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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 소설 - 열두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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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27, 2017 23:09에 작성됨.

또 한 살

 또 한 살을 먹었네요. 문턱을 넘는 순간 그녀가 말했다. 무덤덤하게 시간의 경계를 넘는 듯 하는 말에 남자는 잠깐 그녀를 다시 봤다. 이제는 조금 더 어른이 된 그녀와 반대로 남자는 조금 더 어려지고 싶었다. 그 자리에 선 채로 그녀의 볼을 꼬집으며 놀렸다. 예전에는 나이 먹는 거 싫어했으면서. 한쪽 입꼬리를 올린 그녀가 답했다. 그 때는 정말 어렸죠, 함께 있으면 나이 같은 건 상관없는데. 그게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아 남자는 순순히 문턱을 넘었다. 달력에는 오늘의 날짜가 토끼 귀처럼 쫑긋 서 있었다. 한 해의 꿈과 희망이 거기에 걸려 있었다.

 

*

 

마음을 표하되 숨기면서

 벌써 아이돌들한테 많이 받으셨네요. 이제 막 출근한 그녀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 여기저기서 많이 받았답니다. 남자는 애매하게 기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보면 천벌 받을 놈이라고 하겠지만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이젠 슬슬 진심을 받고 싶은 것이다. 여자는 가방에서 초콜릿을 꺼냈다. 여기저기서 받은 김에 하나 더 드릴게요. 그 말에 난감해 하면서도 남자는 초콜릿을 받았다. 수많은 초콜릿 더미에 섞여드는 자신의 진심에 여자는 주목했다. 그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마음 아파했다. 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인가, 숨긴 것인가.

 

*

 

나도 반가워

 길을 걷다 그녀는 뒤를 돌아봤다. 왜 그래? 친구들이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냥 누가 좀 부른 것 같아서. 가지 앙상한 나무를 뒤로 하고 그녀는 길을 갔다. 뭔가 이상한 날이었다. 바람이 불면 누가 속삭이는 것 같고, 흘러가는 구름도 다르게 보였다. 이상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여전한 속삭임을 따라 집으로 돌아와 잠들었다. 아침 햇살에 눈이 뜰 무렵 창문이 덜컹거렸다. 잠이 덜 깬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었다. 아래를 내려다 본 순간 그녀는 활짝 웃었다. 반가워요, 올해도 잘 부탁해요. 완연한 봄이 정원의 새싹으로 인사했다.

 

*

 

벚꽃길

 찬바람이 불자 꽃잎과 함께 소녀의 머릿결이 흩날렸다. 오늘 따라 묶지 않고 길게 풀어놓은 머리칼 사이사이에 벚꽃 잎이 섞여 있었다. 소녀는 다소곳이 머리를 정리했다. 꽃샘추위란- 그대들의 아름다움을 추위가 시샘하기에 오는 것이라 하나-. 걸러낸 벚꽃 잎을 손안에 모았다. 다시 바람이 불어와 그것을 허공에 퍼뜨렸다. 뭐 하고 있어? 마침 나타난 그가 물었다. 그대- 저기를-. 벚나무들 사이로 곧게 뻗은 길이 분홍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샘을 내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사뿐히 걸어가며 소녀는 노래했다. 꽃, 보라 날려- 이 마음에- 가슴이 떨려오니-.

 

 

5분 전

 차에서 내리자마자 아이는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가방에서 색종이를 꺼내 한 장씩 접기 시작했다. 서툰 솜씨로 꼬깃꼬깃. 정성을 들여서 한 다발, 다시 한 다발. 완성이에요! 꽃다발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아이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꽃다발을 한쪽에 소중히 모셔놓고 차려져 있던 저녁을 먹었다. 한 숟갈을 뜰 때마다 시계를 번갈아 봤다. 먹은 것을 치우면서, 우유를 마시면서, TV를 보면서. 그럴 때마다 침울해하면서도 계속 시간을 확인했지만 결국 지친 아이는 꽃다발을 들었다. 냉장고에 붙어 있는 가족사진과 같이 자석으로 고정시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 때 아이의 집으로 발소리가 다가왔다. 삑, 삑, 삑 하더니 도어락이 열렸다. 5월 9일 5분 전이었다.

 

*

 

색다른 풍경

 아직은 따갑지 않은 햇살에 거리가 온통 밝은 날이었다. 도로에 그어진 선에 햇빛이 반사되어 소녀의 눈에 띄었다. 소녀는 그것을 밟으면서 걸어보기로 했다. 양팔을 벌리고 발이 빠져나오지 않도록 천천히 한 걸음씩. 공원에 들어서서도 선을 찾아 걷다 지나가던 남자와 부딪힐 뻔했다. 남자가 사과하며 소녀가 걷는 것에 대해 물었다. 매일 걷는 길이라도 이렇게 하면 색다르게 보여요. 소녀의 따스한 미소가 묘한 설득력을 주어 남자는 자신도 그렇게 걸어보기로 했다. 걷다 보니 앞서가던 소녀를 따라잡았다. 어떠셨나요? 질문하는 소녀에게 남자는 명함을 꺼내며 답했다. 이번에는 제가 색다른 풍경을 보여드려도 될까요?

 

*

 

노을과 소녀와 아이스크림

 방과 후 집으로 가는 길. 저녁노을에 세상의 모든 것이 붉게 물들었다. 바로 옆의 강물도 저 멀리 도시도. 소녀가 들고 있는 아이스크림까지도. 붉게 변했어도 바닐라의 부드러운 단맛은 그대로였다. 소녀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이것은 석양을 부드럽게 녹인 맛이 아닐까? 의외로 뜨겁고 화끈한 맛이 아니지만 이건 이것대로 괜찮은데? 고양이 같은 웃음을 지으며 아이스크림을 먹다 핸드폰을 꺼냈다. 모처럼의 조용한 시간, 노을을 배경으로 자신의 모습을 찍었다. 행복을 마주쳤을 때 그것을 찍는다. 그것을 모두와 나눈다. 언젠가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소녀는 웃었다. 얼른 모두와 나누고 싶네요!

 

*

 

별 하나의

 열대야에 지쳐 강변을 걷다가 한 소녀가 문득 하늘을 보았다. 밝게 빛나는 별들에 마음을 빼앗긴 듯 위로 손을 향했다. 이리저리 별자리를 잇다가 사이좋게 모인 세 개의 별에서 멈칫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그건 가을 시야, 하고 다른 소녀가 끼어들었다. 그러자 소녀는 뭐 어때, 라고 했다. 또 다른 소녀는 조용히 있었다. 소녀는 다시 별을 헤아렸다.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아이돌. 조용히 있던 소녀가 던진 말에 세 사람 사이에 파문이 일었다. 손을 내리고 소녀가 중얼거렸다. 좀 더 하고 싶었는데. 하늘의 별들만이 그녀들을 헤아리듯 반짝거렸다.

 

*

 

계절의 경계에서

 오래된 서점구석의 계산대 뒤에서 그녀는 책을 읽고 있었다. 조금 어둡지만 차분해진 마음으로 숨소리조차 죽인 채 오직 팔락거리는 소리만을 냈다. 톡, 톡. 소리가 겹쳤다. 쌀쌀해진 공기를 느끼고 그녀는 숄을 둘렀다. 열린 창가에 놓여있던 커피 잔을 무심코 입에 가져갔더니 빗물이 입 안을 씻어주었다. 낡은 책 냄새에 엷은 계절의 냄새가 섞여있었다. 밖을 보니 여름의 끝자락에 묻은 습기가 차갑게 세상을 적시고 있었다. 무더위에 지친 세상을 위로하며 감각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그녀는 계산대를 나와 밖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비 온 뒤의 하늘을 기다리며 책을 읽었다.

 

 

낙엽과 함께 하루가

 따뜻한 물 위로 자그마한 단풍잎이 떠내려 왔다. 여자는 그것을 집어 잔 위에 올렸다. 그대로 술을 마셨더니 얼굴도 단풍처럼 붉게 물드는 것 같았다. 탕의 열기와 취기 때문이겠지만요. 여자는 옅게 웃었다. 별빛을 가리는 달도 시야를 가리는 증기도, 술의 온기도 탕의 온기도, 붉은 단풍도 이곳에 있는 자기 자신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멀리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한창 즐기고 있나 보네요, 저도 끼고 싶지만. 지금의 시간을 놓치기 아까웠다. 그녀가 온기에 몸을 맡기자 단풍잎도 잔 위에 몸을 맡겼다. 낙엽과 함께 하루가 지고 있었다.

 

*

 

첫눈을 보며

 옛날에는 눈 오는 게 좋았어. 그녀의 과거형에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서로의 하얀 입김이 닿자 그는 새삼스레 그녀와의 거리를 깨달았다. 지금은 싫어? 먼 하늘만 바라보며 그녀는 답했다. 싫은 건 아니지만 감흥이 없어졌어, 언젠가부터 세상이 다 얼어붙은 것처럼 보여서. 그는 주위를 둘러봤다. 꽉 막힌 차도, 앞만 보고 걷는 사람들. 그녀의 말대로였다. 어려보이고 싶은 건 겉모습만이 아니야, 마음도 항상 따뜻했으면 좋겠어. 그녀는 내리는 눈을 손에 받았다. 그 위에 그의 손이 겹쳤다. 꼭 감싸 쥐자 사이에서 눈이 녹아내렸다. 그럼 당신은 아직 젊어. 그녀는 웃었다. 당신이랑 있어서 그래.

 

*

 

사람들이 산타를 믿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갑작스레 말했다.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어딘가 소극적이면서도 항상 밝은, 밀크커피 같은 그녀가 오늘은 블랙커피처럼 씁쓸했다.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잖아?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저니까 이런 말을 하는 거죠, 사람들이 믿지 않으면 제가 사라지는 것 같아서. 그런 건가. 그녀에게는 생존의 문제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그도 조금 심각해졌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그녀가 물었지만 마땅한 해결책이 없었다. 대신 아이돌을 믿게 하면 되지 않을까? 행복을 선물하는 거라면 꼭 산타가 아니어도 되잖아? 그냥 해본 말인데 그녀는 꽤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희미하지만 웃었다. 그럼 계속 잘 부탁드려야겠네요. 그야 뭐, 얼마든지.

 

 

 

 

 

 

 

 

 

 

어제 올렸던 초단편보다도 더 짧은 토막 소설입니다.

주제는 일년 열두 달.

아이돌들을 주제로 썼지만 아이돌들의 이름이 전혀 안 나옵니다.

이름을 쓰면 그 캐릭터를 깊이 파고 들어야 해서 내용이 길어질 것 같았거든요.

그러면서도 단서를 던져놨으니 어떤 아이돌이 나왔는지 맞춰보는 것도 재미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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