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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옷 속 숨겨진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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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24, 2017 23:01에 작성됨.

 

"치하야쨩, 어때? 잘 어울려?"

 

두터운 곰 인형탈이라도 다 가로막을 수 없었던, 익숙한 사람의 목소리. 그 쪽을 돌아보자, 밝은 갈색빛의 곰돌이 캐릭터가 이 쪽을 향해 붕붕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인다.

 

"글쎄....."

 

나는 방금 들은 질문에 말 끝을 흐렸다. 잘 어울리니? 라는 질문에 따라오는 대답은 간단히 말해서 yes 아님 no. 하지만 저 잘 어울리냐고 묻는 대상은, 인형옷이다. 체구만 맞다면 어느 누가 입어도 상관없이 캐릭터를 나타내기만 할 뿐인 걸. 그러니까 yes라고도 할 수 없고, no라고도 할 수 없다. 물어보는 것 자체를 하지 않았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상해?"

"그렇지는 않지만."

"그럼?"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느낌이네."

 

어디까지나 인형옷에 관한 이야기라면 말이지. 작게 한숨을 쉬며 아래에 시선을 두자, 이제 막 쓰려고 했던 인형탈이 보였다. 좀 전에 보았던 것하고는 모양은 같지만 색상이 다르다. 이 쪽은 핑크. 설정상 여자애라는 이유로 그런 듯 하지만.....됐어. 그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신경쓰고 싶을 정도로 여유가 있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우와핫, 이런 거 입어보는 건 처음인데! 좀 덥지만, 뭐 그럭저럭 버틸 만한 것 같기도 하고."

 

저기 즐거운 듯이 각종 포즈를 취하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 하루카와는 달리.

 

".....하아."

 

아직 일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녹초가 되버린 기분이다. 처음 입는 인형탈 복장이 불편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기운을 빠지게 하는 것은 역시 일의 내용이었다. 인형옷 차림으로 매장 내를 돌아다니며 부모를 따라온 아이들에게 풍선을 나눠주기. 오직 그 뿐이라니. 본래 내가 목표로 하고자 하는 일과는 너무나도 큰 거리가 존재했다. 어디 그뿐이랴, 흔히 생각하는 아이돌이라는 것과도 그다지 매치가 되지 않았다.

 

굳이 나와 하루카가 아닌, 비슷한 체격의 다른 사람 아무나를 갖다놔도 상관없을 법한, 그런 일.

 

하다못해 이 의미없는 일이 끝난 뒤 아주 작게라도 노래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어있다거나 하면 좀 나으련만, 그런 건 예정되어있거나 하진 않다.

 

"치하야쨩? 왜 그래?"

 

뒤집어 써야할 인형탈의 머리 부분을 그저 끌어안고만 있는 모습이 답답해보였던 걸까, 하루카가 탈의실을 몇 바퀴 뱅그르르 도는 것을 멈추고 이 쪽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어떻게 되어먹은 구조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루카가 뒤집어쓴 인형탈의 머리 부분은 잘 고정이 되어있지 않았다. 조금 세게만 쳐도 그대로 툭 벗겨질 것처럼 흔들흔들, 흔들흔들.

 

"혹시, 화장실?"

"아니야."

 

흔들리긴 해도, 벗겨지지는 않은 인형탈은 빈틈없이 하루카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덕분에 보이는 일 없는 표정. 그러나 다소 과장된 몸짓이나 들뜬 목소리는 충분히 그녀의 감정을 유추해낼 수 있는 단서가 되고 있었다. 나는 짧게 대답하고는 정확히 어디 붙어있는지도 알 수 없는 하루카의 시선을 피해 사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치하야쨩은 이번 일, 별로인가보네."

 

그러자 내 움직임을 따라 함께 이동하는 커다란 곰돌이 얼굴. 금방이라도 벗겨질 듯, 말 듯, 불안하게 보인다. 손, 뻗어서 지지해주는 게 좋을까.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겠지. 나는 양 손 가득한 인형탈을 만지작거리며 되물었다.

 

"그럼 하루카는, 이 일이 좋아?"

"아하하......뭐,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나."

"이런 일이라면,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없는 쪽이 낫다고 생각하지만."

"에이, 그렇지는 않을 거야."

 

하루카는 그렇게 말하고는 근처에 있는 간이 의자를 끌어서 걸터앉았다. 그런 뒤에 벗겨지려고 했던 머리 부분을 다시 고쳐쓰고는, 이 쪽을 바라보는 듯 싶었다. 뭔가, 이 쪽과 대화 같은 걸 하고 싶어하는 걸까. 음.....어쩌지. 그 이상 특별히 할 말은 없는데. 나는 딱히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신경써줄 정도로 여유가 넘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쳐다본다고 해도.....아니, 정확히 시선이 어딜 향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래도 방향은 이 쪽에 가까운 게 맞긴 한 모양이지만.....그렇다곤 해도 이 쪽은 별달리 해줄 말 같은 건, 없어.

 

나는 이 이상 따라오지 말라는 식으로 완전히 정반대의 곳에 고개를 돌렸다. 여기까지 한 덕분일까, 하루카도 더 이상 이 쪽을 보지 않았다.

 

"....."

 

그로부터 잠시후, 주변의 공기가 조금 딱딱해진 느낌이 들었다. 이 쪽은 익숙하니까 괜찮다. 하지만, 하루카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걸까.

 

"이제 10분만 더 있으면 출발인가아.....어떠려나. 막 남자애들이 잡아당기고 그러지는 않겠지? 아, 그렇지. 실수로 풍선을 놓쳐버리거나 하면 큰일이겠네. 주의, 해두지 않으면."

 

뭔가 이것저것 꿍얼꿍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저런 것에는 일일히 답해줄 필요는 없겠지. 나는 아직 쓸 마음이 들지 않는 인형탈을 꼭 끌어안은 채, 우두커니 서서 흘러나오는 혼잣말들을 조용히 듣기만 했다.

 

"....."

 

누구도 상대해주지 않는 말들은 허공만을 맴돌다 사라졌다. 밝은 갈색의 곰인형 머리에서는 더 이상 말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나는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하루카가 언급했던 출발 시간까지는, 이제 5분도 채 남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쉬고는 인형탈의 머리부분을 들었다. 이젠 정말 쓰지 않으면 안된다. 억지로 마음을 다잡아가며 겨우 뒤집어 쓰려는 순간.

 

폭, 하고 뭔가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향했다. 거기에는 결국 머리 부분이 벗겨지고 만 갈색 곰돌이, 깜짝 놀라 이 쪽을 올려다보는 하루카가 보였다.

 

데구르르.

 

벗겨진 곰돌이 인형탈의 머리가 바닥을 구르다가, 이 쪽의 발치에 와서 맥없이 뚝, 하고 멈췄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잠깐 고민하던 나는 쓰려고 했던 분홍색 인형탈을 근처에 내려놓고, 대신 갈색 인형탈을 들어 앉아있는 하루카에게로 다가갔다.

 

"아, 아아, 미안. 이거, 의외로 잘 벗겨진다고 해야할까.....아하하, 조심해야겠네."

 

하루카는 웃었다. 인형탈 속에 갇혀있던 붉은 리본 한쌍이 그에 맞춰 흔들렸다. 그리 밝지만은 않은 웃음이었다.

 

"그렇네. 일하는 도중에 벗겨지거나 하면 곤란하니까."

"응, 응."

 

주워온 인형탈을 건네주자, 하루카는 그것을 급하게 뒤집어쓰고는 붕붕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록 인형탈이 또 벗겨질랑 말랑 흔들거린다는 걸, 아는 걸까 모르는 걸까.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별로 쓰고 싶지 않은 물건을 주워들고는 기어코 뒤집어썼다.

 

".....윽."

 

이거, 얼마나 쓴 걸까. 세탁 같은 건, 했을까? 순간 거대한 의심이 들 정도로 조금, 아니 꽤 퀴퀴한 냄새가 한가득 풍긴다. 그리고 갑갑하다. 숨 쉬는 것도 그렇고, 시야도 그렇고. 하루카는 이런 걸 잘도 쓰고 있네.

 

나는 좁아진 시야가 익숙해지길 기다리며,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겨보았다. 하나, 둘. 하나, 둘. 좋아, 일단 어느 정도 움직일 수는 있게 되었네.

 

"앗, 치하야쨩! 귀여워! 잘 어울려!"

 

덜컥, 하루카가 큰소리와 함께 벌떡 의자에서 일어났다. 나는 아직 완전히는 익숙하지 않은 시야로 색깔만 다른 곰인형과 마주했다.

 

"잘 어울린다, 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사이즈는 맞긴 하네. 얼굴 부분이 조금 불안하긴 해도."

 

살짝 흔들리는 얼굴 부분을 한 손으로 부여잡으며 그리 말하고는, 다시 시계를 보았다. 이젠 정말, 나가야할 시간이다.

 

"나가자, 하루카. 지각하면 안되니까."

 

나는 하루카를 재촉하며 탈의실의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문 폭이 인형탈을 쓰고 지나가기에는 조금 좁다는 걸 깨닫고는, 쓰고 있는 인형탈 머리를 도로 벗고는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다시 인형탈을 쓰려는 순간.

 

"치하야쨩, 아까보다는 의욕이 난 것 같네."

 

다행이야. 혹시 안한다고 나가버리면 나 혼자 어쩌나- 하고 걱정했다니까. 옆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옆을 돌아보자, 거기에는 나랑 똑같이 탈을 벗은 하루카가.

 

"하기 싫다고는 해도,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해야할까."

 

어쩔 수 없다라고 하는 말은, 어디까지 통용될 수 있는 걸까. 어쩔 수 없으니까 일한다. 어쩔 수 없으니까 가만 있는다. 어쩔 수 없으니까 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으니까 포기한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어쩔 수 없다는 말은 결국 내 가장 중요한 부분에까지 침범하고 마는 게 아닐까.

 

그래, 예를 들어.....어쩔 수 없으니까 노래를, 포기해야한다.....같은.

 

노래만이 전부라 할 수 있는 나한테는, 그건 죽으라는 말과 똑같은 말이지만.....

 

푹.

 

쓸데없는 것을 생각하는 건, 그만두자. 나는 인형탈을 힘주어 눌러썼다. 아직, 아직은 그정도까지는 아니야. 그리고 지금은, 일이 급하니까.

 

"응. 그렇네."

 

내 행동에 맞추기라도 한 듯, 하루카도 뒤따라 인형탈을 꾹 뒤집어썼다. 조금은 밝아졌지만, 평소보다는 여전히 어두운 표정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가자."

 

나는 다시 한 번 하루카를 재촉하며, 불편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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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섬머데이즈를 읽던 도중 생각난 뻘망상을 적당히 불려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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