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의 수도를 반으로 나누는 강 위를 달린다. 다리를 지탱하는 철골이 햇빛을 깜박깜박하고 끊어낸다. 아직 하늘로 솟지 않은 태양이 물 위를 날며 저편에 남은 밤하늘의 빛을 몰아낸다. 태양이 가져온 황혼과 머리위의 하늘빛과 함께 절묘한 삼색 그라데이션이 만들어졌다. 평소대로의 하늘과 평소대로가 아닌 여정길에서 부조화를 느끼며, 그러나 동시에 안심하며 덜컹거리는 기차 위에 편승하여 달리는 것이였다.
분주하며, 들떠 있었다.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닌 아직은 구경꾼인 우리는 어떤 광경을 눈앞에 두며, 그런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학교는 수능 준비로 분주했다. 게시판의 안내문들이 하나둘씩 떼어지고, 급훈과 교훈이 전지로 가려진다. 책상도 사물함도 비워지자 비로소 준비가 끝났다. 이 교실에 처음 왔을 때를 떠올리는 아무것도 없는 광경에서 졸업의 쓸쓸함을 환시한 것은 내 기분탓일까. 수능을 앞에 두고 신경이 쓰이지는 않겠지만 고등학교라는 환경에 온 목적이 사라진 그 다음날 그들이 느끼게 될 감정이라고 생각해본다.
매년 으레 하는 것이라며 우리는 밖으로 나갔다. 교문까지 일렬로 늘어서서는 잠시 후 나올 고3들을 응원하는 것이라고 한다. 의미도 없이 대열을 통과하는 차를 향해 박수와 함성을 질러보기도 하고, 바로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특성화고 학생들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기도 하며 기다렸다.
이윽고 저 멀리서부터 환호성 소리가 들려왔다. 내려오고 있는 것이리라.
그들은 재밌어하며, 기뻐하며, 또는 질려하며, 부끄러워하며 내려왔지만, 그들 모두에게는 숨길 수 없는 피로감이 짙게 배어있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교육이 선택한 결과고 그들은 아직 여기 살아있다. 그것이 흑인지 백인지, 자신의 삶으로 증명할 또 한 세대가, 저 문 너머--- 사회로의 출발을 여기서 이루었다.
올 가을은 비가 참 많이도 왔다. 장마철때 안왔던 비가 가을에 온 듯이. 외할아버지는 가을날 받은 건강검진에서 암이라는 진단 결과를 받으셨다. 외할아버지랑 매번 주말에 목욕을 간 지는 아마 5년도 넘었을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오늘도 그 소식을 알려주시지 않은 채로 목욕을 가자고 전화를 하신다. 외할아버지를 신경쓰고 외할아버지를 걱정도 하고 있지만. 그래도 목욕을 하는 중 내 감정이 무미건조한 것은 목욕을 단순한 의무감으로 여겨서인걸까. 정말로 내가 모순되고 이중적인 사람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10살때 할아버지를 여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또 다시 겪을지도 모를 슬픔에 각오를 하려는 것일까. 2018년 겨울 목욕탕 가는 길.
눈이 내렸다.
12월의 초순, 돌변한 듯이 차갑게 살을 에는 바람은 행인들의 살을 찢고 얼마 남지 않은 낙엽을 모두 떨군다.
지나가는 인영들이 절로 몸을 움츠리는 가운데, 하늘은 무슨 연고인지 흐리다.
여름 기운은 어느새 전부 사라졌다 해도 아직 가을의 정경은 남아있었을 터인데,
지금은 이리도 차가운가.
그에 쐐기를 박는 듯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는 순백의 꽃이 하늘하늘 나리었다.
모든 것을 덮기 위해, 남아있는 가을을 없애기 위해.
첫눈도 아니거늘 도리어 이제와서 감상을 품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리도 차가운 날보다도 더욱 차가운 현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15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늦가을의 오전 6시, 지방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아우내의 함성과 선혈이 보이는 듯한 감각에 빠져, 기차에서 내리었다. 이 지방에 올때마다 먹는 호두과자를 한 봉지 사들고는 거리를 걷는다. 서울과는 달리 조용하고, 그러나 결코 적막하지 않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오늘을 시작했다.
— 오전 8시 목적지, 천안에 도착하고 나서
한산하고 평화로운.
따스한 빛깔의 석양이 나를 반겨준다.
포근하고, 포근하게.
ㅡ 이동 중인 버스 안에서. 늦가을의 오후 6시에.
같이 스마트폰에 고정된 눈동자. 덧없이 흘러가는 어르신의 목소리. 1000원짜리 바늘. 요한계시록을 일컫는 팜플렛.
차가움도, 따스함도 없는, 그저 무기질적인 공간에서 다들 이어폰만 다시 무감각하게 끼울뿐.
ㅡ지하철에서. 늦가을의 점심시간.
나는 오늘도 지옥같은 막장 환승에 나지막히 욕설을 내뱉는다.
ㅡ늦가을, 정오 부근. 지하철 승강장에서.
나의 욕심은 끝이 없고..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차로따위 없는 아담한 길을 바라본다.
넉넉하고 샛노랗게 익어있는 벼.
황금빛으로 물들어 그 벼들과 함께 대지를 비추는 나무들.
산 중턱 밑으로 펼쳐진 광활한 평야.
그 위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데우는, 황금빛 대지 위를 내달리는 햇살.
그 어느 때보다도 푸르고, 구름 한 점 없이 활짝 열려있는 하늘.
선인(善人)을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모습이리라.
그것이, 2018년 10월 25일 여수시 율촌면에서의 일이었다.
학교는 수능 준비로 분주했다. 게시판의 안내문들이 하나둘씩 떼어지고, 급훈과 교훈이 전지로 가려진다. 책상도 사물함도 비워지자 비로소 준비가 끝났다. 이 교실에 처음 왔을 때를 떠올리는 아무것도 없는 광경에서 졸업의 쓸쓸함을 환시한 것은 내 기분탓일까. 수능을 앞에 두고 신경이 쓰이지는 않겠지만 고등학교라는 환경에 온 목적이 사라진 그 다음날 그들이 느끼게 될 감정이라고 생각해본다.
매년 으레 하는 것이라며 우리는 밖으로 나갔다. 교문까지 일렬로 늘어서서는 잠시 후 나올 고3들을 응원하는 것이라고 한다. 의미도 없이 대열을 통과하는 차를 향해 박수와 함성을 질러보기도 하고, 바로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특성화고 학생들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기도 하며 기다렸다.
이윽고 저 멀리서부터 환호성 소리가 들려왔다. 내려오고 있는 것이리라.
그들은 재밌어하며, 기뻐하며, 또는 질려하며, 부끄러워하며 내려왔지만, 그들 모두에게는 숨길 수 없는 피로감이 짙게 배어있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교육이 선택한 결과고 그들은 아직 여기 살아있다. 그것이 흑인지 백인지, 자신의 삶으로 증명할 또 한 세대가, 저 문 너머--- 사회로의 출발을 여기서 이루었다.
--- 2018.11.14. 수능 전일, 고1로서 고3을 배웅하며
외할아버지는 오늘도 그 소식을 알려주시지 않은 채로 목욕을 가자고 전화를 하신다. 외할아버지를 신경쓰고 외할아버지를 걱정도 하고 있지만. 그래도 목욕을 하는 중 내 감정이 무미건조한 것은 목욕을 단순한 의무감으로 여겨서인걸까. 정말로 내가 모순되고 이중적인 사람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10살때 할아버지를 여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또 다시 겪을지도 모를 슬픔에 각오를 하려는 것일까. 2018년 겨울 목욕탕 가는 길.
12월의 초순, 돌변한 듯이 차갑게 살을 에는 바람은 행인들의 살을 찢고 얼마 남지 않은 낙엽을 모두 떨군다.
지나가는 인영들이 절로 몸을 움츠리는 가운데, 하늘은 무슨 연고인지 흐리다.
여름 기운은 어느새 전부 사라졌다 해도 아직 가을의 정경은 남아있었을 터인데,
지금은 이리도 차가운가.
그에 쐐기를 박는 듯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는 순백의 꽃이 하늘하늘 나리었다.
모든 것을 덮기 위해, 남아있는 가을을 없애기 위해.
첫눈도 아니거늘 도리어 이제와서 감상을 품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리도 차가운 날보다도 더욱 차가운 현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2018.12.13. 차가운 하늘 아래 새하얗게 물들이는 백설을 보고
눈부시고...
그래도 피곤해.
하지만 기대되기도.
2019.02.03. 귀향하는 버스에서 내린 후, 터미널에 앉아 마중을 기다리며.
점심 시간, 사람 많은 식당에서, 홀로 앉아서 여유롭게.
대학 그거 꼭 가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는 놈을 데리고 나아가는 월요일의 저상버스 뱃속
영원같은 세시간을 보내게 될 산꼭대기의 전산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