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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하게 느긋하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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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21, 2017 21:04에 작성됨.

조용한 레슨실에서 치하야가 홀로 발성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 치하야를 보고 자기도 다시 저렇게 노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목을 어루만지며 그런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인지 아직은 어린 치하야가 자기 뒤를 따르지 않았으면 했다.

‘우선은 프로듀스에 집중하자. 그러면 차차 관계도 가까워질 테고 창법도 고쳐줄 수 있겠지.’

잠깐 쉬면서 치하야는 프로듀서가 사온 도시락을 먹었지만, 그마저도 얼마 먹지 않았다. 간에 기별이나 갔을지 걱정될 정도였다.

트레이너가 오면서 레슨이 시작되자, 프로듀서는 레슨실 구석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태블릿 PC를 꺼내 치하야에 대한 대중들의 여론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765 프로에서 배포한 보도 자료와 데뷔곡 ‘파랑새’를 다룬 기사들 밖에 없었다. 신인에 아직 무명인 아이돌이다 보니 기사가 많진 않았다.

기사 검색을 마치고 여러 커뮤니티와 SNS 반응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한 온라인 동영상 사이트에 치하야의 라이브 영상이 두어 개 정도 올라와 있었다. 얼마 안 되는 댓글이나 SNS 에서 치하야의 노래 실력을 극찬하고 있었다.

- 이런 아이돌이 무명이라고? 가요계는 이런 흙 속의 진주도 몰라보나?

- 얼음 공주 같아 보이지만 그래도 풋풋해 보이는 게 귀여워.

- 엄청 높게 부른다. 저렇게 노래 부르면 목 안 나갈까?

하지만 꼭 긍정적인 반응만 있던 건 아니었다.

- 얼마 전 들었던 라디오 방송에 나온 그 아이돌이 애였구나. 무슨 음악 평론가인 줄.

- 얘도 765 프로라며? 같은 소속사인 류구코마치랑은 이미지가 정반대야. 잘 웃지도 않고 고리타분해보여. 이젠 이런 귀엽지도 않은 애들까지 아이돌을 하는구나.

프로듀서는 댓글의 핵심 내용을 하나하나 정리했다. 아이돌은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존재였다. 이러한 반응 속에 담긴 대중의 기호를 공략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 노래 잘 부르는 건 인정할 만해. 그런데 듣는 사람까지 불편해지는 건 나만 그래?

이 댓글 역시 프로듀서가 치하야의 노래에서 느낀 바와 비슷했다. 노래에 감정을 지나치게 담으면 듣는 사람도 부담스럽고 불편해진다. 푸른 차가움이 흠씬 묻어난 치하야의 노래가 그러했다.

프로듀서 또한 한창 오디션을 보러 다닐 때 이런 지적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엔 실력 부족으로 여기며 더욱 연습에 매진했다. 그리고 큰 아픔을 경험해봤기에 치하야의 창법을 꼭 고쳐야겠다고 다짐했다.

레슨 트레이너가 퇴근하고 날이 저물었지만 치하야의 연습은 끝나지 않았다. 노래 연습 말고도 악보를 찬찬히 살펴보거나 음악을 들으며 따라 불러보기도 했다. 그런 치하야의 진지한 모습을 보면서 프로듀서는 노래에 대한 열정이 정말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실력도 출중한데 노력도 하니 굳이 자기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달빛이 드리워진 저녁이 다 되어서야 치하야의 노래 연습이 끝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수고 많았어요.”

연습 동안 잠깐 편의점에 나가서 사온 음료수를 치하야에게 주었다. 치하야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 감사를 표했다.

“계속 여기 계셔도 괜찮습니까? 다른 일은요?”

“저야 당분간은 치하야 양의 담당 프로듀서니깐요. 그럼 같이 저녁이라도 먹을까요?”

“아닙니다. 바로 집으로 가겠습니다.”

프로듀서의 차를 타고 귀가하던 치하야는 중간에 잠깐 내려 편의점에서 저녁거리를 샀다. 프로듀서가 한눈에 보기에도 봉투는 가벼워보였다. 아까 도시락도 그렇고 평소 식사량이 적은 것 같았다.

‘아무리 외모에 많이 신경 쓰는 아이돌이어도 너무 적게 먹는 게 아닌가?’

여전히 두 사람 사이에는 적막만 가득했다. 아파트 앞에 내린 치하야는 정중히 인사를 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은 학교에 가는 날이죠? 그럼 수업 끝나는 시간 맞춰서 기다릴게요.”

“아니, 그러실 필요는…”

“아까도 말했지만, 치하야 양의 담당 프로듀서잖아요. 당분간은 함께 다니자고요.”

“알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치하야가 들어가는 모습을 보자 프로듀서는 참아온 한숨을 내뱉었다. 갑갑한 마음에 보라색 넥타이를 풀렀다. 그동안 본 아이돌과 달라도 너무 다른 치하야와 가까워지는 건 보통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체 저 아이를 타카기 사장은 왜 자신에게 맡긴 걸까?

프로듀서는 난감했다. 프로듀서 준비를 늦게 시작한 지라 일반적인 음악 프로덕션에 바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다 765 프로로 입사한 것은 아이돌 프로듀서인 선배의 추천 때문이었다.

‘765 프로가 규모는 작아도 한때 전설의 프로듀서셨던 타카기 사장님이 계신 곳이야. 그리고 아이돌 업계도 큰 시장이고 음악과 관련이 없는 건 아니잖아. 거기서 한 4년은 경험 쌓는다 생각하고, 성과도 어느 정도 낸다면 대형 프로로 이직하기 쉬울 거야.’

얼른 성과를 내야 하는데 하필 첫 담당 아이돌이 얼음장과도 같으니 마음만 조급해졌다.

심란한 마음속과 뒤죽박죽인 머릿속을 그대로 안고 집에 도착한 프로듀서는 컴퓨터를 켰다. 캔맥주를 하나 꺼내어 태블릿 PC로 정리해둔 내용을 토대로 프로듀스 계획을 짰다.

리츠코의 말에 따르면 치하야는 춤 실력도 출중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노래나 춤 레슨에 시간을 많이 할당할 필요가 없다 생각했다. 대신 창법은 조금 관계가 가까워지면 고쳐주기로 했다.

치하야의 데뷔곡 ‘파랑새’는 별다른 홍보가 없었지만, 아래에서부터 차근차근 순위가 올라가는 등 선전하고 있었다. 가창력을 발휘활 기회인 페스티발, 오디션, 라이브 등은 정 안되면 대학 인맥을 동원해서라도 섭외해오면 되니 큰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대중의 기호는 워낙 빠르게 바뀐다는 점을 떠올렸다. 지금의 뜨거운 인기가 내일은 불씨도 남기지 못하고 사그라지는 곳이 아이돌 업계였다.

지금의 인기를 유지하면서 인지도를 단박에 올리려면 행사나 방송 출연이 필요했다. 그 필요성을 느낀 프로듀서는 아이돌 출연 방송들을 분석하며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무실에서 코토리와 리츠코에게 일을 배우던 프로듀서는 치하야가 다니는 여고 앞에 차를 대고 치하야를 기다렸다. 프로듀서는 차에 기대어 태블릿 PC를 든 채 여전히 프로듀스 계획을 짜고 있었다. 잠시 후 교문으로 학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나치는 여고생들이 훤칠한 키에 정장을 차려입은 프로듀서를 보고 수군거리며 지나갔다.

저 멀리 이어폰을 귀에 꽂고 악보를 보면서 걸어오는 치하야가 보였다. 푸른 차가움만 걷어낸다면 치하야도 영락없는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겉보기엔 저렇게 평범한 여자아이가 그런 푸른 차가움을 안고 있다니.’

교문 밖으로 나오는 치하야를 향해 프로듀서가 손을 들었다.

“안녕하세요, 프로듀서.”

프로듀서를 알아본 치하야는 정중히 인사하고 조용히 차에 탔다. 프로듀서가 차를 출발시켰을 때도 귀에서 이어폰을 빼지 않았다.

“저기 치하야 양.”

불러봤지만 이어폰을 꽂은 채 창밖만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반응이었으니 프로듀서는 운전에 집중했다. 라디오 방송 출연이 끝나고 당분간 스케줄이 없어 레슨실로 향하고 있었다.

레슨실에 다 다를 때가 되어 치하야는 이어폰을 뺐다.

“무슨 음악을 듣고 있었어요?”

“오페라 ‘투란도트’에 나온 ‘아무도 잠들지 못하리(Nessun dorma)’를 반복해서 듣고 있었습니다.”

프로듀서도 익히 아는 오페라 아리아였다. 먼 옛날, 중국의 투란도트 공주는 세 가지 수수께끼를 내어 맞춘 사람과는 결혼을, 맞추지 못하면 처형했다. 그동안 수수께끼를 모두 맞춘 사람이 없었고, 맞추지 못한 사람이 처형당하는 어느 날이었다. 타타르 왕국의 왕자 칼라프는 처형장에 갔다가 투란도트 공주에게 한눈에 반하고, 직접 도전하여 투란도트 공주의 모든 수수께끼를 맞췄다. 하지만 결혼을 거절하는 투란도트에게 칼라프는 내일까지 자신의 이름을 맞히면 공주가 바라는 대로 직접 목숨을 끊겠다며 역으로 수수께끼를 낸다. ‘아무도 잠들지 못하리’는 칼라프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며 투란도트와 결혼이 확정될 아침이 어서 오기를 바라며 부른 아리아였다.

“오페라 아리아라, 역시 장르를 가리지 않고 듣네요.”

“네.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창법, 그리고 오케스트라 연주와 어떻게 조화되는지를 위주로 듣고 있었습니다.”

“치하야 양이 정말 음악을 좋아하긴 하나 봐요. 음악 듣는 데 열중하느라 불러도 대답하지 않더군요.”

프로듀서는 가볍게 던진 말이었지만 깜짝 놀란 치하야가 받은 무게는 무거웠다.

“죄, 죄송합니다. 음악 들을 땐 그대로 빠져서 집중하다 보니...”

“괜찮아요. 그만큼 치하야 양이 정말 음악을 좋아한단 생각이 들었으니깐요.”

치하야의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푸른 차가움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치하야가 조금 달라 보이긴 했다.

“오늘도 레슨실에서 저녁까지 연습할 건가요?”

“예. 오늘은 학교도 다녀왔으니 어제보다 더 오래 연습할 계획입니다.”

“그럼 오늘은 끝나고 같이 저녁 먹죠. 앞으로 프로듀스 계획도 얘기 나눌 겸.”

자고로 사람이 가까워지려면 밥은 한 번 같이 먹어야 한다는 것이 프로듀서의 생각이었다.

“전 정말 괜찮습니다.”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업무상 파트너끼리의 미팅이에요. 치하야 양의 연습 시간을 보장하기 위해선 연습이 끝난 뒤에 얘기를 나누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요.”

“그럼 알겠습니다.”

치하야가 연습하는 동안에도 프로듀서는 태블릿 PC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코토리가 보내준 자료를 참고해가며 직접 정리한 내용과 합치기 시작했다.

앞서 말한 대로 치하야의 노래 연습은 어제보다 늦게 끝났다. 치하야는 식사를 한 번 더 거절했지만, 일의 연장이라는 말에 프로듀서를 따라 한 우동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엔 단아한 분위기의 어린 여자아이 한 명만이 우동을 먹고 있었다. 프로듀서는 튀김 우동을 시켰고, 치하야는 고심 끝에 그냥 우동을 골랐다.

“자, 한 번 살펴봐요.”

치하야는 프로듀서의 태블릿 PC를 받아 들었다. 거기에는 프로듀서가 코토리의 자료와 직접 찾은 자료를 토대로 정리한 방송 프로그램, 행사 목록이 있었다.

“이건 뭐죠?”

“치하야 양의 ‘파랑새’의 인기가 느리긴 하지만 나날이 높아지고 있어요. 따라서 인지도를 올리기 위한 프로듀스 계획을 짜 봤어요. 행사랑 방송을 잘해낸다면 치하야 양의 이름을 널리 알리면서 톱 아이돌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치하야는 다시 태블릿 PC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왜 음악과 상관없는 일정들이 있죠?”

“아이돌의 인지도를 높이는데 가장 좋은 것이 방송과 행사예요. 노래만으론 아이돌의 매력을 보여주기 힘드니까...”

“전 출연하기 싫습니다.”

단호한 거절과 함께 치하야는 태블릿 PC를 돌려주었다.

“치하야 양. 아이돌이라면 노래하는 곳이 아니라도 이런 행사나 방송에도 나가야 하는 법이에요.”

“전 아이돌이 아니라 보컬리스트에요. 음악과 상관도 없는 이런 스케쥴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간다 해도 다른 아이돌처럼 웃으면서 애교를 부릴 생각도, 자신도 없어요.”.

“아직 치하야 양이 익숙지 않아서 그래요. 경험도 쌓아보고 이미지 트레이닝까지 한다면 잘해낼 거로 생각해요.”

“하지만... 노래와 상관없는 이런 스케쥴은...”

계속 주저하는 치하야가 답답했다. 대답을 기다리면서 무심코 우동을 먹고 있던 여자아이를 바라봤다. 프로듀서와 눈이 마주친 아이는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딱 보기에도 중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는 자신과 치하야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듣고 있던 모양이었다.

‘뭐, 저 정도 나이라면 아이돌에 관심이 많겠지.’

하지만 바로 앞에 마주한 치하야는 아이돌이지만 자기가 아이돌임을 부인하고 있었다. 여전히 주저하는 치하야를 설득하기로 했다.

“비록 치하야 양 말대로 음악과는 상관없는 스케쥴이긴 해요. 하지만 인지도가 높아진다면 노래할 기회도 많아질 거에요.”

“그게 무슨 상관이죠?”

“행사랑 방송을 많이 할수록 많은 사람이 치하야 양을 알게 되고, 자연스럽게 노래까지 찾아보려 할 테죠. 그러면 노래가 많이 팔리면서 팬도 늘어나고, 그만큼 많은 라이브 무대에 설 수 있어요. 그러니 높은 인지도는 곧 톱 아이돌이 되는 길이에요. 아시겠어요?”

“그러면 노래 실력으로 저를 알리고 평가를 받아야죠. 음악과 전혀 상관없는 이런 방송을 나와야 노래할 기회가 생긴다니, 전 이해 못 하겠어요.”

프로듀서는 치하야에게 왜 아이돌에게 인지도가 중요한지 연예 시장의 원리를 일장 강의할 수 있었다. 인지도는 곧 돈이고, 아이돌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그렇기에 많은 아이돌과 프로듀서가 인지도를 높이려 지금도 기를 쓰고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얘기를 늘어놔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노래에 대한 열정만큼 자기가 아이돌이 아니라 생각하는 치하야의 생각이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결국, 프로듀서는 회유책으로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물론 치하야 양이 노래하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신경 쓸게요. 그리고 행사나 방송도 노래도 같이 할 수 있는 스케쥴 위주로 찾아볼게요. 약속할게요.”

“알겠습니다... 그 조건은 반드시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노래라는 얘기에 마지못해 치하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담당 아이돌을 어르고 달래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려던 참에 때마침 주문한 우동이 나왔다. 프로듀서는 참은 배고픔을 푸려는 듯 허겁지겁 우동을 먹어 치웠다. 하지만 치하야는 얼마 먹지 않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더 먹어요. 많이 배고플 텐데.”

“괜찮습니다. 이런 음식은 열량이 높아서 이 정도만 먹어도 충분합니다..”

마침 먼저 계산하고 나가던 여자아이는 아쉬운 눈빛으로 치하야와 우동 그릇을 번갈아 쳐다보며 가게를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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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하야가 듣고 있던 '아무도 잠들지 못하리'는 흔히 '공주는 잠 못 이루고'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공주는 잠 못 이루고'는 오역된 제목이라더군요. 저도 이번에 찾아보면서 처음 알았습니다.

그리고 우동 가게에 나온 우동 먹던 여자아이는 밀리마스도 아시는 분이라면 아마 누군지 예상 가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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