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할 때까지 자리를 지키기에는 시간도 많이 남았고 라이브 때 체력 소모를 고려해 뭔가로 배를 채우기로 했다. 대략 삼십 분쯤을 걸으며 배를 든든히 할만한 것을 찾아헤맸고 그 끝에는 패스트푸드점에 있었다. 주린 배보다는 주린 지갑의 사정을 헤아려야 했다.
햄버거를 점심으로 먹는 건 어제도 오늘도 마찬가진데 왜 오늘 먹는 햄버거는 척 보기에도 저렴해 보이는 걸까. 감자튀김을 먹자니 낯익은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후배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전화를 해보려다 말았다. 바빠서 라이브도 못 간다는 애가 전화를 받을 여유가 있을 리 없겠지.
다시 라이브홀에 돌아와보니 아까의 한산함이 거짓말이라는 듯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지나가는 시민을 상대로 하는 몰래카메라가 떠올랐다. 지금이라면 나도 해당조건은 충족했겠지. 일단은 시민이니까.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려니 외면하려 해도 기대감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어쩌면... 그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심장이 빵빵해져 터질 것 같은 가운데 그는 내게 물었다. 혹시 콜북 받았냐고. 심장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걸 꺼낼 수는 없어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고 콜북을 하나 얻었다. 친절한 사람이었다.
문득 아주 예전에 지하아이돌의 라이브를 보기 위해 기다리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관객이 백명도 되지 않은 작은 무대였어도 기다리는 줄 맨 앞에서 두근거림을 억누르느라 힘들었는데 지금은 무엇이 달라서. 그 사이에 있었던 일 때문일까. 기다리는 줄 맨 뒤에서 열을 맞춰 들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에 꿈이 매달려 있는 게 보였다.
거의 맨 마지막으로 들어갔지만 좌석은 거의 맨 앞자리 무대가 한눈에 보이는 명당이었다. 이런 귀한 자리일 거라곤 생각조차 못했는데. 휴대폰을 꺼내 보니 후배한테서의 연락이 있었다. 도착하셨나요. 한참 전에 온 문자였다. 응, 이라고 답장을 보내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려는데 답장이 도착했다. 재밌게 보세요. 쉬는 시간인 걸까.
한 시대를 풍미하고 가장 앞에서 이끌었던 그 누구보다도 빛났던 765 올스타즈. 그들이 남기고 간 빛의 궤적을 향해 힘차게 뛰어가는 765 시어터 올스타즈. 그리고 그들의 발자취를 지켜보는 수많은 사이리움들이 한곳에 모였다. 암표로 팔았다면 얼마 정도를 벌 수 있을까 생각한 나도 있었다.
콜북은 받았지만 콜북에 적힌 노래보다 그러지 않은 노래가 훨씬 많았다. 그리고 나는 그 수많은 노래를 전부 들어본 것이 아니라서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콜을 해야 했다. 346프로의 라이브였다면 그럴 필요 없는데. 아니, 그럼 애초에 콜을 할 일도 없으려나.
그것은 라이브가 절반 정도 흘렀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사이리움의 색이 변하지 않게 되었다. 건전지 문제라기에는 어제 집에 돌아가는 길에 샀던 새 거로 갈아끼운 거기도 하고 꺼지지도 않으니 그럴 리 없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오렌지색으로 고정된 것이랄까, 오렌지색이면 멀리서 볼 때 울오인 줄 알 테니까. 그런데 그럼 나는 타이밍도 모르고 무작정 울오를 꺾는 사람이 돼버리려나. 상관은 없지만 라이브가 끝날 때까지 오렌지색을 일관되게 주장하는 눈치 없는 사이리움이 아무리 생각해도 주인을 닮았다는 생각이 혀끝을 씁쓸하게 적셨다.
꿈을 처음으로 품게 되고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지나갔을까. 나는 그 꿈을 향해 얼마나 많은 걸음을 걸었을까. 아직도 그것을 향한 길을 꿈을 향한 노력을 하루하루 이어가고 있을까.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처음 들었던 그 노래는 진공 상태에 포장해놔서 언제 들어도 생생한 전율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생각하게 했다. 그래서 정말로 좋아하고 정말로 싫어하는 곡이다.
파티가 끝나도 결코 식지 않는 열기가 끝나지 않는 파티를 요구할 때 나는 그제야 내 주변을 살필 수 있었다. 정말 많은 관객들이 앵콜을 외치고 있었고 무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노래가 이어지길 바라는 관객들과 누군가 채워야 할 무대. 잠깐이지만 가슴이 뛰었다. 그래서 조금 서글퍼졌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굉장히 만족스러운 점심식사였다. 최근에 이렇게 화려한 식사를 해본 적이 있었던가 싶었기에 더더욱 만족했다. 그리고 그것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즐겼다는 점에서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먹은 것은 내겠다는 내 말을 친구는 됐다는 한마디 말로 잘라버렸다.
그러면서 식사는 괜찮았냐고 내게 물었다. 사실 알고 있다. 친구는 이런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 바에야 그 돈으로 고기 파티를 할 사람이다. 하지만 그랬다간 내 몸 상태에 안 좋은 영향이 가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겠지. 그래서 나는 맛있다고. 무척 맛있는 식사였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밥 먹은 값을 여기서 다 받아야겠다고 했다. 아직도 내가 점심 때 우겨넣은 스테이크에 미련이 남아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듯 앵콜까지 각오하라고 으름장을 놓는 그녀. 그렇게 나온다면 이쪽도 가만히 있을 수야 없지.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은 실수였다. 실수가 아니라 불운일지도.
오랜만에 즐겁다는 마음을 가져 벨트를 푼 여유는 바지가 내려가면 정신을 차릴 것이고 나는 섬뜩함을 느낄 것이다. 노래를 부르던 중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눈이 돌아갔다. 그곳에 웬 처음 보는 남자가 있었고 나와 그의 눈은 서로를 똑바로 쳐다봤다.
코인 가라오케를 나온 뒤로 도무지 진정되지 않는 심장이 바늘처럼 내 몸을 찔러대는 탓에 저녁식사의 맛을 음미할 수가 없었다. 술을 마시면 의식이 흐려져 감촉도 흐물흐물해질까 생각했지만 미성년자가 술을 마실 셈이냐며 호통만 들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분명 같은 나무에서 자라난 가지인데도 그것은 나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대체 뭐가 다르기에.
저녁식사까지 얻어먹었으면 택시비라도 내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 호의가 계속되면 어느 순간부터 권리인 줄 알게 된다는 말도 있으니까. 하지만 지갑을 꺼내기도 전에 친구가 내 입의 지퍼를 잠갔다. 그리고 말했다.
노래 부를 때의 네 눈을 네가 봤어야 했는데. 그걸 봤더라면 지금 네 눈에 불만을 품을 거야. 그리고 친구는 빠르게 멀어져갔다. 집에 돌아간 나는 거울을 들여다봤다. 거기엔 내가 있었다. 아무리 봐도 나일 뿐인 나만이 있었다. 친구는 내게서 뭘 봤었던 걸까. 묻지는 않았다. 대답해줄 애가 아니다.
문자를 확인한 것은 목욕을 마치고 나왔을 때였다. 낯익은 이름의 우체부가 티켓 한 장을 슬그머니 놔두고 떠났다. 티켓에 새겨진 날짜는 이틀 뒤, 그래도 생각할 시간이 있어 다행이었다.
간다면 분명 마주칠 수밖에 없겠지, 그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가지 않는다는 선택지를 과연 내가 고를 수 있을까. 가뜩이나 여린 마음씨를 가진 그녀다. 분명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피어난 용기로 전한 편지일 터. 그것을 아는 내가 과연 거절할 수 있을까.
세계의 반을 주겠다는 마왕의 제안보다 더 거절 못 할 것이 있다면 분명 상냥한 사람의 요청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이제는 누구도 봐주지 않을 거라는 마음에 접어뒀던 풀메이크업을 얼굴에 덮어씌울 리가 없지.
입고 갈 옷까지 모두 정했을 때는 시간이 적당히 흘러 바로 출발하면 뮤지컬이 시작하기 전에 적당히 식사 한끼 정도는 할 여유가 있을 것 같았다. 내려야 할 전철 역을 지나치지만 않았어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뮤지컬을 하는 오페라홀은 무척 컸고 다양한 것들이 있었다. 다행히 편의점도 있어 컵라면으로 대충 점심을 해결했다. 간소하다 못해 가난해 보이는 점심을 먹는 동안 시선은 자꾸만 길게 늘어선 줄로 향했다. 뮤지컬을 보기 위해 기다리는 듯보이는 무수한 사람들을 보다 도착하자마자 교환했던 티켓을 확인했다. 새까만 바탕에 하얀 글씨로 적혀 있는 VIP. 고급브랜드 초콜릿의 포장지 같은 종이 조각을 보고 안심했다. 일반석이었다면 돌아갔을지도 모르기에.
뮤지컬을 하는 오페라홀은 총 3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VIP 좌석은 3층에 있었다. 그리고 한창 음악이 거대한 발자국을 남기던 시절 치즈롤을 줄줄이 늘어놓은 머리를 한 아저씨들이 이상하게도 생긴 망원경을 쓰는 이유는 무대가 너무 멀리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혼자만의 공간에서 뮤지컬을 볼 수 있다는 점은 매력적이다. 타인이 없는 공간에서는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할 일도 없으니까.
뮤지컬이 시작되길 기다리는 웅성거림들이 어둠에 푹 담가질 때까지 작은 안내 책자를 살폈다. 첫 페이지 인물 소개란에 화보집에서나 볼 법한 우아한 포즈를 취한 그녀가 있었는데 은은하게 향기가 풍겼다. 청초함의 대명사인 그녀가 주로 쓰던 향수 냄새가. 분명 평범한 종이인데도 왠지 코끝을 간질였다.
뮤지컬의 여주인공은 정말 많은 시련과 부딪쳐야 했다. 수많은 타인들의 시선과 그녀를 붙잡고 놓지 않는 신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그녀의 눈앞에 들이미는 냉혈한 사회. 그녀의 가족조차 그녀를 돕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넘어질 것을 염려해 다시 일어서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한걸음 두걸음 걷고 있어. 어제도 오늘도 멈출 수 없어. 닿을 듯 말 듯 잡힐 듯 말 듯 나 애 타게 바라죠. 이젠 너와 나의 시간을 소중히, 또 우리들만의 땀방울이 헛되지 않길 기적의 밝은 빛 가득히. 내 꿈이, 꿈이 이뤄지게 될 거야. 너와 내가 나눌 밝은 빛. 무지개의 저편을 쫓아 그녀는 쉬지 않고 달린다. 그렇기에 너무나 눈부셨고 그래서 더더욱 눈을 뗄 수 없었다.
순식간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밤하늘을 밝히는 별빛과 그것에 매료된 나. 나는 눈을 피하지 않았고 서로가 서로의 존재만을 인지하는 짧은 순간이 흘렀다. 그것이 나 혼자만의 교감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야 없지만 모든 장이 끝나고 관객들로부터 박수 소리를 잔뜩 선물받은 채 퇴장했던 그녀가 내 눈앞에 있는 걸 보면 마냥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그녀는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숨이 고르지 못한 채 자꾸만 헐떡이는 그녀. 아무래도 퇴장하자마자 3층으로 달려온 듯싶었다. 천천히 와도 됐는데. 여기까지 온 이상 피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돌아갈까 생각을 한 번도 안했던 건 아니지만 그건 뮤지컬이 시작하기도 한참 전의 일이니 세이프가 아닐까 생각할 때였다.
그녀가 갑자기 나를 껴안았다. 양팔로 내 얼굴을 감싸고 가슴으로 나를 품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침착하게 대응할 만큼 나는 그렇게 빠릿빠릿한 사람은 아니다. 힘으로도 역부족이지만 어떻게든 그녀의 품에서 떨어지려고 하는데, 미세하게 아주 희미하게 그녀가 떨고 있는 것을 느꼈다. 아, 그랬었지. 이 사람은 언제나 이랬었지. 그녀가 눈물을 거둘 때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렸고 그동안 조금 답답하긴 했지만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티끌 한방울 없이 비겁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프로듀서는 공연이 끝난 직후 돌아갔다고 한다. 그녀가 돌려보낸 것이다. 이 순간을 위해서.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분명 오래간만의 재회였을 텐데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어린아이만이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맑고 순수한 눈망울. 공연을 위해 입은 화려한 드레스마저 그대로 집어삼켜버린 청초하고 수수한 인상. 은은하게 풍기는 포근한 향기마저. 모든 것이 변하지 않은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 변한 것은 그곳에서 쫓겨난 나뿐이란 걸까.
그녀는 날 오랜만에 본 사람들이 으레 그러듯이 내 몸 상태부터 확인했다. 이제는 좀 괜찮은지, 어디가 얼마나 아픈지, 아픈 곳이 더 생기지는 않았는지. 그것에 일일이 대답하는 것도 십수 번 정도면 지겹기는 하지만 그녀가 순수하게 나를 걱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성실히 대답했다. 그제야 그녀는 안심이 됐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녀의 눈망울은 너무나 투명해서 감추지 못한 염려가 맺히는 걸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대화를 하면서 느낀 거지만 그녀는 나에 대한 호칭 정리를 아직도 못한 듯싶었다. 편하게 부르다가도 아차 하곤 경어를 사용하고. 하긴 그녀는 손에 꼽을 만큼 특별한 사람이니까.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편하게 부르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럴 수 없다고 하면서도 빨리 받아들였다. 그리고 말했다. 이야기한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봤냐고. 무슨 이야기를요. 그렇게 되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처음 듣는 얘기나 다름없었기에 나는 그녀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돌아가는 전철이 정말 많은 생각들을 스쳐지나갔다. 아침 일찍부터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쉬지 못한 채 달렸고 달리고 있는 전철. 슬슬 지치고 피곤할 만도 한데 녹이 슬지 않는 전철이 레일 위를 달린다. 이 전철은 어딜 향해 가고 있는 걸까. 당연히 종점이겠지만, 문득 궁금해졌다.
그는 내게 인사를 하곤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그의 자연스러운 동작에 아직은 단정 지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메뉴판을 건네니 그는 적당한 가격대에 음료를 두 개 주문했다. 역시 생각난 김에 들른 건 아닌가 보다.
그를 카페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자리로 옮겼다. 손님인 그가 어디에 앉는지는 자유지만 손님으로서 온 게 아니라면 얘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행히 점장님이 배려를 해준 덕분에 빨리 그와 마주할 수 있었다. 묘하게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에 새삼 그가 나의 팬이었다는 걸 상기했다.
음료 두 잔을 가지고 테이블로 갔다. 그의 앞에 한 잔, 반대쪽에 한 잔 그리고 그 잔 앞에 나를 올렸다. 이왕 시킬 거면 내가 좋아하는 걸로 시켜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목을 축이자 그가 혼자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서론 같은 조미료를 필요한 만큼만, 때론 그보다도 아끼는 사람인지라 내 몸 상태에 대한 것만 묻고 바로 주제로 들어갔다. 그는 이전에 만났던 두 현역 종사자들의 제안에 대한 얘기부터 꺼냈다. 물론 그 중에 하나는 기억도 제대로 안 나고 그나마 기억나는 다른 하나는 시간을 달라고 말한 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았다. 이왕이면 온전한 하루 정도는 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볼멘소리를 내기에는 내 무관심이 큰 몫을 했으니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일을 그만둔 지 아직 일년도 안 됐네. 느리다고 하기에는 적당히 달리는 애매한 게으름뱅이에 감탄했다. 어쨌든 일년이면 시간은 충분한 거려나. 당사자인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마당에 그에게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고 연신 고개만 끄덕거렸다. 다행히 건성으로 보이진 않았나 보다.
그렇지만 복귀라니, 정말로 가능한 얘기일까. 말로는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그마저도 못하는 것이 나고. 그런 나이기에 스스로도 자신에게 확신을 가질 수 없는데 어떻게 그는 내게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걸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지금 사무실에 들어갔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잘 알기 때문에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만한 곳에서 프로듀서의 귀환을 기다리기로 했다. 이젠 일하지 않지만 그동안 달라진 것도 없어 보이고 늘 쉬었던 장소로 향했다.
실내에서 후드를 눌러 쓰는 건 눈에 띌만한 행동이긴 하지만 보는 눈부터가 없다면 아무 문제 없다. 여기는 프로덕션에 있는 카페에서 일하던 때의 내가 휴식시간 때마다 눌러 앉던 곳. 안에서 밖을 보는 건 가능해도 그 반대는 불가능해 마음 놓고 늘어질 수 있는 곳이었는데, 그런 곳이 있다는 게 한 사람만의 비밀일 수는 있다는 건 너무 희망 찬 생각이었나. 마주쳐버렸다.
그녀는 예전 그대로였다. 언제나와 같은 이유로 이곳에 숨어 있었던 거였다. 한창 바빠야 할 때인데 괜찮으려나. 내 처지도 생각 안하고 그런 감상을 내놓으려던 찰나 그녀가 물었다. 프로듀서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지, 정말로 예전 그대로였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그런 표정까지도.
그녀로부터 앞으로 듣게 될 얘기를 미리 들을 수 있었다. 며칠 전부터 있었던 현역들과의 만남 그리고 프로듀서의 깜짝 방문, 그 이유에 대한 얘기를. 그리고 그 얘기를 전부 들은 뒤의 감상은, 잘도 그런 걸 준비했구나. 미리 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뿐이었다.
그녀가 갑자기 내 상태를 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일단 괜찮다고 대답했지만 그녀의 눈빛에서 의심이 거둬지는 일은 없었다. 왜 내 주변에는 사람 말을 못 믿는 사람들뿐일까. 아, 그 반대일지도.
그녀의 눈동자가 점차 나를 뒤흔들려던 순간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슨 시간에 늦었으니 빨리 가봐야 된다면서. 그러지 않으면 자기를 찾으러 사람들이 올 것이라면서. 그녀답지 않으면서 참으로 그녀다운 행동이었다. 그로부터 한동안 기다리니 프로듀서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 그동안 이곳에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에게 감사했다.
사무실에 문을 여니 커다란 가슴이 나를 끌어안았다. 면전에서 들리는 지나치게 선명하게 들리는 선배라는 말을 보건대 후배였다. 날 놀래킬 셈이었다면 대성공인데, 어째서일까. 분명 본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이 기분은.
프로듀서가 후배를 나로부터 떼어냈다. 그래 이제 인정하자. 여긴 나만 빼고 전부 그대로인 거야. 그녀의 사랑이 양껏 묻은 애교를 보다가 프로듀서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후배도 따라 앉았는데 음, 후배는 분명 프로듀서가 따로 있었을 텐데 왜 여기 있을까. 아 앞으로 할 이야기 때문이구나. 그녀의 존재 덕분에 잠깐 잊었던 앞으로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하마터면 두 번 놀랄 뻔했네.
페스티벌 중간에 깜짝 게스트로 내가 나와 솔로곡을 부른다. 그 다음 내가 속했던 유닛과 함께 그 유닛의 곡을 부른다. 그것으로 내 복귀 무대는 끝. 간단하게 설명이 되는 만큼 정말로 간단해 보였다. 쉬워 보였다. 말로는 말이다.
프로듀서와 후배는 모든 준비를 맞춰 놓은 상태라고 했다. 상부의 승인도 이미 받았고 내 앞뒤 무대도 깜짝 등장이 자연스럽게 연결될만한 세트리스트로 맞춰놓았다고. 후배를 포함한 유닛 멤버들도 동의했다며 후배가 밝은 미소로 말했다. 그 미소에 찬 물을 끼얹어야 한다는 게 가슴 아팠다.
프로듀서와 후배에게 내 상태에 대해 솔직히 말했다. 의기양양하게 준비하던 것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됐는데도 그들은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체념하지도 않았다. 후배가 말했다. 같이 무대에 오르고 싶다고. 다시 한 번 밝은 미소를 한껏 품은 나를 보고 싶다고. 나, 미소는 자주 짓는다고 생각했는데.
뒤이어 프로듀서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도 상관없냐고, 포기해도 괜찮겠냐고. 지금의 나로 만족할 수 있겠냐고.
아이돌, 생각해보면 온통 힘든 일뿐이었어. 물론 내가 바라던 것이었고 즐거운 일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하지만, 지금의 내게 다시 아이돌이 되겠냐고 묻는다면 나는 분명 강하게 부정할 거야. 지금의 내 상태를 아니까, 더 상처 받고 괴로워하고 싶지 않아 도망칠 뿐.
집에 돌아와 오랜만에 옷장 아래 서랍을 열어 보았다. 곱게 접힌 유니폼이 있었다. 그것을 펼쳐 들어 거울 앞에 서봤다. 분홍색 장식 투성이의 옷을 걸친 소녀가 한 명 있었다. 이 소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그 자리에서 그런 대답을 한 걸까.
섣불리 행동하는 것은 좋지 않다. 다시 아이돌 업계로 복귀했을 때 초래될 수 있는 악영향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것이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 너무 좋지 않게만 생각할 것도 없다. 그럼 나 보고 어쩌라는 걸까. 날 걱정해서 하는 말일 테니 굳이 말하진 않았지만 친구에겐 말해버렸다.
내 주관이 지극히도 섞인 얘기를 전해들은 친구는 의사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험담을 하려던 건 아니지만, 화살이 너무 깊게 박혔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친구의 물음에 대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눈치를 보는 것도 아니고 고민되기 때문도 아니다. 정말로 나도 내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몰라서 대답할 수 없었다.
그때 그 자리에서, 못하겠다는 말 딱 한마디만 했었더라도 이런 상황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이돌 업계로 복귀하고 싶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다. 나는,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직도 무서워 벌벌 떨고 후드티와 모자 없이는 거리도 걷지 못한다.
혼자서는 도저히 답을 내지 못할 것 같아 친구에게 넌지시 조언을 구했다. 그러나 친구는 평소의 살가운 태도는 차에 두고 왔는지 매몰찼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든 결국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택할 것이라며, 지당한 말씀입니다만 그것조차 명확하지 않은 나는 어찌 해야 하는 걸까.
계속 혼자 끙끙 앓는 표정을 짓고 있자니 친구가 한숨을 픽 뱉고는 물었다. 아이돌로 있을 때와 지금 중에 어느 쪽이 더 편하냐고.
아이돌일 때는 무척 바빴다. 물론 항상 바빴던 것은 아니지만, 일을 하고 나면 쓰러지는 건 항상 그랬다. 무엇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꾸준히 받는 레슨조차 끝날 때쯤에는 수치심을 느낄 여유도 없이 퍼질러 눕기 일쑤였다. 늘 허리와 온몸이 쑤셨고 피곤을 이겨내지 못한 날에는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쳐 종점까지 갈 때도 있었다. 하루하루가 성할 날 없는 고생길이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훨씬 편하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카페에서 서빙만 할 뿐이니 뛰어다닐 일도 없어 허리라든지 관절 걱정할 필요 없고, 여름에 땀 흘리지 않고 겨울에 추위를 타지 않아도 된다. 그도 그럴 게 실내니까.
물론 곤란하지 않을 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종종 나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팬을 자칭하는 그들은 내게 온갖 말을 늘어놓으며 사인과 사진 촬영응 요구한다. 모든 것이 고객을 위한 서비스가 될 수 있는 메이드 카페인 만큼 문제될 것이야 없지만, 그들과 마주할 때마다 늘 속이 메슥꺼웠다. 그것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고생했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곤 모든 것이 편했다. 분주하게 일할 필요 없는 널럴한 근무 환경, 총애를 넘어서 편애의 영역에 도달해버린 점장의 호의. 그리고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상냥한 동료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날 몰아부치지 않아도 되는 참으로 이상적인 세계. 아이돌의 세계와는 다른 편안함이 그곳에는 있었다.
거기까지, 묵묵히 듣기만 하던 친구가 언제나와 같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답은 나온 거야. 그리고 친구는 살짝은 탄내가 나는 고깃덩이를 젓가락으로 집어 내 접시에 올렸다. 맛이 어땠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에 신경이 쏠렸으니까... 물론 그 뒤에 화장실에서 고생하긴 했지만.
친구는 근처 공원에 나를 내려주고 바로 떠났다. 그 뒤 나밖에 없는 공원에 전화 연결음이 두 번 울렸다. 하나는 카페 점장에게 다른 하나는 프로듀서에게. 어느 쪽도 기분 상할 일 없이 전화를 끊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나, 제법 상냥한 세계에 살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후 전화 연결음이 울리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엎질러진 물을 주워담을 수 있는 건 지금밖에 없다.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홀로 고민했다.
겨우 익숙해졌던 일상을 시계태엽 돌리듯 한참을 되감아야 다다를 법한 옛날의 일상.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거기에 다시 적응하려면 큰일이겠네. 이른 아침, 예정된 시간으로부터 한참 전인 시간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그간 쌓아온 것도 있으니 어쩔 수 없나, 아침 먹기 귀찮은데 다시 잠이나 잘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몸은 어느 샌가 세면대 앞에 있었다. 음... 뭐 이쪽이 건강을 위해서는 좋겠지. 그러면서 치약을 짜냈다.
그런 것과는 별개로, 몸은 기억한다는 걸까. 언제 나가야 약속 시간에 장소에 딱 맞춰 도착할 수 있는지, 어떤 역에서 갈아타야 더 빨리 갈 수 있는지. 덕분에 일찍 오긴 했지만, 일찍 와봤자 할 것도 없네. 하긴 냉정하게 말해서 지금의 나는 갓 입사한 회사원 같은 걸 테니까.
예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물론 지금은 다른 의미 때문이지만 아이돌이란 건 굉장하네. 실내에서 후드 모자를 써도 유별난 사람이라든지 시선을 받지 않아도 되고. 그래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곤란하니까, 머리카락까지 안 보이게 꽁꽁 숨겼다. 다행히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사무실에 들어가니 프로듀서와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후배가 있을 줄 알았는데. 뭐, 후배도 사람인데 석상 마냥 한곳에만 있을 수야 없지. 그건 그렇다 치고,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매혹될만한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 빤히 쳐다보면 어떻게 반응하는 게 좋으려나. 일단 그녀처럼 온화한 미소를 짓는 게 좋을까. 오랜만에 만난 건데 어제 본 것처럼 썰렁한 말장난을 하니 정색하는 것도 나름... 그 정도로 마음이 삐뚤어진 것은 아니라 온화한 미소를 짓는 걸로 걸정했다.
그녀는 내 머릿결이 부럽다고 한다. 비단결 같아서 그렇다는데 내가 보기엔 그녀야말로 비단결 머리가 아닐까 싶다. 어쨌든 그렇게 원하는데 내 고집만 부릴 수는 없지. 그녀는 카페에 찾아오는 자칭 팬들과는 다르니까 괜찮을 것 같기도 해 후드 모자를 벗었다. 놀랍게도, 그것만으로도 속이 거북했다. 프로덕션에 오기 전에 이른 아침식사의 여파가 와 근처에서 적당히 해결했는데 아직 소화가 덜 됐나 보다.
톱 아이돌 중에서도 단연 톱이라 할 수 있는 그녀와 독대를 하는 영광을 누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물론 프로듀서도 같이 있지만, 레슨 참관까지 하겠다니. 테트리스의 블록보다 더 치열하게 쌓였을 스케줄 사이에 존재하는 지극히 작은 오프 시간을 고작 나 따위에게 쓰겠다니. 보다 더 유익한 것들이 많을 텐데 어째서, 라고 생각하지만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톱 아이돌의 덕목인 소신과 고집은 역시 종이 한 장 차이네.
레슨을 위해 트레이닝룸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별관에 있기 때문에 생각보다 걸어야 했다. 그래서 후드 모자를 다시 쓰려고 하자 그녀가 내 손을 가로막았다. 그녀 나름대로 나를 생각해서 그런 거겠지만, 무리니까. 이 상태로 밖을 활보하면 어떻게 돼버릴 것 같아 고집을 좀 부렸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드니까 나중에 사과하자.
트레이닝룸이 떠들썩할 거란 것은 예상했다. 그도 그럴 게 다른 곳도 아니고 트레이닝룸이니까.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예약된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세 명뿐인 방 안에서 나는 구석에서 거울로 된 벽을 살폈다. 전면이 거울로 된 벽 안쪽에 쭈구린 채 앉아 있는 내가 있었다. 언제나의 아침에 봤던 멍한 표정을 나. 그런 나 자신을 빤히 쳐다보다가 손가락으로 볼을 꼬집어봤다. 꿈은 아니었다.
메스꺼움을 도저히 이겨내지 못하고 벽에 양손을 대고 어떻게든 버텼다. 그러지 않으면 바닥에 주저앉을 것 같아서. 바닥이 더러워서 그런 건 아니다. 이 프로덕션에서 이곳보다 청소에 신경을 쓰는 곳도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바닥에게 엉덩이를 대접하지 않는 이유는, 주저앉으면 다신 일어서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나. 걱정이 됐는지 그녀가 찾아왔다. 문 너머라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뻔하다. 톱 아이돌이니 세기말 가희니 해도 그녀는 아직 소녀의 가녀린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래서 걱정끼치고 싶지 않았는데. 이것도 사과해야겠네, 하는 김에 같이.
레슨은 내 상태를 고려해 취소됐다. 프로듀서도, 그녀도, 트레이너까지, 문제는 나한테 있었는데 어째서 그들이 사과하는 걸까. 전부 내 잘못인데. 그런 생각이 뒤통수를 눌렀다.
그래, 인정할 건 빨리 인정해야지. 그래야 발빠른 대응을 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빨리 인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도저히 그 파편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은 이르다. 그도 그럴 게 이제 시작했으니까. 시작하자마자 포기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미안하잖아. 날 위해 애써주는 만큼, 나도 힘내는 게 맞는 거야. 그래서 나는 각오를 다졌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다졌다.
수면제에 들어가는 것에 비하면 지극히 소량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부작용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듯하다.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고. 고통을 이겨내지 못할 바에야 피해서 돌아간다는 건가. 그것도 썩 나쁘진 않네.
하지만 지금은 불필요한 호의로 여겨야 한다. 거절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졸린 상태로 무대에 올랐다가 안무 실수라도 했다간, 상상만으로도 오싹하다. 그래서 약의 종류를 바꾸기로 했다. 아, 약 처방 받은 게 지난 주말이었는데. 남은 약 싸들고 가면 환불해주려나. 무리겠지?
그대로 나가려고 하자 의사가 붙잡았다. 저번에 왔을 때 내가 끙끙대며 혼자 늘어놓았던 말들의 다음을 궁금해했다. 의사 입장에서 그런 걸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환자를 걱정하는 것도 의사의 할 일이라면 할 일이겠지.
의사는 잘 되길 바란다고 했다. 응원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나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어떤 표정을 지어버렸을까. 그가 당황하는 기색을 내비치는 걸 보니 썩 유쾌한 표정은 아닐 것 같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방에 거울은 없었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이고 나왔다.
약국은 갈 때마다 좀 꺼려진다. 하지만 병원에서 1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약국은 하나밖에 없으니 뭐. 처방전을 건네면 약사가 친근하게 말을 늘어놓는다. 오늘은 어쩐 일이니. 약이 바뀌었네. 뭐 불편한 거라도 있니. 반가워서 그런다는 건 알지만, 좀 작은 목소리를 말해달라고 쏘아붙이고 싶을 때가 자주 있다. 시끄러우면 쳐다보니까.
약 봉투를 가방에 넣고 프로덕션으로 출발했다. 오후에 레슨이 있다. 하루하루가 빠듯한 지금 하루를 숨만 쉬면서 보낼 수는 없으니까. 지금 전철을 타면 레슨을 받을 시간 전에 도착하고 시간도 남을 것이다. 그럼 느긋하게 점심이라도 먹고 갈까, 그렇게 생각하는 머리와 달리 무작정 전철에 올라타고 보는 몸. 게으른 주제에 성실하네. 그게 실력으로 이어진다면 좋겠지만, 역시 무리려나.
지금 내 댄스 실력은 갓 태어난 아기가 걸음마를 떼는 단계까지 회귀해버렸다. 문득 펭귄이 떠올랐다. 제딴에는 나름 빠르다고 느끼겠지만 상관없는 타인의 시각에서 본다면 그저 뒤뚱거릴 뿐인 둔하기 그지 없는 걸음마. 빨리 물 속에 들어가야겠네.
두 개의 단체곡과 하나의 솔로곡. 주어진 한달로는 형태만 갖출 수 있겠지. 그나마도 원래 안무가 아닌 최소화된 안무로 말이다. 내게 걸린 상냥한 마음씨가 좀 많다. 언젠가 내가 말했지. 진정으로 거절하기 어려운 것은 마왕 같은 절대자의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 아니라, 상냥한 사람의 꽃 한 송이. 그러니 부응할 수밖에 없다. 앓는 소리는, 잠시 접어둬야겠지.
하지만, 세상사 노력한다고 전부 이뤄진다면 세상에 기아와 전쟁은 없겠지. 설 수 있을까. 그곳에 돌아갈 수 있을까. 지금의 내가? 답을 아는 듯하지만 말할 수는 없는 그런 의문이 자꾸만 스쳐 지나간다. 뺑소니범 같으니.
어느덧 프로덕션에 도착했다. 레슨을 위해 별관으로 이동하는 시간까지 합치면 정말 정확한 타이밍에 도착했다. 이렇게까지 절도 있다면 오늘은 녹화할 수 있을지도. 거북하지는 않지만 바람결에 느슨해진 후드 모자를 다시 꾹 눌러 쓰고 프로덕션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결과는, 무리였다. 불쾌했다. 아쉬워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단순히 안무를 따라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선까지는 도달할 수 있다. 정말로 어느 정도 선까지만. 그 이상은 올라가기 힘들다. 그 선까지 다다르는 과정에서 내 몸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기존의 안무를 내게 가장 편한 형태로 개조를 해버린다. 나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반복하고, 뒤늦게 깨달았을 땐 몸에 착 달라붙어 떨어트릴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그래도 상관 없지 않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텐데, 트레이너에게 유닛 활동을 한다는 자각이 있는 거냐고 호통만 한사발 들을 테니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는 게 좋다.
찰흙은 굳어버리면 물 속에 담가두기만 해도 된다. 하지만 아이돌을 물 속에 담가뒀다간 여차하면 살인마가 될 수도 있으니, 힘으로 뜯어고쳐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촬영은 필수다. 안무를 촬영한 영상을 보며 자신이 어느 부분에서 실수하고 틀리는지를 직접 확인하고 파트별로 나누어 하나하나 교정한다.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지만 원래 가장 무난한 방법이 가장 정석적인 방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촬영은 해야 하는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나 스스로도 알고 있다. 지금 내가 추고 있는 안무가 내가 무대에 올랐을 때 선보여야 할 안무에서 한참 멀리 있다는 것을. 그러니 촬영을 해야 한다. 그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알고 있는데도, 촬영을 할 수가 없다.
속이 뒤흔들리는 것을 어떻게든 버텨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몸을 움직일 기력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추스르지 못한 채 자꾸만 거칠어지는 숨소리가 호소했고 모두들 설득당했다. 아, 오늘 내 레슨은 여기까지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촬영한다고 하지 말걸. 그런 후회가 뒤늦게 밀려왔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니 레슨은 얼추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 나 때문에, 내 신체적 한계 때문에 하향 평준화까지 했는데 따라가지 못한다면 미안하잖아. 그래서 필사적으로 달렸고, 그 성과는 선명하게 눈에 그려졌다. 하지만 애초에 출발점이 남들보다 한참 뒤였다. 이제 다른 사람들의 출발점을 지나친 정도니 앞으로 더 박차를 가해야 한다. 게다가 아직 해결 못한 문제도 좀 있고, 힘내지 않으면 안 된다.
요 며칠은 기초 트레이닝에만 레슨 시간을 전부 할애했다. 최댓값을 키워봤자 정말로 최댓값이 나올 확률이 극히 낮다면 차라리 최솟값을 키우는 게 안정적이다. 애초에 이것 말고 선택지도 없었지만. 고작 카메라 렌즈가 있고 없고의 차이일 뿐인데 나는 어째서 벌벌 떠는 것보다도 더한 추태를 부리는 걸까. 레슨이 끝나면 나는 스스로를 책망한다. 끝나기 전에 할 때도 있는데 오늘은 다행히 끝나고 나서였다. 아예 하지 않게 되는 편이 훨씬 좋겠지만.
레슨이 끝나고 나면 이 프로덕션에서 나란 존재는 창틀에 앉은 먼지가 되어버린다. 어쩔 수 없지. 스케줄 때문에 바쁘게 뛰어다녀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한가하게 잡담이라도 나누기에는 사람이 없는데. 후배는 바쁘다. 내가 떨어져나가면서 생겨난 구멍을 메꾸기 위해 동분서주한 것도 후배고, 내가 떠나고 남게 된 빈 자리에 앉은 것도 후배다. 프로듀서는 담당 아이돌의 스케줄에 따라갔다. 톱 아이돌인 그녀는, 톱 아이돌이니까.
물론 그들 말고도 아이돌은 넘쳐난다. 지금도 프로덕션을 서성이고 있는 아이돌이 뒤져보면 한두 명쯤은 있겠지. 그럼 그들을 찾아볼까. 그건 솔직히 말해서, 무리. 애초에 내가 정말로 잡담을 떨고 싶었다면 내가 일했던 사내 카페를 갔을 것이다. 나랑 가장 오래 알고 지냈던 사람이 그곳에 있으니까. 편한 사람은 마음씨 고운 사람보다는 허물 없는 사람이지. 그런 점에서 최고의 대화 상대다. 뭐, 바쁜 와중일 테니 한 소리 듣고 시작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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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은 언제나 주고 받지만 직접 만나는 일은 드문 후배다.
후배가 먼저 시간 있냐고, 만날 수 있냐고 물어보긴 하지만 주로 내 쪽의 사정,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정으로 만남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거리를 걷는 누구나와 같이 평범하게만 보이는... 수수해 보이는 그녀. 그녀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나타나면 이 거리는 어떻게 될까
후배는 어제 같이 하교한 뒤 오늘 등교하며 딱 마주친 반 친구처럼 내게 친숙하게 반응했다. 붙임성이 있다는 것도 아이돌에게는 큰 장점인지라 내심 부러웠다.
그리고 지갑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나를 배려해 코인 가라오케방으로 장소를 옮겼다.
20곡 정도를 번갈아 부르고 코인 가라오케방을 나왔다. 목은 멀쩡했다. 그래서 울컥했지만 다행히 추한 꼴은 보이지 않았다.
감자튀김을 먹으며 나누는 짧은 담소. 최근 선배 아이돌이 자신을 못 잡아 먹어 안달이라든지, 프로듀서가 묘한 시선으로 추근덕댄다든지, 주로 그녀의 불평불만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입가는 한없이 가벼웠다.
나는 대답했다. 잘 지낸다고.
후배는 다음에 만날 날을 기약했다. 하지만 당분간은 힘들 것 같았다. 주로 후배의 사정으로. 후배는 나와 달랐기에 무척이나 바쁘게 살고 있다. 그것이 부러웠다.
내 돈으로 산 거라면 어떻게든 참아내지 않았을까. 그런 시시껄렁한 생각 너머에 후배의 얼굴이 있었다. 다시 만날 날을 야구공처럼 던질 수 있다면 온힘을 다해 던지고 싶어졌다. 그 뒤에는 또 게워내야겠지만.
후배가 자신은 갑자기 생긴 스케줄 때문에 가지 못하게 됐다면서 내게 티켓을 줬다. 시간 있으면 가보라고. 딱히 할 일은 없어서 그러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 후배한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왜 이렇게 내게 잘해주는 걸까. 혹시 나를... 그럴 리는 없겠지. 세상은 만화가 아니니까.
나는 아무도 눈길 주지 않을 구석자리에서 사이리움에 건전지를 채웠다. 오래된 사이리움은 형광등 못지 않은 빛을 냈고 색도 제대로 나왔다. 그것이 왠지 주인을 닮은 것 같아 마냥 눈부신 빛깔이 씁쓸해 보였다.
햄버거를 점심으로 먹는 건 어제도 오늘도 마찬가진데 왜 오늘 먹는 햄버거는 척 보기에도 저렴해 보이는 걸까. 감자튀김을 먹자니 낯익은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후배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전화를 해보려다 말았다. 바빠서 라이브도 못 간다는 애가 전화를 받을 여유가 있을 리 없겠지.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려니 외면하려 해도 기대감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어쩌면... 그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심장이 빵빵해져 터질 것 같은 가운데 그는 내게 물었다. 혹시 콜북 받았냐고. 심장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걸 꺼낼 수는 없어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고 콜북을 하나 얻었다. 친절한 사람이었다.
거의 맨 마지막으로 들어갔지만 좌석은 거의 맨 앞자리 무대가 한눈에 보이는 명당이었다. 이런 귀한 자리일 거라곤 생각조차 못했는데. 휴대폰을 꺼내 보니 후배한테서의 연락이 있었다. 도착하셨나요. 한참 전에 온 문자였다. 응, 이라고 답장을 보내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려는데 답장이 도착했다. 재밌게 보세요. 쉬는 시간인 걸까.
콜북은 받았지만 콜북에 적힌 노래보다 그러지 않은 노래가 훨씬 많았다. 그리고 나는 그 수많은 노래를 전부 들어본 것이 아니라서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콜을 해야 했다. 346프로의 라이브였다면 그럴 필요 없는데. 아니, 그럼 애초에 콜을 할 일도 없으려나.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오렌지색으로 고정된 것이랄까, 오렌지색이면 멀리서 볼 때 울오인 줄 알 테니까. 그런데 그럼 나는 타이밍도 모르고 무작정 울오를 꺾는 사람이 돼버리려나. 상관은 없지만 라이브가 끝날 때까지 오렌지색을 일관되게 주장하는 눈치 없는 사이리움이 아무리 생각해도 주인을 닮았다는 생각이 혀끝을 씁쓸하게 적셨다.
파티가 끝나도 결코 식지 않는 열기가 끝나지 않는 파티를 요구할 때 나는 그제야 내 주변을 살필 수 있었다. 정말 많은 관객들이 앵콜을 외치고 있었고 무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노래가 이어지길 바라는 관객들과 누군가 채워야 할 무대. 잠깐이지만 가슴이 뛰었다. 그래서 조금 서글퍼졌다.
햄버거를 먹고 돌아오는 길에 라이브니까 필요하겠지 싶어 샀던 건데 가방에 넣어두고 잊은 모양이다. 물은 미지근해져 있었고 목 상태는 멀쩡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지 말 걸 그랬나. 백 엔도 안 되는 돈이지만 묘하게 아깝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보니 후배가 또 문자를 보냈었다. 재밌게 보셨나요. 이 시간이면 후배의 스케줄도 끝났겠지. 답장을 보내려다가 그만뒀다. 자기 전에 먹어야 하는 약은 분명 단맛이 나는데 가끔씩 끝맛이 쓸 때가 있다.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만나 많은 시간을 함께했고 지금은 서로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친구다. 굳이 말하자면 내가 좀 더 아래에 있다.
약속 시간은 오후 1시였고 내가 일어난 시간은 12시 직전이었다. 그마저도 친구가 전화해줘서 깬 것이니 전화가 안 왔다면 1시를 넘겼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약 효과가 굉장히 잘 받은 모양인데, 이것도 의사한테 말해야 하나.
공원에 도착하니 친구가 어린애들이 즐겨 타는 그네에 덩그러니 방치되어 있었다. 헤드셋으로 노래를 듣고 있는 모습이 왠지 화보 촬영을 하는 모델 같아서 그냐도 지금 속으로는 썰렁한 농담을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잘 지내려나. 뭐 나보단 잘 지내겠지.
시내에 도착한 우리는 무려 유료 주차장으로 직행했다. 그녀가 말하길 괜히 주차할 곳 찾아 돌아다니면 시간도 기름도 낭비할 뿐이라고 한다. 못 본 한달 사이 그녀가 바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역시 그녀는 그녀였다.
아무튼 내가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는 공간은 절대 아니었다. 만화에서 나오는 중력을 다루는 초능력자와 싸우는 주인공은 이런 기분이겠지. 그때 친구가 말했다. 스프를 먹는 스푼은 따로 있다고. 아무래도 나 혼자만의 싸움인 모양이다.
그러면서 식사는 괜찮았냐고 내게 물었다. 사실 알고 있다. 친구는 이런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 바에야 그 돈으로 고기 파티를 할 사람이다. 하지만 그랬다간 내 몸 상태에 안 좋은 영향이 가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겠지. 그래서 나는 맛있다고. 무척 맛있는 식사였다고 대답했다.
웃으며 힘내고 있다는 말을 하면 그대로 끝낼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억지를 부리진 않기로 했다. 애초에 믿지도 않겠지.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대답했고 친구는 내가 말하는 내내 눈썹 하나 씰룩이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사람이 많은 곳에는 언제나 노래가 있기 마련이다. 100엔에 두 곡을 부를 수 있는 코인 가라오케도 마찬가지다. 평소라면 네 곡을 부를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매겠지만 그녀는 내 노래에 적어도 50엔의 가치가 있다고 여긴 모양이다.
오랜만에 즐겁다는 마음을 가져 벨트를 푼 여유는 바지가 내려가면 정신을 차릴 것이고 나는 섬뜩함을 느낄 것이다. 노래를 부르던 중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눈이 돌아갔다. 그곳에 웬 처음 보는 남자가 있었고 나와 그의 눈은 서로를 똑바로 쳐다봤다.
마주쳤다. 마주쳐버렸다.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 재회했다. 그것을 친구도 알아챘는지 그 노래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코인 가라오케를 나왔다. 아직 쓰이지 못한 50엔과 희미한 단말마가 나를 붙잡으려 했지만 친구의 경호는 그 이상으로 집요했다.
저녁식사까지 얻어먹었으면 택시비라도 내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 호의가 계속되면 어느 순간부터 권리인 줄 알게 된다는 말도 있으니까. 하지만 지갑을 꺼내기도 전에 친구가 내 입의 지퍼를 잠갔다. 그리고 말했다.
문자를 확인한 것은 목욕을 마치고 나왔을 때였다. 낯익은 이름의 우체부가 티켓 한 장을 슬그머니 놔두고 떠났다. 티켓에 새겨진 날짜는 이틀 뒤, 그래도 생각할 시간이 있어 다행이었다.
간다면 분명 마주칠 수밖에 없겠지, 그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가지 않는다는 선택지를 과연 내가 고를 수 있을까. 가뜩이나 여린 마음씨를 가진 그녀다. 분명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피어난 용기로 전한 편지일 터. 그것을 아는 내가 과연 거절할 수 있을까.
세계의 반을 주겠다는 마왕의 제안보다 더 거절 못 할 것이 있다면 분명 상냥한 사람의 요청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이제는 누구도 봐주지 않을 거라는 마음에 접어뒀던 풀메이크업을 얼굴에 덮어씌울 리가 없지.
뮤지컬을 하는 오페라홀은 무척 컸고 다양한 것들이 있었다. 다행히 편의점도 있어 컵라면으로 대충 점심을 해결했다. 간소하다 못해 가난해 보이는 점심을 먹는 동안 시선은 자꾸만 길게 늘어선 줄로 향했다. 뮤지컬을 보기 위해 기다리는 듯보이는 무수한 사람들을 보다 도착하자마자 교환했던 티켓을 확인했다. 새까만 바탕에 하얀 글씨로 적혀 있는 VIP. 고급브랜드 초콜릿의 포장지 같은 종이 조각을 보고 안심했다. 일반석이었다면 돌아갔을지도 모르기에.
뮤지컬이 시작되길 기다리는 웅성거림들이 어둠에 푹 담가질 때까지 작은 안내 책자를 살폈다. 첫 페이지 인물 소개란에 화보집에서나 볼 법한 우아한 포즈를 취한 그녀가 있었는데 은은하게 향기가 풍겼다. 청초함의 대명사인 그녀가 주로 쓰던 향수 냄새가. 분명 평범한 종이인데도 왠지 코끝을 간질였다.
한걸음 두걸음 걷고 있어. 어제도 오늘도 멈출 수 없어. 닿을 듯 말 듯 잡힐 듯 말 듯 나 애 타게 바라죠. 이젠 너와 나의 시간을 소중히, 또 우리들만의 땀방울이 헛되지 않길 기적의 밝은 빛 가득히. 내 꿈이, 꿈이 이뤄지게 될 거야. 너와 내가 나눌 밝은 빛. 무지개의 저편을 쫓아 그녀는 쉬지 않고 달린다. 그렇기에 너무나 눈부셨고 그래서 더더욱 눈을 뗄 수 없었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그녀는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숨이 고르지 못한 채 자꾸만 헐떡이는 그녀. 아무래도 퇴장하자마자 3층으로 달려온 듯싶었다. 천천히 와도 됐는데. 여기까지 온 이상 피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돌아갈까 생각을 한 번도 안했던 건 아니지만 그건 뮤지컬이 시작하기도 한참 전의 일이니 세이프가 아닐까 생각할 때였다.
그녀의 프로듀서는 공연이 끝난 직후 돌아갔다고 한다. 그녀가 돌려보낸 것이다. 이 순간을 위해서.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분명 오래간만의 재회였을 텐데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어린아이만이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맑고 순수한 눈망울. 공연을 위해 입은 화려한 드레스마저 그대로 집어삼켜버린 청초하고 수수한 인상. 은은하게 풍기는 포근한 향기마저. 모든 것이 변하지 않은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 변한 것은 그곳에서 쫓겨난 나뿐이란 걸까.
그건 그렇고, 대화를 하면서 느낀 거지만 그녀는 나에 대한 호칭 정리를 아직도 못한 듯싶었다. 편하게 부르다가도 아차 하곤 경어를 사용하고. 하긴 그녀는 손에 꼽을 만큼 특별한 사람이니까.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편하게 부르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럴 수 없다고 하면서도 빨리 받아들였다. 그리고 말했다. 이야기한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봤냐고. 무슨 이야기를요. 그렇게 되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음, 분명 편하게 말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만한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며칠 전 후배가 내게 분명 그 말을 전했다고, 듣지 못했냐고 그녀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뭔가 중요한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그런 이야기였나. 기억을 더듬어봐도 이미 몇 년은 지난 일처럼 흐릿해져 무의미한 손동작일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느새 내일이다. 정기 검진을 받는 날이다.
딸랑거리는 종소리. 자연스럽게 나온 인사말. 낯익은 얼굴이 부른 내 이름. 절묘하게 이어진 삼박자가 내 팔목을 붙잡아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러면서 우스운 표정이라도 지은 건지 그가 그리운 표정을 지었다. 마음의 여유만 충분했어도 비슷한 표정을 따라 지었겠지.
그를 카페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자리로 옮겼다. 손님인 그가 어디에 앉는지는 자유지만 손님으로서 온 게 아니라면 얘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행히 점장님이 배려를 해준 덕분에 빨리 그와 마주할 수 있었다. 묘하게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에 새삼 그가 나의 팬이었다는 걸 상기했다.
그는 서론 같은 조미료를 필요한 만큼만, 때론 그보다도 아끼는 사람인지라 내 몸 상태에 대한 것만 묻고 바로 주제로 들어갔다. 그는 이전에 만났던 두 현역 종사자들의 제안에 대한 얘기부터 꺼냈다. 물론 그 중에 하나는 기억도 제대로 안 나고 그나마 기억나는 다른 하나는 시간을 달라고 말한 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았다. 이왕이면 온전한 하루 정도는 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볼멘소리를 내기에는 내 무관심이 큰 몫을 했으니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렇지만 복귀라니, 정말로 가능한 얘기일까. 말로는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그마저도 못하는 것이 나고. 그런 나이기에 스스로도 자신에게 확신을 가질 수 없는데 어떻게 그는 내게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걸까.
한참 얘기하던 그가 갑자기 괜찮냐고 물어왔다. 내 안색이 안 좋아졌다면서 그는 내 몸 상태를 걱정했다. 아무렇지 않다고 말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의심만 차 있었다. 오히려 현기증이 났다고 말한 뒤에야 그는 의심을 거뒀다. 뭐 거짓말은 아니니까.
아니란 것은 알고 있다. 나를 보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간에는 보통 한산하니까. 날 찾아오는 손님이 없어서 그나마 마음이 놓이는 시간대니까.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새삼 느낀 덕분에 되새기는 거지만 일하고 있는 곳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건 좋은 거구나. 조퇴도 할 수 있고. 물론 봉급에서는 빠지겠지만 그것마저 바라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지. 남아 있을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이후 나는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피곤해서는 아니고 단지 왠지 모르게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취소, 날 알아보는 사람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어색하게나마 웃을 수 있겠지만 지금은 도무지 그럴 기분이 아니니까.
저번주 주말 병원에서 나눴던 얘기, 역시 말했어야 했나.
하지만 왠지 먹고 싶지 않아 먹지 않았다. 먹으나 마나일 것 같아서. 그래서일까 아니면 내가 예상했던 대로일까, 썩 개운치 않은 꿈을 꿨다.
오랜만이랄까, 하긴 1년도 안 됐다지만 한달만에 보는 친구에게도 오랜만이라는 말 쓰니까 상관없겠지.
프로듀서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금 도착했는데 어디인가요. 보내자마자 답장이 돌아왔다. 왠지 학교 수업 시간에 종종 했던 공책으로 대화하기 같다. 아무튼 돌아온 답장에서 그는 지금 돌아가는 중이니 갈 때까지 사무실에서 기다려 달라고 한다. 이걸로 받은 건 돌려준 셈인가.
실내에서 후드를 눌러 쓰는 건 눈에 띌만한 행동이긴 하지만 보는 눈부터가 없다면 아무 문제 없다. 여기는 프로덕션에 있는 카페에서 일하던 때의 내가 휴식시간 때마다 눌러 앉던 곳. 안에서 밖을 보는 건 가능해도 그 반대는 불가능해 마음 놓고 늘어질 수 있는 곳이었는데, 그런 곳이 있다는 게 한 사람만의 비밀일 수는 있다는 건 너무 희망 찬 생각이었나. 마주쳐버렸다.
커진 눈으로 날 빤히 쳐다보던 그녀는 곧 심드렁한 표정으로 돌변해 배를 긁적거린다. 전부터 종종 생각했던 거지만 엄청 의연하네. 의연하지 못한 내가 그녀를 향해 인사하자 그녀도 오랜만이라고 대답했다. 역시 오랜만이라는 말 쓰는구나.
그녀로부터 앞으로 듣게 될 얘기를 미리 들을 수 있었다. 며칠 전부터 있었던 현역들과의 만남 그리고 프로듀서의 깜짝 방문, 그 이유에 대한 얘기를. 그리고 그 얘기를 전부 들은 뒤의 감상은, 잘도 그런 걸 준비했구나. 미리 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뿐이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점차 나를 뒤흔들려던 순간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슨 시간에 늦었으니 빨리 가봐야 된다면서. 그러지 않으면 자기를 찾으러 사람들이 올 것이라면서. 그녀답지 않으면서 참으로 그녀다운 행동이었다. 그로부터 한동안 기다리니 프로듀서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 그동안 이곳에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에게 감사했다.
프로듀서가 후배를 나로부터 떼어냈다. 그래 이제 인정하자. 여긴 나만 빼고 전부 그대로인 거야. 그녀의 사랑이 양껏 묻은 애교를 보다가 프로듀서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후배도 따라 앉았는데 음, 후배는 분명 프로듀서가 따로 있었을 텐데 왜 여기 있을까. 아 앞으로 할 이야기 때문이구나. 그녀의 존재 덕분에 잠깐 잊었던 앞으로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하마터면 두 번 놀랄 뻔했네.
프로듀서와 후배의 제안을 간단히 말하면 복귀 무대를 가지자는 것이었다. 그것도 프로덕션에서도 손꼽히는 거대한 프로젝트 중 하나인 섬머 페스티벌에서 말이다. 와, 이게 인터넷 방송에서 종종 봤던 단두대 매치라는 거구나.
프로듀서와 후배는 모든 준비를 맞춰 놓은 상태라고 했다. 상부의 승인도 이미 받았고 내 앞뒤 무대도 깜짝 등장이 자연스럽게 연결될만한 세트리스트로 맞춰놓았다고. 후배를 포함한 유닛 멤버들도 동의했다며 후배가 밝은 미소로 말했다. 그 미소에 찬 물을 끼얹어야 한다는 게 가슴 아팠다.
뒤이어 프로듀서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도 상관없냐고, 포기해도 괜찮겠냐고. 지금의 나로 만족할 수 있겠냐고.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서, 어째서
내일은 병원에 가는 날이 아니지만, 아무래도 가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내 주관이 지극히도 섞인 얘기를 전해들은 친구는 의사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험담을 하려던 건 아니지만, 화살이 너무 깊게 박혔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그 자리에서, 못하겠다는 말 딱 한마디만 했었더라도 이런 상황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이돌 업계로 복귀하고 싶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다. 나는,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직도 무서워 벌벌 떨고 후드티와 모자 없이는 거리도 걷지 못한다.
계속 혼자 끙끙 앓는 표정을 짓고 있자니 친구가 한숨을 픽 뱉고는 물었다. 아이돌로 있을 때와 지금 중에 어느 쪽이 더 편하냐고.
그에 비하면 지금은 훨씬 편하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카페에서 서빙만 할 뿐이니 뛰어다닐 일도 없어 허리라든지 관절 걱정할 필요 없고, 여름에 땀 흘리지 않고 겨울에 추위를 타지 않아도 된다. 그도 그럴 게 실내니까.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곤 모든 것이 편했다. 분주하게 일할 필요 없는 널럴한 근무 환경, 총애를 넘어서 편애의 영역에 도달해버린 점장의 호의. 그리고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상냥한 동료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날 몰아부치지 않아도 되는 참으로 이상적인 세계. 아이돌의 세계와는 다른 편안함이 그곳에는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거기까지, 묵묵히 듣기만 하던 친구가 언제나와 같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답은 나온 거야. 그리고 친구는 살짝은 탄내가 나는 고깃덩이를 젓가락으로 집어 내 접시에 올렸다. 맛이 어땠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에 신경이 쏠렸으니까... 물론 그 뒤에 화장실에서 고생하긴 했지만.
이후 전화 연결음이 울리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엎질러진 물을 주워담을 수 있는 건 지금밖에 없다.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홀로 고민했다.
이윽고 나는 주사위를 굴리기로 했다. 1과 6밖에 없는 주사위를.
그런 것과는 별개로, 몸은 기억한다는 걸까. 언제 나가야 약속 시간에 장소에 딱 맞춰 도착할 수 있는지, 어떤 역에서 갈아타야 더 빨리 갈 수 있는지. 덕분에 일찍 오긴 했지만, 일찍 와봤자 할 것도 없네. 하긴 냉정하게 말해서 지금의 나는 갓 입사한 회사원 같은 걸 테니까.
사무실에 들어가니 프로듀서와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후배가 있을 줄 알았는데. 뭐, 후배도 사람인데 석상 마냥 한곳에만 있을 수야 없지. 그건 그렇다 치고,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매혹될만한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 빤히 쳐다보면 어떻게 반응하는 게 좋으려나. 일단 그녀처럼 온화한 미소를 짓는 게 좋을까. 오랜만에 만난 건데 어제 본 것처럼 썰렁한 말장난을 하니 정색하는 것도 나름... 그 정도로 마음이 삐뚤어진 것은 아니라 온화한 미소를 짓는 걸로 걸정했다.
톱 아이돌 중에서도 단연 톱이라 할 수 있는 그녀와 독대를 하는 영광을 누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물론 프로듀서도 같이 있지만, 레슨 참관까지 하겠다니. 테트리스의 블록보다 더 치열하게 쌓였을 스케줄 사이에 존재하는 지극히 작은 오프 시간을 고작 나 따위에게 쓰겠다니. 보다 더 유익한 것들이 많을 텐데 어째서, 라고 생각하지만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톱 아이돌의 덕목인 소신과 고집은 역시 종이 한 장 차이네.
트레이닝룸이 떠들썩할 거란 것은 예상했다. 그도 그럴 게 다른 곳도 아니고 트레이닝룸이니까.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예약된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세 명뿐인 방 안에서 나는 구석에서 거울로 된 벽을 살폈다. 전면이 거울로 된 벽 안쪽에 쭈구린 채 앉아 있는 내가 있었다. 언제나의 아침에 봤던 멍한 표정을 나. 그런 나 자신을 빤히 쳐다보다가 손가락으로 볼을 꼬집어봤다. 꿈은 아니었다.
그런데,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봐.
원래 이랬나, 진짜로?
거짓말이지? 건전지가 다 된 거 아니야?
그래, 그런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시계 바늘이 저렇게 느리게 갈 리가 없어.
그런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던 이들은 잠깐 숨 좀 고르고 있으니 자기들끼리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결정한 듯 프로듀서가 트레이닝룸을 나갔다. 겨우 숨을 진정시키고 바닥에 앉을 수 있게 됐을 쯤에 프로듀서는 돌아왔다. 손에는 카메라와 삼각대가 들려 있었다.
요컨대, 내가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안무 포인트를 캐치해 그것을 주요 동작으로 한 안무를 재편성한다. 늘 궁금한 건데 이 사람들의 친절은 대체 어디가 끝일까. 혹시 보증도 서달라고 하면 서주지 않을까, 아 역시 그건 무리겠지. 애초에 부탁할 마음도 없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런 자기혐오에 빠질 시간이 없다. 모든 것이 나를 위해 돌아가고 있다면 나도 그 모든 것을 위해 힘내야겠지. 그런 각오로 카메라 앞에 섰다.
메스꺼움을 도저히 이겨내지 못하고 벽에 양손을 대고 어떻게든 버텼다. 그러지 않으면 바닥에 주저앉을 것 같아서. 바닥이 더러워서 그런 건 아니다. 이 프로덕션에서 이곳보다 청소에 신경을 쓰는 곳도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바닥에게 엉덩이를 대접하지 않는 이유는, 주저앉으면 다신 일어서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레슨은 내 상태를 고려해 취소됐다. 프로듀서도, 그녀도, 트레이너까지, 문제는 나한테 있었는데 어째서 그들이 사과하는 걸까. 전부 내 잘못인데. 그런 생각이 뒤통수를 눌렀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도저히 그 파편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은 이르다. 그도 그럴 게 이제 시작했으니까. 시작하자마자 포기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미안하잖아. 날 위해 애써주는 만큼, 나도 힘내는 게 맞는 거야. 그래서 나는 각오를 다졌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다졌다.
매일 먹는 약이 문제였다. 아침에 한 번 먹고, 자기 전에 한 번 먹는 약. 왠지 의심스러워 의사를 찾아가보니 역시나였다. 수면제 성분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불필요한 호의로 여겨야 한다. 거절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졸린 상태로 무대에 올랐다가 안무 실수라도 했다간, 상상만으로도 오싹하다. 그래서 약의 종류를 바꾸기로 했다. 아, 약 처방 받은 게 지난 주말이었는데. 남은 약 싸들고 가면 환불해주려나. 무리겠지?
의사는 잘 되길 바란다고 했다. 응원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나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어떤 표정을 지어버렸을까. 그가 당황하는 기색을 내비치는 걸 보니 썩 유쾌한 표정은 아닐 것 같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방에 거울은 없었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이고 나왔다.
약 봉투를 가방에 넣고 프로덕션으로 출발했다. 오후에 레슨이 있다. 하루하루가 빠듯한 지금 하루를 숨만 쉬면서 보낼 수는 없으니까. 지금 전철을 타면 레슨을 받을 시간 전에 도착하고 시간도 남을 것이다. 그럼 느긋하게 점심이라도 먹고 갈까, 그렇게 생각하는 머리와 달리 무작정 전철에 올라타고 보는 몸. 게으른 주제에 성실하네. 그게 실력으로 이어진다면 좋겠지만, 역시 무리려나.
두 개의 단체곡과 하나의 솔로곡. 주어진 한달로는 형태만 갖출 수 있겠지. 그나마도 원래 안무가 아닌 최소화된 안무로 말이다. 내게 걸린 상냥한 마음씨가 좀 많다. 언젠가 내가 말했지. 진정으로 거절하기 어려운 것은 마왕 같은 절대자의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 아니라, 상냥한 사람의 꽃 한 송이. 그러니 부응할 수밖에 없다. 앓는 소리는, 잠시 접어둬야겠지.
어느덧 프로덕션에 도착했다. 레슨을 위해 별관으로 이동하는 시간까지 합치면 정말 정확한 타이밍에 도착했다. 이렇게까지 절도 있다면 오늘은 녹화할 수 있을지도. 거북하지는 않지만 바람결에 느슨해진 후드 모자를 다시 꾹 눌러 쓰고 프로덕션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결과는, 무리였다. 불쾌했다. 아쉬워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찰흙은 굳어버리면 물 속에 담가두기만 해도 된다. 하지만 아이돌을 물 속에 담가뒀다간 여차하면 살인마가 될 수도 있으니, 힘으로 뜯어고쳐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촬영은 필수다. 안무를 촬영한 영상을 보며 자신이 어느 부분에서 실수하고 틀리는지를 직접 확인하고 파트별로 나누어 하나하나 교정한다.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지만 원래 가장 무난한 방법이 가장 정석적인 방법이 되는 것이다.
속이 뒤흔들리는 것을 어떻게든 버텨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몸을 움직일 기력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추스르지 못한 채 자꾸만 거칠어지는 숨소리가 호소했고 모두들 설득당했다. 아, 오늘 내 레슨은 여기까지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촬영한다고 하지 말걸. 그런 후회가 뒤늦게 밀려왔다.
요 며칠은 기초 트레이닝에만 레슨 시간을 전부 할애했다. 최댓값을 키워봤자 정말로 최댓값이 나올 확률이 극히 낮다면 차라리 최솟값을 키우는 게 안정적이다. 애초에 이것 말고 선택지도 없었지만. 고작 카메라 렌즈가 있고 없고의 차이일 뿐인데 나는 어째서 벌벌 떠는 것보다도 더한 추태를 부리는 걸까. 레슨이 끝나면 나는 스스로를 책망한다. 끝나기 전에 할 때도 있는데 오늘은 다행히 끝나고 나서였다. 아예 하지 않게 되는 편이 훨씬 좋겠지만.
물론 그들 말고도 아이돌은 넘쳐난다. 지금도 프로덕션을 서성이고 있는 아이돌이 뒤져보면 한두 명쯤은 있겠지. 그럼 그들을 찾아볼까. 그건 솔직히 말해서, 무리. 애초에 내가 정말로 잡담을 떨고 싶었다면 내가 일했던 사내 카페를 갔을 것이다. 나랑 가장 오래 알고 지냈던 사람이 그곳에 있으니까. 편한 사람은 마음씨 고운 사람보다는 허물 없는 사람이지. 그런 점에서 최고의 대화 상대다. 뭐, 바쁜 와중일 테니 한 소리 듣고 시작하겠지만.
지금은 거기에 카메라 렌즈까지 합쳐 네 가지네. 이 중에서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할 건 카메라 렌즈려나.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건 아무래도 첫 번째와 두 번째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