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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리티P 시리즈] (Re)Write─덮어 쓰는, 혹은 다시 쓰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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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12, 2017 02:17에 작성됨.

<(Re)Write─덮어 쓰는, 혹은 다시 쓰는. (2)> 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Re)Write─덮어 쓰는, 혹은 다시 쓰는. (3)

 

 

 

월요일 오전 9시, CG프로덕션의 최상층에 위치한 사장실.

 

 

사장실의 한쪽 벽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유리벽 앞에 서서, 사장은 그 너머로 비치는 아침의 풍경과 자신의 손에 들린 종이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종이에 적힌 내용은 연말에 있을 PRA(Producer Ranking Awards)에 관한 내용이었다. 사장의 명패가 걸려 있는 책상 위에는 또 다른 서류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고개를 돌려, 자신의 손에 들린 것과 책상 위의 서류를 번갈아 바라보던 사장은 가볍게 한숨을 섞어 중얼거렸다.

 

“고집을 부려서 정말 미안하다. 또 폐를 끼치는구나.”

 

얼핏 보기엔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그의 말을 받는 목소리가 있었다. 정확하게는 그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휴대전화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지금도 계속 신세를 지고 있으니까요. 그나저나, 그 사람이 이렇게까지 붙잡고 싶은 사람입니까? 그 정도로 유능한 인물인가요?

 

휴대전화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스피커를 한번 거친 탓인지 무척이나 억세게 들리는 여성의 목소리였다.

 

“보내 준 자료 이외에도 더 필요한가?”

-……아뇨, 실언이었습니다.

“유능하고 무능하고의 이야기가 아니야. 그냥……내 욕심일 뿐이니.”

-그렇군요. 그러고 보면, 젊으실 적부터 무척 욕심이 강하셨죠.

“시끄러워.”

 

그는 휴대전화를 향해 팔을 휙휙 내저으며 헛기침을 했다.

 

“흠, 흠. 아무튼, 한번 만나볼 생각은 없나? 너만 괜찮다면…….”

-……괜찮습니다. 어차피 가까운 시일 내로 곧 만날테니까요. 거기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목소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거기다, 저는 프로듀서로써의 그를 보고 싶은 것이지, 은퇴한 전설을 뵙고 싶은 건 아니기에.

“네 생각이 그렇다면야……. 아무튼, 내 고집을 들어줘서 고맙다.”

-그렇게 고마우시다면 좋은 바라도 한 군데 소개해주시죠.

“……그래, 끝내주는 곳 하나 소개시켜 주마.”

 

그 때, 부속실과 연결된 문에서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도착한 모양이군. 이만 끊으마. 잘 자거라.”

-네. 상세한 사항은 메일로 보내드렸으니, 참고하시길.

“오냐, 고맙다.”

 

뚝, 하고 무언가가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사장은 휴대전화를 주머니 속으로 되돌리고, 책상 위에 설치된 전화기의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지?”

[아이돌 부서……아니, 신데렐라 걸즈에서 프로듀서 등 2명 도착했습니다. 들여보내도 되겠습니까?]

“아아, 들여보내.”

[알겠습니다.]

 

사장은 자리에 앉아 사장실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굳게 닫혀있던 사장실의 문 너머로 똑똑, 하는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경첩소리조차 내지 않으면서 스르륵 열리는 사장실의 문 저편에서, 한 쌍의 남녀가 모습을 나타냈다.

 

 


 

 

직원회의를 마치기가 무섭게 나는 사장실로 당장 올라오라는 호출을 받았다. 사무실에 들러, 책상 위에 회의 자료를 내팽개치다시피 내려놓고 사장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던 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났다.

 

“……타카가키 씨?”

“어머? 프로듀서? 좋은 아침이에요.”

“네, 안녕하세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서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이미 최상층에 불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챘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안에는 그녀 한 사람뿐이었으니, 저 버튼은 그녀가 누른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본관의 최상층으로 간다는 것은 곧 사장실에 간다는 것과 동의어였기에 나는 일부러 확인차 질문을 꺼냈다.

 

“최상층에 가십니까?”

“네, 사장님께서 찾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까지 외부인이 아이돌 부서의 사람들을 찾을 때는 항상 나 아니면 치히로를 거쳐 연락을 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야, 업종의 특성상 상시 연락이 가능한 것이 우리 두 사람 정도 뿐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현상이겠지만.

‘별 일도 다 있네’라고 생각하는 내 머릿속을 잘라내듯, 땡, 하는 종소리와 함께 발 밑이 떠오르는 듯한 가벼운 부유감이 느껴졌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우리는 곧바로 임원 회의실과 연결된 복도의 모퉁이를 돌아 사장실로 향했다. 부속실의 문 앞에 서 있던 비서가 우리를 알아보곤 꾸벅, 허리를 숙였다.

 

“사장님께선 지금 통화중이십니다. 끝나는 대로 말씀을 드릴 테니,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우리 두 사람에게 다시 한번 인사를 한 그녀는 부속실 안으로 들어갔다.

약 5분 정도가 지났을 때, 부속실의 문이 다시 열렸다.

 

“들어가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비서에게 인사를 건넨 뒤, 나는 왼손으로 문고리를 잡으면서 오른손을 들어 사장실의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들어오게.”

 

방음기능을 가진 문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게 문이 열렸다. 경첩이 삐걱이는 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서서히 열리는 문 너머로 쏟아지는 아침의 햇빛에, 방 안으로 걸어가던 나는 나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렌즈가 여과할 수 있는 광량을 아득하게 초월한 것인지, 왼쪽 눈이 시큰하게 저려왔다.

잠시 후, 눈이 어느 정도 빛에 익숙해지자 그제서야 사장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찾으셨습니까?”

“그래, 다름이 아니라, 자네들에게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말이야.”

 

사장은 책상 위에서 서류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두어 걸음을 다가가 서류를 받아, 그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런저런 내용이 적혀 있었지만, 요약하자면 어떤 일의 출연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사장을 바라보았다.

 

“잡지촬영이요? 뉴욕에서?”

“그래. 현지에 있는 지인에게서 도와달라는 이야기가 들어와서 말이야. 경력자라곤 하지만 사쿠마는 학업 사정상 힘들 테니 타카가키가 가 주었으면 하네.”

“……일정은 어떻게 됩니까?”

 

사장은 품 속에서 D비행사의 로고가 그려진 하얀 봉투를 나에게 내밀었다. 봉투 안에 든 것은 금요일 날짜가 적혀 있는 티켓이었다.

 

“금요일에 출국해서 현지 담당자를 만나보게. 듣기로는 주말쯤에나 촬영을 할 것 같다는군.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걸세. 기껏해야 하루 정도?”

“주말에도 일이라니, 엄청 성실하네요.”

“적어도 자네가 할 소린 아니지. 현지 일정을 마치는 대로 자네는 휴가를 갖도록 하게. 계획보다 이틀 정도 길어지겠지만, 그 정도는 그냥 보너스라고 생각해 둬.”

“보너스……인가요. 그다지 마음에 드는 보너스는 아니군요.”

“그래서, 어떻게 할 텐가?”

“……언제……”

 

‘언제까지 대답을 드리면 되겠습니까?’라고 물어보려던 찰나, 내 말허리를 끊은 것은, 내 옆에 선 여성의 목소리였다.

 

“하겠어요. 아뇨, 하게 해 주세요.”

 

뜻밖의 모습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똑바로 서서, 곧게 사장을 바라보며 대답하는 그녀의 눈빛은 더할 나위 없이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무언가 각오를 한 듯한 표정이었다.

 

“싫은가? 어차피 자네 휴가도 미국으로 가겠다 싶어서 말한 것이지만……정 싫다면 다른 매니저를 붙이겠네.”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는 사이, 사장은 내 결정을 재촉하듯 나에게 재차 말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타카가키 씨가 이렇게까지 하신다면 제가 반대할 이유가 없지요.”

“알겠네. 자세한 자료는 메일로 보내주지. 아, 그리고 이건 내 선물이야.”

 

몸을 돌려 사장실을 나가려는 순간, 사장은 내게 반으로 접힌 A4용지를 내밀었다.

 

“뭡니까, 이건?”

“내 선물이라니까. 사무실 내려가거든 사람들이랑 같이 열어보게.”

“……그러죠.”

”그래, 그럼 다른 용무가 없다면 이만 돌아가도 좋네.”

“……네. 수고하십시오.”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나는 카에데와 함께 사장실을 나왔다. 대기하고 있던 비서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네고, 우리는 곧바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누가 탄 사람은 없는지, 엘리베이터는 그대로 최상층에 멈추어 있었다.

 

“뜻밖이네요.”

“뭐가요?”

“타카가키 씨가 먼저 하겠다고 하신 거요.”

“그냥……해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하나씩 줄어드는 엘리베이터의 숫자를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경 렌즈 너머로 그녀의 색이 다른 두 눈동자가 보였다. 비록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단 한 가지. 지금의 선택이 그녀의 의지라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올라올 때와 마찬가지로, 내 생각을 자르기라도 하려는 듯, 땡 하는 소리와 함께 가벼운 중량감이 느껴졌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우리는 곧바로 별관과 연결된 구름다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별관의 엘리베이터 앞에서, 지하로 내려가 있는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일정은 제가 조정해서 차후에 말씀드릴 테니, 오늘은 스케줄에 집중해주세요.”

“네.”

“그럼, 오늘 하루도 수고하십시오.”

“네에, 프로듀서도, 오늘도 파이팅! 후훗.”

 

그녀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니, 들떠 보였다고 해야 할까.

나는 그녀를 태운 엘리베이터를 배웅한 뒤, 다시 사무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다녀왔습니다.”

“아, 수고하셨어요!”

“수고하셨어요.”

 

사무실에 도착하자,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치히로와 미후네 씨가 나를 반겼다. 두 사람의 시선은 곧바로 내가 손에 들고 있는 하얀 종이로 향했다.

하긴, 사람이 손에 이런 걸 들고 있으면 바로 눈에 띄겠지.

 

“그건 뭔가요?”

“사장님께 받았는데, 여러분들이랑 같이 보라고 하시길래 가져왔습니다. 뭔지는 저도 몰라요.”

“사장님께서요? 중요한 거려나……?”

 

나는 두 사람의 맞은 편 소파에 앉아, 들고 있던 종이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슬쩍 살펴보면 두 사람의 시선이 온통 종이에 쏠려 있는 것이 느껴졌다. 때마침 삑, 하는 소리와 함께 히터가 잠시 작동을 멈추었다. 째깍, 째깍, 초침이 달리는 소리만이 주위의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별 것도 아닌데, 두 사람이 이렇게 집중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나도 긴장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럼, 엽니다?”

 

나는 천천히, 반으로 접힌 종이를 펼쳤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방송인협회의 로고였다. 그 로고 아래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PRA(Producer Ranking Awards)

P (CG프로덕션, 신데렐라 걸즈)

B랭크 – 중견 프로듀서

 

뭔가 했더니 연말에 있을 PRA의 결과가 미리 발송된 것이었다.

2년차에 B랭크라니, 나도 어지간히 고평가를 받는구나.

 

“에.”

“……B……?”

 

미후네 씨와 치히로는 낚아채듯 종이를 가져가더니 몇 번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프로듀서 씨! B랭크에요?! 안 기쁘세요?”

“기쁘죠. 오늘 저녁에는 제가 한 턱 내야겠네요.”

 

마치 자신의 일인 양 즐거워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가슴 한 켠이 푸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과는 별개로, 머릿속으로 나는 조금 전까지 사장실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쩐지 뒷맛이 영 개운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뭐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내 촉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눈치채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고.

 

하지만, 결국 출국하는 당일까지도 나는 그 느낌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사장실에서의 그 일이 있고 난 이후, 사장님과는 몇 번 더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는 어떤가?

“현지 스태프들이랑 연락이 꼬인다고 계속 불만이에요. 시차 때문에 계속 밤 늦게 자게 된다고.”

-……본인이 알게 된다면 십중팔구는 불쾌하게 느끼겠지. 가급적이면 이번 일은 내 독단인 것으로 해 두게. 절대로 자네와 내가 엮여 있다는 걸 들키면 안 되네.

“네. 주의할게요.”

-눈치가 비상한 사람이니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을 거야.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프로듀서에게 말을 꺼내서.”

-아니야, 처음부터 확실하게 전달하지 못한 내 실수지. 아무튼, 책임은 모두 내가 질 테니 자네는 최대한 자네의 궁금증을 모두 풀고 오게.

“……네, 감사합니다.”

-아니야, 오히려 내가 고맙지.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은 지나, 마침내 출국일인 금요일이 다가왔습니다.

 

 

‘……뭘까요, 이 대접은.’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라는 글자가 대문짝만하게 적혀 있는 라운지의 소파에 멍하게 앉아, 저는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하는 활주로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유리창에 반사되는 모니터에는 우리가 탑승하게 될 비행기의 이름과, 비행기의 탑승까지 2시간이 남았다는 글이 점멸하고 있었습니다.

퍼스트 클래스라니. 평생 저와는 인연이 없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처럼 여행을 자주 다니는 것도 아니고, 자력으로 이런 곳을 들어올 정도로 대단한 사람도 아니니까요.

슬쩍 시선을 돌리면 지금 이 상황을 만든 장본인의 모습이 보입니다.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인 지, 그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노트북에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의 손가락은 자판 위를 정신 없이 내달리고 있지요.

 

제가 왜 이 곳에 있는지를 설명하려면, 시간을 약간 되돌려야 할 것 같습니다.

 

 

***

 

 

금요일, 오전 6시 20분.

어느덧 약속 시간이 된 것인지, 알람시계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10시 비행기인데 벌써부터 공항에 가야 한다는 건 조금 의아했지만, 프로듀서가 제안한 일이기에 저는 군소리 않고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 사람이 하는 행동에는 어떤 것이든 이유가 있었으니까요.

 

“지갑은 챙겼고, 휴대전화도 챙겼고……가스랑 전기도 됐고. 좋아, 가자.”

 

삑삑거리는 알람을 끄고, 저는 잔뜩 짐을 구겨넣어 묵직해질 대로 묵직해진 여행가방을 끌고 1층으로 내려갔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현관 앞을 바라보면, 택시 옆에 서 있는 프로듀서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늘 입고 다니던 짙은 감색 정장 위로 새까만 코트를 걸치고, 택시 옆에 서서 시계를 확인하던 프로듀서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제 모습을 보자마자 재빨리 입구로 달려왔습니다.

 

“가방은 제가 들 테니 택시에 먼저 타세요. 공기가 찹니다.”

“네, 고마워요.”

 

활짝 열린 택시의 트렁크가 텅 비어 있는 것을 보면, 프로듀서의 짐은 아마도 본인이 메고 있는 저 자그마한 백팩 하나뿐인 듯 합니다. 잠시 후, 트렁크에 가방을 싣고, 제 옆자리에 앉은 프로듀서는 기사님께 행선지를 말했습니다. 택시가 출발하자 프로듀서는 고개를 돌려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타카가키 씨, 해외로 가는 건 처음이신가요?”

“아뇨, 처음은 아닌데요……미국에 가는 건 처음이에요. 지금까지는 비행기를 세 시간 이상 타 본 적이 없어서요.”

“……그렇군요.”

 

물론 정직하게 촬영만 하고 온다면 저도 최소한의 짐으로 가볍게 떠날 수 있었겠죠. 하지만, 사장님의 계획에 따르면 최소 일주일은 머물게 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들고 가는 짐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프로듀서는, 생각보다 짐이 적네요? 휴가까지 포함하면 거의 9일정도 있을 거잖아요?”

“저야 저쪽에도 집이 있으니까요. 사실 여권 하나만 달랑 들고 가도 문제될 건 없어요. 여차하면 사다 쓰면 되니까.”

 

그러고보면 이 사람, 미국사람이었죠.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 공항으로 향하는 길은 한산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2일 앞두고, 성탄절 분위기가 만연한 공항의 로비에는 아침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출국수속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저는 프로듀서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가며 전광판에 떠오른 시계를 바라보았습니다. 오전 6시 40분. 업무를 시작하기엔 약간은 이른 시간이었던 것인지, 중간중간 보이는 항공사의 로고가 그려진 카운터에는 아직 셔터가 내려와 있었습니다.

잠시 볼일이 있다며 휴대전화를 꺼내 드는 프로듀서의 말에 저는 비어있는 벤치로 향했습니다. 10분 정도 지났을까요, 의자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고 있자니 프로듀서가 제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누구랑 전화를 그렇게 길게 하세요?”

“도착하면 우리를 맞이하러 올 사람이요.”

 

프로듀서는 코트 주머니에서 두유 한 병을 제게 내밀었습니다. 편의점에서 사 온 것인지, 온장고에서 막 꺼낸 듯 따끈따끈했습니다.

 

“저도 아는 사람인가요?”

“네.”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대답에 순간적으로 한 사람의 얼굴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제 옆에 앉아, 봉투 속에서 꺼낸 티켓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데스크와 티켓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자리가 서로 떨어져 있어서요. 전화상으로는 남은 자리가 없다고 했는데, 우선은 한번 더 확인해봐야겠습니다. 일단 제가 예매한 티켓은 취소도 해야 하니까요.”

“네……하암.”

 

따뜻한 곳으로 들어와 긴장이 풀어진 탓일까요, 하품이 새어나왔습니다. 제 옆에 앉은 프로듀서는 봉투를 가방 속으로 되돌린 뒤, 자그마한 책 하나를 꺼냈습니다. 무슨 책인가 싶어 고개를 내밀어 책 속을 들여다 보는 저에게 돌아온 것은 알파벳의 폭풍이었습니다.

어쩐지 눈이 무척이나 뻑뻑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몇 번인가 눈을 꿈벅거리던 저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습니다.

 

 

드르르륵, 하는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시야가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고, 관자놀이 언저리에서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프로듀서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든 모양입니다. 몸을 일으키자 여전히 책을 읽고 있던 프로듀서가 이쪽을 돌아보았습니다.

 

“아, 일어나셨네요.”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깜박 졸아버렸네요…....”

 

시계를 바라보았습니다. 7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보면, 10분 정도 잠들었던 모양입니다.

 

“어제도 레슨까지 마치고 들어가셨으니 피곤할 만도 하죠.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이 사람은 안 피곤한가 보네요.

읽던 책을 탁, 소리가 나도록 덮고, 프로듀서는 곧바로 항공사의 데스크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데스크의 직원에게 티켓을 보여주고, 이따금씩 손짓으로 제가 앉아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무언가 이야기를 하자, 모니터를 바라보던 직원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습니다. 제 표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 것일까요?

잠시 후,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던 프로듀서는 저더러 잠시만 와 달라는 손짓을 했습니다. 저는 그가 서 있는 데스크로 향했습니다. 그러자 저를 알아본 것인지 데스크의 여직원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습니다. 역시, 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면, 이 정도의 변장은 금세 간파되는군요.

그녀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고, 저는 프로듀서를 바라보았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가까운 자리로 바꾸려고 하니까 이미 자리가 없다네요.”

“그야 그렇겠죠, 휴가철이니까요…….”

 

저는 한숨을 폭 내쉬었습니다. 별 수 없지요, 아쉽지만 탑승은 따로 하는 수 밖에요.

……라고 생각한 순간, 저를 바라보던 프로듀서가 품 속에서 카드 하나를 꺼냈습니다. 그 카드를 확인한 직원 분의 눈이 튀어 나올 듯 커다랗게 뜨였습니다. 조금 아쉽지만, 저를 봤을 때보다도 더 크게 놀란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퍼스트 클래스, 한번 타 볼래요?”

“……네?”

 

그의 손에 들린 카드는 금속 재질로 만들어진 것처럼 새까만 광택으로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어떠세요?”라고 하면서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그에게, 저는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

 

 

라운지로 오면서 에스코트를 해 주신 직원 분께 그 카드가 뭔지 물어보았더니, ‘블랙 카드’라고도 불리는 엄청난 카드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블랙 카드. 소문으로만 들었지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습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요? 활주로에 뭐 재밌는 거라도 있습니까?”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저는 고개를 돌렸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노트북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지금은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나저나……일정이 제때 끝난다면 성탄절부터 휴가인가요?”

“네. 일본 날짜로 성탄절부터 초하루 다음날까지죠.”

 

뜻밖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보통 휴가를 쓴다면 성탄절은 보내고 쓰는 것이 보통일텐데…….

그런 저의 질문에, 그는 뜻밖의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성탄절.”

“왜요?”

“……그런 일이 있어요.”

“저에게도 말 못할 일인가요?”

“네, 비밀입니다. 비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그의 대답에 저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한 이상 더 이상 그를 추궁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양심에 찔리는 것도 있고요.

 

“기껏 왔는데 앉아만 있으면 아깝죠. 한번 둘러보기라도 합시다.”

“그럴까요?”

 

프로듀서는 제 손을 끌고 라운지 여기저기를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라운지 내부에는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은 물론, 샤워실과 마치 SF영화에서나 나올 법하게 생긴 근사한 안마의자도 있었습니다.

 

“라운지를 돌다 보니까 라운딩을 하는 느낌……흐아아아~.”

 

생김새부터가 강렬했기 때문인지, 라운지의 안마의자는 온천의 그것과는 수준이 다른 성능을 자랑했습니다. 절반쯤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몸을 지탱하며 안마실을 나올 무렵이 되자, 라운지 내부의 스피커에서 탑승을 시작한다는 방송이 들려왔습니다.

저는 프로듀서의 뒤를 따라 탑승구로 향했습니다. 깔끔하게 제복을 갖춰 입은 승무원들이 나와 저희들을 반깁니다. 미국 항공사라서 그런지, 한두 사람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외국인으로 되어 있는 승무원들의 안내를 받아 자리로 향하면서, 저는 줄곧 떠오르던 의문점을 꺼냈습니다.

 

“캐서린에게 듣기로는 집은 LA에 있다고 들었는데……왜 뉴욕으로 가죠?”

“개인적으로 볼 일이 있어서요. 이틀 정도 그곳에 있다가 다시 LA로 갈 겁니다.”

“그렇군요.”

“그나저나 비행시간이 꽤 길어질텐데……혹시 비행기 멀미 하세요?”

“안 할걸요?”

“정말로요? 비행시간만 열 시간이 넘는데요?”

”음……아마도요……?”

 

저의 자신 없는 대답을 듣고 프로듀서는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멀미약 갖다 달라고 할게요.”

 

*** 

 

문득 잠에서 깬 저는 눈만 뜬 채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온갖 편의시설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리클라이닝 시트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기내식을 먹고, 반주로 나온 샴페인과 와인을 몇 잔 들지도 못하고, 저는 식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곯아떨어져 버렸습니다. 돌이켜보면, 어제 저녁부터 짐을 챙기느라 두어 시간밖에 자지 못한 후유증이 뒤늦게 나타난 모양입니다. 시트의 한쪽 모퉁이에 설치된 LCD화면을 톡톡 두드리자 비행 정보가 간략하게 나타났습니다. 이륙 이후 다섯 시간이 지났고, 기내식으로 점심을 먹은 것이 이륙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니, 약 세 시간 가까이를 잤다는 말이 되네요.

몸을 일으키자 실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륙 직후와는 정 반대로, 몇몇 안내등과 비상등을 제외하면 불이 꺼져 있는 실내는 어둑어둑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경험했던 비행기 풍경과는 전혀 다른 모습. 이따금씩 비행기 특유의 진동과 울렁거림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비즈니스 호텔로도 착각이 될 만한 분위기였습니다.

 

‘프로듀서는……자고 있으려나?’

 

저는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습니다. 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옆자리에 앉은 프로듀서는 전원 버튼이 반짝거리는 노트북을 접이식 테이블 위에 펼쳐 놓고 그 앞에 엎드린 자세로 잠들어 있었습니다.

사무실에서 늘 봐오던 자세였습니다.

엎드려있는 그의 등에는 항공사의 로고가 그려져 있는 담요가 반쯤 흘러내린 채 덮여 있었습니다. 아마도 진동 때문에 흘러내린 것이겠죠.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반쯤 흘러내린 그의 담요를 다시 제대로 덮어준 다음 다시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아직 비행 시간은 아홉 시간이나 더 남아 있으니, 저도 조금은 사색에 빠져 봐야겠네요.

저는 독서용 전등을 켜고 숄더백에서 노트를 꺼냈습니다. 모퉁이가 살짝 접혀 있는 페이지를 잡고 펼치자, 가로선으로 절반으로 나누어진 페이지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여전히 절반밖에 채워져 있지 않은 페이지였지만, 지금은 약간이나마 내용을 더 채워 넣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펜을 집어 들고, 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노트의 텅 빈 쪽, [P]라는 단어의 아래쪽 여백에 머릿속에 떠오른 내용들을 적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9살, 11살, 13살.

-뉴욕, 시티 필드, 브로드웨이

-LA, 헐리우드

-일본, 도쿄

 

“으으음…….”

 

달그락, 하는 소리와 함께 들려온 신음소리에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습니다. 무슨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인지, 옅은 신음을 흘리는 그의 눈꺼풀은 독서용 라이트의 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습니다.

 

***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으응~!”

“으아아~!”

 

비행기의 탑승구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우리 두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나란히 크게 기지개를 폈습니다. 분명 이역만리 타국의 땅을 밟고 서 있었지만, 장장 14시간에 걸친 비행을 마치고 밟는 이국의 땅은 낯설다기보다는 반갑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습니다. 수발을 드느라 고생하신 승무원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전하고, 마치 고무줄을 잡아 늘리는 듯한 신음소리와 함께 크게 기지개를 편 우리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터덜터덜, 입국 게이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게이트를 지나 입국 심사대가 보이기 시작할 무렵, 프로듀서는 제 여권에 종이 몇 장을 끼워 주었습니다.

 

“이거 가지고 가셔서 하나씩 보여주면 될 겁니다. 질문 내용은 대충 기억하시죠?”

“네.”

“혹시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면 불러주세요.”

“네.”

 

입국 절차 자체는 별 다른 문제가 없었습니다. 역시나 퍼스트 클래스라고나 할지, 전용 게이트가 있었기에 대기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고, 사전에 프로듀서가 가르쳐 준 간단한 질문 몇 가지를 대답하고 나니 금세 입국허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저는 입국 심사장을 바라보았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복을 갖춰 입고, 근엄하게 인상을 쓰고 있던 직원들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심사대 뒤쪽에 우르르 모여 있었습니다. 그 인파의 가운데에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저의 프로듀서였습니다.

난처한 표정으로 직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함께 사진을 찍기도 하고, 사인을 해주기도 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쩐지 신기하다고 느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시간이…….”

“정말 인기 좋네요?”

“……죄송합니다.”

“아뇨, 놀라서 한 말이에요. 정말로요.”

 

거듭 사과하는 프로듀서에게 괜찮다는 말을 반복하며, 부쳤던 짐을 찾은 우리는 입국장을 거쳐 공항을 빠져나갔습니다. 도쿄에 비하면 약간 싸늘한 날씨였기에 저는 가방 속에서 접어 두었던 머플러를 꺼내 둘렀습니다. 제 여행가방을 끌고 가는 프로듀서의 뒤를 따라 걸으며 택시 정류장과 버스 승강장을 지나쳤지만, 마중을 나온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맞이하러 온다는 사람은 어디에 있나요?”

 

프로듀서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습니다. 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저 앞에 서 있는 한 여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청바지 위에 입은 새하얀 패딩과, 털뭉치가 달린 비니 아래로 흘러내리는 금발머리가 눈에 띄는 그녀는 저도 무척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Hey! 카에데! 윌리!!”

“캐서린?”

 

저는 그녀와 가볍게 포옹을 나눈 뒤 프로듀서를 바라보았습니다.

 

“프로듀서가 부른 건가요?”

“네, 제가 불렀어요. 차 좀 가져다 달라고요.”

“자동차……아, 저것 말인가요?”

 

저는 그녀의 등 뒤에 서 있는, 검은 광택이 흐르는 승용차를 바라보았습니다. 광택이 흐르는 육중한 차체에 비해 옛날 영화에 나오는 자동차들처럼 동글동글한 헤드라이트가 어쩐지 귀여워 보이는 자동차였습니다. 동글동글한 헤드라이트 가운데, 은색으로 반짝이는 격자무늬 라디에이터 위에는 양쪽에 날개를 펼치고 있는, 알파벳 B를 형상화한 엠블럼이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마치 날개를 펼친 독수리처럼 B의 아랫쪽에는 꼬리깃도 활짝 펼쳐져 있었습니다.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네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동차에는 문외한인 제가 보더라도 한 눈에 알 수 있는, 무척 고급스러워 보이는 자동차였다는 것입니다.

 

“캐서린 차에요?”

“No! 난 아직 이런 차 못 사요. 비싸기도 비싸고.”

 

손사래를 치던 캐서린은 손가락을 들어 조수석의 문 앞쪽을 가리켰습니다. 그 곳에는 양각으로 새겨진 청색 테두리를 두른 주황색 숫자가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습니다.

31번. 제가 잘 아는 누군가를 상징하는 번호였습니다.

 

“누구 건지 알 거 같죠?”

“아주 잘 알겠네요.”

 

저는 고개를 돌려 자동차의 주인을 바라보았습니다. 언제 열쇠를 받은 것인지, 트렁크에 제 여행가방을 실은 그 사람은 곧바로 뒷좌석의 문을 열고,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를 숙였습니다.

 

“타시죠, 숙소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다음 날, 뉴욕 시내에 위치한 센트럴 파크.

어제까지만 해도 햇빛이 쨍쨍한 날씨였기에 조금 따뜻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다음 날이 되자 햇빛은 귀신같이 종적을 감추었다. 비나 눈이 올 정도는 아니라지만, 햇빛을 가리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구름은 옅게 깔려 하늘을 덮고 있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서서 조명 설비가 주렁주렁 설치된 세트장 주변을 뛰어다니는 스태프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 시선을 돌리면, 의상을 입고 카메라 앞에 의연하게 서 있는 카에데의 모습이 보인다.

팔에 걸고 있는 그녀의 외투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외투를 고쳐 걸고, 주머니에 넣어둔 핫팩의 온도를 확인했다. 좋아, 아직 따뜻해.

촬영장을 바라보았다. 연신 터지는 카메라의 플래시에 미간을 찌푸리면서, 나는 어제 저녁에 있었던 미팅을 떠올렸다.

 

 

 

“네? 고작 이게 끝이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현지 담당자에게서 받아 든 스케줄은 빈말로도 정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스케줄이었다.

요구하는 사진은 고작 12컷. 샘플을 포함한다 하더라도 전체 촬영 시간이 반나절도 안 되는, 엄청나게 심플한 촬영이었다. 고작 이거 하나를 찍자고 지구 절반을 돌아서 왔다는 말인가.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이거는 그냥 낭비잖아.

내 표정을 읽은 것인지, 담당자는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사실, 저희들도 굳이 타카가키 씨가 오실 필요가 있나 싶었어요. 그렇지만 저희 사장님께서 꼭 필요하다고 하셔서……양해 바랍니다.”

“……그렇다면 별 수 없죠.”

 

항의를 하려던 나는 단념하고 어깨의 힘을 뺐다. 중간관리직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 뒤로 디렉터가 동참한 간단한 미팅을 마치고, 카에데와 나는 미리 잡아둔 호텔로 향했다. 미팅을 마치고 그녀에게 이번 일에 대한 감상을 물었지만, 돌아온 것은

 

“뜻밖이네요.”

 

라는 한 마디가 전부였다.

뭔가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마치 내 휴가에 맞춘 듯한 해외 일정도 그렇지만, 그 일정이란 것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단순했기 때문이다. 뭔가,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이번 일에 개입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아직은 단서가 부족하다. 지금은 어디까지나 심증 뿐, 좀 더 확실한 단서가 필요했다. 최소한 내가 누구의 손아귀에서 놀고 있는지는 파악해두고 싶었다.

 

 

 

“응?”

 

그 때, 나는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기척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옮기던 나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나를 바라보던 한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갈색의 풍성한 머리카락을 허리 언저리까지 늘어뜨린 소녀였다. 종아리를 절반 정도 덮는 가죽 부츠 위에는 옅은 분홍빛 원피스를, 그리고 그 위에는 모자와 목덜미에 털이 달린 밤색 외투를 걸치고 있던 그녀는 호기심을 품은 고양이처럼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나와 눈을 마주친 소녀는 촬영을 구경하던 인파 속으로 잽싸게 몸을 숨겼다.

‘별 일도 다 있군’이라 생각하며 다시 촬영장으로 눈을 돌리려는 그 순간, 누군가가 내 코트의 옷자락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누군가 싶어 뒤를 돌아보았지만 걸어 다니는 행인들의 모습만 보일 뿐, 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기야, 여기.”

 

목소리는 아래쪽에서 들려왔다. 일본인 특유의 억양이 다소 느껴지기는 하지만 유창한 영어로 말하는 그 목소리는 통통 튀는 듯한 콧소리가 무척이나 매력적인 목소리였다. 순간적으로 프로듀서로써의 자신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녀석의 머리를 눌러 집어 넣으며 시선을 내려 아래쪽을 바라보자, 목소리의 주인이 눈에 들어왔다.

풍성한 다갈색 머리카락, 밤색 외투, 가죽 부츠.

그녀는 조금 전,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소녀였다.

 

“헤에, 야구 때려치고 어딜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아무래도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억양으로 보면 토박이도 아닌데 나를 기억한다는 건 조금 의외였지만.

 

“프로듀서를 하고 있는데요. 그리고 안 때려쳤어요.”

“프로듀서? 으음……디렉터 같은 건가?”

“저는 엔터테인먼트 쪽이니 매니저에 좀 더 가깝죠.”

“헤에, 그렇구나. 그럼, 누구의?”

 

나는 손을 들어 카에데가 서 있는 촬영장을 가리켰다.

 

“아? 아아, 저 사람? 올리브색에 홍채이색증? 멋진 사람이네. 이름이 뭐야?”

 

뜻밖에도 보는 눈은 있는 아이였다.

 

“타카가키 카에데라고 합니다. 멋진 사람이죠.”

“오오, 좋은 표정인걸. 타카가키, 타카가키…….”

 

카에데의 이름을 중얼거리던 그녀는 “냐하핫”하고 웃으면서 추위 탓인가 코끝이 빨갛게 된 코를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개가 사람의 냄새를 맡는 것처럼.

 

“응, 역시 좋은 냄새야. 당신, 지금 하고 있는 거 즐거워?”

“네, 무척이나.”

“그렇구나……대답 고마워. 그럼 이만~.”

 

뭐라고 할 틈도 없이 그녀는 통통 튀는 발걸음으로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소녀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자니, 등 뒤에서 잠시 휴식을 알리는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또각, 보도블럭을 울리는 하이힐의 발굽소리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촬영용 복장을 걸친 카에데가 훤하게 드러난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들고 있던 외투를 그녀에게 덮어주면서 주머니의 핫팩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수고하셨어요.”

“조금 전에 누구랑 이야기하고 계셨어요?”

“글쎄요……지나가던 학생처럼 보였는데, 누군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잘 봐줘야 18살 언저리로밖에 안 보이는 아이였는데도 선수로써의 나를 알고 있다는 것은 조금 의외였지만.

그나저나, 좋은 냄새라는 건 무슨 뜻이었을까. 옷깃을 당겨 냄새를 맡아 보았지만, 당연하게도 내 코는 스태프들에게서 배인 담배냄새밖에 구별하지 못했다.

나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보일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그 소녀를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 때, 촬영장 쪽에서 스태프 한 명이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프로듀서 씨! 잠시 괜찮을까요?!”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받은 그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코트의 옷깃을 여미었다.

 

 

 

휴식을 갖자고 한 디렉터가 무색해질 정도로, 휴식 이후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촬영이 모두 끝났다.

의상을 반납하고, 인사를 나눈 스태프들과 헤어진 뒤, 우리는 센트럴 파크의 근처에 위치한 카페로 향했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요.”

“그러게요.”

 

그녀는 커피를 홀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새 구름이 약간 걷힌 것인가,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하늘은 강렬한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려는 순간,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전화의 화면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사장이었다.

 

“네, P입니다.”

-담당자한테 끝났다는 소식 듣고 전화했다. 촬영은 잘 끝났나?

“네, 너무 잘 끝나서 문제죠.”

 

나는 왼팔에 찬 시계를 바라보았다. 뉴욕 시간으로 오후 다섯 시. 도쿄라면 지금쯤 오전 7시일 것이다.

일찍도 일어나는군.

 

-그래, 해외까지 가서 일하느라 수고 많았다. 저번에 말한 대로, 휴가 끝날 때까지 오지 마. 알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타카가키 씨는 어떻게 합니까? 월요일부터 일정은 밀어놨는데요.”

 

시야 한 구석에 그녀가 움찔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을 내색하지 않고 나는 전화에 집중했다.

 

-그녀도 휴가로 처리해놨어. 일정 너랑 같이 맞춰놨으니까, 올 때 같이 오도록.

“……네?”

 

그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뒤늦게 휴대전화를 바라보았지만, 화면은 다시 평소의 까만 화면으로 바뀌어 있었다. 휴대전화의 화면에 비치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나와 함께 하고 싶다'는 카에데의 말을 듣고 난 이후, 나는 그녀의 스케줄을 정리했다. 이번 1주일간을 그녀와 함께 보낼 수 있도록. 하지만, 좀처럼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그녀의 휴가에 관한 일이었다. 인사팀장이 좀처럼 허가를 내려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쉽게 끝나버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역시나, 일이 너무 쉽게 풀린다.

 

“……프로듀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두 손으로 커피잔을 꼭 쥔 카에데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휴가 기간이 바뀌어서 말이죠.”

“네?”

“오늘부로 저도, 타카가키 씨도 둘 다 휴가입니다. 정월 다음 날, 귀국하는 날까지 말이죠.”

“어머? 정말인가요?”

 

내 말을 들은 그녀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텔에서의 저녁식사를 마치고, 프로듀서와 저는 호텔의 로비에서 캐서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프로듀서가 개인적인 볼일이 있어 자리를 비워야 하기에, 통역을 겸한 안내역으로 캐서린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물론 본인이 흔쾌히 수락해 준 덕분이기도 하지만요.

 

“어디로 가시나요?”

“……클럽하우스로 갑니다. 제가 예전에 뛰었던……메트로의 클럽하우스로요.”

 

잠시 말을 꺼내기를 망설이던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메리엇과 약속을 했어요. 미국에 오면 한 번만 들러달라고.”

 

그렇게 말하는 프로듀서의 손에는 커다란 반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의 집에서, 아크릴 쇼케이스 안에서 본 적이 있는 물건이었습니다.

메리엇은 아마도 그 날, 연회장에서 만났던 노신사의 이름인 ‘조 메리엇’을 말하는 것일테지요. 단순히 이름이었을 뿐인데, 입으로 그 이름을 말하자 어쩐지 불안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같이 가면 안 되겠냐는 말에,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오래 끌 생각도 없고요. 그냥……인사만 하고 올 거에요.”

“그렇군요…….”

 

잠시 후, 캐서린이 호텔 로비로 들어왔습니다. 그녀에게 저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프로듀서는 저를 한번 바라본 뒤 호텔 밖으로 나갔습니다.

 

 

호텔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캐서린은 빙글, 몸을 돌려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럼, 우리도 슬슬 이동해 볼까요?”

“네? 어디로요?”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요.”

“네……?”

“자세한 이야기는 약속 장소에서 해 드릴게요. 우선은, 이동하죠.”

 

캐서린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호텔 근처에 위치한 카페였습니다. 해가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뉴욕의 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장소였습니다. 주문한 커피를 들고 자리에 앉자, 저를 바라보던 캐서린은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카에데는, 언제부터 P를 신경쓰기 시작했나요?”

“……네?”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그런 거에요. 그 날,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나서 떠오른 생각이었거든요.”

 

저는 곰곰히 생각했습니다. 언제부터였을까요? 제 안에서 그 사람이 이렇게 커지게 된 것은.

돌이켜보면 수많은 계기가 떠오릅니다. 트레이닝으로 힘들어하던 제 손을 이끌어주던 때,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게 되었을 때, 두려워하던 제 손을 잡아주었던 때……참으로 많은 계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확실하게 계기가 되었던 것이 무엇인지, 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데뷔한 지 반 년 정도 되었을 때였어요.”

 

캐서린은 조용히 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년 합동 라이브의 오디션이었어요. 오디션을 마치고, 합격 소식을 듣고 나오는 길에, 불합격 통보를 받은 다른 회사의 아이가 복도에서 울고 있는 것을 봤어요. 저보다 어린 아이였죠. 굉장히 오랫동안, 그리고 많이 준비를 했다고 들었어요.”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군요.”

“……네. 하지만, 그 때의 저에게는 아니었어요. 그 날 이후, 스테이지에 오르는 게 두려워졌거든요. 25살,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주제에 괜히 앞날이 창창한 아이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보다 더 열심히 하고, 저보다 더 피땀을 흘린 사람들이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죠. 내가 이 자리에 서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어요. 사람들이 저를 보는 시선이 두려웠죠.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그가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어떤 이야기였나요?”

“’프로로써 자부심을 가지세요. 당신이 여기에 서 있는 것은 당신 스스로가 쌓아 올린 노력의 결실이지, 결코 다른 요인이 작용한 것이 아닙니다. 위를 보세요. 아래를 보는 건 정상에 서서 봐도 늦지 않습니다’라고요.“

 

이야기를 하면서 돌이켜보았지만, 정말로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이야기를 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눈치를 챈 것인지.

 

“……이 때부터였을 거예요. 제가 그에 대해서 신경이 쓰이게 된 건.”

 

제 이야기를 들은 캐서린은 풋, 하고 웃었습니다.

 

“과연, 그런 조언을 들어 버린다면 궁금할 수 밖에 없겠네요. 고마워요.”

 

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캐서린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은, 그 해답을 알고 있나요?”

“글쎄요……해답이라고 할까, 사실 그 사람은 선수 시절의 그를 가장 가까운 장소에서 봐 온 사람이에요. 이제 곧 올 때가 됐는데…….”

 

그 때, 카페의 문이 덜컥 열리면서 거친 숨을 헐떡이는 거구의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야구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짙은 올리브색 파카를 걸치고, 커다란 가방을 든 채 카페 안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자리에 앉아 있던 캐서린을 발견하고는 활짝 웃으며 다가왔습니다.

히스패닉……이라고 하던가요? 캐서린에 비하면 누런 빛이 도는 피부색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무척이나 맑은 하늘색으로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눈이었습니다.

 

“~~~!”

“~~~~!”

 

이야기를 시작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그제서야 저는 한 가지 중요한 문제를 깨달았습니다.

두 사람이 뭐라고 말하는 지 전혀 모르겠어요.

캐서린도, 프로듀서도, 제가 있을 때는 항상 일본어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캐서린의 일본어는 다소 어눌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상당히 공부를 한 것인지 알아듣기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어요. 하지만, 지금의 경우는 조금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도저히 언어의 장벽을 넘지 못한 저는 조용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습니다. 그런 제 모습을 눈치챈 것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캐서린이 그의 말허리를 끊고 그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Oh, Sorry.” 라고 말하며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미안해요. 이제부터는 제가 통역해드릴 테니까.”

 

그녀의 말에 저는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정말 좋은 친구를 둬서 다행이네요.

 

“저기, 이 분이 누구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월터 그레이시. 재작년에 은퇴한. 한때 윌리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남자죠. 선수 시절의 윌리에 대해서라면 이 사람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에요.”

“그럼 혹시…….”

 

캐서린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 카에데의 이야기를 했더니 꼭 만나고 싶다고 한 것도 이 사람이에요.”

 

 

-------<(Re)Write─덮어 쓰는, 혹은 다시 쓰는. (4)>로 이어집니다.


 

과연 몇 편에서 끝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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