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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과(氷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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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22, 2017 19:25에 작성됨.

이름없는 작사가이자, 한 연예인 소속사 직원인 내가 그녀를 처음 본 때는 몇 달 전, 회사에서 잡은 일본 아이돌의 CD 관련 일로 도쿄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었다.

청초하고 연약해, 곧 부러질 것만 같았던 그녀는 아름답고 맵시 있는 자세로 나와 다른 관계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녹음실로 들어갔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외주를 맡긴 사장과 우리들 중 최고 책임자의 회의가 잠깐.

번갯불에 콩이 아니라 얇은 고기를 구워먹듯이 회의를 마친 책임자가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통역과 함께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이 일에 관해서 어떤 언질이라도 받았는지 책임자는 길고 짧게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자신의 CD 수록곡을 녹음하고 있는 아이돌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내가 왜 그러시냐고 물어보자 책임자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었지만 분명히 그 표정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표정.

왠지 모르게 아이돌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다시 한 번 물어보려는 찰나, 부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안에서 녹음하고 있던 아이돌이 지친 표정을 짓고는 잠시 휴식을 취하러 밖으로 나온다.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내가 중얼거리고는 시계를 쳐다본다.

분명히 들어간지 10분도 되지 않은 시각.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나는 그녀를 조금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본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잠깐 얼굴에 고민하는 빛이 스쳤던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빙긋 웃으며 나에게 손을 살짝 흔들어준다.

꽤나 알 수 없는 매력이 있는 그녀. 

내가 무심코 그녀에게 눈을 떼지 못하자 옆에 있던 책임자가 내 뒷통수를 한 대 때리면서 그녀에게 반했냐고 힐난 아닌 힐난을 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책임자가 옅은, 하지만 그 안에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노리지 말라는 듯이 이야기한다.

내가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고개를 끄덕이자 책임자가 그제서야 얼굴 표정을 풀며 녹음에 집중한다.

녹음이 끝나고 호텔로 돌아가려는데, 그녀가 내 쪽으로 다가와 가볍게 인사하고는 나에게 무엇인가를 건네준다.

내 손에 들린 것은 차가운 바 형태의 아이스크림.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녀는 그저 그것만 주고는 험악한 인상의 매니저와 함께 거의 끌려가듯이 녹음실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 다음에 무슨 급한 스케줄이라도 잡혀있는 걸까, 내부인이 아닌 나로서는 알 방법이 없다.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부르는 책임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은 채로 그를 따라 녹음실의 다른 쪽 문으로 나갔다.

그것이 나와 그녀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

 

 

두 번째로 그녀를 만난 것은, 그로부터 세 달 쯤 후였던가, 우리 회사의 아이돌들과 같이 도쿄의 한 공연장에서 공연을 준비할 때였다.

예전에 같이 일했던 인연으로 일본의 커다란 아이돌 회사가 우리들을 그 곳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배려했던 까닭에, 튀어야만 하는 자리면서 너무 튀어서는 안 되는 미묘한 무대 위 사정으로 인해 이 일의 책임자는 온 몸을 감싸는 긴장감을 참지 못하고 화장실을 들락날락하고 있던 그 즈음이었다.

청초하고 아름다운, 그러면서도 꽤나 동안인 듯한 아이돌 한 명이 통역과 함께 다가와 나에게 인사를 한다.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청명한 목소리로 들려오는 일본어.

일본어를 잘 알지 못하는 내가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하자 그녀는 그것이 너무 부담스러웠는지 난감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가 통역의 힘을 빌려 그녀의 이름을 물어보자 그녀가 짧은 한국어로 입을 연다.

 

저, 저느은, 타카가키 카에데, 라고 해요."

 

타카가키 카에데. 왠지 모르게 그녀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며 웃는다.

카에데 씨가 나의 미소를 보고 안심했는지 짧게 한숨을 쉬고는 갑자기 나에게 무언가를 내민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내가 어쩔 줄을 몰라하자 그녀가 조금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그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쥐어주고는 자리를 뜬다.

상황을 전혀 알 수 없는 내가 손을 사정없이 노략하는 차가운 냉기에 조금 얼어버린 듯한 느낌을 느끼며 들려진 물건을 쳐다본다.

그것은, 어떻게 봐도 컵에 담긴 것같은 아이스크림.

슈퍼 컵이네요.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통역이 알아서 그 아이스크림의 이름을 댄다.

이것을 왜 나에게 주었을까. 나는 그 날 그 의미를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그저 곧 시작해버린 그 날의 공연을 볼 수밖에 없었다.

손에 들려있던 차가움도 신경쓰지 못한 채, 그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공연에 집중하고는 모든 아이돌들에 대한 보고서를 머릿속으로 써야하는 세 시간.

겨우 한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이 되고 나서야 이제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 냉기를 느껴 그녀가 주었던 슈퍼 컵을 쳐다본다.

차가웠던 아이스크림은 마치 절규하듯이 조금씩 녹아 내 손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를 봤던 날은, 내가 잠시 일본의 오키나와로 가서 여행을 보내고 있을 즈음.

옛날에 아이돌을 했었다는, 키가 작고 건강한 매력이 물씬 풍기는 미녀가 운영하고 있는 민박에서 묵고 있었던 나는 문득 심심해져서 내 방의 TV를 켜 보았다.

어차피 알아듣지 못하는 일본어였기에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는데, 마침 TV에는 어디선가 본 듯한 아름다운 얼굴의 미인이 왼쪽 위에 조그맣게 사진으로 나온다.

내가 왠지 모를 죄책감에 뉴스의 자막으로 뜨는 한자를 겨우겨우 읽어내려가며 그 기사의 의미를 유추해내려는 찰나, 화면에는 죽어있는 미인의 모습과 사인(死因), 그리고 다 녹은 아이스크림이 방송된다.

그 아이스크림을 보는 순간, 나는 자신의 무자각함에 큰 충격을 느끼며 머리를 쥐어짰다.

그래, 그녀가 아이스크림을 준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것의 구조 신호였으며, 살고 싶어하는 의지였고, 마지막까지 놓지 않은 희망의 다잉메세지였다.

나는 이제야 그 의미를 깨달아버린 한심한 데이터베이스의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I, SCREAM..." 

 

나는 어쩐지 참을 수 없는 구역질에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에다가 사정없이 구토를 해댄다.

왜 알아채지 못했을까, 나는 어쩌면 그녀의 마지막 희망이었을 수도 있었다.

어째서 나였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미 커져버린 죄책감은 나를 살아있는 채로 집어삼켰다.

이전에 느껴본 적도, 경험해 본 적도 없는 죄스러움에 나는 그 날로 민박을 나와 최대한 수소문한 끝에 카에데 씨의 유골이 화장되어 있는 화장터를 알아낼 수 있었다.

화장터에 가기 전에 꽃집에 들러 꽃다발을 사러 갔었다.

쿨한 꽃집의 아가씨는 나를 보곤 멍멍하고 짖는, 자신의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에게 주의를 주고는 나에게 왜 그런 표정을 짓냐고 물어본다.

내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아무말도 하지 않자 그녀가 아무 말 없이 라벤더가 한가득 담겨져있는 다발을 나에게 건네준다.

그녀가 건네준 꽃다발을 밭고 발을 들이는 화장터.

두어 달 전에 화장되었다고 하는 그녀의 화장터에는 이제 찾는 사람 따위도, 그녀를 얽매는 험상궂은 매니저도 없다.

나는 그녀가 한 줌의 재로 남아있는 항아리 앞에 꽃다발을 바치고, 아무도 듣지 않는 화장터에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대답한다.

 

"I, SC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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