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천하제일] 자격 -2-

댓글: 7 / 조회: 514 / 추천: 5


관련링크


본문 - 02-16, 2017 23:54에 작성됨.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거래는 성사되었다. 다만 원래 가져왔던 계획에서 꽤 많은 변경점이 생겨버렸다. 부장은 내 재량껏 하라고 했지만 이걸 보고 어떤 얼굴을 할지 궁금해졌다. 일단 나로서는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은 하지만 말이다. 예산도 크게 초과하지 않았고 해야 할 일들도 우리 회사의 인력이라면 346에서 인원을 조금만 더 끌어온다는 가정 하에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디자인이나 기획에 관한 변경을 어떻게 적용시킬지는 이제 부장의 손에 달렸다. 이것만큼은 내게 떠넘길 수 없을 것이다. 복수라고 하면... 그렇게 볼 수 있을지도.
“그 폰에 있는 사진, 혹시 따님이신가요?”
“네. 이제 9살이 되는 아이죠. 이름은 니나에요.”
모든 협상이 끝나고 우리는 사내에 있는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이왕 온 거 여기서 좀 쉬었다 가라는 취지였다. 아키바도 아닌데 메이드 복장을 하고 있는 직원이 있는 건 꽤 신기했다.
“딱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끔 이 카페의 일을 도와주는 얼굴마담이거든요.”
“저 분도 아이돌인가요?”
“네, 일명 영원한 17세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들어본 적이 있다. 정확히는 부장이 주최한 술자리에 있던 TV에서 잠깐 본 것뿐이지만.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나저나 따님이 꽤 귀엽네요. 지금 학교에 있을 시간인가요?”
“네. 아마 지금쯤이면 다 끝나고 집으로 오는 중일거에요.”
“아아, 그럼 집에서는 누가 돌보죠?”
“저희 조부모께서 제가 올 때까진 돌보고 계세요.”
혼자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아이를 혼자 놔둔다는 건 생각보다 인식이 좋지 않다. 그것이 설령 나처럼 어쩔 수 없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렇군요. 요새는 다들 바쁘니까요. 그런 식으로 맡기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하더라고요.”
“어쩔 수 없어요.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되도록 아이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많이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맞벌이로서는 그게 최선이겠군요. 저도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이렇게 직접 일을 해보니 상상하던 것과는 다르더군요. 일이 많아지거나 촬영이 길어지면 아이돌도 저도 자동으로 야근이거든요. 저희 부모님에겐 죄송하지만 아마 전 가족 만들기 글렀을 거에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조 섞인 웃음을 띠었다.
“별수 없죠. 사회생활이라는 게 다 그런 거에요. 어느 것 하나는 반드시 포기해야 하죠.”
이건 나도 자조적일 수밖에 없다.
“이거 끝나면 다음엔 뭘 하나요?”
“상사가 바로 퇴근해도 된다고 했으니 바로 집으로 갈 거에요. 오랜만에 니나랑 놀아줘야죠.”
“그렇군요. 그럼 전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수고의 인사를 보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하러 간다면 나도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 이제 바로 귀가하면 될 일이니.“
“아 맞다, 혹시 니나를 아이돌로 만들고 싶으시다면 언제든지 연락해주세요.”
“네? 혹시 제 딸을 데뷔시키고 싶어졌나요?”
“혹시나 관심이 있으시다면요. 아니라면 그냥 겉치레 인사라고 생각해주세요.”
“흐음... 생각해보고요.”
라고는 해도 당장은 생각 없다. 그 아이를 아이돌로 만들지 말지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본다. 일단은 그냥 겉치레 인사로 두자...
아니 어쩌면 이건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일을 일단락 시킬 때 까지 니나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면서 니나에겐 새로운 경험을 해주고 싶다. 니나가 혼자 쓸쓸히 있지 않으면서도 보람 있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의 제안은 매우 솔깃한 건이다.
“저기...”
나는 가려고 하는 프로듀서를 붙잡기 위해 말을 걸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걸로 마지막 거래처다. 이제 계약 따내는 일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막막했던 일도 술술 풀리는 과정과 결과가 내게는 기분 좋게 다가왔다. 이렇게 하다보면 언젠가 큰 계약을 따내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쪽이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런 좋은 조건의 거래는 어디를 가도 보기 힘들더군요. 이치하라씨 쪽에서도 이 결과에 대해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군요."
"저희로서도 유익한 대화였습니다. 절대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그 말을 뒤로 우리는 서로 인사를 하고 나는 곧바로 회사건물을 빠져나왔다. 일 하나가 성공적으로 끝날 때마다 이렇게나 상쾌한 기분이 된다. 나는 크게 기지개를 키며 이 기분을 만끽했다.
"이걸로 당장 해야 할 할당량은 끝난 건가."
첫 영업을 뛰고서 3개월 정도가 지났다. 여전히 일은 매우 많고 집에 들어가는 시간도 늦은 건 여전하지만 받아오는 일은 계속 성공시키며 나의 가치를 증명하고, 그 망할 부장에게서도 어느 정도 인정받았다. 그러면서 한 단계 승진하기까지 했다. 나의 노력이 이런 결실을 맺는 모습을 직접 경험해보니 내 꿈의 달성이 멀지 않았음이 확 와 닿았다.
"수고했네. 이제 당분간은 큰 일거리가 없을 것 같으니 이제 슬슬 휴가를 내는게 어떤가?"
회사에 돌아와 보고를 끝마치자 부장이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휴가요?"
"그래. 지금까지 훌륭하게 달려왔다는 것에 대한 포상일세. 너를 보면 내가 한창 말단이었을 때가 생각나. 그때 처음 받아본 휴가는 얼마나 꿀맛이었는지... 이제 너도 한번 그 맛을 느껴볼 때가 된 것 같군. 우리 쪽은 걱정하지 말게. 전에 약속했던 것처럼 3주 휴가를 줄 테니 푹 쉬다 오게."
"음...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그래! 잘 생각했네. 재충전을 하면서 뒤를 돌아볼 시간은 언젠가 필요한 법이지. 돌아오면 좋은 일거리를 가져다 줄 테니 기대하고 있게나."
"알겠습니다. 그럼 사양 않고 받아쓰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보세. 오늘은 이만 퇴근해도 좋아."
"감사합니다. 그럼 3주 뒤에 뵙죠."
나는 부장에게 목례를 올리고 회사 밖으로 나섰다. 오늘은 내게 특별한 날이다. 휴가의 시작이자 니나의 첫 공연이기도 하니까.
그 날, 프로듀서에게 니나를 맡아달라고 부탁했었다. 비록 일이 바빠서 니나를 사무소에 데려다 놓고 그대로 올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까지 잘 해내고 있는 걸 보면 괜한 걱정이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니나의 얘기를 들어보면 다른 동료들도 잘해주는 것 같았고 아이의 생활에 활기가 띠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나는 그런 니나를 속으로 응원하면서 일에 매진했다. 니나가 이제는 혼자 있을 필요가 없어졌으니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럼에도 아직 그때의 질문에 대한 답은 찾을 수 없었다. 니나는 행복해진 것 같지만, 그 안에서 나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왠지 나만 정체되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무리 일을 성공시키고 보람을 느껴도 그것은 내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약속 장소인 사무실 쪽에 도착하자 프로듀서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한번은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일 때문에 바쁘신 건 저도 아니까요. 일단 앉으시죠.”
나는 그의 권유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사무원은 내게 커피 한잔을 내주고 자리를 떴다. 옆으로 땋은 머리의 꽤 젊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나보다 어릴지도.
“드디어 첫 공연이군요.”
운은 내 쪽에서 먼저 떼었다.
“네, 비록 솔로는 아니지만 열심히 준비한 무대입니다. 부디 잘 지켜봐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군요. 저도 빨리 니나의 모습을 보고 싶어요.”
유치원 학예회도 보지 못했었던 내게 니나가 무대에 서는 걸 본다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그만큼 기대가 크면서도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니나는 잘하고 있나요?”
“그럼요. 레슨도 열심히 받고 있고, 다른 동료들하고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밝고 붙임성 있는 아이라서 누구나 좋아해 주죠. 그 오해 살만한 말투만 어떻게든 고치면 되겠지만요.”
“아하하...”
말투인가... 듣고 있었으면서도 훈계를 해주지 않은 내 탓이 크다. 솔직히 너무 바빠서 가르칠 짬도 나지 않았었던 게 사실이지만.
“그리고 조금 걱정스러웠던 게, 혼자 있는 걸 매우 싫어하더군요. 그 나잇대의 아이들은 원래 그러는 게 당연하지만, 니나는 뭔가 좀... 달랐습니다.”
“그건...”
“가끔씩 다른 아이돌분들로부터 질문이 들어옵니다. 니나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라고요. 저는 사정을 모르니 잘 모르겠다고만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회사 내에서 억측이 돌기도 했고요.”
그의 말에 나는 아무런 반박도,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눈에서는 진심 어린 걱정의 감정이 묻어나왔기 때문이다. 그것이 누구를 향해서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전 부모가 아니고 애를 키워본 적도 없어서 함부로 말씀드리면 실례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한 사람의 프로듀서로서 알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니나를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 말이죠. 혹시 괜찮으시다면 그 아이가 왜 그렇게 된 건지 말씀해주셔도 괜찮습니까?”
솔직히 망설여진다. 겨우겨우 잊은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야 한다는 것을.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이런 타인에게 말이다. 그 이야기는 나뿐만 아니라 니나에게도 큰 상처가 되어버린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를 지금 이 자리에도 뱉어내도 괜찮을까?
“부탁드립니다.”
그는 망설이는 내게 고개를 깊게 숙여왔다. 이 사람의 무엇이 그를 이렇게 몰아붙이고 있는 걸까? 예전에 내게 말했던 다짐?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건가?
“어머님, 니나의 미소 좋아하시죠?”
“네?”
“처음으로 니나를 봤을 때 꽤 불안해 보이는 얼굴이었습니다.”
몰랐다. 분명 잘 설명하고 데려왔을 거라 생각했고, 내 앞에서 그런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겠죠. 한 번도 오지 않은 장소에 덩그러니 혼자 있었으니까요. 누구라도 불안했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간신히 안심시키고 신뢰를 보였을 때 그 아이는 환하게 웃더군요. 군더더기 없이 매우 맑은 미소를요. 그런 미소를 본 건 저의 프로듀서 일생 중에 처음이었습니다. 그 뒤로 몇 번 정도 레슨을 하는 모습과 프로모션 촬영의 참관을 하면서 다짐했습니다. 이 미소를 언제까지나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다른 다짐 때와는 달랐습니다. 그건 마치... 사명과도 같은 느낌이었죠. 니나는 그럴 힘과 자격이 있었던 겁니다.”
“자격... 이군요...”
“저의 직속 선배께선 아이돌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바로 미소라고 말했었습니다. 원래 많이 과묵한 분이시지만 그것 하나만큼은 양보를 하시지 않더군요. 그리고 그의 곁에서 배우면서 저도 그 의미를 조금이나마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알고 싶습니다. 그 내용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어두운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 미소를 지키고 싶은 건 어머님도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의 말, 단어, 목소리 하나하나에 진심이 담겨있었음을 깨달았다. 도망치려고 했던 나와 달리 직접 부딪치고 맞서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저는... 계속 도망치기 바빴군요.”
일 때문에 니나를 잘 돌볼 수가 없었다는 건 어쩌면 핑계였을 수도 있다. 아직 확신은 못 하겠지만 나는 어렴풋이 니나를 피해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아이를 볼 때마다 마음속 어디에선가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 나를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원히 빛날 거라고 믿었던 저 하늘의 별이 그 빛을 잃고 허무하게 떨어지는 모습을, 그걸 잃은 내게 남은 건 거의 없었다는 것을, 그 사실이 두려워서 나는 계속 도망쳐왔다.
“알겠습니다. 조금 긴 이야기가 될 겁니다.”
“괜찮습니다. 오늘 스케줄은 그 무대를 빼면 다 비워놨거든요.”
그렇게까지 해놓을 줄이야... 오늘은 아주 작정을 한 모양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 왠지 모르게 기뻤다.
“그건... 꽤 오래전의 일입니다.”
나는 그 말을 시작으로 운을 떼었다. 어떻게 남편과 만났고, 결혼했고, 왜 헤어졌는지.

 

니나가 6살이 되었을 때 갑자기 남편의 상태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밤늦게 술을 먹고 들어오는 날이 늘어났고, 집에만 있는 시간이 많아졌으며, 여태까지 없었던 폭언을 날리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지지 않고 맞서 싸웠지만 내심 무슨 일이 있나 걱정했었다. 그러나 물어봐도 대답은 없었고 네가 상관할 바 아니라는 말만 들어왔다. 사귀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렇게까지 싸워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로선 영문을 전혀 모를 수밖에 없었고 폭언을 듣거나 쳐 맞기까지 했다. 그것도 니나 앞에서 말이다. 당시의 상황을 요약하자면... 말 그대로 무간지옥이었다. 그러나 언젠가 부모님 앞에서 했던 것처럼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를 해왔고, 나는 지옥이 끝났다는 안도감과 니나를 위해서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사정을 물어보길 회사에서 어이없게 잘리는 바람에 잠시 미쳐버렸다고 했었다. 그 뒤에 뭐가 더 있는지 모른 채 나는 그 말을 믿고 받아들였다. 물론 더 따지고 싶었지만 니나에게 이미 몹쓸 모습을 보이고 말았으니 더 이상 그 아이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 남편은 새로 직장을 잡아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그때 품었던 의문은 내 마음 속에서 사라졌다. 돌아온 남편의 모습에 그만 안도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새 한계는 찾아오고 있었다.

 

그 날은 오랜만에 휴가를 나와 집 청소를 하며 하루를 보냈던 때였다. 니나는 유치원을 가고 없었고 남편도 직장에 가있었다. 거기까지는 그저 평범한 하루였다. 그걸 발견하기 전 까지는 말이다. 청소를 하던 도중에 마구잡이로 구겨진 종이쪼가리 두 개를 침대 구석에서 발견한 것이다. 하나는 주식에 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도박용 마권이었다. 그것도 거하게 털린. 나는 그것을 보고 머리에 피가 쏠려 남편이 돌아왔을 때 그것들을 눈앞에 들이밀며 이게 어떻게 된 건지 해명을 듣고 싶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당신 일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
“그건 또 어디서 찾았어?”
“그냥 묻는 말에 대답해. 이건 대체 뭐야?”
“보면 몰라?”
“내가 듣고 싶은 건 그게 아냐!”
정말로 하기 싫었지만 나는 끝까지 추궁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겨우 평소대로 돌아왔나 싶었는데 또 무너지는 건 싫었다. 나를 위해서 머리를 조아리고 굴욕적인 자태를 맛봤던 그 사람이 이렇게까지 망가질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내 기대를 한 번에 무너뜨렸다. 처음 남편이 미쳐버렸던 그 날, 그가 지금까지 쌓아온 주식이 연쇄적으로 폭락해버려 그 이상 회복되지 않았다. 거기엔 그가 다니던 회사도 포함되어있어 단숨에 실업자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벌어온 돈은 몰래 해온 알바나 어느 순간부터 빠져든 경마에서 벌어들인 것이었다. 그것도 지금은 완전히 망해버려서 지금 수중에 한 푼의 돈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
나는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엔 예전의 그 모습이 아닌 모든 걸 잃고 초췌해진 남편만이 남아있었다.
“이제 됐지? 그만 좀 내버려 둬.”
“하지만...”
“또 뭐?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지금까지 잘 해줬으면 좋잖아? 왜? 또 뭘 빨아먹으려고?”
“아니야, 이렇게 무너지면 안 돼.”
“뭐?”
“우리 다시 시작하면 돼. 아직 내가 버는 게 남아 있잖아? 그것만 있으면 그런 생활 청산할 수 있어. 일자리도 같이 구해주고, 나도 일을 늘릴 테니까, 제발 다시 시작하자... 응?”
그때는 내가 왜 그렇게 매달렸는지 모르겠다. 머릿속에는 단지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소원만 남아있었다. 한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이렇게 무너지게 둘 수는 없었다.
“이제 됐어. 다 필요 없다고!”
그러나 내게 돌아온 것은 차가운 말 뿐이었다.
“뭐가 필요 없어? 이제 와서 버리겠다는 거야? 너무 무책임하잖아! 우리 아직 희망이 남아있어! 왜 그걸 모르는 건데?!”
“그럼 뭐 어쩌라고! 하는 건 전부 안 되고, 이미 가진 돈 전부 날려먹었다고!”
“그럼 다시 벌면...”
“7년! 네가 임신하고 나서 7년 동안 계속 고생했어! 이제는 질렸다고! 내가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된 거지? 아아, 이제 정말로 싫다. 차라리 그때 네 부모 말에 찬동했다면...”
그의 말이 더 이상 이뤄지지 못하게 나는 막아서야 했다. 나의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매우 센 소리가 집안에 울려 퍼졌다. 그의 얼굴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손자국과 함께 힘을 잃고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오호라... 그렇게 나오시겠다?”
그러나 그걸로 남편이 제정신으로 돌아올 일은 없었다. 대신 갑자기 내 몸뚱아리가 공중에 붕 뜬 느낌을 받으며 날아가 등에 강렬한 통증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온 몸에 달리는 격통에 나는 비명을 지르며 벽에 처박힐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고통은 난생 처음이었다.
“어째서...?”
“주는 대로 받는다. 기본이잖아?”
그는 초점 없는 눈을 하고서 특히 격통을 달리는 배를 움켜쥔 채 몸을 수그린 나를 바라보았다. 그 공허한 눈빛은 마치 모든 걸 놔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이게 정녕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는 건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 이걸로 끝난 거지? 이제 끝내자고.”
그는 그렇게 말하며 다리 하나를 뒤로 슬그머니 빼기 시작했다. 이 앞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내심 알고 있었으나 그 격통 속에서 만족스럽게 움직일 리 없었다. 이대로 꼼짝없이 당하는 건가하고 생각하던 그때 이변이 찾아왔다.
“엄마를 그만 괴롭히는 거에요!”
아직도 격통에 시달리고 있는 내 앞에 어떤 형체가 방패가 되어주듯이 막아섰다. 바로 니나였다.
“엄마가 아파하잖아요! 그만 쳐괴롭히는 거에요!”
아직 아기살도 안 빠진 어린 아이가 다 큰 어른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치는 모습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뒷모습만 보여서 얼굴이 어땠는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목소리에 떨림조차 없었으니 분명 단호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그 기세 좋던 남편이 한순간 당황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나는 그사이에 정신을 다시금 차리고 일어서려했다. 아이 앞에서 이런 모습은 정말로 꼴불견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적어도 내가 이 아이 앞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지 않으면 엄마라는 자격조차 없어질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윽.”
내 눈 앞에서 니나의 형상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대신 왠지 모르게 알 것 같은 팔의 각도를 하고 있는 남편의 모습이 시야에 포착될 뿐이었다. 그리고 한편에는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널브러진 모습으로 어떻게든 일어나보려 하는, 그러나 이내 축 늘어져버린 그 아이의 모습이...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알던, 내가 사랑하던 그 사람은 이미 죽어버렸다는 걸.

 

이후의 일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 사람은 곧바로 집을 나가버리고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그와 별개로 나와 니나에게 자행되었던 폭력으로 인해 형사사건이 진행되어 양육권을 잃고 위자료까지 지불한 채 세상과 격리되고 말았다. 저 하늘의 빛나는 별이었던 사람의 몰락은 이렇게나 참혹했다. 그 위자료를 받아든 나는 이미 한번 연을 끊었던 친가가 아닌 따로 살림을 차려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그 사람 쪽 부모로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오히려 더는 관여되기 싫다는 듯 깨끗하게 말이다. 내심 공구리를 각오했던 나로선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나도 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꼴도 보기 싫으니 말이다. 그리고 다짐했다. 더 이상 니나에게 슬픈 경험을 하게하지 않기로. 그러기 위해선 무너져버린 현 자리를 다시 세울 필요가 있었다.

남편 지인의 회사에는 더는 다니기 어려우니 그만두고 재빨리 새로운 회사를 찾아 취직했다. 그리고 밤낮가릴 것 없이 계속 일에 매진했다. 니나를 위해,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믿고서 계속 일해 왔다. 일에 또 다른 일, 업무에 업무를 거듭해서 말이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프로듀서와 대면하면서 나는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 해온 건 대체 뭐였던 것일까?

 

나는 니나의 엄마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가?



“죄송합니다.”
모든 이야기를 끝내고 나는 손수건을 꺼내 눈가에서 흐르는 뭔가를 닦아내었다.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대인관계도 회사의 그것이 전부고 들어줄 부모도 없었다. 그런데 하필 이 자리에서, 그것도 니나의 프로듀서라는 연결점만 가진 남에게 전부 털어놓은 것이다. 다시 한 번 그 기억을 끄집어내는 건 매우 불편했지만, 솔직히 그것에 비해 뭔가 후련하다는 느낌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쌓아놓았던 이야기를 풀어버려서 그런지, 그걸 들어주는 사람이 생겨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 프로듀서는 아무 말 없이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었다는 것.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픈 기억을 억지로 꺼내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이 말 한마디만 했다.
“아니에요. 언젠가는 이야기 해드렸어야 했던 거니까.”
“니나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어머님이 어떤 마음으로 지금까지 왔을지는 잘 알았습니다. 그러니 이 말은 꼭 해두겠습니다. 당신이 걸어온 길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장담할 수 있죠?”
“이치하라 니나, 그 아이가 우리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아, 그런 건가. 그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 나는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내가 걸어온 길은 매우 파란만장하고 끔찍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로 니나가 내 앞에 존재한다. 절망속의 한줄기 빛이라는 건 바로 그런 걸까? 나와 니나만 남았을 때 내가 세웠던 목표는 바로 그 빛을 지키기 위해 탄생했다는 것을 지금 다시 깨달았다.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흘렀고, 늦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프로듀서에 의해 나는 다시금 그걸 상기시킬 수 있었다.
“저는 자격이 누군가에 의해 부여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자신이 자격을 만드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머님께선 엄마의 자격이 있나 의심하고 계시지만, 저는 아직 그 자격을 잃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오래 떨어져있었고 니나에게 신경써주지는 못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직 그 아이를, 자신을 포기하시지 않았잖습니까?”
“네...”
“니나에게는 아직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과오는 바로잡으면 됩니다. 부디 자신을 믿어주세요.”
내가 했던 이야기는 아마 그에겐 그저 옛날이야기였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이런 말을 해주는 이유와 용기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다시금 파악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내게 얼마나 큰 응원이 되는 말이었는지.
“당장은 바뀌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정리하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죠.”
니나와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을 그만둬야한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당장은 막막하지만 시간을 들여 준비하면 될 것 같다. 3주간의 휴가는 바로 이를 위해 만들어진 선물일 테니까.
“당신은 정말로 천성이 그 직업에 맞네요.”
“아직 멀었습니다. 저는 천성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전에 보여줬던 멋쩍은 웃음을 내게 보여주었다.

 

이후로 우리는 몇 가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시간이 되자 자리를 떴다. 사무실에서 나오면서 마치 엿들은 것 같은 느낌의 여자 두 명을 잠시 마주쳤지만 서로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언젠가 TV프로그램에서 각각 나긋한 목소리와 말장난을 잘했던 사람이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어서, 아마 니나의 동료 중 한명일거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라이브 시작까지는 아직 조금 남아있어서 나는 회장 근처의 카페에서 좀 쉬기로 결정했다. 프로듀서에게서 이번 무대는 어린애들만 모아서 짠 유닛이라고 들었다. 시간대가 시간대에서 그런지 점점 회장에 줄을 서는 사람들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니나를 포함한 그 아이들을 보기 위해 저렇게나 많이 모였다는 것에 나는 적잖게 놀랐다. 저 모습을 보니 니나는 이미 저 하늘의 별이 되기 시작한 것 같이 느껴졌다. 아마 그 아이는 앞으로 계속 나아가서 진짜 별이 되어버리겠지. 어쩌면 내가 닿을 수 없을 정도 높이... 더욱 높이...
하지만 어찌되었건 그 길을 처음으로 제시해 준 건 엄마인 나와 프로듀서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되기 전 까지는 아직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어린 아이다. 비록 내게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발버둥 치며 노력을 할 수는 있어야한다. 니나에게 있어 한 점 부끄럼 없는 부모이자 어른이 되기 위해서.
“와... 이런데서 하는구나.”
라이브 회장은 예상보다 훨씬 넓었다. 자리도 많고 그만큼 사람도 들어차기 시작했고 무대는 특별히 짜 맞춰진 세트로 가득 차 매우 화려하다. 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기획이 들어갔는지 딱히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다. 니나는 이런데서 처음으로 자신의 실력을 뽐내는 것이다. 기뻐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이 무대 어디에선가 본 듯한...”
무대의 구성을 자세히 보니 뭔가 낯이 익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아...!”
그래! 이건 예전에 내가 프로듀서에게 기획을 보였던 무대 중 하나다! 당시에 이 안은 기각되고 다른 기획으로 채택되었었지만 지금 여기서 다시 구현된 것이다. 설마 이런데서 쓰일 줄이야... 오늘은 완전 감탄의 연속이다.

 

슬슬 라이브 시작 시간이 가까워져 나는 자리에 앉아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 프로듀서가 만든 기획이다. 잘되는 건 당연할 게 뻔하다. 나는 마음 놓고 감상하고 응원하면 될 일이다.
“참 멀리도 왔네.”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로 정신없이 앞으로만 달려왔다.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목표 하나를 잡아 계속 가보니 언제부턴가 주위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가 아까 그 사단이고 그것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한편에 남아있을 것이다. 거의 10년 만에 처음으로 뒤를 돌아본 때이니 말이다. 물론 그때도 말했듯이 당장은 바뀌기 힘들다. 기존 하던 일의 정리도 있고 이후의 일도 생각해야한다. 아마 조건 좋고 제대로 된 직장을 찾으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때까지는 저금한 것을 쓰며 절약정신을 발휘해야겠지.

 

하지만 우리 앞에 다시 한 번 밝은 길이 열리며 제2의 삶이 시작되었음은 확실하다.

 

“와!!!!!!”
주위의 불이 점점 어두워지며 라이브의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동시에 관객들이 내지르는 함성이 퍼지며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昨日の涙は今日の勇気


顔上げて一緒にLet’s Go!!

 

---------------

안녕하십니까. 이야기를 찾아다니는 자, 북메이커입니다. 눈팅생활 1년만에 이런 이벤트를 알게되어 가입인사글을 겸해 부랴부랴 참가했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절망속에서 희망이 피어나는 이야기, 비록 가시밭 길을 걸었지만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한 엄마의 이야기였습니다. 니나의 스토리와 설정을 처음 알았을때부터 이건 언젠가 단편소설로 써보자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부모의 방임(아니면 학대)에 의해 외롭게 생활하던 아이가 동료들을 만나며 다시금 웃음을 되찾는 모습은 너무나 뿌듯하고 감동적이었으며, 대체 그 부모란 작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어쩔 수 없이 니나를 제대로 돌볼 상황이 되지 않았다면 어떤 이야기가 될까? 하는 생각에서부터 이 소설을 출발시켰습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저로선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럼 열심히 활동하기로 다짐하며, 또 다른 이야기를 찾아 들고오겠습니다.

5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