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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사각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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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10, 2017 19:36에 작성됨.

“후미카!”
달콤한 과실과도 같은 꿈에서 깨어나, 당신이 ‘그녀’의 이름을 외친다.
깜깜한 공간의 적요함을 걷어낸 단말마 같은 외침이 온 방을 헤집고 다니는 동안 당신은 침대에서 일어나 보이지 않을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오래 전 꿈, 당신과 후미카가 아직 먼 미래의 참극을 모른 채 행복을 만끽한 꿈속에서 당신은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발견한 듯,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는 밖으로 나간다.
태양의 눈을 가린 시퍼런 달빛이 온 세상을 조명하는 밤의 길거리. 그곳에서 당신은 잠들어버린 길바닥을 지르밟아 깨우고 있었다.

인기척이 지워져버린 공원 앞에 당신이 서 있다. 후미카와 달을 보던 그 날 그녀와 함께 있던 공원이다. 그 날과 모든 것이 똑같듯 달은 달무리로 자신의 눈물을 가리고 세상에 등을 돌린 채 시퍼런 정기를 뿌리고 있고, 그 아래에는 당신과 후미카가 있던 작은 가로등만이 그 날의 추억을 상기시켜 준다.

그렇지만 그곳엔 후미카는 없다. 어느 것 하나 달라진 것 없는 주변의 경관이 당신의 추억을 비웃듯 주위를 빙 둘러 당신을 본다.
서글픈 가슴을 움켜진 채 밖을 나서려는 당신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놀란 표정과 함께 당신은 소리의 근원지를 찾기 위해 공원을 둘러본다.
공원 중앙의 호수 반대편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당신은 한달음에 달려간다, 거기에 서 있는 소리의 진원지를 마주보며.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흐릿했던 윤곽이 점차 뚜렷해진다. 윤기 있는 검은색 생머리가 어깨에 두르고 있는 처량한 숄이 그 때와 별 변한 것이 없는 그녀의 모습이.
“후미카!” 큰 소리로 외쳐본다. 그 말에 반응하듯 당신을 향해 돌아보는 ‘후미카’가.. ‘후미카’가..
“프로듀서.. 씨?”
‘후미카’가.. 아닌 그곳에 서 있던 것은 ‘아리스’였다.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지 당신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프로듀서 씨? 괜찮아요? 프로듀서 씨.”
놀란 듯한 아리스가 당신의 상태를 묻는다.
당신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얼빠진 사람처럼 바닥을 한참 보다가 미어진 마음이 풀렸는지 앉은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프로듀서 씨..”
보고 있던 아리스가 감싸 안으며 위로해주지만, 아리스도 당신에게 물든 탓인지 참았던 눈물을 쏟아낸다. 하염없이.. 그저 하염없이 말이다.


“여기요. 프로듀서 씨.”아리스가 당신에게 캔 커피를 건넨다.
“아, 고마워. 아리스.”
너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자연스런 대답이 나온다.
“타치바나입니다만.”
당신과 아리스는 공원 벤치에 앉아, 캔 커피로 차가워진 몸을 식히고 있었다. 눈 밑에 미처 지워지지 않은 눈물 자국이 흡사 비극적인 이별을 선고받은 연인들 마냥 짙게 내려앉아 있다.
“그나저나, 타치바나는 왜 여기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를 먹다 혀를 뎄는지 혀를 삐쭉 내밀고는 식히고 있던 아리스가 입을 가리고는 대답한다.
“여기는, 저와 후미카 언니가 자주 산책하던 공원이에요.”
예상 밖의 대답에 사례가 들린 당신이 기침을 한다.
“괜찮으세요? 프로듀서 씨. 여기 손수건이요.”
놀란 표정의 아리스가 당신에게 손수건을 건넨다.
“고마워, 타치바나.”
잠시 머뭇거리는 아리스가 고개를 돌린 채.
“오늘만큼은 아리스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당신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아리스를 똑바로 바라본다. 전의 대답 탓인지, 아니면 커피의 카페인 때문인지 크게 늘어진 눈동자가 좀처럼 원래대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침착하게 호흡을 가다듬고는 당신은 말한다.
“별일이네. 타치바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 잠시 당신을 째려보는 아리스.
“오늘만이라구요. 오늘만.”
언제나의 아리스처럼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잠시 동안의 침묵 속에서 가로등의 따사로운 빛이 둘을 비추고는 두 사람은 달을 올려다본다. 그 때와 변함없는 달이 두 사람 머리 위에서 은총을 내린다.

달의 정기가 퍼렇게 녹아든 밤의 공원은 상상이상으로 쌀쌀하다. 당신과 아리스는 캔 커피로 막아보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한기로 인해 몸의 빨간색 열기가 파랗게 염색된다. 덜덜 떠는 몸으로 당신은 아리스를 바라본다. 아리스 또한 캔 커피의 열이 식었는지 오들오들 몸을 떤다.
이대로 안 되겠다 생각한 당신은 아리스에게 제안을 한다.
“으으. 아리스, 여기서 가만히 있는 것보단 우리 집으로 가지 않을래?”
매우 싫은 듯한 표정을 보이는 아리스가 대답한다.
“제가 거길 왜 가야 되죠?”
당신에게 반박할 틈조차 주지 않고 그대로 밀어붙인다.
“나올 때 여러모로 곤란하기도 하고,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아직 학생인 제가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껄끄러워서 싫어요.”
당신은 그저 멍하니 듣다가 그 때와 같은 아리스를 회상한 건지 작게 웃음을 터뜨린다. 그 모습을 보는 아리스가 약간은 부끄러운지 말을 더듬는다.
“왜, 왜죠. 왜 웃는 거죠? 프로듀서 씨.”
당신도 아리스도 공원도 모두 변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있다. 당신은 여전히 변변찮은 프로듀서이고 아리스는 아직 그 때의 티를 온전히 벗지 못했으며, 공원 역시 그 때 보았던 달빛을 한 움큼 머금어 몸을 푸르게 가꾸고 있었다. 단 하나만 빼고.

길가엔 가로등이, 하늘엔 별빛들이 자신을 가꾸고 그 아래엔 당신과 후미카가 밤의 한을 피하기 위해 집으로 향한다.
소란스러운 낮의 분위기와는 상반된 밤의 차분한 분위기가 당신과 아리스의 거리를 좁혀 오게 만들며, 꿈같은 아찔한 느낌이 거리에 깔린다.
빛들의 신중한 인도 속에서 당신과 아리스는 무사히 집으로 도착한다. 문을 열고선 어두운 방을 밝힐 불을 켜기 위해 벽면을 이리저리 더듬는다.
깜깜함이라는 이름의 수많은 거미들이 틈 사이로 도망치고 형광등이라는 살충제가 방안 곳곳에 뿌려진다. 그와 동시에 다른 날의 흩날려진 파편들이 거미가 지나간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 날을 기억하고 있는지 아리스가 너부러진 방을 충격을 받는다.
“전과.. 변함이 없네요, 이곳은.”
그 말을 들은 당신은 가만히 그 날의 상처가 남은 흉터를 꺼내본다. 후미카가 사라진 그 날, 당신에게 배달된 후미카의 책을 받고는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고는 주저앉아 멍하니 천장을 보는 그 때의 당신을. 바로 그 옆에 부리나케 달려온 아리스가 정승처럼 주저앉은 당신을 원망하며 바라보던 그 때를.
“그렇네..”
아리스의 작은 발이 물건 사이를 비집고 당신의 집으로 들어선다. 당신도 그 뒤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간다.
“정말 여기서 쉬라고 데려 오신게 맞나요? 프로듀서 씨.”
난장판인 집안에 앉을 곳은 없다. 그 사실을 간과한 당신이 ‘아차’하는 표정을 내보이고 아리스는 어이없다는 듯이 눈을 살짝 감고 고개를 젓는다.
“정말이지, 곤란하네요. 프로듀서 씨.”
역시 그 때의 아리스임라고 당신은 생각한다.
“됐으니까. 물건들은 아무데나 밀어 넣고 보일러 틀어놓고 있어.”
아리스의 발을 중심으로 서서히 공간이 넓어진다. 딱 아리스 혼자 앉을 수 있을 만큼 넓어진 바닥에서 조심스레 빠져 나와 벽 옆에 있는 보일러 리모콘을 조작한다.
파란 공기가 붉게 물들고 차가웠던 두 사람의 몸이 서서히 녹기 시작한다. 아리스의 바로 뒤 부엌에서 당신은 아리스에게 내줄 차를 끓이기 위해 물을 올려놓고 있었다.
찬장을 열어젖힌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급히 물을 끓이던 가스레인지를 끄고 잠시 고민하더니 당신은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컵에 붓고는 전자레인지에 우유가 든 컵을 놓고 데운다.
‘팅’하는 소리와 함께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따끈한 우유 두 잔을 쟁반에 얹고는 아리스가 있는 방까지 들어간다.
“추울 테니까 이거라도 마셔.”
꾸벅 하고 감사 인사를 하고는 컵을 받는 아리스. 입김을 후 후 불고는 한 모금 넘기더니 얼어붙은 얼굴이 녹으며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짓는다. 돌아섰던 두 사람의 사이가 다시 마주보게 된 느낌을 당신은 받는다.

“그나저나 프로듀서 씨.”
양손으로 우유를 들고 후후 입김을 불던 아리스가 당신을 보며 말한다.
“왜? 아리스.”
눈을 찡그리는 아리스가 당신에게 충고한다.
“보기 흉해요. 세수라도 하시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그 말을 들은 당신은 방으로 들어가 거울을 살핀다.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은 흉측한 몰골이 눈앞에 있다. 부산스런 머리, 혈안이 풀리긴 했지만 여전히 졸려 보이는 눈, 아리스와 마찬가지로 지우지 못한 눈물 자국이 깊게 파인 눈덩이가 처연한 당신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부엌으로 달려 나온 당신은 싱크대에서 얼굴을 씻는다. 그런 모습을 아리스가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지만, 당신은 눈치 채지 못한다.
“그나저나 아리스.” 막 세수를 끝낸 당신이 아리스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한다.
“눈물 자국 아직 안 지워졌는데?” 그 말에 화들짝 놀란 아리스가 부끄러운지 얼굴을 감추며
“신경 끄세요!”
하고 심술을 부린다. 옛날로 돌아간 느낌을 받는 당신은 생각난 것이 있는지 방으로 들어가 ‘책’을 들고 나온다.
책을 본 아리스는 흐리멍덩한 눈을 하고는 역시 그랬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갖고 계셨네요.”
놀란 당신이 아리스에게 묻는다.
“ ‘역시’라면 알고 있었던 거야? 아리스.”
잠시 기억을 정리하듯 눈을 감고는 천천히 눈을 뜬 아리스가 얘기한다.
“후미카 언니가 제게 늘 그러셨으니까요. 프로듀서 씨에게는 ‘책’이 필요하다고요.”
당신은 그 날 후미카가 했던 얘기를 떠올린다.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다리에서부터 허리, 그리고 머리까지 전달돼 온다. 그런 당신을 보지 않은 채 묵묵히 아리스는 묵묵히 얘기를 이어나간다.
“후미카 언니가 당신에게 책을 준 이유는 고립되지 말라고 준 거예요.”
당신은 이해를 못했는지 의문을 던진다.
“고..립?”
초점 없는 눈으로 당신을 바라보며 아리스는 설명한다.
“프로듀서 씨한테도 그런 말을 했을 거예요. 프로듀서 씨라면 분명, 들은 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프로듀서 씨. 후미카 언니와 늘 함께하던 공원에서 후미카 언니가 달무리를 보고 뭐라 말하지 않으셨나요?”
“...”
“외로운 거라고 그것을 감추는 거라고 말이에요.” “...”
“후미카 언니도 똑같았던 거예요. 달과 똑같이 외로웠던 거예요.”
“그래서 후미카 언니는 책을 읽는다고 저한테 말해주었어요. 자신의 고독이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끔 감추는 거라고. 마치 달이 달무리로 얼굴을 가리듯이.”
“고독은 문자 그대로 독이 되어 후미카 언니를 괴롭혔고, 언니는 묵묵히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했어요. 후미카 언니는..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으니까 말이죠.”
“그렇지만, 후미카 언니 혼자서 감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지요. 일정치를 넘은 고립이, 후미카 언니의 몸을 망가뜨렸고, 그것을 알아차린 후미카 언니는 저희들에게 서서히 멀어질 계획을 세우고는 자신의 소중한 ‘물건’을 저희에게 선물하고는 홀연히 종적을 감춘 거지요.”
말없이 듣고 있던 당신의 눈에서 마음인지 물인지 모를 무엇인가 올라온다.
가만히 지켜보던 아리스가 마지막 해답을 당신에게 던졌다.
“책 커버를 잘 살펴보세요. 아마 프로듀서 씨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후미카 언니의 말이 있을 거예요.”
의식할 겨를도 없이 당신은 미친 것 마냥 책 커버를 이리저리 살핀다. 어딘지 볼록하게 튀어나온 부분이 느껴진다. 덜덜 떠는 손으로 황급히 커버를 벗긴다. 커버를 벗긴 책 안에 조그마한 쪽지가 있다. 당신은 쪽지를 펼쳐 그 안의 내용을 확인한다.
‘당신은 연약한 사람이에요.. 프로듀서 씨.. 주변의 사람이 없어지면 안절부절 못하고 자신의 탓이라며 책망하는 그런 사람이지요. 그런 당신에게서 제가 멀어져 버린다면 아마.. 금방 무너져 내리겠지요.. 방황하는 당신을 두고 떠나야만 한다면.. 마음 편히 멀어지지 못하겠지요.. 그런 당신이 저처럼 고립되지 않길 바라기에 제가 늘 갖고 있던 이 책을 당신에게 선물할게요.. 부디 저를 잊고 편히 살아주세요.. 당신은 아직 늦지 않았어요.. ’
눈 안의 호수에 비구름이 몰아친다. 당신의 수용 량을 넘어선 물이 범람하고 눈 밖으로 빠져나간다. 담담히 보고 있던 아리스의 눈에도 당신과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후미카 언니는 반드시 알아차릴 거라고 그러셨어요.”
“...”
“하지만, 프로듀서 씨는 그러지 못하셨지요.”
“...”“며칠을 몇 주가 되고, 몇 주는 몇 개월이 됐으며, 몇 개월은 결국 몇 년이 되었지요.”
격해진 감정을 누그러뜨리지 못했는지 아리스가 벌떡 일어서며 당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얘기한다. 시퍼런 감정의 물결이 방안을 뒤덮는다.
“당신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몰랐어요. 분명, 분명히 후미카 언니는 알아차려줄 거라고, 발견해줄 거라고 그 뜻을 이해해줄 거라고 말했어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그저 그렇게..”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로 아리스가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방금 태어난 아기처럼 그 자리에 앉아서 엉엉 울기만 한다. 당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아리스를 위로해주지 못한 채 멈출 줄 모르는 눈물을 쏟아내며 무너져 내린다.
당신의 손에서 들고 있던 책이 벗어던진 아리스의 숄 위에 떨어진다. 몇 년을 시간을 거쳐서 이제야 온전히 갖춰진 그녀의 흔적이 어딘지 처연해 보인다.

어째 신파극처럼 변해버렸네요..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인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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