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장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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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6-07, 2014 11:33에 작성됨.

악몽을 꾸었다.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 야요이는 내 자켓을 덮고 꾸벅꾸벅 졸고 있고, 피워 두었던 모닥불은 기세를 잃고 불씨만 조금씩 튀어오르고 있었다. 야요이가 깨지 않도록 살며시 손으로 등을 받치고 편히 눕혀 주었다. 잠들기 전에 모아 두었던 장작이랑 불쏘시개들을 집어넣고 입으로 후후 불었다. 바람에 불씨가 몇 번 날아오르더니 이내 스스로 타기 시작했다.

꿈 속에서 하루카는 나를 노려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이러니한 건, 그렇게 울고 있는 하루카의 손에는 질긴 가죽 채찍이 들려 있고 나는 거기에 난타당하고 있었다는 거다.

하루카 "어떻게, 어떻게 당신이 그럴 수가 있어요!"

P "-----------"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애초에 비현실적인 꿈이니까. 다만, 내 대답을 들은 하루카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안고 무너져 내리던 것만 떠오른다.

상황을 정리해 볼까.
나는 지난 1년여간의 기억이 없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내 방에 있었다.
말끔하게 면도가 되어 있었던 걸로 보아, 누군가가 나를 '관리' 하고 있었다.
야요이는 야요이네 집에 감금되어 있었다.
야요이를 가둔 것은 미나세 이오리다.

... 전혀 정리가 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머리만 더 복잡해지고 말았다. 앞의 세 가지도 어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이지만, 마지막 두 개는 무슨 악질적인 농담이냐고 웃고 싶을 정도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두 사람이 서로 싸우는 것조차도 상상할 수가 없다. 나이는 이오리가 더 많았지만, 두 사람은 거의 죽마고우나 다름없었다. 사실은 두 사람의 우정이란 게, 나와 사무소 사람들 앞에서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고, 실제로는 아니었던 건가? 여자아이란 건 정말 모를 생물이라는 것은 하루카 덕분에 잘 알고 있었지만, 정말 그렇다면 참으로 놀랄 만한 일이다. 이건 아침에 야요이에게 묻기로 하자.

잠깐 등산로로 다시 나가 도심지를 내려다보았다. 네온 싸인의 불빛이 대낮처럼 환히 빛나고 있을 그 곳에는, 그러나 칠흑 같은 암흑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단지 시간에 맞추어 켜졌다 꺼지는 가로등 불빛만 애처롭게 빛나고 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수백, 수천 명 정도라면 어디론가 이주시키는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백만에 달하는 도쿄 시의 거주민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어쩌면 이미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가 기능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

도시가 빛을 잃자 하늘은 빛을 얻었다. 수천개의 별이 마치 쏟아져 내릴 듯이 반짝거리고 있다. 나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야요이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장작을 두어 번 갈고 나서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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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타카츠키 양의 위치가 확인되었습니다."
이오리 "... 그래. 백신을 맞고 항체가 생긴 대원들만 추려서 은밀히 뒤를 쫒도록 시켜"

"지금 바로 덮쳐서 제압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오리 "내 말에 토를 달 생각이야, 신도?"

"... 아닙니다. 아가씨께서 시키신 대로 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신도는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발자국 소리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렇지만 어찌 모르겠는가, 충직한 그의 눈에 서린 의혹의 눈초리를. 이오리는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등을 깊이 파묻었다. 혼자서 모습을 감추었던 그 안경 프로듀서가 갑자기 다시 나타나서는 야요이를 데리고 갈 줄이야.

알고 있다. 야요이가 연관되면 냉정해지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은. 애초에 야요이가 그렇게 되어 버린 이상, 그 시점에서 죽여 없애는 것이 원칙이었다. 차마 그것을 하지 못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가두어 놓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이제 풀려나서 세상으로 나가 버린 이상, 자신이 책임지고 뒷처리를 해야 할 것이다. 도쿄 시내가 소개되어 그 근방에 민간인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은 그나마 위안이 되지만, 저들이 일반 시민들과 접촉하게 된다면, 그나마 안정되기 시작한 시민 사회는 다시 무너져내리고 말 것이다.

안경을 끼고 한참 종이 뭉치를 뒤적이던 이오리는, 어느 샌가 창 밖이 환해져 있는 것을 느끼고는 기지개를 켰다. 벌써 며칠 밤을 새는 건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사실, '그 날' 이후로는 제대로 오랫동안 숙면을 취했던 적 자체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오리는 전화기를 들어 주방에 진하게 끓인 커피 한 잔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고 다시 종이뭉치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창 밖에는 여기저기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그 연기가 무엇을 태우는 것인지, 이오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입맛이 쓴 것이 커피 때문인지 아닌지는, 이오리는 확신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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