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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리티P 시리즈] (Re)Write─덮어 쓰는, 혹은 다시 쓰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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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23, 2017 02:54에 작성됨.

<퍼스널리티P 시리즈의 이전 이야기들>

1. 타카가키 카에데 <밤 바다의 이정표>

2. 사기사와 후미카 <First Step>

3. P <인내의 삶> 

4. <신데렐라 걸스> 

5. 센카와 치히로 <함께 걷는 길> 

6. <'어제'가 '오늘'과 함께 할 '내일'에게> 

7-1. <방랑자라고 다 길 잃은 것은 아니다> 

7-2. 호죠 카렌 <히로인과 소녀, 꿈의 무게> 

8. 네가 모르는 이야기, 너만이 아는 이야기

 

<외전격 이야기들>

메모리얼 <사쿠마 마유의 회상>

사기사와 후미카<걷지 않은 길>

사기사와 후미카 <파트너>

 


 

 

Rewrite

[타동사][VN] (re・wrote / -'rəUt ; 美 -'roUt / , re・writ・ten / -'rItn /) 다시[고쳐] 쓰다

 


 

<(Re)Write─덮어 쓰는, 혹은 다시 쓰는.>

 

타카가키 카에데는 CG프로덕션 본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원룸에 살고 있다.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를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회사 건물까지는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길을 걸어서 약 20분, 택시나 자가용을 타면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그녀의 집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는 그녀의 동료인 센카와 치히로가 살고 있는 원룸이 있고, 두 사람의 원룸의 딱 절반쯤 되는 장소에, 며칠 전 이사한 프로듀서의 맨션이 위치하고 있다.

그 원룸의 주인인 타카가키 카에데는 지금, 침대에 엎드린 채 자신의 앞에 펼쳐놓은 노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가느다란 선에 의해 양 쪽으로 나누어진 노트의 페이지 가장 상단에는 각각 ‘나’와 ‘P’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녀의 새하얀 손가락이 노트의 옆에 놓여 있던 볼펜을 집어 들었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볼펜의 촉이 튀어나오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곧바로 ‘나’라고 적혀 있는 면에 필기를 시작했다.

 

[나]

-타카가키 카에데

-25

-와카야마

-6월 14일

-AB

-쌍둥이자리

-온천 순회

-왼손잡이

-일본주파()

-새우

-……

-……

-…….

 

“으음…….”

 

글자를 적어나가던 손을 멈추고, 그녀는 시선을 돌려 반으로 나누어진 페이지의 오른쪽 면을 바라보았다. 가장 윗부분에 ‘P’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 오른쪽 노트에는, 아직은 P라는 글자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팔다리만큼이나 시원스럽게 뻗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볼펜을 이리저리 돌리던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P]

- P?? William. P. Johnson??

-29

-도쿄??

-9월 24일

-A형??

-천칭자리

-독서, 게임

 

“거짓말.”

 

손을 멈추고, 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으며 가로선을 두 개 힘주어 그었다. 그 옆에 단어를 덧붙이고서야 그녀는 다시 빙그레 웃었다.

 

-독서, 게임 야구

-왼손잡이? 오른손잡이??

-맥주??와인??칵테일???

-면으로 된 것은 전부 다??

-

 

“하아……모르겠어.”

 

볼펜을 내려놓고, 그녀는 자신의 상반신을 지탱하고 있던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얼마간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있던 그녀는 신음소리를 흘리며 고개만을 살짝 들어 노트를 바라보았다. 왼쪽 면에 비하면 절반도 채 채워지지 않은, 그나마 채워진 부분마저도 무수한 물음표가 들어 있는 오른쪽 면이 무척이나 휑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베개 속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이 모양인데 욕심을 안 부릴 수가 있나요……”

 

누구에게 향하는 것인가, 원망스러운 듯한 그녀의 혼잣말이 조용히 원룸 속을 맴돌았다. 그런 그녀의 상념을 부수기라도 하려는 것인지, 머리맡에 올려 둔 그녀의 휴대전화가 맹렬하게 알람을 울리기 시작했다.

 

“네, 네. 알았어요. 일어날게요. 일어나면 되잖아요.”

 

투덜대며 침대에서 일어난 그녀는 산발이 된 머리를 손으로 쓸어넘기며 휴대전화의 알람을 껐다. 노트를 덮어 책꽂이로 되돌리고, 터덜터덜 욕실로 걸어가던 그녀의 시선이 벽에 걸린 달력에서 멈추었다. 이미 12월이 되었지만, 그녀의 달력은 11월에서 멈추어 있었다. 한동안 달력을 바라보던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욕실로 들어갔다.

  


 

 

프로듀서의 집들이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12월의 두 번째 금요일.

점심시간을 한 시간 정도 넘겨 카에데가 출근할 무렵, 사무실에는 히터의 온기와 햇살의 포근함을 스펀지처럼 잔뜩 머금은 나른한 공기가 돌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무실로 들어오며 평소처럼 문을 닫으려던 그녀는 사무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황급히 문고리를 잡아 소리 죽여 문을 닫았다. 문과 가까운 자리에 위치한 치히로의 자리에서는 치히로 본인이 커피를 홀짝이며 잡지를 읽고 있었고, 그녀의 시선이 닿은, 사무실 한 켠에 설치된 소파에는 담요를 덮은 미유가 머리를 벽에 기대어 앉아 식후의 나른함을 달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사무실에 있는 사람은 그 두 사람뿐. 창가를 점령하고 있는, 지금도 서류가 한가득 쌓여 있는 자리의 주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문 바로 옆의 옷걸이에 외투를 걸어 둔 카에데는 미유가 깨지 않도록 발소리를 죽여 치히로에게 다가갔다. 치히로는 읽던 잡지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카에데 씨. 미즈키 씨는 아직 안 오셨어요.”

“프로듀서는요?”

“두 시간 전부터 지하에 계세요. 점심도 연습생 아이들이랑 드신다고 하셨고요.”

“그렇군요.”

 

‘연습실……이번에도…….’

 

카에데는 일정표를 바라보았다. 드문드문 인터뷰나 잡지 촬영 등의 일정이 들어 있기는 했지만 지난 달에 비하면 확연히 늘어난 빈 공간이 눈에 띄었다. 지난 달에 있었던 프로덕션 매치를 마지막으로 ‘신데렐라 걸즈’는 사실상 개점휴업에 들어간 상황. 그 상황을 만든 당사자인만큼, 프로듀서는 영업보다도 연습생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내실을 다지는 쪽으로 포커스를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다. 연습실이다.

이번에도, 연습실이다.

 

“저는 그럼 먼저 내려가서 몸이라도 풀고 있어야겠어요.”

“네. 수고하세요.”

 

치히로의 배웅을 받으며 사무실을 나온 카에데는 곧바로 탈의실로 향했다.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고 지하로 내려간 카에데를 반기는 것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고요한 공기가 흐르는 지하의 공기였다. 일부러 난방을 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여기까지는 중앙난방의 혜택이 닿지 않는 것인지. 지상에 비하면 훨씬 싸늘한 지하의 공기에 가볍게 닭살이 돋는 것을 느끼면서 그녀는 휴게실의 게시판에 걸려 있는 연습 일정표를 확인했다. 오늘은 연습생들이 댄스 트레이닝을 하는 날이었다.

연습생들은 점심시간 직후부터 시작되는 오후 A조. 미즈키와 카에데는 A조가 끝난 다음부터 시작하는 오후 B조에 편성되어 있었다.

 

‘그 인원수라면 댄스 연습실은 피하는 게 좋으려나…….’

 

그녀가 비어있는 연습실을 찾아 복도를 걷던 그 때, 조용한 복도 저편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미루어 보아 근원지는 아마도 복도의 가장 끝에 위치한 주 연습실인 듯 했다.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여 연습실의 앞에 도착한 카에데는 살짝 열린 문틈을 통해 살그머니 방 안을 들여다 보았다.

커다란 거울이 사방에 설치되어 있는 방 안에는 연습생들과 루키 트레이너, 그리고 프로듀서가 있었다. 프로듀서가 평소의 정장 차림이 아닌 트레이닝 복 차림이라는 것을 보면 주 연습실의 한 켠에 설치된 기구로 스스로 트레이닝이라도 하고 있던 모양이다. 별 다른 업무가 없다면, 프로듀서는 레슨의 모니터링을 겸해 종종 지하로 내려와 운동을 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새 더 늘어난 모양이네요……못 보던 아이들도 있고.’

 

그를 둘러싸듯이 빙 둘러 앉은 연습생들과 루키 트레이너의 앞에서 그는 몸짓을 섞어 가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주 연습실의 크기가 생각보다 컸기 때문에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말이 한 마디씩 나올 때마다 이따금씩 연습생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곤 했다.

 

“……신세 좋네요.”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온 혼잣말에 화들짝 놀란 카에데는 재빨리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연습실의 사방을 둘러싼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들키기라도 할세라 그녀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발소리를 죽여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

입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발소리를 죽여 휴게실로 걸어가던 그녀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카에데 씨?”

“히약?!”

 

조용하던 복도에 느닷없이 자신의 이름이 불린 탓일까, 온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로 화들짝 놀란 카에데는 이내 평정을 되찾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등 뒤에는 품 속에 자료를 안고 있는 트레이너, 아오키 메이가 있었다.

 

“트, 트레이너 씨…….”

“죄, 죄송해요. 놀래켰나요?”

“개, 괜찮아요. 무슨 일인가요?”

“레슨 시작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혹시 시간을 잘못 알고 계신 건 아닌가 싶어서요.”

“그런 게 아니라……그냥 미리 몸을 좀 풀어두고 싶어서요. 혹시 지금 사용할 수 있는 연습실이 있나요?”

“역시 카에데 씨는 뭔가 다르네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카에데의 질문에 메이는 트레이닝복의 뒷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오후 A조가 연습생들이니까……네, 지금은 제2 연습실을 사용하시면 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주 연습실은 뒷정리도 해야 하고…….”

“제2 연습실……고마워요.”

“아뇨! 이게 제 일인걸요. 그러면, 수고하세요!”

 

메이와 헤어진 뒤, 카에데는 곧바로 제2 연습실로 향했다. 연습실의 불을 켜고, 벽에 설치된 에어컨의 전원을 켠 뒤, 그녀는 곧바로 연습실의 한 켠에 쌓여 있는 매트리스를 바닥에 깔고 몸을 풀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걸 알지만 말이죠.’

 

제2 연습실은 연습생들이 들어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제1 연습실이라 불리며 주 연습실로 사용하던 장소였다. 아이돌 부서 시절에는 그다지 인원이 많지 않았으므로 딱히 큰 공간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연습생들이 들어오고, 트레이너들의 일정이 바빠짐에 따라 상황이 조금씩 바뀌게 되었다. 용도가 없이 창고로 사용하던 빈 방들을 합쳐 하나의 커다란 연습실로 만들었고, 자연스럽게 제1 연습실이라는 이름은 그 방이 가져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전까지 제1 연습실이라 불리었던 이 방은 이제는 제2 연습실이라고 불리며 대체재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어쩐지……쓸쓸하네요.’

 

스트레칭을 하다 말고, 다시 몸을 일으킨 카에데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스트레칭 후 무거운 한숨을 내뱉는 그녀의 루틴은 잠시 후, 그녀와 마찬가지로 약간 일찍 출근한 미즈키가 연습실로 들어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베테랑 트레이너, 아오키 세이의 박수소리에 맞추어 자세를 취하고 있던 두 사람이 허물어지듯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격렬한 움직임 덕분에 금세 몸이 달아올라, 에어컨의 전원을 끈 지 한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습실 내부에는 후끈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드링크를 마시며 호흡을 고르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손에 든 차트에 무언가를 기록한 베테랑 트레이너는 기록을 마치고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조금 전에 프로듀서 씨에게서 연락이 왔어. 결산회의가 마치는 대로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했으니까, 두 사람은 샤워를 마치는 대로 곧바로 사무실로 올라가보도록 해.”

“프로듀서에게서요……? 무슨 내용인가요?”

“글쎄……그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오래 걸리는 이야기는 아닐거라 하더군.”

“그런가요…….”

“그럼, 두 사람 모두 수고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어~!”

 

세이가 연습실을 나가고, 투박한 소리를 내며 연습실의 두터운 방음문이 닫혔다. 그녀가 나가고 나서도 한동안 쌕쌕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던 두 사람은 약간 시간이 지나서야 시계를 바라보았다.

 

“어디보자……지금이 다섯 시 반이니까……결산회의 마치면 여섯 시쯤 되던가? 이거 까딱하면 늦겠네.”

“그러네요. 얼른 준비하죠.”

 

자리를 털고 일어난 두 사람은 서둘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상당히 서둘렀다고 생각했지만, 두 사람이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는 여섯 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퇴근한 모양인지 사무실의 불은 입구부터 창가에 위치한 프로듀서의 자리까지를 비추는 단 한 줄의 형광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꺼져 있었다.

낮까지만 하더라도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는데 그걸 언제 다 처리한 것인지, 프로듀서의 책상은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간만의 여유를 즐기는 것인가, 전등의 불빛 아래에서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책을 읽고 있던 그는 사무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을 발견한 그는 책상 위에 읽던 책을 내려놓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어요?”

“엑, 지금까지 우리 기다린 거야?”

“아뇨, 읽던 게 얼마 안 남아서요. 마저 다 보고 가려고 했죠.”

“헤에, 책도 읽는구나. 그런데 무슨 일이야? 평소에는 트레이너들 통해서 잘만 전해주더니.”

 

“드릴 게 있어서요”라고 말하며 프로듀서는 책상 위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들에게 다가갔다.

 

“자, 여기요.”

“이건……봉투?”

 

그가 건넨 것은 필기체로 Cinderella Girls라는 글귀가 적힌 봉투였다.

 

“다음 주에 있을 송년회에 대해서는 저번에 말씀 드렸을 겁니다. 그 송년회를 단순한 송년회로 보내고 싶지 않아서 말이죠. 그래서 조금 특별한 자리를 준비했거든요.”

“헤에, 특별한 자리? 한번 볼까?”

 

미즈키가 봉투를 열어보려고 하자, 프로듀서는 깜짝 놀라며 그녀를 제지했다.

 

“아니, 그렇다고 준 사람 앞에서 여는 게 어딨습니까? 이따가 집에 가서 열어보세요.”

“에이, 뭘 그런 거 가지고……알았어, 알았어. 안 열어볼게.”

“할 이야기라는 게 그냥 이것 뿐인가요?”

“네”

 

고개를 끄덕이고 프로듀서는 두 사람을 사무실의 문 쪽으로 안내했다. 먼저 문을 열고 나간 그는 마치 에스코트를 하듯 문을 열어놓은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럼 두 분 모두, 주말 잘 보내세요. 오늘 하루도 수고하셨습니다.”

“네, 수고하셨어요.”

“응! P군도 수고했어!”

 

***** 

 

“헤에, 송년회 주제에 초대장이라. 분위기 있네……응?”

 

프로듀서와 헤어지고, 정문을 통해 본관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곧바로 귀로에 올랐다. 집을 향해 걸어가면서 그에게서 받은 봉투를 이리저리 돌려보던 미즈키가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잠깐만, 이거…….”

“무슨 일이에요?”

“아니, 이 로고 말이야……내가 잘못 본 건 아니겠지?”

 

그녀의 옆에 선 카에데는 슬쩍 고개를 돌려 미즈키가 보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미즈키가 들고 있는 봉투에는, 왕관 위에 수사자의 머리가 그려져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아는 거예요?”

“이거, 내가 제대로 본 거라면, R호텔 로고야.”

“R호텔……아, 저도 이름은 들어 봤어요. 시내에 있는 고급 호텔이죠.”

 

R호텔이라면 카에데 역시 면식이 있는 이름이었다. 모델 시절에 업무 차 몇 번인가 방문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R호텔의 이미지는 ‘고급’이라는 단어를 형상으로 만들어 놓은 듯한, 그야말로 영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그 호텔의 초대장이다, 이 말인가요?”

“응.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다면 말이야.”

 

카에데는 가방에서 자신의 봉투를 꺼내어 바라보았다. R호텔의 물건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별 무늬도 없는 새하얀 봉투에서 어쩐지 기품이 느껴지는 듯 했다.

 

‘뭐, 그 사람이라면……이제는 무슨 짓을 저지르든 놀랍지 않겠네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별관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책을 읽고 있는 것인가, 별관의 창가에는 여전히 형광등의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초대장에 적혀 있던 날이 되었다.

연말을 1주일 앞둔, 12월의 세 번째 금요일.

다른 아이들은 우선 회사에 모인 뒤 프로듀서의 인솔 아래 연습생들과 함께 호텔로 출발했지만, 카에데와 미즈키, 그리고 치히로와 미유는 치히로의 집에서 따로 모여 호텔로 향했다. 출발은 제때 했지만 예상치 못한 시내의 교통혼잡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택시에 앉아,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미터기를 바라보며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기를 10여분. 마침내 목적지인 R호텔에 도착한 그들은,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문을 열어주는 정문을 지나 로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우와아아…….”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들어선 네 사람이었지만, 곧바로 눈앞에 펼쳐진 로비의 광경을 본 그들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R호텔이 어디인가. 전 세계의 숙박업계를 통틀어 탑 오브 탑, 정점 중에서도 정점에 서 있는 곳이 아니던가. 네 사람 중에서는 카에데를 제외하면 생애 처음으로 와 보는 최고급 호텔의 로비, 그나마 카에데마저도 ‘손님’의 입장으로는 처음 와 보는 호텔의 로비였던 것이다.

밖은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었지만, 인테리어나 소품에 고급 자재를 아낌없이 사용한 것을 자랑이라도 하는 듯, 자재의 특징을 죽이지 않는 은은한 조명이 드리워진 로비 안에는 고급스러운 옷차림의 사람들이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휴, 다행이다……안 늦었어.”

“분명히 오후 7시까지였죠. 10분 남았네요.”

 

로비의 정 중앙에 우뚝 서 있는 미니어쳐 시계탑의 시계를 바라보며 미즈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쉴 무렵, 네 사람을 향해 호텔리어 한 사람이 다가왔다. 마치 갑옷을 입은 기사처럼 빈틈없이 차려 입은 검은 제복 위로 단정하게 정리한 검은 머리를 보면 몸가짐에 엄격한 일류라는 냄새가 팍팍 풍기는 남자였다.

 

“실례합니다. 혹시 용무가 있으십니까?”

“에? 아, 그러니까……이거요.”

 

그들은 자신들의 앞을 막아선 호텔리어에게 새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이전날 프로듀서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봉투에 적힌 Cinderella Girls 라는 문구를 본 호텔리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봉투의 입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그는 곧바로 봉투를 그들에게 되돌려주었다.

 

“연회장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꾸벅, 깊이 허리를 숙인 호텔리어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따라 일행은 건물의 가장 안쪽에 있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로비에 있는 것과는 무엇이 다른가 싶었지만, 일단 안에 타 보고 나니 무엇이 다른 것인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버튼이 최고층과 그 아래 2개층밖에 없었던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카에데는 가방 속에 든 봉투를 꺼내 그 내용물을 끄집어냈다.

 

-빛나는 무도회장을 향한 신데렐라들의 첫 걸음을 기념하는 자리를 갖고자 합니다. 이 티켓을 받으신 분 중에서 참가할 의향이 있으신 분은 아래에 적힌 장소로, 지정된 시각까지 와 주십시오.

 

속으로 한숨을 폭 내쉬며 카에데가 봉투를 가방 속으로 되돌렸을 무렵,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커다란 금속 문이 좌우로 열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들을 반긴 것은, 우선은 황금색이었다.

분명히 로비를 지나쳐 올 때만 하더라도 자재의 느낌을 살리는 은은한 조명을 비추고 있었을 터인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다음부터 그들을 반긴 것은, 황금색의 별세계였다. 분명 석재를 가공하여 만들었음이 틀림없는 바닥도, 벽도, 천장도, 모조리 황금색이었다. 물론 실제 황금일 리는 없다. 이곳이 프랑스의 베르사유에 있는 태양왕의 궁전도 아닐뿐더러, 제아무리 세계의 정점에 있는 호텔, 엠블럼 하나만으로도 다른 호텔들을 쩌리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호텔이라지만 본점도 아닌 일개 지점에 그런 정신나간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미국에 있을 본점이라면 또 모를까.

 

“우, 우와아…….”

“장관이네요…….”

“끝내준다…….”

 

그렇지만, 황금색이었다.

천장을 올려다보면, 몇 개나 되는 전구가 들어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 샹들리에가 밝은 황금빛을 뿌려대고 있었다. 벽을 돌아보면, 유리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매끄럽게 가공된 석재가 샹들리에의 빛을 반사시키고, 사이사이에 걸려 있는 그림이나 도자기는 자신들의 가치를 과시하고 있었다. 저 샹들리에만 떼놓고 본다면 황금색이 아니라 추레한 백열등의 색상이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싸구려 백열등의 빛이 황금색으로 보일 정도로, 호텔 내부의 분위기는 그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하지 않고, 호텔리어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정신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들은 마침내 그의 발걸음이 어떤 문 앞에서 멈추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호텔리어는 그들이 모두 멈춰 선 것을 확인한 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열린 문 너머로 나타난 것은 방의 절반은 옷걸이로, 나머지 절반은 피팅 룸으로 꾸며진 의상실이었다.

 

“이곳입니다. 본 연회장에는 드레스 코드를 맞추어주셔야 하기에, 불편하시더라도 옷을 갈아입어주십시오. 필요하신 의복 일체는 구비되어 있습니다.”

“아, 아, 네…….”

 

그제서야 그들은 자신들의 옷차림이 이 장소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움직이기 편한 복장’이라고만 적혀 있었기에 그만 평소처럼 입고 나와버린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화장에는 힘을 빼지 않았기에, 복장을 제외하면 문제 될 부분은 딱히 없었다는 것이었다.

 

“룸 안에 설치된 벨을 누르시면 담당자가 올 겁니다. 부디 천천히 즐겨주시길.”

 

네 사람이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깊이 허리를 숙인 호텔리어가 뒷걸음질로 방을 나갔다. 찰칵, 하고 문고리가 걸리는 소리가 들려왔음에도, 입을 쩍 벌린 채 딱딱하게 굳은 네 사람은 좀처럼 움직일 줄 모르고 있었다.

 

“……저기, 치히로랑 미유는 혹시 이렇게 될 거라는 거, 알고 있었어?”

 

미즈키의 질문에 미유와 치히로는 동시에 고개를 붕붕 흔들었다.

 

“아니, 저희는 그 상자가 초대장인 것도 몰랐어요……어쩐지 프로듀서 씨가 그 상자를 찾는다 싶더라니…….”

 

‘그 상자’라는 것은, 프로듀서의 집들이가 있던 날 그에게 도착한 작은 소포를 말하는 것이었다. 어쩐지 국제우표가 덕지덕지 붙어 있고 이상한 존재감이 느껴진다 싶었더니, 그 안에 든 것은 터무니없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그, 그나저나 이거 그거죠? VIP라고 하는 그거……?”

“……나 이런 대접은 처음 받아보는데……카에데는 이런 거 익숙하지 않아?”

“아뇨……이런 건 저도 처음이에요……미유 씨는……앗, 미유 씨?!”

“아, 아, 아으……저, 역시 저는 이런 곳에는……죄송해요……저, 돌아가겠습니다.”

“아아, 잠깐, 잠깐만요!”

 

핑핑 도는 눈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방을 나가려는 미유에게 미즈키와 치히로가 달려들었다.

 

“정신차려, 미유! 이런 절호의 기회, 앞으로 두 번 다시 안 올지도 모른다고!”

“그래요! 물론 저도, 미즈키 씨도 처음이지만! 그래도 프로듀서 씨가 구해주신 자리잖아요?”

“그, 그, 그렇지만요……!”

“자, 진정하시고……우선은 옷부터 갈아입죠. 이러다 정말로 늦겠어요.”

 

카에데는 손을 들어 자신들의 앞에 늘어서 있는 옷장을 가리켰다. 네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벽에 설치된 옷장을 향해 다가갔다. 옷장에는 치히로와 미유의 이름은 물론, 연습생들을 포함한 신데렐라 걸즈에 소속된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갑자기 레슨 전에 치수를 잰다고 하더니……이러려고 치수를 잰 거였군요.”

“우와, 이거 장신구도 세트야!”

“……저기, 이거 정말 우리들도 입어도 되는거죠? 그렇죠?”

“아마도 괜찮을 거라 생각해요. 그나저나 이 의상들…….”

 

카에데는 옷걸이에 걸린 옷을 하나씩 꺼내어 살펴보았다. 디자인은 조금씩 달랐지만, 청아함이 느껴지는 선명한 녹색을 기조로 한 다섯 벌의 드레스를 살펴보던 그녀는 문득, 예전에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번 의상, 어쩐지 마음에 드네요.”

어떤 부분이요?”

글쎄요……하늘하늘한 부분이라던가? 봐요, 이렇게 바람을 받으면……어쩐지 날아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요?”

“……그렇군요. 참고해두겠습니다.”

 

“응? 의상들이 왜?”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대체 그 사람은 어디까지 파악해두고 있는 것일까, 프로듀서의 철저함에 내심 감탄하면서, 마침내 의상을 결정한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뒤를 따라 피팅 룸으로 들어갔다.

 

***** 

 

“고마워요.”

“즐거운 연회 되십시오.”

 

직원의 인사를 받으며 피팅 룸을 나온 네 사람은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으음, 뭔가 치히로다운 이미지네.”

 

치히로가 선택한 것은 연녹색을 기조로 한, 어깨를 드러낸 디자인의 이브닝 드레스였다. 허리 부분을 노란색 띠로 강조하고, 마찬가지로 노란 장미 장식으로 가슴 부분이 강조되어 있었다.

 

“색상도 그렇고, 조합도 그렇고. 어쩐지 딱 치히로 씨라는 이미지네요.”

“그러는 미즈키 씨야말로, 미즈키 씨 답다는 이미지인걸요.”

 

미즈키는 가슴팍이 짙은 감색으로 강조된 파란 드레스 위에 하얀 숄을 걸치고 있었다. 네 사람의 앞에서 빙글, 한 바퀴를 돈 그녀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일행을 바라보았다.

 

“어때, 어른스럽지?”

“그 말 안 했으면 어른 같았어요.”

“카에데 씨는……그거, 언제 입었던 의상 아닌가요?”

 

카에데가 선택한 것은 치히로와 마찬가지로 어깨를 훤히 드러낸 칵테일 드레스였다. 차이점이라면, 치히로의 드레스와는 달리, 그녀의 훤칠한 키를 강조하듯 일체의 주름도 없이 일자로 곧게 뻗은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반대급부인지 치히로의 드레스에 비해 장식은 거의 없다시피 한 수준이었지만, 가슴팍을 수놓은 금빛 자수와, 그 가운데에 박힌 붉은 보석이 멋지게 포인트를 주고 있었다. 상반신은 선명한 녹색을 띠고 있었지만, 그라데이션처럼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색감이 옅어져, 발치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새하얀 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미즈키가 짝, 하고 박수를 쳤다.

 

“그거잖아? ‘신록의 숙녀’”

“네. 개인적으로는 무척 마음에 들었거든요. 우연히 비슷한 디자인이 있기에.”

“미유는……응, 여러모로 평범하네.”

 

미유가 선택한 것은 베이지색을 기조로 한 평범한 이브닝 드레스였다. 무작정 평범하다고 하기에는 들어가있는 자수의 정교함이 평범함을 벗어난 수준이었지만, 이 호텔에 들어온 이후 좀처럼 제 정신을 찾지 못하고 있는 그녀에게는 그것을 판단할 여유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다행이라면 다행인지, 비치된 다섯 벌 모두 비슷한 디자인으로 되어 있었다.

 

“……죄, 죄송해요. 어쩐지 이런 곳에서는 조금…….”

“괜찮아, 괜찮아! 단순한 게 좋은 거라는 말도 있으니까. 자, 그럼 출발해 볼까!””

 

각자의 드레스로 갈아입고 함께 마련된 장신구까지 착용한 뒤, 입구와는 반대 방향으로 나 있는 출구를 통해 탈의실을 나온 네 사람을 반긴 것은 복도 위에 곧게 깔린 레드카펫이었다.

 

“……이제 감탄하기도 지친다.”

“동감이에요…….”

 

혹여 치맛자락이 바닥에 끌리기라도 할세라,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들어올린 채 조심스레 레드카펫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던 그들을 맞이한 것은 어지간한 성인 신장의 두 배 정도는 되어 보이는 무척 커다란 문이었다. 문에 걸려 있는 금빛 문패에는 잔뜩 힘이 들어간 필기체로 검은 글자가 적혀 있었다.

 

Cinderella Girls

 

커다란 문 앞에서, 드레스 차림의 네 사람은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을까. “좋아, 가자!”라고 말하며 일행의 가장 앞에 서 있던 미즈키가 조심스레 문의 문고리를 잡았다. 경첩이 돌아가는 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부드럽게 열리는 문의 건너편으로 연회장의 풍경이 나타났다.

 

 

연회장 안에는 아이돌들이나 연습생들뿐만이 아니라, 트레이너들마저 평소의 칙칙한 트레이닝복을 벗고 각자 화려한 드레스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것인지, 마침 회장 안을 배회하던 트레이너들의 시선이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아, 미즈키 씨! 카에데 씨! 어서 오세요!”

“메이? 세상에, 이렇게 입으니까 전혀 못 알아보겠어!”

“에헤헷, 고맙습니다!”

“한 시간 정도 늦었다. 상당히 아슬아슬하게 도착하셨군. 안 오는 건 아닌가 걱정했어.”

 

뒤이어 나타난 마스터 트레이너, 아오키 레이의 모습에 두 사람은 헛숨을 삼켰다. 트레이닝 복 위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탄탄한 몸을 새까만 드레스로 몸을 감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무척 낯설었던 것이다.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네 사람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열적인 빨간 드레스를 걸친 아카네, 어쩐지 언제나 입던 고스로리 의상보다 수수해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수줍은 듯 앉아 있는 란코가 눈에 띄었다. 그 옆에는 비록 디자인은 다르지만 색은 서로 맞춘 듯 검정을 베이스로 푸른색 장식이 들어가 있는 드레스를 걸치고 있는 트라이어드 프리무스가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었고, 그 건너편 테이블에는 무대 의상처럼 맨살을 거의 드러내지 않은 옷차림을 한 후미카와 진한 분홍색과 옅은 분홍색이 섞인 드레스를 입은 마유가 조용히 앉아서 과일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사에는 여전히 기모노구나.”

“기모노가 아닌 사에는 상상하기 힘들죠.”

“그건 그래.”

 

마지막으로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란코의 건너편에 앉아, 미즈키와 비슷한 코디를 맞춘 미나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아나스타샤였다. 허리를 강조하는 치히로의 드레스와 비슷하게 어깨를 드러낸 드레스 위에 숄을 두르고 있었지만, 형광색에 가까운 밝은 연녹색과 노란색이 섞인 치히로의 드레스와 달리, 아냐의 드레스는 바다를 연상시키는 푸른색 드레스 위에 반짝이는 장식들이 마치 은하수처럼 뿌려져 있었던 것이다.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하는 것인가, 이따금씩 활짝 웃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미즈키가 칫, 하고 혀를 차면서 감상을 토해냈다.

 

“……하프, 사기야.”

“동감이에요.”

“하하, 자네들 늦었구만.”

 

그런 그들의 바로 옆에서 중후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옆에서 들려온 그 목소리는 며칠 전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한 장소에서 들었던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자 그 곳에는 투명한 액체가 채워진 유리잔을 든 연미복 차림의 중년 남성이 서 있었다.

 

“사장님?!”

“뭐, 나도 이걸 받았거든. 녀석, 뻔뻔한 얼굴로 이따위 걸 던져주다니. 자기과시라도 하려는 것인가.”

 

그렇게 말하며 사장은 품 속에서 새하얀 봉투를 꺼내 보였다. 그 또한 낯익은 물건이었다. 그들이 프로듀서에게 받은 것과 같은 물건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좋은 경험을 하고 있다네. 아무리 나라고 해도 고작 파티 하나 하자고 이런 곳은 흔히 올 수 없는 곳이란 말이지. 높으신 분들이 낀다면 또 모를까.”

 

“하핫” 웃으면서 그는 잔을 들어 테이블을 가리켰다.

 

”아무튼 파티에 왔으면 즐겨야 하지 않겠나? 지금 이 상황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네.”

“그렇죠. 기왕 이런 곳에 왔으니 즐겨야죠! 가자!”

“네!”

 

드레스자락을 휘날리며 음식이 쌓여 있는 테이블을 향해 달려가는 치히로와 미즈키의 뒤를 안절부절못하며 따라가는 미유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카에데는 시선을 돌려 연회장 구석구석을 이리저리 둘러보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면 당연히 보여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음? 자네는 안 가나?”

“아, 네. 가야죠…….”

 

회장 안을 두리번거리는 그녀를 바라보던 사장은 그제서야 눈치챘다는 듯,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하하, 그렇군. 자네가 찾는 사람은 저기 있다네.”

 

사장은 이번에는 손 대신 눈으로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그의 눈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자 연회장의 한 구석의 열린 문 틈 사이로 잿빛 정장을 입고, 지팡이를 짚은 노년의 신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프로듀서의 모습이 있었다. 그가 서 있는 장소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었기에, 사장의 언질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저 사람은……?”

“조 메리엇. 이 호텔 브랜드의 오너일세. 그리고……”

 

사장은 손에 든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

 

“저 녀석의 예전 오너. 40년째 뉴욕 메트로를 굴리고 있는 구단주이지. 교활한 자식, 친구는 무슨 얼어죽을 친구야.”

 

카에데는 그제서야 며칠 전, 집들이에서 프로듀서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연말에 무슨 계획이 있냐는 사장의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이었다.

 

끝내주는 걸로 하나 구했어요. 우연찮게 옛 친구랑 연락이 닿아서 말이죠.

 

‘옛 친구……란 말이죠.’

 

“……궁금하지 않나?”

 

상념에 빠져 있던 그녀를 끌어올린 것은, 가만히 샴페인을 홀짝이던 사장의 한 마디였다.

 

“네?”

“저 영감은 전 세계적인 인물이야. 인정하기는 싫지만, 나 같은 건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어마어마한 거물이지. 그런 거물이 몸소 이 파티장을 직접 찾아 온 걸세. 저 남자를 만나기 위해서 일부러. 어째서일까?”

“…….”

 

사장의 이야기에, 카에데는 머릿속으로 아직 다 채우지 못한 반쪽짜리 노트를 떠올렸다.

 

“……이런, 이야기가 끝난 모양이군. 슬슬 자리로 돌아가야겠어.”

 

사장이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는 것과 동시에 이야기를 마친 듯 신사와 마지막으로 포옹을 나눈 프로듀서가 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먼저 자리에 앉아 있던 미즈키, 치히로, 미유 일행과 인사를 나눈 그는 뒤늦게 자신의 자리로 향하는 카에데를 발견하고는 가볍게 목례를 하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기념일은 기념일인 것인가, 흑단처럼 까맣게 반짝이는 정장을 입고 있는 프로듀서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왁스까지 사용해 머리에 잔뜩 힘을 준 모습이었다. 안경알을 반짝이며 그녀의 앞에 멈춰 선 그에게서 남성용 향수 냄새가 옅게 풍겨져 나왔다.

싱글벙글, 웃음기를 지우지 못하는 그를 바라보던 카에데는 자신의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하는 것을 느꼈다.

 

“어서오세요. 오는 길은 어땠습니까?”

“감탄했어요. 역시 특급은 다르네요.”

“제 나름의 서프라이즈였지요. 사실은, 저도 이 정도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지만요.”

“그건 그렇고, 어때요?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보이며, 카에데는 한 바퀴 빙글 돌아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녹색의 드레스가 넓게 퍼졌다가 다시 내려앉는 것을 바라본 그는 만족스러운 듯 빙그레 웃었다.

 

“잘 어울립니다. 공들여 뽑은 보람이 있네요.”

“후훗, 고마워요. 오늘의 프로듀서도 무척 멋진걸요.”

“감사합니다. 자, 얼른 자리에 앉으세요. 얼추 다 온 것 같으니 슬슬 시작해야겠습니다.”

 

카에데를 그녀의 자리로 안내한 뒤, 프로듀서는 회장 안을 크게 한 바퀴 돌며 아직 서 있는 아이들을 자리로 돌려 보냈다. 단상으로 오르기 전, 복도 쪽에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에게 무언가를 말한 뒤에 그는 수려한 필기체로 Anniversary Party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는 단상 위로 올라갔다. 프로듀서가 단상에 올라서자 수군대던 일행의 목소리가 사그라들었다. 흐트러진 상의의 옷매무새를 바로잡고 프로듀서는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딸깍, 하고 마이크가 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가락으로 톡톡, 마이크를 몇 번 두드린 그는 그것을 자신의 앞으로 가져갔다.

 

“저의 자그마한 서프라이즈 파티입니다. 어떤가요, 이런 곳은 처음이죠?”

““네~!””

“그럴 거에요. 사실은 저도 처음이거든요. 여기 음식 맛있죠?”

””네!!””

“하하, 감사합니다. 옛 친구의 도움으로 생각보다 큰 자리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친구를 불러 인사를 나누고 싶었지만……아쉽게도 무척 바쁜 친구라서, 그건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네요.”

 

그는 자신의 왼팔에 찬 시계를 한번 바라본 뒤 다시 일행을 바라보았다.

 

“약 네 시간 정도군요. 이 곳은 우리가 빌린 곳이니까,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즐겨주세요.”

 

그의 말에 “프로듀서 최고”라던가, “고맙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단상에서 내려와 아이돌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한 걸음 다가갔다.

 

”오늘의 파티는, 다른 것이 아닌 애니버서리 파티Anniversary Party입니다. 여러분들의 시작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이렇게 이름을 지었어요. 이번에는 제가 자리를 만들게 되었지만, 제가 자리를 만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에요. 이 다음부터는 여러분의 손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몇몇 아이들은 옆에 앉은 동료들을 돌아보았고, 또 몇몇 아이들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들 모두의 반응을 바라보던 그의 입꼬리가 약간 올라갔다.

 

“두 번째, 세 번째, 몇 번째가 마지막일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몇 번째가 되더라도, 저는 오늘이라는 날이 여러분에게 있어 지난 한 해 동안 자신이 걸어온 길을,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의미 있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 파티에 애니버서리Anniversary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오늘은 시작의 기념일이지만, 내년에는 1년의 기념일이 될 것이고, 내후년에는 또 다른 1년의 기념일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 작은 바람이에요.”

 

프로듀서는 말을 고르듯 다시 한번 좌중을 돌아보았다.

 

“언젠가……제가 더 이상 여러분들과 함께 할 수 없는 날이 오더라도. 이 날만큼은 오랫동안 남아 있었으면 하네요. 여러분을 거쳐 여러분들의 후배에게, 그리고 그 후배의 후배에게 되물림되는 아름다운 전통으로 남아 주었으면……하는 바람이에요.”

 

“이것 참” 숙연해진 회장의 분위기에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이던 그는 마이크를 내려놓은 뒤, 무알콜 샴페인이 들어 있는 글래스를 집어 들고 다시 단상으로 돌아왔다.

 

“분위기를 탔는지 저도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네요. 그럼 다음은 사장님의 축하 인사가…….”

“야, 지금 니가 폼 다 잡아 놓고 나보고 산통 깨라는 거지? 응?”

 

단상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은 채, 입이 한 뼘이나 튀어나온 모습으로 툴툴거리는 사장의 말에 앉아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할 말 없으시답니다. 그럼 지긋지긋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죠. 모두 잔을 들어 주세요.”

 

프로듀서가 잔을 높이 치켜들자, 테이블에 모여 앉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앞에 놓여 있는 잔을 들어올렸다. 카에데와 미즈키를 필두로 한 성인들은 샴페인과 와인이 든 것, 술을 마시지 못하는 미성년자들은 프로듀서와 마찬가지로 무알콜 샴페인이 든 것이었다.

잠시 잔을 들고 멍하니 서 있던 프로듀서는 한번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쑥쓰러운 듯 다시 한번 뒷머리를 긁적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을 좀 했습니다. 그런데 적당한 게 안 떠오르네요. 그래서 그냥 하던 걸로 해야겠어요. 자, 여러분. 준비 되셨죠?”

“”네!””

 

마이크를 내려놓고, 프로듀서는 큼, 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목표는!”

“”탑 아이돌!!””

“빛나는!”

“”유리구두를 향해!””

“신데렐라 걸즈!”

“”화이팅!!!””

 

그녀들의 마지막 구령에 맞추어, 단상 위에 미리 셋팅해둔 폭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펑펑 터졌다. 신데렐라들의 첫 걸음을 축복하는 그 나름의 축포였다. 자신의 머리 위로 쏟아지고, 이따금씩 입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는 꽃가루들을 이리저리 걷어내면서 프로듀서는 내려놓았던 마이크를 다시 집어 들었다.

 

“무도회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늘 하루는 여러분들만의 파티! 부디 마음껏, 후회가 남지 않도록 실컷 즐겨주세요! 오늘은, 여러분들의 기념일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프로듀서의 얼굴에는, 정말로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회장 안의 떠들석한 공기를 뒤로 하고, 사장은 혼자 발코니에 서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휴우…….”

 

몇 번째의 한숨인가. 연회장과 연결된 발코니에 서있던 사장은 새하얗게 부서지는 한숨 너머로 비치는 광경을, 자신의 발 아래로 보이는 도쿄의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에 든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 절반 정도 남아 있던 잔에는, 이제 1/3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병째 가져올걸 그랬나, 라고 생각하며 사장은 작게 중얼거렸다.

 

“조 메리엇……그 작자가 직접 나타날 줄이야. 그래, 연회장이 이곳이라고 했을 때 짐작했어야 했어. 내 불찰이군.”

 

사장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새하얗게 부서지는 한숨 너머로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여객기의 불빛이 보였다.

 

“……별 수 없지. 비겁하지만, 그걸 써볼까.”

 

체념한 듯 고개를 떨군 그는 품 속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시간이 흘러, 잔뜩 달아올랐던 회장의 분위기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할 무렵. 안주를 가지러 자리에서 일어난 카에데는 문득 자신의 휴대전화가 진동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제자리에 멈춰 서서 휴대전화를 꺼내 보자, 화면에 떠오른 것은 [사장일세]라는 타이틀로 수신한 메일이었다.

 

-잠시 괜찮겠나? 괜찮다면 밖으로 와주게.

 

카에데는 고개를 돌려, 발코니와 연결된 자그마한 문을 바라보았다. 문에 뚫려 있는 작은 창문 너머로 정장을 입은 뒷모습이 보였다.

 

 

“찾으셨나요?”

 

사장은 회장과 연결된 발코니에 홀로 서서 샴페인이 든 잔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는 발코니의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반응해 뒤를 돌아보았다. 따뜻한 회장과는 달리, 돌풍처럼 몰아치는 겨울의 칼바람에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그녀는 사장이 서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고맙네, 이야기를 들어 줘서. 한 잔 마시겠나?”

“감사합니다. 저, 그……하실 말씀이라는 건…….”

“별 다른 건 아니고, 조금 전에 못 한 이야기인데 말이지…….”

“……?”

“자네는 로비에서 이 곳으로 올라오면서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지는 않았나? 가령, 엘리베이터의 위치라던가, 말이지.”

 

사장의 말에 카에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보니, 전용 엘리베이터를 사용했어요.”

“맞아. 전 세계의 R호텔에는 각 지점만의 시크릿 라운지가 있다네. 아는 사람만이 알고 있고, 그 중에서도 자격을 갖춘 극소수만이 사용할 수 있는 장소이지.”

“……이 곳이, 그런 장소라는 뜻인가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미간이 약간 움츠러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장은 말을 멈추고는 잠시 뜸을 들였다. 무엇을 망설이는 것인가. 샴페인이 든 잔을 바라보며 손 안의 잔을 빙글빙글 돌리던 그는 이윽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휴가를 썼어. 1주 뒤 월요일부터 1주일간이지. 개인적인 볼일이 있어 집엘 다녀오겠다고 하더군.”

“집……이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카에데의 가슴이 또 한번 뛰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감추고, 대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눈 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어째서 저에게…….”

“조 메리엇, R호텔의 시크릿 라운지, 그의 방에 있던 트로피……그리고 윌리엄 존슨.”

 

사장이 내뱉은 마지막 단어를 들은 카에데는 고개를 들어 그를 직접 바라보았다. 달빛을 받아 빛나는 검은 눈동자와, 도시의 빛을 받아 빛나는 색이 다른 두 눈동자가 마주쳤다.

 

”궁금하지 않나? P라고 하는 남자에 대해서.”

“…….”

“얼마든지 지원해주겠네. 그러니 원한다면 그를 한번 따라가보게. 따라가서, 그가 걸어온 길을, 그가 살아온 삶을 한번 살펴보게. 그러면 자네의 궁금증이 풀릴 거야.”

 

사장의 제안을 듣고 카에데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조금만, 생각을 할 시간을 주세요.”

“당연하지. 바로 결정해달라는 이야기가 아닐세.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다만……다음 월요일이 지나기 전까지 자네의 대답을 듣고 싶군. 전화든 메일이든 상관 없네. 그냥 그 때까지 꼭 답을 주기를 바랄 뿐이야.”

“……알겠습니다.”

“용건은 여기까지일세. 날도 추운데 얼른 들어가게.”

“사장님은요?”

“……왠지 취기가 올라와서 말이야.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가지.”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아아.”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카에데가 회장으로 들어가기 직전, 사장은 그녀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타카가키 군.”

“……네?”

“다시 한번 말하지만……자네가 할 마음만 있다면, 반드시 내가 도와주겠네. 알겠나?”

“……알겠습니다.”

  

다시 혼자가 되어, 연회장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사장은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스카이트리를 제외하면 도쿄의 가장 높은 건물에 올라서 있기 때문인가. 오늘따라 별빛이 무척이나 아름답게 반짝였다. 하지만, 그 반짝이는 광경을 바라보는 사장의 마음은 그다지 반짝거리지만은 않았다.

 

그가 계획하고 있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인질극이었기 때문이다.

P라는 남자에게 타카가키 카에데는 어떤 인물인가? 그리고 그 역(逆)은 어떤가?

유감스럽게도, 사장은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는지, 그리고 그녀가 어떤 생각으로 그에게 마음을 열었는지, 그는 대부분의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그녀는 그 자신이 직접 선택한 첫 번째 신데렐라다.

그녀에게 있어 그는 자신에게 빛을 가져다 준 첫 번째 마법사다.

그의 어설픈 비밀 덕분에 두 사람의 발을 동여맨 끈은 이제 와서 풀기에는 너무도 강하게 묶여 있었다. 멈출 수 없는 이인삼각. 만약 둘 중 하나가 없다면 나머지 한 쪽은 힘없이 고꾸라지리라.

그렇기에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카에데를 선택했다. 그것은 과격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인 명백한 인질극이었다.

 

“……언젠가 내가 말했었지? 나는 자네와 오랫동안 같이 있고 싶다고. 나는 교활한 남자야. 그러니 나는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해서라도 자네를 붙잡아야겠네.”

 

사장은 잔 안에 든 샴페인을 모두 들이마셨다. 아마도 마지막이라고 생각되는 이 한숨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새하얗게 부서져, 아름답게 반짝이는 별빛 속으로 녹아 들어갔다. 사장은 눈을 감았다. 그 남자가 가진 책임감을 생각해보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 생각이 단순한 기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손을 놓고 구경하고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술 맛 떨어지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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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P의 개인사도 슬슬 끝을 내야겠군요.

설정집을 읽는다는 느낌으로 편하게 즐겨주세요.

다음 이야기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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