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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초단편 소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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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26, 2017 23:52에 작성됨.

 1) 비 온 뒤 하늘

 

 새로운 기획에 대한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프로듀서는 아직 오지 않았다. 사무실에는 조용한 적막이 흘렀다. 타치바나 아리스는 맞은편에 앉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기사와 후미카.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그녀는 아까부터 책만 읽고 있었다. 책장을 넘길 때 팔락거리는 소리조차 없이 적막을 유지했다. 인사는 아까 전에 했지만 그녀는 자기 앞에 소녀를 잊은 듯 책에만 집중했다.

 앞머리에 가려서 눈은 보이지 않았다. 인사할 때도 목소리가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오늘 날씨와 겹치는 ‘음침한’ 여자였다. 걱정이 들었다. 이 사람이랑 같이 일해야 하는 건가. 시끄럽지 않은 것은 좋았지만 일하는 내내 이러면 곤란하다. 얼른 프로듀서가 와서 회의를 진행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드디어 움직임을 취했다. 가볍게 걸치고 있던 숄을 몸에 감았다. 그게 끝이었다. 아무래도 추위를 느꼈나 보다.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타치바나 아리스는 창밖을 내다봤다. 살짝 김이 서린 창문으로 보는 세상은 마치 물에 잠겨가는 것 같다. 이런 날은 싫다. 움직이기 불편한데다 우산을 챙기지 않으면 낭패다. 무엇보다도 어른스럽지 못한 남자애들이 빗물을 튀기며 장난을 치는 것이 싫었다. 얼른 날씨가 개었으면……. 그런 생각을 하는데 정말로 비가 그쳤다.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치니 하늘이 열리는 것 같았다. 가까이서 보고 싶어 일어나는데 맞은편에서 그녀 또한 일어났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았다. 덕분에 그녀의 눈이 보였다. 바다처럼 진하고 깊은 아름다운 푸른색이었다.

 조금 아쉬웠다. 외형만이 아니라 행동 또한 좀 더 어른스러운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모처럼의 기회라 생각해 말을 걸었다.

 “날씨가 좋아졌네요. 맑게 갠 하늘이 정말 예뻐요.”

 그녀는 살짝 돌아보았다. 이 소녀를 잊은 건 아니었는지 곧장 대답했다. 네. 이어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타치바나 양은…… 이런 날씨가 좋은 날씨인 거군요. 타치바나 아리스는 되물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요?

 “맑은 날도 좋지만, 저는 비 오는 날이 좋은 날씨예요. 쌀쌀하지만 그 덕에 피가 식는 느낌이고, 기분 좋은 빗소리가 마음을 차분하게 해줘서 책을 읽기 좋거든요.”

 “네? 지금은 맑은 하늘을 보고 있었잖아요?”

 “그건…… 비가 온 뒤에 맑은 하늘은 꼭 역경을 이겨낸 소설 속의 주인공과 같으니까요.”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조용함 속에 이런 생각을 감추고 있었구나. 그저 겉모습에, 당장의 불편함에 얽매이지 않았구나. 얘기를 마치고 그녀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마 지금의 하늘이 계속되는 동안은 계속 그러고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의 눈 또한 비 온 뒤의 하늘같았다. 지금이 계속 되는 동안 쭉 보고 싶을 만큼.

 

 

 2) 마법은 오븐 속에

 

 오븐을 열자 방 안에 따뜻하고 푹신한 냄새가 풍겨왔다. 완벽하다.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미무라 카나코는 스펀지케이크를 꺼내 다시 내음을 만끽했다. 식욕을 자극하는 갈색을 확인하며 한 번 꾸욱, 눌러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손가락을 떼자 천천히 올라오며 흠을 감추는 모습을 상상했다. 포크를 갖다 댔을 때 달그락 소리도.

 음식은 미각만이 아니라 오감을 모두 자극하는 매력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그녀가 케이크와 같은 디저트를 사랑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아이리는 애플파이를 가져오려나? 노리코는 분명 도넛이겠지. 시즈쿠는 밀크티, 노노는 …… 뭘 가져올지 모르겠어서 더 기대돼.”

 하나의 케이크를 자르면 여럿이 둘러앉아서 먹을 수 있다. 천천히 한입씩 단맛을 만끽하면서 차로 중화시키고, 그 맛을 다 같이 나눈다. 맛만이 아니라 만든 사람의 정성, 먹어주는 사람의 감사함, 한데 모인 기쁨을 나눈다. 그 순간의 행복은, 행복을 나누자 더 큰 행복이 생겨나는 마법은 그녀로 하여금 디저트를 만들게 하였다.

 케이크 위에 생크림을 덧칠했다. 색색의 과일과 초콜릿으로 장식하고 사각의 박스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리본을 달았다.

 얼른 다 함께 모여서 먹고 싶다. 웃는 얼굴을 보고 싶다.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카나코를 보며 프로듀서 또한 행복을 느꼈다.

 

 

 3) 오고 싶은 장소, 가고 싶은 장소

 

 사기사와 후미카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자연히 혼자 지내는 일이 많아지고 남들과의 대화가 줄어갔다. 대학을 다니게 되었어도 변함없이 독서에만 빠져 살았고, 지금에 와서는 앞머리를 길러 남의 시선을 피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런 그녀가 30분 쯤 전에 나타난 한 남자에게는 관심을 보였다.

 관심이라고는 해도 그리 적극적인 것은 아니다. 작은 동물들이 경계를 하는 것처럼 멀리서 지켜보는 수준이지만 이것마저도 그녀에게는 대단한 관심이었다.

 남자는 말쑥한 생김새에 말끔한 정장을 차려 입었다. 걸음걸이는 조심스러웠고 전체적으로 정중하다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관심을 가진 것은 이런 부분들이 아니었다. 그의 행동, 그가 바라보는 것들이었다.

 이곳은 후미카의 숙부가 운영하는 서점이다. 당연히 사방에 책들이 즐비했고 신간부터 오래된 책, 순문학부터 장르소설까지 종류별로 구비되어있다. 그런데 그가 바라보는 것은 책보다는 그 외의 것들이었다. 책장이나 거기에 남아 있는 얼룩,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 같은 것들. 호기심이 들었다.

 “찾으시는 책이 있으신가요?”

 “아, 그건 아니고요. 그냥 둘러보는 중입니다.”

 그러면서 한쪽의 나무기둥을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런 그가 신기했다. 책이 아니라…… 가게를 둘러보시는 건가요? 참지 못하고 묻자 그는 조금 놀라며 답했다. 네.

 “멋진 가게입니다. 인테리어부터 책을 배열한 방식까지 전부. 운영하는 사람의 센스가 느껴져요. 뭐라고 딱 말 할 수는 없지만, ‘이 가게는 이런 곳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이런 걸 알면 다시 오고 싶은 장소가 되거든요. 당신의 안목인가요?”

 “아, 아뇨. 저희 숙부님의…….”

 지금껏 많은 서점을 돌아다닌 후미카지만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항상 그 가게의 책들만은 봤다. 그것이 일반적인 것이겠지만, 그의 시각이 부러웠다. 이런 방법이라면 직접 마주하지 않더라도 가게의 주인과 대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에 빠진 후미카를 남자는 뚫어지게 바라봤다. 가게를 둘러볼 때와 같은 눈이었다. 그러다 정장 안쪽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네?”

 명함에는 그의 이름과 그 옆에 프로듀서라는 직업이 적혀있었다. 그것도 아이돌 부문.

 “당신 덕분에 오고 싶은 장소를 찾은 것 같아서요. 괜찮으시다면 당신에게도 좋은 장소를 소개시켜드려도 될까요?”

 

 

 4)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불러

 

 남자는 질량보존의 법칙에 대해서 생각했다. 물질은 갑자기 생기지도, 없어지지도 않고 그 형태만을 바꿔 항상 존재한다는 법칙이다. 그는 과학자가 아니고 10년도 전에 과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관심을 끊었으나, 지금만큼은 물리법칙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해 보고 싶었다.

 “후고후고후고후고!”

 눈앞의 소녀가 빵을 먹고 있었다. 보기에는 거의 진공청소기의 흡입에 가까워 보일 정도로. 와구와구. 냠냠쩝쩝. 그렇기에 의문이 들었다.

 키 150cm 정도 밖에 안돼 보이는 그녀의 몸 어디로 저 많은 빵이 들어가는 것일까. 혹시 몸 안에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블랙홀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내 지갑에도 블랙홀이 열린 것 같은데 어찌해야 할까. 그가 질량보존의 법칙을 생각한 이유였다.

 “응? 아아, 미안해요. 아저씨도 드실래요?”

 해맑게 웃으면서 소녀는 남자에게 바게트를 건넸다. 남자는 거절했다. 네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부르구나. 대충 얼버무리긴 했지만 솔직히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의 직업은 프로듀서. 지금은 한창 신인 아이돌의 스카우트로 바쁜 시기다. 약 10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언제나처럼 길거리 스카우트를 하고 있었다. 좀처럼 명함을 건넬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 조급하던 때였다. 지나가던 여자 중에 한 명, 스타일이 괜찮은 사람이 보였다. 당장 달려가서 말을 걸려는데 지나가던 이 소녀와 부딪혔다.

 사람 많은 곳에서 자기 몸집보다 커 보이는 빵봉투를 들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 안에 들어있던 빵들이 다 땅에 떨어졌다는 것. 그가 실수로 빵들을 밟아버렸고, 소녀가 나라 망한 표정을 지었다는 것이다.

 ‘미안해! 내가 다시 사줄게!’ 농담으로라도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됐었다. 하도 급한지라 대충 내뱉은 말이었는데 좀 전의 여자는 이미 사라졌고, 이 소녀가 그의 옷소매를 잡고 있었다.

 그렇게 근처 빵가게까지 붙잡혀왔다. 지금 그녀는 ‘이렇게 맛있는 빵을 왜 안 먹지?’라는 표정으로 그의 지갑을 거덜 내고 있었다. 자포자기해버린 그는 소녀가 먹는 모습만을 바라봤다. 좀 전에는 그냥 말한 거지만 확실히 이 소녀는 잘 먹었다.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부를 정도로.

 “빵이 그렇게 좋니?”

 “네! 저는 세상에서 빵이 제일 좋아요! 아저씨도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아니, 나는……. 아.”

 다시 거절하려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역시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부른 건 불가능하다. 이것도 다 질량보존의 법칙 때문이다.

 그가 애꿎은 과학을 탓하는데 소녀가 크게 웃었다. 웃으며 그의 입에 빵을 물려주었다. 거의 우겨넣듯이. 그는 꾸역꾸역 빵을 먹어치웠다. 소녀는 더 밝게 웃었다.

 “거 봐요! 맛있죠?”

 밝다. 참으로 밝다. 일에 치여 사느라 이런 밝은 미소를 지어보기는커녕 보는 것조차 오랜만이었다. 그는 피식, 웃으며 명함을 꺼냈다. 얘야, 빵 값은 해야지. 소녀는 네? 하고 되물었다.

 “그 행복한 미소를 다른 사람에게도 나눠주지 않겠니?”

 오늘 첫 스카우트였다.

 

 

 5) 이 말을 해주고 싶었어.

 

 그 날은 눈이 많이 오는 날이었다. 두 소녀가 어색한 통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말이지……. 아버지가 계속 응원해주신다고 했어.”

 -“그렇구나. 유키호는 좋겠네. 우리 아버지는 진짜 바보라서 내가 아이돌을 한다고 말할 수도 없어. 하, 진짜! 나도 좀 여자애답게 귀여운 푹신푹신하게 꾸미고 싶다고!”

 -“그, 그, 마코토는 지금 이대로도 멋지니까 굳이 바꾸려고 하지 않아도 될 거야.”

 -“아니야. 나는 왕자보다는 공주님이 좋다고. 프로듀서도 그걸 다 알고 있으면서 왜 남성적인 일만 받아오시는 거야……. 유키호가 정말 부러워.”

 -“그래? 나는 마코토가 부러운데. 항상 씩씩하고 주눅 들지도 않고. 프로듀서 씨가 가져오는 일도 전부 척척 해내잖아.”

 -“그거야 일단은 프로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할 수는 없잖아.”

 -“그렇지……. 전부 내 뜻대로 되는 건 아니지. 나는 실수하면 그게 신경 쓰여서 더 주눅 들거든. 그러다 또 실수하고. 저번의 엑스트라 촬영만 해도 계속 NG가 나와서 폐만 끼치고.”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잖아. 나도 고집 부려서 받아낸 공주님 일에서 결국 실패했고. 유키호가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어.”

 -“으응…….”

 -“어…….”

 -“미, 미안해. 할 말도 없는데 괜히 오래 통화하게 해서. 이만 끊을게.”

 -“아니야! 끊지 마! 할 말 있으니까!”

 -“뭐, 뭔데?”

 -“그게, 그러니까…….”

 -“……마코토. 괜히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억지로 친해지려고 할 필요 없어. 나 같은 애는 마코토가 보기에는 답답해 보일 테니까. 사무소에 다른 애들도 많으니까 나 하나쯤은…….”

 -“아니야! 그렇게 말하지 마! 나는 유키호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걸. 진짜야. 단순히 여자아이다운 점이 부러운 게 아니야. 유키호는 스스로를 소심하다고 했지만 그걸 바꾸려고 아이돌을 시작할 만큼 용기가 있잖아. 그걸 가족들에게도 말해서 인정받았고. 그에 비하면 나는…… 아버지에게 한방 먹이겠다고 하면서도 아이돌을 한다고 밝히지 못하고 있단 말이야. 나 자신에게 자신감이 없어서…….”

 -“아……. 미안. 나는 뭐라고 말해줘야 할지 모르겠어. 아직 마코토의 마음을 잘 모르니까.”

 -“으응. 괜찮아. 나도 유키호를 그렇게 잘 아는 건 아니니까.”

 -“응…….”

 -“어…….”

 -“그, 그럼 정말로 끊을게. 시간도 늦었으니까 자야지.”

 -“잠깐, 유키호! 정말로 잠깐만! 조금만 더 기다려!”

 -“어? 조금만?”

 -“유키호랑 친해지고 싶은 건 진심이야.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좋은 게 떠올랐거든. 제일 처음으로 이 말을 해주고 싶었어.”

 -“뭔데?”

 -“잠깐만. 5.4.3.2.1.”

 

 날짜가 바뀌었다. 마코토는 크게 말했다. 메리 크리스마스이브! 그리고 생일 축하해, 유키호!

 

 

 6) 나나는 17살이니까

 

 병원을 나오다 유리문을 보고 깨달았다. 내 얼굴이 굳어있음을. 얼른 표정을 지우고 새로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겠어, 나나?”

 “네. 우사밍 파워로 금방 회복 가능해요!”

 그녀가 웃는데, 가장 힘들 그녀가 웃는데 내가 슬퍼해서는 안 된다. 그녀를 따라 웃어야 한다. 그래야 그녀가 슬퍼할 때 받아줄 수 있다.

 나는 나나를 부축해 차에 태웠다. 두 번의 정지신호를 지나는 동안 차 안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해야만 하는 말이 있는데 온통 꺼내기 괴로운 말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위해서라도 말해야 한다. 마음을 굳게 먹었다.

 “다리가 나을 때까지는 활동을 쉬어야 해.”

 “다리만 나으면 되는 건가요? 그럼 거뜬해요!”

 “아니. 의사가 허리에도 문제가 있댔어. 온통 성한 대가 없대. 나나, 전부터 말했지만…….”

 룸미러에 비친 그녀의 얼굴을 보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가장 괴로운 말을 하지 못한 채. 아이돌을 그만두는 게 어떠냐. 어떻게 그런 말을 하란 말인가. 그녀의 노력을, 그녀의 꿈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내가.

 다시 한참을 이어지던 침묵을 깬 것은 나나였다.

 “또 부모님한테 연락이 왔어요. 그만 고향으로 내려와서 신부수업을 받는 게 어떻겠냐고.”

 “하아. 고등학생한테 신부수업이라니,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대학도 안 보내겠다는 거야?”

 “말했잖아요. 가부장적이고 엄한 분들이라고. 지금 이렇게 아이돌 활동을 하는 것도 기적이에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나는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들어 보이는 미소를. 단순히 부상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집에서 학교까지 한 시간 거리를 왕복시키면서 성적은 항상 순위권으로 유지하라는 것이 그녀의 부모들이 건 조건이었다. 여기에 체력을 기를 시간도 없는 여고생이 아르바이트를 해가면서 한 번도 레슨을 빠지지 않고 무대에 올랐다. 공연은 완벽했지만, 무대를 내려오던 중 그녀는 쓰러졌다. 꿈에 대한 열정이 독이 된 것이다.

 다 내 탓이었다. 그녀의 상태를 더 꼼꼼히 확인해야 했다. 그녀를 조금이라도 쉬게 해야 했다. 그녀를 말렸어야 했다.

 “괜찮아요, 프로듀서 씨.”

 “나나.”

 “쉬는 동안 공부를 열심히 하면 돼요. 레슨에 지장이 없도록 미리 몇 달치 예습도 하고. 그렇게 하면…….”

 다시 침묵이 왔다. 나는 운전에 집중했다. 그녀의 울음소리도 숨죽인 통곡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나는 침묵을 달렸다.

 

 

 7) 꽃말

 

 4월 15일. 내 생일이야. 탄생화는 목련. 꽃말은 자연에 대한 사랑. 나랑 정말 잘 맞는 것 같아. 그래서 목련이 필 무렵에는 항상 꽃을 보러 가. 탄생화인 것과는 별개로 그 하얀 꽃도 좋아해. 꼭 아이스크림 같다는 생각 안 들어?

 이건 자란이네. 보라색 난이라고 쓰고 자란紫蘭. 예쁜 꽃이지만 이걸 볼 때마다 조금 슬퍼져. 왠지 안쓰러운 기분이 들어서. 왜냐고? 그런 건 대놓고 물어보면 안 되지. 직접 알아봐. 그렇다고 상처받지는 마. 다른 건 알려줄 테니까.

 물망초야. 이 꽃에는 한 가지 전설이 있어. 독일의 기사 루돌프가 사랑하는 연인 벨타에게 꺾어주려던 꽃이거든. 꽃을 꺾으려고 강을 건넌 루돌프는 돌아오던 중에 물살에 휩쓸려 버렸어. 그리고 마지막 힘을 다해 이렇게 말했지. 나를 잊지 말아줘요.

 그게 물망초의 꽃말이야. 벨타는 그 후로도 계속 물망초를 지니고 살았지. 그 사람과의 추억이 너무나도 소중했었나봐.

 하하. 이런 건 너는 다 알고 있겠지? 내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질리도록 말해줬으니까.

 있지, 나도 계속 물망초를 지니고 있어. 너는 어때? 나와의 추억이 소중했을까? 너무 소중해서 방해가 됐으면 어쩌지? 이런 걱정을 하면서도 나는 목련이 필 무렵마다 여기에 와. 혹시라도 네가 오지 않을까 해서.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 같아. 미안해. 그래도…… 내년에는 봤으면 해.

 

 

 

 

 

 

 

 

 

 

(링크)

여기 링크에서 받은 소재들로 썼습니다.

어찌어찌 목표한 대로 오늘 안에 쓰는 데 성공했군요.

조금 빡셌지만.

 

소설마다 분량 차이가 꽤 있습니다만, 대충 쓴 소설은 절대 없습니다.

제가 의도한 대로 나온 것은 카나코와 유미 이야기처럼 아주 짧은 이야기들 이거든요.

혹시라도 분량 떄문에 소재를 주신 분들이 상처를 받지 말았으면 합니다.

 

맘 같아서는 이야기 하나하나마다 해석을 쓰고 싶은데 너무 설명충스럽고 오늘이 얼마 안 남았네요.

주무시기 전에 제목대로 여러분이 잔잔한 기분에 들기를 바라면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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