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

새콤달콤한 커피를 맛보신 적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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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9-25, 2012 19:45에 작성됨.

내가 765프로덕션에 프로듀서로 입사해 하기와라 유키호라는 아이돌 후보생을 프로듀스하게 된지도 어느새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 765프로는 꽤나 유명세를 탈 수 있었고, 내가 프로듀스하고 있는 유키호도 같은 765소속의 호시이 미키나 아마미 하루카 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경쟁력을 갖춘 아이돌로 성장해주었다. 메이저 데뷔도 했고 말이다.
아아… 처음에는 정말 곤욕이었는데 말이지. 그 아이. 매사에 부정적인 생각 만만이라 속칭 ‘구워삶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 많이 다투기도 했고, 그때마다 토라져버린 유키호를 달래느라 내 자신이 보살이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생각도 한 적이 부지기수였다. 이정도 인내심으로 다른 일을 했었더라면 대성하지 않았을까 싶었을 정도로.

애초에 나는 왜 프로듀서가 되고 싶어 했던 걸까. 765프로덕션의 면접을 보기 전 날. 그날의 다짐은 유키호를 만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이미 추억속의 산물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어느 정도 나와 유키호와의 신뢰관계가 구축되어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니. 어쩌면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할 뿐인지도 모른다. 유키호. 남자를 아직도 어려워하지 않던가. 그나마 나에겐 우호적인 것 같지만. 그 아이야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녀석이었으니 모르지 뭐.
그래. 난 그때까지도 유키호를 어려워하고 있었다. 유키호 역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반년 전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유키호가 아닌 타카츠키 야요이나 가나하 히비키 같은 아이들을 프로듀스하리라. 라고 생각할 만큼. 그 애들은 원 패턴이라 좋지 않은가. 실제로도 그녀들을 맡은 프로듀서들은 랭크 업에 대해 고민했으면 했지 아이돌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지는 않았다.

그랬던 나의 인식을 바꿔놓았던 건, 이제 막 하기와라 유키호라는 이름이 세간에 조명받기 시작할 때의 일이었다.



출근길은 항상 즐거워야 한다. 비록 유키호와 또 투닥거릴 걸 생각하면 골치가 아팠지만, 그래도 유키호가 성장해나가는 걸 보고 있으면 괜시리 흐뭇한 느낌에, 요즘의 나는 꽤나 기분이 좋다.

“굿 모닝-!”

다른 아이돌들을 맡고 있는 프로듀서들과 인사를 나누고 내 자리로 향하자, 내 자리 맞은편에 있는 사무원, 오토나시 코토리 씨가 언제나처럼 빙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아. 좋은 아침이에요. 프로듀서.”

“예이. 좋은 아침입니다. 코토리 씨. 그러니까 오늘도 모닝커… 으잉?”

코토리 씨 특제 모닝커피는 없었다. 그 대신 내 책상 위에 놓여있는 것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녹차였다.

“뭔가요. 이건.”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프로듀서들은 언제나의 커피였다. 그런데 왜 내 자리에만 녹차가…
하지만 코토리 씨는 대답 없이 빙글빙글 웃을 뿐이었다.

…이게 웬 날벼락이지. 커피로 하루를 시작하지 않으면 그날 내내 컨디션이 별로인데 말이다. 솔직히 범인은 알 것 같지만. 아니. 모르고 있더라도 저 구석에 숨어 얼굴만 내밀고 내 모습을 바라보는 유키호의 모습을 본다면 자연스레 범인을 알게 될 것이다.

“유키호.”

“네, 네에? 아. 프, 프로듀서. 안녕하세요.”

마치 이제야 내가 온 걸 알았다는 듯 시치미를 뗀다. 이 녀석이 요즘 이름이 오르내리는 아이돌이 맞는가 싶은 정도의 어색한 연기였다. 프로듀서로서 정말 통탄할 일이었다.

“이 녹차는 뭐니.”

“그, 그, 글쎄요오… 누가 그랬을까요.”

하루카 흉내를 내려 해봤자 너에겐 무리다. 아니. 그것보다 그건 하루카 전용 표정이잖아. 남의 아이돌 아이덴티티를 그렇게 쉽게 가로채도 되는 거냐.
나는 아무 말 없이 유키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2분 가량 지나자 유키호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제, 제가 탔어요… 그렇게 빤히 보지 마세요오…”

이 녀석이 차를 좋아한다는 사실이야 이미 프로덕션의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다. 문제는 커피를 지독하게 사랑하는 나에게 커피 대신 차를 권하는 이유가 뭐냐는 거다.

“그거야… 녹차가 커피보다 몸에 좋으니까요. 커피만 너무 많이 마시면 몸에 안 좋잖아요.”

“내 몸은 내가 신경 써. 그리고 끽해야 하루에 네다섯 잔밖에 안 마시는데 뭐가 많이 마신다는 거야? 너도 맨날 차를 보온병에 넣어가지고 다니잖아.”

“차랑 커피랑은 달라요!”

아. 또 귀찮은 스위치를 눌러버렸군.
그 후로 유키호의 ‘녹차 만능론’ 일장연설이 펼쳐질 분위기였기에, 나는 재빨리 그녀를 제지했다.

“아. 됐고. 빨리 커피나 가져와. 이건 네가 마시고.”

역시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뾰로통한 표정을 지은 유키호는 아예 내게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네가 그러면 어쩔 건데. 그럼 내가 직접 타먹어야지.
유키호는 내가 커피를 새로 타는 모습을 발을 동동 구르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날 퇴근할 때까지 유키호는 나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오늘 유키호에게 별다른 스케줄이 없다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젠장.



다음 날.

출근한 내 책상에는 어김없이 녹차가 놓여 있었다. 
나는 아직도 화가 안 풀린 듯 뾰로통한 표정의 유키호를 보며 아무 말 없이 커피를 타러 갔으나… 

맙소사. 주전자가 없어졌다.
코토리 씨에게도, 다른 프로듀서들에게도, 아이돌들에게도 심지어 사장님에게까지 물어봤으나 아무도 주전자의 행방을 몰랐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다들 유키호와 한 통속이 되어 나를 몰아넣고 있는 것 같았다. 내 편은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사무실 근처 편의점으로 전력질주했다. 
유키호를 포함한 사무실의 전 인원은 나갔다 돌아온 내 손에 들린 캔 커피를 보고 질린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결국 그날도 유키호는 퇴근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은 잡지 인터뷰 등 몇 가지 할 일이 있었는데도, 유키호는 나와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고 척척 해냈다. 이쯤 되면 나 따위 필요 없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또 그 다음날.

드디어 유키호가 백기를 든 것 같았다. 
내 책상 위에는 녹차가 아닌 커피가 올라와 있었다. 나는 마음 속의 무언가가 녹아내리는 느낌을 받으며 커피를 들었다.

“아아… 이제 살겠네.”

코토리 씨의 모닝커피. 그래. 난 이걸 원했어. 
커피의 맛을 음미하기 위해 쭉 한 모금을 들이켠 후,

마실 때의 제곱의 속도로 내뱉었다. 내 자리가 마침 햇빛이 들어오는 창 근처였던 터라 흐릿하게 무지개마저 생긴 것 같았다.  아아… 아름다운 일곱 빛깔 무지개… 라고 감탄할 상황이 아니었다!

“무, 무지개?!”

“콜록! 커헉! 이, 이게 뭐약--!!”

“에에? 오빠오빠, 아미한테도 무지개 보여줘!”

“마미도!”

코토리 씨의 놀란 음성에 달려온 후타미 자매의 뒷덜미를 잡아 담당 프로듀서에게 떠넘긴 후 생각했다.

뭔가 끔찍하게 오묘한 이 맛. 그래, 이것은… 그 맛이다.

“하기와라 유키호!”

“에, 에? 무, 무, 무슨 일이세요. 프로듀서?”

그러니까 그 표정 짓지 말라고. 하루카의 아이덴티티가 위험해진다니까. 그리고 너 지금 눈이 엄청나게 떨리고 있어.

“커피에 무슨 짓을 한 거냐.”

“프로듀서를 위해 제가 만든 신 메뉴. 녹차커피…”

“가 맛이 있겠냐!!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라!”

어떻게든 내게 차를 마시게 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해봤자 역효과다. 끔찍한 역효과. 게다가 이 녹차커피인지 뭔지. 녹차의 맛을 살리기 위해 아예 설탕 같은 것은 넣지도 않은 모양이다. 결과적으로 엄청 썼다.

“에에? 하루카쨩은 괜찮다고…”

슬쩍 그녀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이름이 불린 걸 들은 모양인지 마침 하루카의 시선도 이쪽을 향해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하루카 특유의… 유키호의 기를 살려주기 위한 립 서비스였던 것 같다. 립 서비스의 방향이 매우 틀리긴 했지만.

“네가 직접 마셔봐라.”

“에? 커피는 그다지… 예…”

내 눈초리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유키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녹차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침묵에 빠졌다.

“프, 프로듀서…”

“이제 알겠냐.”

“프로듀서에게 이런 걸 마시게 하다니… 역시 전 구제불능이네요…”

아. 이 패턴은.

“이런 저 따위… 저 따위는…”

“유, 유키호. 그 정도는 아니니까 그만 둬.”

유키호를 진정시키려 노력하면서 눈으로는 연신 삽의 행방을 쫒았다. 반년동안 유키호와 함께 일을 하면서 유키호가 정신적으로 몰리게 될 때 삽질을 하는 건 수도 없이 봐왔지만, 그때마다 나타나는 삽의 행방은 한 번도 알아낼 수 없었기에, 이번에야말로 조기 진화를 다짐했다만…

“땅 파고 묻혀있을 게요--!!”

또 놓쳤다!

“하, 하지마--!!”

이 녀석 대체 정체가 뭐지? 미래에서 온 로봇 고양이의 4차원 주머니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지금은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일단 말리자.



또 또 그 다음날.

책상 위에는 오늘도 커피…라지만 이쯤 되면 내가 그 커피를 보고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이 수상함이었다고 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유키호. 설마 또 녹차를…”

“녹차 아니에요.”

분명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믿고 한 모금 마셨다.

“응? 뭐지, 이거. 어째 달달한데.”

커피라기엔 필요 이상으로 달달했다. 처음엔 설탕을 많이 넣었나, 생각했지만, 이건 설탕의 달콤함이 아니라 뭔가 새콤달콤한…

“녹차는 너무 쓴 것 같아서 달콤한 매실차로 바꿔봤어요. 매실커피 어떠세요?”

커피를 코로 뿜었다.
그 이후 코를 붙잡고 데굴데굴 굴러야만 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이 녀석은. 자길 화나게 했던 것에 대한 복수인가?

티슈로 몇 차례나 코를 푼 다음,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9회말 원 아웃 만루 상황에서 병살타를 친 응원팀의 4번 타자를 보는 시선으로 유키호를 노려봐주었다.

“너… 너…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에? 이건…”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다. 벌써 며칠째 아침부터 별 꼴을 다 당하고 있는데, 그것도 내 입으로 자랑스럽게 커피 중독자라고 말할 수 있는 나에게 이런 식으로, 소위 엿을 먹이는 행동을 한다는 건 틀림없이 내가 못마땅하다는 것의 우회적 표현이 아닌가. 유키호가 내 커피홀릭을 모른다면 이해하겠지만, 지난 반 년 동안 나와 함께 다녔으므로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좋아. 니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요 며칠간을 통해 아~주 잘 알았다. 이런 테러를 가할 정도로 내가 싫다면, 사장님께 말해서 담당 프로듀서를 바꿔달라고 하는 게 어때?”

“아니에요! 저,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네가 말하지 못하겠다면 내가 직접 말해주지.”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나는 울먹이는 유키호를 무시하고 큰 걸음으로 사장실에 도착했다.

“오. 자네. 아침부터 무슨 일인가?”

“저…”

몇 마디만 하면 된다. 유키호에게 다른 프로듀서를 붙여주는 게 좋겠다고. 저 아이는 도저히 나와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싫어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 보다는, 그래도 어느 정도 유키호와 코드가 맞는 사람을 찾는 게 낫겠지. 유키호라면 지금보다 더 성장할 수 있고, 나보다 더 재능 있는 프로듀서를 만나면 대성할지도 모른다.
그럼 이제 난 다른 일을 찾아봐야 하나…

“응? 무슨 일이라도 있나? 고민하지 말고 털어놔보게나.”

‘저와 유키호는 아무래도 안 맞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을 시작하려 했다. 하지만 그 말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항상 나보다 먼저 출근해 내 시시껄렁한 아침인사에도 밝게 웃어주는 것 때문에? 촬영에 쓸 액세서리 하나만 바꿔줘도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해주는 것 때문에? 아니면 끝내 녀석의 삽이 어디서 튀어나오는지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일까.

무엇보다도, 새로 온 프로듀서가 유키호를 잘 이끌어줄 수 있을지도 걱정됐다. 유키호가 보통 별난 녀석이어야지. 나도 초반에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다른 이라고 안 그럴까. 유키호와 새로운 프로듀서가 만나자마자 겪을 일들. 굳이 상상하려 하지 않아도 그림처럼 그려졌다. 또 프로듀서가 교체되는 일로 인해 유키호가 받을 스트레스를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와 버렸다. 그 녀석 성격에 또 며칠 정도는 침울해져있겠지.
그래. 안 되겠다. 역시 그 녀석은…

“자네. 말하려다말고 뭘 생각하는 건가?”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벌렸던 입을 다물고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는 내가 있었다.
망할. 정말 끝까지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을 골랐네. 나도.

“다름이 아니라…”



사장님과 대화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더니, 유키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코토리 씨에게 유키호의 행방을 물어보려 했는데, 중간에 하루카가 불쑥 나타났다.

“저… 프로듀서 씨. 이거, 유키호에게 들키면 혼날 것 같지만, 프로듀서 씨라면 봐도 좋다고 생각해요.”

하루카가 내민 것은 유키호의 이름이 유키호의 글씨체로 적힌 노트였다. 처음에는 유키호의 자작시가 적힌 노트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첫 번째 장을 펼쳐보자 시가 적혀있는 건 아니었다.

“이건…”

첫 장에는 ‘나를 위해 힘써주시는 프로듀서의 건강을 위해’라고 적혀있었다.
온갖 차들의 효능과 효과, 더 맛 좋게 우려내는 방법… 일종의 차 레시피 모음집 같았다. 계속 넘겨보니 차뿐만 아니라 커피도 여러 가지 종류가 적혀있었다.

“유키호. 요즘 프로듀서 씨가 자주 소화불량 때문에 고생하시는 걸 알고 그게 다 자기 때문이라며 여러 가지로 고민한 모양이에요.”

그러고 보니, 요즘 유키호의 스케줄이 늘어나 내가 제대로 밥을 먹어본 적이 없다. 유키호가 밥을 먹는 동안에도 나는 여기저기 달리면서, 차를 몰면서 허겁지겁 해치워야 했으니 자연스럽게 소화불량에 시달렸던 건 사실이다. 

“그래서 소화불량에 좋은 차들을 타왔는데, 프로듀서 씨가 드시지 않으니까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게 그 터무니없는 커피들이었던 건가… 녹차, 매실차. 확실히 둘 다 속이 안 좋을 때 즉효인 차들이다. 
그 바보가, 그럼 그렇게 말을 하던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찻물에 커피를 탄다는 말도 안 되는 발상은 어떻게 한 거야?

“그래도 결론은 내가 잘못한 셈인가.”

“유키호는 어떻게…”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하루카를 향해, 나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괜찮아. 이것보다 더 심하게 싸운 적도 있으니까. 아. 그래. 유키호가 탄 매실차. 그거 재료는 어딨냐?”



하루카의 조언을 받아 옥상으로 올라가니, 예상대로 훌쩍거리고 있는 유키호가 보였다. 속으로 비관해 떨어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유키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유키호. 일하러 갈 시간이야.”

유키호는 대답 없이 내게 등을 돌리고 훌쩍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반대쪽으로 돌아가 그녀를 마주보고 서서 준비해온 것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 이건…”

그녀의 눈앞에 잔을 내밀자, 열기를 느꼈는지 눈이 새빨갛게 된 유키호가 고개를 들었다.

“커피…”

“그래. 내가 직접 탄 커피다. 마시면 조금 진정될 거야.”

유키호는 움찔거리며 커피 잔을 받아들었다. 유키호가 커피 잔을 받아드는 걸 확인하고, 나도 내 몫의 잔을 쟁반에서 들어올렸다.

“하루카에게 들었어.”

“하루카쨩이…”

“응. 다 얘기하더라. 네 특별 레시피 노트도 봤다고.”

“에. 그, 그걸… 하루카쨩… 대체 무슨 일으을…”

금세 얼굴을 붉히며 부들부들 떠는 유키호를 보자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고마웠어. 정말로.”

“에…?”
“나 말이지. 맨날 니 앞에선 센 척 했지만, 사실은 불안했었거든. 내가 지금 하기와라 유키호라는 녀석을 잘 이끌어가고 있는지, 내 능력이 부족해서 네가 더 크게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무엇보다도, 내가 널 신뢰하고 있는 만큼 너도 날 신뢰해주고 있는지. 그 밖에도 여러 가지가 말이지.”

“저, 저는!”

“아아. 알고 있어. 지금은. 하지만 말이지. 그런 건 솔직히 말로 해주지 않으면 잘 모르는 거 아니냐.”

“그, 그런 말 하지 마세요. 프로듀서. 저, 저…”

아까 전의 나처럼, 유키호도 뭔가 말을 하고 싶지만 입 안에서 걸리는 것 같았다. 사장님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인내심을 가지고 유키호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유키호는 눈을 꼭 감고 자신의 온 힘을 짜내듯이 말했다.

“저! 프로듀서가 제 프로듀서라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유키호의 말은 내 예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것이었다.

“프로듀서는 언제나 상냥하고, 다정하고, 제가 쓰러져도 항상 일으켜 세워주셨잖아요. 항상… 항상 제 뒤에서 저를 응원해 주셨는걸요. 그리고… 그리고… 제가 억지를 부리고 화를 내도 한 발 뒤로 물러서주신 건 프로듀서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어느 프로듀서나 다 하는 일이야.”

하지만 유키호는 눈으로는 울고 입으로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저 같은 아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모두 프로듀서 덕분이니까. 저는 앞으로도 프로듀서와 함께 가고 싶어요. 다른 사람은 안 돼요. 프로듀서여야만 해요. 저에게 있어서 프로듀서는… 특별한 사람이니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만두지 말아주세요!”

여기서 울컥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남자가 돼서 여자아이 앞에서 질질 짤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최대한 평정을 가장했다.

“아…알았어. 사실 나도 그것 때문에 온 거니까. 역시 너 같은 녀석은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안심이 안 되니까 말이다.”

유키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내 마음속까지 환하게 해주는, 그런 표정이었다.

“프로듀서… 그럼!” 

“그래. 같이 가자고. 이 바닥의 끝까지.”

“네… 네! 그럴게요. 프로듀서어…”

“어이. 울지 마. 좀 있으면 화보 촬영인데 그 눈으로 어쩔 거야. 아니. 솔직히 이미 늦은 것 같긴 하다만, 어쨌든 진정하고 내가 탄 커피나 마셔봐.”

유키호는 몇 번 몸을 들썩이더니, 곧 심호흡을 하고 커피잔에 입을 대었다.

“어때.”

“맛…있네요.”

“그치? 커피도 충분히 좋다니까.”

“그런데 프로듀서. 프로듀서는 뭘 타신 거에요?”

유키호는 그제야 내 잔에 든 것이 커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낸 것 같았다.

“아. 니 자리에 있던 거 한 번 타봤어. 매실 원액이었나? 그거 말이다.”

“매실차…”

“그래. 근데 제대로 탄 건지는 모르겠네. 커피를 타는 느낌으로 타봤는데.”

“프로듀서. 그거, 색이 너무 진한 것 같은데요…”

“그런가? 먹어보면 알겠지.”

달았다. 엄청.
나는 어제의 데자뷔를 느끼며 입에 머금은 찻물을 힘차게 분사했다.

“뭐야, 이거---!!!”

“프로듀서. 원액은 조금만 넣어야 하는 거에요.”

“그, 그런가. 난 커피 넣는다는 느낌으로 확 부어버렸는데… 그게 아닌가 보군.”

“푸훗.”

유키호는 웃음을 터뜨렸고, 나 역시 빙긋 미소 지었다. 그래. 역시 나는 이 녀석과 함께 가야겠다. 

“자, 자. 다시 잘 해보자. 응? 유키호.”

“예. 프로듀서.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내가 쓱 내민 손을 유키호는 살포시 마주잡았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훨씬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유키호가 그 날보다는 훨씬 더 나를 신뢰해주고 있다는 것을. 말로, 행동으로. 이제 확실히 느꼈다.

그리고 옥상 문이 거칠게 열렸다. 
깜짝 놀란 우리가 그곳을 바라보자, 혼이 빠져나간 표정의 코토리 씨가 숨을 몰아쉬며…

“유키호쨩! 프로듀서 씨! 뭘 하고 있는 거에요? 화보 촬영이잇--!!!”

아. 
시계를 봤다.

끝장이다.

“우와아아악---!! 유키호!! 우린 끝났어!! 빨리 촬영장으로 가지 않으며언--!!!”

“에? 에? 하지만 저, 눈도 아직…”

그랬지! 맙소사. 저 부어터진 붕어눈으로는 아무 데도 못가!!

“어어어어떻게 할 거야, 유키호! 네가 펑펑 울어버리는 바람에…”

“에? 그, 그건 애초에 프로듀서가 그런 심한 말을 해서!”

“또! 또냐! 또 내 잘못으로 몰아가는 거냐!”

“역시 그렇죠… 남 탓만 하는 저 따위… 저 따위…”

“하지 마! 여기서 하지 마! 건물을 무너뜨릴 셈이냐--!!”

“두 사람 다! 시간 없다니까요오오오오----!!!”



그로부터 두 달 뒤.

“프로듀서. 커피에요.”

“응?”

유키호가 타온 것은 달콤한 향기를 내는 밀크 커피였다.

“웬일이야? 오늘은 차 마시는 날 아니었어?”

그 날 이후. 절충안으로 나는 하루는 커피, 하루는 차를 교대로 마시기로 했다. 어제는 에스프레소였으니 오늘은 차를 마시는 날일 텐데.

“우훗.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요.”

오늘. 드디어 유키호의 곡이 1위를 차지했다. 그 동안 고생했던 것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결과에 정말이지 감개무량. 다들 유키호를 축하해주는 자리에 혼자 화장실로 도망쳐 눈물을 찔끔찔끔 흘렸었다.

그렇게 축하파티가 끝나고, 다들 돌아간 자리에 남은 사람은 코토리 씨를 제외하면 나와 유키호 뿐이었다.

유키호에게서 커피를 받아들고, 멍하니 잔 안의 커피를 보고 있자니, 지금까지 유키호와 함께 해왔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기 시작했다. 거 참. 나도 웃기는 놈이군. 지금 죽기라도 하는 것 같이 말이다.

“프로듀서…”

“응?”

“세 달 전. 기억나세요?”

“아아. 그래. 기억나지.”

세 달 전의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처음으로 차를 입에 대기 시작한 날이자, 유키호가 커피를 좋아하게 된 그 날.

“그때 프로듀서가 그랬죠. 함께 끝까지 가자고.”

“응. 그래. 그날 이후로 나 같은 놈을 잘 따라와 줘서 고맙다. 유키호.”

“저, 저도. 저 같은 아이를 잘 끌어줘서 고마워요. 프로듀서.”

“아아. 하지만 이걸로 끝난 게 아니잖아? 앞으로도 힘내서 뛸 테니까.”

내가 유키호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자, 유키호는 방긋 웃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같이… 뛰어야죠?”

“그래. 같이.”

서로 마주보며 빙긋 웃고 있던 차에, 멀리 다용도실에서 코토리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아직 퇴근 안 하신 분 있나요?”

코토리 씨의 목소리를 들은 유키호는 화들짝 놀라더니 다급한 말투로,

“프, 프로듀서. 잠깐 귀 좀 대보실래요?”

무슨 비밀 얘기라도 하려는 건가. 나는 유키호를 향해 귀를 바싹 가져다댔다.
하지만 내가 느낀 것은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가 아닌, 뺨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그것의 의미를 깨달은 내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출입문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너, 너…”

“수, 수, 수고하셨습니다! 전 이만 가볼게요오!”

유키호가 사라지고, 내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내일 만나게 되면 유키호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것이었다. 벌써부터 궁금해지는데.
슬쩍 유키호가 타온 커피에 입을 가져다대니, 분명 밀크 커피인 줄 알았던 그것은 새콤하고 달콤한 매실의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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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 사이트에서 처음 참여했던 아이마스 단편제에서 유키호, 커피로 썼던 글입니다.

[이 게시물은 에아노르님에 의해 2013-06-07 00:11:12 창작글판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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