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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하게 느긋하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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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23, 2017 21:44에 작성됨.

---5

그래도 크고 작은 행사 스케쥴을 잡을 수 있었다. 노래 부를 수 있는 행사라면 지방도 가리지 않고 스케쥴을 잡은 덕분이었다. 그리고 페스티벌, 미니 라이브도 가능하면 모조리 참가했다. 대신 치하야의 목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노래 없는 행사도 넣는 등 스케쥴을 조정했다

치하야도 노래 부르는 스케쥴이 아무리 많아도, 혹은 멀리 가야 한다 해도 거절하지 않았다. 무대의 성격, 무대 장소와 규모, 관객의 수는 상관치 않았다. 치하야에게는 오직 ‘노래를 부를 기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다만 행사에서 멘트를 하거나 사람을 대할 때는 다소 고전했다. 도통 웃지 않으니 관객들도, 행사 주최 측도 반응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프로듀서는 행사 스케쥴을 포기하지 않았다.

늘어난 스케쥴과 긴 이동 거리로 피곤할 법했지만, 치하야는 음악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동할 때도 잠자는 대신 늘 항상 음악을 듣거나 악보를 살펴봤다. 하지만 일과 관련된 얘기가 아니면 프로듀서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프로듀서도 어느새 그런 단절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렇듯 단절 속에 치하야의 스케쥴의 강도는 높아져 갔다. 하지만 정체된 ‘파랑새’의 순위를 보면서 프로듀서는 초조해져만 갔다.

그러던 와중, 치하야는 절찬리에 방영 중인 세기말 배경의 격투물 애니메이션 ‘세기말 P’의 2기 오프닝 녹음을 맡게 되었다. 마침 그 애니메이션 제작진인 대학 선배에게 사정하여 오디션 기회를 간신히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참가한 오디션에서 치하야는 유감없이 자신의 노래 실력을 발휘하여 오디션 1등에 올라 녹음 기회를 따냈다.

한 녹음실에서 치하야가 오프닝 곡인 ‘눈이 마주친 순간’을 녹음하는 동안, 프로듀서는 녹음실을 방문한 선배에게 감사를 표했다.

“치하야 양에게 노래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야. 저 아이 노래 실력이 굉장하던데? 네 연락 받고 노래도 들어보고 라이브 영상도 찾아봤는데 내로라하는 가수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더라. 덕분에 위쪽에서도 오디션을 보곤 흔쾌히 합격시킨 거야. 나도 저렇게 좋은 보컬리스트를 섭외할 수 있어서 네게 고맙지.”

“그렇습니까? 정말 다행이군요.”

“아무튼, 내 개인적인 감상이긴 한데 음색, 성량, 창법 모두 나무랄 데 없어. 그런데 노래 실력과 별개로 무언가 이상해. 비장한 걸 넘어서 노래에 많은 걸 쏟아붓는 느낌이야. 저렇게 노래하는 아이돌은 처음 봐. 하지만 계속 저런 식으로 부른다면...”

“저처럼 되겠죠.”

선배 또한 과거 프로듀서의 성대 결절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실의에 빠진 프로듀서를 격려해줬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래서 창법을 바꾸자고 얘기하는데 워낙 프라이드가 강해서 말이죠...”

그만큼 치하야는 노래에 모든 걸 걸고 있었다. 하루 가득 스케쥴이 잡힌 날에도 무조건 노래 연습을 하겠다고 주장했다. 프로듀서는 다시 자신의 과거를 이유로 만류했지만, 치하야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제게 남은 것은 노래뿐이에요.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무대를 놓치기도 싫고, 그렇다고 노래 연습을 줄이는 것도 싫습니다.”

거기서 프로듀서는 치하야에게서 절박함을 느꼈다. 하지만 무언가에 쫓기는 절박함인지를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사장님이 치하야 양을 두고 다급해 보인다고 한 게 이거였나?’

그런 치하야를 떠올리며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은 프로듀서에게 선배는 슬쩍 웃었다.

“그래도 너라면 창법도 고쳐주고 좋은 아이돌로 프로듀스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슨 근거로요?”

“노래하는 기쁨과 못하는 슬픔을 그 누구보다 잘 알잖아?”

“글쎄요, 우리 공주님이 참으로 까다로운 분이셔서 말이죠.’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요. 녹음 끝났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확실히 곡 이해도 빠르니 녹음도 빨리 끝나는군.”

마침 ‘눈이 마주친 순간’의 녹음이 끝났다는 사인이 나왔다. 하지만 치하야는 녹음실에서 나오지 않고 도리어 재녹음을 요청했다.

- 죄송하지만 한 번 더 갈 수 있을까요?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은데요?”

- 제가 생각하기엔 많이 부족합니다. 부탁드립니다.

“뭐, 그러면 한 번 더 가죠.”

재녹음은 한 번에 끝나지 않고 몇 차례 더 반복됐다. 프로듀서가 직접 시간이 다 됐다는 얘길 해서야 마지막 녹음이 진행됐다. 그 얘길 듣고 아쉬운 표정을 짓는 치하야를 선배가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어린 나이에도 완벽주의자군.”

“자신에게 남은 것은 노래뿐이라니까 철저할 수밖에 없겠죠.”

다행히 사전 공개된 애니메이션 오프닝에 대한 반응이 좋았고, 이에 힘입어 한 케이블에서 치하야에게 아이돌 중심의 방송 프로그램 출연을 요청했다. 치하야가 페스티벌에서 노래하던 도중 연락을 받은 프로듀서는 귀가하면서 치하야에게 알려주었다.

“’장애물 넘으면 마이크!’? 이건 무슨 프로그램이죠?”

“장애물 코스를 통과해서 상위권에 들면 라이브 기회를 주는 아이돌 참여 프로그램이에요. 케이블 채널 중에서도 시청률이 나오는 편이니 라이브까지 한다면 치하야 양의 인지도도 단숨에 올릴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하는 프로그램이라 아이돌들에게 짧은 복장을 입히는 등 다소 선정적인 면도 있었다. 그래도 시청률이 보장되는 프로그램에서 라이브 기회까지 주는 방송은 흔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치하야도 승낙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치하야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장애물 코스요? 제가 왜 그런 걸 해야 하죠?”

“이 방송에 나가서 상위권에 들면 노래할 기회가 생긴다고요. 인지도도 높이면서 노래도 부를 수 있고, 치하야 양에게 어울리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하지만 장애물 코스를 통과해야 한다는 조건이 달려 있잖아요? 애당초 보컬리스트가 할 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이런 부끄러운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도... 전 하기 싫어요.”

치하야는 프로듀서가 준 태블릿 PC를 뒤집었다. 거기엔 ‘장애물 넘으면 마이크!’의 방송 진행 방식, 출연자 착용 복장과 등장하는 장애물에 관한 내용 등이 있었다.

“왜 해보지도 않고 못 한다고 그래요?”

프로듀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프로듀스가 뜻대로 풀리지 않아 조급해진 마음이 짜증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치하야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저는 아이돌이 아니라 보컬리스트예요. 앞으로도 몇 번이나 더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프로듀서.”

“지금 분명히 해두죠. 치하야 양은 아이돌입니다.”

“아이돌에게도 가장 중요한 건 노래에요.”

어느 새 치하야의 목소리도 높아져 있었다. 서서히 푸른 차가움이 뻗어져 나왔지만, 프로듀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 왜 치하야 양은 아이돌이 된 거죠? 아이돌이라면 노래 말고 다른 것도 해야 한단 걸 알잖아요?”

순간 치하야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프로듀서 앞에서 처음 동요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프로듀서는 그동안 참아온 말을 멈추지 못했다.

“이 바닥은 냉혹해요. 가창력이 뛰어나도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면 아이돌 생활을 이어갈 수 없어요. 치하야 양에겐 노래밖에 없다고 했죠? 그 노래를 계속하고 싶으면 인지도를 쌓아야 한다고요. 이제 아시겠어요?”

“...”

“그럼 다시 물어볼게요. 치하야 양은 왜 아이돌이 된 거죠?”

\ 치하야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표정이 더 어두워지는 것이 보이자, 프로듀서는 자신이 실수한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말하지 않아도 된다 하려 했지만 치하야가 입을 열었다.

“제게 아이돌이 되는 것 외에는 노래할 방법이 없었어요. 그래서 사장님의 스카우트 제의를 수락했어요.”

“어쩔 수 없었다...”

“사무실에 들어오기 전까지 아이돌은 그냥 노래만 하면 되는 건 줄 알았어요. 하지만 지금 관둔다면 전 더는 노래할 수 없어요.”

“그만큼 치하야 양에게 노래는 소중하군요.”

치하야가 대답하지 않았지만, 프로듀서는 긍정하는 침묵임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무언가 말 못 할 사정이 치하야를 노래에 매달리게 하는 것 같았다.

‘대체 무엇이 치하야 양을 이렇게 다급하게 만드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한때 노래에 모든 걸 걸었던, 쫓기듯 노래했던 자신이 겹쳐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프로듀서는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아이돌이 된 이상, 아이돌의 본분은 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이돌은 프로이고, 프로면 프로답게 해야 하니까요.”

“...”

두 사람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치하야는 프로 정신이라는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치하야의 완벽주의자적 성향이 마음을 흔든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래할 기회가 있다는 것도 중요했다.

‘노래를 계속 부르기 위해선 나가야 한다잖아. 그리고 어찌 됐건 노래도 부를 수 있고.’

“좋아요. 한 번 해볼게요.”

다음 날, 모처럼 사무실로 출근한 치하야는 소파에 앉아 고민에 빠져 있었다. 지금이라도 출연을 물릴까 생각도 해봤다. 그러나 프로듀서가 말한 ‘프로 정신’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 치하야에겐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 출근한 미키가 들어왔다. 미키는 개인 활동을 하면서도 독보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언젠가 봤던 무대에서 미키는 반짝반짝 빛나며 무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까다로운 치하야도 미키의 노래 실력은 인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소감들로 미루어, 아이돌에 적합한 천재라면 자신이 아닌 미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치하야 씨 안녕.”

“응. 안녕.”

“아후~. 미키는 잠 좀 잘게.”

큰 하품과 함께 미키가 바로 소파에 누웠다. 그리고 평상시처럼 잠이 들려는 순간, 치하야가 말을 걸었다.

“저기 미키.”

“응? 무슨 일이야?”

“그 애교라는 건 어떻게 하는 거야?”

“에?”

먼저 말을 거는 일이 별로 없는 치하야였기에 놀라움이 먼저 반응했다.

“이번에 ‘장애물 넘으면 마이크!’에 출연하게 돼서...”

더불어 자신에게 처음 건네는 질문도 아주 놀라웠다.

“치하야 씨가?”

치하야가 연신 쏟아내는 놀라운 말들에 미키는 잠이 확 달아난 기분이었다. 미키도 그 프로그램을 알고 있어, 치하야가 출연한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프로듀서 씨가 계속 노래하려면 방송 출연이 필요하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나간다 했어. 프로는 프로답게 해야 하니까...”

“그런데 애교는 왜? 장애물이 더 중요하지 않아?”

“아이돌이라면 그런 데 나가서 애교를 부려야 한다는데 난 그런 걸 못하니까...”

“흐음, 그렇구나.”

치하야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누우려던 미키는 자세를 바로 했다.

“미키는 말이야, 애교라고 딱히 무얼 생각하는 게 아니란 거야.”

“그럼?”

“미키는 어디서나 반짝반짝 빛나니까 무얼 하건 사람들이 좋아한단 거야. 그래도 치하야 씨를 위해 보여줄게. 따라 해봐. 뿌뿌~.”

미키가 입을 모으고 볼에 바람 넣는 애교를 보여주었다. 귀엽게 토라진 척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치하야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어떻게 해?”

“그렇다면 미키가 간단한 애교를 알려주겠단 거야.”

미키가 한 손으로 V자를 그렸다.

“여기에 하나 더 하면 더 귀엽단 거야.”

미키는 V자로 만든 양손을 치하야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양손을 이렇게 대면 완전 귀엽단 거야.”

양손을 양 눈에 가까이 댄 미키는 찡긋 윙크했다.

“윙크까지 하면 완벽하게 귀엽단 거야. 어때? 할 수 있겠지?”

“그런 건 내게 무리야!”

“치하야 씨도 하면 엄청 귀여울 거 같단 느낌! 자, 어서 해봐.”

마침 사무실로 들어온 하루카는 양손으로 V자를 만들고 어쩔 줄 모르는 치하야와 그걸 진지한 눈빛으로 지켜보는 미키를 볼 수 있었다. 이 어색하고도 신기한 광경을 가까이서 보려고 다가가던 중 또 넘어지고 말았다.

“으아아아!”

“하루카?”

“하루카 오늘도 넘어졌단 거야.”

“헤헤, 또 넘어지고 말았네. 그런데 치하야랑 미키 둘이서 무얼 하고 있어?”

“치하야 씨가 ‘장애물 넘으면 마이크!’에 나간다고 미키에게 애교를 알려달라고 했단 거야.”

“방송 출연? 애교?”

하루카 역시 놀란 반응이었다.

“그, 그래도 난 프로잖아... 노래도 할 수 있다니 나도 노력 정도는... 이런 거 나에겐 전혀 어울리지도 않지만.”

하루카는 치하야의 양손을 잡아 V자로 펼쳐 양 볼에 대었다.

“하, 하루카! 뭐하는...”

“자 봐, 치하야도 정말 귀여운걸.”

얼굴이 새빨개진 치하야는 하루카의 웃는 얼굴을 차마 바라보지 못했다.

“헤, 치하야 씨 생각보다 부끄러움 많이 탄다는 거야.”

“내일 녹화 잘해! 라이브 기회도 꼭 얻고.”

“응... 고마워.”

마지막 스케쥴까지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치하야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음악 공부와 학교 숙제까지 마쳤다. 시간을 보니 어느덧 자정이었다. 화장실 거울 앞에 선 치하야는 미키와 하루카가 알려준 애교를 연습해보려 했다. 그러나 1초도 안 돼서 손을 내렸다.

‘이런 건 역시 나한텐 어울리지 않아.’

그러다 문득 노래 연습을 충분히 못 했단 생각이 든 치하야는 집을 나섰다. 집 근처 공원으로 나간 치하야는 문득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나마 큰 공원이라 크게 소리 지르지만 않는다면 노래하기엔 적합한 곳이었다.

‘역시 내겐 노래뿐이야.’

그리고 숨을 깊이 들이신 뒤 밤하늘로 퍼져나가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조용한 치하야의 노래는 새벽하늘에 한참이나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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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서 '눈이 마주친 순간'이 오프닝인 애니 '세기말 P'는 아래 영상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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