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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무라 우즈키 [소녀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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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20, 2017 15:43에 작성됨.

‪-소녀의 끝-‬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우즈키가 프로듀서를 불러낸 건 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그가 좋아졌다. 가벼운 친근감이 아닌 이성적인 애정이었다. 좀 더 가까워지고 싶은 욕심과 요동치는 마음은 소녀가 눈치채기도 전에 크게 부풀어 있었다.

 

"아, 그게..."

 

발끝을 바닥에 비비적거리며 우즈키는 머뭇거린다. 평소처럼 무서울 정도의 무표정인 프로듀서는 그저 우즈키의 이어질 말을 기다린다. 소녀는 알고 있었다. 저 표정, 겉보기와는 달리 온화하게 자신의 용무를 기다려주고 있다. 그런 점 또한 우즈키는 좋았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박동이 빨라졌다. 사이를 가로막는 격차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우즈키의 마음은 이미 프로듀서의 가까이 기대고 있었다.

 

"쉽사리 말씀하기 힘드시다면 언제라도 괜찮습니다."

 

뒷목을 쓸며 시선을 맞춰주는 프로듀서. 우즈키는 괜스레 그의 사소한 배려까지 의식한다. 지도하는 프로듀서로서 조금은 위에서 바라봐도 될텐데, 그는 언제는 눈높이를 맞춰준다.

 

우즈키의 가슴이 떨린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까 망설여진다.

 

"약간은... 사적이랄까요...? 아하...하..."

 

문득, 우즈키는 아무런 준비없이 프로듀서를 불러버렸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앞선 마음이 먼저 튀어나간 경솔함에 소녀의 자신감은 더욱 움츠러든다.

 

"예, 괜찮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냉철한 눈이지만 언제든지 우즈키의 말을 듣기위해 빛나고 있다. 역시 지금은 안되겠어... 바닥난 자신감이 백기를 들고, 소녀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사무실이 조금 건조해서..."

 

"그렇습니까.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말끝을 흐리는 목소리에 칼같은 즉답이 날아온다.

 

"에헤헤... 죄송해요... 이런 거까지..."

 

"아닙니다. 여러분의 컨디션 관리는 제 일입니다. 그것 말고 다른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또다시 그 눈빛. 우즈키는 황급히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으응, 그것 뿐이에요. 고맙습니다...!"

 

"필요한게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부탁드립니다. 시간이 늦었는데, 귀가길은 괜찮으십니까?"

 

"아, 네! 아직 전철도 다니는 걸요!"

 

"그럼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네...!"

 

프로듀서는 돌아가고, 우즈키는 막혀있던 숨을 한번에 털어냈다. 심장소리가 귓가에 들릴 정도로 거셌다. 프로듀서가 듣지는 않았을까 달아오른 볼가를 진정시킨다. 가슴팍에 조금만 귀를 기울였어도 큰일이었을거야... 우즈키는 절로 떠오른 생각을 상기하고선 또다시 얼굴을 붉히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갔다.

 

순전히 충동이었다.

 

작은 사고라고 해도 좋았다. 점점 커져가는 마음에 미통이 느껴질 즈음, 우연히 미오는 걱정을 건네왔다. 우즈키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둘러 댔지만 미오의 털털한 모습은 소녀의 마음 한 구석에 작은 균열을 만들었고, 우즈키는 간신히 프로듀서에 대한 호감을 털어놓았다. 미오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괜찮은 남자아니야? 하하 웃어대며 우즈키를 다독여주었다. 그렇게 짧지만 조금이나마 후련해진 속내 탓일까. 우즈키는 며칠간의 고민 후 프로듀서를 불러냈다. 그리고 아무런 성과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역시 너무 급하면 안되겠죠... 우즈키는 성급했던 자신을 질책하며 다음날 사무실에 새로 놓인 가습기의 물을 채웠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비록 지금까지 소녀가 친절했던 사람을 보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그만큼 자신의 가슴까지 파고드는 호감은 처음이었다. 친절하고, 자상하며, 두루 인망이 높은 남자. 그럼에도 과묵하고 성실하여 제 맡은 책임을 다하는 사람. 우즈키는 그에 대해 생각할수록 더욱 뜨거워지는 머리를 느꼈다. 애정의 패닉은 작은 심장을 괴롭히고, 소녀는 기어이 그에게 자신의 호감을 조금씩이나마 표현하기로 했다.

 

조촐하게나마 준비한 선물. 그에게 잘 어울리는 것이 뭘까 한참이나 고민하여 구입한 넥타이. 그는 난감해하면서도 기쁘게 받아주었다. 겨우 미미한 미소 뿐이었는데도 프로듀서의 표정을 본 우즈키는 뛸듯이 기뻤고 마치 고백이 성공한 것 마냥 즐거웠다.

 

어느샌가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된 미오도 같이 기뻐해주었고, 천천히 소녀는 프로듀서에게 다가가려는 마음을 굳혔다.

 

단순한 프로듀서와 담당하는 아이돌의 관계에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까지, 생각만해도 볼이 달아오르는 그곳까지, 우즈키는 꺼지지 않을 것 같은 연심을 받아들였다.

 

며칠 후, 프로듀서는 우즈키가 선물한 넥타이를 메고 출근했다. 소녀는 즐거운 충격을 느꼈고, 얼굴에는 하루 종일 웃음기를 머금었다. 내 선물이 그리 싫지는 않으셨던 거겠지... 에헤헤... 순진한 마음. 예쁜 불꽃을 내는 연정이 소녀의 주변에 맑은 분위기를 흘렸다.

 

"넥타이... 다시 해줄테니까..."

 

허나, 오래가지 않았다.

 

우연히 복도를 지나다 우즈키가 목격한 광경. 차마 끼어들수 없는 그 분위기. 우뚝 선 남자의 가슴팍에 올린 가느다랗고 새하얀 손이 우즈키가 선물했던 넥타이를 바로 잡고 있었다. 뒷목에 손을 올린 남자는 머쓱하게 또 다른 소녀의 손길을 가만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능숙하게 매듭을 짓는다. 가끔씩 올려다보는 눈빛이 마주친다. 린의 입술은 무심하지만, 눈빛만은 익숙했다. 교환하는 눈짓이 평소와는 다르다. 우즈키는 쉽사리 자리를 피하지 못했다. 굳어져버린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손에 든 캔음료의 차가움이 손등까지 베어들었다.

 

넥타이의 매듭을 마무리하고 프로듀서의 가슴을 톡 치며 피식 웃어버리는 린. 평소에 보이던 무심하고, 차가운 인상과는 다르다.

 

"아, 우즈키."

 

인기척을 눈치챈 린의 고개가 돌아간다. 우즈키는 저도 모르게 들고 양 손에 들고 있던 두 캔을 등뒤로 숨겼다. 린의 눈은 잠시 놀라지만, 곧 평상으로 돌아간다. 평소에 보이던 무심하고, 차가운 인상이었다.

 

린은 프로듀서를 무시하고 우즈키에게 다가온다. 사뭇 굳어진 소녀의 모습이 걱정스럽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 아뇨..."

 

지그시 우즈키의 모습을 살피던 린은 획, 프로듀서를 노려본다.

 

"가습기, 싸구려로 산거 아니지?"

 

"...가장 좋은 걸로 구입했습니다."

 

"아니에요! 그런건! 그냥 잠시 졸려서요! 나, 날씨가 좋으니까 이상하게 잠이 오는 거 있죠?"

 

린은 별 의심없이 넘긴다.

 

"그래...? 그럼 난 레슨이 있어서. 우즈키 다음에 봐."

 

"네에!"

 

린은 사라지고, 정적이 시작된 곳엔 형광등의 빛이 몇번 깜빡인다. 우즈키는 어쩔까 고민했다. 등에 숨긴 캔의 온도가 소녀의 열기를 식힌다. 잠시 우즈키를 바라보는 프로듀서.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잠시 기다려주지만, 소녀는 바로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피했다.

 

뒤늦게 알아챈 린과 프로듀서의 미묘한 기류는 그날 이후, 유난히 우즈키의 눈에 들어왔다.

 

딱히 다른 이유가 없어도 프로듀서의 옆에 다가가는 린. 시덥잖은 대화를 나누는데도 둘 사이에서 흐르는 분위기는, 그저 친근한 대화를 넘어선 다른 기색들이 느껴졌다. 즐거워보였다. 우즈키는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멀직이서 보아도 향긋한 향기가 흐르는 두 사람의 모습에 빈자리는 없었다.

 

우즈키가 점점 어두워진 것은 아니었다. 평소같았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배시시 웃었고, 스케줄을 소화하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만 조금씩 타고 있었다. 가슴속의 불씨는 남몰래 소녀의 심장을 태웠다. 둘은 무슨 관계일까. 우즈키는 춤을 추면서도, 노래를 부르면서도, 가끔씩 그 생각을 했다.

 

"우즈키, 잠시 할 말이 있는데..."

 

영문없이 다가온 린의 모습에 우즈키는 작게나마 놀라버렸다. 멍하니 휴게실에 앉아 쉬고 있을때, 혹시나 자신의 속마음이 새어나갔을까 마음조렸다. 린의 진지한 얼굴이 우즈키의 불안을 키웠고, 옆에 차분히 앉는 모습에 소녀는 입을 열지 못했다.

 

"최근들어... 많이 힘들어보여. 무슨 일이라도 있는거야...?"

 

고민했다. 당장 우즈키의 목청까지 프로듀서와 무슨 관계냐고 캐묻고 싶었다. 간신히 말을 삼키고,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에? 아무것도요... 요즘 제가 좀... 이상했나요?"

 

"응, 조금... 무언가 고민이 있어보여서..."

 

조심스러운 린의 목소리엔 우려가 가득했다. 다른 의미없이 린은 순수하게 우즈키를 걱정했다. 마음은 충분히 와닿는다. 소녀의 안에서 거품을 내던 격정이 가만히 가라앉았다. 린이 품은 진심을 알았기에 우즈키는 밝은 표정으로 입술을 열었다.

 

"... 전 괜찮아요!"

 

소녀는 애써 두팔을 들어올려 기운 찬 몸짓을 보낸다. 그 후 린은 몇번의 당부를 보내고서야 사라졌고, 우즈키 속의 생겨난 두 실타래는 제멋대로 얽혀가기 시작했다.

 

그날밤, 우즈키는 미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린과 프로듀서는 무슨 관계일까요. 미오의 대답은 단순했다. 그저 '린이 좀 의지하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라는 단순한 논조였다.

 

마음의 진전은 없었다. 오히려 소녀는 자신에게 작은 질투가 생겨났다는 사실만 알아냈다.

 

그리고 눈치챈 질투는 커져갔다. 그러나 나약한 소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둘의 달가운 모습을 멀리서 바라만 봤다. 프로듀서를 좋아하지만, 그만큼이나 린을 좋아했기에, 우즈키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자신이 미웠다. 소심한 자신에게 무력해지고,

 

그렇게 프로덕션의 외진 곳에서 둘이 입맞춤을 하는 것도 보고 말았다.

 

"아."

 

연인의 입맞춤. 우즈키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현실을 깨달았을 때의 패닉이 소녀의 몸에 밀어쳤다.

 

"우즈키... 그게,"

 

린은 다급히 우즈키에게 다가오지만,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히 린을 좋아하는데, 지금만큼은 보고싶지 않았다.

 

"죄, 죄송해요."

 

자리를 피하려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지만, 린은 우즈키를 따라오고 붙잡았다.

 

소녀는 린의 손에 이끌려 카페로 갔다. 떨쳐내고 싶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미안해..."

 

"뭐...가요?"

 

"그러니까... 숨겼던 거."

 

싫었다. 린이 자신에게 사과하는 것이 싫었다. 린이 남들 몰래 프로듀서와 사귀고 있었다는 사실이 싫었다. 싫었다.

 

"딱히, 사과하실 일은 아니잖아요..."

 

"하, 하지만..."

 

말문이 막힌 린은 입술을 우물거린다. 무언가 알고 있단 듯이 린은 머뭇거린다.

 

"두 분 잘 어울리기도 했고... 저한테만이라도 살짝 이야기 해주셨으면 좋았을텐데. 헤헤... 조금 놀랐달까요..."

 

우즈키의 속은 타들어갔다. 타들어가지만, 어디 하나 불씨조차 보이지 않았다.

 

잠시간의 대화. 저자세인 린. 우즈키는 오히려 린을 달래는 꼴이 된다. 짧지만 긴 대화가 끝나고, 둘은 헤어지려 했다.

 

"그런데... 우즈키."

 

"네?"

 

"그, 내 짐작뿐이긴 한데... 혹시..."

 

"아마 아닐거에요."

 

우즈키는 일어났다. 처음으로 보여준 쌀쌀함에 린은 입술을 깨문다.

 

그날 밤, 우즈키는 아무런 생각없이 잠들었다. 죽은 듯이 잠들었다. 일어난 아침은 개운했고, 컨디션은 최고였다. 그날의 일과도 아무런 문제없이 끝냈다.

 

잠시 쉬는 시간, 우즈키는 미오에게 물어봤다.

 

프로듀서씨, 어때요?

 

미오는 머리를 긁적거렸지만, 비교적 순탄하게 늘어놓았다. 성실하고, 자상하고, 과묵하지만 책임을 다하는 성격. 그런 점들이 좋지?

 

그렇구나...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던 장작은 숯이 되고, 홀로 타올라 하얀 재가 되어 흩날린다. 남은 것은 그을음이 남은 껍데기. 일방적으로 향하던 마음의 끝이 어디인지 소녀는 깨닫는다. 이성과 감정. 헛되이 품은 연심, 스스로도 깊이를 모르는 곳.

 

새로이 떠오르는 마음을 안으며 우즈키는 쓸쓸한 미소를 만들었다.

 

 

 

* * *

 

 

창밖, 저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느리게 흐르고, 코앞에 있던 울타리는 잔상을 남기며 빠르게 지나간다. 시마무라 우즈키는 잠시 멍하니 밖을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옆에 운전하던 매니저를 바라봤다.

 

"얼마나 걸릴까요?"

 

"곧 도착해요."

 

몇년이 지나고 그녀는 프로덕션을 나와 개인활동을 시작했다. 합의 하에 모든 것을 순탄하게 처리했기에 문제는 없었다. 매니저는 프로덕션에서 알선해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우즈키의 개인활동에도 큰 도움이 됐다. 또한 프로덕션의 관계도 끊이지 않았고, 서로 좋은 관계가 되어 우즈키는 계속 방송에 나올 수 있었다.

 

"얼마나 걸릴까요..."

 

우즈키는 무심하게 물었고, 매니저는 흐음, 작은 숨을 흘렸다.

 

"일부러 오늘은 짧은 스케줄을 잡았으니까 금방 끝나겠죠? 저녁약속이 있다고 하셨나요?"

 

"네."

 

"호오, 혹시 남자?"

 

"아하핫, 아니에요. 친구에요. 처음 아이돌 활동을 할 때 친해진 친구요."

 

"알 것 같네요. 시부야 린씨죠?"

 

"에, 저희 관계가 그렇게 알려졌던가요...?"

 

"유명하잖아요. 시부야씨도 다른 프로덕션에 이적하면서도 시마무라씨 이야기를 했을 정도니까요."

 

우즈키는 은은하게 웃었다. 힐끗 그녀의 미소를 바라본 매니저는 청초한 미소에 잠시 넋이 나가려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다.

 

미소에는 여러가지가 담긴다. 한때의 순정. 상처조차 남기지 않았다. 홀로 긁어내지도, 누군가 그녀의 마음을 할퀴고 간 것도 아니었다. 홀로 타오른 불은 홀로 꺼지고 많은 흔적을 남긴다. 스쳐가는 감정, 하지만 쉬이 넘길 수 없었던 그 기억. 소녀는 끝이나고, 우즈키는 몇가지를 알게되었다.

 

"요즘은 바쁘니까요. 이렇게 짬을 내지 않으면 밥도 같이 못먹네요."

 

"제가 더 빠르게 뛰어야겠네요."

 

"후후, 매니저씨는 지금도 충분하세요."

 

여유롭게 흐르던 대화는 곧 잡담이 되어 이어진다.

 

해가 지는 도로는 석양이 아름답고, 그녀가 탄 차는 도로를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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