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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코미디 마스터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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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05, 2012 12:03에 작성됨.

홈런으로 0-4가 된다는 생각을 물론 아예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아까 마운드 위에서 히비키에게 말했던 것처럼.
근데 솔직히 진짜 칠 줄은 몰랐지. 아무리 구장이 작다고 해도 저 무지막지한 타구는… 농담 조금 보태서 여기가 도쿄돔이었다고 해도 넘어갔을만한 타구였다.

어쨌든,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다. 노아웃에 주자 없는 상황이니, 점수 차는 생각하지 말고 지금부터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일부러 히비키에게 들리도록 박수를 크게 치며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부담을 덜 갖도록 큰소리로 격려했다. 지금까지 목소리로 들킬 염려가 있어 방송에까지 들릴 만큼 크게 말을 하는 건 삼갔지만, 울기 직전인 히비키의 표정을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다행히 아즈사 씨가 마운드로 올라와 특유의 치유스킬로 히비키를 어찌 진정시켜주었다. 그 덕분인지 히비키는 더 이상의 실점 없이 이닝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나는 히비키가 덕아웃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불러 세워 양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잘 들어라. 가나하 히비키.”

“으, 으응.”

“정면승부는 내가 지시했어. 충분히 쟤를 거르고 5번부터 상대했으면 막을 수 있었던 것을 내 판단미스로 맞은 거야. 백 프로 내 책임이니까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고 던져. 알았어?”

“하, 하지만…”

“알았냐고.”

내 단호한 말에 히비키는 한참 망설이더니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다음 대답했다.

“알겠어.”

“점수는 공격할 때만 신경 써. 던질 때는 신경 쓰지 말고. 0대0이라는 생각으로 던져. 지금 점수 준 건 다시 되돌리지 못해. 알고 있지?”

히비키는 덕아웃에 막 들어왔을 때보다는 나아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2회초 우리의 공격이 히비키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나는 여기까지 하고 히비키를 보내주어야만 했다.
그녀는 곧 타석에 들어서, 저쪽의 선발인 료를 상대로 풀카운트 승부 끝에 우중간을 가르는 2루타를 치고 나갔다.

선두타자가 살아 나갔는데, 유키호부터 이어지는 다음 타순은 료의 빠른공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할 것이 뻔한 녀석들뿐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성적이 좋은 녀석들을 좀 균등하게 배분해 놨어야 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봤자 늦은 일이다. 정말이지 마코토의 부재가 뼈아팠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아…”

예상대로 유키호는 료의 공을 건드려보지도 못하고 삼진. 유키호도 키라리와 마찬가지로 걸리기만 하면 장타를 노려볼만 한데, 이번회의 거의 유일한 찬스가 날아가 버렸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건 히비키가 3루 도루를 성공했다는 것일까. 앞으로 남은 순서는 아즈사 씨와 이오리. 아즈사 씨의 타격은 알다시피 절망적이고, 그나마 이오리가 있다지만 료의 속구까지 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4회까지 치러지는 이번 대회 특성상, 2회인 지금부터 차근차근 따라가지 못하면 승산이 더 없어진다. 게다가 이오리에서 공격이 끝나게 되면 다음 3회초 타순은 8,9번부터 시작하게 된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우리가 점수를 낼 기회는 4회에나 찾아온다는 거지.

여기서 아즈사 씨가 살아나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되는 거다. 설령 여기서 점수를 못 낸다 하더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 한 명이라도 더 살아나가야 다음 회 공격 때 유리한 타순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
아즈사 씨. 제발 부탁합니다.

하지만 내 간절한 바람도 헛되이, 아즈사 씨는 완벽하게 느린 스윙 타이밍으로 여유 있게 볼카운트 2-0으로 몰렸다. 이대로 삼진아웃인가. 어차피 아웃될 거면 공 하나라도 더 던지게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는데.

아즈사 씨가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배트를 어색하게 휘두르며 다시 타격자세를 취하려는 순간,

“아즈사 씨--!! 힘내세요!!!”

옆에서 폭발하는 듯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름 아닌 야요이였다.
그것을 시작으로 다른 녀석들의 목소리 또한 높아져가기 시작했다.

잠시 배터박스에서 떨어져 그 광경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아즈사 씨는, 곧 예의 그것처럼 걱정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표정으로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심판이 지시한 후에야 우리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배터박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달라진 모습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뭐가 달라진 것 같은데, 뭔지 모르겠군. 여기서 기적적인 적시타를 바라도 되는 건지.

하지만 그녀는 결국 공을 때려낼 수 없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아즈사 씨의 왼다리가 풀썩 꺾였다. 나는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그때를 되짚어보면 내가 생각해도 무시무시한 반응속도인 것 같았다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아즈사 씨!!”

나는 물론 리츠코와 다른 녀석들과 심판과 포수인 키라리와 료까지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엉덩방아를 찧은 아즈사 씨를 향해 달려갔다. 뭐. 심판이랑 포수는 그자리라서 달려갈 이유가 없지만.
아즈사 씨를 향해 달려가는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분명 다리 쪽 어딘가를 맞았는데, 그게 정강이일 경우 아무리 연식구라고 해도 부상의 위험이 크다.

“아야야….”

“괜찮으세요? 어딜 맞은 겁니까?”

“여기… 허벅지 쪽을.”

그나마,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아즈사 씨가 가리킨 곳은 살이 많은 허벅지 뒤쪽이었다. 저기라면 멍이 드는 걸로 끝난다. 비록 그 멍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일단 교체합시다.”

여기서 또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악재가 겹치고 겹치는구만. 어쩔 수 없이 타카네를 포수로 넣고 어제 경기처럼 치하야를 유격수에, 그리고 하루카를 2루에 넣기로 했다. 어제의 에러연발이 생각났는지 불안한 표정을 짓는 하루카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던 건 덤이다.

이번 일로 인해 5분간 추스를 시간을 주었기에, 나는 모두를 덕아웃으로 불러들였다. 이건 분명 우리에겐 호재다. 상대 투수의 어깨가 식어 제대로 된 공을 못 던질 수도 있기 때문에, 원래 프로야구였다면 상대 감독이 미친 듯이 반대했겠지만, 저쪽 프로듀서가 그 사실을 알 리도 없고, 애초에 이건 예능이다.
그래. 예능 말이지.

우리 덕아웃까지 따라와서 연신 고개를 숙이는 료와 키라리를 돌려보낸 다음, 일단 짚고 넘어갈건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아즈사 씨.”

“네에-?”

“일단 혼나야겠습니다.”

“에에? 어째서인가요.”

“일부러 맞았죠?”

내 말에 주변에 있던 녀석들이 놀라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집게손가락을 입에 대어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한 다음, 아무 말 없이 아즈사 씨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어색하게 웃으며,

“그, 그럴 리가요. 이렇게 아픈데 어떻게 일부러….”

“증거는 꽤 있지만 그 중에서도 두 가지를 들죠. 첫째.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야요이와 모두의 응원이 있었던 이후에 다시 배터박스에 들어왔을 때는 평소보다 더 홈 플레이트 쪽으로 바싹 붙어있었어요. 내가 위화감을 느꼈던 게 생각해보니 그거였어. 그리고 둘째. 맞는 순간은 자세히 못 봤지만, 허벅지 뒤쪽에 공을 맞았다는 건 피하려는 동작을 취한 게 아니라, 피하지 않고 맞으려고 갖다 대려는 동작을 취했을 때 그쪽에 맞게 되니까. 진짜 피하려거나, 피하려고 했는데 피하지 못했었더라면 허벅지 앞쪽이나 옆에 맞았겠죠. 이래도 발뺌하실 겁니까.”

“어머나….”

“제 전직을 생각해보세요. 변명은 안 통합니다.”

그제야 아즈사 씨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역시 야구선수 씨 앞에서 야구에 대해 둘러대는 건 무리군요. 우후훗.”

“우후훗. 이 아닙니다. 대체 왜 맞은 겁니까? 자신이 아이돌이라는 걸 자각하셨어야죠. 앞으로 며칠, 길게는 몇 주 동안 무대의상으로 미니스커트는 입지 못할 테고, 댄스에도 지장이 있을 테고, 무엇보다 제가, 이 녀석들이 그 짧은 순간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신다면 그렇게는 못했을 겁니다. 제 스스로 그걸 자꾸 인식하지 못했던 것만큼 계속해서 강조했던 것. 여기 있는 사람들은 야구선수가 아니라 아이돌입니다.”

“네. 알고 있답니다.”

“그럼 대체 왜?”

“그래도… 저희들. 아직 모두 함께 무언가를 해본 일이 적어서, 여기서 우승을 하면 나중에 모두가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추억거리가 생기지 않을까,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저 운동신경도 둔하니까, 제가 팀의 우승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렇게라도 출루해서 다른 아이들에게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뿐이겠지요.”

말문이 막혔다. 솔직히 말하자면 0-4로 벌어진 시점에서 마코토가 경기 끝날 때까지 오지 않는다면 너무 무리하지 말고 적당히 지는 것도 괜찮겠다. 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니까. 보는 사람들에겐 예능일지 몰라도, 이 녀석들. 적어도 아즈사 씨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눈을 감고 한숨을 한 번 푹 쉬어보았다. 슬슬 준비하라는 심판의 콜 역시 들려왔다. 나는 경기가 재개되기 전에 한마디를 해야만 했다. 순간 망설였지만, 역시 지금까지 먹어온 욕에 비하면 이 경기가 끝나고 들을 욕은 아무 것도 아니겠지.

“잘 들어.”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향하는 것을 느끼며, 나는 다시 한숨을 쉬고 눈을 떴다.

“리츠코. 괜찮겠어?”

“뭐…가요?”

“지금부터 내가 지시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할 거야. 설령 네 사촌동생에게 피해가 갈지라도.”

“에…?”

“물론 이 경기에 한해서야. 뒤탈은 없어.”

“그렇다면야… 괜찮지만요.”

“좋아. 타자들. 지금부터 무조건 배터박스 가장 안쪽으로 붙어. 이제부터 쟤한테 몸 쪽은 없다.”

프로야구에서 내노라 하는 투수들조차 거의 본능적으로 몸 쪽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멘탈이 강한 투수라고 해도 일부러 지시한 빈볼이 아닌 우발적인 사고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다만 그걸 극복하고 제대로 몸 쪽 제구가 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좋은 투수와 그렇지 못한 투수가 가려지기도 한다.
하물며 선수도 아닌, 공을 잡아본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여자아이가 자신보다 연상의 여자를 맞췄다. 지금쯤 료는 정신적으로 엄청나게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우리 덕아웃까지 와서 거의 도게자 수준으로 고개를 숙였는걸. 그런 상황에서 바로, 게다가 다음 타자는 아즈사 씨보다 키가 훨씬 작은 이오리다. 이런 상황에서는 절대 몸 쪽으로 못 던지지. 노골적으로 바깥쪽으로 빼려고 할 거다.
야구는 멘탈의 스포츠. 상대가 심리적으로 흔들린다면, 그걸 물고 늘어질 뿐이다.

“알겠지? 안쪽에 딱 붙어서, 노리는 코스는 무조건 바깥쪽이다. 스트라이크 존은 지금까지보다 더 좁혀. 들어오면 치고, 아니면 골라 나간다. 라는 생각으로 해.”

모두에게, 그리고 특히 다음 타석인 이오리와 야요이에게 더 강조했다. 평소 같았으면 ‘감히 나에게 명령…’ 운운했을 이오리도 아즈사 씨의 말과 그 이후의 내 태도에서 무언가 느꼈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지. 이오리니까, 누구보다 지기 싫어하는 이오리니까 지금의 어느 누구보다 더 간절한 마음일지 모른다. 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에서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겠지.

“플레이볼-!”

“부탁한다! 이오리!”

내 외침에 이오리는 고개를 뒤로 돌려 나를 바라본 후, 헬멧을 쓰며 예의 소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잘 보고 있어. 이 이오리쨩에게 못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니까!”

1사 주자 1,3루. 이오리는 마치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타석에 섰다. 저렇게 큰소리까지 쳐대는데 한 번 믿어 봐도 되겠지.
료는 역시나 초구를 바깥쪽으로 뺐다. 예상대로였다. 원 볼.
그리고 여기서 모두가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이오리가 번트 모션을 취한 것이다. 기습 스퀴즈도 아닌, 3루 주자를 들여보내고 자기는 죽겠다는 의도의 자살 스퀴즈인가. 하지만 확실히 해 볼만 했다. 상대는 우리와 마찬가지인 아이돌 팀이기 때문에, 어쩌면 수비 실수로 이오리의 생존까지 노려볼 수 있는 작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녀석들 의외로 수비 포메이션이 좋잖아. 이오리가 번트 모션을 취하자마자 1루수와 3루수가 홈으로 전진하는 것이 보였다. 이대로라면 번트를 어디로 대든 홈에서 아웃당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나는 바로 우리 덕아웃을 마주보고 있는 1루의 하루카를 향해 투수가 투구를 하는 것과 동시에 뛰라는 사인을 보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이오리의 판단 뿐, 제발 번트를 절묘한 곳에 댔으면 좋겠는데, 아니. 애초에 이 녀석에게 내가 번트를 가르쳐 준 적이 있었던가?

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이오리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다시 한 번 경악시켰다.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번트슬래시!!!”

페이크 번트 앤 슬래시. 말 그대로 번트 모션을 취하던 타자가 기습적으로 다시 타격자세로 바꿔 투수의 공을 쳐내는 것을 말한다.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번트 모션에서 투수가 공을 던지는 순간에 타격자세로 바꿔 공을 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저 녀석 대체 뭐지?
타구는 전진수비를 하던 1루수의 키를 넘겨 원래 1루수가 있어야 할 곳에 떨어진 다음 외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당연히 번트를 댈 것이라고 예상했던 876프로의 모든 수비수들은 허를 찔려 한 박자씩 반응하는 것이 늦어졌고, 그 틈에 3루 주자 히비키는 여유 있게, 1루에 있던 하루카도 졸지에 히트 앤드 런이 먹힌 상황이 된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홈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이오리의 2타점 적시타가 터진 것이다.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던 갑작스런 상황에 멍하니 있던 우리들은 하루카가 홈에서 세이프 판정을 받은 다음에야 환호성을 지르며 난리법석을 피우기 시작했다.

1회초 가장 기대할 타선의 삼자범퇴와 1회말 4실점으로 인해 착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가 아즈사 씨의 말과 이오리의 말도 안 되는 재치로 인해 다시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나저나, 저 녀석 저건 어떻게 한 거지? 나도 가르쳐준 적 없는데.”

“이오리쨩. 틈틈이 혼자서 연습했던 모양이에요.”

내 혼잣말에 대기타석에 서있던 야요이가 마치 자기가 해낸 것처럼 기뻐하며 말했다.

“765프로의 모든 일에 앞서 나가야 할 자기가 걸림돌이 될 수는 없다면서, 그동안 같이 연습하면서도 항상 시간 날 때마다 혼자 연습하고, 저에게 물어보고, 저랑 같이 야구장도 직접 가고는 했어요.”

역시나 녀석의 지기 싫어하는 마음이 만들어낸 건가. 그러고 보면 지난 경기에서 붕괴된 외야를 거의 혼자 책임지다시피 했던 것도 이오리였다.
결국 그 다음 타자인 야요이와 아미가 범퇴로 물러나고 말았지만, 아까 전에 점수를 못내도 좋으니 한 명이라도 살아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 떠올리면 지금의 2점은 정말 큰 점수였다.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2점 정도는 금방 따라잡을 수 있다. 게다가 다음 공격은 다시 1번부터 시작이다.

히비키 역시 기세가 올랐는지 8,9번을 연속삼진으로 잡고 투아웃. 1번 타자인 카에데 누나가 친 좌측 깊숙한 타구를 아미가 전력질주로 달려가 간신히 잡아냈지만 달려가던 속력을 못 이겨 데굴데굴 구르고 말았다. 다행히 살짝 까진 걸 제외하고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 아미를 마미와 교체하기로 했다.

“헤헷. 아미. 구르면서도 끝까지 공 놓치지 않고 있었다구? 오빠가 말했던 것처럼.”

“그래. 잘했어. 고맙다.”

기특해서 머리를 쓰다듬었더니, 평상시와 같이 밝게 웃었다. 이 녀석들 모두 할 생각 만만이구나.
나는 3회초 공격의 시작인 그 녀석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하고 쓱 봤더니, 헬멧을 쓰고 배트를 땅에 짚은 채로 쭈그려 앉아 멍하니 대기타석에서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추억…인거네.”

“뭐하고 있어? 슬슬 배터박스로 가지 않으면.”

“미키. 생각하고 있었어.”

“무엇을?”

“미키의 접근 방법이 달랐던 걸까나. 하고. 춤추거나, 노래 부르거나 하는 건 분명 재미있는 일이지만, 야구는 보는 건 그럭저럭 재미있어도 직접 하는 건 재미없었으니까. 그래서 야구도 예능의 연장선상이라고, 그렇게 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해서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던 거야.”

“확실히 그랬지.”

“하지만, 아즈사가 일부러 공에 맞고, 마빡쨩이랑 히비키가 힘내고, 아미가 넘어지면서까지 공을 잡는 걸 보면서, 내가 계속 예능적인 것에 신경 쓰는 바람에 져버리고 끝나게 되면 사람들의 주목은 받을지 몰라도 다른 애들은 낙담하게 되어버릴 거라고 생각하게 된 거야. …그럴 바엔 차라리 주목을 덜 받을지라도 다른 애들과 함께 기뻐하는 걸 선택해야겠다고. 미키는 그렇게 생각했어. 다들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걸, 미키는 너무 늦게 알아버린 거야.”

“그랬구만. 근데 미키.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무엇을?”

“주목을 받으면서도 이길 수 있는 방법. 예능에 먹힐만한 깜찍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좋지만, 멋진 플레이를 보여주는 방법도 충분히 주목받을 수 있다고. 너라면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잖아?”

“그렇네….”

미키는 너무 간단한 것을 잊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보여줘. 결승전이잖아. 모두가 보고 있다고. 관중들도 꽤 왔으니까.”

“응! 해볼게!”

미키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배터박스로 가는 것을 보며 나도 덕아웃으로 들어왔다. 게으른 천재 호시이 미키. 물론 게으른 것도 게으른 거지만, 저 녀석은 기본적으로 천재다. 저 녀석이라면 뭔가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페어리를 프로듀스하면서 저 녀석의 능력은 몇 번이나 나를 놀라게 했으니까.

그녀는 배터박스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한 번 한 다음, 빙긋 미소 지으며 안으로 들어가 내가 모두에게 지시했던 대로 포수 쪽으로 바짝 붙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나는 나도 모르게 헛바람을 집어 삼킬 수밖에 없었다.

“저 녀석…”

그러고 보면, 내가 프로듀서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점에 마코토가 말했던 적이 있다. 행사에 지각해서는 자신이 한 번 보여줬던 댄스를 실전에서 그대로 따라 해냈다고. 그걸 들은 나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마코토를 믿지 않았다.
내가 페어리를 프로듀스 했을 때는 타카네가 반주도 없이 그저 단 한 번 불러준 ‘플라워 걸’을 역시 실전에서 완벽하게 듀엣으로 불러냈다. 그때는 저 녀석이 정말 머리도 좋고 센스도 좋구나. 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내 주 종목이 아니라 그다지 와 닿지가 않았던 걸까.

하지만 지금은, 내 주 종목인 지금 벌어지는 일은 나조차도 안 놀라려고 해도 안 놀랄 수가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미키의 타격자세가, 다름 아닌 내 타격자세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았던 것이다. 배트를 쥔 손이 올라간 높이, 양 팔꿈치 사이의 간격, 보폭은 어느 정도로 넓히고, 뒤꿈치를 까딱거려 리듬을 맞추는 것도, 모두.
물론 내가 미키에게 내 타격자세를 가르쳐 준 적은 없다. 지금까지 내가 자세를 교정해줬던 녀석들 모두, 저 자세를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미키는 내가 출전했던 경기를 보러왔던 그 몇 번 사이에 내 타격자세를 눈으로 익혀뒀다는 건가? 마코토의 그 말. 한 번 보고 댄스를 모두 완벽하게 따라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조금 신빙성이 있는 말이 되지만.

뭐. 지금 그렇게 놀랄 필요가 있을까. 타격자세만 따라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지. 그걸 완벽하게 자기 몸에 맞춰서 제대로 된 스윙을 해야…

딱! 하는 경쾌한 소리에 내 생각은 그대로 끊겼다. 타구는 힘차게 날아가 중견수와 우익수 사이를 완전히 갈랐다. 중견수가 공을 줍고 중계 플레이를 하는 동안 미키는 이미 2루를 밟고 3루까지 여유 있게 안착했다. 선두타자 3루타.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마저 느끼며 실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공을 치려 나오는 스윙과 공을 타격한 이후의 팔로스윙까지. 내가 내 타격하는 동영상을 보는 기분마저 들 정도로 똑같았으니까.
3루를 밟고 몸을 돌려 덕아웃을 향해 브이를 그리는 미키를 보며 나는 그저 웃어주었다. 그래. 저게 진짜 천재라고 하는 인종이었구만.

어쨌든 이걸로 무사 3루. 타순을 생각하면 적어도 동점 정도는 만들 수 있는 찬스가 왔다. 그리고 역시나 다음 타자인 치하야가 1루수와 2루수 사이를 꿰뚫는 안타를 만들어내 드디어 3-4. 한 점차까지 따라붙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타카네가 볼넷. 무사 1,2루에 4번 타자인 히비키 차례. 완벽한 동점, 아니. 역전까지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히비키는 자신의 임무를 잘 아는지 료의 초구를 그대로 받아쳐 정중앙 멀리 날아가는 타구를 만들어냈다. 치하야와 타카네는 볼 것도 없다는 듯 다음 베이스를 향해 질주했고, 이대로 2타점은 확정적인 분위기였다.

중견수가 몸을 날려 거의 완벽에 가까운 다이빙 캐치로 공을 잡지만 않았더라면.

나는 그제야 두 사람에게 돌아가라고 소리를 쳤지만 이미 그들은 너무 멀리 와있었다.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 중견수가 송구한 공을 받아 2루와 1루에 베이스터치. 프로야구에서도 나오기 힘든 삼중살(트리플 플레이). 찬스는 그대로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어차피 공이 떨어지는 걸 기다렸다 뛰게 해도 최소 동점에 노아웃 찬스는 지속되는 거였는데, 내가 너무 급하게 생각해 뛰는 녀석들을 그대로 놔둔 것이 화근이었다. 애초에 저게 잡힐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었는데. 중견수 녀석. 죠가사키 미카라고 했던가. 운동신경이 상당한 녀석이다. 저 정도 거리를 달려 다이빙캐치로 공을 잡는다는 건 웬만한 남자들도 못하는 건데.

그리고 삼중살의 여파는 3회말 수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삼중살의 장본인이자 투수인 히비키의 멘탈이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2번 타자의 잘 맞은 타구를 타카네가 점프 캐치로 간신히 잡아낸 것을 시작으로, 3번 미카와 4번 키라리가 연속안타. 1사 2,3루의 위기가 찾아왔다.

“지나간 일 신경 쓰지 말라고 했잖아. 잊어버리고 던져.”

“나도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다구… 그런데 자꾸 떠오른단 말야.”

안 그래도 투수를 바꿔야 할 타이밍이 아닌가. 생각은 했는데, 이 녀석 말고 또 누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천재인 미키라도 투수를 갑자기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고. 조금만 더 참고 던지라기엔 내가 봐도 히비키는 여기서 끝인 것 같았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보려고 히비키에게 계속 말을 시켜봤지만, 그렇다고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리츠코가 빙긋 웃으며 마운드 위로 올라왔다.

“됐어요. 교체 선수는.”

“…설마 니가 던지게?”

“그럴 리가 있겠어요?”

리츠코는 피식 웃으며 우리 팀 덕아웃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이미 유니폼을 차려입은 채로 왼손에 글러브를 끼고 있는 마코토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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