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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리티P 시리즈] (Re)Write─덮어 쓰는, 혹은 다시 쓰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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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30, 2017 02:27에 작성됨.

 < (Re)Write─덮어 쓰는, 혹은 다시 쓰는. (4) >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나의 마지막 제자이자 마지막 친구에게.

바라건대, 내 기력이 다하더라도 이 편지가 그에게 무사히 전해질 수 있기를.

 

 


(Re)Write─덮어 쓰는, 혹은 다시 쓰는. (5) 

 

 

 

동경 표준시 12월 27일, 로스앤젤레스 교외의 한 마을.

 

 

“자, 차 키 챙기고. 차고에는 내가 넣어 놨으니까.”

“응…….”

“조심해서 들어가. 또 방 올라가다 구르지 말고.”

“응……너도 잘 가…….”

 

어딜 보고 손을 흔드는 건지.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캐서린이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는 가볍게 몸을 들썩여 등 뒤에 업고 있는 카에데의 위치를 바로잡았다.

정원을 가로질러,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이 넓게 만들어진 도로를 스무 걸음 정도 걸으면 야트막한 울타리가 나타나고, 그 울타리를 지나가면 곧바로 우리 집이 나타난다. 캐서린의 집과는 울타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 거의 맞닿아 있다고 해도 될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오토락이 달려 있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미 3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내 머릿속에 깊숙이 남아 있는 냄새가 내 코를 자극했다. 나를 진정시켜주는 우리 집 고유의 냄새였다.

 

“으응…….”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에 반응한 것인지 등 뒤의 그녀가 작게 몸을 꿈틀거렸다. 실시간으로 등을 자극하는 부드러운 감촉을 머리 속에서 밀어내며, 나는 카에데의 여행 가방을 현관에 내려놓고는 곧바로 현관으로 연결된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두 사람 분의 체중이 실린 탓인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삐걱거리는 익숙한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내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기억 속의 그 모습과 거의 바뀐 것이 없는 방 안의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뀐 것이 있다면 며칠 전 캐서린을 통해 미리 손질을 해 둔 덕분에 침구류가 모두 모두 새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는 것 정도였다.

 

“……뭐, 쓰는 사람이 없으니 당연하지.”

 

업고 있던 카에데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스레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을 쉬는 그녀에게 이불을 덮은 뒤, 다시 현관으로 돌아가 현관에 세워둔 여행가방을 그녀가 자고 있는 내 방으로 옮겨놓고 방을 빠져 나와 부엌으로 향했다.

 

“어디보자, 가스는 제대로 들어오고 있고, 수돗물도 이상 없고, 전기도 잘 들어오고 있고…….”

 

나는 콘센트가 뽑혀 있는 냉장고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텅 비어있는 저 녀석의 배를 채우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그럼, 시장만 봐 오면 되겠군.”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에 눈을 떴을 때, 제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난생 처음 보는 낯선 천장이었습니다. 눈을 깜박이며 크게 심호흡을 하면, 처음 맡아보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습니다.

 

“아……여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삐그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머리맡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손을 뻗어 주워 본 그것은, 프로듀서의 글씨가 적혀 있는 쪽지였습니다.

 

-아마 이 쪽지를 보셨다는 건 제가 없을 때 일어났다는 뜻이겠죠. 여기는 제 집입니다. 일본에 돌아갈 때까지는 이곳에서 지낼 테니 편하게 계세요. 원하신다면 집 안을 구경하셔도 됩니다. 저는 물건 살 게 있어서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저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 시계를 확인했습니다. 오전 10시. 마지막으로 공항에서 시계를 본 것이 6시 언저리였으니, 네 시간을 내리 잤다는 이야기가 되는군요.

 

“으으응~!”

 

침대에서 내려와서 크게 기지개를 폈습니다. 어깨며 목이며 뚜둑하는 소리가 귓가에 울립니다. 흐트러진 이불을 정리하고 방 안을 다시 한번 돌아보았습니다. 조금 전에는 낯선 환경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탓에 미처 보지 못했던 방 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기는……그냥 침실이네요.”

 

원룸의 절반 정도 되는 크기의 방의 가운데에는 제가 누워 있던 침대가 서 있었고, 창문이 나 있는 한쪽 벽면을 제외한 나머지 세 벽면에는 모두 책으로 가득 찬 책꽂이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문이 달린 쪽의 벽에는 그나마 작은 책장이 들어서 있었고 그 옆에는 지금도 째깍째깍, 초침이 달리는 소리를 내는 벽걸이 시계가 걸려 있었습니다.

저는 책장으로 다가가 책장에 든 책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미국에서 살아온 사람인 만큼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은 하나같이 영어로 된 것들뿐이었습니다. 시야를 가득 메우는 낯선 언어의 폭풍에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저는 방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문을 열자 곧바로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습니다. 고개를 내밀어 슬쩍 내려다보면 계단의 끝은 현관으로 바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계단을 따라 1층으로 내려가자, 2층과는 달리 온통 카펫이 깔려 있는 바닥이 저를 맞이했습니다.

저는 현관에 서서 집 안을 돌아보았습니다. 왼쪽에는 벽난로가 설치된 거실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반쯤 문이 열려 있는 방이 있었습니다. 문 틈으로 슬쩍 보이는 방 안의 모습은 책이 가득 들어차 있는 서재처럼 생긴 곳이었습니다.

 

“영화에서 많이 본 것 같은 구조네요…….”

 

그 순간, 제 머릿속에는 며칠 전 심야 케이블 방송에서 본 공포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이렇게 생긴 주택 어딘가에 철가면을 쓴 살인마가 숨어 있다가, 멋도 모르고 들어온 사람들을 해친다는 내용의 흔해빠진 슬래셔 영화였습니다.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 했습니다. 등줄기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저는 곧바로 계단을 뛰어 올라가 침실로 돌아갔습니다.

여행가방에 들어 있는 짐을 정리한 뒤, 저는 프로듀서가 돌아올 때까지 이불 속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30분 정도 지났을까요, 마당에 자동차의 바퀴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프로듀서가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제 이야기를 듣고 프로듀서는 박장대소를 터뜨렸습니다.

 

“아하하! 그래서 침대에 누워 있었어요? 꼼짝도 안 하고?”

“저, 정말로 무서웠단 말이에요……대체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는 건지…….”

“그러면 다음에 저랑 같이 둘러봅시다.”

 

프로듀서는 도마 위에 정리해둔 재료들을 커다란 웍(주 : 중국식 요리를 할 때 쓰는 커다란 냄비)로 옮겨 담았습니다.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끓는 버터 위로 큼직하게 썬 야채가 들어가자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버터 특유의 냄새가 코를 간지럽힙니다.

미국에 살던 시절의 프로듀서는 정말 본격적으로 요리를 했던 모양입니다. 부엌에는 커다란 업소용 버너는 물론, 웍도 크기별로 구비되어 있었으니까요. 칼이나 냄비의 손잡이에 손때가 묻어 있는 것을 보면 정말로 오래 사용한 물건인 듯 합니다.

지금까지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기에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음식 냄새를 맡은 다음부터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배가 꼬르륵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지글거리는 소리에 묻히겠지만, 혹여 그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저는 식탁에 턱을 괴고 앉아, 가스버너 위에서 웍을 이리저리 돌리는 프로듀서의 옆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프로듀서가 음식을 만드는 모습은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었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평소보다 더 즐거워 보이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문득, 예전에 나갔던 예능 프로그램에서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요리하는 섹시한 남자’라던가요……요리하는 섹시한 남자……색시감……후훗.’

“뭐 보세요?”

 

아차, 너무 뚫어지게 바라본 모양입니다. 다 볶은 재료를 옮겨 담던 프로듀서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여기서는 솔직하게 말해볼까요.

 

“예전에 TV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가 생각나서요.”

“어떤 프로그램이요?”

 

프로듀서는 팬 밖으로 흘러내린 기름기를 닦아내고, 이번에는 고기를 넣고 볶기 시작했습니다.

 

“’레이디스 토크’말이에요.”

“아아, 그거 말인가요.”

“거기서 ‘요리하는 섹시한 남자’라는 이야기가 나왔거든요.”

 

덜그럭, 부드럽게 돌아가던 웍이 한 순간 헛돌며 버너와 부딪혔습니다. 귀를 찌르는 금속음에 그가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고개를 돌려 저를 바라보는 프로듀서에게 저는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섹시하네요, 프로듀서.”

“농담하지 마세요. 섹시는 무슨.”

“앞치마도 잘 어울려요. 좋은 색시감이 될 것 같네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거의 다 됐으니까.”

“네~.”

 

다시 요리에 집중하는 그의 모습을 턱을 괸 채로 바라보는 것이 무척이나 즐거웠습니다. 마치 영화에 나올 법한 광경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어제 봤던 뮤지컬에서도 이런 내용이 있었지요. 사랑에 빠진 두 주인공이 동거하면서 서로의 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이었습니다.

……비록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요.

 

“자, 다 됐습니다.”

 

생각에 빠져 있던 사이, 완성된 요리가 테이블 위에 올라왔습니다. 대단히 공을 들인 듯, 밥알 하나하나가 금빛으로 번쩍이는 볶음밥이었습니다. 커다란 접시에 수북하게 쌓인 볶음밥을 바라보고 있자니 제 앞에 자그마한 접시 하나가 탁, 하고 놓였습니다.

 

“비행기 타고 난 뒤로 아무것도 안 먹었으니까요. 든든하게 먹고 나갑시다.”

“네.”

 

 

***

 

 

식사를 마치고 프로듀서와 함께 집을 나섰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을 한참 넘긴 시각이었습니다.

밖의 날씨는 무척이나 포근했습니다. 캘리포니아가 도쿄나 뉴욕보다 따뜻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한낮에는 봄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날씨가 따뜻했습니다. 미리 봄 옷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 했네요.

차고에서 꺼낸 프로듀서의 자동차는 뉴욕에서 봤던 어마어마한 자동차(훗날 캐서린에게 듣기로는 ‘벤틀리’라고 하는 엄청난 고급 브랜드라고 합니다)와는 달리, 딱 두 명이 탈 수 있는 자그마한 차였습니다. 뜻밖이라고 생각하며 작은 차를 모는 이유를 물어보자.

 

“LA는 교통이 무척 안 좋거든요. 작은 차가 운전하기 편해요. 평소에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고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러고 보면 관광 가이드에서도 본 적이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교통이 끔찍하니 대중교통도 뒷목을 잡을 각오를 하고 사용하라는 식으로 적혀 있었죠.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면, 청바지에 반팔 셔츠를 입고 메트로의 로고가 그려진 야구 모자를 쓰고 있는 프로듀서가 운전대를 잡고 있었습니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일본과는 정 반대로 오른쪽에 마련된 조수석에 앉아, 이국의 풍경을 만끽하던 저는 뒤늦게 행선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이 녀석을 고치러요.”라고 말하며, 프로듀서는 운전대를 잡고 있는 왼팔을 들어 보였습니다. 언제나처럼 그의 왼팔에 걸려 있던 시계가 반짝, 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그 아이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리피터’라고 하는 게 있어요. 주기적으로 시간을 가르쳐주는 시계 내부의 장치인데, 그게 고장이 나서 말이죠.”

 

그제서야 저는 프로듀서와 함께 있을 때면 이따금씩 들리곤 하던 가느다란 종소리가 며칠째 들리지 않던 것을 떠올렸습니다.

 

“일본에서는 안 되던가요?”

“몇 군데 돌아다녀 봤죠. 힘들다는 대답만 돌아오더군요.”

 

‘아무리 고급 시계라도 판매점으로 가져가면 수리를 해 주지 않을까?’라고 생각한 순간, 제 생각을 읽은 듯 프로듀서가 한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오더메이드 라더군요. 일반 메이커 판매점에서는 수리가 안 되는 물건이래요.”

“귀한 건가 봐요?”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습니다.

 

“……네. 귀한 거죠. 무척.”

 

한 박자 늦게 들려오는 대답은 어쩐지 무척이나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여기인가요?”

“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도심의 골목 깊숙한 곳에 위치한 작은 공방이었다.

간판이라고 할 만한 물건이라고는 문에 걸려 있는 자그마한 나무 팻말뿐. 자그마한 창문과 낡은 나무로 만들어진 문이 인상적인 가게였다.

문에 달린 문고리를 잡고 두어 번 노크를 하자, 그 안에서 드세어 보이는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오?”

“시계를 봐주셨으면 해서 왔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시게.”

 

문 너머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카에데를 돌아보았다. 원래라면 그녀를 집에 남겨두고 혼자서 나올 생각이었지만, 그녀가 집에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니 도저히 그녀를 남겨둘 엄두가 나지 않았다. 캐서린에게 맡길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뉴욕에서 몇 번이나 신세를 졌는데 더 신세를 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지금부터는 아마도 영어만 사용하게 될 겁니다. 불쾌하시더라도 양해해주세요.”

“네, 저는 괜찮아요.”

 

문에서 반 걸음 정도 물러서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머리가 반쯤 벗겨진 노인이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머리카락도 눈이 내린 듯 하얗게 센 노인은 자신에게 목례를 하는 우리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그래, 용건이 있는 쪽은 어느 쪽인가? 자네? 아니면 이 아가씨?”

“아, 접니다.”

 

노인은 안경을 고쳐 쓰면서 나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청년이군.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었나?”

“아뇨. 저는 처음입니다만…….”

“그렇군. 미안하네. 이거 나이를 먹으니까 기억력도 예전만 못하군그래……시계를 봐 줬으면 한다고?”

“네. 이겁니다.”

 

나는 손목에서 미리 풀어두었던 시계를 내밀었다.

 

“그래, 아픈 곳은?”

“안쪽에 리피터가 깨진 것 같아서요.”

 

시계를 받아 들고, 주머니 속에서 접안렌즈를 꺼낸 그는 내가 건넨 시계를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흐음……오버홀은 몇 번이나 받았나?”

“10년쯤 전에 한 번…….”

“에잉……그러니까 깨지지.”

 

무언가를 발견한 것인지, 시계를 이리저리 돌려보던 노인은 신음소리를 흘리기 시작했다. 그는 나를 흘깃 바라본 뒤 렌즈를 다시 주머니로 되돌리고 안경을 고쳐 썼다.

 

“자네, 이거 어디서 난 건가?”

“……저희 아버지께 받은 겁니다.”

“그렇군…….”

 

노인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는 문을 크게 열어 젖혔다.

 

“들어오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노인의 뒤를 따라 들어간 공방 내부는 그야말로 ‘공방’이라는 단어 이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장소였다. 한낮의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어둑한 공간을 밝히고 있는 것은, 수많은 부품과 공구가 돌아다니는 책상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스탠드의 불빛뿐이었다. 어찌나 불빛이 강한 것인지, 주위에 산란하는 빛만으로도 방 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노인은 우리를 공방의 좀 더 안쪽에 있는 안채로 안내했다. 형광등 불빛 아래로 자그마한 테이블과 냉장고, 그리고 작은 싱크대가 놓여 있는 그 곳은 안채라기보다는 응접실 같은 장소였다.

우리가 의자에 앉자, 노인은 냉장고에서 병에 든 과일음료를 하나씩 꺼내어 우리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카에데를 사이에 두고, 노인은 내 건너편 자리에 털썩 앉아 내 시계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칠 수 있네.”

“정말입니까?”

“물론, 이건 내가 만든 녀석이니까.”

“……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한때 꽤나 알아주던 캐비노티에(cabinotier, 시계장인)였어. 유럽 전역에서 시계를 좀 만졌다 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내 공방과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지.”

“그런데 어쩌다 이런 곳에…….”

”자식들 때문이지.”

“아.”

 

흔한 이야기이다. 아버지의 재산을 두고 자식들끼리 싸운다는 전개. 아마도 이 노인 역시 그런 이야기를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내가 죽고 나서, 나는 자식들에게 공방을 물려주고 미국으로 건너왔네. 자식 놈들 싸우는 것도 지긋지긋했고, 그냥 쉬고 싶었어. 그렇게 여기에 작은 시계방을 차려놓고 소일거리나 하면서 살고 있었지. 시계장이로 말이지.”

 

‘공방’이라 하지 않고 ‘시계방’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아마도 이곳에 온 이후로는 시계를 만들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계는 언제 만들었다는 거지?

그는 아련한 눈빛으로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내 시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시계를 어루만지는 노인의 표정은, 마치 오래 전에 헤어진 사람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자세를 펴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이름까지 바꿔 가면서 은거 흉내를 내기 시작한 지 2년쯤 되었을 때였나. 지금으로부터 35년쯤 전이었지. 어떻게 찾은 것인지, 사업가 한 사람이 나를 찾아왔어. 나랑 한 열 살 정도 차이 나는 사람이었는데, 숙박업을 하고 있는 사업가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이었지. 대뜸 찾아와서는 나에게 시계 하나를 만들어달라고 하더군. 무슨 일인고 하니, 자신의 지인에게 줄 선물을 만들어 달라고 하는 소리였어. 요금은 얼마든지 지불할 테니, 5년 안에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달라고 하더군.”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혹시 알고 계십니까?”

 

내 질문에 노인은 입을 다물었다.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그의 눈빛, 그것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눈치였다.

 

“……미안하네만, 거기까지는 말해줄 수 없네. 본인이 거듭 비밀을 지켜달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했지만?”

 

마치 주위에 듣는 사람이라도 있다는 듯, 노인은 자세를 숙여 목소리를 죽였다.

 

“……지금의 그는 터무니없는 거물이기도 하거든. 괜한 입을 놀려서 피를 보고 싶지는 않아.”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모른다면 자네는 어떻게 나를 알고 찾아왔나? 보아하니 소문을 듣고 온 건 아닌 모양이다만.”

“……아버지께서 이 가게의 위치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군…….”

 

또다시 대화가 멈추었다. 내가 앞에 놓인 음료를 한 모금 마시자, 노인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네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있지?”

“돌아가셨습니다. 16년 전에…….”

“……괜한 질문을 했군.”

“아뇨, 괜찮습니다. 그보다도 이야기를 계속해주세요.”

 

“그러지”라고 말하며 그는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그 시계를 만드는 데 4년 하고도 10개월이 걸렸네. 도대체 누구에게 주려고 만드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같은 사람을 찾아와 부탁을 할 정도라면 분명 보통 사연이 아닐 거라 생각했지. 단순히 돈지랄을 하고 싶었다면 나 같은 캐비노티에 아닌 브랜드를 찾았을 테니까.”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같은 오더메이드라 하더라도 단순히 돈지랄이 목적이었다면 브랜드에 오더를 넣었겠지. 이렇게 외딴 곳에 은거한 사람을 찾은 것에는 분명 무언가 특별한 것을 남기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완성된 시계를 전해주기로 한 그 날, 나는 그 사람에게 대체 누구에게 줄 것인지를 물어보았네. 간이 부은 것도 정도가 있지, 궁금증 때문에 눈에 뵈는 게 없었던 게야.”

“뭐라고 했습니까?”

“’나에게는 사생아가 하나 있소. 30년 세월을 살면서 평생 아버지한테서 아들 소리 들어본 적 없는 놈이고, 평생 아버지가 있는지도 모르고 자란 녀석이지. 그런 녀석이……어느새 결혼을 한다고 하더군. 무언가 해 주고 싶었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못난 아비지만, 결혼식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못난 아비지만, 그 녀석에게 뭐라도 해 주고 싶었어’라고 하더군.”

“그럼 그 아들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시계의 주인일세. 시계를 의뢰한 사람은 만의 하나 이 시계를 받은 아들이 자신을 찾아올 경우를 대비해 시계에 특별한 장치까지 넣어 두었네. 그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나와 그 남자만이 알고 있어. 내가 이 시계를 단번에 알아본 것도 그것 때문일세. 이 세상에서 이런 걸 만들 수 있는 건 젊은 시절의 나 말곤 없다는 걸 자신하고 있었거든.”

 

그제서야 떠오른 것이지만, 처음 이 시계의 오버홀을 맡겼을 때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시계의 구조가 너무 복잡해서 자신의 힘으로는 고작 바깥부분을 청소하는 게 고작이라며 제대로 된 분해수리를 하려면 만든 사람을 찾아가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시계장이의 말이었다.

그 때는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이었으니 적당히 한 귀로 듣고 흘렸지만…….

 

“……그래서, 얼마나 걸릴까요?”

 

노인은 검지와 중지를 펼쳐 보였다.

 

 

***

 

 

노인의 공방을 나와서, 할리우드의 명소 몇 군데를 들렀다 집으로 돌아오니 이미 저녁 10시를 넘긴 시간이 되어 있었다.

카에데가 먼저 씻으러 간 사이, 나는 서재에 넣어 두었던 간이침대를 내 침실로 옮겼다. 원래라면 카에데를 침실에서 재우고 나는 서재의 간이 침대에서 잘 계획이었지만, 혼자서 자기에는 도저히 무서워서 안 되겠다는 그녀의 말에 별 수 없이 다시 올라오게 된 것이다.

‘이 집이 그렇게 무섭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침부터 꼼짝도 안 하고 침실에 박혀 있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면 아무래도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2층의 내 침실에 간이 침대를 펼치고 그 위에 누워 있자니 침실의 열린 문틈 사이로 카에데가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 노랫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천장을 바라보는 내 머릿속은 온통 시계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2일이면 충분하네. 2일 뒤 이 시간에 찾아오게.

 

‘아버지의 아버지……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시계를 남겨 주었고, 나는 아버지에게 시계를 받았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나는 아버지에게서 시계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내게 아무 것도 남겨주지 않았다.

이 시계는 아버지가 더 이상 찰 수 없는 몸이 되었기에 멋대로 내가 얻어 쓰기 시작한 것일 뿐. 아버지의 기억 속의 나는, 아마도 이 시계의 근처에도 갈 수 없는 놈일 것이다.

 

-넌 아직 내 아들이 될 자격이 없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놈 같으니.

 

불현듯 아버지가 틈만 나면 내게 내지르던 일갈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야구를 시작하고, 조금은 ‘아들’에 가까워질 수 있었을까……따위의 생각을 했지만, 결국 나는 아들이 되기 전에 아들이 아니게 되어버리고야 말았다.

 

“하아…….”

 

머리가 복잡했다. 한숨을 내쉬는 그 때, 방의 문이 덜컥 열리며 카에데가 들어왔다. 집에서 입는 옷차림인지, 실크 재질의 원피스를 걸친 그녀는 목에 두른 타월로 머리의 물기를 닦아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 하고 있어요?”

“내일은 뭐 먹을까 생각하고 있었죠. 욕실은 어때요? 쓸만합니까?”

“네. 호텔보다 여기가 더 좋은 것 같은데요?”

“하하, 빈말이라도 감사합니다.”

“프로듀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보았다. 내 대답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 것인지,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아내던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어떤 의미입니까?”

“그 시계방을 나온 뒤부터 뭔가 생각이 많아 보여서요.”

“그렇게 보였나요…….”

 

얼굴에 드러날 정도라니, 나도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며 나는 그녀를 향해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정말로요.”

“그런가요…….”

“네, 정말로 괜찮아요”

 

나는 불을 끄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잡시다..”

“……네.”

 

나는 그녀가 자리에 누운 것을 확인하고 불을 껐다. 어두워진 침실의 창문을 통해, 도쿄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반짝이는 별빛이 쏟아져 내려왔다.

 

 


 

 

 

한밤 중, 침대에 누워 있던 카에데는 불쑥 몸을 일으켰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그녀의 머리맡에 놓여 있는 휴대전화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전화라도 온 것인지, 그녀는 휴대전화를 들고 발소리를 죽여 침실을 나갔다.

나무를 깎아 만든 문은 오랜 세월이 지난 탓인지 약간 축이 뒤틀려 있었다. 뒤틀린 문이 만들어낸 문틈 사이로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씩 새어 나왔다.

 

“아, 사장님……네, 지금은 LA에……휴가……감사…….”

 

잠시 후, 통화를 마친 듯, 화면이 꺼진 휴대전화를 든 그녀가 방으로 돌아왔다. 방 안을 한번 둘러본 그녀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머리맡의 충전기에 연결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나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동경 표준시, 12월 28일.

 

 

다음 날, 프로듀서는 병원에 예약이 되어 있다고 하며 아침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같이 가고 싶었지만, 대학병원이라는 말을 듣고 저는 그냥 집에 남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집에 있는 거, 이번에라도 집 안을 구경해보고자 했지만.

 

“……역시, 무섭네요…….”

 

찬바람이 쌩쌩 부는 집 안의 분위기에 압도된 저는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동네 구경도 할 겸 해서, 산책이라도 해 볼 생각이었습니다.

 

“어? 카에데? 좋은 아침!”

 

그 때, 저는 때마침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던 캐서린과 마주쳤습니다. 개를 산책시키고 온 참인지, 그녀의 손에는 커다란 골든 리트리버가 묶여 있는 목줄이 들려 있었습니다.

 

“여기서 뭐 해요? P는 어디 갔어요?”

“병원 예약이 되어 있다고 해서 일찍 나갔어요.”

“아, 맞아…….”

 

‘병원’이라는 말에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습니다. 무슨 일인지 알고 있냐고 묻자, 그녀는 대뜸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습니다.

 

“예전에 뇌수술을 한 적이 있거든요. 그 뒤로 주기적으로 대학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곤 해요. 보아하니 일본에서는 못 한 모양이네요.”

 

“그것보다도” 그녀는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P가 집 구경 못하게 했어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요……그게……조금, 무서워서요.”

“무서워……? 아아, 하긴. 저런 집에 혼자 있으면 무섭긴 하죠. 그럼, 나랑 갈래요?”

“그래도 되나요?”

“물론이죠!”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팡팡 두드렸습니다.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기 때문인가, 서양인다운 볼륨감을 지닌 그녀의 두 봉우리가 사정없이 출렁거렸습니다.

 

“P가 없을 때는 제가 대신 관리해 주거든요. 관리비도 받고 있지요.”

 

어쩐지, 3년이나 안 쓴 집인데 청소 상태가 묘하게 양호하다 싶었습니다. 이런 비밀이 있었군요.

 

”그럼 금방 갈아입고 나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요?”

“네.”

 

 


 

 

 

로비에 설치된 소파에 앉아, 나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파랗고 하얀 줄무늬가 그려진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군데군데 앉아 있었다. 그 때, ‘띵동’하는 차임벨 소리와 함께 알림판에 번호가 떠올랐다. 32번이었다.

나는 손에 쥐고 있는 번호표를 내려다 보았다. 32번이었다.

접수창구로 다가가자, 단정하게 정장을 갖춰 입은 남자 직원이 나를 올려다 보았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오셨나요?

“검사 예약을 해 뒀는데요.”

“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윌리엄 존슨.”

“윌리엄……?”

 

내 이름을 컴퓨터에 입력하던 직원은 화들짝 놀라며 나를 올려다 보았다. 나는 쓰고 있던 모자와 안경을 벗으며 가볍게 목례했다.

 

“안녕하세요.”

“아, 아, 안녕하세요. 아, 그러니까……지하 1층 뇌신경 검사실로 가시면 됩니다.”

“고마워요.”

 

다시 한번 꾸벅, 목례를 한 뒤 나는 안경과 모자를 다시 제자리로 되돌렸다.

 

 


 

 

 

캐서린을 기다리며 집 주위의 마당과 뒤뜰을 둘러보고 있자니, 잠시 후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캐서린이 그녀의 집에서 나왔습니다. 어째서 외출복이냐고 물어보았더니 “P랑 오후에 갈 곳이 있어서요. 카에데도 같이 가게 될 거에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어디를 간다는 것인지 궁금증이 일었지만, 그것은 잠시 접어 두고 저는 그녀의 뒤를 따라 프로듀서의 집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자, 우선은 여기부터 가보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캐서린은 거침없이 바로 오른쪽에 있는 서재의 문을 열었습니다. 어제만 하더라도 반쯤 열려 있었는데, 오늘은 프로듀서가 문단속을 한 것인지, 문이 제대로 닫혀 있었습니다.

침실보다 약간 큰 서재는 서재라는 이름에 걸맞게 커다란 채광용 창문이 있는 벽면을 제외하면 사방이 온통 책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꽂혀있는 책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여기저기 사람의 손길을 많이 탄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책이 정말 많네요.”

“별 다른 일이 없으면, P는 항상 여기에 틀어박혀서 책을 읽곤 했어요. 시즌이 끝나고 나면 운동선수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여기에 틀어박혀서 나오지를 않았죠. 퇴원한 직후에도 한동안은 그랬고요.”

 

캐서린의 설명을 들으면서 저는 책장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책들이 잔뜩 꽂혀있는 책장 역시 보통 책장이 아니라 두 겹으로 되어 있는 책장이었습니다. 마치 도서관처럼, 앞쪽의 책장을 좌우로 밀면 뒤쪽의 책장이 나타나는 방식이었습니다.

저는 미즈키 씨가 주도했던 ‘신데렐라 걸즈 좌담회’에서 들었던 후미카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프로듀서 씨와 이야기를 하면……무척 편안함을 느껴요……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모두 받아 주시기에…….

 

과연, 이 정도라면, 동질감을 느낄 만도 하죠.

그 때, 책장에 꽂혀 있던 책들 중에서 제 시선을 잡아 끄는 것이 있었습니다. 뽑아서 읽기 편하도록 눈높이와 비슷한 자리에 꽂혀 있는 책으로, 사방이 영어책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그 책과 주변의 몇 권만큼은 일본어로 되어 있었습니다.

 

“’초보자도 쉽게 할 수 있는 일본어’……’일어 한자 사전’……’일본어 문법 정리’……?”

“아, 그거는 P가 할리우드에 있을 때 쓰던 거에요. 일본에서 연수생이 몇 명 왔는데, 그 중에서 한 사람을 P가 담당하게 됐거든요. 아카 어쩌구 하는 사람이었을거에요.”

“그렇군요…….”

 

왠지 누구인지 알 것 같네요. 지금도 선배님 형님 하면서 잘 지내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겠죠.

 

“자, 그럼 다음은 P가 쓰던 방을 보러 가죠. 따라오세요.”

 

 


 

 

 

검사를 마치고 나는 다시 진료실로 돌아왔다.

 

“뇌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다만 문제라면…….”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남았을까요?”

“짧으면 3년, 길면 5년 정도로 생각됩니다. 신경의 붕괴가 생각보다 빨라요.”

“그렇군요. 3년에서 5년이라…….”

 

나는 벗어두었던 안경을 썼다. 마치 얼음을 갖다 댄 듯, 서늘한 감촉으로 시큰거리던 왼쪽 눈의 시큰거림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이야기가 끝나고, 의사에게 인사를 한 뒤 나는 진료실을 나왔다. 습관처럼 왼팔을 내려다 보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일까지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로비에 도착해서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검사가 생각보다 길었던 것인지, 시계는 어느덧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안녕!”

 

병원의 정문을 나서려는 순간, 나는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무척 독특한 목소리. 마치 통통 튀는 듯한 콧소리의 주인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하면 무척이나 얇은 옷을 입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냐하핫, 역시 여기로 왔구나. 올 줄 알고 있었어.”

“또 뵙네요. 여기는 언제 오셨습니까?”

“오늘 아침에. 그보다도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오래는 안 잡을게.”

“그전에 통성명부터 하시죠. 당신은 저를 아는데, 저는 당신을 모른다는 건 불공정하잖아요?”

“그런가……너는 기억 못하는구나……뭐, 아무렴 어때. 내가 당신을 기억하는걸.”

 

한순간, 그녀는 무척이나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한 순간에 지나간 것이었다.

 

“나는 시키. 이치노세 시키야.”

 

 


 

 

 

부엌에는 입구가 두 개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거실과 연결된 입구만 사용했기에 나머지 한 쪽이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었지만, 캐서린의 뒤를 따라 들어가 보니, 그 곳에는 굳게 문이 닫혀 있는 두 개의 방이 있었습니다.

 

“왼쪽이 P가 쓰던 방이에요. 오른쪽은 P의 아버지가 쓰던 방이고요.”

 

왼쪽 문 앞으로 다가간 캐서린은 크게 심호흡을 했습니다.

 

“자, 보고 놀라지 마세요. 엽니다?”

“……네.”

 

덜컥, 문고리가 돌아가고, 끼이이익 하는 경첩소리를 내며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서서히 드러나는 방의 풍경을 바라보던 저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습니다.

프로듀서의 방은 책상 하나와 장식장 하나를 제외하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아니,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방 안을 둘러보았습니다. 벽은 물론, 천장에까지 빼곡하게 붙어 있는 것은.

 

“사진……인가요?”

“네. P가 선수 시절에 팬들과 함께 찍었던 사진들이에요.”

 

저는 벽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습니다. 유니폼을 입은 프로듀서가, 31번이 마킹된 유니폼을 입고 있는, 한 눈에 보더라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팬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었습니다. 사진의 아래쪽에는 날짜와 함께 짤막한 영어단어가 적혀 있었습니다. 캐서린을 바라보자,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제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어디서 찍은 것인지 위치를 적어 둔 거에요.”

“그렇군요…….”

 

방 안에 붙은 사진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수십, 수백 명의 팬들과 함께했던 시간이, P씨 자신이 추억하는, 자신이 가장 눈부시게 빛나던 시간이 이 곳에 있었습니다. 저는 천천히 벽을 따라 걸으면서 사진들을 하나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즐거워 보이는 것은 비단 사진 속의 사람들만이 아니었습니다. 팬들과 함께 서 있는 프로듀서 역시, 무척이나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몇몇 사진은 경기가 끝난 뒤에 찍은 듯, 흙먼지투성이가 된 채로 찍혀 있었지만 그 얼굴에 떠올라 있는 웃음은 지금껏 제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습니다.

 

“메트로를, 윌리 존슨을 응원했던 수많은 팬들은 아직도 그를 기억하고 있어요. 그 바탕에는 저런 팬서비스가 있었죠. 자신을 지켜봐주는 팬들을 위해서라면 그는 뭐든지 하려고 했어요. 월터의 이야기, 기억 나시죠?”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월터 씨도 그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월드 시리즈 7차전. 자신의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프로듀서가 했던 이야기였지요.

방을 한 바퀴 돌아본 저는 조금 색다른 사진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진들과 거리를 둔 곳에 따로 모여 있는 그 사진 속에는 공통적으로 붉은 벽돌집을 배경으로, 사복 차림의 프로듀서와 20명 남짓한 어린아이들이 함께 찍혀 있었습니다.

 

“이건 무슨 사진인가요?”

“그건…….”

 

 


 

 

 

시키와 이야기를 마치고, 나는 병원을 나와서 곧바로 교외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향했다.

마을 한 켠에 있는 자그마한 2층짜리 주택의 현관에 서서 나는 조심스레 초인종을 눌렀다. 찌르르, 하는 소리가 울리고, 잠시 후, 현관문 안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죠?”

“……윌리입니다. 윌리 존슨.”

“……미스터 존슨?”

“네, 접니다.”

 

녹슨 경첩소리를 내며 낡은 현관문이 열렸다. 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멜빵바지 위에 체크무늬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흑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활짝 웃으면서 두 팔을 내밀었다.

 

“미스터 존슨!”

“오랜만이에요, 아주머니.”

 

나는 그녀와 가볍게 포옹을 나누었다. 몇 년 못 본 사이 그녀의 얼굴에는 주름이 부쩍 늘어 있었다.

 

“그간 어디에 있었어요? 연락도 안 되고.”

“사정이 있어서 일본에 있었습니다. 귀국한 김에 선생님께 인사라도 드리고 싶어서요. 미첼 선생님은 잘 계십니까?”

“아……그게…….”

 

선생님의 이름을 듣자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아버지는……작년에 돌아가셨어요.”

“……네?”

 

덜컥,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눈 앞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잠시만요, 잠시만 기다려줘요.”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그녀는 현관문을 열어 놓은 채 재빨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우당탕 하는 소리가 몇 번인가 들려온 뒤, 다시 현관으로 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곱게 접혀 있는 새하얀 편지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께서 남기신 거에요. 언젠가 당신이 찾아오거든 전해달라고 하셨거든요. 조금 시간은 걸렸지만…….”

“……감사합니다. 늦은 시간에 실례했습니다. 다음에 다시 놀러올게요.”

“그래, 조심해서 돌아가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동차로 돌아온 나는 편지 봉투를 살펴보았다.

펜을 쥘 기력도 없는 것이었던지, 금방이라도 스러질 듯한 필기체로 두 줄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나의 마지막 제자이자 마지막 친구에게.

바라건대, 내 기력이 다하더라도 이 편지가 그에게 무사히 전해질 수 있기를.

 

 


 

 

 

저는 장식장을 향해 다가갔습니다. 장식장이라곤 하지만, 사실은 조금 깊게 만들어진 책장의 안쪽에는 책을 꽂아 놓고, 그 앞에는 아크릴 케이스로 포장된 4개의 야구공과 트로피들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야구공에는 날짜와 함께, ‘The PERFECT GAME’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프로듀서의 통산 퍼펙트 게임은 총 4회. 그것에 미루어 보면, 그 공은 아무래도 퍼펙트 게임을 기념하는 공인 것 같았습니다. 그 옆에는 조금 더 큰 사이즈의 아크릴 케이스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프로듀서의 기숙사에서 본 것과 같은 반지가 7개 들어 있었습니다. 우승 반지라고 했던가요.

 

“트로피는 중학생, 고등학생 시절에 받은 것들이에요. 무척 많죠?”

“그렇네요.”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장식장에 빼곡하게 서 있는 트로피는 두 손으로도 세는 것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무척이나 많았던 것입니다.

다음에는 자세를 낮추어 책장의 안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책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은, 다시 살펴 보니 연극과 영화의 팜플렛이었습니다. 들어 본 적도 없는 주제 연극의 팜플렛에서부터 시대의 명작이라 불리는 영화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팜플렛이 꽂혀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를 꺼내어 펼쳐 보면, 그 안에는 무언가가 빼곡하게 적혀 있는 하얀 종이가 덧붙여져 있었습니다. 화살표나 그림 등으로 봐서는 무대의 연출에 관련된 자료인 듯 합니다.

 

“카에데도 어느 정도는 알겠지만……P는 데이터를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에요. 무엇이든 상대를 알고 나를 알아야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있다면서……할리우드에서 연출 일을 배우면서도 그는 시간만 났다 하면 주위의 극장이란 극장은 모조리 들쑤시고 다녔죠. 1년 정도 브로드웨이에 있던 시절에는 아예 극장에서 살다시피 했고요. 젊은 녀석이 싹수가 보인다고, 감독님들께서 하나같이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죠.”

“선수 시절에 모아놓은 건 없나요?”

“그건 은퇴하면서 구단 전력분석실에 기증했다고 들었어요. 좋은 자료가 될 거라면서.”

“그렇군요…….”

 

저는 방 안을 한번 더 둘러보았습니다.

그 때, 캐서린의 휴대전화가 벨소리를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아, P 전화네요. 여보세요? 나? 지금 너네 집. 카에데랑 같이 있는데?”

 

이야기를 듣던 캐서린의 표정이 약간 굳었습니다.

 

“……너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알았어. 그렇게 할게. 응, 아냐,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응.”

 

통화를 마치고, 캐서린은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으음……카에데, 옆방 구경하고나서 나랑 같이 우리 집에 갈래요? 졸업앨범 보여드릴게요.”

“정말요? 가도 되나요?”

“괜찮고말고요. P는 급한 일이 있어서 저녁쯤에나 온다니까, 우리 집에서 저녁밥 먹고 가요. 알겠죠?”

“괜히 실례를 끼치는 건 아닌지…….”

“아유, 괜찮다니까, 정말. 자, 얼른 가요!”

 

캐서린에게 반쯤 끌려가다시피 하며, 저는 프로듀서의 방을 나와 바로 옆에 있는 그의 아버지가 사용했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녁 먹고 들어갈게.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별 일 아니니까. 응, 고맙다.”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에는 어느샌가 하나 둘씩 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윌리. 별은 하늘에 떠 있다고 해서 별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란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길을 알려주고, 스스로 그들에게 꿈이 되어줄 수 있어야 진짜 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 너는 내가 본 수많은 별들 중에서도 가장 밝고, 가장 눈부시게 빛나는 별이었다. 너랑 만날 수 있었던 것을 나는 최고의 행운으로 생각한다. 나의 친구여. 너의 앞길에 늘 축복이 가득하기를 빈다.

─너의 오랜 친구, 미첼 “로버트” 페이지.

 

하늘은 금세 어두워진다. 나는 자동차의 실내등을 켜고 편지의 마지막 구절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하나 둘, 편지지에 물방울 자국이 늘어났다. 잉크에 물 자국이 닿지 않도록, 나는 재빨리 편지지를 접어 재킷의 주머니로 되돌렸다.

이것은 단순한 편지가 아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는, 세상에 하나뿐인 내 스승의 마지막 가르침이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는 별들 가운데 유독 밝게 빛나는 시리우스가 눈에 띄었다.

 

 


 

 

 

캐서린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저는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프로듀서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나 흐른 것인지, 석양이 저문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떠올라 있었습니다.

도쿄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풍경, 고향 와카야마를 떠난 뒤로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습니다.

 

혼자 걷는 길은 생각보다 좀 더 쓸쓸했습니다.

그제는 '윌리 존슨'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윌리'가 아닌 P씨를 보았어요. 사진 속의 그가 짓고 있던 미소는, 우리들에게 이따금씩 보여주는 웃는 얼굴과는 명백히 다른 성질의 미소였습니다. 제가 모르는 그의 모습은, 제가 알고자 했던 그의 모습은 저의 생각보다도 훨씬 더 멀리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에 대해서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저는 그에게서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마당과 마당을 구분하는 울타리를 지나 프로듀서의 집을 향해 몸을 돌린 순간, 저는 아침까지만 해도 열려 있던 프로듀서의 차고 문이 닫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무래도 그가 돌아온 모양입니다.

 

“저 왔어요…….”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거실에서 부엌까지 어스름한 불빛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희미한 불빛을 더듬어 부엌으로 향한 제 눈 앞에는 뜻밖의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식탁에 웅크리듯 앉아 있던 프로듀서가 저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습니다.

 

“아, 타카가키 씨. 어서오세요.”

“프로듀서? 이게 다 뭔가요……?”

“뭐긴요, 술이지.”

 

양주와 위스키, 그리고 보드카. 어디에 들어 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식탁 위에는 어림잡아 열 병은 되는 술병들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 어스름한 백열등 아래, 얼음 양동이에 꽂혀 있는 위스키 병을 집어 들고 내용물을 병째로 꿀꺽꿀꺽 넘기던 프로듀서는 병에서 입을 떼고는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푸하! ……술 한잔 하실래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뜻밖에도 무척이나 또렷했습니다.

하지만 어스름한 불빛 아래로 비치는 그의 얼굴은 몹시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Re)Write─덮어 쓰는, 혹은 다시 쓰는. (6)> 으로 이어집니다.


저번 화가 선수로써의 P의 이야기였다면, 이제부터는 선수가 아닌 P의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다음 화에서 끝나지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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