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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마스 판타지] 푸른 날개 - 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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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16, 2017 01:47에 작성됨.

 모든 소음이 잦아들었다. 칼과 칼이 부딪히는 소리, 말들이 공포에 잠겨 날뛰는 소리, 사기를 돋우려 외치는 소리, 목숨을 구걸하는 비명 소리. 그 모든 소리가 잠기고, 시체들은 평원에 나뒹굴었다. 죽은 자들을 거두려 산 자들은 움직였다. 곳곳에서 울음과 탄식이 터졌다. 그 평원에서 두 사람이 마주보았다. 한 사람은 쓰러져있었고, 또 한 사람은 그 자를 부축했다.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그는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자에게 말했다. 곧 숨이 끊어질 듯이 가느다랗고 떨리는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새 시대를 열어주십시오, 나의 왕이시여.”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자는 그 마지막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자는 말없이 미소를 짓고 숨을 거두었다. 남은 사람은 숨죽여 흐느꼈다.

 

 거대한 성벽이었다. 그 높이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쳐다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어디하나 모난 곳 없이 깔끔하게 다듬은 것이다. 이 돌은 성 주위에 있는 돌산에서 캐온 것으로, 단단하기로는 강철과도 같다고—물론 강철보다 단단하진 않았다.—할 만큼이었다. 때문에 석공들이 작업을 할 때 도구를 여럿 깨먹기도 했다. 몇몇 돌에는 문양이나 글자가 써있는데, 이는 왕명으로 석공들의 이름과 왕국을 위해 목숨을 잃은 전사자들의 이름을 새긴 것이었다. 성벽 주위로는 깊이 파놓은 해자가 있었다. 해자를 가득 채운 물은 의외로 깔끔했다. 성 북쪽으로 커다란 강이 흘렀다. 그 강줄기를 성으로 이었기에 깨끗한 물이 흘렀다. 이 강은 성 안에 있는 사람들에겐 커다란 축복이었다. 덕분에 다른 곳과는 다르게 비교적 비옥한 땅을 가질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 강을 ‘괴랭고다(Göran’Goda) 강’, 지모신의 강이라 불렀다.
 도개교를 지나 보이는 정문은 나무문이었다. 철로 덧댄 나무문은 두께가 성인 남성 한 명보다 조금 더 두꺼웠으며, 난공불락이라는 말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온통 하얀 돌로 지어진 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거리 곳곳엔 가판대가 있었고, 상인들은 물건을 자랑하느라 큰 목소리를 냈다. 사람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골목에선 아이들이 뛰어 놀았다. 그 길목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막히게 된다. 무장한 경비병들이 막아서기 때문이다. 경비병들 뒤로 보이는 커다란 건물은 왕궁이었다. 동화책 속에서 나오는 으리으리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크기는 크기만 언뜻 보기에는 수수하게 보였다. 화려한 장식 역시 없었다. 하지만 성문 앞 광장 한 가운데 우뚝 선 석상이 인상적이었다. 이곳은 북부 연합 중 가장 큰 왕국, ‘하흐르모덴(Hagh'Rmoden, 커다란 의지)’이다.
 왕궁 안은 바깥과는 다르게 조용했다. 경비는 삼엄했다. 알현실 안에선 사람들이 회의를 하고 있었다. 하흐르모덴 국왕, ‘라드페데(Radh’Fede, 붉은 깃)’와 신하들이었다.
 “어찌 했으면 좋겠는가?”
 라드페데가 말했다. 말 속엔 근심이 가득했다. 신하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다. 그는 지쳤다는 듯 미간을 눌렀다.
 “폐하, 송구하오나 다시 화친을 맺으시는 게 어떻습니까?”
 조심스레 한 신하가 그에게 간언했다.
 “그것이 가능했다면 내 진작 하지 않았겠나? 게다가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네.”
 “하오나…….”
 “이곳까지 다다르는데 빠르면 1주일, 느려야 1주일 반이오!”
 답답한 마음에 그는 언성을 높였다. 그의 모습에 신하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라드페데는 목소리를 높여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한숨을 쉬었다.
 “남쪽 세력이 그렇게 타락할 줄 누가 알았겠소.”
 라드페데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 했다. 하흐르모덴의 선왕 ‘튀아트르(Tuiatr, 큰 나무)’는 남부 연합에서 가장 큰 왕국인 ‘데아 우를(Deah Wurl, 검은 우물)’의 왕, ‘퀴로우(Quirou)’와 형제라고 불릴 만큼 우정이 두터웠다. 그들은 서로 태어난 곳도 달랐고, 자란 배경도 달랐으나, 전장에서 함께 싸우고, 서로가 부족한 것이 있으면 채워주며 신뢰를 쌓아갔다. 왕위에 오르기 전, 튀아트르는 동쪽 ‘깊은 동굴(Decab, 디카브)’의 난쟁이들에게 칼 두 자루를 요청했다. 한 자루의 이름은 ‘비라디(Viradi, 우정)’, 다른 한 자루의 이름은 ‘휘무스(Huimus, 조화)’였다. 그리고 대관식 때, 비라디는 퀴로우에게, 휘무스는 튀아트르에게 전해졌다.
 “이 두 자루의 칼이 있는 한, 두 왕국이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
 튀아트르는 만인에게 말했다. 이를 계기로 두 왕국은 서로 평화조약을 맺었다. 두 왕국의 화친은 영원토록 이어질 듯 했다.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튀아트르가 즉위한지 14년째 되던 해, 서부 지역 ‘움라흐트(Uhm’Raght, 황금 평야)’에서 ‘움라흐트 침공전’이 일어났다. 당시 움라흐트 국왕인 ‘스테올(Stewol, 별 우물)’은 동맹국이던 하흐르모덴에 지원을 요청했고, 튀아트르는 그에 화답해 병사 1천을 이끌고 전선 지원에 나섰다. 나흘이 넘게 걸리던 침공전은 움라흐트의 성공적인 방어로 끝이 났지만, 튀아트르는 안타깝게도 이 전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사망 소식에 하흐르모덴의 모든 백성들은 슬픔에 잠겼다. 장례식은 이틀에 걸쳐 진행됐고, 며칠 뒤 그의 아들인 라드페데가 새 왕위에 올랐다. 하나 이 전투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겼는데, 휘무스가 행방불명 된 것이다. 전투가 끝나고 그의 시신을 수습할 때 있어야 할 휘무스가 보이지 않았다. 병사들이 전장을 모두 뒤졌으나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라드페데가 왕위에 오르고 며칠이 지나지 않자 데아 우를에선 일방적인 조약 파기를 알렸다. 라드페데는 그 태도에 분노해 사자를 보냈으나 데아 우를은 묵묵부답이었고, 되려 국경을 봉쇄했다.
 그렇게 6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데아 우를은 여전히 쇄국정책을 썼다. 그 사이 라드페데는 북부 왕국들과 연합을 결성하고, 동부와 서부 왕국들과도 화친을 맺었다. 라드페데의 이러한 행동은 데아 우를에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고립된 국가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 지금이라도 선왕의 말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다 바로 오늘 아침, 하흐르모덴에 데아 우를의 사자가 찾아왔다. 라드페데는 혹시라도 다시 평화조약을 맺으러 온 것인가 싶어 기쁜 마음으로 맞았지만,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퀴로우 전하의 어명입니다.”
 사자가 운을 뗐다.
 “그대의 왕국은 이미 신뢰를 잃었다. 두 자루 검에 맹세했던 약속은 이미 깨졌다. 그대 선왕의 말에 따라 한 자루의 검이 없어졌으니, 평화조약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2주의 유예기간을 줄 테니, 항복하고 데아 우를 밑으로 들어올 것을 명한다.”
 사자의 낭독이 끝나자 라드페데는 역정을 냈다.
 “선왕께선 그대 국왕과 오랜 벗이었거늘, 어찌 이리도 쉽게 파기한단 말인가! 제대로 된 이유도 없이 전쟁을 하려 하는, 그대 국왕이야 말로 신뢰란 것을 찾아볼 수 없거늘!”
 “그 이상의 모욕적 언행은 저의 국왕께서도 참지 못 할 것입니다!”
 라드페데의 말에 사자는 불쾌하다는 듯이 맞받아쳤다.
 “뭐라! 이놈이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주위에 있던 기사들은 사자의 폭언을 견딜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 베려 했다. 그러나 라드페데는 그들을 말렸다.
 “정 그렇게 전쟁을 바란다면 우리도 받아들이지. 배신자의 말로가 어떻게 끝나는지 직접 보여주겠소!”
 라드페데는 경비병을 불러 사자를 끌어내라 명령했다. 경비병들은 사자를 거칠게 끌었다.
 “이러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지 마시오!”
 사자는 끌려가며 외쳤다. 알현실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사자는 문 밖으로 쫓겨났다. 모두가 말을 잃었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났기에 혼란스러웠다. 불안한 기운을 느낀 라드페데는 즉시 신하와 참모들을 불러 회의를 시작했다. 하지만 마땅히 대책 없이 시간은 흘렀다.
 “전쟁 준비를 해야겠소.”
 라드페데가 말했다.
 “재협상은 없단 뜻입니까?”
 “그렇소.”
 신하의 질문에 그는 단답했다. 데아 우를이 조약에 다시 서명할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았기에, 신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라드페데는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하다크(Hadakh) 경. 그대는 병사들의 훈련과 무기 정비, 군량 비축을 맡으시오.”
 “예, 폐하!”
 하다크라 불리는 기사가 대답했다. 그는 하흐르모덴 제 2번대 기사단장으로, 커다란 목소리가 특징이었다. 전장에서 그의 목소리가 가장 크게 들린다는 병사들의 증언도 있었기에, 별명이 ‘황소 울음’이었다. 라드페데 역시 그걸 잘 알았기에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병사들의 사기와 실력을 키우는데 제격이라 생각해 제안했다.
 “리오(Rio) 경. 그대는 데아 우를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병사들과 정찰을 나가시오. 만일 수상한 낌새가 있다면 바로 보고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리오는 하흐르모덴 제 3번대 기사단장이었다. 침착한 성격과 냉철한 판단을 갖고 있으며, 전세가 기울어졌을 때도 다시 역전을 시킬 만큼 뛰어난 임기응변도 뛰어났다. 그렇기에 데아 우를의 움직임을 파악하는데 그만한 자가 없다 생각해 제안했다.
 “뮈지타나(Müsitana) 경. 그대는 성 안 백성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되, 불안에 떨지 않게 하시오. 전쟁이 나기 전 백성들의 피난을 맡으시오.”
 “…예, 전하.”
 뮈지타나는 정무대신 중 가장 으뜸이었다. 약간 내성적인 성격이었으나, 나랏일을 허투루 하지 않았고, 정치 수완도 좋았기에 라드페데 역시 신뢰하는 신하였다. 그라면 백성들의 피난을 피해 없이 끝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제안했다.
 “다른 자들도 자기 자리에서 임무에 충실하길 바라오.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알아두시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회의는 끝이 났다. 하지만 라드페데는 여전히 불안했다. 2주의 기간을 주겠다고는 말했지만, 지금 상황으론 언제 공격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이긴다 해도 피해 역시 심각할 터였다. 그렇게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들어왔다. 들어온 자는 그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인사했다.
 “아, 할뤼카(Hallüka).”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그는 하흐르모덴 제 1번대 부기사단장이었다. 항상 몸 어딘가에 붉은 리본을 묶고 다녔기에, 그의 이명은 ‘드마세임라(Dhmaseimlha)’, ‘결속자’였다. 라드페데는 밝게 맞이했지만, 그 안엔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다. 그것을 알아챈 할뤼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폐하, 어딘가 편찮으십니까?”
 “아니다. 조금 생각이 많은 것뿐이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으나, 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실은 방금 전 선전포고가 있었다.”
 “예? 선전포고?”
 할뤼카는 그 말에 당황했다.
 “폐하, 어찌 신에게 알려주시지 않으셨습니까?”
 “할뤼카.”
 라드페데는 옥좌에서 일어나 할뤼카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할뤼카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독였다.
 “딸아, 내 어찌 네게 불안을 주겠느냐.”
 “폐하. 신은 왕의 자식이기도 하나, 이 나라의 군인이기도 합니다. 알아야 할 것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단호한 말에 라드페데는 내심 기뻤다. 올바르게 자라준 그가 대견했다. 그의 초록빛 눈에서 아주 조그맣지만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의 빛을 보았다. 라드페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신하에게 명령을 내렸다.
 “예언자를 모셔오라.”
 “예, 폐하.”
 신하는 알현실 밖으로 나갔다. 몇 분이 지나지 않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라드페데가 들어오라 말하자 문이 열렸다. 하얀 머리와 수염, 새하얀 지팡이가 인상적인 노인이 들어왔다.
 “그 동안 평안하셨나이까, 폐하.”
 “휘아트르(Huiatr, 드높은 나무) 경! 어서 오십시오!”
 휘아트르라 불리는 노인은 허리 숙여 인사했다. 라드페데는 반가운 목소리로 환영했다. 휘아트르는 튀아트르의 동생이었다. 무예에 뛰어나 기사가 된 튀아트르와는 달리 휘아트르는 머리가 뛰어나 참모로 일했다. 게다가 미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에 예언자라 불리기도 했다. 하흐르모덴의 정무대신이었던 그는 튀아트르의 죽음 이후로 성에서 나와 백성들 사이에서 살았다. 라드페데는 쉬이 결정할 수 없는 일이 있을 때, 그의 도움을 받아왔다.
 “휘아트르 경. 아마도 지금 부탁할 것이 가장 큰 부탁일지 모르겠소.”
 “신하에게서 전쟁이 일어날 거라 들었습니다.”
 “그렇소. 그래서 휘아트르 경에게 묻고 싶소.”
 “무엇입니까?”
 “이 전쟁에서 어찌하면 승리할 수 있겠소?”
 라드페데는 굳건한 표정으로 말했다.
 “확실한 승리를 바라십니까?”
 “그럴 수 있다면 좋겠소만.”
 휘아트르는 고개를 끄덕인 뒤 눈을 감았다. 그가 주문을 외자 지팡이에서 빛이 났다. 눈을 뜨자 그의 눈에서 하얀 빛이 나왔다. 그리고 입에서 아까와는 다른 목소리가 나왔다.
 “영웅 12명의 후손이 한 곳에 모여야 하리라. 그리고 지금 이곳에 없는 한 사람을 찾으라. 그는 인간과 이종족, 둘의 모습을 지닌 자이니라. 그가 있다면 승리할 것이라.”
말이 끝나고 휘아트르는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영웅 12명의 후손. 인간과 이종족의 모습을 지닌 자. 여전히 수수께끼로군요.”
 라드페데가 말했다.
 “영웅 12명의 후손은 폐하께서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짐작이 가는 자들이 몇 있소. 하지만 뒤에서 언급한 사람은 누군지 모르겠군요.”
 라드페데가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인간과 이종족, 둘의 모습을 지녔다라…….”
 옆에서 예언을 듣던 할뤼카가 중얼거렸다.
 “짐작 가는 게 있느냐?”
 그 모습을 보던 라드페데가 물었다.
 “지금 여기에 없다는 건 하흐르모덴에서 나간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인간과 이종족, 둘의 모습을 지녔다는 건 혼혈이라는 뜻일 수도 있겠고요. 설마…….”
 할뤼카의 뇌리에 무언가가 스쳤다.
 “폐하. 신이 알 것 같습니다.”
 “그 자가 누군가?”
 “하흐르모덴 제 1번대 전 부기사단장. 인간과 바르드세르(Bardhser, 조인)의 혼혈. ‘치하이야(Chihaiya)’.”
 할뤼카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게 문제로군.”
 “제가 찾아보겠나이다.”
 “할뤼카.”
 “전쟁이 일어나기 전 그를 찾아 도움을 구하겠나이다. 허락해 주소서.”
 라드페데는 쉬이 허락할 수 없었다. 유일한 혈육인 그를 성밖으로 내보내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안 되겠느냐?”
 “폐하. 지금 모든 이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저 왕가의 핏줄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안전하게 있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저도 제 역할을 다 하겠나이다.”
할뤼카의 확고한 의지에 라드페데는 말릴 수 없었다.
 “그대의 요청을 허락하겠네.”
 “황공합니다, 폐하.”
 “다만 그대 혼자서는 안 되네. 그대의 등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과 같이 가게.”
 “알겠습니다, 폐하. 지금 당장 떠날 준비를 하겠나이다.”
 할뤼카는 허리 숙여 인사하고 알현실 밖으로 나갔다.
 “용맹한 자식을 두셨습니다, 폐하.”
 휘아트르가 웃으며 말했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했소.”
 “걱정되시는 건 이해합니다. 다만 자식을 믿는 것도 부모의 역할입니다.”
 “격려 고맙소, 휘아트르 경.”
 그러다 라드페데는 휘아트르의 얼굴을 쳐다봤다. 휘아트르는 눈빛으로 보내는 그의 생각을 읽고서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 늙은이를 같이 보내려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휘아트르 경이 옆에 있다면 걱정될 것이 없겠소. 무리한 부탁이란 건 알지만 어떻게 안 되겠소?”
 그의 말에 휘아트르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까 말한 큰 부탁이 바로 이것이었나 보군요. 알겠소. 나 역시 떠날 채비를 하겠소.”
 “정말 고맙소, 휘아트르 경!”
 라드페데는 자리에서 일어나 휘아트르를 향해 허리 숙여 절했다. 왕이 함부로 보일 수 없는 행동이었으나, 가장 크게 예를 표한 것이었다. 휘아트르가 밖으로 나가고 난 뒤, 라드페데는 신하에게 한 사람을 불러오라 명령했다. 그가 생각해 둔 사람이었다.
알현실을 나온 할뤼카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먼 여행길이 될 것이라 생각해 무거운 갑옷보다는 사슬 갑옷과 가죽옷으로 갈아입고, 화려한 장식품도 놓아두었다. 장검 한 자루는 왼쪽 허리춤에, 단검 두 자루는 양쪽 허벅지에 있는 가죽띠에 장비했다. 천 망토를 쓰고 마지막으로 머리카락에 두 개의 붉은 리본을 달았다. 준비가 다 된 그는 성밖으로 나왔다. 안녕을 바라는 병사들의 말에 화답하며 마구간으로 향했다. 말 하나가 할뤼카를 보자 반가운 듯이 울어댔다. 검은 털과 매끈한 갈기를 가진 말이었다.
 “데아만(Deah’Mhan, 검은 갈기), 오랜만에 달리겠구나.”
 할뤼카는 데아만을 쓰다듬었다. 데아만은 할뤼카가 기사가 된 것을 기념해 라드페데가 선물한 말이었다. 하지만 기병술보다는 보병술 위주로 배운 터라 데아만을 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쉬는 날에 성 근처 평야를 달리는 것을 빼고는 마구간에 있는 터라, 심심하지 않게끔 할뤼카는 빗질을 해주기도 하고, 직접 먹이를 주기도 했다. 그렇게 달리고 싶어한 데아만의 소원을 오늘에야 이뤄주게 된 것이다.
 할뤼카는 데아만의 등에 안장을 채우고 올라탔다. 마구간을 나오자 휘아트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역시 하얀 말을 타고 있었다.
 “기다렸습니다, 왕녀님.”
 “휘아트르 경! 어떻게 여기에?”
 “폐하의 어명입니다. 왕녀님을 잘 보좌해달라시더군요.”
 할뤼카는 그가 있다는 것에 반갑기도 하고, 놀라기도 했다.
 “그대가 있으니 마음이 든든합니다.”
 “그리고 또 한 명이 있습니다.”
 휘아트르가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할뤼카가 돌아보자 한 기사가 뛰어오고 있었다.
 “기다려주십시오, 왕녀님!”
 “마뮈아(Mamuia)! 그대도?”
 마뮈아는 긴 갈색 머리카락을 왼쪽으로 몰아 묶은, 하흐르모덴 제 4번대 기사단장이었다.
 “폐하의 어명입니다. 왕녀님을 잘 보좌하라셨습니다.”
 할뤼카는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두 사람이 있으니 정말 마음이 든든합니다.”
 마뮈아도 마구간에서 말을 타고 나왔다. 정문이 열리고 세 사람은 박차고 달려나갔다. 그들의 여행은 이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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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가를 소재로 한 판타지물은 왜 없을까 하다가 끄적였습니다.

누가 누군지 알아보시는 분이 계실까 싶습니다만.

몇몇 인물들은 알아보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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