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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리티 P 시리즈] '어제'가 '오늘'과 함께 할 '내일'에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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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25, 2016 01:24에 작성됨.

<'어제'가 '오늘'과 함께 할 '내일'에게(2)>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토요일.

 

[월드 시리즈 6차전, 오늘까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등판한 메트로의 선발 윌 존슨이 믿을 수 없는 호투로 브롱스를 꽁꽁 틀어막고 있는 가운데 9회말, 뉴욕 메트로의 마지막 공격입니다. 1아웃에서 주자는 2루. 바뀐 투수 존 캐스터가 메트로의 4번 타자, 마이클 페이지를 상대합니다. 과연 브롱스가 0:0의 균형을 지켜내 승부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인지. 플레이볼 사인이 떨어졌습니다. 초구…….]

 

재생되던 동영상이 멈추었다. 마시던 맥주를 내려놓고, 무슨 일인가 싶어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화면이 전환되며 통화화면이 떠올랐다. 번호 대신 나타난 것은 그의 이름이었다.

“여보세요? 나? 뭐…...TV보고있지. 응. 그래, 월요일 비행기야.”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어쩐지 피곤해 보였다.

“너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그러자 “별 것 아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얘는 항상 이런 식이었지.

“그래, 몸 조심하고. 정 못 견디겠으면 꼭 병원 가고. 알겠지? 그래, 다음에 또 놀러 올게. 응.”

전화가 끊어졌다. 휴대전화의 화면이 바뀌며 일시정지 된 상태로 재생 중이던 동영상이 다시 나타났지만, 재생 버튼을 누르는 대신 어플리케이션을 종료하고 휴대전화의 화면을 껐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가 난간에 몸을 기대었다. 싸늘한 바람이 온 몸을 휘감았다.

이제 곧 그녀가 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찌르르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초인종 소리다.

금세 몸이 식어버렸기에 나는 입고 있던 가운의 옷깃을 여미면서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네, 잠시만요!”

문에 뚫린 구멍을 통해 밖을 살펴보자, 낯익은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잠금장치를 풀고, 체인까지 풀어낸 뒤 나는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했다. 잿빛 재킷 아래로 연보라색 튜닉을 걸치고, 반짝이는 올리브색 머리카락을 어깨 언저리에서 늘어뜨린 그녀는 나보다 머리 반 개 정도 작은, 호리호리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방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딛은 그녀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방 안의 불빛을 받아, 청색과 녹색으로 반짝이는 그녀의 색이 다른 두 눈동자는 강한 경계의 빛을 품고 있었다. 한 걸음 물러서서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기다린 뒤, 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다시 잠근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 구면이죠?”

“네?”

“저번 주 수요일, 번화가에서. 저를 보고 있던 분이 당신 아니었나요?”

“마, 맞아요.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자신에게 해코지라도 한다고 생각한 것인지 그녀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녀린 몸이 더욱 더 가냘프게 보였다.

“아뇨, 그냥 물어본 거예요. 아 참, 제 소개가 늦었죠? 정식으로 소개할게요. 캐서린 오브라이언이에요.”

“저……타카가키 카에데입니다. 초대해주셔서 영광……이에요. 미스 오브라이언.”

“캐서린.”

“……네?”

“캐서린이라고 불러주세요. 캐시라고 부르셔도 된답니다.”

나는 그녀에게 내민 오른손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였다. 나와 내 손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녀는 그제서야 내 생각을 읽은 듯,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손을 뻗어 내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럼, 캐서린, 으로……만나서 반갑습니다, 캐서린 씨.”

가볍게 악수를 나누고, 다시 손을 놓자 그녀는 조심스레 나를 올려다 보았다.

“저기, 무슨 일로 초대해주셨는지…….”

“우선 앉아요. 맥주라도 한 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죠.”

나는 손을 뻗어 창가에 설치된 테이블을 가리켰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테이블로 향하는 사이, 나는 냉장고에서 캔맥주 두 개를 꺼내 그녀의 앞에 하나, 내 앞에 하나를 놓고 의자에 앉았다.

“오늘 당신을 초대한 이유는 이야기를 조금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이야기요……?”

“네. 윌리……아니, P와 함께했던 지난 2년간의 이야기를 말이죠.”

‘윌리’라는 이름에, 카에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는 순간적으로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인터뷰 차 들렀던 그의 회사에서 들은 이미지와는 약간은 괴리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당신, 혹시, 저랑 윌리. 아니, P의 사이를 질투하시나요?”

“……네?”

“혹시나 싶어서 여쭤본거에요. ‘윌리’……아니, P에게서 당신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거든요. 그의 첫 아이돌이라면서요?”

“네. 스카우트를 받아서, 아이돌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스카우트라……후후, ‘윌리’……P가 직접 고른 사람이다, 이거군요.”

입으로는 태연하게 대답을 하고 있었지만, ‘윌리’라는 이름이 나올 때마다 그녀의 눈썹이나 눈꼬리가 꿈틀대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어떻게 한다? 견제구를 던져 볼까? 아니면 직구로 승부할까?

“그래서, 무슨 생각이 들었어요? 수요일에 우리가 있는 모습을 보면서.”

“……모르겠어요.”

“……?”

“질투……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사람과 저는 어디까지나 가장 가까운 동료니까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 날부터 그 사람을 대하기가 힘들어요. 저는 평소처럼 웃고 말하고 싶은데, 그의 얼굴을 보면 이상하게 그게 잘 안 되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것은 뜻밖의 대답이면서, 너무나도 솔직한 대답이었다.

“그 이야기, 저한테 해도 되는 건가요?”

“앗……!”

카에데의 표정이 낭패로 물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너무 많은 것을 말한 모양인지, 그녀는 재빨리 자신의 입을 가렸다.

“후훗, 농담이에요. 그럼, 이쪽도 변명을 해야겠군요.”

“변명……?”

”어찌됐든 당신의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을 한 건 제 쪽이니까요.

나는 맥주캔의 오프너를 잡아 당겼다. 푸식, 하는 소리와 함께, 손아귀에 든 캔의 온도가 한순간에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맥주를 한 모금 삼키는 사이, 그녀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캔을 열고 내용물을 한 모금 마셨다.

“20년.”

내 목소리에 반응하듯,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푸핫, 하고 귀여운 소리를 낸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

“올해로 20년이 되는 해에요. 제가 그를 만난 것이.”

“그, 그런가요…….”

“20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하면서, 저는 그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그토록 즐겁게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적어도 이 나라에 오기 전까지는 말이죠.”

“그, 그렇군요…….”

맥주캔을 만지작거리며 카에데는 약간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두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것은 취기 때문일까?

“오늘 당신을 초청한 이유는, 한 가지, 거래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거래……인가요?”

“네, 거래.”

나는 들고 있던 맥주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통짜 화강암을 깎아 만든 테이블에 알루미늄이 맞부딪히며, 캉,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반응하여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의 20년과 당신의 2년을 맞바꾸죠.”

“……”

망설이는 듯, 그녀는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런 그녀를 유혹하듯, 나는 그녀를 향해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잘 생각해봐요. 절호의 기회라구요? 아무도 모르는, 저만 알고 있는 그의 top secret을 알 수 있는 기회에요? 비싼 걸 요구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저 당신의 기억, 2년간 있었던 일을 말해주기만 하면 That’s OK.”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듣던 그녀는 마침내 생각을 굳힌 듯,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거래를 해요.”

“Good job. 좋아요. 제가 먼저 말을 꺼냈으니, 제가 시작하는 것이 순리겠죠?”

나는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어디……어떤 이야기부터 시작할까…….”

카에데는 가만히 앉아 이야기보따리를 뒤적거리는 나를 기다렸다.

그가 늘어놓던 자랑을 너무 많이 들었던 탓일까? 문득 내 눈에 비치는, 양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곧게 앉은 자세로 나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그녀의 모습은 한순간이지만 반짝이는 드레스를 걸친 우아한 아가씨의 모습처럼 보였다.

‘이것 봐, 네가 너무 자랑을 해 대니까 나도 헛 것이 보이잖아.’

이렇게까지 해 버린다면, 분하지만 이제는 납득할 수 밖에 없다.

내가 알던 나의 우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나는 그의 과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내가 그 아이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9살이던 무렵이었다. 당시 우리 집 옆에는 공터가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거기에 집이 들어서더니, 한 가족이 덜컥 이사를 온 것이었다. 가족이라고는 하지만 구성원은 아버지와 아들 둘 뿐인 가정이었다.

여러모로 독특한 가족이었다. 이사를 오면 보통은 주변 집에 한 번씩 인사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그 가족은 이사를 온 당일을 제외하면 좀처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때마침 학교 또한 방학 중이었기에, 학교에서 그 집의 아들을 보는 것 또한 요원한 일이었다.

 

내가 그 집의 아들. 그러니까 지금의 ‘그’를 본 것은 다음 학기가 시작되던 날이었다. 평소처럼 등교한 그 날, 저학년 교실에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인파를 헤치고 들어가자 교실 한 켠에 앉아 있는 이색적인 외모의 소년이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먹물로 감은 듯한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마치 흑요석처럼 새까만 눈동자를 가지고 있던 그 소년은 좀처럼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동물원에서 신기한 동물을 구경하듯, 아이들 모두가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를 바라보고만 있던 그 와중에, 내 동급생 중 한 명이 그를 향해 다가갔다.

 

“안녕, 네 이름은 뭐야?”

“%!%!#$%#......아, 나, 난, P, P라고 하는데…….”

 

어눌한 영어에 어눌한 발음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사전 준비도 없이 덜컥 이민을 와버린 외국인의 당연한 모습이었겠지만, 어린이들의 단순한 생각이란 때론 그 무엇보다도 가혹해지는 법이다.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우리들은 그의 그러한 모습을 보며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게 말을 건 동급생은 우리들을 돌아보며 그를 손가락질했다.

 

“뭐야 이거, 원숭이같이 생겨가지고, 말도 제대로 못해!”

 

비극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가 영어를 잘 못 한다는 사실은 순식간에 학교 전체로 퍼졌다. 상급생은 물론, 그보다 두 살이나 어린 하급생들도 그를 보면 그가 알아듣기 힘들만한 단어로 그를 놀려대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그는 그 때마다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점점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놀림으로 시작된 것이, 학기가 끝날 무렵에는 훌륭한 집단 괴롭힘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 나이대 애들이 그렇듯, 괴롭힘이라고 해봐야 그가 지나갈 때 이유 없이 발을 걸어 넘어뜨린다던가, 이동수업이 있을 때 엉뚱한 교실을 가르쳐준다던가, 밥을 먹을 때 그에게 반찬을 적게 준다던가 하는 것들 뿐,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장난이었지만, 그래도 우리들은 당황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좋다고 시시덕거렸다. 물론 그 때도 그는 자기와 시선이 마주치거나, 누가 자기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싱글싱글 웃고 다녔다.

 

그렇게 반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자기 이름이나 기본적인 인사 말고는 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던 영어를 어느 정도는 이해하게 되었고, 이제는 간단한 작문 정도는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학년이 바뀌고, 반이 갈라진 다음부터 예전만큼 그를 자주 보는 일은 없었지만, 들리는 이야기만으로도 나는 그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반이 바뀌었음에도 그를 향한 아이들의 괴롭힘은 여전해서, 그가 영어를 알아듣게 되었다는 것을 눈치챈 다음부터는 그를 거의 없는 사람 수준으로 무시하기 시작했다. 첫 단추가 어디에서부터 어긋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영문도 모른 채, 계속해서 피해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그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동네에 놀이터나 공원은 있었지만, 같이 놀 친구가 없다면 혼자서 거기에 가 봤자 할 게 없는 것은 자명한 일. 그런 그가 선택한 자신의 놀잇감은 다름아닌 ‘야구공’이었다.

내가 그와 처음으로 말을 튼 것도, 계기를 따지자면 그 야구공이었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나는 과제가 든 가방을 학교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부모님과 함께 갈까, 라는 생각도 했지만, 그다지 늦은 시간도 아니었고, 그 사실을 깨달은 곳이 집보다는 학교에 더 가까운 위치였기에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텅 빈 학교의 운동장에서 나는 혼자서 놀던 그를 발견했다. 그는 철봉과 철봉 사이를 그물로 엮고, 그 가운데에 자신의 가방을 걸어 놓은 뒤 공을 던져 그것을 맞추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얘! 너 뭐 해?”

“나? 놀고 있는데?”

“그거 재밌어?”

“혼자 앉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그렇구나.”

 

그와 나의 기념비적인 첫 대화였다. 나는 곧장 교실로 돌아가 가방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지만, 그는 내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도, 석양의 붉은 기운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에도 계속해서 운동장에서 공을 던지고 받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 이제 와서 생각난 것이지만, 어린 시절 그에게는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었다. 주말이 지난 월요일이 되면, 꼭 팔이나 다리에 피멍이나 긁힌 상처를 하나 둘씩 달고 오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여긴 선생님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면, 그는 항상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괜찮아요. 그냥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거예요.”

“밤에 화장실 가다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어요.”

“들개한테서 도망치다가 넘어졌어요.”

“야구공을 가지고 놀다가 공에 맞았어요.”

 

평소처럼 웃으면서, 너무도 태연하게 말하는 그의 태도 때문인지, 선생님들은 그런 그의 모습에 대해 더 이상 의문을 갖지 않았다. 그리고……나 역시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일’이 터지기 전에는.

 

그와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눈 그 해의 가을이 되던 날의 일이었다. 집에서 키우던 애완견과 함께 마당에서 공놀이를 하던 나는 실수로 거실의 유리창을 깨뜨리고 말았다. 부모님이 부재중이었기에 당장 혼나는 일은 없었지만, 그때 당시의 나는 부모님의 엄격한 면을 정말 무서워하고 있었다. 어떻게 일을 숨길 수 없을까, 고민을 하던 내 머릿속에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다.

‘옆집 애한테 덮어씌우면 되겠다. 걔 맨날 야구공 갖고 노니까.’

그것은 묘안인 동시에, 결코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적어도 그가 매번 달고 다니던 상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면.

계획이 정해진 이상 행동은 빨랐다. 나는 곧바로 언젠가 야구공을 본 기억이 있던 다락방으로 올라가 때묻은 야구공을 찾아, 깨진 유리창의 파편이 있는 곳에 가만히 올려두었다. 누가 보더라도 야구공이 유리창을 깨고 들어온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유리 파편 위에서 공을 이리저리 굴려 파편을 적당히 묻혀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름대로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한 나는 곧바로 내 방으로 올라가 침대에 누웠다. 강아지와 논 덕분에 피곤했던 것인지, 나는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부모님의 호통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부모님은 잔뜩 화가 난 모습이었다. 잠에서 막 깨어 내려오는 나를 향해 무슨 일이냐고 나를 추궁했지만, 나는 모른다는 말을 반복하며 의혹을 딱 잡아 뗐다. 그러자 부모님의 의심의 화살은 곧바로 주변의 이웃들을 향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유리창을 깨뜨린 것이 다름아닌 야구공이었고, 우리 부모님 또한 옆집의 그 아이가 야구공을 자주 가지고 논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아니라고 잡아떼자, 부모님은 노발대발하여 옆집으로 향했다. 나는 재빨리 내 방으로 올라가, 책을 읽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슬쩍 열어놓은 내 방의 창문 사이로, 부모님의 호통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독서하는 시늉을 그만두고, 고개를 슬쩍 내밀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거, 네가 한 짓이냐?!”

“……저, 그, 그게…….”

 

안 돼……모른다고 해 줘……제발…….

하지만, 그는 내 기대와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제 잘못이에요! 죄송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자신을 노려보는 우리 부모님을 앞에 두고, 그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는 죄송하다며 싹싹 빌기 시작했다. 자기에게 무슨 짓을 해도 좋으니 제발 아버지에게는 말하지 말아 달라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며, 그는 우리 부모님의 앞에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또 빌었다.

그 아이가 그토록 열심히 빌 것이라곤 생각도 못 하셨던 것인지, 결국 부모님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집으로 돌아오셨고, 나는 내 범행이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성하는 모습이 기특해서 그냥 돌아왔지만……그래도 안 되겠어. 야구공을 다루는 데 너무 부주의해. 자식 교육 좀 시키라고 해야겠군.”

 

지나가듯 들려온 아버지의 한 마디가, 모든 것을 시작하는 열쇠가 되었다.

 

한밤중, 화장실에 다녀오느라 잠시 잠에서 깬 나는 어떤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푹, 푹, 하고, 푹신하면서 묵직한 무언가. 이를테면 샌드백 같은 것을 둔기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무슨 소리인가 싶었던 나는 열려 있던 창문 밖으로 살짝 고개를 내밀어,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저지른 짓의 결과물을 내 눈으로 보고야 말았다.

옆집의 뒤뜰에서,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마치 아르마딜로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그 아이를, 야구방망이를 든 성인 남성이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는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달빛에 반짝이는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것을 보면 그 남성이 그 아이의 아버지라는 사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어찌나 진심으로 두들겨 패는지, 퍽, 퍽 하는 소리가 내 방까지 들려올 정도였다.

 

“세, 세상에…….”

 

너무나도 끔찍한 광경이었다. 나는 곧바로 침대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 썼다. 하지만 한번 그 소리의 존재를 인식한 내 귓가로 집요하게 그 소리가 파고들기 시작했다. 몇 분 후, 마침내 그 소리가 멎고,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조심스레 이불을 치우고, 고개를 내밀어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 아이는 웅크린 자세 그대로, 마치 시체처럼 쥐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정말로 죽은 건 아닐까? 라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뒤뜰 한 켠에 마련된 자그마한 천막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 때가 되어서야,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깨달았다. 매주 월요일마다 그의 몸에 생겨나던 상처들이 어째서 생겨난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넘어져서 생긴 게 아니었다.

부딪혀서 생긴 것도 아니었다.

그를 희생시키고 나서야 나는 ‘양심’이라는 것의 정의를 배울 수 있었다.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가,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맞거나 넘어진 것이 아닌 다른 이유로 눈물을 흘렸다.

 

그에게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까? 고민을 하던 나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미안해요’라고는 말하기 부끄러우니, 내가 그의 친구가 되어 주자.

친구 없이 혼자 지내다가 친구가 생기면 그 아이도 분명히 좋아할 테지.

그렇게 제멋대로 결론을 내린 나는, 언제나처럼 석양이 붉게 물든 시간에 학교를 찾아가, 언제나처럼 야구공과 놀고 있던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너, 혼자 노는 거 불쌍하니까 내가 네 친구가 되어 줄게.”

“……고마워.”

 

나는 내심 ‘계획대로’라 외치며 승리 포즈를 취했다.

그래, 어린 시절의 나는 정말로 교활하고, 비겁한 쓰레기였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이 흘러, 그와 나 모두 열한 살이 되었다. 방과 후에 혼자서 공을 던지던 것도, 가끔씩은 나와 함께 캐치볼을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나랑 같이 이야기를 섞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그에 대한 노골적인 따돌림도 많이 줄어들었다. 다른 아이들은 그를 향해 웃어주거나 농담을 건네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너, 공을 무척 잘 던지는구나.”

 

그러던 중, 그에게 일대의 반환점이 찾아왔다. 평소처럼 방과후에 혼자 남아 공을 던지고 놀던 것을, 야구부 코치로 새로 부임하게 된 선생님의 눈에 띄게 된 것이었다.

 

“네 생각만 있다면 야구부에 들어올 생각 없니? 그렇지 않아도 선발투수가 필요하던 참이었는데.”

 

그리고, 그 날을 기점으로 그의 인생은 180도 바뀌었다.

 

“나, 프로 선수가 될 거야.”

 

기본적인 재능에 더해 2년 가까운 시간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공을 던지고 놀았던 탓인지, 전문적인 훈련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그의 역량은 압도적이었다. 코치에게서 배운 것은 공을 잡는 그립 뿐. 얼마나 압도적인 실력이었는지, 처음으로 출전한 학교 대항전에서 가볍게 무실점 승리, 이후 이어지는 주(州)내 대회에서는 양손잡이라는 재능을 살려, 2인분의 역할을 소화해내면서 가뿐하게 학교에 첫 번째 우승 트로피를 안겨 주었다. 변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집을 나와 야구부의 기숙사에 살기 시작하면서 아버지의 폭력에서 드디어 해방될 수 있었고, 팀의 에이스이자 학교의 간판이 되면서 그를 무시하던 또래들 사이에서도 그의 입지는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 신입생조차 무시하던 학교의 이방인에서 이제는 그 누구라도 친해지고 싶어하는 학교의 스타가 된 것이었다.

그야말로 최고의 반환점을 맞이하는 그의 곁에서, 나는 그런 그의 ‘유일한, 그리고 최고의 친구’로써 그의 후광을 듬뿍 누리고 있었다.

 

이듬해, 13살이 되던 그 날, 그의 아버지가 죽었다.

기차 사고로 인한 사고사였다. 그렇게 자신을 학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은 가족이었던 것일까? 가을치고는 유난히 추웠던 그 날, 억수처럼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그는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비석 앞에 하루 종일 멀뚱히 서 있었다. 우산에 가리워진 그의 표정이 어땠을지, 유감스럽게도 나는 알 수 없었다.

친척도 없고, 지인조차 없었기에, 천애고아가 된 그는 보호시설을 전전하다가 결국 자신의 집으로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어느 보호시설에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혼자가 된 그는, 그날부터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웃음을 짓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심지어 화내거나 우는 일도 없었다. 가슴 속 깊숙한 곳에 자신을 감추고, 꽁꽁 걸어 잠가버렸다. 그렇게 1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그는 완전한 고독에 몸을 담그기 시작했다. 학기 도중이나 대회가 있을 때는 야구부의 기숙사에서 동료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었지만, 방학이 되거나 대회가 끝나면, 그는 그 넓은 집에서 홀로 시간을 보냈다. 그의 곁에 있는 것은 단 두 가지. 집 안에 잔뜩 쌓여 있는 수많은 책들과, 나 뿐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로 진학한 이후에도 그는 마운드 위에서만큼은 모든 언론의 주목을 받는 특급 에이스였고, 최고의 신인이었으며, 모든 프로 구단에서 계약서에 도장을 못 찍어 안달이 날 정도의 인물이었다. 처음으로 국기를 달고 출전한 세계 대회에서도 압도적인 성적을 찍어내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어냈고, 개교 이래 단 한 번도 결승전 근처에도 가지 못한 고등학교에도 우승 트로피를 세 번이나 안겨 주었다. 그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시기에는, 이미 그의 계약금을 두고 내로라하는 구단에서 그를 사기 위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들려올 정도였다.

 

누가 감히 저 아이를 고아라고 볼 수 있을까?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그의 모습은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서서히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가던 나의 우상이 되었다. 나에게 비치는 그의 모습은, 모진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드넓은 하늘을 향해 날갯짓을 하는 미운 오리 새끼, 백조처럼 보였다. 아니, 실제로도 그는, 나 같은 뱁새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근사한 황새였다.

 

프로 무대에 올라가자, 나의 우상은 더욱 크게, 그리고 높이 날갯짓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불쌍한 사람들은 첫 해,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탓에 잠시 주춤하는 그를 향해 거품이니 뭐니 욕을 해댔고, 두 번째 해에는 올해만 반짝할 신인이라고 혹평을 했다.

그러나 세 번째 해부터,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바꾸었다. 그 해의 그는 미국에서 가장 약하다고 할 수 있는 자신의 팀을 종착역인 월드 시리즈까지 끌어올렸고, 팀에게 창단 첫 번째 우승 트로피를 안겨주었다. 네 번째 해, 다섯 번째 해도 마찬가지였다. 프로가 받을 수 있는 모든 스포트라이트와 영광은 그에게로 집중되었고, 그는 묵묵히 감사를 표하며 그것을 받아들였다.

인간을 벗어난 듯한 압도적인 모습과,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그의 성격, 그리고 승자 인터뷰에서도 극히 말을 아끼는 모습이 어우러져, 그를 수식하는 별명에는 어느샌가 ‘신God’이라는 단어가 붙기 시작했고, 아무도 그것에 의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 절대자를, 신을 끌어내린 것은 그가 자신의 수족처럼 다루던 자그마한 공 하나였다.

 

 


 

 

 

“그 사고……군요.”

“……7차전을 앞두고 그가 웬일로 저에게 전화를 걸더군요. 느낌이 안 좋다며, 내일 아프다고 할까, 아니면 가만히 있을까를 물어봤어요.”

“……직감한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걸지도.”

“그래서, 뭐라고 대답하셨나요?”

“무책임한 대답을 했죠.”

나는 이미 김이 빠질 대로 빠진 맥주를 삼켰다. 김 빠진 맥주에서는 쓴맛만이 끈적하게 묻어 나오고 있었다.

“’너를 믿는다’고.”

“…….”

”저는, 그를 사지로 밀어 넣었어요. 그리고 그 다음 날, ‘신’이 죽었고요.”

그 때를 떠올리자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를 바라보던 카에데의 눈빛이 측은한 빛을 띠었다.

“……따지고 보면 제 탓이죠. 뭔가 느낌이 안 좋았어요. 안 좋았는데, 그 때의 저는 그걸 눈치챌 정신도 없었죠. 다음 날 저녁에, 평소처럼 이기고 있겠거니, 하면서 TV를 켰는데, 그가 쓰러져 있더군요. 피를 철철 흘리면서, 구급차에 실려 나가고 있었어요. 마운드의 신이, 마운드 위에서 죽은 거에요.”

“…….”

“……그가 다시 눈을 뜨는 데는 반년이 필요했어요. 그 사이……아니, 이 이야기는 필요 없겠죠.”

나는 크게 숨을 토해냈다. 가슴 속에 쌓여 있던 오래 된 먼지가 날숨에 섞여 나온 듯 했다. 목을 축이려고 캔을 집어 들었지만, 이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예요. 할리우드에서의 이야기는, 아마도 지금 그의 삶과 큰 차이는 없을거에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맥주 몇 개를 더 꺼내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그 중 하나를 잡아, 오프너를 열고, 조금 전의 쓰디쓴 액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시원함을 품은 것을 목으로 넘겼다.

“자, 그럼 이제 들려주시죠. 당신과 그의 이야기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를 고쳐 앉아, 이번에는 자신의 이야기보따리를 펼치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달이 휘영청 떠오른 밤 늦은 시각. 이제는 텅 비어있다시피 한 CG프로덕션의 남자 기숙사 주차장에서는 주기적으로 펑, 펑 하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보면, 그 소리의 근원지가 나타났다. 그것은 다름아닌 주차장 한 켠에 설치된, 체육시설이 모여 있는 공터였다.

 

공터에는 트레이닝 복 차림의 P가 서 있었다. 그의 등 뒤에는 사람 하나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플라스틱 통이 든 수레가 세워져 있었는데 달빛에 슬쩍 비치는 통 안에는 몇 번이나 쓴 듯 한 낡은 야구공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하아! 후우!”

 

통 안에서 공 하나를 꺼내 든 P는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이제는 그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철봉 사이에 걸려 있는 녹색 그물의 정 중앙에 고정된 방석을 쏘아보았다. 무언가에 심하게 얻어맞은 듯, 너덜너덜해진 방석의 아래쪽에는 마찬가지로 야구공이 무더기처럼 쌓여 있는 플라스틱 양동이가 있었다.

 

“흐읍!”

 

쏜살같이 날아온 야구공이 퍽! 하는 소리를 내며 방석의 정 중앙에 틀어박혔다. 운동 에너지를 잃은 야구공은 그 아래에 설치된 양동이로 떨어졌지만, 그 충격을 미처 흡수하지 못한 방석의 한쪽 모퉁이에서는 찌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서늘한 가을 밤에 어울리지 않게 비오듯 땀을 흘리며, 거친 숨을 몰아 쉬는 P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자신의 뒤에 있는 통으로 손을 가져갔다. 공을 찾듯 통 안을 뒤적거려 보았지만 손 끝에 걸리는 것은 서늘한 공기뿐이었다. 통 안을 들여다 본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왼손에 끼고 있던 글러브를 벗었다.

 

“……세 번째인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그는 텅 빈 통을 들고 터덜터덜 걸어가 그물망 아래에 놓인 양동이와 자리를 바꾸었다. 비록 그의 기준에서 하나하나는 그다지 무게가 나가지 않는 야구공이지만 역시나 200여개가 쌓이면 상당히 묵직해지는 법이다. 다리가 풀린 것인지, 좀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면서 그것을 수레에 올려놓은 뒤, P는 자신이 벗어놓은 글러브를 오른손에 끼웠다.

후우우, 하고 깊은 숨을 내쉬자, 그것은 곧 새하얀 입김이 되어 컴컴한 하늘로 흩어졌다. 옆으로 손을 뻗어, 야구공 하나를 움켜쥐며 그는 또다시 깊은 숨을 내쉬었다.

P는 자신의 손에 딱 들어오는 가죽 재질의 자그마한 구체를 바라보았다.

바라보며, 그는 생각했다. 변명했다.

 

“친구라구요? 그럼, 어째서 그런 행복한 표정을 짓는 건가요?”

 

행복하다? 그럴 리가. 그저 즐거웠을 뿐이었겠지. 20년간 사귄 오랜 친구를 2년만에 만난 것인데, 반갑지 않을 리가 없다. 비록 그것이 가짜 인연이라고는 하지만, 그녀는 혼자였던 그의 삶에서 만난 유일한 친구였고, 그를 그로써 붙잡아준 기둥이었다.

 

“P씨는, 저에게 있어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어요. 처음으로 만난 파트너였어요. 처음으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한 상대였어요……당신에게 저는 어떤 존재였죠? 그냥 아이돌이었나요? 판매용 상품이었나요?”

 

그 말을 하면서 그녀는 그를 밀쳐냈다. 그를 거부했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그녀는 자신을 향해 훤히 드러난 그의 심장에 비수를 꽂아 넣었다. 배신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고작 그까짓 것으로 그녀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굳게 다문 그의 입에서 까드득, 하는 억센 소리가 났다. 아직 호흡이 채 가라앉지 않았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또다시 손을 뻗어 야구공을 쥐었다. 어깨건 팔이건 지칠 대로 지쳐 이제는 쥐가 날 정도였지만, 그래도 그는 공을 집어 들고 자세를 잡았다.

 

“므아악!”

 

비명에 가까운 기합을 지르며, 땅을 박차고 왼손을 앞으로 휘둘렀다. 여기까지는 평소대로였지만, 이 직후 문제가 발생했다. 다른 곳처럼 마찬가지로 지칠 대로 지쳐 있던 허리와 무릎에서 힘이 빠져 버린 것이었다.

일순간 자세가 무너진 그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공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몇 번인가 일어나기 위해 몸을 들썩거리던 그는 자기 몸이 더 이상 말을 듣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체념한 듯 바닥에 등을 대고 드러누웠다.

데굴데굴, 그의 왼손에서 굴러 나오는 야구공에는 피에 젖은 지문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손톱이 깨진 모양이었다. 왼손 검지와 중지의 말단에서 한 발 늦게 통증이 찌릿찌릿 올라왔다. 하지만, 그보다도 그를 아프게 하는 것은 아까 전부터 계속해서, 자동 반복이라도 시킨 듯 반복해서 떠오르는 그녀의 말이었다.

 

“제가, 그녀보다도 못한 사람인가요? 그런거에요?”

“……아닙니다.”

 

머리속에 떠오른 그녀에게 그 때는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그러나 듣는 이 하나 없이 그 목소리는 허공으로 산산이 흩어졌다.

 

“……최악이야.”

 

헤어지기 직전, 그녀의 마지막 한 마디그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피가 철철 흘러 나오는 왼손의 상처보다도 가슴을 찌르는 그녀의 얼굴이, 그녀의 말이 지금의 그에게는 더욱 더 고통스러운 상처였다. 이렇게 될 것이었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가면을 쓰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뱃속의 내장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있던 그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근처의 수풀로 뛰어갔다.

 

"콜록! 쿨럭!"

 

마른 기침으로 시작하던 기침소리가, 기침을 반복할수록 점차 축축해지고,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수풀 속에서 한동안 기침과 구토를 반복하며, 그는 자신의 속에 있던 것을 모두 토해냈다. 먹은 것이 없었기에 든 것도 없었지만, 아무튼 토해냈다.

수 분간의 구토가 멎고, 그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드러누웠다. 안경을 벗어 옆으로 내려놓고, 그는 글러브를 낀 오른팔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덮었다. 입술을 깨물고, 가슴을 위아래로 들썩이며 가쁜 숨을 내쉬는 그의 호흡은 좀처럼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그것은 비단 ‘숨이 차기 때문에’라는 이유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될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마음을 여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 게 좋았던 걸일지도 모른다.

 

 


 

 

 

밤이 점점 깊어가고 있었지만, 적당히 취기가 오른 캐서린과 카에데의 대화의 열기는 좀처럼 식을 줄을 몰랐다.

 

“P는 자기가 운전 안 하는 거면 출발하기만 해도 금세 잠들어버려요. 다른 곳에선 안 그러는데 꼭 교통수단만 타면 그렇게 된다니까요?”

“정말이요?”

“그럼요. 어찌나 잘 자는지, 자기가 탄 게 멈추기 전에는 흔들어 깨워도 안 일어나요. 못 믿겠으면 다음에 한번 시험해봐요.”

 

그 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캐서린의 휴대전화에서 자정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Oh, 시간이 벌써 이렇게……아무래도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미안해요. 저는 내일도 스케줄이 있거든요.”

“아뇨, 미안해하실 것 없어요. 오히려 귀한 시간 내 주신 건데 제가 감사해야죠.”

“아, 잠시만요.”

 

자신의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서는 카에데를 캐서린이 멈춰 세웠다. 객실 전화기를 들어 프론트를 호출한 그녀는 영어로 무언가를 말하고는 전화기를 다시 내려놓았다.

 

“택시 불렀으니까 타고 가요. 로비까지 배웅해 드릴게요.”

“가, 감사합니다…….”

 

금방 헤어지기는 아쉬웠던 모양인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나온 두 사람은 택시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널따란 호텔의 로비를 빙빙 돌면서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프론트의 직원으로부터 택시가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두 사람은 마침내 호텔의 정문 앞에 멈춰 섰다. 카에데는 렌즈에 색이 들어간 안경과 모자를, 캐서린은 선글라스와 다갈색 가발을 쓰고 있었기에 주위 사람들이 그들을 알아보는 일은 없었다.

 

“휴우, 실컷 이야기했네요. 이렇게 마음 놓고 말해본 건 얼마만인지.”

“이야기 즐거웠습니다.”

“Me too.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시 만났으면 좋겠네요.”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려는 카에데를 제지하며 캐서린은 그녀의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 행동의 의미를 눈치 챈 그녀는 싱긋 웃으며 자신의 오른손으로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맞잡은 손에 가볍게 힘을 주고, 두 사람의 손이 떨어지려는 순간, 캐서린은 무언가 떠오른 듯, 엄지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아참, 이거 이야기하는 걸 까먹었는데, 만약에 말이죠, 정말로 만약에 그 사람한테 관심이 있으면 말이에요?”

“네?”

 

캐서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카에데에게 한 걸음을 더 다가가, 카에데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간수 제대로 하셔야 할 거에요. 그는 우리 같은 나이대 여자들한테 인기 엄청나니까.”

“…...네? 그게 무슨…….”

“뭐에요. 관심 없어요? 그럼 뭐, 가만히 놔두시던가. 그러면 알아서 누가 낚아채가겠네.”

“아, 아니, 그, 그, 그런 건 아니고요……!”

“농담이에요, 농담. 말이 그렇다는 얘기죠. 여자를 밝히는 사람도 아니고.”

 

홍당무처럼 얼굴을 빨갛게 붉히는 카에데에게서 한 걸음 떨어진 캐서린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제 정말로 헤어질 시간이에요. 로비 앞에 택시 불러놨으니까 타고 가세요.”

“네? 아아, 네……가, 감사합니다. 아, 저기, 캐서린!”

“네?”

“조금 전의 이야기, 캐서린은…….?”

 

카에데의 질문에, 캐서린은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어쩐지 서글퍼 보이는 미소였다.

조금 전 인사를 대신하는 악수를 나누었음에도 카에데는 자신도 모르게 꾸벅, 인사를 건넨 뒤 호텔을 벗어났다.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주던 캐서린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잘 가요, 신데렐라.”

 

그녀의 모습이 택시 속으로 사라지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는 캐서린의 뒷모습에는 부러움과 씁쓸함을 포함한 여러 가지 감정이 녹아 들어가 있었다.

 

 

 


 

 

 

"웃으렴. 웃는 사람에게는 항상 좋은 일만 생긴단다."

어머니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항상 웃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나를 버렸다. 항상 웃기만 하는 바보같은 자식이라고. 욕하고 손가락질하며.

유일한 나의 혈육이자 유일한 나의 가족인 아버지에게, 나를 떠넘겼다.

 

 

월요일 아침, 휴대전화의 모닝콜 소리에 어우러져 느껴지는, 익숙하면서도 그 이상으로 불쾌한 감촉에 프로듀서는 눈을 떴다. 분명히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맑았던 하늘이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동이 트는 것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구름이 끼어 있었다.

 

“비……가 오려나…….”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는 베개에서 머리가 떨어지는 순간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관자놀이를 드릴로 후벼 파는 것처럼 머리가 아팠다. 눈을 질끈 감은 채, 몇 번이나 심호흡을 반복하고서야 그는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아물었다고 생각한 흉터가 기분 탓인지 약간 부어 오른 것처럼 느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지긋이 누르면서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냉장고로 다가가, 그 안에서 우유와 곡물가루를 꺼냈다.

 

“……먹을까……?”

 

음식물을 입에 대지 못한 것이 이미 4일째. 첫째 날에는 뭔가를 먹으려 하면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으로 시작한 것이 이제는 음식. 아니, 스태미나 드링크나 에너지 드링크의 냄새만 맡아도 속이 메슥거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칼로리 메이트로 영양분을 보충하려고 해 봤지만 그마저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냄새가 없는 칼로리 메이트는 삼키는 것까지는 괜찮았지만 그 이후에는 삼킨 걸 그대로 토해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식도가 헐어버릴 정도로 구토를 하기 일쑤였다.

 

“휴우……내 주제에 먹긴 뭘 먹어.”

 

눈치도 없이 꼬르륵, 하는 소리를 내며 배고프다는 어필을 하는 자신의 배를 두드리면서 한동안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을 바라보던 그는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먹고 어쩌고를 떠나서, 도저히 먹고 싶다는 식욕이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는 고프지만, 먹고 싶지는 않았다. 몸은 살고자 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살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출근 준비나 하자…….”

 

곡물가루와 우유를 다시 냉장고에 되돌리고 비틀비틀 욕실로 향하면서 그는 걸치고 있던 잠옷을 벗어 던졌다. 욕실로 들어가기 직전, 얼핏 드러난 그의 어깨에는 검붉은 꽃이 피어 있었다.

 

 

 

“안녕하세……앗?!”

 

평소처럼 회사로 출근한 치히로는 사무실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화들짝 놀라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웬 거한이 소파 위에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센카와 씨군요……안녕하세요.”

“프, 프로듀서 씨……? 안색이 왜 그러세요?!”

 

그녀의 눈에 비친, 소파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는 프로듀서의 안색은 금요일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져 있었다. 마치 며칠이나 굶은 사람처럼 눈이 퀭하게 들어가 있었고, 화장으로 덮었음에도 불구하고 차마 가려지지 않은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아아……주말간에 몸이 조금 안 좋아서요. 지금은 머리도 아프고……힘드네요, 이거.”

“마, 많이 아프세요? 어쩌지……의무실은 9시부터 여는데…….”

“괜찮아요……이 정도 쯤이야, 조금 누워 있으면 금방 낫습니다……약이 듣는 것도, 아니고요…….”

 

벽에 걸려 있는 시계는 오전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프로듀서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저, 잠깐 휴게실 좀 쓸게요. 사람들 오면 30분에 미팅 있으니까 적당히 붙잡아주세요. 미팅 시간 까지는 돌아오겠습니다.”

“네? 아, 네…….”

 

치히로는 비틀거리며 사무실을 나서는 프로듀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사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 미즈키와 마유, 후미카가 모습을 나타냈다.

 

“좋은 아치……임? 엥, 뭐야? 치히로밖에 없어? P군은?”

“두통이 심하다고 하셔서 지금 휴게실에 계세요.”

“두통? 별일이네…….”

“그러게요. 아, 거기 두 사람?”

 

치히로의 목소리에 슬쩍 사무실을 나가려던 후미카와 마유의 움직임이 딱 멈추었다.

 

“프로듀서 씨가 얌전히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랬어.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치히로의 말에 마유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후미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터덜터덜 소파로 향했다. 또다시 10분 정도 지난 뒤, 이번에는 트라이어드 프리무스와 함께 카에데가 사무실에 모습을 나타냈다.

“안녕하세요!”라며 저마다 활기차게 인사를 건네는 트라이어드 프리무스의 세 사람과 달리, 카에데는 무척이나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휴우…….”

“카에데 씨, 드링크 드실래요?”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는 카에데에게 치히로는 스태미나 드링크를 내밀었다.

 

“아,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왠지 안색이 피곤해 보이시네요. 주말 동안에 무슨 일 있었어요?”

“조금 생각할 일이 있어서요……그보다 프로듀서는요?”

“프로듀서 씨라면 지금 휴게실에서 쉬고 있어요. 오늘따라 두통이 심하다고 하셔서요.”

“그런가요…….”

“미팅 시간에는 맞춰서 오신다고, 여러분들 오면 여기에 잘 묶어두라고 하셨고요.”

 

그 때,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있던 미즈키가 불쑥 끼어들었다.

 

“호오? 두 사람 화해한거야? 금요일만 해도 찬바람 씽씽 불더니.”

“아, 아니에요. 애초에 싸운 적도 없었고…….”

“헤에, 그래?”

 

치히로가 미팅에 사용할 자료들의 정리를 마치고 업무 시작을 준비할 무렵, 사무실의 시계가 8시 30분을 가리켰다. '혹시 자고 있으면 어쩌나, 전화라도 걸어야 하나', 라고 치히로가 생각하던 그 순간, 사무실의 문을 조용히 열면서 프로듀서가 모습을 나타냈다. 확실히 쉬었던 것이 효과가 있던 것인지, 조금 전에 비하면 확연히 낯빛이 편안해진 모습이었다.

 

“여러분,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세요!””

“5분 뒤에 미팅 시작할 테니까 회의실 가서 기다려주세요.”

““네!””

 

사무실에 모여 있던 일행이 우르르, 일제히 회의실로 나간 틈을 타 프로듀서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낯빛이 괜찮아 보이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 나름대로의 연기였던 모양이었다.

 

“저, 정말로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센카와 씨, 자료 혹시 챙겨 두셨나요?”

“네, 여기 있어요.”

“……감사합니다. 폐를 끼쳤네요.”

“폐라뇨. 저는 사무원인걸요. 이게 제가 할 일이잖아요?”

“하하, 그랬죠……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네, 다녀오세요!”

 

치히로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무거운 발걸음으로 사무실을 나서는 프로듀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괜찮으신걸까…….’

 


  

“……군?”

“프로……서!”

“프로듀서!”

“네, 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결재판을 품에 안고 있는 치히로와, 그녀의 옆에 서 있던 미즈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P군, 괜찮아?”

“아아,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죠?”

 

프로듀서는 곧바로 태연한 척 안경을 고쳐 쓰며 비뚤어진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직원회의 가실 시간이에요.”

“직원……? 아아, 오늘 월요일이었죠. 감사합니다. 전혀 생각을 못 했네요.”

 

스케줄 보드와 시계를 한 번씩 바라본 그는 자책하듯 자신의 뺨을 수첩으로 몇 번 찰싹 두드렸다. 시계는 이미 오후 2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직원회의가 2시 40분이었으니, 조금만 더 늦었다면 큰일이 날 뻔 했다.

 

“다른 아이들 올라오면 이 이후에는 자유시간이니 알아서 하라고 해 주세요. 물론 카와시마 씨도 자유입니다.”

“진짜? 앗싸! 집에 가도 돼?”

“아뇨, 그건 안 되죠.”

“쳇……그럼 자유시간 하는 의미가 없잖아.”

“자기계발 하세요, 자기계발. 라이브 이제 며칠 남았는지 아시죠?”

“우우……프로듀서가 너무해.”

“……아무튼, 저 회의 다녀오겠습니다.”

“네, 다녀오세요…….”

 

낮은 신음소리를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프로듀서는 치히로에게서 결재판을 건네받고는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사무실을 나섰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미즈키와 치히로는 스르륵 닫히는 사무실의 문에서 시선을 돌려 서로를 바라보았다.

 

“많이 안 좋아 보이네. 사람이 완전히 망가졌어.”

“그러게요……대회 준비하실 때도 저렇게 심각하진 않았는데.”

“약은 줘 봤어?”

“안 드셔요. 약 먹는다고 낫는 게 아니라고 하시면서.”

“그러고보면 오늘 점심도 안 먹었지? 점심시간엔 휴게실에 계속 누워만 있었고……큰일이네. 지금이 정말 중요할 때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사람이.”

“그러게요……”

 

치히로와 미즈키는 스케줄 보드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는 달력에만 적혀 있던 "11월 합동 라이브"라는 항목이, 어느 새 스케줄보드의 끝자락에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오후 3시 30분. 생각보다 일찍 끝난 직원회의를 마치고, 프로듀서는 곧바로 지하 연습장에 위치한 트레이닝 파트의 회의실로 이동해 트레이너 네 사람과 함께 차후 일정에 대한 미팅을 진행했다. 당장 2주 뒤부터 연습생들이 대거 합류하게 되는 만큼, 효율적인 인원 배분과 협업관계에 있는 양성소에서 인력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화이트보드에 판서를 하며 브리핑을 진행하던 프로듀서는 갑자기 밀려오는 현기증에 휘청거리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 트레이너들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 머리를 부여잡는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그의 손에서 툭, 하고 그가 들고 있던 보드마커카 바닥으로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금방, 다시 시작할게요.”

 

프로듀서는 보드마커를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두통이 봇물처럼 한 번에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제자리에 쪼그려 앉은 채, 무거운 신음을 흘리던 그는 이를 악물어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억눌렀다.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던 마스터 트레이너, 아오키 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그에게 다가갔다.

 

“P씨, 괜찮아? 아까 직원회의부터 계속 상태 안 좋아 보이던데, P씨만 괜찮다면 내일 해도 상관 없어.”

“……아뇨, 괜찮습니다. 문제 없어요. 계속하겠…….”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일어서려던 프로듀서의 코에서 검붉은 핏줄기가 주르륵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어떻게 반응할 새도 없이, 곧바로 그의 커다란 몸이 마치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회의실의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 '어제'가 '오늘'과 함께 할 '내일'에게 (4-完)> 으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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