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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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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11, 2017 01:23에 작성됨.

마치 아무것도 없는 한겨울의 무덤으로 들어가는 듯한 차디찬 알람소리가 들려온다. 너무나도 아린 손끝을 움직여 머리맡에 둔 휴대폰의 알람을 끈다. 밖에 비가 오는 소리가, 조용한 듯 조용하지 않은 듯이 천천히 난다. 비가 오는건가, 그녀가 사라지면서 시간관념마저 잃어버린 나는 어둑어둑해진 바깥을 잠시 멍하니 쳐다보다 천천히 씻으러 일어난다. 알람을 분명히 끈 것 같은데 휴대폰에서 전화가 오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무엇인걸까, 이 일상 속의 비일상은. 나는 작게 중얼거리고는 대충 씻다가 만 몸을 재빠르게 닦고는 휴대폰을 집어들어 발신자를 살펴본다. 발신자는 없다. 그렇다는 것은 공중전화에서 걸려오는 전화. 나는, 마치 새로 시작할 것만 같은 이야기의 느낌을 느끼며 전화를 받는다. 잠깐 아무 말이 없던 전화에서, 마치 기계적으로 준비된 문장이라는 듯이 빠른 속도로 무언가를 이야기해나간다. 전화는 내가 바라던 그런 종류의 전화가 아니었다. 방문 판매조차 하기 귀찮았던 회사가, 전기를 잡아먹는 전화기를 몇 대씩 돌려 송출하는, 통신 판매의 전화. 불과 몇십 초 전에 느낀 감정이 그저 헛된,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란 것을 깨달으며 길게 한숨을 내쉰다. 어떻게 발신자를 완전히 없앤걸까, 아무래도 좋은 질문을 잠시 붙들고 있던 나는 거칠게 전화를 끊으며 휴대폰을 탁상에 내려놓고는 다시 몸을 씻는다. 천천히, 더욱 천천히, 이것보다 더 느리게 할 수는 없을 정도로. 오늘은 왠지 기분이 꿀꿀하다. 날씨 탓일꺼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머리와 몸을 대충 말리고 옷을 갈아입고는 집을 나선다.

 

 

회상의 지하철역들을 거쳐, 늘 가는 역에서 내린 나는 회사 안으로 들어가, 나의 일상인 잡무를 시작한다. 금방이라도 그칠 것같았던 비는 끊길 듯, 끊길 듯 끊기지 않고 계속해서 내린다. 아마 오늘의 비일상은 저 비뿐이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잠시 비가 내리는 화면을 비춰주는 유리창을 쳐다보다 상사가 나의 어깨를 잡는 듯한 느낌에 조금 놀라며 고개를 돌려 잡무에 눈을 고정시킨다. 나의 어깨를 힘을 주어 잡았던 상사가 나의 재빠른 대처에 어깨에 손을 뗴고는 빗물을 잔뜩 먹은 듯한 발걸음으로 다른 곳으로 움직여 나에게서 멀어져간다. 비오는 날의 사람이란 건 저렇게 꿀꿀한 발걸음으로 걷는 것이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분주히 손을 놀려 아무래도 좋은 보고서를 정성스럽게 작성하는 잡무를 시작한다. 잡무란 것은, 하다 보면 요령도 생기고, 적절히 상사의 입맛에 맞게 쓸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이 보고서도 마찬가지. 마치 현재의 나의 삶처럼 별 내용은 없는 보고서지만, 그들은 이런 보고서를 보면 좋아할테지.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옅게 자조적인 미소를 입가에 띄운다. 커서가 반짝이는 모니터를 거울삼아 불투명한 나의 얼굴과, 내가 얼굴 근육을 움직여 띄운 기묘한 미소를 쳐다본다. 나는 비가 오는 것은 싫어하지 않는다. 그저, 비오는 날에는 그녀를 떠올릴 수밖에 없기에 조금 기분이 다운된 것일지도. 나의 손가락이 습기를 먹은 듯이 조금 느려진다. 습기를 먹은 만큼 하늘은 맑아지겠지, 나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하며 손가락을 놀린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꽤나 적절한 시간대에 작업을 마친, 혼신의 힘을 다한 것처럼 보이는 보고서를 상사에게 메일로 보내자 얼마 안 있어 상사가 나를 그의 자리로 부른다. 이번에는 무슨 트집을 잡을까, 나는 항상 불만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 있는 듯한 상사를 떠올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며 상사의 집무실 문을 두드린다. 들어오시게, 비가 와서 그런지 낮고 침울한 목소리가 집무실 안에서 들려온다. 나는 일단 최대한 비굴해질 준비를 하며 집무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안에 있던 상사가 잠시 비가 오는 창 밖을 쳐다보다가 나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옅은 미소를 짓는다. 상사의 저 미소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어쩐 일이시냐고 물어본다. 상사는 잠시 나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뜬금없이 나의 과거 이야기-프로듀서를 했던 시절의-를 묻는다. 내가 당황하자 상사가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라고 말하고는 자신의 턱수염을 쓰다듬는다. 저건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가 있을 때 하는 행동인데, 나는 몇 년간이나 상사를 쳐다본 결과로서 머릿속에 저장되어있는 행동양식지침서에서 관련된 항목을 찾아내고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나의 생각을 읽었는지, 아니면 표정에 다 드러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상사가 재밌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저 미소는 무슨 의미일까, 나는 머릿속의 행동양식지침서를 황급히 뒤적거리며 그의 미소에 담긴 의미를 해석해보려 해본다. 하지만 그것은 의미 없는 것. 이내 상사는 나에게 편지같아 보이는, 빗속에 섞여있는 화학 약품 냄새가 나는 편지를 내민다. 화학약품이라, 나는 마치 나스카의 황량한 벌판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 그림이 그려진 편지. 나는 해석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어쩌면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열쇠를 남겨놓았던 것인지도. 비가 조금 거세진다. 하지만 이제 축축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어쩌면, 메말라버린 내 가슴에 축축한 감성을 더하기 위해 내리고 있는 걸지도. 나는 이제 더 이상 비가 차갑다고 느끼지 않는다. 오늘은 왠지 우산이 필요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마치 그 옛날, 비 오는 날에 실종되었던 그녀를 찾으러 돌아다녔던 그 날처럼, 선명하게 내 눈 앞에 그려진다. 그 상태로는 오늘은 더 일하라는 것은 무리겠군, 상사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가라는 듯이 손을 내젓는다. 오직, 그 한 장의 편지만을 나에게 넘겨준 채로. 

 

 

내 자리로 돌아온 나는 편지봉투를 뜯고 내용물을 읽는다. 내용물은 알 수 없는 그림들이 그려진, 언뜻 보기에는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편지 한 장. 하지만 나는 그것을 보고 비가 오는 바깥을 잠시 쳐다보다 황급히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간다. 후다닥 밖으로 나가는 나를 다른 사원들이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것 같다. 하지만 비가 오는 지금이 아니면 나는 그녀를 만나러 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빗 속에서 실종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런 아이돌이었으니까.

 

 

비를 맞아가며 달려 회사 근처의 역인 츠이게키역(終戟驛)에 도착한다. 이야기는 곧 끝난다. 하지만 끝난다는 것은 또다른 시작을 할 수도 있는 것. 나는 빗 속에서, 그녀가 마치 시키 트리스메기스토스처럼, 그러니까 마치 엄청난 마법사인 것처럼, 내 앞에서 나타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그저, 그녀가 이 빗 속에서, 어디에서라도, 나의 앞에서, 나의 가슴 속에서, 완전히 젖어버린 내 앞에서, 우산을 들고 서 있어주기를 바란다. 나는, 나는....

 

 

회상의 장소였던 몇 개의 역을 세 배 빠르게 지나쳐 집에 도달해서는, 소중한 감정의 작은 조각이고자 남겨두려 서랍에 넣어두었던 그녀의 마지막 편지를 꺼내든다. 그리고 다른 것을 생각할 것도 없이 그녀와 내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장소, 그 빌어먹을 장소로 달려간다.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그 프로덕션. 그리고 마지막 실종. 나는 그 모든 것이 빗 속에서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려가는 것을 느끼며 그 거리로 달려간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빨리. 이제 저 골목만 지나면 그 빌어먹을 프로덕션이다. 나는 빗속에서 조금씩 젖어가는 정장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조금씩 녹아내리며 추억의 향기를 내뿜고 있는 편지 두 장을 쥔다. 조금만 더 빨리 가면 그녀가 있을까, 나는 마법을 바란다. 나는 그녀를 보고싶다. 나는.... 그녀가 너무나도 보고 싶다. 골목 끝에서 강렬한 냄새가 난다. 나는 빗속에서도 섞이지 않는 그 향기를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이 곳의 이름은 시게키로(始戟路). 비 오는 이 곳에서, 우산을 들고 가만히 서 있던 여성이, 나를 향해 미소짓는다. 나는 그녀의 고양이상의 얼굴을 보고는 우뚝 멈춘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다시는 끝내지 않을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듯이, 다시는 끝내지 않겠다는 듯이.

 

 

 

 

후기

 

이 글은 전에 썼던 그녀가 없는 거리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이 글을 빌어 이 글의 첨삭을 도와주신 후고링 님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그 분의 도움에, 이 글은 조금 더 생명력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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