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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리티P 시리즈] (Re)Write─덮어 쓰는, 혹은 다시 쓰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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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20, 2017 01:54에 작성됨.

------(Re)Write─덮어 쓰는, 혹은 다시 쓰는. (3) 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Re)Write─덮어 쓰는, 혹은 다시 쓰는. (4)

 

 

 

“정말 괜찮겠어? 월터를 소개시켜줘도.”

-물론, 그러려고 데려 온 사람이야. 이 참에 그냥 다 가르쳐 주려고.

“그녀가 널 떠나버리면?”

-……그건 그때 생각해야지. 이미 너무 깊게 들어와 버렸어.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거든.

“너…….”

-……괜찮아. 각오는 이미 했으니까. 부탁한다.

“……알았어."

 

휴대전화를 떼어내면서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바보야."

 

 

 


 

 

 

“아가씨가 윌리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하던 그 아가씨야?”

 

캐서린이 통역해준 그의 첫 말이었습니다.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반갑군. 난 월터 그레이시라고 해.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윌리랑 같은 팀에서 뛰었지.”

“타카가키 카에데라고 합니다.”

“반가워, 미스 타카가키.”

 

그와 악수를 나누고 다시 자리에 앉자, 월터 씨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그나저나 뜻밖인걸. 이제 와서 나한테 윌리에 대해서 물어보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이상한 일인가요?”

“이상한 건 아니지만……뭐, 그 녀석이 저지른 짓은 숫자로 늘어놓는 기록으로는 보기 힘든 것도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는 가지고 온 커다란 가방 속에서 자그마한 상자 하나를 꺼냈습니다. ‘자그마한’이라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덩치가 산만했던 월터 씨의 기준이고, 제 기준으로는 충분히 커다란 상자였어요. 제 머리 하나 정도는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습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마치 고급 우표처럼 하나하나가 아크릴 케이스 안에 들어가 있는 카드였습니다. 무슨 카드였냐 하면, 다양한 포즈로 찍힌 야구선수의 사진과 간략한 프로필이 적혀 있는 카드였습니다. 어릴 적, 또래 남자 아이들이 모으곤 하던 것들이었지요. 물론 그 카드에 그려진 것은 모두 프로듀서의 선수 시절 모습이었습니다. 흰 바탕에 파란 줄무늬가 그려진 유니폼을 입고 있는 당시의 프로듀서는 잘 봐 줘야 중학생 고학년 정도로 보이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저 때 나이가 20살 언저리였으니, 동안은 동안이네요.

 

“언젠가 이런 기회가 되면 이걸 꼭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 내 비장의 컬렉션이거든.”

 

하나하나 카드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늘어놓는 월터 씨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습니다. 그 미소는 마치 그 시절, 남자 아이들의 미소와도 비슷했습니다. 상자 속에서 카드를 모두 꺼내놓은 뒤, 월터 씨는 턱을 괴면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

 

 

선수의 시선으로 바라본 그 녀석은, 그야말로 천재라는 단어 그 자체인 녀석이었어. 아니, 천재를 넘어선 그 무언가였지.

단순히 공을 던지는 것이라면 그 녀석보다 잘 던지는 사람도 있었지. 더 빠른 공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고, 더 예리하게 공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어.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 녀석이 압도적이었던 건 ‘육체’였다고 생각해. 한 시즌에 약 180경기 정도를 하게 되는데, 그 중 100경기에서 110경기 정도를 뛰고도 아무런 탈이 안 생긴다는 건, 정말로 그 육체에는 신이 깃들어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지.

선수로써의 스타일이라고 한다면……그래, 데이터를 무척이나 중요시하는 타입이었어. 녀석은 쉬는 날이나, 자기 등판일이 아닌 날에는 하루 종일 전력분석실에 틀어박혀 비디오를 돌려보곤 했거든. 늘 가지고 다니던 두툼한 수첩에는 상대 투수에 대한 정보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지.

오죽했으면 우리 팀 전력분석원들 사이에서도 '윌리의 진짜 적들은 상대 투수가 아니라 상대 팀의 분석원들이다'라는 이야기가 돌 정도였겠어?

응? 왠지 알 것 같다고?

 

……어디보자, 내가 그 녀석, 윌리 존슨이라는 사람을 처음 만난 건 2003년이었어. 녀석은 신인 드래프트 당시에만 하더라도 메이저리그의 30개 구단이 군침을 뚝뚝 흘리던 특급 중에서도 초특급 신인이었거든.

이게 그 녀석의 루키 카드야. 아, 루키 카드가 뭐냐면 메이저리그로 처음 올라오는 선수의 이름으로 발급되는 카드를 말해. 나온 당시에는 헐값인데, 이게 그 선수가 얼마나 뜨느냐에 따라서 가치가 천차만별이거든.

여기 밑에 숫자 보이지? 31/50이라고 된 거. 이건 루키 카드 주제에 딱 50장만 나온 카드였어. 첫 카드 주제에 한정발매. 그 정도로 업계가 그에게 걸고 있는 기대가 컸다는 말이 되지.

지금은 뭐……나도 이거 한 장 구하느라 무지 애먹었거든. 이거 한 장이 1200달러짜리야. 옥션에서 내가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하핫.

흠, 흠. 아무튼, 이렇게 윌리는 시작부터 전국의 메이저리그 팬들에게서 관심을 듬뿍 받으면서 데뷔했어. 130년을 넘는 야구 역사에 전무후무한 양손투수. 반쪽 짜리 스위치 투수도 아니고, 왼손 오른손을 번갈아 쓸 수 있는 괴인 중의 괴인이었지. 그 특이성 때문에 사무국에서도 무척 신경을 썼던 모양이야. 선수 등록을 왼손, 오른손으로 한번씩 해야만 했거든. 라인업에도 이름을 따로 써넣어야 했고.

근데 뭐, 결과적으로는 잘한 일이 되었지. 그 반쪽짜리 기록으로도 상이란 상은 싹싹 긁어먹었는데 기록 통합이라도 시켰어봐.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졌을거야.

 

윌리의 데뷔전은 어땠냐고? 말도 마. 끔찍했지. 아, 좋은 뜻이 아니야. 안 좋은 뜻이지.

신인 드래프트에서 시즌 시작까지 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마추어를 폭격하던 초특급 신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운드에는 평범한 고딩 하나가 서 있었어. 거기다 하필이면 상대는 당대까지만 하더라도 악의 제국 소리를 듣던 깡패 중의 깡패 브롱스였어. 브롱스와 메트로의 경기는 서브웨이 시리즈라고 하는 라이벌 매치인데, 소문이 무성한 특급 신인을 보러 갔던 팬들 앞에서 그 녀석은 죽도록 얻어맞았어. 1이닝도 못 채우고 15점을 내리 얻어맞았거든. 뭐? 안 믿겨져?

음……봐봐, 이게 윌리의 기록표거든. 2003년에 ERA 135.0 보이지? 이게 그 한 경기의 기록이야. 그 경기 이후로 곧장 마이너로 굴러떨어져서 1년하고도 4개월동안 마이너에 처박혀 있었지. 듣자 하니 마이너에서 훈련하다가 어깨까지 상했었다고 하더군. 그 때까지만 해도 다들 끝났다고 생각했지. 아마추어에서 날아다니다가 빅리그에서 두들겨 맞는 신인이 한둘이 아니었거든.

 

그런데 그 녀석을 다시 만났을 때, 녀석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어. 어디보자……그래, 이 카드로군. 이건 ‘올타임 레전드 시리즈’라는 녀석인데, 어떤 선수가 대기록을 세울 때마다 한 장씩 나오는 카드야. 딱 31장밖에 안 나온 레어 중에서도 레어지. 이것도 밑에 보면 31번이라고 적혀 있지? 이건 이게 제일 비싼 거야. 3천달러나 주고 샀거든.

아무튼, 이게 윌리의 두 번째 빅리그 경기였어. 2004년 올스타전이 끝난 8월이었을거야. 팀은 9연패를 찍고 10연패를 걱정하던 시기였고, 경기 상대는 자신에게 굴욕적인 기록을 안겨준 바로 그 브롱스였지. 그 때의 브롱스는 2003년 월드시리즈까지 제패하고 그야말로 기세가 잔뜩 올라 있던 녀석들이었는데, 그 놈들은 놈들대로 윌리가 올라온다고 잔뜩 신이 나 있었어. 한 번 크게 이겼으니까 방심할 만도 하지. 하지만 놈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건, 다시 돌아온 그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는 거야.

선발 라인업이 발표되고, 경기가 시작되고, 윌리가 마운드에 올라갔어. 관중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에게 야유를 쏟아냈지. 하지만 그 사람들도 아무도 결과를 예상하지는 못했을 거야. 예상했다면 야유가 아닌 환호를 보냈겠지.

이 카드를 보면 테두리에 “퍼펙트”라고 적혀있지? 이건 퍼펙트 게임 기념 카드야.

메이저리그 전체로 따지자면 17번째, 팀 기록으로는 구단 역사 100년을 통틀어 처음으로 나온 퍼펙트 게임이었어. 자신을 몰락시킨 팀을 상대로 거둔 승리이자 팀의 연패를 끊는 승리였고, 나아가서는 윌리 존슨이라는 전설의 서막을 여는 게임이었지.

 

음,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캐서린이 말했다시피 난 현역 시절에 윌리의 라이벌 소리를 들었지만, 정확하게는 ‘왼손’쪽 라이벌이었어. 난 좌완이니까. 그래서 메트로로 이적하면서 등번호를 16번으로 바꿨어. 31번의 반이라도 따라가자 싶어서. 그럼 오른손도 있냐고? 당연히 있지. 지금 메트로의 구원투수 중에서 톰 마르티네스라고 나랑 비슷하게 놀던 녀석이 있는데 걔도 아마 올해가 마지막일거야.

하하, 별 다른 건 아니고, 나도 그 녀석도, 황새를 따라가느라 가랑이가 제법 찢어졌거든.

 

그리고 어디보자……이 카드인데. 사진이 조금 특이하지?

미리 말해두지만, 이거 그라운드 맞아. 무대 위에서 찍은 게 아니고.

이건 내가 브롱스에서 뛰고 있던 마지막 시즌인 2004년 월드 시리즈 4차전때 나온 카드야. 어찌어찌 월드 시리즈까지 올라오기는 했지만 메트로의 타자들은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었지. 1,2,3차전. 그것도 2, 3차전은 윌리가 선발로 나섰지만 결국 우리가 이겼어. 상대의 수비실책으로 어떻게 나온 1점을 아득바득 끌고 가서 이긴 거였지만 그래도 그 미쳐 날뛰던 윌리를 상대로 이긴 건 이긴 거지. 그리고 4차전이 시작됐어. 우리로써는 한 경기만 더 이기면 우승이었고, 메트로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승부를 끌고 갈 필요가 있었지. 6차전까지만 끌고 가면 4일을 쉰 윌리가 다시 만전의 태세로 올라올 수 있으니까.

4차전 브롱스의 선발은 나였고, 메트로의 선발은 지금은 없는 존 클랜스라는 아저씨였어. 나름 잔뼈가 굵은 백전노장이었는데, 은퇴 직전이라 그런지 아니면 날이 추워서 그런지 그날 따라 영 시원찮았어. 1회에만 홈런 세 방에 안타 열 대를 맞으면서 12점이나 내 줬거든. 다들 끝났다고 생각했지. 경기장 안쪽에서는 미리 샴페인까지 준비해두고 있었고.

그런데 2회 초, 우리 공격이 시작될 때 갑자기 경기장의 조명이 일제히 꺼지는 거야. 무슨 일인가 싶어서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스포트라이트 하나가 켜지면서 마운드로 터덜터덜 걸어오는 한 사람을 비췄지.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응원석의 스피커에서 녀석의 등장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어.

난 순간적으로 내가 헛걸 봤나 싶었지.

맞아, 그건 윌리였어. 그 전날과 전전날, 아무리 본인이 왼팔 오른팔을 번갈아 쓴다지만 도합 230개가 넘는 공을 던져놓고도 멀쩡한 괴물이 마운드 위에 서 있었어.

어떻게 됐냐고?

뭐, 이런 얘길 꺼내는 걸 보면 대강 짐작은 하겠지만, 우리가 졌어.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도 그는 9회까지 우리 타자들을 꽁꽁 묶어놨지. 에이스가 그렇게까지 분투하는데 정줄 놓고 있으면 프로가 아니잖아? 우리가 윌리한테 완전히 틀어막혀 있던 그 사이 메트로의 타자들이 서서히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고, 한 점씩 한 점씩 내주다가 결국에는 9회말 끝내기 홈런에 어이없게 역전패를 당했어.

 

뭐……팀도 졌고 나도 완패했던 날이었지만, 이 날의 맞상대 이후로 나는 녀석의 팬이 됐어. 그 녀석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직접 내 몸으로 알아버린거야. 지금도 가끔 그 때가 떠올라.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마운드로 올라오는 그의 모습과 쩌렁쩌렁 울리는 그의 등장곡.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군.

결국 그 경기로 브롱스는 기세가 꺾였고, 3:0까지 몰아붙였던 우리는 3:4로 그림 같은 리버스 스윕을 당하면서 우승을 놓쳤어. 이게 메트로의 창단 100년만의 첫 번째 우승이었고, 이 날의 승리로 윌리는 단번에 뉴욕의 연인이 되었지. 반쪽짜리 시즌을 보낸 루키에게 상을 몰아서 줄 수는 없다는 논리로 페넌트레이스 MVP는 못 받았지만, 그 반쪽짜리 활약으로도 신인왕에 월드 시리즈 MVP, 올해의 선수상까지 사실상 신인이 받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상은 다 가져갔지.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전문가들이나 팬들이나 다들 신인이 반짝하는 거라고, 내년이 되면 소리소문 없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생각을 엿먹이기라도 하듯, 윌리는 계속해서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했어. 2004년부터 2007년까지, 4년동안 투수가 받을 수 있는 상이란 상은 모조리 싹 쓸어 담으면서 리그 최약체였던 뉴욕 메트로라는 팀을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강의 구단으로 바꿔 놨지. 팀 최다승을 갈아엎고, 최고승률도 갈아엎고, 아무튼 뭐 많이 갈아 엎었어.

 

한 사람으로 그게 어떻게 되겠냐 싶겠지만, 정말로 그걸 혼자서 해 냈단 말이지. 일단 그가 올라왔다 하면 최소한 패전은 안 했거든. 근데 그런 괴물이 1년 160경기 중에서 100경기를 나온다고 생각해 봐. 어떻겠어? 단적인 예로, 어디보자……그래, 이거군. 이 카드는 2006년 시즌의 마지막 경기 다음 날 나온 카드야. 이거 뒷면에 보면 주위에서 이 녀석을 뭐라고 불렀는지 알 수 있지.

The Prime ENEMY No.0.

공공의 적 0순위라는 뜻이야. 무척 오만한 별명이지만 그 누구도 이 별명에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그를 이렇게 부르는 데 아무런 반박을 하지 않았어.

내로라하는 모든 선수들이 그를 쓰러뜨리기 위해 달려들었지. 나도, 톰도, 이제는 명예의 전당에 올라간 수많은 선배들도. 하지만, 결국 그를 정상에서 끌어내리는 건 불가능했어.

……아니, 불가능한 건 아니었군. 그래, 결과적으로는 끌어내리게 된 셈이었으니.

 

 

***

 

 

“…….”

 

말을 멈추고, 월터 씨는 자신의 들고 있는 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캐서린이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그는 들고 있던 카드를 내려놓았습니다.

 

“아, 미안해. 이걸 보고 있자니까 또 괜히 짠해져서. 이건 2007년 월드 시리즈의 마지막 카드인데, 윌리의 그림이 들어간 것들 중에서는 가장 마지막으로 나온 카드야.”

 

그가 내려놓은 카드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르게 생긴 카드였습니다. 도금이 아닌 금속 재질로 만들어진 듯한 광택으로 반짝이는 그 카드는 방금 전까지 그가 보여준 것들과는 달리 흑백으로 인쇄가 되어 있었습니다. 흑백이었기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카드 속의 프로듀서가 입고 있는 유니폼에는 얼룩덜룩한 무늬가 묻어 있었습니다.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드는 무늬였습니다.

그 카드를 보는 순간 저는 무언가를 직감했습니다. 아직 무언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말이죠.

 

“……또 다른 이야기가 있나 봐요?”

“…………있어.”

 

제 질문에, 한참동안 카드를 바라보던 월터 씨는 한층 더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이건, 2007년 월드 시리즈 7차전때 나온 카드거든.”

 

2007년의 월드 시리즈. 그것은, 저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지금의 제가 이 곳에 있도록 만들어 준, 그리고 제가 그 사람을 만나게 해 준 사건이었으니까요.

 

“……원래 이 경기는, 내가 나가야 하는 경기였어.”

 

저는 월터 씨를 바라보았습니다. 잔뜩 몸을 움츠린 채, 눈을 내리깔며 이야기를 하는 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

 

 

아직도 눈에 선하군. 2007년 11월 2일이었지. 그 해의 월드 시리즈 7차전은 원정 경기였어.

이른 아침에 호텔에서 출발해서 경기장으로 향하는데, 우리 투수들이 타고 있던 버스가 사고를 당했지. 충돌 사고였는데, 다행히도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어. 다만 다들 어디 한 군데씩은 맛이 가 있었지. 큰 충격에 갑자기 근육에 담이 온 사람도 있고, 인대가 늘어난 사람도 있었어.

나도 다쳤냐고? 아니, 나는 멀쩡했지. 오른손이 상태가 조금 안 좋긴 했지만, 난 어차피 좌완이었으니 오른손은 별 상관이 없었어. 충분히 던질 수 있는 상태였지.

그래, 던질 수 있는 상태였어…….

……하지만, 나는 몸을 사렸어. 2005년에 메트로로 이적하면서 2008년 시즌까지만 마치면 남은 연봉을 포기하고 자유계약을 할 수 있는 시기였거든. 옵트아웃이라고 하는 건데, 어찌되었든 나는 거금을 벌고 싶었으니까, 어떻게든 몸을 아끼려고 했지.

나는 프로의 자존심을 버린 거야. 돈 때문에.

 

프런트 쪽에서는 위원회에 일정 연기를 요청했지만 씨알도 안 먹혔지. 감독이랑 코치는 완전히 발등에 불이 떨어졌어. 라인업을 짜야 하는데, 선발에 후보 인원들까지 죄다 컨디션이 말짱 꽝이니, 감독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겠지. 그런데, 거기서 한 사람이 손을 들고 나선 거야.

윌리였어.

그 전에도 대단했지만 2007년의 그는 더 대단했지. 페넌트레이스를 거쳐 디비전 시리즈, 챔피언십 시리즈, 월드 시리즈까지 180여경기 중에서 120경기를 홀로 책임졌어. 신이 깃들었다는 녀석의 어깨에서 피멍이 빠지는 날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자신을 깎아 가면서 그는 주전멤버의 줄부상으로 초상집 신세였던 메트로를 혼자서 지탱하고 있었지. 거기다 월드 시리즈에서는 앞선 6경기를 치르는 동안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선발과 구원을 넘나들며 닥치는 대로 올라왔던 녀석이었고. 그런 녀석이 이번에도 나가겠다고 하니 다들 매달려서 그를 뜯어 말렸지. 신이 깃든 육체가 아니라 신이 직접 내려와서 던진다 하더라도 1주일 사이 공을 700개 가까이 던지고도 어깨가 무사할 거라는 생각은 안 들었거든.

나도 말렸어. 중과부적이라고, 이 경기는 나가봤자 득 될게 아무것도 없는 게임이라고.

그랬더니 녀석이 뭐라고 한 줄 알아?

 

-주위를 둘러봐요. 저 많은 팬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들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들 앞에서 못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어요.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라고 하더군.

그 녀석은……정점에 서 있는 주제에 자기주장이 약한 녀석이었어. 인터뷰를 할 때나, 남들앞에서 이야기를 할 때는 답답할 정도로 남의 눈치를 살폈지. 혹여 기분을 상하게 할까, 하고 말이야. 그 녀석이 그렇게 강하게 말한 건 그 때가 처음이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눈치챘어. 그리고 그 결과는…….

……혹시 그 녀석이 이 다음에 어떻게 됐는지는 알고 있나?

……그래, 알고 있었군.

아니, 고마워. 내 입으로 말했다가는 울 것만 같았거든. 아니, 아마 울었겠지. 지금도 그 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지는걸.

 

…….

……….

……미안해. 몇 번이나 겪었지만, 여전히 진정이 되질 않는군……녀석은, 야구가 뭐냐고 물으면 즉답으로 “내 이름 석 자”라고 대답하던 녀석이었어. 그런데, 그 야구란 녀석이 말이지……무슨 셰익스피어가 좋아할만한 이야기구만.

0대 1. 메트로의 리드로 게임이 흘러가고 있었어. 우리 리그는 투수도 타석에 서던 리그였는데, 4회초 타석에 선 윌리가 솔로 홈런을 날리면서 1점의 리드를 가져가고 있었지. 물론 상대방 타선은 그 녀석한테 꽁꽁 묶여있었어. 7회까지 안타 두 개를 친게 고작이었으니까.

하지만 7회초 윌리의 세 번째 타석에서 그 사고가 터졌어. 상대 투수가 윌리를 맞춘거지. 맞춘게 무슨 대수냐 싶겠지만 그 공이 하필이면 머리, 그것도 헬멧이 보호하지 못하는 눈을 맞춰버렸어. 끔찍한 상황이었지.

아니, 여기서 끝이 아니야. 피를 철철 흘리면서 그 자리에서 쓰러져 누워 있는 녀석에게 의료팀들이 다가갔을 때, 어떻게 정신을 차린 건지 녀석은 다시 일어서서 괜찮다고 손을 내저었어. 누가 봐도 심각해 보였지만 녀석은 계속 괜찮다며 고집을 부렸어. 알고 있던 거지. 자신이 없으면 우리는 여기서 끝이라는 걸.

그 상태로 그는 7회, 8회, 9회를 안타 하나 없이 막아냈어. 공 하나하나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서. 2년 넘게 녀석과 한솥밥을 먹었지만 나도 처음 보는 공을 던져대더군. 마치……그 자리가 자신의 마지막 자리라는 걸 직감한 듯이 말이야.

마지막 아웃을 잡고, 전대미문의 완봉으로 경기가 끝난 그 순간, 윌리는 마운드 위에서 쓰러져 그대로 의식을 잃었어. 의료팀과 함께 마운드로 뛰어가면서 우리는 아까처럼 다시 녀석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하는 기대를 가졌어. 경기장 안에서는 5만명의 관중들이 윌리의 이름을 연호했지.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어.

그는 일어나지 않았지. 마치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고 말하듯이.

……뇌사라고 하더군. 질 나쁜 농담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현실이었지. 시상식이 끝나고 1주가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다음 시즌이 시작해도 녀석은 좀처럼 눈을 뜨지 못했어. 아니, 호흡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어.

 

기적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반년이 지난 뒤에 어떻게 녀석이 눈을 떴다는 소식이 들렸어.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병원으로 뛰어갔지. 반 년 동안 아무것도 못 먹어서 그런가 반의 반쪽이 된 몸으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고 하더군. 나는 병실 안으로는 차마 들어가지 못했어. 도망쳤지. 내가 무슨 염치로 그 녀석 얼굴을 보겠어? 누구 때문에 그 꼴이 났는데. 녀석의 얼굴을 도저히 볼 용기가 나지 않았지.

그 날 저녁, 윌리가 전화를 걸었어. 와 줘서 고맙다는 얘기였지. 그리고 팀을 잘 부탁한다는 이야기도.

……그래, 끝나버린 거야. 1주 정도 재활이 끝나고, 병상에서 일어난 윌리는 은퇴를 선언했지. 명목상으로는 더 이상 이룰 것이 없어서 은퇴한다고는 했지만, 아는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었어. 그 날 맞았던 공 하나가 그의 인생을 끝장내버렸다는 걸. 이제 그 누구보다도 화려하게 빛났던 ‘윌리 존슨’이라는 선수의 이야기는 계속되지 않아. 그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재능에 비교하면 허무한 결말이었지……그래, 너무나도 허무한 결말이었어.

 

……한순간에 정상에서 굴러 떨어진다는 건 어떤 기분이었을까.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 기분을 몰라. 아니, 아마 우리와 같은 시대를 보낸 선수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야. 정점을 논하기에는 그 정점이 너무나도 높았거든. 그가 은퇴한 다음에도 시티 필드에는 늘 관중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지만, 그들은 모두 31번을 기억하고, 추억하고 있었어. 그 누구보다도 눈부시게 빛났기 때문에, 그 모습을 봐 온 사람들은 그의 시대가 끝났다는 걸 납득하질 못한 거야.

 

윌리가 은퇴하고 몇 년 지나서는 나도, 톰도 슬슬 선수 생활의 끝자락이 보였지. 매 해를 지나갈수록 어깨가 맛이 가는 게 느껴지더군. 다음 시즌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은퇴하기를 결심하고 나니까 그제서야 녀석의 기분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어. 뭐, 톰 녀석은 내년까지 해 본다곤 하더라만, 내가 보기엔 걔도 글렀어. 은퇴경기 한번 거하게 뛰고 물러나는 게 최선이지.

난 은퇴식을 하고 난 다음부터는 한동안 침대에 박혀서 꼼짝도 안 했어. 치밀어 오르는 무력감, 박탈감, 허무함은……솔직히 참기 힘들더군. 난 내가 스스로 물러났는데도 이 정도인데, 대체 그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 그리고 그 때 쯤 되서 윌리가 할리우드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 새 보금자리를 틀었더군. 그 소식을 듣고 나서, 나는 결국 그걸 딛고 일어선 그 녀석이 얼마나 대단한 녀석이었는지를 새삼 깨달았어. 그 녀석은 마운드에서도, 그 밖에서도, 정말 굉장한 녀석이었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미스 타카가키, 지금껏 윌리는 그 누구한테도 먼저 손을 내민 적이 없었어. 그런 녀석이기에, 그가 당신을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건 그에게 있어서 당신이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라는 뜻이야. 

뭐? 어떻게 장담하냐고?

……당신이 녀석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한다는 것, 그 자체가 이유가 될 수 있겠군. 기자 놈들한테 한번 데인 이후로 그 녀석은 지금까지 누구한테도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적이 없었어. 그가 무대에서 내려온 지 7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그 사이 기자 놈들을 제외하고 나를 찾아온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거든. 그러니 부디 그의 믿음을 배신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아, 그리고, 혹시나 그의 선수시절에 대해서 조금 더 알고 싶다면 '시티 필드'로 가 봐. 그 곳에 가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당신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을테니.

 

 


 

 

“이야기는 잘 끝났어?”

-말도 마, 세 시간이나 통역했더니 죽을 맛이야. 이제 카에데랑 호텔로 돌아가는 중. 너는?

“난 지금 호텔이지. 로비에 있어.”

-응?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나야 뭐, 그냥 인사만 하고 나왔으니까.”

-아, 월터가 너보고 꼭 연락 달라고 하더라. 저번에 안 해준 사인 마저 다 해달라고.

“그래, 그건 내가 따로 연락을 해야겠네. 고맙다, 수고했어.”

-내가 뭘……그녀한테 다 보여줄 거야?

“……그래.”

-……힘든 선택을 했구나.

”힘들긴, 다 내가 자초한 일인데. 고맙다.”

 

통화가 끊어졌다. 휴대전화를 다시 파카의 주머니로 되돌리고 나는 들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브로드웨이 일대 극장의 스케줄이 들어 있는 소책자였다.

고요한 로비에 앉아, 책자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왼팔에서 짤깍,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래대로였다면 곧이어 땡, 땡, 땡, 하는 타종소리가 들려와야 하겠지만, 그 대신 들려온 것은 톱니바퀴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틱틱거리는 소리였다.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밤 10시를 넘긴 시각이었습니다.

로비로 들어가자, 정문이 정면으로 보이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프로듀서가 고개를 들어 저희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습니다.

 

“잘 놀다 왔어요?”

“캐서린 덕분에 무척 즐거웠어요. 그나저나,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뇨, 저도 조금 전에 도착했거든요.”

 

프로듀서는 늘어져라 하품을 하는 캐서린을 바라보았습니다.

 

“너도 고생 많았다.”

“……몇 시간이나 통역을 했더니 죽겠어. 통역가들은 정말 대단하구나…….”

 

크게 기지개를 편 뒤, 캐서린은 다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내일은 어떻게 할 거야?”

“그건 지금부터 생각해야지.”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주머니 속에서 작은 소책자를 꺼냈습니다. 그것을 받아 표지를 넘기자, 소책자의 사이즈에 맞추어 작게 축소된 포스터가 나타났습니다.

 

“이건 뭔가요?”

“올 연말까지 브로드웨이에서 상영하는 공연의 정보를 모아놓은 일종의 정보지에요. 여기까지 왔는데 한 편 보고 가야죠.”

“어? 내일 크리스마스인데? 괜찮겠어?”

“괜찮아. 내가 싫다고 타카가키 씨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까.”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러면 비행기는 어떻게 할래?”

“휴가가 좀 길어졌고, 여기서 볼 일도 별로 없고……별 일이 없으면 내일 심야로 출발하지 싶은데.”

“비행기요?”

 

저는 책자에서 눈을 떼고 프로듀서를 바라보았습니다. 어딜 가길래 비행기까지 타야 하는 걸까요?

 

“LA로 가려면 비행기를 타야 합니다. 이 큰 땅덩어리를 동에서 서로 가로질러야 하기 때문에. 안 그러면 3일은 꼬박 운전을 해야 하고요.”

“내일 LA로 갈거면……일정보다 2일정도 빠르네. 전체적으로 다 조이는 거야?”

“아마 30일 출국이 될 거 같아. 새해맞이 정도는 고향에서 하게 해드려야지. 올해는 휴가도 별로 못 챙겨드렸는데.”

“그래? 흐음…….”

 

도저히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한 저는 프로듀서와 캐서린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거렸습니다.

 

“아, 캐시. 너 요새 뮤지컬 본 적 있어?”

“으음, 뭐, 몇 번 보긴 했지. 계약 끝나서 할 거도 없었고…….”

“잘 됐네. 그럼 이거 중에서 추천 좀 해봐. 여자들한테 인기 있는 걸로.”

“응? 그러지 뭐. 어디, 이리 줘봐.”

 

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캐서린과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듀서의 모습이, 어쩐지 조금은 멀게 느껴졌습니다.

 


 

 

다음 날이 밝았습니다.

오늘이 크리스마스라는 것을 재확인이라도 하려는 것인지, 오전 8시에 맞춰둔 모닝콜은 크리스마스 캐럴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으응…….”

 

저는 머리맡의 테이블을 더듬어 수화기를 한번 들었다 놓았습니다. 그제서야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습니다.

5분 정도,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저는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온 다음에야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분명히 잠은 잘 잤을 텐데, 온몸이 마치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습니다.

이게 시차 피로라는 것이군요. 지금까지 해외라고 해봐야 비행기로 2시간 이내인 나라들이 전부였으니, 시차적응에 애를 먹는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든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었습니다. 어제처럼 옅게 구름이 낀 뉴욕의 하늘이 저를 반깁니다. 늘어져라 기지개를 펴고 있자니 휴대전화의 LED램프가 깜박거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휴대전화의 화면을 켜자 프로듀서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습니다.

 

-9시, 체크아웃 해야 하니 짐은 다 챙겨서 나오세요. 로비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메시지의 발송 시각은 새벽 여섯 시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피곤하지도 않은 걸까요…….”

 

그러고보면 월터 씨가 말씀하시길, 비정상적인 체력은 선수 시절부터 이랬다고 했었죠.

한번 더 기지개를 펴고, 저는 터덜터덜 샤워실로 향했습니다.

 

***

 

욕조에서 깜빡 잠들어버린 덕분에 약속 시간을 살짝 넘겨 로비로 내려간 저는 로비에서 프로듀서를 발견했습니다. 평소처럼 정장과 코트를 입고, 블라인드가 내려온 창가를 등진 자리에 앉은 프로듀서는 노트북의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순간 머릿속에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슬금슬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누르며, 저는 살금살금 프로듀서의 뒤로 다가갔습니다.

제 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듯, 프로듀서는 계속해서 노트북의 트랙패드를 이리저리 문지르고 있었습니다. 그의 뒤로 다가간 저는 그의 안경을 건드리지 않도록 안경테의 아래쪽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밀어 넣어 그의 두 눈을 손가락으로 덮었습니다.

 

“누구~게?”

 

자세를 기울여, 그의 어깨에 턱을 올리며 짧은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귓가에 작게 속삭이자 그의 어깨가 크게 움찔거렸습니다. 적잖이 당황한 듯, 노트북의 화면이 이리저리 휙휙 넘어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잠시. 그는 곧 여유를 되찾은 듯, 노트북에서 손을 떼고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습니다.

 

“……이렇게 늦게 내려오신 걸 보면 분명 미인이겠죠.”

 

그렇게 말하며 그는 손을 들어 제 손목을 가볍게 쥐었습니다.

 

“선이 가는 손목이네요. 모델이신가요?”

“네에, 뭐, 예전에는요.”

“그렇군요. 모델 출신에 미인이라면, 제가 아는 사람은 한 명 밖에 없네요.”

 

그는 자신의 눈을 덮고 있던 제 손을 조심조심 벗겨내며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블라인드 사이로 비치는 흐릿한 햇빛을 받은 그의 왼쪽 눈이 검붉은 빛으로 반짝였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타카가키 씨.”

“저도 메리 크리스마스에요, 프로듀서.”

 

빙그레 웃는 그에게 웃음으로 대답하면서 저는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습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었어요?”

“어제 샘플입니다. 일단 한번 체크하고 회사에 보내려고요.”

“저도 봐도 될까요?”

 

“당연하죠”라고 말하며 프로듀서는 노트북을 이쪽으로 돌려 주었습니다.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센트럴 파크의 여러 랜드마크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12장이란 말이네요.”

“네, 일단은요. 그 중에서도 저쪽에서 실제로 사용하는 건 4~5장 정도겠지만.”

“어쩐지 아까운걸요. 다들 마음에 드는 사진들인데.”

“네, 그렇지 않아도 일단 찍은 건 전부 가져가도 좋다는 허락을 얻은 참입니다.”

“정말요?”

“우리 신데렐라 걸즈의 기념비적인 첫 해외 촬영인데 당연히 보관해야죠.”

“그런가요……제가 첫 번째, 후훗.”

 

노트북을 돌려주자, 프로듀서는 곧바로 노트북을 닫고 가방 속으로 집어넣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테이블 옆에 세워둔 제 여행가방의 손잡이를 움켜쥐며 그는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자, 슬슬 움직이죠. 비행기 시간까지 맞추려면 빠듯할거에요.”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프론트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오늘은 어딜 갈 건가요?”

 

프론트를 향해 걸어가던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시티 필드로 갈 겁니다.”

 


 

 

주차장을 관리하는 직원의 깍듯한 인사를 받으며 프로듀서와 캐서린, 그리고 제가 타고 있는 검은색 승용차는 주차장으로 들어섰습니다. 문을 열고 내려서 주위를 둘러보는 저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마치 콜로세움을 연상시키듯 아치 모양 창문이 나 있는 거대한 건축물이었습니다.

 

“시티 필드…….”

 

뉴욕을 상징하는 커다란 사과 모형을 앞에 둔 거대한 메인 게이트의 위에는 “CITY FIELD”라는 글자가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고, 고개를 돌려 옆쪽 벽을 살펴보면, 구장을 둘러싼 가로등에는 제각각 선수들의 사진과 이름이 적힌 현수막들이 걸려 있었습니다.

프로듀서의 이름은 어디에 있을까 싶어 눈에 잔뜩 힘을 주며 그것들을 살펴보고 있자니,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습니다.

 

“오랜만이네요, 이 곳은.”

 

옆에서 들려온 프로듀서의 목소리에 저는 옆을 돌아보았습니다. 어째서인지 안경 대신 선글라스를 끼고 있던 프로듀서는 제 옆에 서서 시티 필드의 메인 게이트를 가만히 올려다보며 중얼거렸습니다.

 

“……오랜만이에요, 정말로.”

 

 

***

 

 

입구를 지나오면서 우리들의 신분증을 확인한 경비원은 프로듀서의 신분증을 확인하고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습니다. “Oh, my god”을 연발하며, 감격에 젖은 표정으로 연신 프로듀서와 악수를 나누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 도시에 도착해서 몇 번째일지 모를 신선함이 느껴졌습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거에요. 금방 끝내고 내려올게요. 정말 죄송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지만, 이번에도 볼일이 있다며 잠시 자리를 비운 프로듀서를 대신하여 저는 캐서린과 함께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미안해요. 두 사람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것 같아서.”

“아, 아,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더 미안한걸요……괜히 저 때문에 시간만 버리는 건 아닌지.”

“아뇨, 어차피 뉴욕에서 딱히 할 것도 없었거든요. 윌리가 온다기에 남은 거였죠.”

 

메인 게이트를 통해 구장 안으로 들어가자, ‘지금은 운행하지 않습니다’라는 팻말이 걸린 에스컬레이터가 우리를 반겼습니다.

 

“경기장으로 들어가는 에스컬레이터에요. 경기가 없는 날에는 못 쓰죠.”

 

저는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경기가 없는 날인데도 불구하고 로비에는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습니다.

 

“경기가 없는 날인데도 사람이 많네요.”

“놀러 오는 사람도 많거든요. 여기서만 파는 구단 상품도 있고요. 다른 도시에 살면서 이 팀을 응원하는 팬들이 365일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도록 하는 거죠.”

“그렇군요…….”

”우리는 저쪽으로 가 볼까요?”

 

저는 캐서린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녀의 손 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HALL OF FAME” and MUSEUM>이라는 간판이 걸린 박물관의 입구가 있었습니다.

 

“공식적인 명예의 전당은 아니지만, 구단에서 자체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들을 모아놓은 곳이에요.”

 

내가 할 이야기는 이 정도 뿐이군. 다른 걸 보고 싶다면 ‘시티 필드’로 가 봐. 그 곳에 가면 당신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을 거야. 그 녀석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저는 어제 저녁, 월터 씨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과연, 시티 필드로 가라는 건 이런 뜻이었나보군요.

저는 캐서린의 뒤를 따라 입구로 들어갔습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저희를 반기는 것은 팀의 역사를 모아놓은 연표와 무척 오래되어 보이는 흑백 사진들이었습니다. 영어로 적혀 있었기에 제대로 읽을 수는 없었지만, 숫자가 적힌 것으로 미루어보아 팀 창단 초기의 사진인 듯 했습니다.

곧이어 모습을 나타낸 것은, 두꺼운 강화유리 케이스 안에 들어있는 일곱 개의 크고 작은 트로피였습니다. 프로듀서의 방에서 본 적이 있는 그것은 원통형으로 배열된 여러 개의 깃대가 번쩍이는 야구공 하나를 둘러싸고 있는 트로피였습니다. 큰 것과 작은 것은 제각각 짝이라도 맞춘 듯 가장 왼쪽부터 2004, 2005, 2006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큰 건 월드 시리즈의 우승 트로피고, 작은 건 지구리그 트로피에요..”

“그렇군요…….”

 

그것을 바라보던 저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2007년의 트로피는 작은 것만 세워져 있었을 뿐, 큰 것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건 다른 곳에 있거든요. 곧 볼 수 있을 거에요.”

 

캐서린의 뒤를 따라 트로피가 진열된 곳을 지나가자, 곧바로 선수들의 명판이 걸려 있는 또 다른 격실이 나타났습니다. 방 안에는 스무 개 가까이 되는 명판이 걸려 있었는데, 그 중에서 네 개는 왼쪽에 따로 걸려 있었습니다.

 

“여기가 명예의 전당이에요. 실제로 헌액된 선수들은 저렇게 명판이 따로 걸려 있고, 이쪽에 있는 건 구단 자체적으로 헌액한 선수들이죠.”

“여기에 프로듀서도 있나요?”

“물론이죠. 윌리는 가장 최근에 헌액되었으니까요. 저기 오른쪽 구석에 보면……있죠?”

 

그녀의 말대로, 오른쪽에 따로 걸려 있는 열여섯 개의 명판 중, 가장 마지막 자리에는 William Johnson이라고 적혀 있는 명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래쪽에 적혀 있는 글귀가 조금 다르네요?”

 

명판에는 선수들의 얼굴과 이름, 그리고 그 선수의 활약이나 특징에 대한 간단한 요약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프로듀서의 명판에는 그런 것 대신 두 개의 단어만이 적혀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The ALMIGHTY.

 

제 말을 듣고 명판을 살펴보던 캐서린은 훗, 하고 웃었습니다.

 

“’전지전능한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혹평이 아니라 호평이였군요. 저는 화끈거리는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캐서린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명판이 걸린 곳을 지나가자, 이번에는 벽면에 커다란 TV가 걸려 있는 구불구불한 복도가 나타났습니다.

 

“여기는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순간의 영상들을 모아놓은 곳이에요. 2000년대의 영상은 좀 더 들어가야 있지요.”

 

그렇게 말하며 캐서린은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갔습니다. 경기 영상이 흘러나오는 벽에 걸린 커다란 모니터와, 역사적인 순간들을 찍은 사진들이 든 액자들을 지나가자 이번에는 또 다른 구불구불한 복도가 나타났습니다. 조금 전에 비하면 훨씬 짧은 복도였지만, 벽과 바닥에 그려져 있는 등번호가 들어간 유니폼과 벽에 걸려 있는 여러 벌의 유니폼은 제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NYM No. 31

W. Johnson

 

“저, 여기는…….”

“네, 이곳이에요.”

 

앞서서 걸어가던 캐서린은 걸음을 멈추고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선수로써의 윌리……아니, P의 모든 것이 남아 있는 곳이죠.”

 

강화유리로 격리된 진열장 안쪽을 바라보며 저는 숨을 삼켰습니다. 좀 전에 본 것과 똑같은 프로듀서의 명판이 걸려 있고, 그 아래 거의 30개에 달하는 트로피와 상패가 진열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투수가 가져갈 수 있는 상이란 상은 다 쓸어갔지.

 

월터 씨의 말을 떠올리며 저는 트로피가 진열된 진열장의 옆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옆에는 표지 모델로 실리는 것 자체로도 엄청난 영광이 된다는 유명한 스포츠 잡지가 다섯 권이나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다섯 권 중에서 네 권의 표지에 그려진 것은 글러브를 치켜세우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거나, 힘차게 공을 던지는 젊을 적의 프로듀서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중에서 저의 눈에 띈 것은 프로듀서가 찍혀 있지 않은 2007년의 표지였습니다.

un pour tous, tous pour un”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2007년의 표지에는, 월드 시리즈 트로피로 추정되는 물건을 피가 묻은 31번 유니폼으로 덮은 채 침울한 표정으로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찍혀 있었습니다. 새 맨션으로 이사하기 전, 프로듀서의 기숙사 방에서 본 것과 거의 비슷한 사진이었습니다.

 

“하나는 모두를 위해, 모두는 하나를 위해. '삼총사'에 나오는 말이에요.”

 

원어로는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그 말 자체는 저도 자주 들어본 것이었습니다.

잡지들이 진열된 선반 위에는 잡지의 표지처럼 유니폼으로 덮여 있는 기둥 모양의 물건이 있었습니다. 유니폼 밑으로 슬쩍 드러난 기둥의 목재  지지대에는 World Series Champions 2007 이라는 금색 문구가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과연, 이런 곳에 있었군요.

 

“캐서…….”

 

캐서린을 부르려던 저는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는 그녀의 제스쳐를 보곤 냉큼 입을 다물었습니다. 대체 언제 따라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복도의 한 가운데에는 트로피 진열장의 맞은편 벽에 진열되어 있는 물건들을 바라보고 있는 프로듀서가 있었던 것입니다. 가만히 서서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이제는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검붉은 자국이 남아 있는 네모난 상자와 31번이 각인된 유니폼이었습니다.

한동안 진열장을 바라보던 프로듀서는 한숨을 내쉬고는 저희를 바라보았습니다.

 

“……갑시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안내할게요. 이 뒤에는 구단에서 운영하는 샵도 있고,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싶은 것도 있거든요.”

 

박물관을 나와서, 기념품을 판매하는 샵을 둘러본 뒤, 프로듀서는 에스컬레이터로 우리를 안내했습니다. 캐서린은 갈 수 없다고 한 곳이지만, 프로듀서의 뒤를 따라 도착한 에스컬레이터에는 메트로의 로고가 그려진 점퍼를 입고 있는 직원 한 사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좋은 것인지, 프로듀서를 바라보며 연신 싱글벙글 웃는 직원분의 뒤를 따라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 가자, 각 층의 좌석으로 이동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와, 커다란 선수들의 사진이 걸려 있는 복도가 나타났습니다. 직원분은 사진 하나하나를 가리키며 선수의 이름을 불러 주었지만, 제 기억에 남는 것은 가장 마지막에 걸려 있는 프로듀서의 사진 뿐이었습니다. 데뷔한 직후에 찍은 듯, 메트로의 유니폼을 입고 풋풋한 미소를 품고 있는 프로듀서의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복도를 지나가자 각종 편의시설이 모여 있는 콘코스(주 : 광장을 겸한 커다란 통로)가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시즌이 끝난 날이었기에 문을 연 곳은 없었지만, 이런 곳에 처음 와보는 저로써는 무척이나 웅장해 보이는 광경이었습니다.

콘코스의 한켠에 마련된 직원용 입구에서 직원분은 목에 걸고 있는 카드를 이용해 문을 열었습니다.

 

“이건 어디로 가는 길인가요?”

“덕아웃……그라운드로 바로 갈 수 있는 길이에요.”

“그라운드요?”

 

프로듀서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계단을 내려가자 지상층 특유의 서늘한 공기가 흐르는 복도가 나타났습니다. 직원분께서 라커룸, 트레이닝 센터, 그리고 선수들이 몸을 풀 때 사용하는 불펜을 차례로 지나가며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덕아웃'이라고 적힌 팻말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프로듀서가 보여주고자 한 풍경은 그 곳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직원 분과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던 프로듀서는 곧바로 제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캐서린을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힘내요'라고 말하며 빙그레 웃을 뿐이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무심결에 그 손을 잡자, 기다렸다는 듯 그는 내 손을 잡아 끌고 저를 그라운드 위로 이끌었습니다.

 

“꺄앗……?!”

 

마치 급류에 휩쓸리듯, 달려가는 그의 손길에 이끌려 몇 걸음을 뛰어갔는지, 제 손을 잡은 채 달려가던 그는 돌연 걸음을 우뚝 멈추었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우리들의 앞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저의 바로 앞에는, 흙을 쌓아 올린 마운드가 있었습니다.

 

“자, 주위를 둘러보세요. 이것이 제가 봐 온 풍경입니다.”

“아…….”

 

프로듀서의 손을 잡고 마운드 위에 올라서서 저는 주위를 돌아보았습니다. 타자들이 서 있는 곳보다 약 30cm 더 높은 곳. 지금 제가 서 있는 자리는, 5만 명의 시선을 한 눈에 받을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저는 눈을 감고, 조금 전 박물관에서 보았던 비디오를 떠올렸습니다.

그의 동작 하나하나에 사람들이 열광하고, 그가 아웃을 잡아낼때마다 사람들이 환호를 내지릅니다. 경기가 시작할 때, 그가 마운드로 올라설 때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외치고, 그가 자신의 역할을 마치고 내려올 때는 모든 사람들이 박수로 그를 맞이합니다.

눈을 뜨고, 주위를 다시 한번 돌아보았습니다. 메트로의 유니폼을 입은, 혹은 그 상대팀의 유니폼을 입은 수많은 관객들의 모습이 오버랩되었습니다. 떠올리기만 했을 뿐이지만, 머릿속에 더오른 그 광경에 어쩐지 가슴이 들뜨는 것을 느끼면서 저는 프로듀서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숨을 삼켰습니다. 제 옆에 서서, 주위를 돌아보는 프로듀서의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촉촉하게 젖어 있었던 것입니다.

 

 

***

 

 

시티 필드를 빠져나올 무렵에는, 어찌 된 일인지 바람이 무척 강하게 불고 있었습니다.

메인 게이트를 빠져나와, 주차장에 세워 둔 프로듀서의 자동차로 향하던 저는 문득 뒤에서 따라오던 발소리가 멈췄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뒤를 돌아보자, 우두커니 서서 시티 필드의 메인 게이트를 바라보고 있는 프로듀서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프로듀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강하게 몰아치는 도시의 밤바람에 고개를 돌린 순간, 저는 그의 뒷모습이 한순간 흐릿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다시 보면, 그는 분명히 그 곳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요. 기분 탓이었겠죠.

하지만 단순히 기분 탓이라고 보기에는 무언가 불안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바람에 나부끼는 그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흐릿해 보였던 것입니다. 마치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듯.

 

“프로듀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저를 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방금 전보다도 조금 더 강한 바람이 몰아쳤습니다. 그에게서 저를 밀어내려는 듯,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을 맞으며 저는 그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갔습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바람이 점차 강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 걸음씩 다가간 저는 마침내 그에게 손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손을 뻗어, 마치 시티 필드에 걸린 메트로의 깃발처럼 정신없이 나부끼는 그의 옷자락을 강하게 움켜쥐었습니다.

바람이 멎고, 그가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타카가키 씨…….”

“얼른 가요……. 공연 시간에 늦겠어요.”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 공연에 늦으면 곤란하죠. 비행기도 타러 가야 하고요.”

“그럼요. 얼른 가요.”

 

프로듀서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완전히 몸을 돌려 주차장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중간에 멈춰 서서, 어깨 너머로 메인 게이트의 앞에 설치된 “빅 애플”을 한번 바라본 그는 또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고는 발걸음을 내딛는 발에 힘을 주었습니다.

 


 

 

LA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카에데와 나란히 앉아 이륙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 프로듀서.”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자 색이 다른 두 눈동자와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은, 행복했을까요?”

 

‘두 사람’이라는 것은 아마도 조금 전 브로드웨이에서 본 뮤지컬의 내용일 것이다. 꿈을 쫓으며 서로 사랑에 빠졌던 두 남녀가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히며 자신들의 사랑과 꿈이 결코 양립할 수 없음을 깨닫고, 결국 이별을 선택하게 된다는 내용의 뮤지컬이었다.

 

“……애초에 만나게 된 원인이 꿈이냐 현실이냐의 갈등이었잖아요? 결국에는 꿈을 쫓을 수 있게 되었으니, 분명 행복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녀는 눈길을 돌려 다시 창 밖을 바라보았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안전벨트를 착용하라는 지시등이 깜박거렸다.

 

“……저는, 두 사람이 서로 사랑을 이루기를 바랬어요. 뮤지컬이잖아요. 그 정도의 해피엔딩을 바라는 건 사치인가요?”

 

이륙 준비를 하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엔진소리가 점점 강해졌다. 나는 그녀가 잘 들을 수 있도록 그녀를 향해 몸을 약간 기울였다.

 

“……불행의 씨앗을 안고 맺어지는 사랑만큼 비참한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이 거기서 꿈을 선택하지 않았다면……언젠가는 더 큰 싸움과 더 큰 이별, 더 큰 슬픔을 맞이해야 했을 거에요.”

 

카에데는 대답이 없었다. 가만히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비행기의 엔진이 돌아가는 소리에 자세를 바로잡고 앞을 바라보았다.

 

 

나의 두 번째 고향. LA로 향하는 비행기가 활주로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 <(Re)Write─덮어 쓰는, 혹은 다시 쓰는. (5)>로 계속됩니다.


 

"선수"로써 P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이 흐름이면 대충 6편이나 7편쯤에서 끝날 것 같네요.

 

아니 근데 이 정도면 그냥 게임 캐릭터수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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