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반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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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프로듀서
Maggie Reilly - Everytime we touch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또 다른 끝(또는 시작)에 대해>
2021년 3월 8일, 일본에서 대망의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다카포(부제:무재원점)'가 개봉되었습니다. 영화 포스터만 수 차례에 걸쳐 수정되고, 그 동안 제작사 및 제작인력이 여러 사정으로 변경 될정도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마침내 수 많은 에반게리온 팬 분들이 고대해오던 '끝(또는 시작)'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네요. 한국에서는 으레 그렇듯 한발 늦게, 이미 일본에서 수많은 스포일러들과 결말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한참이 지나서야 개봉이 되겠지만 이제 그런 것은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나머지 아무래도 좋은 것 같습니다.
<세기말 에반게리온=신세기 에반게리온 인가>
에반게리온은 세기말에 만들어진 세기말적인 작품입니다. 이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타이틀은 '세기말 에반게리온'이 아니라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어떻게보면 무척 이질적입니다. 그리고 21세기를 사는 오늘날은 200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새로운 '신극장판'을 통해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실제로 목격하기도 했군요.
사실 에반게리온 TVA판과 구극장판을 '진정한 결말'이라 생각하는 팬으로서 신극장판은 '새로운 이야기'라기보다는 '사족'이라 느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신극장판의 이전에 없던 기이한 복선과 엄청난 양의 맥거핀들은 90년대의 에반게리온을 추억하던 팬들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고, 새로운 캐릭터의 등장과 기존 캐릭터의 성격에 있어서의 중대한 변화는 놀라움과 색다름을 가져다 주었습니다만 많은 혼란도 가져다 주었으니까요. 무엇보다 세기말 무렵(95년 10월 4일)에 세기말의 분위기를 가득 지닌채 처음 세상에 태어난 '에반게리온'이, 어째서 새시대의 시작에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마저 이어가려는 지...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세기말' 특유의 알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들과 'Y2K 버그' 등과 같은 '새로운 시대(정보 혁명)'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불안감들이 이미 대부분 소강된 '21세기'에 '세기말 애니메이션'은 대체 무슨 말을 더 하고 싶은 것일까요. 마치 총포와 봉건제의 붕괴 등으로 기존 시스템이 완전히 변해버려서, 구시대의 유물인 '기사(Knight)'가 몰락한 시대에 오히려 전설과 환상이 가득한 '기사도 문학(Roman)'이 더욱 성행하게된 것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실체가 사라진 자리엔 그 무엇을 가져다 놓아도 그것이라 우길 수 있고 얼마든지 과장과 왜곡이 가능하니까요.
기존의 팬분들 사이에서도 '신극장판'에 대한 갑론을박이 오가는 상태에서 처음엔 기존의 에피소드들을 답습하거나 살짝 변주를 주는 정도인 새로운 에반게리온이 점차 '본 궤도'에 오르면서 더욱 많은 혼란과 난해함을 가중하는 모습을 보면서 에반게리온이 겉으로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결국은 과거의 그 '신비주의' 코드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는 '맥거핀 뷔페'로 회귀하고자 하는 것이라 생각되어 신극장판을 이해하는 것을 그만두고 말았네요. 개인적으로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에반게리온의 팬이라 생각하지만 어디까지나 'TVA 및 EOE(구극장판)'까지가 이해의 마지노선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심리적인 간극을 극복하기엔 여러 장벽들이 있기에 개인적으로 '세기말 에반게리온'과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일종의 별개의 작품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두 작품이 하고자 하는 말이 전혀 다르게 다가오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두 작품을 이어지는 연장선상으로 해석하는 분들도 많으시기에 해석하기 나름이라 생각합니다.
<에반게리온이 하려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에반게리온은 로봇 SF물이면서 사이코드라마(심리극)을 표방하는 매우 기묘한 작품입니다. 기존의 로봇 SF물이 완구 판매 및 각종 굿즈 수익을 위해 파일럿보다는 '로봇'이 가지는 특성과 기체의 우수성, 디자인 등등이 더욱 부각되는 성격이 있었다면, 에반게리온은 오히려 '파일럿'이 더욱 강조되는 독특한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파일럿의 가슴 아픈 과거사와 수 많은 대내외적 상처들, 어그러지는 인간관계와 무너져가는 인물들을 보면서 저렇게 거대한 최첨단 과학 병기와 신도시 속에도 스스로의 내적모순과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절망과 자학에 빠져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삶을 끝내버리거나 자포자기한듯 살아가는 인간군상들이 무척 안타까우면서도 많은 생각을 들게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극이 흘러갈 수록 '로봇물'의 전개보다는 인물들의 내면에 치중하는 것이 두드러집니다. 전체적인 연출 자체도 에반게리온 세계관이 하나의 거대한 '폐쇄병동'과 같았습니다. 알고보면 모두가 환자이기에 진정한 치유도 간호도 없는 구원이랍시곤 '죽음'말고는 없는 암울한 버려진 병동....에반게리온이 묘사한 '인간의 삶'이란 결국 '죽음에 이르는 병(절망)'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개인마다 해석은 무척 다양하겠지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반게리온이 이토록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또 회자된다는 건, '절망' 그 이상의 무언가를 전달해주기 때문이라는 생각됩니다. 지독한 염세주의자이지만 나름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바라본 어느 독일 철학자가 오늘날에도 수 많은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생각의 말미를 제공하는 것처럼, '절망적인 삶'을 억지로 '행복하다'라며 애써 위로하고 보듬으며 현상유지를 하기보다는 깨끗하게 그 사실 자체를 인정하고 '그렇다면 이 절망적인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건설적인 고찰을 할 수 있게 해준다랄까요.
에반게리온 속의 인물들은 저마다 자신의 행동과 주어진 상황에 따른 결과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릅니다. 현실을 부정하고 맞서 싸우는 사람도 있고, 겸허히 수용하고 포기하는 사람도 있으며, 끝없이 회피하고 도망치면서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대응이 가져오는 변화는 미미합니다. 에반게리온 속의 세계가 지축이 기울어져 '영원한 여름'으로 계절이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오랫동안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던 '인류보완계획(=전인류 말살계획)'과 같은 '종말'은 이미 예정된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든 사람은 죽고, 세상은 멸망합니다. 그건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불멸'이라는 건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일이고 생명도 우주도 언젠가는 '종말'을 맞이합니다. 비록 에반게리온에선 그것이 자연의 섭리가 아닌 '인간'에 의한 의도된 종말이라는 점에서는 다르겠지만요. 그러나 이미 정해진 운명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수 많은 대응과 행동들이 모두 무의미하다고 보기엔 어렵습니다. 이미 모든 것이 정해진 상황속에서도 각자 나름의 의도와 생각으로 결국 자기만의 삶을 살다가 떠나는 것이 인생이니까요.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많은 것들은 이미 결정되어 있음을 알게됩니다. 신체의 내구도나 선천적인 질환에 따른 기대 수명만이 아니라 나 자신 주변의 가정환경이나 사회적인 배경 혹은 나의 취향과 흥미, 성격 또는 재능 등등은 이미 유전적으로 어느 정도 정해진 채 살아가게 되니까요. 타고난 운명을 완전히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기에 그런 수많은 '운명'을 지닌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우여곡절이 많은 인생이고 달고 쓰고 떫고도 짠 삶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 역시 나름의 의미가 있을테지요. 그렇기에 어쩌면 에반게리온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어쩌면 과장되고도 극적인 삶에 부분적으로 묘한 공감과 상념을 갖게 되는 것 역시 현실의 삶을 그 속에 투영해도 좋을 정도로 '현실적'인 면이 어느정도 내재되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가해봅니다. 그 포인트 역시 개인마다 다르겠지만요.
<열광금지 에바로드>
2015년 무렵 우연히 알게된 책 '열광금지 에바로드'는 '에반게리온 스탬프 랠리'를 통해 세계 일주를 하면서 전 세계 각지에 흩어진 에반게리온 스탬프를 모은 두 한국인 에반게리온 팬의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입니다. 한국 문학 작품에서 일본의 애니메이션인 '에반게리온'과 '오타쿠 문화'를 소재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무척 이색적이고 독특하다는 주목을 받기도 했었는데, 실제 내용은 '에반게리온'보다는 등장인물의 '삶'에 초점을 맞춰진 것이 그야말로 '에반게리온식 전개'였습니다.
비록 실존인물과의 인터뷰가 바탕이 되었더라도, 소설이기에 어느정도 허구와 각색이 있을 수 밖에 없지만 등장인물의 사실적인 삶과 묘사를 보면서 '지구가 기울지 않고, 외계인들도 침공하지 않고, 비뚤어진 거대 과학의 산물인 '생체 병기'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신지'는 어떻게 살고 있을지 생각해보게 되는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에반게리온'은 주인공이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었고, 젊은 날의 '전부'와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불만족스러운 삶과 불우함이 가득한 유년기를 뒤로한 채, 에반게리온에 대한 치기어린 신념 하나로 무모하고도 긴 순례의 여정을 시작한 그가 수 많은 역경을 헤친 여행의 성공 후 귀로에 이르러서는 에반게리온이 과연 나에게 무엇이었나 하는 회의와 의문에 빠져들면서 창 밖으로 나서게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상처투성이인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마주하면서 마침내 더 이상 '에바라는 껍데기에 타지않고' 자신의 두 발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주인공을 보면서 에반게리온은 결국 그에게 있어 '유년기의 끝'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소년이 신화가 될 수 없는 시대에서, 소년들은 그렇게 어른이 되어갑니다.
<감사와 작별>
에반게리온은 언제나 '끝'을 이야기하지만 사람들은 그 속에서 '시작'을 발견합니다. 이번 극장판 역시 누군가에겐 '끝'이자 '시작'이 될 수 있겠지요. 이미 일본 사회 곳곳에 수 많은 굿즈와 파생 상품들로 깊게 뿌리내린 '90년대의 망령' 혹은 '불멸의 아이콘' 에반게리온.
작품이 지닌 의미나 해석을 떠나, 90년대에 태어나, 00년대에 자랐었고, 10년대를 견뎠으며, 20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앞으로도 어떤 식으로든 잊을 수 없는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제작진 여러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그동안의 모든 '에반게리온'들에게 작별을 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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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의 작중 인물들이 다 미쳐돌아간 결정적인 이유가 그것입니다. 절망이 눈 앞을 가린 사람은 그 절망을 어떻게든 씻어내야만 행복이 무엇인지 다시 가늠을 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씻어내기에 절망이 너무 짙다면 행복을 잡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수 밖엔 없습니다. 그래서 신지고 아스카고 겐도고 제레고 다 미쳐돌아간겁니다. 그 행복을 잡아보겠다고 몸부림치고 피를 토한거에요.
그렇게 과하게 몸부림을 치면 뭐합니까?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이카루스가 떨어진 건 너무 높이 날아서에요. 과거는 역겹고, 현실은 잔인하고, 미래는 어둡습니다. 그럼 뭘 해야 하느냐?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합니다. 받아들여야만 해요. 모든것이 완벽할 순 없다는 사실을. 그게 행복으로 가는 길이에요.
에반게리온의 세계는 매우 불친절합니다. 어찌보면 에반게리온 내의 생명이란 악의 그 자체만으로 탄생된 흉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껴질 만큼요. 현실도 별반 다를 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 언젠가는 죽을 것을 알면서도 살려고 발버둥쳐야만 하거든요.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내 뱃속이나 채우겠다고 풀 몇백만포기와 가축 몇백만마리를 무차별적으로 학살해댄 희대의 악한입니다. 나 살겠다고 무고한 식물들과 동물들을 학살하는데 아주 혁혁한 기여와 공을 들였지요. 그런데 어쩝니까. 안 그러면 내가 죽는데. 그런데, 사실은 안 그러거나 그러거나 저는 죽습니다. 일시적인 진전을 위해서 저는 그런 무차별적인 학살을 해댄 겁니다. 이런 지구의 암덩어리같은 놈이 다 있나.
완전무결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위와 같은 생각이 하루에 수도 없이 맴돕니다.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을 가지고요. 오직 내가 한 행동 중에서 완벽한 선만이 옳은 행동이고 나머지는 모두 그릇된 행동이라면 살아있는 것은 그 자체로 그릇된 것이 됩니다. 왜냐면 살아있는 건 그 자체로 다른 생명을 해치는 일이거든요.
식물과 동물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예를 들어서 제가 공무원 시험을 합격했다고 쳐요. 그런데 바로 제 다음 순위였던 사람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채 병에 걸린 할머니를 모시고 감당이 안 될 만큼의 병원비를 매달 납부하면서 공부를 하는 사람이었던 겁니다. 모든 희망을 이번 시험에 걸었는데 제가 붙는 바람에 시험에 떨어져버린 그 사람이 모든 희망을 잃고 극단적 선택을 한다면 저는 시험에 합격한 것 때문에 사람을 죽이게 되는 겁니다.
제 생각에 살아가는 것이란 그런 거에요. 저는 살기 위해선 다른 누군가에게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밖엔 없고, 그 사실이 저는 매우 싫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 하는 행동 때문에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어요.
그렇기에 제가 개인적으로 내린 가장 최선의 해결책은 절망에 젖을 일을 최대한 피하고 그러한 현실에서 눈을 돌리는 겁니다. 그런 잔인한 사실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분명히 존재하고, 그런 사람들은 대단한 사람들이에요. 하지만 적어도 저는 그렇게 강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할 수 있는 건 눈을 돌리는 것 뿐이에요.
위에서 절망이 눈을 가린다고 말했던 것 처럼 우선 절망에 빠지는 것은 그것 자체로 너무나도 큰 문제입니다. 행복을 잡겠다고 발버둥치면 더 큰 실패만이 다가오고 절망이 앞이 보일 만큼 사라지기에는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걸려요. 그렇기에 애초에 그런 것에서 눈을 돌리는 게 최고인 거에요.
그런게 일종의 정신승리로 이어질 수도 있겠죠, 할 수 있는 일을 안 하면서 어차피 안 될 거였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수도 있을 거에요. 하지만, 그런 것이 없다면 삶이 너무 힘들 겁니다. 안 그러면 천재지변이 나의 잘못처럼 느껴질수 있거든요.
에바는 그래서 좋았습니다. 절망에 눈 앞이 가려진 사람은 얼마나 나락까지 갈 수 있나를 아주 여과없이 보여줬거든요. 신지는 천재지변을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는 사람이에요.
구원이란건 존재하지 않고, 구원의 실마리는 존재할 수 있지만, 그 실마리가 더 큰 불행의 단초가 될 수도 있어요. 그렇기에 에바를 보면서 제가 느꼈던 점은 역시 가장 좋은 것은 행복의 존재보다는 절망의 부재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에반게리온이 여타 메카물과 다른 건 아무래도 '인간 불신'과 '절망'이 핵심에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흔히 에반게리온과 자주 비교가 되곤하는 '건담 시리즈' 역시 전쟁의 암울함, 인간의 어리석음과 잔인함이 자주 비판적으로 다루어지곤 하지만, 개인의 내면적 어두움보다는 연방과 제국 사이의 이데올로기 충돌 및 해묵은 갈등 속에서 희생되는 여러 사람들을 동시에 다루기에 건담의 이야기들은 개개인의 이야기보다는 '한 시대'에 대한 큰 이야기로 귀결이 되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에반게리온에선 매우 한정적인 인물들(주인공 일행 및 네르프 소속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기에 보다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이야기에 집중하는 느낌이 강하네요. 그리고 하나같이 사람들의 내면의 '어둠'을 집중적으로 드러내는데 안간힘을 쓰는 모습입니다.
인정하기 싫은 자신의 미숙함, 학대받고 버림받은 과거, 부모를 상실한 고독한 유년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겉도는 알 수 없는 기분, 자신의 행동과 과오에 대한 후회...에반게리온 특유의 우울함과 음침함은 대개 등장인물들의 과거에서 비롯됩니다. 당장 눈 앞에 '외계인'이 침공해서 세상이 멸망하는 일촉즉발의 세계라도, 결국 인물들을 끝까지 괴롭히는 것은 그들의 '과거'들입니다. 이건 비단 등장인물들에게만 해당하는 점은 아니기도 하네요.
'절망'을 보다 직접적으로 다룬 구극장판의 결말에 대한 나름의 생각으로는
삶=절망, 죽음=구원이라는 희한한 공식이 에반게리온 세계에선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선 에반게리온의 세계는 이미 '죽는 것이 사는 것 보다 나은 세상'이나 다름없습니다.
외계인(사도)는 절망에 빠진 지구인들에게 '구원'이라는 이름의 '달콤한 죽음'을 선사하고자 끊임 없이 지구에 찾아오지만, 그때마다 사람들은 '복음(에반게리온/기쁨의 소리)'이라는 생체 병기를 이용해 그들의 무너진 세상을 가까스로 지켜냅니다. 하지만 그들이 계획적으로 이용당하는 줄도 모른 채 거짓된 '복음'으로 필사적으로 지켜낸 세상은, 마침내 구원(죽음)을 거부한 대가로 '영원한 생명(인류보완 계획)'을 얻어 '영원한 절망(불멸)'을 마주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일 수 없던 주인공 신지의 마지막 결단으로 자신만이 살아남아 '절망'을 감당하는 대신 인류는 그토록 거부하던 '구원(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모든 생명이 죽어버린 핏빛 '안식'이 내린 별을 '절망에 빠진 이들(신지, 아스카)가 함께 바라보면서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물론 구극장판의 마지막에 대한 해석은 정말 다양하고 천차만별이라 정해진 해답은 없지만, '절망이 곧 삶이고, 죽음이 곧 구원'이라는 점은 작품 여기저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이 되네요.
하지만 역시 '사는 것 보다 죽는게 낫다'는 이 작품 전반의 주제의식은
보편적인 가치관이 아니기에 항상 '정말 그러한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만듭니다.
개인적으로는 에반게리온이 불완전한만큼 작품의 주제도 불완전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이에 대한 생각은 다르겠지만요.
오늘날의 세계는 '외계인'의 침공과는 또다른 역경과 고난의 연속이군요. 에반게리온의 파일럿들처럼 표면적으로나마 세상을 구할 영웅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다는 점에서 어쩌면 에반게리온의 세계보다 더 어둡고 절망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늘 목빠지게 찾는 구원은 요원하고, 당장의 미래도 잘 보이지 않는 이 별에서의 삶. 하지만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절망을 기꺼이 살아나가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람들의 마음 어느 한 구석에 기꺼이 절망을 감당하기를 선택한 '신지'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일면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프로듀서님의 말씀처럼 절망에 대해 싸우거나, 회피하거나 도망치는 것으로는 분명 행복을 찾기는 어렵지만, 절망을 멀리할 수는 있습니다. 세상은 담대한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게 절망을 잠시나마 떨쳐내면서 우리는 조금씩 나 자신을 받아들일 여유를 가지게 되네요.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 불완전한 나 자신, 그리 사랑스럽지 못한 나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서 우리를 그토록 괴롭히는 절망도 나의 삶의 일부가 되고 우리는 절망 속에서도 살아가는 방법을 알게됩니다
절망이 더 이상 나만의 특별한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면,
'특별한 사춘기'를 지나 '평범한 어른'이 되듯이...혹독한 유년기는 끝이 날 것입니다.
후회와 절망 속에서도 기꺼이 살아간다.
삶이란 그런 것 아닐까요....
진지한 고찰과 감상 감사합니다!
...안노가 힘 많이 빠지긴 헀군요. 예전만큼의 통수력도 없고, 그렇다고 떡밥회수를 깔끔하게 한 것도 아니고, 고작 이런 이유 때문에 비상업 2차창작 금지를 했다는 걸 알고 나니까 어이가 없습니다.
상황을 알고 나니까 남은 건 신극장판 제작진이 얼마나 오만과 선민사상에 빠져서 신극장판 시리즈를 제작해 왔는가, 이거 딱 하나네요.
최근 에반게리온과 관련된 일련의 불미스러운 일들로 에반게리온 한국 팸덤에서도 이에 대한 여러 우려를 표명하던 가운데, 갑작스럽다면 갑작스럽게 26년 에반게리온 역사의 마침표가 찍히게 되었군요.
에반게리온이라는 불완전하고도 모호한 작품에 대한 팬 여러분들의 평가와 해석은 늘 엇갈렸지만, 이번 작품만큼 큰 반향과 갑론을박을 이끌어내는 작품 역시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만'과 '선민사상'....늘 별것 아닌 이야기를 크게 부풀려 과장하고, 심오한 척 혹은 현학적인 척 하면서 알기 어렵게 꼬아서 보여주는 에반게리온이라는 작품 전체에 묻어나는 불친절함의 근원이라고 생각이 드네요. 확실히 관객들이 보고 나서 자연스레 주제의식을 깨닫는 작품이 아니라, 관객들이 보고도 당췌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수 없어서, 시간 아까운 토론과 시시콜콜한 분석과 여러가지 해석 끝에 '가설'을 도출해내야 하는 작품은 좋은 작품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별다른 핵심 이야기랄 것이 없어서, 일부러 뭔가 있어보이게 만드는 작품인 에반게리온에서 굳이 어떤 의미를 추출할 바에는 차라리 그만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관심있는 철학 서적을 한 권 읽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세대에 걸쳐 지루하도록 이어져온 에반게리온에 대해서 지금도 사람들이 끝없이 이야기해오고 또 기억한다는 건 이미 그 '난해함'마저도 작품의 일부가 되어버렸다는 의미겠지요.
지금도 의미를 알 수 없는 맥거핀들과 불만족스러운 전개, 원치 않은 결말들로 숱하게 회자될 작품이겠지만 어떻게든 지금까지 이끌어온 작품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는 점은 변치 않는 사실이기에...일단은 그 끝을 축하하고자 합니다.
'에반게리온의 끝'. 어떤 의미에선 더 이상 이런 고통스러운 작품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세상이 진정한 의미의 '신세기'를 맞이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90년대 부터 이어져온 '세기말적 담론'이 비로소 '과거'가 되어버린 시대. 사람들은 또 어떤 이야기들을 이어갈까요.
잘은 모르지만 더이상 '에반게리온'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야 하고 말고요.
아무튼, 이걸로 하나의 시대가 끝났군요. 역시 시대의 끝은 조금은 초라하고, 그렇기에 온갖 설왕설래가 오고가는 법이죠.
한 시대를 풍미한 '현상'의 종언을 보면서
왠지모르게 씁쓸하면서도 속 시원함을 느낍니다.
여타 에반게리온의 팬 여러분들은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26년 동안 쉬지 않고 장광설을 늘어놓은 이 시리즈가
드디어 '침묵'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후에도 에반게리온은 한동안 에반게리온 신칸센,
에반게리온 아파트, 에반게리온 된장국 등 온갖 기상천외한
굿즈들로 살아 숨쉬겠지만 그 역시 언젠가 시들해지며 '끝'이 있겠지요.
그동안 너무나 많은 말들을 해왔기에
저는 이 시리즈의 침묵이 오히려 반갑습니다.
에반게리온이란 말보다 침묵이 더 알기쉬운 작품이니까요.
한 시대가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면...아마 이런 기분일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 수 는 없지만, 어렴풋이 짐작만이 가능한 것이
마치 우리네 삶과 같네요.
어떤 의미로는 90년대의 모든 감정들을 담아 20년대로 전해주는
호불호 갈리는 타임캡슐이라고도 여겨집니다.
이래나 저래나...끝이 좋다면, 결국 다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혹여나 '아, 그런데 말이야...아직 할 이야기가 남았어'라고 어느날 갑자기
에빈게리온 '신신극장판'이라도 다시 제작되는 날에는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서드 임팩트'를 간절히 바라게될지도 모르니까요.
안녕(さようなら), 에반게리온....당신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난 당신을 사랑할 수는 있어요. 고마웠어요. 잘 가요.
그래도 사실 이제 정리하고 싹 접어야 하니까, 거기서도 또 할것처럼 힘주면 안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도 신지가 주변과 많은 걸 주고받으며 어른이 될 수 있었다는 건 다행인 이야기겠죠?
에반게리온식 뒤통수 치기... 태생부터 이 시리즈가 '서비스! 서비스!'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불러모은 관객들에게 잠시나마 헛된 기대감과 또 그만큼의 충격과 공포의 바닥없는 절망을 안겨다 주는 유구한 전통을 가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저 역시 바다 건너 드문 드문 전해지는, 엑스트라 캐릭터의 비중이 뜬금없이 커졌다거나,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버린 상황이 되어버렸다거나, 예상보다 무난한 결말을 맞이했다는 등등의 숱한 결말에 대한 비평들을 들으면서 이 역시 끝까지 일종의 '에반게리온식 서프라이즈'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네요. 이젠 그 식상한 에바식 점프 스퀘어도 끝이겠지만요.
생각해보면 오늘날 우리는 이미 에반게리온이 상상하던 시대 속에 살고 있군요. (서드 임팩트가 일어난 2015년대는 이미 과거가 되었습니다.) 외계인도, 거대 로봇도, 인류를 구원하고자 선택받은 아이들도, 전인류말살 계획(일명 인류보완계획)도 없지만, 인류는 여전히 서로 불신하고 갈등하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점을 보면...비록 에반게리온이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는지는 해석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통해서 '사람들 간의 소통과 교감'에 대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하기에 '에반게리온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20년 묵은 작품이 아주 헛소리만 한 것은 아니지 않나 하고 종종 생각하게되곤 합니다.
어쩌다 마음이 너무 평온해서 문득 복잡한 문제를 생각해보고 싶다거나,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난제에 도전해보고 싶을 때마다 이 문제작 시리즈를 추억하곤 하겠지요. 한 시대 동안 시청자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희로애락을 겪은 소년 신지가 아마 많이 그리울 것입니다. 하지만 신지가 더 이상 외롭거나 고통스럽지 않으리라는 점에선 마음이 평온해지는 결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