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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사와 후미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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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4-30, 2017 03:28에 작성됨.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러고 보면, 후미카는 책을 굉장히 많이 읽지?”

“네……듣기로는, 잘 때나 밥 먹을 때를 빼고는 늘 읽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듣기로는?”

“그게, 저는 자각이 없기에…….”

“아아, 그렇겠지. 나도 게임 같은 걸 할 때는 그러니까. 아무튼 이야기를 되돌려서. 혹시 특별히 마음에 드는 이야기 같은 거라던가, 있어?”

 

내 질문에, 그녀는 늘어뜨린 앞머리 사이로 새파란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한 가지, 있기는 있습니다만…….”

“오, 있어? 어떤 건데?”

“……죄송합니다. 지금은, 말씀 드리기 힘들어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그녀의 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던가.

안타깝게도, 그 때의 나는 거기까진 생각이 닿지 않았다.

 

 

 


 

 

TV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눈을 떴다.

분명히 왼팔로 머리를 받치고 누워 있었을 터인데, 팔은 앞으로 힘없이 뻗어 있고 머리는 축 늘어져 다다미 바닥에 옆머리를 힘껏 누르고 있었다. 왼쪽 어깨가 저릿거리고, 고무줄처럼 한껏 늘어나있던 오른쪽 뒷목이 뻐근한 통증을 보내왔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딱딱한 다다미 바닥에 모로 누워 TV를 보다가 그대로 잠들어버린 모양이다. 프로듀서 일을 하면서 육체노동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는데, 역시 공사판에 비하면 노동강도가 하늘과 땅 차이구나.

요컨대 하루 종일 두는 바둑과 하루 종일 달리는 마라톤 수준의 차이다.

이런, 이렇게 말하니 더 모르겠군.

 

“으음…….”

 

코마저 골았던 것인가. 텁텁한 목구멍으로 마른 침을 삼키면서 나는 몸을 일으켜 장판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오른손으로 뻐근한 목과 어깨를 주무르며 늘어져라 하품을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방 구석에 세워둔 커다란 물병을 집어 들었다. 주둥이에 입을 대고 한동안 정신없이 물을 꿀꺽꿀꺽 들이킨 나는 TV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입에서 물병을 떼고 TV 화면을 바라보았다.

TV에는 그녀가 나오고 있었다.

 

-자! 그럼 후미카 쌤! 설명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후미카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바다’였지요. 예부터 바다라는 것에는 인간의 정복욕과 경외심이…….

 

카메라를 향해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뒤, 또렷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하는 그녀는 흑단처럼 반짝이는 검은 머리카락과, 극지방의 호수처럼, 보는 사람의 눈이 시릴 정도로 새파란 눈동자가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여전하구만.”

 

자그마한 입술을 달싹이며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훗, 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항상 저런 식이었다. 이야기를 하다가도 어떤 키워드에 반응해서 곧잘 옆길로 새어버리곤 하던……그게 벌써 한 달 전이구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 순간에 머리가 차가워졌다. 안개가 낀 듯, 뿌옇게 둥실둥실 떠 있던 의식이 제자리에 내려앉았다. 둥글게 말려 올라가던 입꼬리를 두 손으로 억지로 잡아 내리고, 나는 TV의 앞으로 걸어가서 전원을 껐다. 새까맣게 변한 브라운관을 바라보았다. 브라운관의 매끄러운 표면은 마치 거울처럼 집 안의 풍경을 반시시키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조금 전, TV속에서 보이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처음의 가녀리고 불안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믿음직스럽게 성장한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시 눈을 떴다. 그 둥그렇고 새까만 것에는, 방 안의 광경뿐만 아니라 내 모습도 함께 비치고 있었다. 브라운관에 비친 내 등에는 군데군데 깃털이 떨어지고, 밀랍이 녹아내리는 가짜 날개가 덜렁거리며 붙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져 버릴 것처럼.

 

“……그래, 이거면 된 거야.”

 

듣는 이 하나 없는데도, 나는 중얼거렸다. 마음 속으로만 떠올려도 되었을 터인데.

아니, 실은 듣는 이가 하나 있었다. 구태여 혼잣말을 늘어놓은 것은, 그 녀석이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장 속에서 이불을 꺼냈다. 내일도 인력시장으로 나가야 하니 일찍 자자.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이었다.

평소처럼 스카우트를 허탕치고, 영업도 하는 둥 마는 둥, 적당히 시간을 잡아먹고 회사로 돌아가던 길에, 나는 공원의 벤치에서 책을 읽고 있던 그녀를 발견했다. 옆에서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었기에, 나는 그녀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그녀가 책을 다 읽기를 기다렸다.

몇 분이나 기다렸는지, 셀 수 없을 정도로 하품을 늘어놓고 있자니 탁, 소리가 나도록 책을 덮은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명함을 주면서 이래저래 설득을 해 보았지만, 그녀의 입장은 단호했다.

 

‘죄송합니다. 저로써는 역시 이야기가 잘 이해가 가지 않아서……오늘은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절반쯤 퇴짜선고를 받고, 나는 터덜터덜, 어깨를 늘어뜨린 채 사무실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담당 없는 프로듀서 경력이 1주일 더 늘어나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며칠 후, 그녀가 나를 찾아왔다. 아니, 정확히는 회사의 입구에서 울상을 지으며 헤매고 있던 것을, 출장에서 돌아오던 길에 운 좋게도 발견한 것이었지만……당시에 그녀와 내가 다니던 회사는 무척 큰 회사였으니, 낯을 가리는 그녀가 입구에서 어기적거리던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아무튼, 다시 만난 그녀는, 뜻밖에도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실은, 그 후로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아이돌에 흥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과 만난 것이……무언가 인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합연기연, 일기일회……라는 말처럼요.”

 

뜻밖이었다. 한번 더 목숨을 걸고 설득을 할 생각이었는데 본인이 선선히 OK를 해줄 줄이야.

뜻밖이면서도, 기쁘다고 생각했다. 기뻤다.

하지만, 그 한편으로는 ‘업계인’의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내가 있었다. ‘업계인’의 눈에 비친 그녀는, 단단한 껍데기 속에 들어 있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한 마리의 새처럼 보였다.

알은 세계이며,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라고 했던가.

그 이야기를 그녀에게 하자, 그녀는 재밌다는 듯 작게 웃었다.

 

“’데미안’이네요. 좋은 책이었죠.”

 

유감스럽게도 그 말은 나도 어디서 주워들은 말이었기 때문에, 그것의 원전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그 날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알 수 있었다. 어깨를 으쓱이며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다시 한번 쿡쿡, 작게 웃었다.

 

“그렇군요……재밌으신 분이네요.”

 

 

그렇게 반년 동안 나는, 우리는 그녀의 ‘껍데기’를 깨뜨리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앞에서 이끌어주면 그녀는 반드시 내 뒤를 따라왔다. 그 속도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녀는 매일매일 고된 트레이닝과 레슨에 힘들어하면서도, 결코 우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첫 데뷔 무대에서,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껍데기’를 깨고 밖으로 나오는 데 성공했다.

껍데기를 깨고 나온 그녀는 날개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자그마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가능성’을 확인한 이상 그것을 키우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었으니까.

0에서 1을 만드는 것은 무척 어렵지만, 1을 2로, 2를 10으로 키우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약 1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비록 빠른 걸음은 아니었지만, 위로 향하는 계단을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착실하게 내딛은 그녀는 마침내 ‘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서는 데 성공했다. ‘정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1년 전의 모습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근사한 모습이었다.

그녀가 서 있는 무대의 뒤에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을 느꼈다.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날개 비스무리한 것을 달고 바닥에서 꿈틀거리던 그녀가 이제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갈 수 있는, 크고 근사한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공연을 마치고, 우리는 평소처럼 함께 대기실로 돌아왔다. 거기서, 나는 그녀와 함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심결에 바라본 거울 속의 내 날개는 그녀에 비하면 무척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두 달 정도가 지났을 때였던가. 임원들이 대거 물갈이되며, 내가 있던 부서의 부서장 또한 다른 사람으로 바뀌게 되었다. 우리 부서의 새 부서장은 미국에서 온 여성 임원이었는데, 기세가 얼마나 강렬한지 어지간한 남자 임원들도 그녀의 앞에서는 꼼짝달싹 못 한다는 소문이 파다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부서장에 취임한 바로 그 다음 달, 그녀가 나를 불러냈다.

 

“사기사와 후미카를 내게 다오. 그녀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

 

후미카를 그녀가 담당하고 있는 대형 프로젝트로 데려가겠다는 제안이었다. 제안? 아니, 그것은 통보였다. 네가 얼마나 못난 놈인지 알고 있으니 그녀를 나에게 넘겨라, 라고 말하는 듯한 일방적인 통보. 나는 흘깃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등 뒤로는 마치 맹금류처럼 드높이, 기운차게 뻗은 날개가 보였다.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자네에게는 또 다른 프로젝트의 책임자 자리를 맡기겠다.”

 

얼핏 듣자면 무척이나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나는 거절했다.

아, 거절했다는 것은 후미카 쪽이 아니다. 나는 그런 일방적인 통보를 거절할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멋대로 거절할 수 있을 정도의 거물도 아니었다. 내가 거절한 것은, 내 쪽의 일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나는 행동력 하나만큼은 회사 내에서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자신할 수 있는 놈이었으니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 다음 날, 나는 사직서와 함께 그녀를 다시 찾았다.

 

“괜찮겠나? 너무 성급한 것처럼 보인다만.”

 

되묻는 그녀에게 나는 거듭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의 질문은 없었다. 그걸로 모든 것이 끝났다. 실로 시원스러운 결말이었다. 나는 후미카에게 인사다운 인사조차 건네지 못하고 도망치듯 회사를 떠났다.

아니, 사실은 도망친 것이다. 너도 나도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개를 뻗친 이 세상에서 내 날개는 언제 떨어질 지 모르는 불안한 꼴을 하고 있었기에.

'철새는 둥지를 떠날 때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법'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핑계를 대면서 그렇게 나는 그녀에게서 스스로 도망쳤다.

 

 


 

 

프로듀서를 때려 치고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하면, 그냥 건설현장을 전전하는 일용직 노동자를 하고 있었다. 다른 사무직이나 다른 일을 알아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관두었다.

애초에 프로듀서가 된 것도 이 일이 무척이나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 스스로 걷어차놓고 뻔뻔하게 다른 직업을 구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렇다고 다른 회사의 프로듀서로 들어간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녀’와 마주치고 말게 될 것이다. 그것이 무서웠다. 그래서, 나는 거기서 또다시 도망쳤다.

뚜두둑, 내 어깻죽지의 밀랍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루의 고된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나는 집 앞에 서 있는 낯익은 자동차를 발견했다. 연비가 끝내준다고 정평이 난 T회사의 하이브리드 승용차였다. 분명 처음 봤을 때만 하더라도 은색 도장으로 번쩍이고 있던 그것은, 역시나 세월의 무게에는 버텨내지 못한 듯 우중충한 회색으로 탁해져 있었다.

 

“여어, 고생하네.”

 

운전석 쪽으로 다가가자, 부드럽게 창문이 열리면서 감색 정장을 갖춰입은 남자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운전석에 앉아 있는 남자는 나 역시 무척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타. 이야기 좀 하자.”

 

나는 쭈뼛거리면서 조수석에 올라탔다. 무엇이 그리 급한 것인가,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차는 것과 동시에 선배는 곧바로 가속페달을 밟았다. 골목길을 벗어나 큰길로 접어들자, 육교나 가로등에 걸린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한 달쯤 뒤에 열리는, 우리 회사가 주관하는 대형 라이브 페스티벌의 포스터였다.

 

“……잘 지냈냐?”

“어때 보이십니까?”

 

선배는 눈을 슬쩍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보다는 좋아 보이는군.”

 

‘선배’는 나보다 5년 먼저 입사한 사람으로, 우리 부서에서는 가장 경력이 오래된 프로듀서였다. 지금까지 수많은 아이돌들이 그의 손을 거쳐 발돋움을 해 왔지만, 그가 자신의 입으로 ‘담당’을 자처하는 것은 지금껏 단 한 사람 뿐이었다. 바로 최정상급 아이돌이자 회사의 간판 중 하나인 ‘타카가키 카에데’였다.

 

“빌어먹을 후배 한 놈이 자기 일을 내던지고 런하는 바람에 말이야. 아직도 뒷처리가 잔뜩 남아있지.”

“이것 참……죄송합니다.”

“죄송한 줄 알면 알아서 기어.”

“……타카가키 씨는 잘 계시나요?”

“저번 주에 촬영 마치고 지금은 휴가 보내 놨다. 무슨 촬영 보내놨더니 술독에 빠져가지고. 내가 술 함부로 주지 말라고 그렇게 강조했건만.”

 

쯧, 하고 혀를 차며 선배는 다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우리는 골목길 깊숙한 곳에 위치한, 간판조차 없는 포장마차에 도착했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 우연히 발견한 곳으로, 선배와 내가 함께 애용하던 곳이었다. 이 곳에서 우리는 신세한탄을 하기도 하고, 너랑 내 담당 중에서 누가 더 잘났냐는 걸로 입씨름을 벌이곤 했다.

 

“그래. 시원하게 때려치니까 기분 좋냐?”

“글쎄요……복잡하네요.”

 

내가 사표를 냈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에 있던 선배는 한달음에 달려와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대체 뭐가 불만이냐고, 너만 보고 따라온 후미카는 뭐가 되겠냐고. 선배는 나보다 머리 두 개 정도 키가 더 큰 사람이었다. 듣기로는 190cm가 넘는다던가 했으니, 아슬아슬 170cm이 되는 내 입장에선 완전 거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거기다 키만 큰 것도 아니고, 무슨 운동이라도 한 것인가, 덩치 역시 그에 못지않게 어마어마했다. 여성 중에서는 장신에 속하는 카에데 씨도 그의 옆에 서 있으면 아담하게 보일 정도였으니까.

그런 사람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멱살을 움켜잡고 머리를 짤짤짤 흔들어대면, 당하는 입장에서는 어버버하며 덜덜 떠는 것 말고는 딱히 방도가 없을 것이다.

 

“이제는 물어봐도 되겠냐?”

“…….”

 

나는 손에 든 술잔을 들이켰다. 평소같으면 알코올의 열기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을테지만, 잔뜩 지쳐있었던 탓인지, 도무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네, 말씀하세요.”

“왜 때려쳤냐? 너 애들 좋아했잖아. 같이 앞으로 가는 게 좋다며.”

“아니 보통 이럴때는 앞에 ‘…’붙이면서 각오 좀 다지게 하는 거 아닙니까?”

“시꺼, 나 시간 없어. 치히로가 기다린다고.”

“그럼 술 먹으러 나오면 안 되잖아요.”

“안 그럼 니가 입을 안 여니까.”

 

나는 한껏 달아오른 한숨을 내쉬었다. 뒤늦게 알코올의 열기가 올라왔다.

 

“아이돌……아이들이랑 함께 나아가는 건 지금도 좋아해요. 그녀와 함께 있던 시간……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만 있으면 꼭 돌아가고 싶어요.”

“근데 왜 그랬냐?”

“……착각을……해 버렸어요. 어느 정도 그녀와 지내면서, 그녀의 앞길을 밝혀주면서, 저는 그녀보다 내가 더 높은 곳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착각을 해 버렸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그렇겠죠……선배는 정말로 그들의 앞에서 그들을 이끌어주는 사람이니까요. 길잡이 새처럼.”

 

나는 포장마차의 주인에게 안주를 주문하는 선배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날개는 언제나처럼 금방이라도 바람을 타고 날아갈 듯이 활짝 펼쳐져 있었다.

선배는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다. 아이돌 한 명 없는 프로덕션에 입사해서 수 년만에 자신의 회사를 업계 굴지의 기업으로 키워냈다. 그러한 공적이 있었기에, ‘그녀’는 선배를 자신이 만든 프로젝트의 담당 프로듀서로 끌어들이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카에데 씨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기는 했지만.

주인에게서 안주가 담긴 작은 접시를 받아 들고, 선배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 뒤로 후미카랑 연락은 해 봤냐?”

“……아뇨.”

“그럴 줄 알았다. 그녀 소식은 챙겨보고 있고?”

 

나는 말문이 막혔다. 도망치듯 그만둔 주제에 일부러 멀리 하고 있었습니다, 라고 말했다간 분명 아구창이 날아가겠지.

내가 대답이 없자 선배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면서 품 속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자, 어제 촬영 끝나고 찍은 사진이다. 한번 봐.”

“선배가 담당하고 계신가요?”

“아니, 카에데랑 같은 방송사라서 픽업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사진이나 봐.”

 

나는 휴대전화를 받아들어 액정화면을 바라보았다. 대기실에서 찍은 것인가, 평소의 펑퍼짐한 사복 위로 숄을 두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내가 알던 그녀의 얼굴과는 약간 다른 모습이었다.

 

“눈 크게 뜨고 잘 봐라. 그게 정말로 네가 알던 후미카인가.”

 

선배를 올려다보려던 나는 차가운 눈으로 나를 쏘아보는 선배와 눈을 마주쳤다. 목이 절로 움츠러드는 것을 느끼며, 나는 조심스레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네 책임이다. 알겠냐?”

“……네.”

 

휴대전화 속의 후미카는, 금방이라도 스러질 듯 무척이나 위태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선배와 헤어진 지 1주일이 지난 어느 날.

아무리 늦가을이라지만, 오늘은 가을이라기보단 겨울에 가까울 정도로 이상하리만치 쌀쌀한 날이었다. 나는 근육통으로 사정없이 쑤시는 팔다리를 이끌고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기숙사를 나온 나는 곧바로 시 외곽에 있는 작은 원룸 하나를 구할 수 있었다. 당장 딱히 하고 싶은 일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향으로 돌아갔다가는 부모님을 볼 면목이 없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는 당분간 이 곳에서 시간을 보낼 요량이었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 복도로 걸어가던 나는 우리 집 현관문 앞에 있는 커다란 덩어리를 발견했다.

뭐지? 쓰레기라도 버려놓은 건가? 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다가가자, 내 발소리에 반응한 것인지 굼실거리던 덩어리 속에서 불쑥, 여자아이의 머리가 튀어나왔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 한 것을 억누르며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덩어리가 아니라 웅크린 사람이 털모자가 달린 코트를 뒤집어쓰고 있었던 것이었다.

코트를 걸친 소녀는 복도에 설치된 낡아빠진 백열등의 빛을 반사시키는 쇼트컷을 찰랑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맹금류의 눈처럼 샛노란 눈동자가 나를 쏘아보았다.

 

“당신이 이 집의 주인이야?”

 

외모에 비하면 성숙한 느낌이 드는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그녀의 시선에 억눌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발치에 있는 또 다른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하네, 이제 일어서도 될 것 같아. 설 수 있겠어?”

“네…….”

 

잠깐만, 거짓말이지.

뒤집어 쓴 후드 아래로 새어나오는 것은, 내겐 무척이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의 주인을 인식하자, 펄럭, 하고 아무것도 없었을 터인 하늘에서 보일 리가 없는 깃털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쇼트컷의 여자아이 옆에서 몸을 일으킨 사람은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두 손을 들어올렸다. 코트의 소매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손은 내 기억 속의 모습보다는 조금 더 가늘어진 듯 했다. 천천히 후드를 벗자 흑단처럼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려왔다. 옆머리가 앞으로 쏠리는 것을 막아주는 헤어밴드 아래로 늘어뜨린 앞머리와, 그 앞머리 사이에서 반짝이는 깊은 호수처럼 푸르른 눈동자는,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의 특징과 일치했다.

 

“……후미카.”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P씨…….”

 

그녀는 나의 이름을 불렀다.

 

 

“자, 그럼 난 여기까지. 뒷일은 잘 해봐, 후미카.”

“……감사합니다, 카나데 씨.”

 

떠나가는 그녀, ‘카나데’라는 아이에게 인사를 한 뒤, 후미카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유독 쌀쌀한 날씨에 떨고 있었던 것인가, 백열등의 빛 아래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안색은 창백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서로를 마주보며, 서로 눈을 피하며 망설이던 중, 먼저 움직인 것은 그녀 쪽이었다.

 

“엣쵸!”

 

잔뜩 억눌렀던 탓인지 나이에 안 맞게 귀여운 재채기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웃으려던 것을 간신히 억누르고, 나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현관문을 열었다.

 

“……기다리느라 추웠지? 일단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그녀는 뜻밖에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급한 대로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싸구려 티백으로 우려낸 홍차에 꿀을 섞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나름 고급 재료를 사용하는 사무실의 것에 비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떨어진 체온을 보충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

 

“자, 일단 이거라도 마셔. 목은 소중히 해야지.”

“……감사합니다…….”

 

두 손으로 머그잔을 받아 들고, 내용물을 한 모금 마신 그녀는 따끈한 열기가 깃든 한숨을 토해냈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나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따뜻한 것을 마신 덕분인지 새하얗게 질려있던 그녀의 얼굴에 혈색이 어느 정도는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내가 회사를 그만둔 지 한 달 반이 지났다. 그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늘 호수보다도 깊은 푸른빛으로 반짝이던 그녀의 눈빛은 이전의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한 눈에 보더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광택이 줄어 있었다.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그녀의 날개는 무언가 무거운 것에 짓눌리기라도 한 듯, 축 늘어져 있었고, 코트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목덜미와 손은, 며칠 전 선배를 통해서 본 사진보다도 조금 더 가느다랗게……아니, 야위어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말 한 마디 없이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를 망설였다.

이제 와서 태연하게 “잘 지내?”같은 이야기를 꺼낼 만큼 낯짝이 두꺼운 놈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나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후미카는 차를 홀짝이며 작은 한숨을 토해내었고,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방 안을 둘러보기도 하고, 천장을 올려다 보기도 하고,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거 누가 손님이고 누가 주인인지 모르겠군.

찻잔을 거의 다 비웠을 무렵, 후미카가 입을 열었다.

 

“P씨는……제가 아이돌을 그만두고 싶다고 했을 때……필사적으로 저를 말리셨지요.”

“그랬지. 아깝다고 생각했어. 넌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면……어째서, 이번엔 제게 일언반구의 말씀도 없으셨나요……?”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멋지게 장성한 그녀의 날개를 바라보았다. 비록 축 늘어져 있긴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흠 잡을 데 없이 훌륭한 것이었다. 저번 주보다도 훨씬 더 볼품없어진 내 것에 비하면 더더욱 그렇게 보였다.

 

“나는……더 이상 너를 인도할 수 없어. 네게 길을 보여줄 수도 없고, 너와 함께 나아갈 수도 없어. 이제는, 네 뒤를 따라가는 것조차 버거웠어.”

 

그녀는 말없이 내 말을 듣기만 하고 있었다.

 

“너는……나 같은 거랑 있어서는 안 돼. 너는 내가 보여줄 수 없는 곳, 더 높고 더 먼 곳을 갈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너는 이제 네게 어울리는 무리를 찾아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 전무님께서 제안하신 계획은 내가 생각하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고……그 곳으로 가면, 너는 나 같은 것과 있을 때보다는 훨씬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나는 늘 그녀의 앞에서 내가 그녀를 이끌고 있노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힘차게 날갯짓을 하는 그녀의 발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녀에게 매달려 점점 더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내 등에 달린 가짜 날개가 천천히 녹아 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가짜 주제에 태양에 너무 가까이 다가간 것이었다. 진짜와 가짜의 차이를 그제서야 실감했다. 나라는 녀석은, 그녀에게 있어서는 그녀의 비행을 방해하는 짐 덩어리였던 것이다.

 

“……프로듀서는……새를 좋아하시지요……?”

“그렇지.”

“새 중에서 몇몇 종류는……날 수 없게 된 자신의 부모나 동료를 챙기는 종도 있다고 합니다……특히 까마귀는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말도 있을 정도로…….”

 

서서히 스위치가 들어가려는 듯 했기에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멈추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그래서는 안 돼. 네가 나에게 얽매여서는, 네가 나 때문에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고.”

“P씨…….”

“……미안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아. 그렇지만……내게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줘.”

“하지만, 제게 있어서 P씨는…….”

 

후미카가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하던 그 때, 문 밖에서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그 소리에 놀란 것인가, 후미카는 크게 어깨를 떨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으로 향했다.

 

“……누구세요?”

“카에데에요. 카나데 양에게서 후미카 양이 여기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맞나요?”

 

나는 문을 열었다. 현관 밖에는 두툼한 점퍼를 입고 있는 카에데 씨가 있었다.

 

“……아차, 아직 이야기 중이었나요? 미안해요.”

“아뇨, 조금 전에 막 끝난 참입니다.”

“어머, 벌써요? 정말이니?”

 

나는 고개를 돌려 후미카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 남은 듯, 나와 카에데 씨를 번갈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거리던 그녀는 고개를 떨구며 힘없이 대답했다.

 

“네……”

“그래? 그럼 돌아가자. 사감님이 걱정하신단다.”

 

잠시 후, 후미카를 데리고 나가면서, 카에데 씨는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너무 우유부단한 남자는 보기에 안 좋아요? 생각, 빠르게 정리되길 빌게요.”

“……조언 감사합니다. 살펴가세요.”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방으로 돌아온 나는 손을 들어 가볍게 머리를 쥐어박았다.

회사를 나오고 난 뒤 나는 의도적으로 후미카에 대한 것을 멀리했다. 그녀를 생각해서 그녀를 놓아주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다른 놈의 손으로 들어가는 것은, 다른 놈과 함께 날아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질투심이 내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만약 그 질투심이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그녀의 이변을 눈치챘을 것이다.

……눈치채더라도, 딱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 테지만.

 

찌지직, 또다시 등 뒤에서 반쯤 녹은 밀랍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2주일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초겨울의 문턱을 막 넘어가는 날씨는 한겨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척이나 추웠다. 어느 정도 적응은 되었다지만, 건설현장의 노동은 여전히 전(前) 사무직에게는 무거운 노동이었다. 근육통에 후들거리는 팔다리를 억지로 흔들고, 마스크를 뚫고 들어오는 저녁의 한기에 이를 딱딱 부딪히면서 나는 집으로 향하는 길을 걷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나를 반기는 것은 맹렬하게 반짝거리는 휴대전화의 화면이었다. 그러고 보니 일하는 중에는 무음으로 놓고 있었지.

휴대전화의 화면을 열자 무지막지한 메시지의 해일이 덮쳐왔다. 수 초 단위로 도착한 것은 다름아닌 선배의 주소가 적혀 있는 메시지였다.

 

선배: 읽는 즉시 연락해라.

 

수신이력을 살펴보았다. 가장 먼저 보낸 메일은 오전 11시로 나타나 있었다.

무슨 일이지? 라고 생각하며, 나는 답장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선배: 너, 내가 말하는 거 하나는 무조건 듣겠다고 했지?

 

칼같이 답장이 날아왔다. 요전번에 뒷처리로 고생하는 선배한테 저런 말을 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랬었죠. 무슨 일인가요?

선배: 지금 당장 K병원으로 튀어와라. 시간 없으니까 택시 타고 와. 돈 없으면 내가 줄 테니.

-왜요?

선배: ……후미카가 쓰러졌다.

 

……그 뒤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떻게 헐레벌떡 준비를 해서 뛰쳐나가긴 한 모양인지, 병원의 로비에서 마주친 선배는 기가 차다는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 쉬는 나를 바라보았다. 일하던 도중에 온 것인지 정장 위에 코트를 걸친 선배의 목에는 보안카드를 겸한 사원증이 걸려 있었다.

 

“뭐야, 뛰어서 왔냐? 뭔 숨을 그렇게 헐떡여?”

“차, 차가……막혀서…….”

“아, 그렇지. 퇴근시간이구나. 오느라 고생했다.”

“후, 후미카는, 어, 어떻…….”

“일단 숨 좀 고르고. 커피 사 줄까?”

 

이상하리만치 여유로운 선배의 태도에 의심을 품을 새도 없이 나는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대답을 하려 했지만, 목구멍까지 차오른 숨 때문에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일용직을 시작하면서 체력은 꽤 붙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한참 멀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래, 그녀가 먼저다 이거지. 이거 참, 부러워 죽겠네.”

 

투덜거리면서 선배는 외투의 안주머니로 손을 찔러 넣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내가 전에 다녔던 회사의 로고와, 사장의 직인이 찍혀 있는 서류였다.

 

“면회 허가서다. 7층 병동에 올라가서 스테이션에 보여주면 될 거야.”

 

내 대답따위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선배는 엘리베이터의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다. 땡, 하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선배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면회 끝나면 연락해라. 얘기 좀 하자.”

 

서서히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너머로 선배를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곳은 개인병동 중에서도 따로 분리되어 있는 개인실이었다. 병실 옆에 걸린 명패에는 ‘사기사와 후미카 님’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병실의 여닫이문 앞에 서서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병이라도 온 것인가. 나는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스레 병실의 문을 열었다.

TV나 영화 속에서 봐오던 VIP룸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1인실은 생각보다 작은 곳이었다. 자그마한 방의 절반은 환자용 침대가 차지하고 있었고, 나머지 공간을 옷장 겸 사물함, TV, 그리고 보호자용 의자와 간이 침구류가 차지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눈을 감은 채, 환자복을 입고 병상 위에 누워 있는 후미카의 옆에는 카에데 씨가 있었다.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는 비어있는 의자의 옆자리에 앉았다. 카에데 씨는 손을 들어 후미카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선생님께선……뭐라고 하시던가요?”

“스트레스래요. 이 아이 나름대로 버텨왔지만……한계였던 모양이네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바라보던 카에데 씨는 빙그레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이제 저는 자리를 비켜 드릴테니, 두 분께서 차근차근 이야기를 나눠 보세요.”

“네? 아, 아아, 네…….”

 

카에데 씨가 병실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이 병실 안에는 후미카와 나 둘 뿐이었다. 나는 한 칸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오른팔에는 노란 수액이 들어가는 주삿바늘을 꽂고 있는 후미카는 2주 전에 만났을 때보다도 한층 더 야윈 모습이었다. 자세히 보면, 늘 광택이 흐르던 피부도 퍼석하게 말라 있었다. 우아하게 뻗어 있던 그녀의 날개는 힘없이 축 늘어져, 날개라기보다는 머리카락의 연장선처럼 보였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오른손에 손을 얹었다.

 

“으응…….”

 

그 때, 후미카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리더니, 그 너머로 그녀의 새파란 눈동자가 모습을 나타냈다. 내 모습을 확인한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P씨……?”

“그래……나야.”

“……죄송해요……컨디션이 중요하다고 그렇게 강조하셨는데…….”

 

어깨를 늘어뜨리고 눈을 내리깔며 사과하는 그녀에게 나는 아무런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지금의 나는, 그녀에게 함부로 그런 말을 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잠시 말을 멈춘 후미카는 주사가 꽂혀있지 않은 팔을 들어 내 손을 잡았다. 내 손의 촉감을 느끼려는 듯, 그녀는 손바닥 전체로 내 손을 조물조물 만지기 시작했다.

 

“손……많이 거칠어지셨군요. 얼굴도……많이 작아지셨어요…….”

“마른 건 너도 마찬가지야. 피차일반이구나.”

“그렇네요…….”

 

후훗, 하고 힘없는 웃음을 흘리며 후미카는 내 얼굴을 쓰다듬던 손을 놓았다. 멀어지는 그녀의 체온이 내심 아쉬웠다. 침대에 설치된 스위치를 조작해 몸을 반쯤 일으켜 세운 후미카는, 좀처럼 나를 바라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눈을 내리깔고만 있었다.

 

“……저는……욕심쟁이에요.”

“무슨 뜻이야?”

“그 때……저는 전무님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었어요. P씨보다 먼저 제게 이야기가 왔었거든요.......”

“…….”

“……하지만, 저는 거절하지 않았습니다……욕심이 생겼어요. 당신께서 보여주지 않은 곳, 내가 혼자서는 볼 수 없는 곳……좀 더 높은 곳으로 가 보고 싶다는 욕심이......”

 

후미카는 두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그 욕심이……그 욕심이 당신을 떨어뜨릴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당신께서는 제가 무슨 선택을 하더라도, 언제나 어디서나 저를 지켜봐 주실 거라고, 안일하게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니야.”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어깨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쓴 맛이 나는 침을 삼켰다.

 

“나는, 응당 그렇게 행동했어야 했어. 네 선택을 존중하고, 네 앞길을 축복하면서 방관자로써 남아야만 했어. 하지만……그렇게 하지 못했지.”

 

후미카는 향상심이 강한 아이였다. 비록 넘어지고 구르고 길을 잃을지언정, 그녀는 결코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비록 그 속도가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리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분명 매일매일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 매일매일이 새로운 도전이었을 터였지만, 그녀는 거기에서 결코 도망치지 않았다. 내가 해 준 것은 날개의 사용법을 가르쳐 준 것뿐이었다.

잠시 말을 멈춘 후미카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실은, 저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답니다…….”

“지켜보다니? 뭘?”

“저라고 하는 인간에게 맞춰주기 위해, 당신께서 해 오신 수많은 노력들을……콜록! 콜록!”

 

말을 하다 말고 후미카는 마른 기침을 토해냈다. 나는 황급히 침대 옆에 놓인 물컵을 그녀에게 건네었다. 컵에 달린 빨대로 물을 마신 그녀는 살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당신을 만나서, 당신과 함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무척 큰 행운처럼 느껴졌습니다……당신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하루하루가 무척이나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떠나던 날, 저는 결심했어요.”

 

후미카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드러난 그녀의 목덜미에는 안쓰러울 정도로 새파란 혈관이 비쳐 보였다.

 

“……’좀 더, 좀 더 높이 날아가자, 좀 더 밝게 빛나자……그렇게 하면 분명히 돌아오실 거야. 밤하늘을 나는 새들은 별빛을 보고 방향을 정하는 법이니까’라고요……그래서 노력했답니다……하지만, 잘 안 되었네요.”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나는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하지만, 너 우리 집에 왔을 때는 아무 말도…….”

“……네, 아무 말씀도 못 드렸지요. 그 때는, 정신이 없었어요. 당신을 마침내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너무 기뻤기 때문입니다. 저는 당신이 어디론가, 아주 멀리 가 버린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제 욕심 때문에……이제는 두 번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그런데, 저와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도시 아래에 계셨다고 생각하니……너무 기뻤어요. 행복했답니다.”

 

자신의 가슴 언저리를 누르면서, 고백하듯 수줍게 이야기를 꺼내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가슴 한 켠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와 함께, 나는 문득 등 가운데가 간질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후미카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병실을 나온 나는 곧바로 선배가 기다리고 있다는 병원 근처의 카페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면회 시간이 정해져 있었기에, 나는 다음에 다시 연락하겠노라는 말만 남기고 쫓겨나듯 병실을 나와야만 했다.

 

“여기다.”

 

카페로 들어가자,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는 선배가 나를 불렀다.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밤 10시를 막 넘긴 참이라서 그런지, 가게 안에는 우리를 제외한 손님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뭐 할 말 없냐?”

“……고맙습니다. 후미카를 챙겨 주셔서.”

“그래.”

 

후미카에게 듣기로는, 내가 떠난 뒤로 프로젝트의 객원 프로듀서 역할을 하던 ‘선배’가 자신을 계속 챙겨주었다고 했다. 전무의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는 프로듀서는 그녀에게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고 하면서.

그 대목에서 나는 남몰래 주먹을 말아쥐었지만, 그건 나 혼자만 알고 있으면 되는 일이다.

 

“저기, 그런데 무슨 일로 이런 곳까지…….”

“후미카에 대한 일로 해 줄 얘기가 있어서 그래. 아, 커피 마실래?”

“아메리카노 진한 걸로요.”

“흠, 그럼 난 카페오레로.”

 

 

잠시 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머그잔을 앞에 두고, 우리 두 사람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후미카에 대한 이야기란건 뭡니까?”

“전무의 프로젝트에서 후미카가 제외됐다.”

“……네?”

 

내가 헛것을 들었나 싶었다. 멋대로 끌고갈 땐 언제고 멋대로 잘라?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선배는 손을 들어 나를 제지했다.

 

“아직 이야기 안 끝났다. 끝까지 들어.”

“……죄송합니다.”

“프로젝트에서 떨어져 나온 이상, 그녀에게는 새 담당 프로듀서가 필요해. 그게 없으면……어떻게 되는지는 너도 알고 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담당 없는 프로듀서’는 있지만, ‘담당 없는 아이돌’은 존재할 수가 없다. 담당이 없는 아이돌은, 연습생으로 강등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쫓겨나게 되니까.

 

“그래서……그 담당은 누가 한답니까?”

 

나는 머릿속으로 몇 명의 후보군을 떠올렸다. 대머리에 유쾌한 성격을 가진 동기도 있었고, 쓸데없이 선글라스 따위를 쓰고 다니는, 에너지의 집합체 같은 후배도 있었다. 하지만 또다시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선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다. 한 사람도.”

“네……? 그럴 리가요. 후미카가 어떤 아이인데!”

“그래, 분명 ‘사기사와 후미카’는 상품성은 뛰어나다. 비주얼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잘 팔려. 하지만, 너무 까다롭다. 다루기 힘든 정밀기계 같은 여자라는 평이 지배적이지. 거기다, 너라는 전례까지 있어. 미치지 않고서야 예쁘게 잘 꾸며진 폭탄을 솔선해서 짊어질 멍청이는 우리 회사에는 없다.”

“큭…….”

 

결국 내 독단적인 행동이 이렇게 돌아오는구나.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선배는 훗, 하고 코웃음을 쳤다.

 

“……나는 얼간이 한 사람을 알고 있어. 새를 따라가보겠다며,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차고 벼랑에서 고공점프를 하는, 정말 제대로 된 얼간이였지. 하지만, 기계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게 잘 다루는 얼간이더군.”

“……그게 무슨…….”

 

나는 고개를 들어 선배를 바라보았다.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면서, 선배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번만 말할 거니까 잘 들어. 네가 지금 근본적으로 뭘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내가 가르쳐주마.”

 

나는 침을 삼켰다.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등 뒤에 달고 있던 거추장스런 밀랍덩어리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음……팔도 그렇고 가슴도 그렇고 되게 조이네…….”

 

다시 1주일의 시간이 지났다.

두 달 만에 입은 정장은 무척이나 답답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신사들의 갑옷이라고 하던가. 비겁한 도망자 신세였던 나에게는 ‘신사’라는 타이틀은 아직 무거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어쩌랴, 이제는 입어야만 하는 것을.

거울 앞에 서서, 넥타이를 고쳐 매면서 나는 선배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너는 지금까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만, 제3자인 내가 보기에는 너희 둘은 누가 앞에 서 있냐는 그런 단순한 관계가 아니야. 이인삼각, 누구 하나가 나머지 하나를 끌어주는 게 아니라, 둘이 합을 맞춰 앞으로 나아가는 관계가 너희 둘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네 식대로 말하자면……그래, 서로가 날개 하나씩을 갖고 있는 셈이지. 날개를 펄럭일 때, 어깨동무 단단히 안 하면 둘 다 떨어져 버릴 거다.

 

넥타이를 조여 매고 현관으로 향했다. 어제 저녁에 미리 불광까지 먹여둔 검은 단화가 반짝거리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어필하고 있었다. 새로 산 것은 아니지만, 지난 2년간 몇 번이나 밑창을 갈아가며 나와 함께 동고동락했던 파트너였다. 파트너의 감촉을 느끼면서 나는 현관문을 박차고 나갔다.

 

 

 

“자, 어떻게 할 테냐?”

 

선배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생각보다 시원시원하게 나왔다.

아니, 애초에 고민을 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다. 아마 저 사람도 그것을 알고 내게 이야기를 꺼낸 것이리라.

 

“하겠습니다. 아니, 하게 해 주세요.”

“뭐야, 고민이라도 할 줄 알았더니?”

“……제가 저지른 짓입니다. 제가 속죄하고 싶어요.”

“속죄? 아니지, 이건 속죄가 아니야. 네가 내팽개친 걸 다시 되찾는 거지.”

 

그렇게 말하며 선배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이제부터는 나한테 맡겨라. 넌 그냥 출근 준비나 하고 있어. 그리고 어떻게 엎드려서 빌어야 덜 맞고 끝날지도 고민하고. 알겠냐?”

“……네.”

 

 

 

2달만에 다시 찾은, 한때 내가 몸담았던 회사의 건물을 올려다보면서, 나는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자,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일단 전무한테 가서 엎드려 빌어보기나 할까.

 

 

***

 

 

뜻밖에도 이야기는 너무나도 시원스럽게 진행되었다. 이런저런 핑계거리를 생각해 두었지만, 내 얼굴을 본 전무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지난 2달간은 출장으로 처리해두었다. 그리고 사기사와 후미카는 자네의 담당으로 돌려놓을 테니, 자네는 신변이 정리되는 대로 가급적이면 빨리 업무를 재개해주었으면 좋겠군. 그녀의 빈자리를 때우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말이다. 가능하면 다음 주 안으로 신변정리를 끝내놓게.”

“네! 심려 끼쳐 드려서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알면 됐다. 들어가 봐.”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쏘아붙이는 전무를 앞에 두고, 부서질 듯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면서 나는 집무실을 나왔다. 집무실을 나오면서도 '이거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던 나를 반기는 것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선배였다. 눈치를 보아 하니, 아무래도 나를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잘 끝났냐? 뭐라고 하던?”

“지난 두 달간은 출장으로 처리해 주겠다고……빨리 신변정리를 끝내라고 하시더군요.”

“그래? 그거 잘 됐군. 자, 가자. 네 자리 되찾으러 가야지.”

“아뇨, 그것보다도, 먼저 할 일이 있어요.”

 

내 손을 잡아 끌고 사무실로 향하려던 선배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한 여성의 목소리에 덜컥, 하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카에데 씨였다.

 

“정말, 무뚝뚝한 것도 정도가 있어요. 감동적인 재회의 순간을 뒤로 미룰 셈인가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그녀의 등 뒤에 있는 것은, 두툼한 스웨터 위에 체크무늬가 들어간 숄을 걸치고 있는 흑발의 미녀였다. 몸은 좀 괜찮은 것일까. 나는 비틀거리면서 나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오는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내 앞에 선 그녀는 쭈뼛거리면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프로듀서……씨죠……?”

“……그래, 면목없지만……폐 끼쳐서 정말 미안하다.”

“……아뇨……폐라뇨……아니에요……저기, 괜찮으시다면…….”

“……그래.”

 

그녀가 내 소맷자락을 가볍게 잡아 당겼다. 예전부터 우리 둘 사이에서만 사용하는 암호. 조금 걷고 싶다는 제스쳐였다. 나는 선배를 바라보았다.

 

“뭘 봐? 할 얘기 많을 텐데. 나중에 저녁때 보자.”

“……감사합니다.”

 

선배와 카에데 씨에게 인사를 하고 나는 후미카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녀가 멈춘 곳은 소회의실 앞에 마련된 자그마한 쉼터였다. 자판기가 설치되어 있는 벽면의 한쪽 면에는 ‘용모를 단정히’라는 표어가 그려진 커다란 거울이 붙어 있었다. 후미카는 그 거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예전에……제게 특별히 좋아하는 이야기가 있냐고 물어보셨죠......?”

“응? 아아, 그랬었지.”

 

그 때는, ‘지금은 말하기 곤란하다’라고 했었던가. 후미카는 뒤로 돌아서서, 나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심창에 숨겨둔 영애가 아닌, 심창에 숨겨둔 아이돌……지금의 저는, 어떤 의미로는 손이 닿지 않는 존재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어떤 이야기에도, 인연은 있다고 생각해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나는 그녀의 새파란 눈을 바라보았다. 평소의 그녀와는 달리, 오늘의 그녀는 어쩐지 아련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나를 올려다보던 후미카는 빙그레 웃으며,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와 자신의 두 손으로 내 오른손을 감싸 쥐었다.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겉으로 보면, 이 이야기는 수수한 소녀의 성공담이에요. 하지만, 뒤쪽에서 보면……그건, 아주 현명한 사람이 수수한 소녀를 이끌어준 이야기랍니다……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고, 후미카는 두 손으로 감싸쥐었던 내 손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당신과 저에게는, 서로가 서로를 더욱 깊게 알아가는……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 이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저는 가장 사랑하고 있답니다.”

 

두 뺨을 수줍게 붉히면서 조용히 눈을 내리감는 후미카를 바라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고마워요, 다시 돌아와 주셔서…….”

 

***

 

잠시 후, 후미카가 레슨을 받으러 간 뒤, 나는 거울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에게는 가짜 날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흉측한 밀랍 덩어리가 뜯겨나간 자리에, 자그마한 날개가 있었던 것이다. 비록 지금은 흔적밖에 보이지 않는 수준이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날개였다. 그녀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성질의 것이었다.

 

“그렇구나, 2인3각.”

 

나는 선배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다. 대체 어디까지 꿰뚫고 있었던 것일까.

그제서야 나는 내가 무엇을 착각하고 있었는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아이돌이 되기로 결심했던 날, 후미카는 내게 ‘나를 만난 것이 인연이다’라는 말을 했다. 그 시점에서 그녀에게 있어서 길잡이는 나 하나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를 감히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려 했으니 서로 단단히 어긋날 수 밖에.

나는 다시 한번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바라보았다. 비록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그마한 날개였지만, 적어도 그녀와 함께 하면서, 그녀가 힘이 부칠 때 그녀를 받치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으리라.

그 정도면 충분하다. '가능성'을 발견한 이상, 그것을 키우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니까.

나는 크게 기지개를 폈다. 내일부터는 다시 바빠지겠구나.

 

 

<끝>

[이 게시물은 천사P님에 의해 2017-05-02 13:36:15 창작판에서 복사 됨] http://idolmaster.co.kr/bbs/board.php?bo_table=create&wr_id=10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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