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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사와 후미카는, 암적색으로 물든다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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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6-08, 2017 01:53에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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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주일이 지났다.

난 카나데 씨와 함께 남아서 연습을 했고, 아카네 씨도 리허설이 끝나는 대로, 한 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달려서 집으로 돌아갔다.
분명 집에서 연습하고 있었으리라. 그 성과는 신출내기인 내가 보기에도 명백할 정도로 드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어느 날 리허설이 끝났을 때, 감독이 말을 꺼냈다.

카나데, 네가 공주 역할을 연기해 봐라, 하고.

그 말을 듣고, 카나데 씨는 한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지극히 온화하게, 말했다.


카나데 「지금, 여기서,…… 제가 대신 연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요?」


하지만, 그런 카나데 씨의 저항도 부질없이, 감독은 집요하게 연기를 강요하고, 카나데 씨가 거기에 꺾이고 말았다.


카나데 「――」


우리는, 같은 사무소 동료들이지만, 라이벌이기도 하다―― 카나데 씨가 했던 말이, 지금 와서야 뼛속까지 사무친다.

보고 있으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이 세상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
노력하면, 꿈이 이루어진다.
그런 심플하고 눈부신데다 아름다운 명제조차, 성립하지 않는다.


프로듀서에게, 주역을 교체하자고 건의하겠다.
감독은, 그렇게 딱 잘라 말하고서, 오늘은 여기까지라며 무대를 등졌다.

좋든 싫든, 그 자리에 남겨진 사람들 모두가, 아카네 씨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아카네 씨가 날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단 걸 깨달은 그 순간에, 아카네 씨는 미소를 지었던 거다.


아카네 「ㅈ, 전, 집에서 더 연습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후미카 「아, 아카네 씨!」


쫓아가려 하지만, 평소에도 열심히 운동을 하는 아카네 씨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무릎을 꿇듯이 쓰러지며, 난 점점 작아지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았다.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 그녀는 도대체,

―― 누구를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 걸까.


시키  「안 쫓아가도 괜찮은 걸까냐?」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시키 쨩이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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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키  「서투르다는 단어가, 마치 그녀를 위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해」


내밀어진 손을 붙잡고, 일어섰다.

정말, 그 말대로라고 생각했다.


후미카 「시키 씨…… 이 세상에, 슬퍼하지 않는 인간, 상처받지 않는 인간이 있는 걸까요」

시키  「그런 거, 물어볼 필요도 없이 알고 있잖아」

후미카 「……」

시키  「그렇게 살아가는 게 몸에 배어 버린 거라구. 그녀는, 그냥 정말 서투를 뿐이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도 모르는 것뿐이야. 모르는 채로 자라 버린 거지」

시키  「그냥 그것뿐이잖아?」

후미카 「그녀는 도대체 언제부터, 그런 짐을 떠안고 있었던 걸까요」

시키  「그건 나한테 질문해도 모르겠는데에ー」

후미카 「제가,…… 그녀를 구원할 수 있을까요」


우스운 말이란 것도, 지나치게 오만한 말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난, 대답을 듣고 싶었다.
질문하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었다.


시키  「너도, 꽤 서투르게 살아가는구나. 뭐어, 서투르지 않은 사람이 압도적으로 드물지만 말야ー」

시키  「네가 그녀를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으면, 너의 가치관에 대해서, 고민을 해 봐야 할 거야」

후미카 「가치관을요?」
   
시키  「"올바르게 살아가는 건, 행복하게 살아가는 거랑은 또 다른 거라구", 후미카 쨩」


시키 씨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손을 잡았다.


시키  「행복은, 욕망이 실현될 때 성립해」

시키  「그래도, 인간의 욕망엔 끝이 없어」

시키  「그러니까, 우린 규칙을 만들고, 도덕을 준비했어」

시키  「행복의 범위를, 규칙이나 상식의 범위 안에 가둬 둔 거지」

시키  「그렇게 해도, 인간의 욕망엔 끝이 없어」

시키  「가끔은, 그 울타리 밖에 행복이 보일 때도 있겠지」

시키  「그래도, 울타리가 쳐져 있으니까 포기해 버려」

시키  「그리고」

시키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눈이 무서우니까, 포기하는 거야」

시키  「우린 서로 행복의 싹을 뽑아 내고 있는 거나 다름없는 거 아닐까」

시키  「진정한 행복을 외면한 채로, 살아가고 있는 거지」

시키  「우리는, 언제까지나 피어날 일 없는 꽃봉오리인 걸지도 모르겠네」


난, 시키 씨의 말을 들으면서, 아카네 씨를 생각하고 있었다.

내 마음은―― 울타리 안엔 없다.


시키  「네가 내 말을 듣고 움직일 정도로, 단순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시키  「딱 하나만, 시험해 봤으면 좋겠어」


난, 완전히 허를 찔렸다.

시키 씨가, 있는 힘껏 안겨왔던 거다.


시키  「흐아아아ー, 좋은 냄새! 샴푸 냄새랑 희미한 헌 책 향기가, 그야말로 후미카 쨩이란 느낌!」

후미카 「시, 시키 씨!?」

시키  「아하하ー, 후미카 쨩 두근두근대고 있어ー」

후미카 「얼굴 좀, 들이대지 마세요……!」

시키  「냐하. 너도, 이렇게 아카네 쨩을 꽉 껴안아 보라구. 그럼 분명, 답이 나올 테니까」


귓전에 그렇게 속삭이고, 시키 씨는 날 놓아 줬다.


시키  「넌, 좀 더 심플하게 살아야 해」

후미카 「심플하게……」

시키  「인간은, 이 세상은, 복잡기괴하지만, 그 세계를 인식하고 쌓아올리고 있는 건, 당신 뇌의 역할이야」

시키  「당신이 본 적 없는 곳에, 세상은 존재하지 않아」

시키  「5분 전의 세상이 존재하는지 어떤지도, 증명할 수 없어」

시키  「"이 세상은 그저, 당신만의 것" 이야」


시키 씨는, 웃었다.

천진난만하게, 하지만 어른스럽게.

순진하기도 하지만, 무구하지는 않다.

분명, 그녀의 세계는 지나치게 복잡하리라.

그래서, 동시에 단순하기도 한 거다.

얼마나, 서투른 사람인지.


후미카 「대체 왜」


자꾸 질문하는 건, 내 나쁜 버릇인 걸까.


후미카 「왜, 그렇게 절 신경쓰시는 건가요?」


그녀는, 평소대로 대답해 줬다.


시키  「왜냐면, 재미있는걸」





21

346프로 여자 기숙사의 입구는 아홉 시가 넘으면 폐쇄돼 버린다.

안 쫓아가면 분명 후회할걸, 마치 미래를 알고 있는 것 같은 시키 씨의 말을 듣자마자, 의심하지도 않은 채 달려나가고 있었다.

비가 내린다.

비에 젖은 앞머리가 늘어진다. 시야가 좁아지는 게 거슬려서, 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밤을 좋아했고, 빗소리도 좋아했다.

아카네 씨는, 럭비를 좋아했다.

깜깜해지거나, 비가 내리면, 럭비는 못 하겠구나―― 언제부터였을까,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댄스가 서투른 내 키를, 아카네 씨에게 나눠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카네 씨가 좋아할 만한 책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카네 씨에게 악의를 품는 인간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아아, 나는.

이 쏟아지는 빗방울처럼.

당연한 듯이, 바라고 있었다.

부디 아카네 씨가,

행복해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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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프로 기숙사에 도착했다.

하지만, 문은 닫혀 있었다. 시간은, 9시를 몇 분 넘겨 있었다. 담을 넘고 싶어도, 물리적으로 어려운데다, 경비원의 눈도 있다.

안 쫓아가면 분명 후회할걸―― 시키 씨의 말이 머릿속에서 리프레인한다.

어떻게 해야, 들어갈 수 있을까…….


유코  「여기에요」


목소리가 들려 뒤돌아보니, 거기엔 샛노란 우산을 쓴 유코 씨가 서 있었다.


후미카 「유코 씨……, 어떻게」

유코  「사소한 건 신경쓰지 마시고, 자, 이쪽입니다!」


그 말을 듣고, 유코 씨를 뒤따라 걸었다.

아무래도 뒷문에서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 같고, 유코 씨는 미리 뒷문 경비원 분께, 나를 데리고 조금 늦게 들어갈 거란 걸 전해 뒀던 것 같다.


후미카 「저기, 제가 이런 시간에 여기 올 거라는 걸 어떻게……?」

유코  「후미카 씨, 잊어버리셨나요? 전 사이킥 아이돌이니까요! 미래예지 정도는, 식은 죽 먹기에요!」

후미카 「…… 감사합니다」

유코  「괜찮아요.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이 정도니까요」


안뜰 같은 곳에서 유코 씨가 멈춰서더니, 우산 안에서 나와 마주보았다.


유코  「후미카 씨……」

후미카 「ㄴ, 네」

유코  「우산 좀 들어 주세요」


정신차려 보니, 아무렇지도 않게 우산을 들고 있었다.


유코  「오늘의 럭키 아이템은, 그 노란 우산입니다!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되실 거에요!」


그렇게 말하며, 유코 씨는 우산 밖으로 뛰어나갔다.


후미카 「ㄷ, 다 젖으실 텐데요」

유코  「바로 앞이니까 괜찮아요. 그래도 후미카 씨는 거기 가만히 계셔야 해요! 꼭이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유코 씨는 달려서 기숙사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대로 교대하듯이 나타난 건,

아카네 씨였다.


아카네 「후미카 쨩……!!!」


우산도 쓰지 않은 채, 아카네 씨는 달려들어왔다.


아카네 「다 젖으셨잖아요! 어서 들어가죠!」

후미카 「앗……」


손을 잡힌 채, 아카네 씨에게 이끌려,

그대로 기숙사 안으로, 아카네 씨의 방까지 들어갔다.


아카네 「수건 가져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목욕물도 받겠습니다!」


그대로 흐르듯이 목욕을 하고, 아카네 씨의 운동복을 빌려서 방에 눌러앉게 돼 버렸다.


아카네 「죄송합니다, 저, 몸이 작으니까요! 배가 서늘하시진 않으신가요!?」

후미카 「네, 그건, 괜찮아요」

아카네 「……」

후미카 「…… 앗」


방을 둘러보려는 건 아니었는데, 책장만큼은, 무심코 봐 버렸다.


후미카 「제가 빌려드렸던 책을…… 혹시, 사 주신 건가요?」

아카네 「!!!」

아카네 「저기, 이건, 그게!!!」


당황스레 일어나선, 책장 앞에서 방방 뛰어오른다.


아카네 「이건 말이죠, 그게!!! 후미카 쨩이 모처럼, 해설이나 단어들을 가르쳐 주셨는데, 이해력이 부족해서, 그래서 저는 그게, 제대로 읽고 이해하고 싶어서 말이죠……!!!」

후미카 「다 읽으시고 나서 돌려주셨어도 괜찮았는데요?」

아카네 「계, 계속 읽다 보면, 후미카 쨩의 소중한 책이 구깃구깃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요……」

후미카 「아카네, 씨……」


아아, 이 사람은.

이 얼마나 서투른가.

난 그런 건, 전혀 신경쓰지 않는데.


아카네 「저기!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이번엔 기세 좋게, 내 눈 앞에 정좌했다.


아카네 「후미카 쨩은, 왜, 여기 오신 건가요……!?」


그건, 지극히 당연한 질문이었다.

말이 막혀 버린 난, 순간적으로――.


후미카 「…… 연극 연습을, 같이 하러 왔어요」





23

담담하게, 우린 대본을 읽으며 극을 진행시켰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라스트 신에 도달한다.

공주와 기사가 수많은 장애물을 넘어 재회하고, 키스 신을 연기하며 막이 내린다.

대사를 이으면서 난, 아카네 씨의 어깨를 잡았다.

움찔, 아카네 씨는 살짝 어깨를 떨었다.


아카네 「후미카 쨔……」


갑자기, 느닷없이.

요염한 목소리가, 아카네 씨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내 이름이 들린 순간.

들려 버린 그 순간에,

나는, 기사가 아니게 되어 버렸다.


후미카 「아카네, 씨……」


――너도, 이렇게 아카네 쨩을 꽉 껴안아 보라구. 그럼 분명, 답이 나올 테니까.
시키 씨의 말이, 시키 씨의 감촉이, 시키 씨의 냄새가, 내 욕망을 뒤흔든다.


나는,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손을 잡는 것보다도,

꼭 껴안는 것보다도,

입맞춤을 주고받는 것보다도,


아카네 「후, 후미카 쨔――!!!」


『사랑한다』 고 말하는 게 어렵다.
어렵다는 걸, 알아 버렸다.


아카네 「!?」


의미심장한 태도를 취하면, 대답을 상대에게 떠넘길 수 있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난, 최악이다.


아카네 「후후후후후후미카 쨩, ㅇ, 왜, 키, 키스……」

후미카 「죄송, 합니다……」


안절부절못하다가, 난 아카네 씨의 방에서 뛰쳐나왔다.


아카네 「후미카 쨩!?」


이젠, 돌이킬 수 없다.

인생은 책과는 다르게, 넘겨 버린 페이지를 되펼칠 수는 없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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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2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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