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

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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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4-08, 2013 19:21에 작성됨.

"오랜만이네?"

"......."

남자는 여자의 말에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실제로 얼굴을 맞대면서 대화해본지 햇수로 근 2년이 지났다.

"이제와서 여기는 왜 온거야? 너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곳일텐데."

남자는 간신히 대꾸를 할 수 있었다. 사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뒤돌아섰다해도 여자는 잡지 않았을텐데도...



"오늘은 그 아이의 생일이니까"

"기일이겠지"



남자는 여자의 말에 동요하면서도 태연하게 말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물론 그 목소리는 떨리고 있음에도...





"역시 허니는 아직도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거네. 그럴거라고 생각했어. 아마...몇년이 지난다고 해도 당신이 눈을 감는 그 순간에도 나를 용서하지 않겠지."

"허니라고...부르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역겨우니까"

"아...미안.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당신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하니까 거의 반사적으로 나오는구나..."


남자는 점점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당장이라도 무신경하게 말을 내뱉는 저 여자의 뺨을 세차게 내려치고 싶었다.


"더이상 할 말도 없고 들어줄 이유도 없어. 돌아가. 더 이곳에 있고 싶다면 내가 가겠어."


남자는 그 말을 마치고 여자에게 등을 돌린 채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기다려."


남자는 발을 멈췄지만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나...후회하고 있어. 분명 그날 이후로 계속. 하지만 그걸 인정할 수 없었어.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기에는 난 너무 어렸어."

"험한 소리 나오기 전에 그 주둥아리를 다무는게 좋을 거야. 난 이미 더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참고 있으니까."


남자는 그 여자의 뻔뻔한 말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당장이라도 세상에 모든 욕설과 폭언을 여자에게 퍼붓고 싶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잠들어 있는 곳이야. 이런 이야기 여기서 하고 싶지 않아."

"우리의 아이...겠지."



남자는 어느새인가 여자의 멱살을 잡고 오른 손을 크게 치켜들었다. 그러나 여자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차마 여자를 때리지 못했다. 상상에서는 몇번이고 했었을 그 행동을. 막상 그녀를 앞에 두고는 할 수 없었다.


"여기서 나와. 이럴 거면 사람이 없는 조용한 곳에서 얘기해. 따라와."



남자의 말에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따라 나갔다.


남자는 여자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날 있었던 일도 지금 자신 앞에서 당당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납골당과 꽤 거리가 있는 빈 뜰에서 남자와 여자는 다시 대화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여기는 뭐하러 온거야?"

"말했잖아. 우리 아이를 만나러 왔어. 당신도 만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고..."

"우리 아이? 우리라고? 정말 뻔뻔하게도 말하는구나. 그래 우리의 아이지. 너와 나 사이에 잉태된 아이지. 그런데 너란 년은 그 아이를 마치 자신의 몸 속에 자라난 암세포 마냥 떼어냈어!! 나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무리하게!!"

남자는 결국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더이상은 여자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들을 수 없었다. 자신의 아이를, 나의 아이를 제멋대로 끄집어내서 죽게한 정말 XX 같은 년이다.


"그건...사고였어. 그렇게 되길 바란 게 아니었다고. 나는 그 아이를 죽이려고 수술을 받은 게 아니야. 단지..."

"단지...꼭 그 무대를 오르기 위해서였지. 꼭 그 작품이 하고 싶어서였겠지. 꼭 그 배역을 맡고 싶어서였겠지. 한달만...한달만 더 기다리면 될 일을 너가 참을 수 없어서!!!"


남자는 기억하기 싫은 그날을 떠올렸다.



그 일이 있기 전 남자는 세상의 모든 행복을 가진 사람이었다. 자신이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직장에서 일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해서 꿈에도 그리던 2세의 출산이 얼마 남지 않은 그 때.


여자는 행복했지만 불행했다. 분명 그 남자와 하루라도 빨리 결혼하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 남자의 아이를 낳고 싶었다. 그랬을터인데...임신한 것을 알고 그렇게 남자와 눈물을 흘리면서 기뻐했을터인데....

임신 3개월이 되자 남자는 여자의 일정을 줄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도 수긍했고 그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고의로 줄였던 스케줄들이 더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아예 없어져버렸다. 남자는 방송관계자나 업계사람들의 배려라고 여겼지만 여자는 위기를 느꼈다. 자신의 출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자는 혼자만 있는 시간동안 생각을 하다가 깨달았다. 그것은 더이상 자신이 빛나기 위해 노력할 수 없다는 것. 나 자신보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 가족을 위해 남편을 위해 자식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 이제는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했듯이. 나라는 꽃을 피우기 위해 어머니가 거름이 되었듯 자신도 더이상 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여자에게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를 사랑했다. 자신이 품은 아이를 사랑했다. 그래서 참을 수 있었다.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분명 출산 예정일을 2달 앞둔 시점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시점에서 여자에게 최고의 기회가 찾아왔다. 실제로 최악의 타이밍에 거절할 수 없는 제안들이 그녀 앞으로 쏟아졌다. 예정대로라면 출산은 두 달뒤...하지만 조기 출산을 한다면?

여자는 자신이라면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한달 빨리 제왕절개를 하고 한달동안 몸을 추스린 후 일을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아이도 낳을 수 있고 자신도 후회없이 은퇴할 수 있을만큼 최고로 빛날 수 있을거라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여자는 남자의 동의없이 서둘러 수술 날짜를 잡았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남자와 여자가 처음 만난 날짜였다.


여자는 기분이 좋아졌다. 첫아이의 생일이 자신들의 첫기념일이라면 평생 남자가 잊으려해도 잊을 수 없을거라 여기며...


수술날이 되자 여자는 긴장했지만 자신이 있었다. 자기는 할 수 있을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아이는 엄마처럼 강하지 않았다.

여자의 뱃속에서 꺼내진 아이는 인큐베이터에 들어간지 3시간 만에 사망했다. 원인은 불명이지만 조기출산의 영향 때문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남자는 소식을 듣고 믿을 수 없었다. 재빨리 여락을 받고 병원에 도착했지만 자신의 눈 앞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차갑게 식은 핏덩이...
를 안은 채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결국 그런 일이 있고나서도 너는 그 이전에 제안 받은 일을 모두 계약했었지."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난...더이상 살아갈 수 없었을거야."




"여론들도 대단했지. 비운의 여주인공에 그 슬픔을 연기로 노래로 승화시키는 아티스트라고 띄워주느라 정신 없었지. 동정표도 많이 받아서 안티들도 뿌리 채 사라지고 말이야."

".........."






"내가 이혼장을 내밀어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바로 도장을 찍어줬고."

"당신이 원하는대로 해줄 수밖에 없었어. 사실 그때 무슨 짓을 해서라도 당신에게 용서를 빌고 싶었어. 용서를 받고 싶었어."


처음 봤을 때처럼 당당하고 냉정해보이던 여자의 모습은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여자도 더 이상 남자의 앞에서 연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럴 자격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나도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데...누가 나를 용서할 수 있겠어."

".......이제와서 말하는 거지만 그때 너가 내 앞에서 용서를 구했다면 너를 용서해줬을지 몰라. 무릎 꿇고 빌어라고까지 안 해. 단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잘못했다는 그 말만 했어도 난 너를 이렇게까지 증오하지 않았어."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그랬다면 난 다시는 혼자서 일어서지 못하고 평생 당신에게 기대어 살았을거야."



"만약이라는 말은 필요없어. 우리는 결국 이렇게 되었으니까."






남자는 여자를 용서할 수 없었다.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용서하는걸 용서할 수 없었다.

그저 그 뿐인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이제 다시 만났잖아. 지금 용서를 구할 수 없을까?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해도 세상사람들 모두가 용서하지 못한다고 해도...당신이 나를 용서해준다면...우리가 다시 시"

"그런 일은 없어. 이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여자는 여태껏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소리내지 않고...그저 눈물만을 흘리는 것은 남자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눈물을 막을 수 없지만 소리는 손으로 입을 막으면 될 일이었다.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이제와서 여자의 그런 모습을 보고 약해지고 싶지 않았다.

남자는 그날 이후로 여자를 증오하는 힘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니....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린 그날 이후로 망가졌어. 나는 이미 그때의 내가 아니야. 지금 있는 건 그때 깨지고 남은 파편이지. 너도 마찬가지고."

"윽...흑! 끄윽...."


"그 깨진 조각끼리 다시 맞출 수 없어. 남아 있는 파편도 있지만 이제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진 조각들도 있으니까. 다시 맞출려 노력해도 어긋날 뿐이고. 억지로 껴맞춘다고 해도 결국 사라진 조각들의 텅빈 자리만 강하게 남을 뿐이야."

".......?"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에서 눈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땅에 떨어지자 마자 눈은 소리없이 녹으면 사라졌다.


"우리의 아이 이름....유키라고 지었었지. 이름 그대로였구나...쌓이지 못하고 땅에 닿자마자 사라진 눈처럼. 그렇게 쉽게 가버렸어."

"미안해...정말 미안...흑...정말...끅 죄송합...흑..."


"..............."




남자는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여자는 계속 울면서 자신의 과오를 속죄했다.





"미안해 허니...으끅...정말...정말...흑"

"미안해 미키...널 용서해줄 수 없어서..."
















오늘 우울한 일이 있어서 우울해졌습니다. 그래서 우울한 이야기를 써봤네요 하핫

으음 그래도 역시 우울합니다.


날씨가 풀리면 덜해지까요? 하하핫 [이 게시물은 에아노르님에 의해 2013-06-07 00:05:52 창작글판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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