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반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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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프로듀서
【※주의※】
를 먼저 읽지 않으면 내용 이해에 지장이 있습니다.
시점은 하지메편 이후 6주 정도 지난 뒤입니다.
따라서, 작중에서 호죠 카렌의 나이는 만 18세가 되기 직전.
_____
"다녀왔습니다~ 아아... 덥다!"
"오~ 어서 와!"
"더운데 수고하셨어요. 보리차 가져올게~"
사무소에서 한가하게 나오와 잡담을 하고 있는데 땀투성이의 프로듀서가 들어왔다.
아무리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려도, 8월 한중간의 무더위는 견디기 힘들겠지.
냉장고에서 차게 식힌 컵을 꺼내 보리차를 붓고 얼음을 띄운다.
"여기 보리차."
"땡큐... 아... 살 것 같다"
프로듀서가 보리차를 단숨에 들이키고 한숨을 크게 내쉰다.
"P 씨. 아저씨 같아..."
"아직은 오빠다."
아이돌의 컨디션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절약의 일환인지 모르겠지만 사무소의 에어콘 온도는 상당히 높게 설정되어 있다.
전기를 아껴야 한다고 웃으며 말하던 치히로 씨가 떠오른다.
역시 전기료 때문인가...
"좀 쉬어야지..."
"아, P 씨. 미안한데 잠깐 여기에 정좌해 줘."
"어... 뭐?"
반사적으로 대답한 P 씨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미안. 잘 못들어서... 그래서 뭘 해달라고?"
"응? 잘 못들었어?"
P 씨를 위해 바닥을 가리키며 다시 한 번 또박또박 말해준다.
"P 씨. 여기에 정좌."
"그... 카렌."
"정좌."
"아. 네."
P 씨가 주뼛주뼛 바닥에 앉는다.
"아, 미안. 정장이 더러워지면 안되니까 쇼파에 앉아."
"...여기 앉으면 되는 거지?"
P 씨가 구두를 벗고 소파 위에 정좌 한다.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P 씨의 모습이 우스운지, 나오가 읽고 있던 책으로 얼굴을 가리고 억지로 웃음을 참는다.
"P 씨. 내가 왜 불렀는지 알아?"
"...미안. 전혀 짐작가는 게 없는데. 요즘 스케줄이 너무 빡빡했나?"
"아니. 내 스케즐은 아무런 문제도 없어."
불안한 표정으로 내 눈치를 보는 P 씨가 귀여워서 무심코 웃음이 나온다.
"오히려 내가 지치지 않도록 쉬는 날을 조절해주고 있잖아. 고마워, P 씨."
"으, 으응... 근데 그거 이외에는 정말 생각나는 게 아무 것도 없어."
"나는 그렇다치고, P 씨. 요즘 제대로 쉬고 있어?"
그렇게 묻자 P 씨가 안심 했다는 듯이 한숨을 내쉰다.
"확실히 요즘 바쁘긴 하지만 쉴 때에는 제대로 쉬고 있으니까 걱정 할 필요 없어."
"그치? 아이돌에게 본보기가 되도록 컨디션 관리를 하는 것도 프로듀서의 일 중 하나니까. 역시P 씨야."
"대놓고 칭찬 받으니까 조금 부끄럽네."
"응. 칭찬만 할 거면 무릎을 꿇으라고 하진 않아."
샐쭉하게 웃는 나와, 긴장한 표정을 짓는 P 씨, 그리고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고 웃음을 참는 나오.
오늘도 CG프로덕션은 평화롭습니다.
"그럼 두 번째 문제. 여기 이 책자는 뭘까요?"
P 씨의 눈 앞에 들이대고 스테이플러로 철한 종이뭉치를 흔든다.
어라라~ P 씨가 내 시선을 피하고 있네~
"근태표... 입니다."
"정답. 10 포인트 올려줄게. 이 근태표라는 건 출석부랑 비슷한 거잖아? 치히로 씨한테 부탁하니까 보여주셨어."
말하면서 페이지를 몇 장 넘겨 근무기록이 적혀 있는 부분을 펼친다.
"그래서 이 표에는, 마지막 휴일은 지지난주 일요일, 근 일주일 동안 열 시간 가량 추가 근무를 했다고 적혀 있는데."
"그게... 직업이 직업이다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어. 알잖아?"
"알고는 있어. 우리들도 어쩔 수 없이 무리한 스케줄을 소화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니까."
"게다가 바로 어제까지 투어 라이브가 있었잖아. 바쁜 것도 어쩔 수 없어."
"응... 그렇네. 난 그냥 P 씨가 쓰러지지나 않을까 걱정된 것 뿐이야."
"카렌..."
"대신 앞으로는 바쁘다는 핑계로 일만 하지 말고, 제대로 쉬기."
"아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앞으로는 조심할게."
그렇게 말하며 소파에서 일어나려는 P 씨의 어깨를 양손으로 누른다.
뭐하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P 씨와 눈을 맞추고 씨익 웃는다.
"나도 사실은 이 정도까지만 하려고 했어? P씨, 정좌."
P 씨가 양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리고, 펭귄마냥 여기저기 시선을 돌린다.
그 상태 그대로 2분 정도 기다린 다음 말을 꺼냈다.
"그럼 세 번째 질문! 이건 뭘까요오?"
아까와 다른 종이 뭉치를 꺼내 P 씨의 눈 앞에서 흔든다.
어라? P 씨, 왜 그렇게 땀이 많이 나?
치히로 씨한테 혼나더라도 에어컨 온도를 좀 낮추는게 나으려나?
"..."
"땡! 시간 다 됐어. 뭐어 당연히 대답 못하겠지. 정답은 근태표야."
웃음을 띈 채로 페이지를 넘겨 작은 글씨로 빼곡히 채워진 근무기록표를 찾는다.
"이런 거 원래는 보여주면 안되는 거래. 하지만 치히로 씨한테 정중하게 ‘부탁’ 하니까 보여주셨어."
"부...부탁?"
"응. 비상시에 유용한 마법의 주문이라고 카에데 씨가 알려주셨거든. 『근로기준법』 이라고."
"아...하하..."
"처음으로 써봤는데 효과가 직빵이던데? 나, 신데렐라보다 마법사가 어울리는지도 몰라."
P 씨가 목이 마른 모양이다.
땀을 그렇게 흘렸으니 수분이 부족할만도 하지.
"그래서, 이 표에는 P 씨의 마지막 휴일은 지난 달 초, 근 2주간 합계 60시간 이상의 추가근무를 했다고 적혀 있네."
"..."
"신기하지? 남아있으면 안 되는 기록이 왜 여기에 적혀 있을까."
나오가 어느샌가 나가서, 지금 사무소에는 나와 P 씨와 치히로 씨밖에 없다.
치히로 씨는 숨을 죽이고 자기 책상 위에 있는 모니터만 노려보고 있다.
"그럼 이제 마지막 질문. 저번에 내가 P 씨한테 바다에 같이 가자고 한적이 있지?"
"네..."
"그 때 P 씨가 뭐라고 하면서 거절했더라? 저기, P 씨. 기억하고 있어?"
"...『한여름에 바다에서 놀다가 몸 상태가 안 좋아지면 큰일이다. 카렌은 소중한 내 아이돌이니까.』"
"띵동! 정답입니다! 그럼 P 씨가 이제 해야 할 말도 알고 있겠네?"
"카렌 씨, 정말 죄송합니다. 면목 없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잘 알고 있어서 다행이야. 저기... 치히로 씨?"
"네, 녜엣!"
의자가 큰 소리를 내며 흔들릴 정도로 힘차게 일어난 치히로 씨가 큰 목소리로 대답한다.
너무 심하게 ‘부탁’ 했나.
그렇게까지 정자세로 서 있을 필요는 없는데.
"그런 고로, 내일 하루 P 씨는 쉬는 날이네."
"아니... 그... 내일은 린의 촬영이... 있는데..."
"그러니까 그것까지 치히로 씨가 알아서 처리해 주실거야. 그쵸, 치히로 씨?"
P 씨가 반항하지 못하도록 말을 끊었다.
"네. 프로듀서는 내일 하루 느긋하게 쉬고 오세요."
"넷? 자...잠깐. 치히로 씨?"
P 씨가 치히로 씨의 어깨를 붙잡고 흔든다.
치히로 씨는 필사적으로 P 씨를 무시하며 휘파람을 분다.
응. 전부 잘 해결된 것 같네.
"P 씨. 이제 슬슬 5시야. 구두 꺼내놨으니까."
"잠깐. 오늘 처리해야 할 서류가..."
"됐으니까 오늘은 그만 퇴근! 내일도 절대 사무소에 오지 마. 알았어?"
"알았다. 알았어. 그러니까 잠깐... 좀 밀지 마."
P 씨의 등을 떠밀어서 사무소 밖으로 쫓아낸다.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니, 치히로 씨가 또 깜짝 놀란다.
"저도 나가볼게요. 고마워요, 치히로 씨."
"아..아하핫. 천만의 말씀..."
서로 웃으며 인사하고, 나도 사무소를 나선다.
응. 역시 CG프로덕션은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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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워..."
아직 11시밖에 안됐는데 태양이 살갗을 태워버릴 것처럼 뜨겁다.
햇빛을 막으려고 쓴 모자도, 그 자체가 뜨거워져서 별로 도움이 안 된다.
한숨을 쉬며 걷다 보니 드디어 목적지인 맨션에 도착했다.
메모를 꺼내 정확한 호실을 확인하고 벨을 누른다.
띵동~
"...네."
"안녕~ P 씨. 오늘도 덥지?"
"음... 아. 카렌이구나. 응? 카렌? 어떻게 여길!"
인터폰이 끊기고, 집 안에서 허겁지겁 물건을 치우는 소리가 들린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P 씨가 나온다.
급하게 꺼내 입었는지 구겨진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
굉장한 위화감이 느껴진다 싶었는데, 그러고보니 P 씨의 사복을 보는 건 처음이구나.
일할 때에는 항상 정장 차림으로 있으니까.
"얏호~"
"어떻게 우리 집 주소를 안거야..."
"치히로 씨한테 물어보니 바로 가르쳐 주시던데? 지금은 린이랑 나오도 알고 있을걸."
"그 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어쨌든 빨리 들어 와. 누가 보면 큰일이니."
황급히 나를 집 안에 들인 P 씨가 문을 닫는다.
처음으로 들어온 P 씨의 집. 무심코 여기저기 둘러보게 된다.
응... P 씨의 냄새가 난다.
"이봐 카렌. 무슨 생각으로 여길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넌 아이돌이야. 거리낌 없이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오면 안된다고. 아니, 아이돌이 아니라도 곤란하지 이건."
"응? P 씨가 사는 집이라서 온 거야. "
"하아... 어쨌든 빨리 돌아가."
"내가 여기 왜 왔는지 궁금하지도 않아? 잠깐 실례."
"아, 잠깐! 카렌!"
샌들을 벗고 거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다.
책상 위를 보니, 보이지 않았으면 했던 서류가 잔뜩 널려 있다.
"이... 이건 말이지. 그러니까... 정리야. 그냥 서류를 좀 정리하고 있었던 거야."
"P 씨. 그 말을 믿느니 차라리 나오가 하는 거짓말을 믿겠어."
"미안..."
우리들의 스케줄표, 지난 번 투어 라이브의 보고서, 홍보용 사진들...
갖가지 서류가 책상 위에 놓여 있다. 명백히 P 씨가 일을 하고 있던 흔적.
"있잖아... 사무소에 오지 말라고 한 건 집에서 일을 하라는 뜻이 아니야. 난 정말로 P 씨가 걱정 돼서 그런 건데..."
"미안해."
"물론 내가 여기에 쳐들어온 걸 잘했다고 생각하진 않아. 그래도 P 씨는 나의 소중한 프로듀서니까..."
여고생한테 혼나는 사회인. 다른 사람이 보면 필시 어처구니 없다고 생각하겠지.
나는 나대로 어쩌다가 이런 사람을 좋아하게 됐는지...
"하아... 이제 화 안낼 테니까 P 씨도 그만 앉아."
P 씨가 주뼛주뼛 소파에 앉는다.
나도 바로 옆에 앉아서 P 씨의 오른팔을 살짝 끌어 안는다.
"응? 안 돌아갈거야?"
"P 씨, 내가 돌아가면 또 일 할 거잖아."
"...아니. 안할거야."
"『부처님 얼굴도 세 번』 이라는 말 알지?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세 번째에는 화를 내는 거야."
"어쩔 수 없나. 마음대로 해."
"응. 마음대로 할 게."
꼬옥
P 씨의 팔을 꼭 조여서 가슴 쪽으로 끌어 당긴다.
"저기, 카렌... 꼭 내 팔을 잡고 있어야 하는 거야?"
"이러고 있으면 일을 못 할테니까."
사무소보다 냉방이 잘 되는데도, 이 정도로 달라붙어 있으려니 조금 덥다.
그래도 P 씨의 체온이 느껴져서 굉장히 기분 좋아.
옷은 잘 빨았지만, 혹시... 땀 냄새 나는 건 아니겠지?
꼬옥
"..."
"..."
아... 위험해. 심장이 두근두근 거려서 견딜 수가 없다.
P 씨 한테까지 심장 소리가 들릴지도...
"..."
"..."
꼬오옥
"미안, 카렌! 이젠 무리다!"
"앗!"
P 씨가 내 팔을 풀어내고 부엌으로 도망간다.
이건 효과가 있었다고 봐도 되는 거지?
"이대로 단둘이 있으면 안 돼. 여러모로 안 되니까 외출하자."
"응? 데이트? 괜찮아?"
P 씨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여고생이랑 데이트를 하러 가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네.
나중에 혼내야지.
"안 괜찮아. 그러니까."
P 씨가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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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Доброе утро 에요. 카렌, 프로듀서. 프로듀서 그 옷. 처음 봤어요."
결국 P 씨의 차를 타고 사무소에 갔다.
집 안도 안되고, 바깥도 안되면 확실히 선택지는 사무소밖에 없다.
오후부터 일이 있는지, 아냐가 아이스티를 마시며 소파에 앉아 있다.
"응. 나도 P 씨도 오늘은 쉬는 날이거든."
"사이 좋아 보이네요."
"응응. 사이가 좋은 정도가 아니라..."
"얜 또 무슨 소릴 하려고."
그렇게 내 말을 막은 P 씨가 소파에 가서 앉는다.
이번에는 왼팔을 안아야지.
"..."
"..."
"카렌. 오늘은 너도 쉬는 날이잖아. 다른 일정 같은 거 없어?"
"응. 있긴 한데, P 씨보다 중요한 일정은 없어."
"..."
"아! 중요한 일정 생각났다. 점심 먹기!"
"밖에 먹으러 갈래?"
"아, 그보다, 내가 만들어 줄게."
"카렌. 용기와 만용은 다르단다."
"P 씨는 날 뭘로 보는 거야!"
벌떡 일어나서 지갑을 확인한다.
"아냐도 먹을래? 좋아하는 거 있어?"
"저도 먹어도 되나요? 전 뭐든지 괜찮아요."
"사무소 부엌에서 만들 수 있는 메뉴라고 해봐야... 카레나 스파게티 정도인가."
"알았어. P 씨도 메뉴는 별 상관 없는 거지? 그럼, 아냐. P 씨가 일 못하게 잘 감시하고 있어 줘~"
"알겠습니다. 다녀오세요."
P 씨의 얼굴에 순간 난처한 기색이 떠오른다.
P 씨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정도는 훤히 꿰뚫어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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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기... 아나스타샤 씨."
"что? "
"조금만 봐주면 안 될까. 카렌도 없는데."
"떽! 이에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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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점점 더워지는 것 같아..."
사무소에 돌아오니, 아냐와 P 씨가 내가 나갈 때의 자세 그대로 앉아있다.
설마 계속 저러고 있었던 건가?
"카렌, 정말 만들 수 있는 거야? 내가 도와줄까?"
"므으... 걱정하지 말라니까, P 씨. 나도 요리 정도는 할 줄 알아. 얌전히 기다려."
"아..알았어."
사온 재료를 꺼내고, 부엌에 걸려 있는 앞치마를 입는다.
2대 신데렐라 걸이 입은 덕분에 주가가 올라서, 지금은 가정계열 아이돌의 필수품이라든가 뭐라든가.
"일단 물을 끓여야지."
물을 올리고 베이컨을 한 입 사이즈로 자른다.
계란을 깨서 노른자를 골라낸 다음 프라이팬에 우유와 생크림을 넣는다.
"앗!"
"카렌! 괜찮아?"
"응. 괜찮아. P 씨는 앉아 있어."
"그런가."
얼굴을 내밀고 엿보고 있던 P 씨를 쫓아낸다.
베이컨을 먼저 구웠어야 하는 건데 실수 했다.
마음을 다잡고, 끓는 물에 스파게티 면을 넣는다.
소스도 슬슬 따뜻해진 모양이다.
"다 됐어."
면이 적당히 데쳐진 것 같아서 꺼내려고 냄비를 잡았다.
"뜨것...!"
손잡이가 생각보다 뜨거워서 무심코 비명을 질렀다.
뒤쪽에서 황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카렌! 괜찮아?!"
"아~ 괜찮아. 괜찮으니까! 정말 P 씨, 너무 과보호 한다니까."
그 후에도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P 씨를 어르고 달래서 돌려보내고, 어떻게든 까르보나라를 완성 했다.
제법 잘 된 것 같아서 나 자신을 칭찬한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아냐와 P 씨가 포크를 움직이는 걸 보며, 나도 접시로 손을 뻗는다.
응. 맛있어. 평소보다 더 맛있게 된 것 같다.
머리 속에서 승리포즈를 지은 다음 열심히 먹기 시작 했다.
"다행이야...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나와서..."
"아냐, P 씨는 이제 그만 먹는다니까 접시 치워야겠다."
"죄송합니다. 정말 맛있습니다. 접시만은..."
"맛있네요. 카렌은 요리 잘하는군요."
실 없는 잡담을 나누다보니 어느샌가 접시가 비었다.
"잘 먹었습니다. 다음에는 제가 Борщ를 대접할게요."
"정말? 기대할게~"
"그럼 저는 일이 있어서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래. 다녀 와."
아냐가 사무소를 나가자마자 다시 P 씨의 팔을 끌어안는다.
반항해도 소용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P 씨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
"의외네, 카렌. 너는 요리 같은 건 못할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맞아. 예전에는 전혀 할 줄 몰랐어. 저번에 ‘순백의 신부’ 컨셉으로 촬영 했을 때부터 연습했지."
"아~ 그 때구나."
그 나이에 웨딩드레스를 입게 될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지만.
처음으로 웨딩드레스를 입고, 그리고 P 씨와...
지금 생각해보니 굉장히 좋은 기회를 놓친 것 같다.
"드레스를 입어 보니까, 나도 언젠가는 결혼을 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카렌은 결혼할 상대가 없어서 곤란할 일은 없겠지."
"그래서 가사도 조금씩 배우기로 했어. 엄마한테 물어보기도 하고, 쿄코한테도 배우고 있고..."
"벌써 이 정도면, 집안일도 금방 마스터 하겠는걸."
"열심히 할게. 이제 좀 있으면 18살이고, 나랑 결혼해 줄 사람만 있으면 바로 결혼 할 수 있을텐데."
"..."
"있잖아, P 씨? 이 근처에 어디 좋은 신랑감 없어?"
"그..글쎄..."
P 씨가 대답을 얼버무리고, 나도 부끄러워서 입을 닫았다.
한동안 둘 사이에 침묵이 계속된다.
왠지 모르게 약이 올라서, P 씨의 팔을 좀 더 강하게 끌어안는다.
"저기, 카렌."
"겁쟁이."
"아하하... 그보다, 카렌. 다른 하고 싶은 일 없어? 계속 이러고 있을 순 없잖아. 덥기도 하고..."
"있어."
조금 아쉽지만, P 씨의 팔을 놓아 주었다.
대신 P 씨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눕는다.
"이거 한 번 해보고 싶었어."
"아니, 내가 말하기도 좀 뭐하지만, 이런 건 보통 반대 아닌가."
"상관없어. 그리고 머리도 쓰다듬어 줘."
"그리고는 뭐가 그리고야."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내 부탁을 들어주는 점. 정말 좋아해."
내 머리카락에 P 씨가 손을 올리고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흠칫흠칫 거리는게 귀엽다.
잠시 눈을 감고, 상냥한... 그리고 따뜻한 감촉에 몸을 맡긴다.
"음... 이걸로 한 달 정도는 버틸 수 있으려나."
"?"
P 씨의 손길을 충분히 즐긴 다음 일어나서 기지개를 편다.
좀 더 그대로 있고 싶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
그건 그렇고, 아까보다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다.
앞으로 자주 보급해야지.
"이제 교대하자."
내 무릎을 툭툭 두드린다.
"응?"
"여기 누워."
"아니. 나는..."
"됐으니까, 빨리."
P 씨를 끌어당겨 강제로 내 무릎 위에 눕힌다.
머리카락이 허벅지에 닿는 게 간지러워서 웃음이 나온다.
"어때?"
"...노코멘트."
"헤에~ 기분 좋구나?"
특별 서비스로 P 씨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이제 충분하지? 자, 손 치워 줘."
"에이... 조금만 더어..."
"다른 사람이 보면 내가 곤란해..."
"그럼 앞으로 10분만. 누가 오면 바로 그만 할테니까."
"알았어. 딱 10분이다."
"응. 후후..."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을 맞추자, 부끄러운지 P 씨가 눈을 감는다.
그렇게 한참을 그저 쓰다듬고만 있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가늘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온다.
"정말이지... 너무 무리하니까 그런 거야. 항상 고마워요, P 씨. 푹 쉬어요."
그러면 이제는 부수입을 얻을 시간.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 충분히 즐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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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P 씨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사무소의 문이 열린다.
"안녕하세요."
"아, 카에데 씨. 어서 와~"
"안녕, 카렌. 어머어머~"
카에데 씨가 신기한듯이 P 씨를 쳐다 본다.
"푹 쉬고 계시네. 오늘은 쉬는 날이야?"
"응. 나도 쉬는 날. 프로듀서도 쉬는 날."
카에데 씨와 얼굴을 맞대고 쿡쿡 하고 웃는다.
카에데 씨랑 오랫동안 알고 지내다 보니, 점점 서로의 파장이 맞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카렌~ 나중에 언니한테도 해줄거지?"
"물론이죠. 저번에 마법의 주문도 알려주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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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해가 지고 하늘이 조금씩 어두워질 때 쯤, 린이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사무소에 왔다.
지금부터 시즈오카 현에서 1박2일로 촬영이 있다고 했었지.
아까부터 계속 무릎베개를 하고 있어서, 슬슬 다리가 저리던 참이었다.
딱 좋은 타이밍이네.
"야호~ 린!"
"아, 카렌. 안..."
린이 내 무릎 위에 누워있는 P 씨를 보고 딱딱하게 굳는다.
"카렌. 나랑 바꾸자."
"응? 괜찮아. 내가 할게. 린은 지금부터 촬영하러 가야 하잖아?"
"비켜 줘."
"싫어. P 씨가 깨버린단 말야."
린이 양 손으로 내 머리를 붙잡고 이리저리 흔들기 시작 했다.
평소에는 그렇게 쿨하면서 왜 P 씨만 얽히면 이성을 잃어 버리는 걸까.
"아, 린 왔구나? 갑자기 예정이 바뀌어서 미안한데, 오늘은 란코P 씨가 바래다 주실... 히익!"
"시부야 씨. 먼저 차에 가서... 히익!"
"린, 그만해. 치히로 씨랑 란코P 씨가 겁먹잖아."
나오하고만 했던 얘기지만, 저럴 때의 린은 하나코랑 닮았다.
조만간 진짜로 으르렁거리거나 하진 않을까 이 언니, 너무 걱정 돼.
"카렌... 으으... 로케 끝나고 두고보자."
"응응~ 아, 맞다. 란코 앞에선 그런 표정 짓지마. 란코는 은근히 겁이 많단 말이야."
"안 그래. 아 그 전에..."
린이 성큼성큼 걸어 와서 P 씨 앞에 한 쪽 무릎을 꿇는다.
검고 긴 머리카락의 한 쪽을 쓸어 올리고 P 씨의 뺨 가까이에 입술을 가져 간다.
저러고 있는 것만으로 그림이 되는 게 조금 분하다.
"얍!"
"후앗?!"
갑자기 P 씨가 벌떡 일어난다.
"어머~ 일어났네, P 씨."
"아... 카렌. 그리고 린은 뭐하는 거야."
"흥. 일 다녀올게."
린이 휙하고 돌아서서 사무소를 떠난다.
아직까지 멍하니 있던 란코P 씨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린을 쫓아간다.
"지금 몇 시지?"
"7시반 정도?"
P 씨가 양손으로 얼굴을 싸맨다.
"몇 명이나 봤어?"
"음... 그러니까. 린, 카에데 씨, 미카, 야스하, 카코 씨, 하지메, 유키미, 그리고..."
"더 들을 필요도 없겠네... 하아... 골치가 아프다."
P 씨가 깊게 한숨을 내쉰다.
피로는 다 풀렸을텐데...
"P 씨, 푹 쉬었어?"
"아주 잘 쉬었지... 너무 쉬어서 이제 일 할 의욕이 안 날 정도다."
"흐응... 그래? 내일부터는 일해도 안 말릴테니까, 걱정하지 마."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고... 일단은 집에 가고 싶어."
P 씨가 이불 대신 덮고 있던 수건을 걷어 내고 일어 난다.
크게 기지개를 한 번 켜고, 뚜둑 소리가 나게 목을 돌린다.
"그렇네. 슬슬 돌아갈까?"
"잠깐 기다리고 있어. 차 꺼내 올테니까."
"아, 차 안 꺼내도 돼. 별로 멀지도 않고. 걸어서 바래다 주면 좋겠는데."
"아... 그러면 나는 다시 걸어 돌아와야 하잖아."
"오늘 하루종일 뒹굴거렸으니까, 조금 운동을 해야 하지 않겠어?"
"...뭐어 그런가.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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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씨와 함께, 여자기숙사까지 천천히 걸어 간다.
석양에 물들었던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지고 나서야, 조금씩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어딘가에서 풍경 소리가 들려와 낮동안 쌓인 열기를 걷어 낸다.
"이 시기에는 밤만 되면 뭐랄까... 조금 외롭단 말이지.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여름방학이 끝나가서 그런 거 아니야?"
"확실히 학생 때는 그랬지만."
"우리들이 있으니까, P 씨는 외로울 틈도 없어야 정상인데."
"하하... 그런가. 슬슬 너랑 나오 생일 축하도 해야하고..."
"아!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구나. 착하다~ 착해~"
"소중한 아이돌의 생일을 잊어버릴 리 없잖아. 제대로 선물도 준비했다고."
"사실은 나도 P 씨한테 줄 선물을 준비했어."
"선물? 뭐 특별한 일이 있었던가."
"아니야. 그냥... 평소에 프로듀스 해주고 오늘 내 어리광을 받아준 답례."
여자기숙사로 가는 길에는 작은 공원이 하나 있다.
확실히 이 근처에 벤치가... 아, 찾았다.
일부러 헛기침을 한다.
"카렌? 괜찮아? 감기 기운 있어?"
"음... 괜찮아. 조금 많이 걸어서 그런가, 다리가 아프네. 저기 벤치에서 잠깐 쉬었다 가자."
"응? 그래."
"그럼... P 씨. 정좌."
"아니... 왜 갑자기? 오늘은 이미 충분히 했다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 선물 줄테니까. 부탁해!"
"하아... 알았어."
P 씨가 구두를 벗고 벤치 위에 올라가 무릎을 꿇는다.
해가 져서 어둑어둑한 공원에는 우리밖에 없어서, 이런 묘한 광경을 보고 발길을 멈추는 사람도 없다.
응. 딱 좋아. 프로듀서한테도... 나한테도...
"여기 너무 딱딱한데."
"미안. 조금만 더 참아 줘."
그대로 3분 정도 기다리니, P 씨가 고통스러워 보이는 표정을 짓는다.
"카렌... 이거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다리가 너무 저린데..."
"P 씨. 혼자서 일어설 수 있겠어?"
"조금 힘들 것 같은데..."
"좋아. 그럼 선물."
"응?"
양손으로 P 씨의 볼을 잡고, 입술을 겹친다.
그렇게 한참을... 있고 싶었지만 3초가 한계였다.
"하앗..."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내 입에서 흘러나온 한숨이 너무 야해서 놀랐다.
벙 찐 P 씨에게서 떨어져, 살짝 미소짓는다.
"그, 카, 카렌..."
"아직... 린한테는 안되지만, 꼭 모든 팬 분들이 반할만한 멋진 여자가 될테니까."
바로 뒤돌아서 공원 입구를 향해 달려간다.
"P 씨! 그거 내 첫키스야! 내일 봐!"
"뭣! 어이, 카렌! 잠깐 멈춰... 우왓!?"
다리가 꼬여서 넘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마음 속으로 사과하면서도, 달리기를 멈추진 않는다.
"...읏. 하앗... 하앗..."
체력이 허락하는 한도까지 계속 달렸다.
기숙사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심장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주위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
"하앗... P 씨... 바보..."
전신에서 흘러 떨어지는 땀이 길바닥에 자취를 남긴다.
"멈출 리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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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왔습니다."
"어서 와~"
"수고했어~"
캐리어를 끌고 돌아온 린을 나오와 함께 맞이한다.
해변에서 촬영하고 왔는지, 얼굴이 살짝 탄 것 같다.
"카렌. 어제 일을 잊은 건 아니지?"
"돌아오자마자 바로 그것부터 물어보는 거야?"
"중요한 일이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난 잘 모르겠지만, 그보다 먼저 물어볼 게 있지 않아?"
나오의 말을 듣고서야 린이 나를 쳐다 본다.
"너... 왜 소파에 무릎 꿇고 있는 거야?"
"어제 일에 대한 벌이래."
"벌...이라고? 그게?"
확실히... 나를 보고 벌을 받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위 때문에 컨디션 관리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P 씨의 지론에 따라, 내 옆에는 차가운 녹차와 선풍기가 놓여 있다.
응. 확실히 이건 벌이라기보다 그냥 챙겨주는 거지.
"후~응. 잘 모르겠지만 컨디션 관리를 소홀히 하면 안 되지."
아무래도 내가 실패한 걸 눈치챈 모양인지, 순식간에 린의 표정이 풀어진다.
정말 알기 쉽다니까.
"린은 정말 멋있네."
"뭐, 뭐야 갑자기..."
"신데렐라 걸도 됐고, 행동력도 있고, 어른스럽고, 가끔 알아 듣기 힘든 소리를 하기도 하고."
"응? 마지막에 이상한 게 끼어들었는데."
"응. 나오한테도, 너한테도 질 수 없으니까. 아이돌로써... 그리고..."
내 눈을 마주보며 린이 다부진 미소를 짓는다.
이런 식으로... 가끔씩 같은 여자라도 반해버릴 정도로 멋있으니까...
너무 치사해, 린.
"아~ 아이돌이야 상관 없지만, 나를 ‘그 쪽’에 끼워 넣지 말라고."
"으응~ 내가 보기엔 나오도 좀 의심스럽단 말이야."
"맞아. P 씨랑 단 둘이 방 안에 틀어박혀서 대체 뭘 하는 건지..."
"하...하긴 무, 뭘 해!!"
결국 언제나처럼 셋이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우리들에게는 지금과 같은 관계가 딱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잠시 멍하니 있는동안 린이 신나게 나오를 놀려먹고 있다.
멋있으면서도 순진하고 귀엽고, 그리고 한결같이 앞만 보고 달려가는 린.
라이벌로써 이만큼이나 벅찬 상대가 또 있을까.
실력도... 냉정하게 평가하면 아직 린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도.
"지금은 내가 한발 앞섰으니까."
"응? 카렌, 뭐라고?"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어른에 한 발자국 다가선, 17세의 여름이 끝나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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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의 대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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