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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코미디 마스터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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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24, 2012 15:52에 작성됨.

칸자키 란코라는 이름의 여자아이. 누나의 말대로 특별하다 못해… 심각할 정도였다. 우리 765프로의 녀석들도 개성 하나라면 어디서 지고 들어가진 않는다고 자부한다만, 그 열두 명을 모두 모아놔도 여기 있는 란코에게는 상대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크크… 이 나를 한눈에 알아보다니… 당신도 ‘눈’의 주인이라는 뜻이겠지요? 나를 스카우트했던 그 여자처럼.”

뭐야… 몰라 이런 거… 무서워…
대답해야 할 말을 찾지 못해 그냥 대충 얼버무리고 집으로 향했다. 876프로덕션의 프로듀서는 대체 누구길래 이런 녀석을 스카우트한 걸까.
카에데 누나. 정말 이런 녀석과 듀엣해도 좋은 거야?

그 이후, 집에 오는 동안 란코도,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는 내내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려움에 떨었던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를 누나에게 맡겨버리고 도망갈 곳을 찾았다. 여기서 저 아이의 말을 계속 듣다간 미쳐버릴 것 같다.

“란코와 함께라면 안심이야.”

“후후훗… 나의 벗 카에데. 그대가 원한다면 나의 힘. 모두 보여드리지요. 하지만 조심하시길. 심연의 저편은 그대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건 틀렸어. 여기서 빠져나가야겠다. 카에데 누나는 어떻게 저런 아이와 말이 통하는 걸까.
누나에게 급하게 저녁 약속이 생겼다고 둘러댄 다음 집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런데 막상 나왔더니 딱히 갈 곳이 없었다.

“하아…”

어쩔 수 없이 그냥 복도에 서서 밖을 내다보며 근처 식당이나 패스트푸드점에서 혼자 저녁을 해결해야 하나, 생각하던 중 옆집 문이 열리고 치하야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프로듀서?”

“오. 치하야.”

“왜 이런 곳에 계신가요?”

아직 내가 누나와 같이 살고 있다는 건 765프로의 그 누구도 모르는 상태다. 바로 옆집에 사는 치하야조차 모를 정도면, 내가 얼마나 보안을 철저히 했는지 대충 알겠지.

“어… 집에 벌레가 들어온 것 같아서 말이지. 살충제 뿌려놓고 나왔어. 그런데 그러는 넌 어디 가는 거야?”

“저는… 저녁 찬거리를 사러 가려고요.”

“이 시간에? 흐음…”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 같다. 평소에 몰랐던 치하야에 대해 알 기회가 생길지도 몰라. 예전 같았으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프로듀서로서 아이돌을 돌봐야 한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좋아. 같이 가자.”

“예?”

“좋잖아. 마트까지 가려면 이 더운 날 꽤 걸어야 한다고. 차로 가면 금방이지.”

“하지만, 폐를 끼칠 수는…”

“폐라니. 난 한 번도 너희들이 폐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 폐는 숨 쉬는 게 폐인데 폐를 어떻게 끼치겠다는 거야?”

치하야는 내 말에 뒤늦게 반응을 보이더니,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이 녀석이 갑자기 뭐하나 봤더니,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쿡쿡거리며 낮은 소리로 웃고 있었다.
설마. 이 녀석. 아저씨 개그가 취향이라는 건가.

“거 참 독특한 웃음코드를 가지고 있구만. 어쨌든, 빼지 말고 가자고.”

차키를 흔들어 보이며 먼저 움직였더니, 치하야도 더 이상 뺄 분위기가 아니라고 느꼈는지 순순히 내 뒤를 따라왔다. 다른 녀석들은 혼자 내 차에 타게 될 땐 무조건 조수석인데, 이 녀석만은 아직도 뒷좌석을 고수하는군.

“저녁 메뉴는?”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엥? 대충 찬거리 사러 가기 전에 뭐 먹을지 정해놓는 건 기본이잖아.”

“그런가요. 하지만 저. 이렇게 직접 해먹게 된지는 얼마 되지 않으니까요.”

“…그럼 그 전까지는 줄곧 혼자 어떻게 살았던 거야.”

“편의점…”

이 녀석은 도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던 거야.

“언제부터 직접 만들어 먹기 시작했는데?”

“저번에 출연했던 프로에서 만들기 시작한 다음부터 가끔 스스로 만들어보기도 했어요.”

“그럼 그 전에는 계속 편의점 신세만 졌다는 거야? 그걸로 돼?”

“네. 영양제도 함께 먹으니까.”

치하야는 그걸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이야기했다. 마음 같아서는 ‘니가 그래서 그렇게 말라빠진 거야. 덤으로 가슴도 없고.’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니. 싶었던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목까지 차올랐었다. 하지만 난 결국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치하야가 이런 농담을 싫어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언제 상대가 그 말을 듣기 싫어한다고 안하는 사람이었나.

내가 그 말을 하지 못한 까닭은 단지, 그 말을 할 때 치하야의 표정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을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기에, 그 표정에 질려버린 까닭이었다.

“너…”

“네?”

“아니. 아무 것도 아니다. 잘 좀 챙겨먹어. 앞으로 더 바빠질 테니까.”

치하야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이 녀석.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저번까지만 해도 나는 분명 타인이었다지만, 지금의 나는 이 녀석의 프로듀서다. 내가 뭔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치하야의 눈을 보면 그럴 생각도 사라지고 만다. 이 녀석의 눈. 왠지 그때의 나를 보는 것 같단 말이야. 신뢰라는 걸 아예 잊어버린 눈이라고 할까. 이 상태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던 들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도 그랬었으니까.
내가 미키를 만났을 때처럼, 뭔가 계기가 필요했다.

마트에 도착해 카트를 끌고 치하야의 뒤를 따랐다. 치하야는 아직도 저녁메뉴를 정하지 못한 듯, 우물쭈물 거리고 있었다.

“카레로 해, 카레.”

“카레는… 아직 만들어본 적이 없어요.”

“이런 세상에. 독거생활 메뉴의 기본 중 기본인 카레를 안 만들어봤다고?”

“애초에 제가 스스로 만들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고…”

“좋아. 그럼 오늘 내가 카레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지.”

치하야는 마치 특유의 무표정에 놀라움만 아주 살짝 끼얹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만들 줄 아시나요?”
“당연하지. 날 뭘로 보는 거냐. 이래보여도 독거생활 4년차라고. 자. 알겠으면 카레로 하자고. 프로듀서 요리교실. 교습비는 외상으로.”

“외상…인가요.”

“그래. 언젠가 네 목소리가 전 일본을 매료시킬 때가 되면 갚는 걸로. 어때?”

치하야의 표정이 이번엔 약간 복잡한 것으로 바뀌었다. 확실히 프로듀서가 되고 나서 이 녀석의 다양한 표정을 보게 되는군.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네. 반드시.”

“좋아. 그럼 됐군. 가장 먼저 정육 코너로!”

“에엣? 자, 잠깐만요!”

카트를 끌고 신나게 내달렸더니, 치하야가 당황해서는 나를 쫒아왔다. 역시 이 녀석은 저번 야요이 때도 그렇고, 갑자기 감정이 급변할 때가 귀엽다. ‘그래. 이래야 이 나이 대 여자아이답지.’라는 느낌이라고 할지.

어떻게든 장을 다 보고 맨션에 도착했다. 그래도 한 번 와봤답시고 우리 집에 가려는 치하야를 어떻게든 설득해(아직 집에 란코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치하야의 집에 방문하게 됐다.

“그럼, 누추하지만.”

“아아. 실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려다 나도 모르게 얼어붙었다. 방이 누추한 정도가 아니라 완벽한 살풍경 그 자체였다. 짐으로 추정되는 아직 열지도 않은 박스에, 조리 기구들에는 비닐이 씌어져 있는데 얼마나 쓰지 않으면 저런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PC는커녕 TV도 없는 건 덤이었다. 거실에 있는 것이라고는 침대와 테이블과 오디오 플레이어뿐이었다.

“프로듀서?”

멍하니 서있는 나를 보며 치하야가 무슨 일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은 고사하고 풀포기조차 자라지 않을 것 같은 집에서, 이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요즘 잊고 지냈던 1년 전의 내가 다시 생각나서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속이 쓰렸다.

“프로듀서? 무슨 일이라도?”

“아, 아냐. 배도 고픈데 바로 시작하자.”

어떻게든 웃는 게 좋겠지. 어떻게든.내가 물을 올리는 동안, 치하야는 서툰 손길로 감자를 썰기 시작했다. 뭔가 아슬아슬한 게, 보는 내가 다 손가락이 서늘했다. 결정적으로 속도 역시 느렸다.

“아직 멀었군. 비켜라. 내가 보여주지.”

치하야를 가스레인지 쪽으로 밀어내고 내가 도마 앞에 섰다. 당근을 하나 꺼내 도마 위에 올려놓은 다음,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스피드로 당근을 썰기 시작했다.

“당근을 당근당근당근당근당근당근당근당근당근당근당근!!!!”

치하야의 놀란 것 같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후후. 이 정도 스피드일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겠지.

“양파를 양파양파양파양파양파양파양파양파양파양파양파!!!!”

그렇게 당근 한 개와 양파 한 개를 미친 듯이 썰어버린 다음에 무언가 깨달았다. 카레에 넣을 건데 깍둑썰기가 아닌 채썰기를 해버렸다는 사실을.

“…이건 이것대로 맛있겠지.”

“프로듀서…”

나를 한순간 동경의 눈으로 보았던 치하야는 이내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게 되었다.

“괘, 괜찮아. 성공은 실패의 아들이라고 하니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아닌가요.”

“그게 그거잖아. 그러면, 대체 성공의 아버지는 누구야? 아버지 없이 어떻게 아이를 낳은 거냐고.”

치하야는 침묵했다.
나 역시 침묵했다.
한동안 집 안에는 물 끓는 소리와 무언가를 써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게 되었다. 쳇. 어째서 아까랑 똑같은 아저씨 개그에 웃지 않는 거야.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합장을 한 후에 곧바로 한 수저 떠서 입에 넣었다. 카레를 만드는 건 오랜만이었지만 그것에 비하면 꽤나 만족스러운 맛이었다.

“어때. 괜찮은가.”

“네. 맛있네요.”

“다행이네. 조금 걱정했었는데, 만드는 법은 익혀뒀지? 앞으로 생각나면 만들어 먹도록 해. 이 프로듀서 표 카레는 본고장 인도에도 없는 맛이라고.”

아. 또 웃었다. 대체 이 녀석의 웃음 포인트는 뭐지. 종잡을 수가 없구만.
그러고 보면, 프로듀서가 된 이후에도 공부에만 매진하느라 이 녀석들에 대해 알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했다. 물론 그동안 친하게 지내왔던 게 있으니 대충 파악은 해놓고 있지만, 그래도 막연히 아는 아이돌이 아닌 내가 직접 프로듀스 해야 할 아이돌이 됐으니, 이 녀석들에 대해 더 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제 막 첫걸음을 뗀 페어리의 멤버들에 대해서는 더더욱.
아아… 페어리를 생각하니 또 골치가 아파진다. 내가 어떻게 해야 그 녀석들을 조금이라도 더 빛나게 할 수 있는 걸까.

“아…”

“응? 왜?”

“페어리…”

아. 내가 아무래도 생각하던 걸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은 모양이다.
치하야. 설마 이 일에 대해 신경 쓰고 있던 건가.

“오늘 연습하는 걸 들었어요.”

“아. 우리도 너 연습하는 거 들었어. 설마 우리가 네 연습에 방해되었던 거야?”

“아뇨. 그건 아니지만…”

그렇다면 이 녀석 혹시.

“페어리. 들어가고 싶었던 거야?”

치하야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 녀석의 표정을 봐서는 역시 페어리에 미련이 있다는 느낌인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봐.”

“약간은… 노래. 부르고 싶었으니까요.”

“역시 그건가.”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 모두의 앞에서 프로젝트 페어리의 결성을 발표했을 때, 치하야는 평소의 무뚝뚝함과는 다른, 약간 아쉬운 기색이 감도는 표정을 보였던 게 기억났다. 그야말로 약간이긴 해도, 표정을 읽는 것에 대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내가 놓칠 리 없는 변화였다.
사실. 페어리의 멤버 세 명을 히비키, 타카네, 미키로 정한 이후에도 치하야는 마지막까지 내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보컬능력에 있어서는 765프로의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능력을 지닌 녀석이 치하야니까. 게다가 같은 멤버로 어느 누구든 스스럼없이 대하는 히비키와 치하야를 존경하는 미키가 있으니까, 타카네 대신 치하야를 넣어도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결국 타카네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프로젝트 페어리는 꽤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프로젝트야. 다음 달의 아이돌 페스티벌을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면, 그땐 페어리를 시작으로 너를 포함한 나머지 녀석들도 높은 곳으로의 길이 열리게 될 거야.”

치하야는 아무 말 없이 내 말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나도 너를 페어리 멤버에 넣는 것에 생각했었지. 하지만 넣지 않은 건 다 너를 위해서야.”

“저를… 위해서요?”

“그래. 너를 위해서. 페어리는 765프로의 선두야. 그러니까 앞으로 아이돌 페스티벌에서 노래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다방면에 걸쳐 활약을 해서 우리 765프로를 홍보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해.”

치하야는 그제야 내가 말하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인 것 같았다.

“그 게로게로 키친 이후에 내가 너에게 ‘넌 아이돌이야?’라고 물었었지. 그때 넌 보컬리스트라고 대답했어. 그리고 그 이후에도, 너는 아이돌이 할 다른 일보다는 노래 하나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내게 보여줬지.”

그녀의 표정이 점점 어둡게 물들어가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이 녀석도 아마 미키를 만나기 전의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녀석도 나와 비슷하구나.

“내가 처음 미키를 만난 날. 나는 아무 미래도, 계획도 가지지 못했던 사람이었어. 프로에서 은퇴를 하게 된 이유. 너에겐 이야기하지 않았지?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어. 그 얘기를 미키에게 해줬더니 나에게 미키가 그러더라. ‘역시 자기가 편한 게 제일 좋지?’라고.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내가 너를 페어리에 집어넣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거야.”

치하야의 고개가 다시 천천히 나를 향하는 것을 보고 나는 피식 웃었다.

“물론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지. 하지만 될 수 있으면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좋아. 그렇지? 난 그걸 잘 알고 있으니까. 너에겐 최대한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주고 싶어. 너에게도. 그리고 다른 녀석들에게도.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줘. 페어리를 반드시 성공시킨 다음, 너는 될 수 있으면 노래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줄 테니까. ‘고고의 가희. 드디어 데뷔!’ 라는 걸로 말이지. 물론 그땐 네가 날 실망시키지 말아야겠지만.”

“………”

“왜. 더 묻고 싶은 말이라도?”

“…솔직히. 프로듀서가 저희들의 프로듀서가 된다고 했을 때, 그다지 프로듀서의 능력을 믿지는 않았었어요.”

“직격이구나. 뭐. 당연하겠지. 나라도 믿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프로듀서는 의외로 생각이 깊으신 분이셨군요. 능력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겠지만.”

“칭찬은 고맙다만, 의외로는 빼. 어째서 의외로냐.”

치하야가 처음으로 나에 대해 평가해 주었다. 어떻게 보면 놀리는 것 같긴 하지만, 상대가 치하야라는 걸 감안하면 저것도 대단한 찬사라고 생각한다.

“자, 자. 미래설계는 나중에 더 하고, 일단 밥부터 마저 먹자고. 카레는 식으면 맛없어.”

“프로듀서.”

“응.”

“기회가 주어진다면, 온 힘을 다해 노래하겠습니다.”

“그래. 나도 힘낼게. 아까 말했던 것처럼, 네 목소리가 전 일본에 퍼질 수 있도록.”

“네.”

“아. 그래도 어디까지나 ‘최대한’ 노래만 할 수 있게 힘써준다는 거지, 그렇다고 다른 분야를 완전 등한시할 생각은 하지 마. 내가 프로듀스 하는 동안 저번 게로게로 키친 때 같은 표정 한 번만 더 했다간 확 엎어버릴 거야.”

“마, 많이 반성했어요, 그때는.”

“그때 정말 하루카가 커버 안쳐줬으면 어떻게 됐을지… 평범한 시청자의 입장이었던 나조차 등골이 서늘했다고, 너 그때 많이 혼났지?”

“그, 그만하고 어서 먹죠, 우리. 카레는 식으면 맛없잖아요.”

당황하는 치하야가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더니, 그녀는 곧 왜 웃느냐는 뜻으로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역시나 카레는 거의 식어있었지만, 기분 탓인지 아까보다 더 맛이 좋은 것 같았다. 이걸로 치하야와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면 더 좋을 텐데.

카레를 다 먹고, 뒷정리까지 다음, 다시 한 번 거실을 휘 둘러보았다. 다시 봐도 이 나이대의 여자아이가 사는 집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살풍경했다. 다음에 다시 방문하게 되면 화초라도 사오는 것이 좋을까.
오디오 플레이어 주변에는 갖가지 음악 CD들로 가득했다. 주로 클래식이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그 밖에도 가스펠이나 팝페라, 성악, 이것저것이 있었다. 정말이지 음악을 좋아하는 녀석이라고, 새삼 생각했다.

“그럼 난 이만 돌아갈게.”

“아, 프로듀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 신발을 신고 있는데, 치하야가 현관 앞까지 걸어왔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오늘은 여러 가지로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나는 네 프로듀서인데다 크세르크세스 뺨칠 정도로 관대한 사람이니까.”

“…그건 누구죠?”

“고대 그리스 시절의 페르시아 음악가.”

“정말인가요?”

“그래. 그 사람이 바로 불타는 로마를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다는…”

“거짓말이었군요.”

“…그래. 농담이었어.”

억지로 끼워 맞추긴 했다만, 한 번에 알아채다니, 그러고 보니 이 녀석. 공부를 그럭저럭 했다고 했지.

“어쨌든, 아까 말했지? 네가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면, 전 일본을 울린 다음에 어떻게든 갚아봐.”

“네.”

“좋아. 그럼 내일 아침에 보자고.”

치하야의 집을 나와 내 집으로 들어가니, 란코는 어느새 가버린 것 같았다. 정말 무서운 아이야. 다시 만나기 꺼려진다고 할까.

“누나.”

“응?”

“진짜 그 애랑 듀엣하는 거 괜찮겠어?”

“괜찮아. 란코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무서운 아이가 아니란다. 어느 쪽이냐면 귀엽다고 할까.”

그랬지. 누나도 범상치 않은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정말 파란만장한 듀엣이 되겠군. 두 사람의 무대는 나중에 언제라도 한 번 꼭 보고 싶다.
나나 누나나, 앞으로 고생문이 훤해 보이는구만.



다음날. 어김없이 나와 페어리의 세 사람은 방음이라고는 개뿔도 안 되는 연습실에서 신나게 노래와 춤 연습에 매진했다. 그나마 오늘은 옆의 연습실을 쓰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할까.

“멍청하군, 히비키! 대체 트레이너 씨에게 뭘 배운 거냐! 그 정도 동작은 나도 할 수 있겠다!”

“웃기지마! 할 수 있다면, 내 앞에서 보여보라구!”

“좋다. 봐라. 필살의 공중 3회전-!!”

“이제 알았어! 프로듀서 바보지? 바보인거지? 거기서 공중 3회전이 왜 나와! 게다가 3회전은커녕 1회전도 못하잖아!”

“바보에게 바보 소리를 듣다니, 이것 참 기분이 상쾌하구나!”

“누가 바보야-! 그건 내가 할 말이라구!”

“후후훗…”

“…미키. 이제 자도 되지?”

대충 이런 식이었지만, 다들 잘 하고 있으니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 2일차일 뿐이고.
오늘의 일과를 마치기 직전, 사장님으로부터 급한 호출을 받았기에 세 사람에게 시간이 되면 알아서 돌아가라고 지시해둔 뒤 사장님과의 약속장소로 이동했다. 꽤나 고급스러운 카페였는데, 사장님과 처음 보는 사람이 앉아있었다. 사장님의 말로는 꽤 지명도 높은 케이블 프로그램의 PD라고 했다.

“물론 본방은 아이돌 페스티벌이긴 하지만 말일세. 그 전에 어느 정도 우리 페어리의 인지도를 높여야 하지 않겠나.”

페스티벌과 그 이후만 생각했던 나로서는 생각 못한 일이긴 하지만, 확실히 맞는 말이다. 될 수 있으면 여기저기 얼굴도장을 찍어놔야 페스티벌 때 더 유리하겠지.
그나저나, 사장님 꽤나 수완가시구나. 벌써 이런 건을 물어오시다니.
PD라는 사람에게 페어리의 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 다음, 그에게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과 시간 장소 등 잡다한 것을 들었다. 설명을 들어보니 예의 음악토크쇼인 것 같은데. 앞으로 닷새 후인가. 조금 빡빡하긴 하지만, 지금 익혀가는 페이스를 볼 때…
아냐. 뭔가 다른 방법이 있을 거다. 페스티벌 때 터뜨려야 할 오버 마스터를 벌써 보여줄 수는 없지. 그리고 시간상 오버 마스터 한 곡으로 때울 수도 없다. 그러니 이 프로그램에선 각각의 장점을 부각시킬 수 있는 솔로곡으로 하자. 마침 세 사람 모두 전용 솔로곡이 있으니까.

PD와의 이야기를 마치고, 사장님은 또 어디론가 가실 곳이 있다고 하셔서 혼자 차를 타고 돌아오기로 했다. 예상보다 빨리 페어리를 세상에 알릴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괜히 마음이 들뜨는 게, 비록 프로듀서가 된지 20일도 안됐지만 이제 나도 진짜 프로듀서가 됐나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세 사람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일단 사무소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오토나시 씨가 전화를 받아, 자고 있는 미키를 제외하고는 다들 집에 가거나 해서 아무도 없다는 말을 해주었다. 이 녀석들. 정말 다 가버린 건가?
일단 전화를 끊고, 차의 시동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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