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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사와 후미카는, 암적색으로 물든다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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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6-09, 2017 00:48에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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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서 나와, 기숙사 현관까지 와서 멈춰섰다.

밖엔 아직, 비가 내리고 있다. 게다가 집에 돌아가려고 해도, 경비원이 출구를 지키고 있을 거다. 옷도 아카네 씨에게 빌린 운동복이어서, 배가 살짝 드러나 있었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으니, 누군가 「후미카 씨」 하고 불렀다.

이상하게도 놀라진 않았는데, 나에게도 예지 능력이 생겼던 걸지도 모르겠다.


유코  「그렇게 입고, 어딜 가시려는 거에요?」


제 방에 와 주세요, 하고 유코 씨는 티없이 웃으며 말했다.


후미카 「죄송합니다…… 호의를 받아들일게요」

유코  「아뇨아뇨, 사양하지 않으셔두 괜찮아요」


유코 씨의 방에 들어가 보니, 내가 올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불이 두 채 나란히 깔려 있었다.


유코  「양 세는 대신, 잠깐 이야기라도 할까요」


유코 씨는, 미소짓고 있다.


유코  「전, 아카네 쨩이랑 자주 같이 일을 하곤 했어요」


아카네 씨의 이름이 나왔는데도, 별로 놀라지 않고, 난 유코 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유코  「아카네 쨩은 언제나 활기차고 밝아서, 함께 있기만 해도 저까지 건강해지는 기분이었어요」


그런데, 하고 유코 씨는 말을 이었다.


유코  「가끔, 이상한 느낌이 들어요」

유코  「그, 활기찬 흉내를 내고 있는 것 같은……」


서투르다는 단어가, 마치 그녀를 위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해―― 시키 씨의 말이, 머릿속에서 울려퍼진다.


후미카 「저도…… 가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유코  「역시 후미카 씨도 느끼셨나요」


위험한 모순을 떠안고 살아간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코  「그래도, 이제 전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다고 생각해요」


갑자기, 눈꺼풀이 무거워지며, 격렬한 졸음에 습격당했다.


유코  「그러니까, 후미카 씨. 아카네 쨩을, 잘 부탁드릴게요」

후미카 「유코, 씨……?」

유코  「사이킥 안녕히 주무세요」


마치 물 밑으로 끌려내려가는 것처럼.
의식이, 가라앉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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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몰라보겠는데―― 나와 아카네 씨의 연기를 보고, 감독은 입을 열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아카네 씨는 완전히, 얌전해져 버렸다. 나와 눈을 마주치려고도, 말을 주고받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휴식 시간만 되면 쏜살같이 무대에서 뛰쳐나가, 어디론가 사라진다.


시키  「냐하. 후미카 쨩, 뭘 해 버린 걸까냐~?」

후미카 「키스…… 해 버렸어요」

시키  「……」


아무리 시키 씨라도 할 말이 없었던 걸까, 하고 그녀의 표정을 보니, 번쩍 빛나는 눈동자가 날 응시하고 있었다.


시키  「역시 후미카 쨩은 Crazy하고 재밌어!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고백도 안 하고 키스한 거겠지! 후후ー, 멋진 문학의 향기가 나네에ー!」

후미카 「모,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지 말아 주세요」

시키  「하스하스♪」


그래도, 라고 시키 씨는 말했다.


시키  「대답을 떠넘겨 버리는 건, 비겁하지 않았을까냐?」

후미카 「……저는,」

시키  「넌 상대의 마음을 모르니까, 애매한 행동으로 적당히 얼버무린 거야」

시키  「그리고 지금, 넌 상대가 마음을 말해 주기만 기다리고 있어」


책사구나, 하고 말하면서 시키 씨는 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시키  「후후후. 그런 후미카 쨩에게 줄 선물을 준비해 보았답니다」


요염하게, 시키 씨는 미소지었다.


시키  「여기 한 병의 트왈렛이 있습니다」

시키  「어제, 후미카 쨩에게 안겼을 때 채취한 페로몬을 베이스로 만들었어요」

시키  「향을 맡은 사람은, 반드시 사기사와 후미카를 사랑하게 돼 버리는 트왈렛이랍니다」

후미카 「……」

시키  「사람에겐 무한한 종류의 감정이 있어. 사랑이란 감정도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고, 다양한 수준으로 나눌 수 있지」

시키  「하지만, 이걸 쓰면 네가 바라는 감정이, 화학적으로 한 치의 오차 없이 재현돼」

시키  「사랑이란 것도, 어차피 전부 화학식인걸」

시키  「히노 아카네는, 사기사와 후미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시키  「"그냥 그렇게 된다". 이거 최고 아냐?」

시키  「히노 아카네에게 무슨 짓을 하든, 미움받지 않을 거야」

시키  「그러니까, 네 마음대로, 네가 원하는 대로, 아무런 걱정 없이 히노 아카네를 사랑할 수 있어」

시키  「그건 뭐, 행복의 극치 아닐까?」


후미카 「……」


그건, 흔해빠진 이야기.

모든 사람이 바라마지않는 이상향이 눈 앞에 제시돼도, 그것은 잘못되었다 말하며 거절한 다음 현실을 살아가라고.
진흙투성이라도, 비효율적으로라도, 미래를 향해 노력하는 모습이 아름다운 거라고, 수많은 이야기들이 주장하고 있다.

나도 그렇게 해야, 올바른 거겠지.

그런데도,

이상이 실현되는 세상.

두 번 살 수 없는, 한 번 뿐인 인생에서,

언제까지나 행복하고 싶다고 바라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시키  「냐하. 역시 후미카 쨩은 Crazy하네」


나는 지금, 행복의 극치를 손에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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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애매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건 시키 씨가 말했던 대로, 무한한 종류의 감정이 있기 때문이리라.

나와 아카네 씨는 모든 걸 애매한 그대로 남겨두고, 연기에 임했다.

결과적으로, 연극은 대성공으로 끝났다.

그 다음, 뒷풀이로 호텔 일부를 빌려 입식 파티를 했다.

감독부터 순서대로, 이번 무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주역 두 사람의 마음이 통한 결과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아무도, 아무것도 모른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카네 「후미카 쨩」


되돌아본다,

새빨간 드레스에 감싸인 아카네 씨가, 거기 있었다.


아카네 「밖에서 잠깐 이야기라도, 하실래요?」


긴 밤이, 시작된다.

그런 예감이, 내 가슴을 꽉 조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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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안뜰에 놓인 벤치에 앉았다.

가끔씩, 분수대의 물이 기세 좋게 뿜어져 나와, 저항할 수 없는 중력에 끌려 떨어져내린다.


아카네 「후미카 쨩」


평소에 듣던, 힘찬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게 날, 불안하게 만든다.
발 밑이 무너져 내린 것 같은, 바닥에 다리가 닿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카네 「후미카 쨩은, 절 좋아하시는 건가요?」


아무 꾸밈없는 질문, 나로선 도저히 물을 수 없는 질문이어서, 난 아카네 씨가 부럽다고 생각했다.

끄덕이는 건, 어렵진 않은 일이었다.


아카네 「역시, 그랬던 건가요……」


역시, 그랬던 건가요?


아카네 「전, 타인의 마음을 생각하는 게 서투르니까……」

아카네 「계속 후미카 쨩이, 왜 저에게 ……하신 건지 고민해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어요」

아카네 「그런데, 시키 씨가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카네 「후미카 쨩이, 저를, 그…… 좋아한다고」

아카네 「하지만」

아카네 「저는」


그 다음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카네 「여자아이로서, 후미카 쨩을 사랑할 수는 없었습니다」


알고 있었다.
예상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실제로 들으면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젠 단 하나뿐이다.

난 주머니 안에 넣어 둔, 향수 병을 움켜쥐었다.

이걸 사용하면, 아카네 씨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걸 알고도 오늘까지 망설이고 있었던 이유는…….


아카네 「그래도 저는……!」

아카네 씨는, 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그건 익숙한 모양의 병이었다, 아니, 분명 내가 들고 있는 향수병과 같은 모양이었다.


후미카 「어떻게, 아카네 씨가 그걸……!」

아카네 「저도, 후미카 쨩을 사랑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분수대가 뿜어내는 물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다.

아카네 씨는, 미소지었다.

그건,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듯한,

어딘가 그늘진, 미소였다.


후미카 「아, 안 돼……」


난 그런 건, 바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카네 「이걸 쓰면, 후미카 쨩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솟아올랐던 물이, 떨어진다.

아카네 씨는, 향수를 자신에게 겨눈다.



후미카 「안 돼!!!」



목이 찢어지도록, 외쳤다.

그런 건, 바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건 거짓에 불과하니까.

난 그게 만들어진 감정이란 걸 알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이 정도로 공허하고 잔혹한 일이 또 있을까.





물이, 떨어진다.

뭔가 깨져나가는 것 같은 물 소리가, 어둠을 가르며 울려퍼졌다.






아카네 「후미카, 쨩」


히노 아카네는, 내 이름을 불렀다.

뺨을 붉게 상기시키고, 요염하게, 요염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아카네 「가슴이 두근두근, 멈추지 않습니다……!」

아카네 「저는, 전…… 후미카 쨩이……!」

후미카 「아카네 씨이!!」


힘껏, 목소리를 쥐어짜며, 난 아카네 씨를 제지했다.


후미카 「…… 잠깐,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뒤돌아보면, 거기엔 시키 씨가 있었다.


시키  「해피 엔드, 맞이할 수 있었을까냐?」


이치노세 시키는, 고양이처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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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서만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렇게 말하고, 난 호텔 라운지 구석에서, 시키 씨와 마주섰다.


시키  「표정 무서워라. 후미카 쨩은 웃어야 귀엽다구?」

후미카 「…… 왜, 아카네 씨가 그 향수를 갖고 있는 건가요」

시키  「고뇌하는 사람을 구원하는 건,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 아닐까냐?」

후미카 「……」

시키  「그 고민의 근원은 당연히, 너였던 거구」

후미카 「제가……」

시키  「내가 관여해 버렸다곤 해도, 이렇게 끝나도록 만든 방아쇠는 후미카 쨩, 네가 당긴 거야」

시키  「네가 히노 아카네에게 똑바로 『사랑한다』 고 말할 수 있었다면」

시키  「네가 히노 아카네에게 키스하지 않았다면」

시키  「네가 오늘에 이르기 전에 히노 아카네와 마주볼 수 있었다면」

시키  「그리고」


시키  「"네가 그 향수를 무리하게라도 빼앗아 버렸다면"―― 그치?」


모든 걸 꿰뚫어보는 것만 같은 새까만 눈동자에, 삼켜진다.


시키  「넌 애초에, 그 향수의 효과에 대해선 반신반의하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바로 앞에서 히노 아카네가 향수를 사용하려고 했을 때도, 진심으로 막으려고는 하지 않았어」

시키  「오히려, 정말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확인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후미카 「그럴 리가……」

시키  「그럴 리가 없어?」

시키  「그럼 왜 바로 앞에 있던 네가 향수를 빼앗지 않았는지, "빼앗으려는 시도조차도 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실까」

후미카 「그건……」

시키  「후미카 쨩」


이름을.

시키 씨는, 상냥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시키  「당신은, 총명해」

시키  「총명한 탓에, 상상하고, 의심한 거야」

시키  「지금, 끌어안고 있는 그 마음이, 영원히 계속될 수 있는지를」

시키  「아니 오히려, 확신하고 있었겠지」



시키  「"이 마음이, 영원히 지속될 리가 없다" 는 걸」


아아.

이게 아름다운 이야기였다면, 난 당신에게 반박해 보일 수 있었으리라.

난 영원히 아카네 씨를 사랑할 수 있다, 고.

하지만, 여긴 현실이고, 이상적인 세계도 꿈 속 세상도 아니다.

난, 자신이 없다.

아카네 씨만을 평생 마음에 둘 수 있을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평생 사랑할 수 있을지―― 그 중압감을, 내가 평생 견뎌낼 수 있을지.


시키  「지금을 살아가지 못하는, 불쌍한 너에게」


시키 씨는, 주머니에서 진홍색의 작은 병을 꺼냈다.

따로 말하지 않아도, 내용물은 알고 있다.


시키  「네가 바라고 있던 게, 여기 있어」

시키  「히노 아카네가 먼저 쓰도록 하다니, 역시 넌 총명하네」


난, 아이돌이 되기 전의 날 생각했다.

내가, 이치노세 시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히노 아카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프로듀서 씨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후미카 「…… 제가 아이돌이 되지 않았더라면, 전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내 질문에, 시키 씨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시키  「있지도 않은 미래를 생각하는 건, 시간 낭비야」 

시키  「인생은 단 한 번 뿐」

시키  「절대로, 되감을 수는 없어」


이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난, 눈 앞의 진홍색 향수병을 집어들었다.

망설임은 없다.

당신이, 그렇게 돼 버린 것처럼.

나도, 당신을 사랑하게 되는 거다.

우리는, 행복의 극치에 다다르리라.


후미카 「시키 씨」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자, 시키 씨는 어딘가 슬픈 것처럼, 미소지었다.


시키  「별말씀을」





난, 트왈렛을 끼얹었다.

그 순간,

청정한 세상에, 안개가 끼는 것처럼,

아아

나는, 이제,



――"억누를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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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난 거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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