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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리티P 시리즈] (Re)Write─덮어 쓰는, 혹은 다시 쓰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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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02, 2017 02:24에 작성됨.

< (Re)Write─덮어 쓰는, 혹은 다시 쓰는. (1) > 에서 이어집니다.

 


 

(Re)Write─덮어 쓰는, 혹은 다시 쓰는. (2)

 

 

저는 낯익은 장소에 있었습니다.

분명 낯은 익은 곳이지만, 이곳이 어디인지는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이곳이 어디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면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러 개의 전구가 끼워져 밝게 불이 들어온 화장대, 책상 위에 펼쳐진 프로그램 표, 그 옆에 놓여 있는, 가사와 퍼포먼스에 관한 팁이 깨알 같은 글씨로 적혀 있는 낡은 수첩이 보입니다. 굳게 닫혀 있는 새하얀 문 너머로 들려오는 남자들의 다급한 목소리와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다시 고개를 들어 화장대의 거울을 보면, 녹색을 기조로 한 무대 의상을 걸치고 있는 제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렇군요. 이곳은 스테이지의 대기실이었습니다. 그것을 눈치챈 바로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대기실의 문을 누군가가 똑똑 두드렸습니다.

 

“타카가키 씨, 접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네.”

 

저의 대답에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짙은 감색 정장을 입고 있는 남자였습니다. 문의 위쪽에 닿을 듯, 키가 몹시 큰 그는 자신의 시계를 한번 본 뒤 시선을 저에게로 향했습니다.

 

“스탠바이 15분 전입니다. 슬슬 준비하시죠.”

“네.”

“컨디션은 좀 어떠세요?”

“좋아요. 몸도 가볍고, 목도 촉촉하네요. 머리도 아주 맑아요.”

“다행이군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대기실을 나서는 그 순간, 저는 스테이지의 뒤편에 서 있었습니다. 드리워진 두터운 암막 너머로 진행을 맡은 탤런트 분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제 차례가 가까워진다는 것을 실감하자 곧바로 입안이 바짝 마르고 두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당당하게 앞을 보도록 연습했건만 시선은 마치 압정이라도 꽂아놓은 듯 발 끝에 고정되었습니다.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떠는 두 손을 꼬옥 움켜쥐고 있자니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떨리세요?”

 

에나멜 구두 아래로 꼼지락거리는 엄지발가락을 바라보던 저는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습니다. 쪼그려 앉아 있는 것인지, 저의 눈높이보다 약간 낮은 곳에 그의 얼굴이 있었습니다.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는 저를 바라보던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습니다. 미소를 띤 얼굴로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삐비빅! 삐비빅!!

 

 

*** 

 

 

눈을 떴습니다. 낯익은 천장, 낯익은 벽지, 낯익은 전등의 모습이 아직도 신기루처럼 눈 앞에 아른거리는 어젯밤의 화려한 파티장의 광경을 덧씌워갔습니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침대와 TV 사이에 서 있는 테이블의 정 중앙에서 열심히 소음을 퍼뜨리고 있는 소음의 근원이 보입니다.

 

-삐비빅! 삐비빅!!

 

“으응……시끄러워…….”

 

그것을 침묵시키기 위해 이불 속에서 손을 뻗었습니다. 따뜻한 이불 속에서 갓 나온 따끈한 손이 이불 밖의 차가운 공기에 멈칫하는 것도 잠시뿐. 그 충격으로 훨씬 맑아진 정신으로 의지를 다잡은 저는 계속해서 손을 쭉쭉 뻗었습니다.

 

-삐비빅!! 삐비빅!!!

 

“조, 조금만 더……!”

 

이불 안에 본체를 두고, 가급적이면 차가운 공기에 본체가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하며 저는 최대한 손을 뻗었습니다. 닿을까 말까 하는 거리에서 손가락을 허공에 허우적거리기를 수 회. 조금만 더, 라고 생각하며 손을 앞으로 뻗어서 그것을 움켜쥐는 순간.

 

“꺄앗……!”

 

쿠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마침내 저는 ‘그것’을 침묵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다다미 촉감이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운 바닥에서 일어서서, 마침내 조용해진 알람시계를 다시 원위치에 돌려놓은 뒤 저는 창 밖을 바라보며 크게 기지개를 폈습니다.

 

“으응~!”

 

오늘은 주말의 자율 레슨이 있는 날. 학업 때문에 평일에는 나오지 못한 아이들이 나와서 연습을 하거나, 레슨을 받는 날이었습니다. 평소였다면 주말에는 집에서 푹 쉬었을 테지만……어제 그렇게 진수성찬을 즐겼으니, 조금이라도 더 몸을 움직여 칼로리를 소모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늘어져라 기지개를 편 뒤, 물이라도 마시자 싶어 부엌으로 향하던 저는 충전기의 줄이 연결된 채, 바닥에 굴러다니던 휴대전화의 화면이 반짝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습니다. 휴대전화의 화면에 떠오른 것은 스케줄 알람과,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서 도착한 한 통의 메일이었습니다.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저는 곧바로 욕실로 향했습니다. 어제 저녁, 파티가 끝나갈 무렵에 듣게 된 어떤 이야기가, 또 다시 떠올랐습니다. 

 

알고 싶지 않나? 그에 대해서.

 

샤워를 하는 중에도, 간단하게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는 중에도, 집을 나와 사무실로 걸음을 옮기는 도중에도 사장님의 한 마디는 계속해서 제 머릿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그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 ‘지금이라도 좋으니 어서 좋다고 해 버려!’라고 머릿속에서 외치는 것 같았습니다.

생각이 길어지네요. 저는 회사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별관의 입구를 지나쳐 연습실로 들어간 저를 반기는 것은, 마치 캠프파이어를 하는 것처럼 둥글게 모여 앉은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아, 왔네.”

“죄송해요. 늦잠을 자 버려서.

“괜찮아, 괜찮아. 얼른 와서 앉아.”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키는 미즈키 씨의 옆에 앉아 저는 빙 둘러앉은 사람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마유와 후미카, 트라이어드 프리무스에 연습생 아이들까지. 사무소에 소속된, 그리고 프로듀서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모여 있었습니다. 사이사이에 트레이너 분들까지 섞여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행동이 딱히 문제가 되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자, 마지막 참가자가 도착했으니 이제 슬슬 시작해 볼까!”

 

제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 미즈키 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카와시마 미즈키입니다!”

 

몸풀기로 사용하는 줄넘기를 둘둘 감아 마치 마이크처럼 그것을 손에 쥔 미즈키 씨는 빙 둘러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여러분, 어제 파티 즐거우셨죠?”

“”네!!””

“미즈키도 엄~청 즐거웠어요. 그런데 말이죠? 집에 가는 길에 이런 생각 안 들던가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이들을 돌아보며 미즈키 씨는 과장되게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대체 P군. 아니, 프로듀서는 뭐 하는 사람이길래 이런 파티장을 만들었을까?’하는 생각 말이에요!”

“”네!!””

“그죠~? 다들 그렇게 생각했죠? 그래서 시작합니다! ‘제 1회 신데렐라 걸즈 좌담회’!”

 

진행이 능숙하네요. 그러고 보면 이 사람, 방송인 출신이었죠.

자리에서 일어나 기세 좋게 외치는 미즈키 씨를 향해 쏟아지는 짝짝짝, 하는 박수 소리가 연습실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기에, 저는 약간 몸을 기울여, 제 반대쪽 옆에 앉아 있는 베테랑 트레이너, 아오키 세이 씨의 어깨를 손 끝으로 톡톡 두드렸습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연습생들을 바라보던 그녀는 그제서야 저를 돌아봅니다.

 

“응? 왜?”

“혹시,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을까요?”

“아아, 별 거 아니야. 그냥 어제의 파티가 너무 인상적이라서 말이야. 처음 말을 꺼낸 건 미즈키 씨였는데, 어쩌다보니 우리들까지 말려들게 된 거야. 아이들이 궁금해하기도 하고.””

 

세이 씨의 말에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도 그렇지요. 일이 아닌 사적인 자리로는 일생에 한 번 가 볼까 말까 하는 세계 레벨의 호텔에, 그것도 난생 처음으로 받아보는 VIP대접이었습니다. 사장님께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저도 납득하기 힘든 대접이었는데 다른 분들은 오죽할까요? 개인적으로는 쌓여 있는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좋은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이 있다면.

 

“…….”

 

연습실 한 구석에 팔짱을 끼고 서 계신 마스터 트레이너, 아오키 레이 씨의 표정이 점점 더 안 좋아 진다는 점일까요. 저건 누가 보더라도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되는 표정이에요.

 

 

***

 

 

결국,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습니다.

 

 

“좋아, 여기까지! 다들 고생했다!!”

“하아…….”

 

마치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로 서 있는 것이 고작이던 저는 레이 씨의 구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곧바로 바닥으로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다른 아이들 역시 저와 크게 상황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수, 수고하셨습……우욱.”

“수고하셨습니다…….”

 

자칭 ‘제 1회 신데렐라 걸즈 청문회’는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머리에 잔뜩 핏대를 올린 마스터 트레이너의 일갈에 의해 허무하게 끝을 고했습니다. 그리고는 시답잖은 일로 시간을 잡아먹었다는 이유로, 한 시간 분의 진도를 따라잡기 위해 쉬는 시간마저 깎아가며 그야말로 피로 피를 씻어내는 것과 같은 지옥의 레슨을 받은 결과, 레슨을 마쳤을 무렵 저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초주검이 되어 연습실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아, 한 사람을 제외하고 말이죠.

 

“우오오!! 불타오르는 느낌이군요!! 그야말로 열혈!! 끓어오르는(熱) 피(血)라고 해서 열혈이군요!!”

“아니, 그건 그냥 피가 쏠린 거라고 생각해……?”

“오늘의 마무리 운동은 러닝으로 해야겠습니다!! 어떤가요, 미오!!”

“아하하……아무리 미오 양이라도 오늘은 무리일지도……그보다도, 히놋치, 안 힘들어?”

”럭비 트레이닝에 비하면 이 정도는 낙승입니다!! 그럼 여러분, 월요일에 만나죠!!”

 

레이 씨가 뭐라 할 틈도 없이 아카네 양은 문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느릿느릿 닫히는 방음문의 저편으로 ‘봄바아아아!!’하는 기합과 힘찬 발소리가 들려옵니다. 정말로 기운찬 아이네요.

 

“나 참, 정말 못 당하겠군……저 녀석을 당해내려면 역시 프로듀서라도 있어야겠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진 저희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저 바보랑 달리 너희들은 한계라는 게 있으니까 저 녀석 따라가다가 다치지 마라. 마무리 운동 제대로 하고, 오늘이랑 내일은 별 다른 일 하지 말고 푹 쉬도록. 모두 수고 많았다. 월요일에 다시 만나자.”

““수고하셨습니다…….””

 

세이 씨에게 차트를 건네고, 연습실을 나가려던 레이 씨는 미즈키 씨와 제 곁으로 다가와 작게 말했습니다.

 

“우리 막내가 마사지를 해준다고 하니까 움직일 만 해지면 잠깐 우리 쪽 사무실에 들렀다가 가도록 해. 근육통으로 며칠 끙끙 앓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

“고, 고마워요…….”

“네에에…….”

 

주저앉는 것조차 힘들어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미즈키 씨와 저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살았습니다. 루키 양의 마사지는 정말로 효과가 뛰어나니까요. 내일 아침 침대에서 표정연기를 하는 것만큼은 사양하고 싶었어요.

 


 

 

“흠…….”

“어떤가요?”

 

사진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노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에잉, 이거 틀렸군. 완전히 부러졌어.”

“그렇습니까…….”

“보아하니 오더메이드 같은데, 아무리 낯짝이 두꺼운 나라지만 이런 걸 만질 배짱은 없어. 미안하네.”

“아뇨, 견해라도 들려주셨으니 오히려 제가 인사를 드려야지요. 실례 많았습니다.”

“허허, 혹시나 버릴 것 같으면 여기로 가져와 줘. 교재로 사용하고 싶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사례금을 지불하고, 시계방을 나오면서 나는 다시 왼팔의 자기 자리로 돌아온 시계를 톡톡 두드렸다.

며칠 전부터 리피터가 울 때마다 이상하게 소리가 튀는 것 같더라니, 오늘 아침이 되자 마침내 뻗어 버린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몇 년이나 가만히 썩혀두고, 신인왕을 받은 날 이후로는 거의 10년 가까이 단 한 순간도 떼놓고 있지 않았으니, 슬슬 한 번쯤은 고장이 날 만도 했다.

 

“……결국 가져가봐야 하나.”

 

곧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인가, 때마침 퍼진 녀석의 너무나도 절묘한 타이밍에 나도 모르게 훗,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때,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전화가 윙윙 울기 시작했다. 화면을 살펴보면, 마스터 트레이너의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네, 프로듀서입니다.”

-아, P씨? 여기 트레이닝 파트야. 여기 일정 끝났는데 애들 그냥 다 보낼까?

“아,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은 별 거 없으니까 그대로 해산시키시면 됩니다.”

-알았어. 볼일은 다 끝났나?

“네, 방금 끝났어요. 지금 사무실로 들어가겠습니다. 카와시마 씨랑 타카가키 씨는 잘 하던가요?”

-그럭저럭 따라오더군. 그렇지 않아도, 막내가 마사지를 해 주고 있는 중이야.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부탁을 드려서…….”

-아니, 컨디션 관리도 당연히 우리가 할 일이니까. 나중에 케이한테 맛있는 거라도 사 줘.

“네, 그렇게 할게요. 휴일에도 고생하셨습니다.”

-별 말씀을. 그럼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전화가 끊어졌다. 휴대전화를 주머니 속으로 되돌리고 주차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느 새 시간이 이렇게 지난 것인지, 서쪽으로 기울어진 해가 서서히 하늘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루키 양의 마사지를 받고, 별관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중천에 떠 있던 해님이 서쪽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회사 부지를 빠져나오며 휴대전화의 화면을 열어 아침에 받은 메시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자니, 마찬가지로 휴대전화의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미즈키 씨가 말을 꺼냈습니다.

 

“카에데, 저녁에 약속 있어? 치히로가 쇼핑 가자고 하는데.”

“아……죄송해요. 저 미용실에 예약이 있어서요.”

“그래? 아아, 예전에 얘기한 거기?”

“네. 오늘 한번 가기로 했거든요.”

“그렇구나. 그럼 별 수 없지. 다음에 나도 한번 소개시켜 줘.”

“그럴게요.”

 

회사의 정문에서 미즈키 씨와 헤어진 뒤, 저는 곧바로 메시지에 적혀 있던 주소로 향했습니다. 변장용으로 사용하는 모자와 안경, 그리고 목도리를 걸친 저는 젊은 아이들이 바글거리는 번화가를 지나, 비교적 한산한 골목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골목길로 접어들어 10분 정도 걷자 자그마한 3층짜리 건물이 나타났습니다. 고개를 들어 2층을 바라보면, 메시지에 적혀 있는 것과 똑 같은 가게의 이름이 걸려 있습니다. 건물의 입구로 들어가자,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의 앞에는 개업을 축하한다는 화환이 서 있었습니다.

 

-카에데는, 모델 관두면 뭐 할 거야?

-나는……글쎄, 작은 가게라도 낼 까 싶어. 에스테나 미용실 같은 걸로.

 

언젠가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또각, 또각, 저는 발소리가 울리는 계단을 한 걸음씩 올라갔습니다. 2층에 도착한 저는 환하게 불이 켜진 가게의 입구에 서서 유리문 안쪽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뜻밖에도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시 시간을 잘못 확인한 것은 아닌지, 저는 휴대전화로 한번 더 시간을 확인했습니다. 시간이 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설마……아니겠죠…….’

 

두근두근, 심박수가 빨라지고 목도리를 찬 목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저는 가게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문에 매달린 도어벨이 차르릉, 하고 방문자가 있음을 알립니다. 그 소리를 듣고 나타난 것일까요? 청바지에 무늬 없는 블라우스라는 캐주얼한 복장 위로, 가게의 로고가 그려진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한 여성이 나와 고개를 숙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예약이 있어서…….”

 

2년만에 보는 몹시 반가운 얼굴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서운하네요. 벌써 저를 잊어버리셨나봐요?”

 

그야 변장을 하고 있으니 알아볼 리가 없지요. 알아보는 변장은 변장이 아닌걸요.

허리를 숙이며, 죄송하다는 말을 먼저 꺼낸 그 사람은 제 목소리를 듣고서야 “어?”하는 얼굴로 저를 올려다 보았습니다. 저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 안경을 벗고, 목도리를 풀었습니다.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래집니다. 2년 만에 보는 그녀의 얼굴은, 그 때에 비하면 아주 약간이지만 주름이 깊어져 있었습니다.

 

“카에데!”

“오랜만이에요, 매니저 씨.”

“너도 참, 이젠 매니저가 아니잖아?”

“그렇네요. 이제는……사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려나요?”

“낯뜨겁게 사장님은 무슨……그냥 평소대로 불러 줘.”

“후훗, 그럴게요.”

 

마침내 저를 알아본 것인지, 그녀는 저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습니다. 얼마 만에 보는 그녀의 미소일까요. 저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무실의 한쪽 벽면에 설치된 소파에, 나를 포함한 트레이너 네 사람이 앉아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일정표가 들어간 자료를 내려놓으며 나는 자리에 앉아 있는 네 사람을 돌아보았다.

 

“그럼, 오늘 미팅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주말에도 나와 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자, 마찬가지로 소파에 앉아 있던 네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 짝짝짝, 박수를 보내왔다.

 

“수고했어. 주말인데 고생이 많네.”

“제가 이러는 게 한두 번인가요. 주말인데도 제 욕심에 어울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봐, 지금은 당신이 우리 상사잖아? 좀 더 세게 나와도 된다고.”

“아하하, 노력할게요.”

 

마스터 트레이너와 베테랑 트레이너는 못 말리겠다는 듯 내 어깨를 한번 툭, 두드리고는 회의실을 나갔다. 그들의 뒤를 따라 이번에는 트레이너와 루키 트레이너가 다가왔다.

 

“프로듀서 씨, 다음다음 주에 휴가라고 하셨죠?”

“네. 아마도 정월 다음에나 끝날 것 같습니다.”

“아쉽다……같이 새해 보러 가고 싶었는데.”

“미후네 씨나 센카와 씨도 계시니까요. 제 몫까지 즐겨주세요.”

“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프로듀서 씨.”

 

나는 해맑게 웃으면서 작별인사를 하는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어디……정리는 이 정도면 된 것 같고.”

 

미팅에서 사용한 자료들을 대강 정리한 뒤, 목을 빙빙 돌리면서 기지개를 펴고 있자니 책상에 올려둔 시계에서 짤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고장난 리피터가 내는 신음소리처럼 들리는 그 소리에 나는 시계를 집어 들었다. 어느덧 오후 6시가 되어 있었다.

어디, 이 정도면 퇴근할 사람은 다 빠졌겠지.

 

“좋아, 운동하러 가자.”

 

그렇다. 사실 주말에도 출근을 한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나갈 채비를 마치고 휴대전화를 집어 들자 언제 도착한 것인지 메시지가 한 통 도착해 있었다. 마스터 트레이너가 보낸 메시지로, 오늘 있었던 '신데렐라 걸즈 청문회'라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머리카락 사이로 두피를 꾹꾹 누르는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그 느낌에 몸을 맡기며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시원함과 상쾌함이 뒤섞인, 무척이나 기분 좋은 감각이 스르르 다가오는 것이 느껴집니다. 스타일리스트에서 헤어메이크로 완전히 업종을 바꾼 덕분인지, 못 본 사이 매니저 씨의 손길은 무척이나 부드러워져 있었습니다.

 

“2년이나 지났어도 여전히 탱탱한걸 보면 역시 아이돌이구나 싶네. 난 이렇게나 삭았는데.”

“아니에요. 저도 어린 아이들 옆에 서면 나이를 실감하는걸요.”

“후훗, 그거야 그렇겠지.”

 

전화통화나 메일은 몇 번인가 주고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얼굴을 대면하는 것은, 2년전 그 날, 제가 프로듀서의 손을 잡은 그 날 이후로 처음이었습니다.

 

“그나저나~우리 카에데가 변장이라니, 세상사는 참 모르겠네.”

“그러게요……저 같은 사람도 아이돌이 될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농담이야. 나는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거든.”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그 날, 그 남자가 너를 찾아 헤매던 그 때부터, 이렇게 될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어.”

“네……?”

“너를 바라보는 그 남자의 눈빛이 정말로 예사롭지 않았거든. 어떤 경위인지는 모르지만, 결국 네가 아이돌을 하겠다고 했을 때, 완전히 확신이 들었어. 네가 드디어 자신이 설 곳을 찾았구나, 하고 말이야.”

“그, 그런가요…….”

 

매니저 씨는 이번에는 손끝을 날카롭게 세워 머리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에 회사를 떠나고……프리랜서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 네 이야기도, 그리고 그 남자의 이야기도. 정말로 많은 일이 있었구나 싶었지.”

“그랬죠……이제 와서 생각하면, 하나하나가 모두 추억들이네요. 가슴 속에 고이 담아두고 싶은.”

“네 표정도 정말 부드러워졌어. 내가 알던 애가 맞나 싶을 정도라니까. 요즘은 렌즈도 안 하는 것 같고.”

“네.”

 

모델 시절에는 컬러 렌즈를 곧잘 착용하곤 했습니다. 패션모델 주제에 걸친 옷의 개성을 죽인다며 쓴소리를 듣기 일쑤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선재 사진을 찍던 날, 프로듀서는 저에게 렌즈를 끼지 말 것을 요구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 주는 것’. 그것이 아이돌의 첫 걸음이라고 하면서요.

 

“프로듀서 씨가 있는 그대로의 제가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고 하셔서요.”

“호오, 매력적으로.”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린 매니저 씨는 머리를 주무르던 손을 멈추고, 제 두 귀를 가볍게 잡아당겼습니다.

옛날 기억이 나네요. 풋내기 모델이었던 시절, 메이크업을 받다가 꾸벅꾸벅 졸아버리거나 하면 이렇게 제 잠을 깨워주곤 하셨죠. 아련히 떠오르는 옛 추억에 입꼬리가 또다시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자, 여기까지! 머리는 딱히 손 댈게 없어서, 오늘은 그냥 마사지만 하는 걸로.”

“고마워요.”

“신데렐라 걸즈라고 했지? 네가 두 번째라며?”

 

매니저 씨는 제 몸을 덮고 있던 방수포를 걷어냈습니다.

 

“네. 카와시마 씨라고, 저보다 세 살 많은 분이 맏언니로 계세요.”

“그렇구나.”

 

그녀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습니다. 사락사락, 제 몸을 덮고 있던 방수포를 접는 소리가 가게 안을 채웠습니다.

 

“……미안해.”

“뭐가요?”

 

거울에 비친 모습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저는 고개를 돌려, 뒤돌아선 그녀의 등을 바라보았습니다.

 

“……라이브도, 라디오도, TV도, 카에데가 나오는 건 모두 챙겨보고 있었어. 그런데도, 섣불리 네 앞에 나서지를 못해서……괜히 내가 네 발목을 잡는 건 아닐까 생각했어.”

“아니에요. 제가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없잖아요?”

“맞아, 카에데는 그럴 사람이 아니지.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괜한 생각이 자꾸 나네.”

 

돌아선 그녀는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거울 너머의 제가 아닌 저를요.

 

”아이돌은……즐거워?”

“네. 무척 즐거워요. 모델 시절에 비하면 신경 쓸 것도 많고 바쁘기도 하지만……매일매일이 새롭다는 느낌인걸요.”

”……그렇구나.”

 

제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그녀에게, 저는 이번에는 제대로 된 대답을 돌려주었습니다. 그것은 아이돌이 되기로 하고, 프로듀서와 함께 가시밭길을 걸어오면서 단련한 것. 모델이던 시절에는 감히 상상조차 못 하던 미소였습니다. 제 마음이 닿은 것일까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차라도 한 잔 하고 갈래? 생각보다 일찍 끝났는데, 이렇게 돌려보내긴 아쉬워서.”

“감사히 받을게요.”

“뭐로 줄까?”

“저는 커피로요.”

 

입구 옆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를 확인하고 있자니, 달그락 소리를 내며 제 앞으로 머그잔 하나가 내려왔습니다.

 

“감사합니다.”

“후훗, 이러니까 옛날 생각 난다. 그치?”

“그러네요.”

 

모델 일에 익숙하지 않던 시절, 촬영장에서 꾸중을 듣고 돌아올 때면 매니저 씨는 늘 이렇게 저를 위로해주곤 했습니다. 분장실의 테이블에 마주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때로는 울기도 하고, 투덜거리기도 하고, 정말로 못 볼 꼴을 보이기도 했지요.

분장실에서 만나고, 분장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분장실에서 헤어지고. 언제까지고 계속될 줄 알았던 두 사람의 인연도 어느샌가 끝을 고하고야 말았습니다. 시간이 지난 지금은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네요.

그 분위기에 휩쓸린 것인지, 손끝으로 머그잔을 만지작거리던 저는, 지금까지 계속 가슴 속에 담아두고 있던 것을 조심스레 끄집어 냈습니다.

 

“저……한 가지, 고민이 있어요.”

 

저는 눈 앞의 여성을 바라보았습니다. 눈 앞에 있는 사람은 오래 전, 한때나마 나의 옆을 지탱해 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고, “말해 보렴”이라고 말하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시선을 받으며 저는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엄연한 제삼자의 앞에서 ‘그’를 지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한 사람이 있어요. 외국에서 살다 온 사람인데, 이 사람이 좀처럼 자기 이야기를 안 하거든요.”

 

저는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아니, 이야기를 안 한다기 보다는 무언가 선을 그어둔 것처럼, 말하지 않고 묻어두는 게 너무 많은 사람이에요.”

“헤에, 그래서?”

“딱히 캐묻고 싶다던가 하지는 않아요. 다만…….”

 

내가 모르는 그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머릿속이 복잡해져요……라고 말하려던 것을 잠시 멈추고 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내 머릿속의 생각을 뭐라고 순화시켜야 할지를 고민했습니다. 말을 망설이는 제가 이상해 보였던 것인지,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다만?”

“……신경이 쓰여요.”

“헤에, 신경이 쓰인다고.”

“네……저를 만나기 전의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곳에 오기 전에는 어떻게 살아 온 사람이었는지……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점점 더 궁금해져요.”

 

커피를 한 모금 마셨습니다. 바짝 말라가던 목이 다시 촉촉해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제가 잘못된 걸까요? 저는 저이고, 그 사람은 그 사람인데. 남의 일에 너무 깊게 관심을 가지는 걸까요?”

 

제 시선을 받으며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셨습니다. 잔을 내려놓고, 팔짱을 낀 그녀는 신기하다는 듯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카에데. 너 그 사람 좋아하니?”

“푸흡!!”

 

그녀의 대답을 기대하며 커피를 마시던 도중에 난데없이 의표를 찔린 저는 성대하게 커피를 뿜으며 사레가 들리고 말았습니다.

 

“콜록! 콜록!!”

“미안해. 다 마실 때까지 기다릴 걸 그랬나?”

“괘, 괜찮아요…….”

“농담이 좀 과했나보네 아무튼, 서로를 알고 싶어하는 사실 그 자체는 잘못된 게 아니라고 생각해. 함께 지내다 보면 당연히 서로에 대해서 궁금해지겠지. 카에데와 나도, 처음에는 이런 사이가 아니었지?”

“그렇죠…….”

 

제가 막 모델이 되었을 때에는 지금처럼 이러한 관계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점점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지금의 관계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알고 싶다는 욕심을 너무 억제하지는 마. 그러다가 잘못 엇나가면 큰일 난다?”

 

저를 바라보던 그녀는 한쪽 눈을 찡긋했습니다.

 

“내가 우리 그이랑 사귈 때도 그랬거든.”

 

저는 또 다시 사레가 들릴 뻔 했습니다. 이번에는 간신히 참아냈지만요.

 

 

“차 잘 마셨습니다……그럼, 다음에 또 찾아올게요.”

“응, 다음에는 머리도 봐 줄게. 지금 네 머리 한 거 보니까 불안해서 안 되겠다. 역시, 카에데는 내가 봐 줘야 할 것 같아.”

“후훗, 그렇죠. 기대하고 있을게요.”

 

가게를 나서기 직전에, 그녀가 저를 다시 한번 불렀습니다.

 

“……카에데.”

“네?”

“되는 대로 떠다니던 예전보다도, 확실한 목표를 갖고 헤엄치는 지금의 모습이 훨씬 더 보기 좋아. 그러니까, 앞으로도 주눅들지 말고 힘내렴.”

 

그렇게 말하는 매니저 씨의 눈은, 마지막으로 그녀와 함께 일했던 날 보았던 것과 같은 감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가슴 속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저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 날씨 춥다.”

“네, 고마워요.”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저는 가게를 나왔습니다.

건물 밖으로 나올 무렵, 하늘은 이미 짙은 감청색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한층 더 싸늘해진 밤 바람에 옷깃을 여미면서 저는 타박타박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12월의 초입과 함께 서서히 드리워지기 시작한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이제는 당장 내일이 크리스마스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무르익어 있었습니다. 이따금씩 지나쳐가는, 지켜보는 사람의 옆구리가 시릴 정도로 딱 붙어 다니는 연인들을 바라보며, 저는 생각했습니다.

 

'알고 싶다는 욕심인가요…….'

 

계기라고 할 만한 것은 그다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이 마음에 불꽃을 당겼는지는, 아주 확실하게 기억이 납니다.

약 두달 전, 저는 우연히 만난 그의 옛 친구, 캐서린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 그의 청소년기, 그의 선수 시절 등등,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요.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저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캐서린이 아는 그'의 이야기이지, '그'의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제가 정말로 알고 싶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본인의 입에서, 본인의 머릿속에서 나온 이야기가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좀 더 함께 있고 싶어.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남들이 모르는 그의 모습을 알고 싶어. 남들이 모르는 나의 모습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어.

 

새삼스럽지만,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는 것이 실감이 됩니다. 모델 시절의 제가 지금의 저를 바라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하루하루, 그날의 바람에 떠밀려 살아가던 제가 지금은 신세 좋게도 남의 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만연한 번화가를 지나, 회사들이 모여있는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주말이라 그런지, 평소보다도 더욱 메마르고, 더욱 황량해 보이는 광경이었습니다. 빌딩의 협곡으로 몰아치는 강풍에 저는 옷깃을 다시 여미었습니다. 몸을 잔뜩 움츠리고 길을 걷고 있자니 CG프로덕션의 거대한 건물이 나타났습니다. 별 생각 없이 바라본, 거대한 본관의 옆에 위치한 별관에는 뜻밖에도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별관 2층의 사무실. 그것도 창가 자리. 그곳은 다름아닌 프로듀서의 자리였습니다. 설마하니 주말인데도 나와서 뭔가를 하고 있는 걸까요?

 

“……한번 얼굴이나 보고 갈까요.”

 

저는 회사의 정문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습니다. 오후 7시를 막 넘긴 시간이었습니다.

운이 좋다면 가는 길에 자동차를 얻어 탈 수도 있겠죠.

마음을 결정한 저는 곧바로 본관의 입구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실례합니다~.”

 

불이 켜져 있는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프로듀서의 자리에는 컴퓨터가 켜져 있고 서류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지만, 머그잔 안에 든 커피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자리를 비운 지 꽤 시간이 지난 모양입니다.

조금 더 살펴보면, 프로듀서의 자리 위에는 사진이 붙어 있는 두툼한 서류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습니다.

뭐 하는 서류일까 싶어서 그것들을 살펴보려고 하던 바로 그 때, 복도 너머로 익숙한 휘파람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구두가 아닌 운동화를 신고 있는 것인 듯, 그의 발소리는 평소의 뚜벅거리는 소리가 아닌 푹신한 것이 밟히는 소리였습니다.

 

“아, 시원하……어? 타카가키 씨?”

 

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아직 가라앉지 않은 호흡과 상기된 피부, 그리고 물기를 머금고 있는 머리카락을 보면, 이제 막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모양입니다.

 

“운동하고 오시는 길인가요?”

“네. 새 집에는 딱히 할 만한 장소가 없어서요…….”

 

그는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프로듀서는 남자 기숙사에 살던 시절에는 기숙사의 체육공원을 거의 혼자서 전세 내다시피 하여 사용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새로 이사한 집에서는 그런 게 안 될 테니 답답할 만도 하겠죠.

 

”타카가키 씨야말로 무슨 일이십니까? 오늘은 레슨 말고는 일 없을 텐데요.”

“미용실에 갔다가 들어가는 길에 사무실에 불이 켜져 있기에 들어와봤어요. 그나저나 이건 다 뭔가요?”

“아, 그게…….”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서류들을 바라보며 묻자,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습니다.

 

“혹시 제가 보면 안 되는 건가요?”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그러니까, 저건 스카우트 리포트에요. 여러분들과 연습생 아이들의.”

“스카우트 리포트요?”

“간단하게 말하면 제가 바라보는 여러분들의 모습을 기록한 관찰일지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저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프로듀스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서 일단 가지고 왔습니다.”

 

그 때, 테이블 위에 놓인 자료들 중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길어봐야 두세 페이지에 불과한 다른 아이들의 것에 비하면 유난히 두꺼운 그것은, 다름아닌 저의 사진이 붙어 있는 자료였습니다. 

 

“앗, 이거는 제 거네요? 봐도 될까요?”

“좀 부끄러운데요…….”

“괜찮아요, 괜찮아.”

 

아무래도 입장이 바뀐 것 같은 문답을 주고받고, 저는 자료를 집어들었습니다. 저는 떨떠름한 표정의 그를 옆에 두고, 기세 좋게 제 이름과 사진이 붙어 있는 표지를 넘겼습니다. 간단한 프로필과 지금까지의 경력이 적힌 페이지를 넘어가자, 곧바로 본격적인 ‘리포트’부분이 나타났습니다.

페이지를 넘기려던 손이 멈칫했습니다.

저는 망설였습니다. '그의 생각'이 적혀 있는 리포트와, '내 생각'이 적혀 있는 반쪽짜리 노트가 차례로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지금 내 손 안에 든 것은 그가 나를 바라보는 그의 생각이겠지요. 반쪽짜리 노트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무게가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 무게에 떠밀리듯, 저는 생각을 굳혔습니다.

 

“아뇨, 그냥 안 볼래요.”

 

그러자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밝아졌습니다.

리포트에 대체 뭘 적어두었길래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요?

 

-자네가 할 마음만 있다면, 반드시 내가 도와주겠네. 알겠나?

 

사장님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일정표의 한 구석에 적혀 있는 짤막한 문구. 그의 휴가를 적어 놓은 문구가 보입니다. 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새까만 두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더 이상은 지켜보는 것으로 멈추지 않겠어요.

 

“프로듀서, 돌아오는 월요일에 휴가 가신다면서요?”

“네. 개인적으로 집에 볼일이 있어서요.”

“집……이란 건, 미국이죠?”

“네.”

“……저도, 따라가면 안 될까요?”

“네?”

“……억지인 건 알고 있어요. 프로듀서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저는 알고 싶어요. 당신에 대해서. 사장님도, 캐서린도 모르는 당신만의 모습을.”

 

프로듀서는 멍한 표정으로 반짝이는 안경알 너머로 눈을 꿈벅거리며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정적이 흐르는 사무실 안을, 재깍, 재깍, 초침이 달리는 소리만이 채우고 있었습니다. 잠시 동안 말없이 저를 바라보던 그는 빙그레 웃으며 자세를 낮추었습니다. 머리 두 개 정도 높은 곳에 있던 그의 안경을 낀 얼굴이 저의 눈높이로 내려왔습니다.

 

“그건 ’욕심‘인가요?”

 

어쩐지 짓궂어 보이는 그의 미소를 본 순간, 저는 어떤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그것은 그의 집들이를 간 날, 그의 차 안에서 나누었던 이야기였습니다.

 

-또 어딘가에는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내가 모르는 당신에 대해서 알고 있겠죠. 그치만, 봐요. 아무리 저라고 해도 욕심 정도는 부려도 괜찮지 않나요? 저만이 알고 있는 당신의 모습이라는 것, 말이에요.

 

“……네.”

 

떨리는 마음을 억지로 다잡으며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어쩌면 반쯤 자포자기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좋습니다. 그러면, 만들어볼까요? 우리 둘만의 비밀.”

“……네?”

 

뜻밖에도 OK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것도, 지금까지 고민한 저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너무나도 시원스럽게요.

 

“그, 그래도 되나요……?”

“안될 것 없죠. 어차피 타카가키 씨에게는 보여줄 꼴, 못 보여줄 꼴 다 보여드렸으니까요. 이 참에 소개시켜 드릴 사람들도 있고, 저는 문제 없습니다.”

 

정말로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한 뒤, 그는 "밖에 추우니까 데려다 드릴게요"라고 말하며 곧바로 퇴근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어쩌다 보니 두 가지 목표가 동시에 달성되어 버렸습니다.

책상 위에 대강 펼쳐둔 서류들을 낑낑대며 캐비닛으로 밀어 넣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면서, 저는 어제 저녁, 무척이나 심각한 얼굴로 말씀하시던 사장님의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저는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내어, 화면에 떠오른 번호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여보세요?

“사장님? 타카가키 카에데입니다.”

-아아, 무슨 일인가?

“저번에 말씀하신 것 때문에 전화드렸어요.”

-……자네가 굳이 전화를 했다는 것은, OK로 판단해도 된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맞나?

“네.”

-대답 고맙네. 다음은 내가 어떻게든 해 보지. 편히 쉬게.

“……감사합니다.”

 

통화를 마치고, 휴대전화를 충전기에 꽂아 머리맡에 올려둔 다음, 저는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습니다. 밋밋한 색의 벽지를 바른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 그러고보니 비행기 표가…….”

 

뭐, 그건 사장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겠죠.

 

 

<(Re)Write─덮어 쓰는, 혹은 다시 쓰는. (3)>  으로 계속됩니다.


 

프로듀서의 1인칭 시점으로 쓴 건 '인내의 삶' 이후로 참 오랜만이네요. 매니저 아줌마의 재등장입니다.

그나저나, 개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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