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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하게 느긋하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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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23, 2017 23:20에 작성됨.

---6

치하야와 ‘장애물 넘으면 마이크!’의 녹화장에 도착한 프로듀서는 출근 첫날보다 더한 긴장에 시달렸다. 분명 치하야를 차에 태우고 왔지만 어떻게 온 지도 기억 안 날 정도였다.

‘무사히 끝마쳤으면 좋으련만.’

촬영 복장인 짧은 체육복을 입은 치하야는 여전히 차가운 무표정으로 녹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매가 매우 짧은 체육복이 치하야의 가녀린 몸매를 더 부각했다. 평소에도 치하야가 말랐다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녹화가 시작되고 참가자들의 자기소개 순서가 되었다. 사회자의 유쾌한 안내에 따라 아이돌들은 저마다의 애교와 함께 자기소개했다.

 

“장안의 화제인 애니메이션 ‘세기말 P’의 오프닝, ‘눈이 마주친 순간’으로 떠오르고 있는 아이돌이죠? 9번 참가자 765프로덕션의 ‘푸른 가희’ 키사라기 치하야 양! 귀여움 가득한 자기소개 부탁해요.”

 

드디어 치하야의 차례가 되자, 프로듀서는 걱정과 긴장감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목까지 타는 것만 같아 음료수를 벌컥 들이켰다.

 

“안녕하세요. ‘파랑새’로 데뷔하고 ‘눈이 마주친 순간’을 부른 키사라기 치하야입니다. 열심히 해서 오늘 라이브 기회를 얻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던 치하야는 미키와 하루카가 알려준 대로 눈 쪽 가까이에 양손으로 V자를 그렸다.

 

“브, 브이!”

 

윙크까지 하는 치하야를 보고 프로듀서는 마시던 음료수를 뿜을 뻔했다. 사회자는 어설픈 애교를 선보이고는 잔뜩 수줍어하며 얼굴까지 새빨개진 치하야를 보고 호탕하게 웃었다.

 

“얼음장 같은 줄만 알았던 ‘푸른 가희’에게 이런 반전 매력이 있었군요! 오늘 푸른 가희의 활약을 기대해보겠습니다.”

 

결승점까지 도달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짧은 체육복을 입은 아이돌들의 신체가 훤히 드러나도록 코스가 어렵게 설계된 탓이었다. 장애물에 매달린 아이돌을 카메라가 가까이에서 찍는 광경을 볼 때마다 치하야는 눈쌀을 찌푸렸다.

거의 마지막인 치하야의 차례가 다가올 때까지 결승점에 도달한 아이돌은 없었다. 이런 경우, 가장 멀리까지 간 아이돌 순으로 1등에겐 자기 어필 시간과 함께 2곡을, 2등에겐 1곡만 부를 라이브 기회가 주어졌다.

뒤에 아직 한 명이 남아 있었지만, 치하야가 최고 기록만 경신해도 최소한 1곡을 부를 수 있었다.

 

“오늘 과감한 귀여움을 보여준 ‘푸른 가희’의 등장! 결승점에 도달한 아이돌이 아무도 없는 지금, ‘푸른 가희’는 최고 기록을 경신하여 대망의 라이브 기회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럼 지금부터 START!”

 

출발 신호와 함께 치하야는 빠르게 줄을 타고 벽을 올랐다. 벽을 오르니 얇은 원통 기둥들을 밟으며 통과하는 코스가 나타났다. 치하야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빠르게 코스를 통과했다.

 

‘그렇지!’

 

“가녀린 줄만 알았던 ‘푸른 가희’의 대선전!”

 

사회자도 치하야의 활약에 신이 났는지 분위기를 더욱 돋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치하야는 재빠르게 코스를 통과했다.

“오오, 엄청나게 빠른 스피드! 하지만 곧 다가오는 마의 난관. ‘푸른 가희’는 과연 통과할 수 있을 것인가?”

 

여러 코스를 넘은 치하야는 앞선 참가자들이 통과하지 못한 소위 ‘지옥의 코스’와 마주했다. 가느다란 원통형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코스인데, 작은 고무공들이 다리 위의 아이돌을 향해 날아들었다. 다리에 매달려도 통과할 수 있어, 고무공을 피하려고 다리에 매달리는 아이돌의 신체 부위를 집중해서 찍는 포인트이기도 했다.

치하야가 재빠르게 외나무다리를 건너기 시작하자, 더 많은 고무공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더 쏴! 다리에 매달리게 해!”

 

어떻게든 치하야를 다리에 매달려 시청자들의 욕구를 채울 장면을 찍으려는 PD가 지시를 내렸다.

 

‘참, 이런 방송이 아니라면 TV에 나오기 힘든 게 현실이라니.’

 

프로듀서는 내심 이런 방송에 치하야를 출연시킨 자신이 한심했다. 하지만 뜨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치하야가 무사히 통과하길 바랐다.

하지만 계속 날아오는 고무공들이 버거웠는지 치하야는 다리 위에 웅크렸다. 그러자 원통이 돌아가면서 치하야는 급히 다리를 안고 매달렸다. 짧은 체육복이 늘어지면서 신체 부위가 훤히 드러났다.

 

“좋아, 가까이서 찍어!”

 

카메라맨이 다리에 매달린 치하야에게 카메라를 들이댔다. 반사적으로 드러난 자신의 신체 부위를 찍고 있는 것을 알아챈 치하야는 불쾌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째려봤다..

 

‘여기서 대체 뭐하는 걸까?’

 

내심 이런 방송으로 자기를 떠민 프로듀서와 그걸 수락한 자신이 미워졌다. 그러나 이 방송에 출연한 이유인 라이브 기회를 얻으려면 조금이라도 더 전진해야 했다.

 

“대망의 라이브 기회 확정까지 얼마 안 남았습니다. 과연 ‘푸른 가희’는 전진할 수 있을까요?”

 

다리에 매달려 있던 치하야는 팔에 힘이 빠짐을 느꼈다. 어쩔 수 없이 겨우 다리 위로 올라섰다. 몇 발짝만 가면 무조건 라이브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노래 부르려면 가야 해.’

 

다시 일어선 치하야는 살짝 어지러웠다. 난생처음 만난 장애물 코스에 대한 긴장, 그동안 빡빡한 스케쥴로 쌓인 피로, 늦게까지 노래 연습하느라 부족한 잠이 한데 몰려왔다. 설사 목이 잠길까 봐 방송국으로 오는 차에서 쪽잠도 청하지 않은 터였다.

하지만 치하야는 노래하겠다는 집념 하나로 후들거리는 다리를 조금씩 내밀며 한 걸음씩 나아 갔다. 그리고 마침내 최종 기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데 성공했다.

 

“드디어 ‘푸른 가희’가 최고 기록을 경신! 이로써 라이브 기회도 확정! 과연 1등을 확정 짓기 위해 더 나아갈 수 있을까요?”

 

그러나 치하야는 이젠 힘이 빠져 떨리는 다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래도 간신히 한 발짝 더 뻗는 순간, 머리 쪽으로 고무공 하나가 날아왔다. 안전 헬멧을 쓰고 있었지만 한 걸음 다시 내딛는 치하야를 흔들기에 충분했다. 치하야의 오른발은 허공을 그대로 밟고 말았다.

치하야는 오른 다리를 내뻗은 자세 그대로 떨어지고 말았다. 밑에 안전 매트가 깔렸었으나 먼저 닿은 오른발에 충격이 쏠렸다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최고 기록을 경신한 ‘푸른 가희’ 키사라기 치하야 양이 라이브 기회를 확정 짓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사회자의 축하에도 치하야는 일어나지 못했다. 쓰러진 치하야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본 순간 프로듀서는 가슴이 확 덴 느낌이었다.

 

“녹화 중지!”

 

PD의 말과 함께 다급히 달려간 프로듀서는 스태프들을 제치고 먼저 치하야에게 다가갔다. 치하야는 고통에 겨워 표정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치하야 양! 괜찮아요?”

 

“네...”

 

대답과 달리 치하야는 발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프로듀서는 다급하게 치하야를 안아 들고 대기실로 달려갔다.

 

“어때요? 아파요?”

 

“괜찮습니다...”

 

하지만 발목은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조심스레 신발을 벗긴 프로듀서는 스태프에게 받은 파스 스프레이를 뿌렸다.

 

“누워서 좀 쉬고 있어요.”

 

“하지만 라이브가...”

 

“우선은 쉬고 있어요.”

 

치하야가 소파에 누운 것을 확인한 프로듀서는 대기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PD에게 녹화에 지장을 줘서 죄송하다는 인사를 거듭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치하야 양 때문에 녹화에 지장이 가는 건 아닌지…”

 

“뭐 이런 일이 한 두 번 있던 것도 아니고, 키사라기 군 덕분에 좋은 장면도 많이 찍었어. 그런데 라이브는 할 수 있겠어?”

 

“모르겠습니다만… 치하야 양과 상의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직 한 순서 남아 있다지만 빨리 말해줘. 다음 아이돌의 성적과 상관없이 키사라기 군에게 무조건 라이브 기회가 돌아갈 테니까.”

 

PD에게 다시 거듭 사과한 프로듀서는 대기실로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뒤에서 한 여자아이가 앙칼진 목소리로 프로듀서를 불렀다.

“어이 당신!”

 

뒤돌아보니 화려하게 염색한 머리와 ‘갸루’처럼 짙은 화장이 눈에 띄는 아이돌이 있었다. 가슴팍에 달린 명찰엔 ‘346 프로덕션 - 죠가사키 미카’라고 쓰여 있었다.

 

“당신이 키사라기 치하야의 프로듀서야?”

 

“그렇습니다만.”

 

“프로듀서라는 작자가 자기 아이돌 몸 상태도 관리 안 해? 누가 봐도 아파 보이는 애를 이런 방송에 그냥 내보내?!”

 

“그게 무슨...?”

 

차로 데려올 때 치하야는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어 알아채지 못했다. 분명 치하야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징조를 알아챌 기회가 있었지만, 프로듀서는 방송 출연에만 정신이 팔린 상태여서 미처 생각지 못했다.

프로듀서는 아차 싶었지만, 미카는 계속 프로듀서를 꾸짖었다.

 

“아무리 방송이 중요하다고 해도 그렇지, 딱 봐도 힘들어 보이는 여자애를 그냥 내보내? 아니, 그보다 뭐? 녹화에 지장을 줘서 죄송하다고? 아이돌 프로듀서라면 자기 아이돌이 먼저인 거 아니야?”

 

“미카, 그만해.”

 

뒤늦게 미카를 따라온 346 프로의 프로듀서가 고개를 숙였다.

 

“미카의 무례를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프로듀서는 엉겁결에 사과를 받았다.

 

“프로듀서가 왜 사과해? 당신은 가서 당신 아이돌부터 보살펴.”

 

“미카, 그만해. 오지랖은 적당히 해. 그리고 곧 네 녹화 순서야.”

 

“아무튼, 프로듀서라면 자기 아이돌을 소중히 여겨. 하여간 우리 프로듀서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자기 아이돌도 제대로 못 돌본다니까.”

“거기서 내 얘긴 왜 나오는 거야?”

 

“프로듀서도 반성하란 의미야. 됐으니 가자.”

 

미카와 그의 프로듀서가 떠나자, 프로듀서는 급하게 대기실로 달려갔다.

대기실 소파에 누워 있던 치하야는 푸른 차가움에 한껏 싸여 있었다. 외나무다리에 매달린 동안 맨살을 노리고 달려든 카메라에 수치심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녹화 도중 다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일단 하는 일엔 완벽을 추구하는 치하야에게 이런 사고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일은 역시 하지 말아야 했어.’

 

푸른 차가움은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대기실 문을 조심히 열던 프로듀서는 치하야가 소리 죽여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프로듀서는 차마 문을 마저 열지 못하고 조용히 닫아주었다. 그리고는 안경을 벗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어진 녹화에서 미카가 결승점에 도착하면서 1위를 차지했다. 2위까지 주어지는 라이브 기회가 치하야에게도 돌아갔지만, 프로듀서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발목을 다친 데다 울어서 목도 잠기고 눈이 부은 상태로는 무대에 서기 무리란 생각에서였다.

결국, 치하야가 기권하면서 라이브 기회는 3위인 아이돌에게 돌아갔다.

 

“다음 기회에 또 부를 테니깐 너무 상심하지는 마.”

 

PD가 위로 아닌 위로를 했지만, 프로듀서의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재출연은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머리와 가슴 속엔 일을 제대로 못 했단 좌절뿐이었다.

녹화가 끝나자마자 프로듀서는 치하야와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치하야의 푸른 차가움만이 두 사람 사이를 떠돌았다.

다행히 진단 결과 발목은 살짝 삔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의사는 프로듀서에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환자분의 컨디션이 매우 안 좋아 보이더군요. 프로듀서시라면 컨디션 관리에 더 신경 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의사의 소견을 들은 프로듀서는 치하야에게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자초지종 경과를 들은 다카기 사장은 흔쾌히 허락했다. 치하야의 다음 스케쥴들은 다른 아이돌들에게 맡기거나 취소하였다.

치하야는 차에 타자마자 아무 말도 없이 잠들었다. 그리고 푸른 차가움도 잠잠해졌다. 긴장이 풀린 탓일까, 아니면 미카와 의사가 말한 것처럼 컨디션 저하 때문이었을까?

치하야가 깬 것은 집에 도착해서였다. 그것도 프로듀서가 한참을 조심스럽게 깨워서야 일어났다.

 

“아, 제가 얼마나 잔 거죠?”

 

“한 30분 정도요.”

 

“아, 이래선 생체 리듬이...”

 

“우선은 들어가서 쉬어요. 내일 학교는 어떡할 건가요?”

 

“발목이 아파도 학교 가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태우러 올게요.”

 

“그럴 필요까진...”

 

“부상 당한 담당 아이돌을 그냥 둘 필요도 없죠.”

 

치하야도 프로듀서의 고집을 알고 있는 터라 거절하지 못했다. 그리고 몸도, 마음도 지쳐있어 더 거절하기도 힘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도 부탁드리겠습니다.”

 

프로듀서는 아파트로 들어가는 치하야의 모습이 어둠에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을 차를 출발시키지 못했다.

집에 와서 잠을 청했지만, 눈이 도통 감기지 않았다. 의욕을 갖고 프로듀스를 했지만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는 기분이었다. 또렷한 성과를 내긴커녕 담당 아이돌과도 여전히 멀었다. 이대로 잘해낼 수 있을지 막연한 걱정이 앞섰다.

거기에 담당 아이돌의 몸 상태를 간과하는 등 방송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죄책감도 들었다. 아이돌을 소중히 하라는 미카의 꾸짖음과 자꾸만 치하야의 피곤한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만약 내가 치하야 양이 지쳤다는 것을 알았어도 스케쥴을 감행했을까?’

 

TV 출연이 힘든 아이돌의 입장에서 무리해서라도 방송을 나가야 하는 것은 맞았다. 그렇게 생각해도 먼저 치하야를 배려하며 스케쥴을 조정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러나 아집은 그 후회가 일어서는 것을 막았다.

‘톱 아이돌로 프로듀스하고, 성과를 내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렇게 자신을 위안했지만, 마음 한쪽에 자리한 불편함은 어쩔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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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업로드 못할 것 같아 미리 올립니다.

잠깐 배경 설명을 하자면 애니마스를 기초로 한 시기이며(다만 몇몇 설정은 1에서 가져왔습니다),

신데 애니에서 이미 뜬 걸로 나온 미카는 이 시점에서 데뷔 초기라는 설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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