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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투성이 가면(bloody ma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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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27, 2017 00:25에 작성됨.

오후 12시, 따뜻한 햇살이 내리쬔다. 카를로스는 눈을 찌르는 듯한 햇살에 눈커풀을 찡그린다. 그리고는 운전석의 햇빛가리개를 내려 햇빛을 막는다.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이곳, 버지니아에서도 눈으로 바로 내리쬐는 햇빛이 문제였다. 이곳은 미합중국 버지니아주 랭글리, 미국 중앙 정보부의 본부가 있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 카를로스가 랭글리에 온 이유도 중앙 정보국 때문이다.

"돌아온 지 별로 안됐는데 호출이라..."

임무에서 돌아온지 이틀, 이틀 밖에 안되었는데 본부에서 호출이라니 카를로스는 좀 불안했다. 새로운 테러의 위협으로 호출이 난 것일수도 있기에 본부로 들어가기 전부터 바짝 긴장하였다. 이윽고 '회사'(정보국의 속칭)로 통하는 정문을 지나 카를로스는 자신의 차를 주차장에 주차시킨 뒤, '회사'로 들어갔다. 입구의 자동 유리문이 열리고 카를로스는 곧장 카운터로 향했다. 카운터에 앉은 갈색머리카락에 검은 눈을 가진 여성이 카를로스에게 말했다.

"어서오세요, 도와드릴것이라도?"

"어...음, 카를로스 헤스콕이라고 합니다만..."

카를로스의 이름을 들은 여직원은 무엇인가 생각난 듯 컴퓨터 자판을 두들긴 뒤 말했다.

"국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카를로스씨."

그 말을 들은 카를로스는 가슴이 긴장감으로 쿵쾅댔다. 어째서 국장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건가. 맡은 임무를 잘 수행하지 못해 질책을 받을 수도 있지만 카를로스는 그런 생각따위 하지도 않았다. 카를로스는 자신이 맡은 임무는 완벽하게 수행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자만이 아닌, 자타가 공인한 사실이였다. 실제로 중앙 정보국 국장, 제이슨 허드슨이 카를로스를 부른 건 다른 이유에서 였다. 국장집무실에 들어가니 커다란 유리창이 먼저 보였고 그 다음으로 집무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뒤적이고 있는 와이셔츠와 정장바지를 입고 무테 안경을 쓴 국장, 제이슨 허드슨이 보였다. 제이슨은 그제서야 누군가가 들어왔다는 걸 알고 서류를 책상구석으로 치웠다.

"어서오게나, 헤스콕."

"안녕하십니까, 국장님."

제이슨은 앉으라는 듯 의자 하나를 자신의 맞은편에 놓았다. 카를로스는 사양하지 않고 앉았다. 카를로스가 앉자 제이슨은 서류를 다시 뒤져보며 말했다.

"대단한 경력이군, 제75레인저연대에 입대해서 경험을 쌓은 뒤 육군구획제대에 입대, 제대해서 CIA의 S.A.D(Special Activities Division, 특수활동부)에서 지금까지 활동..."

서류를 한 장 넘긴뒤, 이어서 말했다.

"실적도 화려하군. 대부분이 흑색 작전인데도 뒤탈없이 깔끔히 해결했어."

이쯤되니 자신을 왜 호출한건지 카를로스는 궁금해졌다. 결국 참지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절 부르신 이유는요?"

카를로스의 반응에 제이슨은 놀란 듯 서류에서 눈을 떼고 그를 쳐다보았다. 곧이어 쓰고있던 안경을 검지손가락으로 올린 뒤 말했다.

"그래, 내가 아무런 사정설명없이 이력과 실적만을 말했으니 영문을 모를만하군."

제이슨은 책상 서랍에서 서류봉투 하나를 꺼낸 뒤, 카를로스에게 건냈다.

"우린 지금 중대한 위협과 마주하고있네."

서류봉투 안의 사진은 각도로 보아 감시카메라에 찍힌 듯 했다. 사진에는 얼굴을 종이가면으로 가리고 후드점퍼 위에 검은 방탄 조끼를 입은 키 180전후의 2명이 SIG 552 commando소총을 들고 어딘가에 침입하는 장면이 찍혀있었다.

"그들이 MI6를 침입했을때의 사진이네."

제이슨의 말에 카를로스는 경악하며 말했다.

"MI6...영국 정보부 말하는 겁니까?! 거기를 침입했다니 무슨..."

"피해 정도나 침입경로, 사용 장비로 보아 그들은 유럽에서 오랫동안 준비를 거친걸로 판단이 되네."

카를로스도 제이슨의 말에 동감했다. 방탄조끼나 이들이 들고있는 SIG 552 commando소총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진짜 목적은 밝혀진 바가 없네. 우리가 알고있는건 그들의 무기가 운반될 때 일본의 한 항구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는 것."

"오래 머물렀다니...어느정도 입니까?"

"그래, 거의 4개월동안."

4개월, 확실히 컨테이너를 정박시키기엔 이상할정도로 긴 기간이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가지다, 컨테이너에 4개월 동안 무기를 더 많이 실었거나 아니면 컨테이너에서 4개월 동안 무기를 가져왔거나. 제일 최악인 시나리오는 후자. 무기를 가져왔다, 그말은 곧 최소 도시 하나를 뒤흔들 힘이 테러리스트들에게 주어진다는 소리니까.

"그것이 자네를 부른 이유네."

제이슨이 다시 집무실의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흑색 작전입니까?"

"의외의 것을 먼저 묻는군. 그래, 일본정부의 승인을 받지않고 CIA, NSA. 이 세개의 기관끼리 협력하는 작전이네."

제이슨은 비장하게 말하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작전명, 눈먼 탄환(blinded bullet)"

 

"승객 여러분께 알립니다, 일본 도쿄 국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울려퍼지는 기내 방송에 카를로스는 부스스 눈을 떴다. 이라크에서 돌아온지 아마도 3일째, 그간 펼쳤던 작전의 피로 때문에 깜빡 잠든 듯 싶었다.

'습격당하면 어쩌려고 잠들었담...주의해야겠군.'

그렇게 속으로 자신을 채찍질해가며 비행기에서 내렸다. 자신의 수하물을 찾은 뒤, 여권을 펼쳐보았다. 이번 임무에 중앙 정보국에서 지급한 위조신분은 스탠포드 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346프로덕션이란 회사에 입사하게 된 미국 디트로이트 주 출신의 신입사원, 카를로스 헤스콕. 위조신분을 볼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자신인듯 하면서 자신이 아닌 느낌은 몇번이고 익숙해지지 않는다. 마치 맞지않는 가면을 쓴 불쾌함이랄까. 카를로스는 스탠포드는 커녕 대학 지척까지도 가본 적이 없다. 성인이 되자마자 제75레인저연대에 입대했으니. 그렇기에 더욱 걱정이 된다. 이때까지 전장이 집이나 마찬가지였던 인간한테 회사생활이라니, 그것도 예행연습없이. 걱정투성이인 카를로스는 입국심사대에 도착했다. 입국심사대의 직원이 손을 내밀며 영어로 말했다.

"passport please."

카를로스는 왜 영어를 쓰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도 여권을 직원에게 넘겼다. 직원은 여권에 찍힌 사진과 카를로스를 비교하더니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what is your purpose to visit?"

카를로스는 영어가 아닌 일본어로 대답했다.

"이 나라 회사에 입사하게 되서 말이죠."

카를로스의 대답에 직원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안도감이 묻어났다. 직원은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며 일본어로 말했다.

"입사 축하드리고 힘내세요!"

카를로스는 직원의 응원에 건성으로 반응하고 입국심사대를 통과했다.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 일본, 도쿄에.

 

따르르릉, 요란한 자명종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카를로스는 자명종 소리에 바로 반응해 번쩍 눈을 떳다. 시곗바늘은 아침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카를로스는 침대에서 일어나서 기지개를 폈다. 오늘은 처음으로 346프로덕션에 입사하는 날. 카를로스는 간단히 아침을 먹고 양치질과 세수를 한 뒤, 정장을 입고 오피스텔을 나섰다. 다행히 오피스텔은 346프로덕션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있어서 도보로 5분이면 충분했다. 카를로스는 인도를 걸으며 주변을 자세히 살폈다. 유동인구가 많고 도로도 넓어 교통이 원활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미행이 없는지 자신의 뒤를 꼼꼼히 체크하는 것도 잊지않았다. 346프로덕션은 크게 상당히 높은 고층빌딩과 1900년대 초반의 건축 스타일이 보이는 고풍스러운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 듯 했다. 카를로스는 긴장감에 무의식적으로 넥타이를 고쳐맨 뒤, 고풍스러운 건물 입구로 들어갔다. 들어가보니 정말 안은 동화에 나올법한 궁전이 따로 없었다. 카를로스가 그 위용에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고 있는 사이, 누군가가 다가왔다.

"혹시...카를로스씨?"

목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니 녹색의 재킷을 입고 회갈색 머리를 땋은 헤어스타일을 한 여성이 긴장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카를로스 헤스콕이라면 저 입니다만.."

그러자 긴장이 다소 풀린 얼굴로 여성이 말했다.

"아, 역시나! 일본어를 못하시면 어쩔까 했는데...아, 자기소개가 늦었네요. 센카와 치히로입니다."

"...카를로스 헤스콕입니다."

치히로는 카를로스를 집무실로 안내했다.

"흐음, 방금전의 궁전같은 건물이 본관이라고요?"

"예, 카를로스씨가 업무를 보실 곳은 저기 보이는 빌딩, 혹은 신관이예요."

카를로스는 머릿속에 건물구조를 각인시키려 이곳저곳 자세히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카를로스씨 일본어 정말 능숙하시네요."

"언어 배우는 것이 취미라서...다른 나라 언어도 더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정보국의 일때문에 배운거나 다름없지만 말이다. 당연하지만 치히로는 그런 걸 모르고 그저 놀라워한다

"헤에..! 대단하시네요. 스탠포드 대학교 졸업에 언어배우기가 취미시라니...."

이때까지 거짓말을 한다고 속이 쓰려오진 않았지만 이번에 카를로스는 거짓말에 대한 부담으로 속이 쓰려왔다.

'누구냐, 스탠포드 경제학과 졸업이라 쓴 놈은...'

카를로스는 속으로 스펙이 과도하게 높은 위조신분을 작성한 누군가를 원망하며 겉으로는 여전히 미소짓고 있었다.

"이제부터 카를로스씨는 프로듀서 업무를 하게될꺼예요."

"producer...뭔가를 제작하는 건가요?"

"아아, 아뇨. 저희 프로덕션이 방송관련 일들을 하는 건 알고계시죠?"

"예, 그건 알고 있습니다."

"방송 관련 사업에는 아이돌 양성도 있답니다. 카를로스씨는 아이돌들을 담당하며 그들을 위해 계약을 따오는 사람이 되는거예요."

"아아, 그런건가요."

'...듣지도 예상도 못했다고!!'

방송관계일을 하는 줄 알았던 카를로스에게 그 말은 한줄기 빛을 막는 장막과도 같았다. 테러리스트 상대로 심문이나 협상은 해보았지만 계약을 성립시키는 영업직원이라니. 일을 하기도 전에 의욕대신 걱정이 머릿속에 차올랐다.

"하...하지만 저는 그런 쪽으로는 경험이 없습니다만..."

"후후, 처음에는 다 그래요. 일을 하면서 서서히 경험을 쌓고 숙련되는 거죠."

아아, 그렇지.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 카를로스는 문득, 자신이 처음 탈레반을 심문 했을때 얼마나 미숙했는지 떠올렸다. 경험을 쌓아서 능숙해진다, 그걸 다시 상기하니 이 프로듀서일에 대한 자신감이 붙었다.

"그러면 제가 담당하게될 아이돌은 누구인가요?"

"혹시 아이들 좋아하시나요?"

왠 뜬금없는 소리인가 했지만 카를로스는 프로듀서로서의 업무와 관계되어 있을거라 생각해 신중히 대답했다.

"예, 정말 좋아합니다."

이 긍정의 대답은 진심이였다. 카를로스는 아이들이 좋았다. 그들의 반짝이며 깨끗한 눈동자가, 걱정없이 웃으며 뛰어노는 모습이, 처음보는 사람에게도 친절을 베풀줄 아는 아이들이 그는 더할 나위없이 좋았다. 그래서인지 카를로스는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곧잘 아이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카를로스의 대답에 치히로는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카를로스씨가 맡을 아이돌들은 나이가 어린 편이거든요."

"아이돌들이라, 한명이 아닌가보죠?"

"예, 한 7명정도 돼요."

카를로스가 예상했던 것보다 많다. 끽해야 두세명 될줄 알았는데. 어떤 아이들일까. 치히로가 한 문앞에서 멈추었다. 문 안쪽에서 뭔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여기가 카를로스씨의 집무를 보실 곳인데....아이돌들이 먼저 들어가있나봐요."

카를로스는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목재 문을 열었다. 집무실은 중앙 정보국의 국장실과 비슷했다. 큰 유리창 앞에 책상과 책상앞에 투명한 유리가 올려진 탁자, 탁자 양옆으로는 소파가 있었다. 국장실과 차이나는 거라면 여자아이 셋이 뛰놀고 다른 여자아이 넷이 그 세명을 말리고있다는 것. 치히로가 헛기침을 하자 7명의 시선이 치히로에게 향했다. 치히로는 7명을 둘러보고 카를로스를 정중히 가리키며 말했다.

"여러분, 여러분의 담당 프로듀서가 오셨어요! 카를로스씨."

카를로스는 치히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한발짝 앞으로 나가 그들을 향해 허리숙여 인사했다. 물론 일본어로

"오늘부터 여러분의 담당을 맡게된 카를로스 헤스콕이라고 합니다."

놀란 표정을 한 아이도 있었고 그저 활짝 웃고있는 아이도 있었고 무관심한 아이도 있었다.

"그럼, 카를로스씨. 저는 가볼께요."

"아, 예. 안내 감사합니다, 센카와씨."

치히로가 나가자 집무실안에서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다행히 그것도 잠시, 분홍색 토끼옷을 입은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카를로스에게 다가온 뒤 갸웃거렸다. 이내 그 여자아이가 외쳤다.

"외국인인겁니다!"

"하하, 미국에서 왔으니 외국인 맞습니다. 카를로스 헤스콕이예요."

"이치하라 니나입니다! 열나게 잘 부탁 드리는겁니다!"

비속어가 섞인 것 같지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카를로스는 미소지으며 니나와 악수했다. 작고 어린 손인데도 에너지가 넘쳤다. 니나와 악수한 뒤, 에너지로는 니나에게 지지않을 오렌지색 단발머리에 약간 짙은 눈썹이 포인트인 여자아이가 손을 내밀며 힘차게 말했다.

"류자키 카오루예요! 앞으로 엄청 열심히 할게요!"

카를로스는 역시 악수를 거부하지 않으며 말했다.

"잘 부탁해요, 류자키양." 

나이가 제일 어린 두명이 가장 당당하게 악수하자 나머지 5명도 경계를 풀고 카를로스에게 다가왔다.

"그럼 프로듀서는 미국에서 온 거야?"

그렇게 묻는건 양쪽 머리카락을 살짝 묶은 아카기 미리아.

"예, 디트로이트 주 출신입니다."

위조신분대로 대답하는 카를로스.

"어머나....정말 먼데서 오셨네요."

살짝 웨이브가 들어간 세미롱의 금발과 하얀색과 고급스러운 빨간색이 섞인 원피스가 인상적인 사쿠라이 모모카가 살짝 입을 가리며 놀라워했다.

"그런데도 일본어 능숙하시네요..."

검은 숏헤어를 토끼 머리핀으로 정돈한 것이 특징인 사사키 치에가 나즈막이 말했다.

"언어 배우는 게 취미라서 말이죠. 영어와 일본어말고도 5개정도 더 할 수 있습니다."

"대단하세요...7개 국어라니..."

모모카와 비슷하게 웨이브가 들어간 회색 숏헤어에 왼쪽 눈 밑의 눈물점이 찍힌 나루미야 유메가 동경의 눈길로 카를로스를 쳐다보았다.

"국어능력이 아니라 업무능력을 봐야하지 않을까요? 전 아직 신뢰할 수 없다고 봐요."

차갑게 이런 말을 뱉는 건 카를로스가 들어왔을때부터 줄곧 태블릿만을 보고있는, 금갈색 눈동자에 파란 리본으로 긴 갈색머리를 정돈한 타치바나 아리스.

"타치바나양이 못믿는것도 당연합니다. 저는 아직 실적을 쌓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쌓지도 않은 실적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는 건 잘못되지 않았을까요?"

카를로스의 차분하고 조용한 반박에 아리스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리스의 그 모습에 카오루와 미리아는 놀라워했다.

"아리스가 말싸움에서 진건 처음봐!"

"정말~..."

"타치바나입니다!"

카를로스가 그렇게 놀라워 할일 이냐는듯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치에가 말했다.

"아리스쨩은 말싸움 정말 잘하거든요. 항상 논리적으로 반박해서 어른도 이겼었는데..."

"어른을 이겼다고요? 대단하군요, 타치바나양."

카를로스의 칭찬에 아리스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뭐...뭔가요, 비아냥인건가요?"

"아뇨, 순수히 감탄한겁니다. 정말 대단해요."

아리스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고개를 들지못했다.

'어른인척 하지만 역시 애구나.'

앞으로 이 아이들을 아이돌로서 이끈다는 생각에 카를로스는 매일매일이 즐거워 질것같은 예감이 들었다.

 

"후우, 힘들군...."

장시간의 컴퓨터 업무로 지친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카를로스는 오피스텔내의 계단을 올랐다. 프로덕션 내에서의 업무는, 당연하지만, 전장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피곤함을 불러일으켰다. 굳이 그 피곤함을 정의하면 감정을 너무 숨긴것이려나. 중앙정보국 휘하의 부서, 특수활동부에서의 경험으로 카를로스는 감정을 숨기는 것에 너무도 익숙해졌다. 결국, 시간이 갈수록 자신도 모르게 감정을 숨기게 되었다. 감정을 숨긴 대가는 마음 속의 응어리였다. 감정을 숨길때마다 마음 속의 응어리가 천천히, 하지만 착실히 쌓였고 그 응어리는 가끔씩 카를로스의 심장을 죄는 듯 했다. 지금도 예외는 아니다. 신체적으로 아무이상이 없어야 할 심장은 누군가가 움켜쥔 듯 했다. 카를로스는 한숨을 쉬며 열쇠로 오피스텔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집에 들어와보니 거실의 탁자 위에 못보던 서류철과 검은 색 케이스 3개가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혼비백산하겠만 카를로스는 담담히 서류가방을 소파에 올려놓고 검은색 케이스들을 바닥에, 서류철은 그대로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건케이스로군...정보국에서 보낸건가."

3개의 검은색 케이스는 제각각 다르게 생겼다. 하나는 길쭉한 직육면체, 하나는 높이가 높은 정육면체, 하나는 마치 첼로케이스처럼 생겼다. 카를로스는 우선 첼로케이스를 열어보기로 했다. 지퍼를 내려 첼로케이스를 열어보니 케이스안에는 탄창이 분리되어 있고 검은 색으로 도색된 MSR(Modular Sniper Rifle, 모듈화 저격 소총)과 AAC사의 titan-qd소음기가 검은 스티로폼위에 조심스레 놓여있었다. 카를로스는 MSR을 꺼내 자세히 살펴봤다. 그리고는 시험삼아 볼트를 당겼다가 밀었다. 움직임이 뻑뻑하지 않은 걸 보니 정비는 제대로 된 듯했다. 다음으로는 정육면체 모양의 케이스를 열었다. MSR과 마찬가지로 검은색으로 도색된, 소음기 장착이 가능하며 타 모델보다 길이가 짧아 휴대가 쉬운 HK45CT 권총, omega 45k 소음기와 함께 나이프도 한자루 들어있었다. 동남아에서 유래되어 휘어진 날에서 나오는 무시무시한 절삭력이 특징인 카람빗 나이프. 전부 다 육군구획제대에서 활동했을 때부터 줄곧 써온 무기들이였다. 남은 직육면체 케이스, 저기에는 뭐가 들어있을지도 예상이 가지않는다. 카를로스는 손을 뻗어 직육면체형 케이스의 잠금장치를 풀고 열었다. 그안에는 탄약과 탄창이 분리되어 있었고 어깨 권총집과 칼집이 들어있었다.

"첨단장비는 하나도 없군. 잘된거지, 그런건 오히려 눈에 띄니까."

카를로스는 안도감에 혼잣말했다. 집안의 어둠과 고요함을 깨고 전화가 울렸다. 터치스크린에 발신자 표시 제한이라고 표시되어있었다.

'보나마나 국장님이겠지.'

카를로스는 스크린을 드래그해 전화를 받은 뒤 말했다.

"여보세요?"

"물건은 잘받았나?"

제이슨의 목소리였다. 카를로스는 소파에 앉아 서류철의 표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예, 잘 받았습니다. 서류는 확인 못했지만요."

"내가 자네에게 전화한 것도 그 문서에 대한 설명이네. 펼쳐보게나."

노란색에 빨간색 잉크로 Top secret(1급 기밀)표시가 찍힌 서류철을 펴니 각종 사진들과 한 서류뭉치가 들어있었다.

"사진의 인물들은 4개월 간 그 정체불명의 컨테이너를 수시로 들렀던 인물들일세. 총 12명이지, 문제는 신원확인이 불가능할만큼 드론의 카메라가 좋지못했네."

"그렇다면 저는 이들이 찍힌 CCTV영상을 확보하면 되겠군요."

"제대로 짚었군, 그게 자네의 첫임무네. 컨테이너가 있던 곳은 서류철에 나와있다시피 도쿄항이네."

무기가 실려있던 붉은 색 컨테이너의 사진이 한 서류뭉치에 클립으로 끼워져있었다.

"그리고 이런 임무의 특성상 자네도 알겠지만...."

카를로스도 이미 다 알고있는 사실을 제이슨은 왜인지 뜸을 들이더니 말한다.

"누굴 죽이고 살릴지는 전적으로 자네의 판단에 달렸네. 하지만 그에 따른 처리도 자네의 몫. 그리고 이 작전이 대외적으로 노출됐을시 우린 자네의 존재를 전면부정할걸세."

"잘 알고있습니다, 한두번해본것도 아닌걸요."

카를로스는 이미 외교적인 마찰이 예상돼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는, 이른바 흑색작전을 밥먹듯이 했기에 주의해야할 점이라던가 과정은 알아서 술술 입으로 나왔다.

"아참, 그리고...."

제이슨이 말끝을 잠시 잇지못했다. 카를로스의 눈앞에 제이슨이 '말해야하나? 하지말아야하나?'라며 고민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보이는 듯 했다.

"....러시아에서도 자국의 요원을 보낸 것으로 판단이 되네."

그 말에 소파에 잠시 몸을 맡긴 카를로스는 벌떡 일어났다.

"예?! 사실입니까?"

"사실이네, 어떤 요원인지는 모르지만 SVR소속이라고 판단되네."

"SVR....대통령 직속 아닙니까!? 이런..."

"아마 SVR도 우리가 자네를 파견한건 대강 파악했을 것이네. 마주칠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조심하게나, 이만 끊도록 하지."

"알겠습니다...끊죠."

전화를 끊고 카를로스는 착잡함에 이마를 손으로 가렸다. 명백히 꼬이고 있다, 회사를 다니는 것도 모자라 러시아의 요원까지. 어떤 임무든 상정내의 예측불가능한 요소들이 있다. 그러나 이번 임무는 상정 외의 예측불가능한 요소 투성이다. 이것들은 양날의 검이다. 때에 따라 도움이 되기도, 위협이 되기도 한다. 카를로스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이런 요소들은 위협만이 된다고 믿는다. 그는 힘없이 소파에 누워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의 일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모르는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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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써보는 창작 글입니다! 재밌게들 봐주셨으면 하네요. 밀덕질로 점철되어있어 못알아보시는 분들도 많을 것이 기에 일단 용어 정리 들어가겠습니다!

제75레인저연대:미 육군 소속 티어 2 특수부대입니다. 1942년 창설된 유명한 부대죠. 부대의 구호는 '레인저가 앞장선다!(Rangers read the way!)입니다.

육군구획제대(Army Compartmented Elements):줄여서 ACE, 이것까지만 듣는다면 모르시는 분이 많겠지만 이것은 미 육군 소속 티어1 특수부대인 델타포스의 2010년 이후 명칭입니다.

S.A.D (Special Activities Division, 특별활동부):CIA휘하의 준군사조직입니다. 특수부대 출신으로 이루어졌다는군요.

NSA(National Security Agency, 국가안보국):미 국방부 휘하의 조직입니다. '프리즘 폭로 사건'으로 질타를 받았죠. 주로 정보관련업무를 본답니다.

SVR(Слу́жба вне́шней разве́дки, 러시아 해외 정보국):대통령 직속의 러시아 정보기관입니다, 소련때의 정보기관인 KGB에서 파생되었죠. 쉽게말해서 러시아의 CIA입니다.

밀덕질을 하는지라 한번 신데마스와 밀리터리 요소를 결합해보았습니다. 망상을 글로만 적다가 올려본건 이번이 처음이군요. 이건 글 내용과 상관없을지도 모르지만 주인공의 이름, '카를로스 헤스콕'은 베트남전에서 맹활약한 미군 저격수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CIA국장 '제이슨 허드슨'은 CIA관련 인물은 모르기에 한 게임의 등장인물에서 따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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