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06-09, 2013 22:07에 작성됨.
"...................."
지금은 밤 열두시. 아즈사는 멍한 눈으로 시계를 응시한다.
잠이 들면 잘 일어나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P가 사준 자명종 시계.
이제는 더 이상 필요없는 것 같은.
꿀꺽꿀꺽.
아즈사는 병째 술을 들이켠다. 독한 일본주 한 병이 다 들어간다.
하지만 또다시 새 병이 따진다. 이미 빈 병들이 아즈사의 주위에 맴돈다.
어느 사이에 새벽 두 시. 아즈사는 자신의 휴대폰을 든다.
이미 배터리가 나간 휴대폰이지만 익숙한 번호를 눌러본다.
당연히 차갑게 식은 휴대폰은 무반응.
파악!
심통이 난 듯한 그녀의 손을 떠난 휴대폰은 죄 없이 나뒹군다.
"흑....흐윽흑...."
그와의 만남은 로맨스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길을 잃어버린 자신을 데리러 온 그의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그렇게 한 순간에 마음에 박힌 그는 절대로 빠지지 않았다.
보수를 많이 받지 못하는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낡은 중고차에서 그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내게 호감이 있음을 고백했다.
그날밤은 나이 값도 못하고 수줍은 소녀처럼 들떠 버려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다음날 트레이너한테 아프냐고 오해사버렸다.
그와의 연애는 행복했다. 스트레스 받아하는 코토리씨에게 속으로 귀엽게
혀를 내밀어보기도 했고 그와의 전화통화로 내일 일이 있다는 것도 까먹고
밤을 새워보기도 하고, 우산을 잊은 그를 위해 빗속에서 우산을 들고
마중을 나오기도 했다. 그는 늘 감기에 걸리면 어쩔거냐며 타박했지만.
20년 넘게 챙겨본 적 없는 기념일도 챙길 수 있었다. 돈을 많이 벌지 못하
던 등급외 아이돌이었지만 한 달 급료를 다 써서 그의 선물을 샀다.
그에게 받은 선물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는 게 우스운 일이었지만,
그와 빵 귀퉁이를 뜯으면서 보낸 한 달이 그렇게 행복했다.
가족 모임과 친구와의 약속도 일을 핑계로 미루거나 불참한 적도 있었다.
몸과 마음을 다 주면서 그를 사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점점 더 인기가 있어졌고, 그도 업계에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일에 치이기 시작한
우리는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을 때는 늦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내게 이별을 통보했다.
한동안 나는 내가 아니었다. 우산없이 빗속을 걸어가기도 했고,
미친 여자처럼 그가 사랑하던 긴 생머리를 뚝 잘라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하루가 다르게 초췌해졌고 그걸
보다 못한 코토리씨가 내게 진실을 털어놓았다.
그를 찾은 곳은 그가 내 첫키스와 첫경험을 가져간 겨울바다가 잘 보이는
언덕 위에서였다. 그리고 나는 그를 다시 데려왔다.
어리석게도 나는 이미 마음이 떠난 그를 붙잡을 수 있을거라고 착각했다.
그리고, 오늘 그가 결혼했다. 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흑......흑흑흑흑...."
한참을 울던 아즈사는 방에서 빈 쓰레기통 하나를 가져온다.
쓰레기통에 쓰레기가 가득 쌓인다. 그와 함께 찍은 사진, 수도 없이
보낸 다시 돌아온 편지, 그가 보낸 편지, 그가 줬던 선물......
그와 함께한 추억과 애정이 가득 녹아 있는 여러 물건들.
아즈사는 그 위에 먹던 일본주를 들이붓는다.
마지막으로 잔인하게도 그가 직접 준 다른 여자와의 청첩장을 집어든다.
찰칵. 찰칵.
가스불을 이용해 불을 붙였다. 불쏘시개가 된 그의 얼굴이 사라진다.
쓰레기통에 이윽고 불이 확 붙었다.
"흑.....흑흑흑흑...."
아즈사의 투명한 눈물이 계속 바닥을 적신다.
무심하게 타오르는 쓰레기통 속의 불도 그녀의 눈물을 말리지 못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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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지 못하는 여자. 떠나가지 못하는 남자의 후속편?일까요.
어우 위 아파라.
16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이야기군요. 이제 아즈사씨는 히비키 오빠랑 결혼인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