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차분하게 느긋하게 (7)

댓글: 2 / 조회: 413 / 추천: 2


관련링크


본문 - 03-25, 2017 18:28에 작성됨.

---7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잠깐 눈을 붙인 프로듀서는 급하게 씻고 치하야의 집으로 향했다. 오른발목에 반깁스를 찬 치하야가 아파트 앞에 나와 있었다. 조수석에 탄 치하야는 여전히 피곤해 보였다.

 

“잠은 좀 잤어요?”

 

“아뇨. 어제 못 한 숙제와 음악 공부, 노래 연습을 마저 다 하느라...”

 

“발목도 다치고 피곤했을 텐데 왜 바로 안 자고요?”

 

“어제 방송 녹화와 병원 치료로 일정이 늦어졌지만, 그렇다고 빼먹을 순 없었습니다.”

 

“그럼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잔 거예요?”

 

“아마 1시 반부터 6시일 겁니다.”

 

새벽 6시라면 프로듀서도 아직 자고 있던 시각이었다.

 

“어차피 차로 데려다주는데 조금이라도 더 자죠.”

 

“목소리가 완전히 깨어나려면 3시간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전 레코딩이 대개 9시니 생활 패턴으로 맞추기 위함입니다.”

 

“어후. 그럼 어제도 똑같이? 아니, 지금까지 쭉이요?”

 

“예.”

 

프로듀서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같이 다니는 동안 치하야가 잠깐이라도 자는 걸 어제 말곤 본 적이 없었다. 아마도 목이 잠길까 봐 그러는 게 분명했다. 그만큼 치하야는 철저히 노래에 맞춰 생활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제 라이브 기회가 무산되어서... 라이브를 못한 만큼 노래 연습도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었어요. 치하야 양이 노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판단해서 기권을...”

 

“프로듀서가 기권했다고요?”

 

운전대를 잡은 손으로 푸른 차가움이 뻗쳐 왔다. 프로듀서는 자기가 라이브를 기권했단 걸 미처 말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예. 아무래도 발목을 다쳐서 라이브가 힘들었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발목 다친 것과 노래가 무슨 상관인가요? 노래는 발목이 아닌 목으로 하는 거잖아요?”

 

그제야 프로듀서는 자기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치하야라면 어떻게든 무대에 서려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치하야가 울고 있다는 사실과 좌절에 감정이 앞섰고, 노래를 향한 치하야의 마음가짐까지 잊어버리고 말았다.

 

“본의 아니게 치하야 양이 대기실에서 울고 있던 것을 들어서... 아무래도 눈도 붓고 목도 가라앉았을 테니 노래하기엔...”

 

“하지만 왜 저하고 상의 한마디 없이 취소한 거죠?”

 

작아진 프로듀서의 목소리와 달리 치하야의 목소리엔 날이 서 있었다. 때마침 켜진 빨간 불이 야속했다. 그동안 느낀 적 없는 등골 저릿한 푸른 차가움을 느낄 수 있었다. 치하야는 이젠 원망 섞인 눈빛으로 프로듀서를 쳐다보고 있었다.

 

“라이브 기회가 있으니 그 방송에 꼭 출연해야 한다고 한 것 아닌가요?”

 

“그렇긴 합니다만...”

 

“저라고 좋아서 어울리지도 않는 애교를 한 것도, 카메라에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것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장애물을 통과한 게 아니에요. 단지 노래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런데 어째서 제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푸른 차가움을 쫓아내려는 듯 프로듀서 마음속에 불길이 일었다. 하지만 그 불길은 가슴 속을 벗어나 치하야에게까지 번지고 말았다.

 

“그럼 치하야 양은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제게 왜 말하지 않은 거죠?”

 

“차마 스케쥴까지 펑크 낼 순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제게 먼저 말해주지 않았잖아요.”

 

“제가 얘기한다고 달라질 게 있었나요?”

 

어젯밤 대충 접어두었던 걱정을 치하야가 꺼내어 찔렀다. 짜증까지 솟구친 프로듀서는 대화를 더 이어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요. 애초에 위대한 보컬리스트께 그런 방송 출연을 제의한 제 잘못입니다. 됐습니까?”

 

“...그럼 저도 더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 이후 학교에 다다를 때까지 두 사람은 차 유리에 성에가 낄 것 같은 차가운 분위기 속에 있었다. 내리는 치하야에게 예의상 잘 다녀오란 말을 조심히 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무실로 출근했지만 일이고 뭐고 잡히질 않았다. 피로와 스트레스에 안경을 벗고 얼굴을 쓰다듬기가 수 차례였다.

그때 어제 치하야의 부상 소식을 들은 리츠코가 다가와 걱정스레 물었다.

 

“프로듀서 씨, 어제 얘기는 들었어요. 치하야는 좀 어떤가요?”

 

“발목을 삐었습니다. 당분간 무리하지 않으면 금방 나을 거라고 하더군요.”

 

“다행이네요… 그래도 아쉽네요. 치하야라면 그래도 열심히 하려 했을 텐데요.”

 

“애당초 그 방송에 나가는 게 아니었습니다. 치하야 양의 몸 상태도 좋지 않았는데...”

 

“예?”

 

“그동안 바쁜 스케쥴로 밀린 음악 공부와 숙제에다 노래 연습까지 하느라 잠을 못 자서 피로가 쌓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녹화 도중에 부상으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리츠코는 화난 표정으로 프로듀서를 노려보았다.

 

“담당 프로듀서면서 어떻게 스케쥴 전까지도 담당 아이돌의 몸 상태를 모를 수 있어요? 그리고 스케쥴 관리를 어떻게 하신 거예요?”

 

“죄송합니다.”

 

“프로듀서 씨가 죄송해야 하는 건 제가 아니라 치하야에요.”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몸 상태가 어떤지 얘기하지 않는 걸 제가 어떻게 합니까? 물론 제대로 확인 못 한 제 실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톱 아이돌이 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스케쥴이라고요.”

 

“그러고 보니 최근 치하야의 스케쥴이 많았네요.”

 

아이돌들의 스케쥴은 모두 코토리가 사무실 화이트 보드에 정리하다 보니 리츠코도 치하야의 스케쥴을 대략 알고 있었다.

 

“치하야 양의 인지도를 단숨에 올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습니다. 치하야 양의 실력이라면 굳이 레슨에 많은 시간을 투입하지 않아도 되고요.”

 

프로듀서의 변명에 리츠코는 안경을 고쳐 썼다. 리츠코가 이렇게 프로듀서에게 단호하게 보인 것도 처음이었다.

 

“치하야라면 분명 레슨 시간이 줄어든 만큼 개인 연습을 많이 했을 거예요.”

 

“맞아요. 잠을 줄이면서 노래 연습에 음악 공부까지 하느라 피로가 누적된 모양입니다. 하아, 이젠 모르겠습니다. 너무 까다로워요. 제가 프로듀스하기엔 너무 버거운 아이돌이에요.”

 

“하지만… 하, 좋아요. 일단 절 따라오세요.”

 

프로듀서는 리츠코를 따라 레슨실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레슨실에 들어온 둘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풍성한 트윈 테일이 인상적인 타카츠키 야요이였다. 상체를 숙이면서 양팔을 활짝 뒤로 펼치는 인사가 독특한 아이였다. 뒤에서 몸을 풀고 있던 하루카도 두 사람을 맞이해주었다.

 

“아 리츠코 씨, 프로듀서 씨!”

 

다가와 인사하려던 하루카는 저번처럼 넘어지고 말았다. 스스로 덜렁대다 보니 자주 넘어지는 것이니 걱정 안 해도 된다고 말했지만, 프로듀서에겐 아직 익숙지 않은 광경이었다.

 

“아마미 양! 괜찮아요?”

 

“헤헤, 괜찮아요.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러는 걸요.”

 

현재 765 프로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아이돌은 단연 인기 급상승 중인 류구 멤버들이었다. 그다음은 사무실에서 잠만 자는 것과 다르게 뛰어난 재능을 갖춘 호시이 미키였다. 미키는 조만간 신비한 분위기를 노래에 녹여내는 시죠 타카네, 최고의 춤 실력을 갖춘 오키나와 출신 가나하 히비키와 새로운 유닛을 결성할 계획이라 들었다. 치하야를 포함한 유닛에 속하지 않은 아이돌들은 나름 저마다의 활동을 이어가며 차근차근 인지도를 높이는 중이었다.

마침 레슨실에는 류구, 치하야를 제외한 아이돌들 모두가 모여 있었다.

 

“오빠, 치하야 언니는 괜찮아? 발목 다쳤다며?”

 

평소의 장난스러운 표정 대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은 마미의 질문에 프로듀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다음 주까진 휴식할 예정입니다.”

 

“그럼 레슨 끝나고 치하야 만나러 갈 사람?”

 

“저기 치하야 양에겐 아직 휴식이...”

 

“치하야 본 지도 오래됐으니 만나러 가야지.”

 

가장 먼저 손을 든 것은 얼핏 보면 사내아이 같은 키쿠치 마코토였다.

 

“저기, 저, 저도 가도 되겠죠오?”

 

“마미도 갈래!”

 

뒤이어 늘 조용한 하기와라 유키호도, 장난기 가득한 마미도 손을 들었다.

 

“미키도 가고 싶은데 저녁 스케쥴이 있단 거야.”

 

“미안해. 오늘은 본인이 꼭 이누미랑 햄조들 밥 챙겨줘야 해서...”

 

“참으로 아쉽사옵니다. 마침 오늘 아주 중요한 약속이 잡혀있사옵니다… 부디, 키사라기 치하야에게 제 안부까지 대신 전해주시길.”

 

못 가는 아쉬움까지 표하는 미키, 히비키와 타카네를 보며 프로듀서는 약간 의아해했다.

 

“다들 치하야를 좋아하는군요.”

 

“동료잖아요. 아이돌도 영락없는 어린아이들이에요. 함께 765 프로에서 활동한다는 점이 이 아이들을 한데 묶는 거죠.”

 

“동료라.”

 

“치하야가 워낙 노래 연습에만 매진하고 겉으로는 한없이 차가워 보여도 분명 여린 면이 있는 아이예요. 앞으로 그 점을 유념하고 프로듀스할 때 신경 써주세요.”

 

리츠코의 말에 혼자 대기실에서 흐느끼던 치하야가 떠올랐다. 분명 치하야에게도 여린 면이 있단 생각이 처음 들었다. 그래서 감정이 앞서는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프로듀서는 리츠코의 레슨을 받는 아이돌들을 쭉 지켜봤다. 리츠코가 엄하게 가르쳤지만, 누구 하나 뭐라 할 것 없이 열심이었다. 그리고 부족한 부분을 묻거나 알려주고, 서로 격려해주었다.

합동 레슨을 가만히 지켜보던 프로듀서가 주목한 것은 처음 만난 아이돌인 하루카였다. 프로듀서가 보기에도 하루카의 노래나 춤은 아주 뛰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하루카는 누구할 것 없이 모두와 가장 친해 보였다. 먼저 물어보거나, 알려주기도 하면서 다들 지쳐 보이면 계속 화이팅을 외쳤다. 모두 그런 하루카를 다들 따르는 분위기였다.

자주는 아니어도 치하야가 사무실에서 하루카와 같이 퇴근하거나, 대화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차가운 치하야도 하루카에게는 마음을 연 것 같다는 느낌이 다시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치하야 양이 다른 아이돌들과 레슨을 같이 받는 걸 본 적이 없군.’

 

쉬는 시간을 틈타 프로듀서는 리츠코에게 물어봤다.

 

“아카즈키 씨, 치하야 양이 합동 레슨에 참여한 적이 있나요?”

 

“프로듀서 씨가 오시기 전엔 몇 번 있었지만 그리 많진 않았어요. 노래 레슨은 같이 해도 춤 레슨은 도통 받으려 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요새 스케쥴이 많아져서 그럴 시간도 없었죠.”

 

“합동 레슨을 받을 때 어땠는지 기억하시나요?”

 

“하루카나 마코토뿐만 아니라 모두와 많이는 아니더라도 피드백을 주고받았죠. 특히 치하야가 노래를 잘 부르다 보니 다른 아이들에게 노래도 많이 알려주고 했죠. 그러고 보니 프로듀서 씨 보컬 공부하셨죠? 괜찮으시다면 다음에 레슨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직접 부르지는 못하지만 봐주는 정도는 가능합니다.”

 

이어진 레슨에서도 아이돌들은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연습했다. 지칠 만 한데도 웃고 떠들며 서로를 이끌어주었다. 치하야도 저 속에 있었다면 웃었을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프로듀서는 이마를 짚었다. 레슨은 단순히 실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같은 프로 소속의 동료들과 함께 어울리는 과정 중 하나였다. 자기도 대학 시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연습하면서 더 실력이 늘고, 노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 간단한 사실을 지금 아이돌들을 지켜보며 다시 깨달았다. 하지만 프로듀서는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래서 치하야에겐 레슨이 딱히 필요 없다고 판단하여 동료들과 선을 그어버린 셈이었다.

푸른 차가움을 안고 있어도 치하야는 어린아이였다.

 

“제가 실수를 한 모양이군요. 인지도를 높이는 것만 생각하느라... 치하야 양이 동료들과 어울릴 기회를 없애버렸군요.”

 

“물론 프로듀서 씨의 방법이 틀린 건 아니에요. 아이돌에게 뜰 기회는 많지 않으니깐요. 하지만 아이돌도 그전에 사람이에요. ‘프로듀스’란 절대 기계를 찍어내는 게 아니에요.”

 

“그동안 저는 치하야 양을 스케쥴을 소화하는 기계로 생각했군요.”

 

“지금이라도 깨달으셨으면 됐어요.”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쫓기듯이 프로듀스를 하니 치하야라는 사람보다 스케쥴에 신경을 더 썼다. 결국, 자신의 조급함이 자기 자신이 아닌 치하야를 떠민 셈이었다.

프로듀서는 타카기 사장이 덧붙였던 말을 떠올렸다.

 

‘차분하게, 느긋하게.’

 

레슨이 끝나고 치하야 집으로 향하는 차를 탄 것은 하루카와 마코토, 유키호였다. 마미도 가고 싶어 했지만, 경차다 보니 마미까지 태울 순 없었다. 그리고 합동 레슨이 늦은 저녁에 끝난 것도 있었다.

다만 출발이 조금 늦어졌다. 시간이 늦어져서 프로듀서가 차로 태워다 주겠다고 했지만, 유키호가 선뜻 프로듀서의 차에 타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 유키호를 보고 당황하는 프로듀서에게 하루카가 남자 공포증 때문이라고 설명해줬다. 결국, 하루카의 제안으로 유키호는 조수석 뒤에 타고 마코토가 옆에 있기로 했다.

 

‘아마미 양은 누구에게나 상냥하군.’

 

“그런데 아마미 양은 집도 먼데 지금 가면 막차 못 타지 않아요?”

 

저번에 하루카의 집과 사무실이 대중교통으로 2시간 거리라는 것을 들은 것이 떠올랐다.

 

“아까 치하야한테 집에서 자고 가도 되는지 물어봤는데 괜찮다고 했어요. 저번에도 잔 적이 있기도 해요.”

 

‘역시 아마미 양한테는 마음의 문을 연 것인가?’

 

치하야 집에 도착하여 초인종을 눌렀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마코토가 난감해하며 재차 노크를 해봤지만, 집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이상하다. 집에 없을 리가...”

 

“아깐 전화를 받았는데?”

 

“그러게에. 으, 발목도 아픈데 혹시 큰일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아?”

 

치하야를 걱정하는 유키호 옆에 있던 하루카가 무언가를 떠올렸다.

 

“저 치하야가 어딨는지 알 것 같아요.”

 

 

 

-------------------------------------------------------------------------------------------------------------------------------

이번 화의 교훈 : 이래서 텐션 관리가 중요합니다

2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