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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의 소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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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18, 2017 17:18에 작성됨.

어쩌면 아이돌이라는 것은 소비재.

이미지를 소비하고, 소비하고, 소비하다 보면 언젠가 그 가치가 사라져버리는 무형의 자원같은 것.

그것을 막기 위해, 최소한 늦추기 위해, 나의 직업-프로듀서-이 있는 이유일 것이다.

설령 아이돌들이 소비재라고 할지라도, 설령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 것이 그녀들의 운명이라고 해도, 그것을 조금이라도 늦추고 그녀들이 조금만 더 빛날 수 있도록 하는, 화학적으로 말하면 부촉매재같은 경우.

시키가 내 옆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본다.

내 냄새가 질린건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에게 시선을 맞춘다.

절대 질리지 않아♬. 시키가 특유의 말투로 나의 생각을 부정한다.

그녀에게 나는 촉매재일까, 부촉매재일까. 그녀의 말투에 안심하던 나는 뜬금없이 이런 생각을 한다.

그녀는 처음에 아이돌 일을 오로지 그녀의 전혀 재미없었던 삶을 조금 바꿔보려는 노력의 일종으로 선택했다.

자의가 아니긴 했지만, 그녀가 그 과정에서 선택한 것은 나였고, 그것이 촉매가 되어 그녀는 이 일이 재미있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나날들은 너무나 행복해서, 나도 모르게 내 본분-프로듀서의 일이든, 늦추는 일이든-을 잊어버리고 그녀가 행복한 미소를 지어주었다면 마냥 행복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거의 막바지. 그녀의 유통기한이랄까, 사용기한이랄까, 여하튼 그 언저리의 무엇인가가 다가온다.

마치 시계가 흐르는 자연스러움. 결국 그 누구도 흐르는 것은 당할 수가 없다.

그녀의 마약같은 타고난 귀여움도 이제 한계의 봉착한 것일까, 나는 날카로운 눈빛을 내뿜으며 사무소의 창문 밖의 하늘을 쳐다본다.

날카롭고 톡 쏘는 향기가 나네, 시키가 옆에서 중얼거린다. 

그녀의 말에 조금 뜨끔한 나는 그녀의 말에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고 잔잔한 눈웃음을 지어본다.

이번엔 꽤나 버터향이 나, 시키가 옆에서 중얼거리고는 나를 껴안는다.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뭐, 그것도 시키라는 여자아이의 속성이겠지.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행복한 시간. 하지만 이제 사무소에서 이러는 것도 슬슬 그만둬야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나에게 매달린 시키를 잠시 떼어내고는 와이셔츠에 대롱대롱거리며 매달려 있는 넥타이를 고쳐 맨다.

정장은 움직이기 불편한 옷이지만, 그만큼의 격식과 예절을 갖추게 해주는 물건.

그만큼 몸에서 나는 '향기'를 막지만, 한 꺼풀 벗으면 맡지 못한 만큼의 황홀한 체취를 맡게 해주는 물건.

시키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정장의 상의를 벗고 와이셔츠 채인 나에게 들러붙는다.

나갔다 온지는 꽤 되었는데, 나는 난감한 말투롤 꾸며대 중얼거리며 시키를 쳐다본다.

좋아하는 사람의 체취는 꽤나 특별한 법이야, 시키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에게 들러붙어 온다.

과연 나의 향기란 무슨 향기일까, 꽃 같은 향기일까, 30대의 고개를 넘기 직전인 블루 워커의 퀴퀴한 땀냄새일까. 

아마도 후자에 가깝겠지. 나는 왠지 모르게 자신을 자학하며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무언가 고민하고 있는 모양이네, 시키가 어떻게 알았는지 나를 쳐다보며 냐후훗♬하고 웃는다.

정말 너는 잘도 알아채네, 내가 신기하다는 듯이 말하자 당연하다는 듯한 그녀의 시선이 돌아온다.

그런가, 그만큼 어울렸다면 이 정도는 알아채는게 당연한 건가.

인간 관계가 매우 협소한 나는 시키의 반응을 보며 오늘도 하나 알아나간다.

그보다 프로듀서, 오늘은 평소보다 더욱 잘 차려입은 것 같은데. 시키가 마치 방어할 시간은 주지 않겠다는 듯이 정곡을 찔러온다.

오우, 진지하게 할 얘기가 있어서 말이야. 나는 간신히 그렇게 말하고는 조금은 두근거리는 눈으로 시키를 쳐다본다.

시키는 나의 표정을 잠시 쳐다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는다.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시키가 당연하다는 듯이 그 고혹적인 입술 사이를 열어 말한다.

뭐야, 이제는 톱 아이돌도 아니라고? 시키냥은 이제 한물간 아이돌임-.

괜찮아. 오히려 그 때가 오기를 기다렸는 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의 향기를 맡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듯이 붙어있는 시키를 잠시 떼어내고는 정장의 상의를 입는다.

시키가 도도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본다. 실수는 용납되지 않아.

나는 천천히 바짓주머니를 뒤져 몇 년 전부터 준비해두었던 물건과, 그 때보다 전부터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낸다.

 

시키, 너를 사랑해.

 

시키는 나의 고백에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옅은 미소를 짓는다.

일말의 불안감. 하지만 시키는 그런 나의 불안감을 날려버리려는 듯이, 혹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나에게 달려들고는 환한 미소를 짓는다.

아, 그런가. 이런게 이심전심인가.

나는 결국 시키에게 부촉매재같은 역할은 한 번도 해주지 않았다.

어쩌면 부촉매재는 시키에게 필요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엄청난 탤런트니까, 그런 것은 방해만 될 뿐이었는지도 모르지.

그저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이 질리지 않도록 하는 엄청난 반응속도와, 그것이 안 된다면 천천히 찾아오는 감동의 반응속도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꺼야? 시키가 나에게 매달린 채로 질문을 던진다.

글쎄, 일단 아이돌 은퇴 기자회견부터 할까. 확실히 정해놓은 것은 없는 내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뭐야, 아무것도 생각 안 해놓은 거야? 시키가 나의 말에 조금 실망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나는 그 표정이 그저 농담이라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그 표정에선 그런 '향기'가 나니까.

좋아, 그럼 일단 좋은 레스토랑에서 둘 만의 식사라도 할까.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몇 달 전부터 예약해둔 고급 프랑스 요릿집의 티켓을 두 장 꺼낸다.

내 말을 들은 시키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더욱 가까이 붙어온다.

얼른 나가지 않으면 늦겠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시키와 함께 사무소 밖으로 향하는 문을 연다.

어쩌면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는 공간. 나는 무심코 이렇게 얘기한다.

 

"In case I don't see you. Good afternoon, Good evening, Good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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