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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하게 느긋하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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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22, 2017 20:17에 작성됨.

---4

다음 날, 프로듀서는 사무실에서 ‘류구코마치’의 스케쥴을 점검하던 리츠코에게 조언을 구하고자 했다.

“예? 치하야가 행사랑 방송에 나가기로 했다고요?”

“대박 사건! ‘푸른 가희’가 드디어 출격!”

마침 류구 멤버들까지 사무실에 있던 터라 아미가 신나게 소리를 질렀다. 류구는 현재 765 프로의 주력 유닛으로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 소식은 아미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사무실에 있던 모두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리츠코가 프로듀서에게 이유를 물었다.

“시작이지만 치하야 양의 부족한 인지도를 올리기 위함입니다. 노래는 이미 완벽하니 그런 스케쥴로 인지도만 올린다면 금방 톱 아이돌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치하야가 나가서 잘할 수 있을까요...”

리츠코는 걱정이 앞서는 모양이었다. 프로듀서 역시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저는 치하야 양이 잘할 거라고 믿습니다.”

“어머나, 이런 모습을 보면 치하야는 참 좋은 프로듀서를 만난 것 같다니깐요.”

류구 멤버이자 765 프로 유일한 성인인 미우라 아즈사였다. 연장자답게 차분하고 나긋나긋한 인상과는 반대로 류구 데뷔가 결정되자 긴 머리를 지금 같이 짧게 잘랐다고 했다. ‘운명의 사람’을 찾기 위해서 아이돌이 되었다지만 열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경험이 많은 류구코마치 분들이 치하야 양에게 조언 같은 걸 해주셨으면 합니다만...”

“글쎄요, 딱히 신경 쓰는 건 없는 것 같아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가장 좋은 거 같다고 할까요?”

“행사랑 방송은 엄청 신나고 재밌는 일이잖아! 그래서 아미는 항상 이오링이랑 아즈사 언니랑 즐겁게 놀다 와.”

“그럼 미나세 양은 어떤가요?”

류구의 센터를 맡은 미나세 이오리는 낡은 토끼 인형을 안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국내 최고의 재벌인 미나세 가문의 막내딸이라 그런지 귀여운 외모와 다르게 성격이 깐깐했다.

“사람들을 웃고 기쁘게 해주는 게 아이돌로서 당연한 기본 소양 아니야? 나야 슈퍼 미소녀 아이돌이니까 따로 노력할 필요는 없지만 말이야. 하지만 치하야도 경험을 쌓는다면 금방 나처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슈퍼 미소녀 아이돌이 될 수 있을 거야.”

“뭔가 더 어려워졌군요...”

프로듀서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자 리츠코가 격려했다.

“치하야도 몇 번 경험해보면 익숙해질 거에요. 물론 프로듀서 씨가 옆에서 잘 프로듀스해주셔야겠죠?”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하품을 하는 미키가 들어왔다. 미키는 반쯤 감긴 눈으로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소파로 다가갔다.

“아후~. 마빡아, 미키 잘 거니까 비켜줘.”

“내 먼저 앉아 있었잖아. 비키기 싫어. 그리고 내가 마빡이라고 하지 말랬지?”

“미키는 그런 거 모르겠단 거야.”

이오리의 말을 들은 둥 마는 둥 미키는 이오리 옆에 누웠다. 그리고 이오리가 안고 있는 토끼 인형을 빼앗으려 했다.

“오늘따라 우사짱이 푹신해 보인단 거야. 베고 자면 완전 좋을 것 같은 느낌.”

“우사짱이 아니라 샤를 도나텔로 18세. 몇 번을 더 알려줘야 해? 그리고 이거 놓지 못해?”

우사짱을 빼앗으려는 미키와 주지 않으려는 이오리의 신경전 끝에 우사짱의 팔 한쪽이 찢어지고 말았다.

“헤, 생각보다 허약하단 거야.”

“우사짱!”

이오리는 한쪽 팔이 덜렁덜렁 매달려 있는 우사짱을 안고 울먹거렸다.

“키이이이잇! 우사짱한테 뭐하는 짓이야! 미키 당장 사과해!”

“마빡이 아까는 샤를 도나텔로 18세라고...”

“우사짱 팔 어떡할 거야! 당장 책임져!”

“미나세 양, 이리 주세요. 리츠코 씨, 혹시 실하고 바늘 있습니까?”

내심 미안해하는 미키와 리츠코, 아즈사와 아미가 이오리를 달래는 사이, 프로듀서는 능숙한 바느질로 인형의 팔을 꿰매 붙였다.

“자, 여기 우사짱, 아니 샤를 도나텔로 18세 여기 있어요. 말끔하죠?”

“오? 멀쩡한 느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우사짱의 모습은 감쪽같았다. 이오리는 말끔하게 팔이 붙은 우사짱을 다시 꼭 안았다. 아즈사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어머 어머, 감쪽같아라. 이오리보다 잘 꿰매셨는걸? 프로듀서 씨 바느질 잘하시네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맞벌이 부부셔서 제가 집안일을 많이 했거든요.”

“뭐야, 내가 한 것보다 더 잘했네? 다 큰 남자가 바느질을 잘하다니, 순 변태 같아.”

하지만 뾰로통해졌던 이오리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도 우사짱은 프로듀서한테 고맙대. 니히힛~.”

“마빡이 아까부터 계속 우사짱이라고 했단 거야.”

“미키 넌 계속 마빡이라고 할 거야?”

우선 류쿠 멤버들의 충고를 치하야에게 전해주었지만 들은 둥 마는 둥 했다. 그래도 일단 치하야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뭐, 프로 정신 하난 투철하니까 잘해낼 수 있겠지.’

프로듀서는 대학 인맥까지 수소문하면서 치하야가 나갈 행사와 방송을 물색했다. 하지만 대학 인맥을 통해 만날 수 있는 관계자는 얼마 되지 않았고, 그마저도 선뜻 아직 무명인 치하야를 섭외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치하야가 차가운 인상으로 굳어진 것도 이유였다.

그래도 무대에선 유감없이 노래 실력을 뽐내었다. 관객들은 치하야의 노래에 열광했지만, 짙게 묻어 있는 푸른 차가움까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간혹가다가 아이돌답지 않게 노래가 무겁다는 얘기를 나누는 관객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치하야는 늘 관객들에게 간단히 묵례만 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어느 날 작은 라이브 홀에서 미니 라이브를 마친 치하야는 어김없이 바로 무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무대도 정말 좋았어요. 역시 ‘푸른 가희’다워요.”

“과분한 칭찬입니다.”

프로듀서가 생수를 건네며 그동안 치하야의 무대를 쭉 지켜보며 느낀 소감을 말했다.

“지금까지 치하야 양의 무대를 지켜보면서 느낀 건데, 노래 끝나고 잠깐 관객들과 토크를 한다든가, 아니면 적어도 관객들에게 웃어주고 내려오는 건 어때요?”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아이돌이잖아요. 그리고 관객들에 대한 예의기도 하고요.”

“보컬리스트라면 노래로 메시지를 전하는 겁니다. 프로듀서도 아실 텐데요? 그 외의 행위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제 노래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 건가요?”

“아뇨! 그건 절대 아니에요. 치하야 양 노래야 완벽하죠. 다만 조금 더 신경 써줬으면 해서 말하는 거예요.”

“노래를 부르다 보면 제 안의 세계로 들어가다 보니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죄송합니다.”

그러고 먼저 돌아서는 치하야가 야속했다. 노래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 없는 아이였다. 그런데도 왜 아이돌이 된 건지 이유조차 여전히 짐작 가지 않았다. 그걸 물어볼 기회도, 마음도 없었다.

많은 수고 끝에 간신히 잡은 첫 방송 출연 기회는 길거리 취재 영상을 보면서 토크를 나누는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게스트로 참가한 치하야는 짧은 자기소개를 제외하고는 녹화하는 내내 말을 하지 않았다. 사회자가 말을 걸어도 한마디를 넘지 않았다.

쉬는 시간에 무어라도 좋으니 아무 얘기라도 하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애초에 음악과 관련 없는 방송이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치하야는 충고를 무시했다. 방청객들도 활짝 웃는 프로그램 속에서 홀로 웃지 않는 치하야에게 카메라가 돌아갈 리 만무했다. 담당 PD는 그런 치하야를 두고 프로듀서에게 면박 아닌 면박을 주었다.

“편집 담당이 마술을 부려도 한계가 있어. 목석마냥 말도 없이 무표정으로 뚱하게 앉아 있는데 분량은 무슨 분량이야? 참 나, 이럴 거면 다른 아이돌을 섭외할 걸 그랬어.”

실패로 끝난 첫 녹화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프로듀서는 좀 더 적극적으로 해야 했다고 피드백을 주었지만, 치하야에게 돌아온 대답은 예의 그것과 같았다.

“전 보컬리스트에요. 역시 음악과 상관조차 없는 이런 방송은 제게 어울리지 않았어요.”

“하지만 나간 이상 최선은 다했어야죠.”

“그건...”

“제가 말했잖아요. 이것도 일의 연장이고 치하야 양이 노래 부를 기회를 더 얻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요. 아이돌인 만큼 최소한의 본분은 해야 해요. 이른바 프로 정신이요.”

“프로 정신...”

프로 정신이라는 말에 치하야가 되뇌었다.

“그러니 제발 부탁드릴게요. 전 치하야 양을 톱 아이돌로 키워야 하는 프로듀서예요. 제 입장도 고려해주세요.”

“노력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이런 말이라도 차라리 솔직하게 대답해주는 것이 고마웠다.

그래도 어색한 분위기를 풀고자, 프로듀서는 클래식 음악 CD를 하나 넣었다. 둘의 공통적인 관심사인 음악이라면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조용하고 고풍스러운 음악이 천천히 흘러나왔다. 아니나다를까 치하야는 음악에 관심을 나타냈다.

“프로듀서, 지금 나오는 음악은 뭔가요? 연주가 아름다워요.”

“아, 이거 하이든의 72번 교향곡 라장조예요.”

“큿...”

갑자기 분한 반응을 하는 치하야를 보고 프로듀서는 다급히 음악을 껐다. 예상치 못한 치하야의 반응에 프로듀서는 혼란스러워했다. 그리고 치하야가 차에서 내릴 때까지 두 사람의 대화는 없었다. 이렇게 대화마저 줄어드는 갑갑한 일상이 계속 반복되었다.

아침 스케쥴이 빈 날, 프로듀서는 타카기 사장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그래, 키사라기 군과는 어떠한가?”

“치하야 양은 자기 자신을 아이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프로듀서는 한을 푸려는 듯 그동안의 일을 쭉 풀어놓았다. 타카기 사장은 그런 프로듀서의 말을 끊지 않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끝까지 들었다. 그런 타카기 사장의 태도도 자기를 약 올리는 것 같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자네나 키사라기 군이나 아직까진 서로에게 서툰 모양이야.”

“무슨 뜻입니까?”

“먼저, 자네는 아이돌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급히 프로듀서는 기존에 생각하던 아이돌에 대한 생각을 말하였다.

“대중들에게 외모, 노래와 춤, 말솜씨, 태도 등으로 즐거움을 주는 직업이라 생각합니다.”

“틀린 것은 아니네만 그것은 아이돌의 한 부분일 뿐이지.”

“그렇다면 아이돌은 대체 무엇입니까?”

“무엇이 되었건 한 아이의 본연 그대로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라네. 프로듀스라는 건 아이돌을 만드는 것이 아닐세. 그 아이의 본연을 가꾸는 것이라네. 자네가 말한 것들은 그 본연의 일부라는 거지.”

“본연 그대로의 모습이라...”

“내가 키사라기 군을 이 일이 처음인 자네에게 맡긴 이유 중 하나는 자네가 생각하는 아이돌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기 위함이기도 했네. 하지만 자네나 키사라기 군이나 무언가 다급해 보이는군.”

‘설마 눈치챘나?’

순간 가슴이 뜨끔했지만 일단 둘러댔다..

“제가 생각했던 아이돌의 이미지와 치하야 양이 매우 달라서 그렇습니다.”

“키사라기 군이 다른 아이들과는 많이 다르긴 하네. 그러나 아이돌로서 틀린 것은 아니야.”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키사라기 군을 직접 스카우트했으니 잘 알지. 노래를 듣는 순간 느낌이 팟! 하고 왔거든.”

‘또 그놈의 느낌 타령.’

어느새 타카기 사장을 불신하는 것 같은 프로듀서였다.

“다 자네도, 키사라기 군도 처음이라 그런 것일세. 앞으로 자네에게 다른 아이돌들의 프로듀스도 맡길 것이지만, 당분간은 키사라기 군의 프로듀스를 계속 맡아주게. 본연을 봐라,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이구먼.”

“그럼 치하야 양의 프로듀스에 다시 정진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수긍하고 나가려는 프로듀서에게 타카기 사장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두 사람 모두도 무엇이건 늘 차분하게, 느긋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게.”

알 듯 모를 듯한 소리만 듣고 나온 프로듀서의 마음은 되려 더 복잡해졌다. 하지만 선배한테 타카기 사장이 전설적인 프로듀서였다는 얘기를 들은 터, 좀 더 믿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프로듀서는 번번이 한계에 부딪혔다. 관계자들은 수많은 아이돌이 즐비한 지금, 잘 웃지도 않는 무명 아이돌을 굳이 쓰려 하지 않았다.

‘이거 봐, 아이돌에게 노래 실력이 전부 다는 아니라니까.’

이런 생각이 굳어진 것도 한 방송 관계자에게서 치하야 말고 차라리 다른 아이돌을 섭외하겠다는 말을 들은 직후였다.

섭외에 열중하다 보니 전적으로 치하야에게만 붙어 있을 수 없었다. 퇴근할 때도 바래다주지 못하기 시작하며,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더욱 줄어들었다.

저녁까지 사무실에서 섭외 전화를 돌릴 때면 치하야는 하루카와 같이 퇴근하곤 했다. 자신에겐 차가운 치하야가 하루카와는 어울리는 것을 보며 신기하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동갑내기라서 친하긴 한가 보네.’

여전히 자신에겐 차갑기만 한 치하야에 대한 섭섭함, 그런 치하야에게도 다정한 하루카에 대한 호기심 등을 한 구석에 치워두며 프로듀서는 다시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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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하야를 분하게 만든 하이든의 72번 교향곡 라 장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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