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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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7-03, 2014 22:03에 작성됨.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소나기인지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 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만약에 조금 비가 일찍 와서 라이브 도중에 내렸다면 이래저래 곤란했을 것이다. 손님들은 돌아가는 길에 비를 맞을 지도 모르겠지만 거기까지 걱정하기에는 내 앞가림도 하기 힘든 사정이다.

 "오, 치하야. 수고했어. 오늘도 좋은 라이브였다고."

 뒷정리까지 마친 치하야가 나타나자 내 쪽에서 먼저 말을 건넸다.

 "왜 그렇게 젖으셨어요?"
 "아,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 말이야. 이거 가져오려고."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린 커다란 우산을 흔들어보였다. 나도 프로듀서 일을 제법 하면서 센스가 늘었다고 자신할 수 있다. 그래봐야 차에 항상 우산을 하나씩은 두고 다니는 것에 불과하지만.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그렇게 비를 맞으면 감기 걸려요."

 확실히 여름이라고 하기엔 비를 맞아서인지는 몰라도 쌀쌀하게 느껴지는 날씨였다.

 "나는 튼튼하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프로듀서가 아프면 저희한테까지 영향이 오니까 특별히 주의하셔야 해요."
 "으, 으응. 그건 그렇지."

 사실 내가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치하야까지 비를 맞아야 했을 지도 모른다. 아무리 내 상태가 치하야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치하야가 비를 맞는 것 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그래도 치하야가 걱정해주는 게 나쁜 기분은 아니라서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럼 갈까?"

 차로 향하는 길까지 하나뿐인 우산을 같이 쓰고 가야만 했다. 커다란 우산이어서 비를 맞지는 않았지만 서로 꼭 달라붙은 모양새가 되어서 제법 묘한 기분이기도 했다.

 "저, 치하야?"
 "……?"

 무슨 일이시죠? 하는 시선이 돌아왔다. 가까이 붙어있으면서도 묘한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시선이었다.
 
 "역시 혼자 쓰고 갈래? 차까지 먼 것도 아니고 불편하지 않을까 해서. 게다가 나는 이미 젖어서 붙어서 가면 치하야도 찝찝할 거고."

 나야 이미 버린몸이니까 비를 더 맞는다고 해도 안 될 것도 없었고 소속 아이돌이라지만 여자아이와 꼭 붙어서 걷고 있다는 점이 마음이 편치 않기도 했다.

 "아, 아니에요. 저는 괜찮으니까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거 없어요."
 "그래? 정말로 괜찮은 거지?"
 "물론이죠."

 치하야는 오히려 내 팔을 붙잡고 걸어나갔다.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우산을 들고 있는 것은 나였기에 재빨리 보조를 맞춰 나란히 걸었다.

 
 -


 "괜찮아? 비 맞은 건 아니고?"
 "프로듀서 덕분에 괜찮아요."

 차에 탔지만 아직도 빗방울은 시끄럽게 창문을 때려대고 있었다. 비가 와서 습한 공기가 차 안에 가득했지만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할 수도 없었다.

 "수고했어. 이제 어엿한 톱 아이돌이네."
 "아직 멀었지만요. 갈 길이 까마득한걸요. 아직 저를 바라봐주지 않는 사람도 많이 있고."

 이 정도면 조금은 자신을 가져도 될텐데 치하야는 역시 자신에게 엄격한 탓인지 만족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
 "치하야?"

 치하야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할 말이 있다기보단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프로듀서."
 "응?"
 "프로듀서는 언제쯤이면 저를 바라봐 주실건가요."

 이제야 이해가 갔다. 다만 머리로 이해를 했을 뿐이지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치하야가 요즘 달라졌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런 이유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나 자신 또한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전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으, 응? 나는 항상 치하야를 바라보고 있었잖아? 톱 아이돌로 성장해가는 치하야를 말이야."
 "……큿."

 이미 치하야의 마음은 내게 전해졌지만 나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너무 갑작스럽게 알아버린 것이기도 했고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자, 그럼 돌아가자고."
 "프로듀서."
 
 애써 웃으며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는 찰나 치하야가 내 손을 잡으며 저지했다. 평소의 치하야라면 상상도 못할 박력이 느껴졌다.

 "확실히 대답 들려주세요."
 "무, 무슨 대답?"
 "이미 알고 계실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보통의, 그러니까 사무소의 동료들이나 팬들에게 말하지 않을 때의 치하야의 목소리는 차가운 편이었지만 지금은 그 정도가 더했다. 비를 맞아서가 아니라 치하야의 목소리 때문에 싸늘함을 느낄 정도였다.

 "아직은 할 일이 남아있으니까 위를 목표로 하는 것에 전력을 다하자고 말씀하셨죠. 이번에도 피하실 생각인가요?"

 분명 치하야가 자신의 마음을 밝혀온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 때마다 항상 톱 아이돌이 되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해왔었는데 이제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치하야… 아무리 그래도 프로듀서와 아이돌 사이의 관계가 그런건 조금…"
 "아뇨. 물론 제 노래를 들어주는 팬 분들도 중요하지만 저에게는 프로듀서가 더 중요해요. 그러니까…"

 치하야는 심호흡을 하더니 충격적인 말을 했다.

 "프로듀서가 저를 받아주시지 않는다면 아이돌은 그만두겠어요."
 "뭐…라고…?"
 "제가 노래하는 가장 큰 이유는 프로듀서 때문이니까 프로듀서가 아니라면 저는 여기에 더 있을 이유도 더 노래할 이유도 없어요."

 나도 치하야가 싫은 건 아니었다. 굳이 말하면 좋은 쪽에 가까웠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에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치하야가 이렇게 과격하다고 할 정도로 나올 줄은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잖아. 함께 해온 동료들도 있고."
 "물론 다른 모두들도 소중해요. 그리고 프로듀서가 저를 좋아해주지 않는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프로듀서가 다른 사람과 있는 걸 보면서 노래를 계속하고 웃을 수는 없어요."

 무거운 마음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이렇게나 좋아한다는 건 굉장히 기쁜 일이었지만 간단히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운 마음이었다.

 "…알았어. 진지하게 생각해볼게."
 "감사합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치하야도 더 몰아붙이지는 않고 물러섰다. 언제까지고 여기 있을 수는 없었기에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사실 내 대답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프로듀서와 아이돌의 관계를 넘어서 그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만을 놓고 바라본다면 결론은 명확했다.

 운전을 하다 보니 조수석에 앉은 치하야는 잠들어있었다. 공연을 마치고 피곤해서인지 불편한 의자인데도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평소와 향하는 곳이 다른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사무소도 치하야의 집도 이렇게 오래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평소의 도착할 시간보다 몇 배로 시간이 지나도 치하야는 그저 잠들어있었다.

 "…프로듀서."

 나를 부른 소리에 흠칫 놀라 옆을 바라보았지만 치하야는 여전히 잠들어있었다. 잠꼬대를 하는 모양이었다. 한편으로는 짠한 느낌이었다. 자면서 나를 부를 정도로 이 아이는 나를 좋아하고 있구나 하고.

 "치하야? 다 왔으니까 일어나."

 

 목적지에 도착해 먼저 차에서 내려 반대편으로 돌아가 문을 열고 치하야를 깨웠다. 비가 그쳐서 맑은 하늘 아래였다.

 "프로듀서…? 여긴 어딘가요?"

 치하야는 잠에서 깨어나고 보니 낯선 풍경이 보여서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새까만 밤하늘과 검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멀리 온 건 아니지만 바다야. 별로 의미는 없지만서도."

 아직 잠이 덜 깬 치하야의 손을 잡아주며 차에서 내리게 했다.

 "여긴 왜…"
 "그야 할 말이 있어서지."

 목을 가다듬고 치하야의 손을 잡을 채로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좋아. 사귀자."
 "프로듀서…?"

 어색한 말투로 손에 힘을 쥐어가며 쏟아낸 고백이었다. 난생 처음 해보는 것이었지만 부끄럽다기보다는 해냈다는 성취감이 들 정도였다.
 
 "앞으로 사람들이 뭐라 하건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보건 내가 다 알아서 할테니까 치하야는 계속 나를 위해서 노래를 불러줘."
 "……네!"

 비록 이 결정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후회는 하지 않는다. 잘못되게 두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치하야의 프로듀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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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 - 9:58

시간이 없어져갈수록 완성도가 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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