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천하제일] 자격 -1-

댓글: 2 / 조회: 459 / 추천: 2


관련링크


본문 - 02-16, 2017 23:45에 작성됨.

밤의 공기가 나의 폐를 계속해서 드나들며 안 그래도 추운 겨울 날씨를 계속 상기시켜주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본 현 시각은 23시 반. 날짜가 바뀔 시간이 딱 30분 남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매우 조용하고 한산하다. 다들 침대에 드러누워 자고 있을 시간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 조용하다. 불이라고는 가로등에서 나오는 빛밖에 없고, 눈을 밟고 있는 내 발소리만이 침묵의 거리를 채우고 있다. 평소보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더욱 확실히 와 닿는다.
“후우...”
나는 차가워진 손을 입김으로 데우며 추위를 버텼다. 이럴 줄 알았다면 장갑이라도 끼고 갈 걸 그랬다. 점점 추워지는 날씨는 나의 노출된 맨살을 계속해서 베어내고 있고 손끝과 귀에서 열기를 잃어가는 피가 흘러가는 게 느껴진다. 나의 입김은 그저 그 과정을 덜 고통스럽게 해줄 진통제일 뿐이다. 그것도 효과가 매우 짧은. 하지만 이것도 모두 그 아이를 위해서니 어쩔 수 없이 견뎌내어야 한다. 아무리 직장이 야근천국에 허구한 날 잔심부름이나 시키고, 윗사람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들어야 하는 썩어빠진 곳이라도 나는 견뎌내어야 한다. 만약 버티지 못하면 끝나버리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니니까.
“그래... 견뎌야 해.”
추위 때문에 약해진 마음을 다잡으며 나는 맨션 입구로 들어갔다. 이곳으로 이사 온 지 6개월. 전에 살던 집보다는 훨씬 비좁은 곳이지만 직장에서 가깝고 월세도 싸서 일단은 만족한다. 아니, 생각해보면 지금이 더 살만하다. 청소할 양도 줄어들었고, 필요한 것들만 자리 부족을 명목으로 딱 사놓고, 무엇보다도 그 쓰레기 같은 자식을 다시는 볼 필요가 없으니까.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는 이 감촉도 그 집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감각보다 훨씬 가볍다. 층수도 딱 중간지점. 1층이 아닌 건 아쉽지만, 지금은 이 정도면 된다.
얼마 안 가 엘리베이터는 내가 지정한 층에 멈췄다. 이제 이 차가운 복도만 걸어가면 나의 집이다. 아니, 우리 집이다. 지금까지의 무미건조한 발소리는 언뜻 들어보면 경쾌한 발걸음으로 들린다. 조금만 더 가면 나의 삶의 목적이 눈앞에 나타난다. 나는 이를 위해 잠겨진 현관을 열쇠로 따고 무겁다면 무거운 철제문을 열었다.
“안녕히 쳐 다녀오셨어요!”
문이 열리자마자 어린아이 특유의 높은 톤의 목소리가 나를 반겼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문을 닫고 걸어 잠근 뒤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그곳엔 토끼 인형 옷을 뒤집어쓴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눈에는 졸린 기색이 역력하지만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고, 우윳빛이 감도는 피부와 통통한 볼살은 아직 어린이의 티를 벗지 못했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정갈하면서 긴 주황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그 아이는 작디작은 손으로 나를 꼭 껴안았다. 마치 오랫동안 헤어진 가족을 다시 만난 듯이...
“응, 다녀왔어. 니나.”
아이의 이름은 이치하라 니나. 나의 단 하나뿐인 딸이다.

 

세간에선 나를 뭐라 부르는지 아는가? 싱글맘, 이혼녀, 전 기혼녀, 이런 낙인 같은 느낌의 단어로 나를 규정하고 있다. 아직 30세도 넘지 않은 내게 이런 딱지가 붙은 건 어찌 보면 가혹한 처사라고도 부를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 와선 내겐 이런 것 따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적어도 그런 딱지가 예전의 삶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물론 처음에는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만난 그 사람은 훈남에다 부모의 재력에 힘입어 꽤 부유한 생활을 했고, 누구에게도 상냥했고, 여자애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고, 주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나를 선택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나는 세상 전부를 가진 것 같았다. 별 볼 일 없는 집안에서 자라 평범하게 살아온 내게 그는 저 하늘에 뜬 별과 같았다. 그런 별이 유성이 되어 내 손에 떨어진 것이다. 이걸 기적이라 하지 않으면 뭐라고 할까? 이후 나와 그는 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커플이자 솔로들의 기만자로 자리 잡았고 나는 그 부러워하는 반응을 즐기며 공주처럼 살아갔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센터시험이 다 끝난 그 날에 그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졸업여행 가지 않을래?”
“졸업여행? 학교에서 하는 거라면 아직...”
“아니, 학교 말고. 우리 둘이서만 가자고.”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뭔가를 보여주었다. 예전에 잡지에서 본 기억이 있는 온천이었다. 꽤 고급진 시설에 다른데서 찾아보기 힘든 풍경을 가진 온천으로 여러 연예인들이나 유명인사들도 왔다 갔다는 곳이었다. 이걸 보면서 언젠가 한번쯤을 가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를?”
“응, 너도 가고 싶어 했잖아 시험도 끝났으니 이번에 놀러가자.”
“하지만 여기는 비싼걸?”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 곳의 가장 좋은 자리를 예약할 정도는 여유라고.”
그는 언제나 그랬다. 내가 넌지시 말했거나 비스무리하게 소망을 얘기하면 언젠가 반드시 들어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계속 의지하며 살아왔고 그는 내게 절대로 실망을 주지 않았다. 기만커플이라는 별명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좋아, 예약까지 했으면 안 갈수는 없잖아?”
“오케이! 그럼 모레 9시에 역에서 만나자. 기대하고 있으라고.”
기대... 이 정도까지 해줬는데 내가 더 뭘 바랄 수 있을까? 나는 단 둘이서 여행, 그것도 가장 가고 싶어 했던 장소로 향하는 건데 그 이상은 사치라고 생각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약속의 그 날에 모여 역을 나섰다. 온천까지는 신칸센으로 두 시간 반에 택시를 타고 조금 더 들어가는 장소에 있었다. 주위는 산으로 둘러싸여있었고 겨울 특유의 흰색으로 덮여있어 이야기에 나올법한 장소로 변모해있었다. 사진에서 보기는 했지만 실제로 보니 느껴지는 감탄과 경외는 다른 어떤 것도 견줄 수 없었다. 건물에 들어서자 종업원들이 깍듯이 인사하며 우리를 맞이했고 예약했던 특급 객실로 안내했다. 우리 같은 학생이 그런 객실을 쓰는데 의아했는지 눈을 크게 뜨던 한 가족의 얼굴은 아직도 선하다.
“후아~”
이 곳의 개인 노천온탕은 역시 소문으로 들었다시피 기분 좋은 온도에 편안한 느낌이었다. 바깥으로 보이는 설산은 마치 유명한 옛날 그림 같았고 온천에서부터 올라온 흰 연기는 그 분위기를 더욱 살려주었다. 나는 그 모습에 감탄사를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어때?”
그가 내 옆에서 몸을 온천에 담그며 물었다. 몸을 수건으로 가린 상태지만 드러난 부분의 근육은 매우 탄탄해보였다.
“끝내줘. 이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하하, 재미있네. 그래도 좋아해주니 다행이야.”
그는 만족한 듯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는 그것을 보며 단 둘의 여행을 만끽하기 시작했다. 2박 3일이라는 짧은 일정을 보람차게 보내기 위해 그는 이것 말고도 꽤 많은 이벤트를 준비해주었다. 1년 동안 책상에 앉아 찌들었던 몸을 풀어주기 위한 마사지라던가, 특별히 주문해둔 만찬이라던가, 잊고 있었던 300일 기념일 등 정말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계획이었다. 그는 별거 아니라고 손사레를 쳤지만 내게는 매우 뜻 깊은 시간이었고, 그렇게까지 감동적이었던 때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정말 고마워.”
여행의 마지막 날 밤, 나는 이불 속에서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그 손을 크면서도 튼튼하고, 따뜻했다.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야.”
“아니, 나에게는 너무나 과분했어... 사실, 처음 우리가 사귀고 있었을 땐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불안했어. 나는 그냥 평범한 여자였고 너는 저 높은 하늘의 별같은 존재였어. 그런 내게 네가 찾아왔을 땐 엄청 기뻤지만, 동시에 불안했어. 내가 너와 같은 길을 갈 자격이 되나, 혹시 나 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을 만나서 떠나지 않을까, 너에게 있어서 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일지도...”
나의 말은 전부 이루지 못하고 도중에 끊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입술에 뭔가가 포개어진듯한 느낌을 받았다. 뭔가 온기가 있고, 축축하고, 그러면서도 뭔가가 편안해지는 것 같은...
“읍...!”
머리가 새하얘지면서 나는 내가 지금 무슨 짓을 당하고 있는지 파악했다. 마치 내가 내뱉으려고 하는 말들을 내보내지 못하게 잡아먹으려는 듯이 힘을 꼭 주고 깊게 나와 입술을 포개었다. 마치 강하게 내게 각인시키려 하듯이. 그 뒤에 입술을 떼고서 나의 눈을 바라보며 내게 단호히 말했다.
“네게 그런 부담을 안겨준 건 미안해. 하지만 이건 알아줘. 너는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 누가 뭐라고 해도 너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나야.”
“증명할 수 있어?”
첫 키스의 느낌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지만 그때의 나는 그에게서 더욱 뭔가를 원했다. 그 말을 내게 깊이 각인시키기 위한, 내게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 나는 그를 더욱 원했다. 우리 앞에 그 어떤 장애물도 남아있기를 원하지 않았다.
“...알았어.”
그는 나에게 더 확신을 주기로 했다.
그 날 이후 우리는 우리 사이에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센터시험 결과도 여유롭게 나와서 우리는 같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앞으로도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우리는 엄청나게 들떠있었고, 더는 거칠게 없다는 느낌으로 관계는 더욱 발전해갔다. 캠퍼스 내에서도 고등학교 때와 같이 기만커플이라고 불리며 말이다. 그가 준 확신은 내게 의심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우리는 더욱 원하는 게 강해져 비밀이란 게 존재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이대로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앞으로도 좋은 일만 가득할거라고 생각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 까지는.

 

시작은 사소한 것이었다. 어느 날부터 갑자기 속이 안 좋아지며 게워낼때가 많아졌고, 그 어떤 식사도 입에 닿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생각해도 너무할 정도로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그 이는 어떻게든 내 곁에 있어주려 했지만 난 그에게 괜한 짜증만 부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기분 나쁨 그대로 그 어느 것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런 적은 난생 처음이었다.
“아마 조금은 쉬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며 그 이가 잠시 내 곁을 떠났을 때는 오히려 그 짜증이 어디로 갔는지 매달리고 싶어졌다. 휴식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난 그 휴식을 마음껏 누릴 수 없었다. 내가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건지 나 자신에게 혐오감마저 들었다. 한 번도 크게 싸우지 않은 우리 사이에 금이 갈 것 같아서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감정은 이런 식으로 계속 요동치면서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나중에 그가 뭔가를 들고 왔을 때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며칠간의 공백을 깨고 그가 내 앞에 나타나 들이민 것은 낯설지만 지식으로는 알고 있는 것이었다.
“혹시 원인이 이쪽이 아닐까 해서. 강요하진 않을게. 다만 우리 관계가 제대로 나아가기 위해선 한번은 해봐야할 것 같아.”
나는 순간적으로 황당해서 뭐라 한소리를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나도 어렴풋이 의심이 가기 시작하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인정하면 지금 이 관계가 어떻게 될 것 같아서 무서웠다. 그럼에도 나는 더욱 확신을 얻고싶어서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는 평범한 연인으로서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우리 부모님의 분노하는 모습과 비굴하게 꿇은 남자친구의 모습을. 아버지는 당장에 죽여 버릴 듯이 역정을 내셨고 어머니는 말리면서도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 흘러나왔었다.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그 이는 머리를 바닥에 박고 계속 조아리며 용서를 구했다. 그는 이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것이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책임은 반드시 지겠습니다. 그런 말을 계속하면서 정말로 비굴하게, 그리고 불쌍하게, 그는 허리를 숙였다.
“네놈이 감히! 내가 지금까지 잘 대해준 게 그렇게도 우습더냐?! 이런 식으로 배신을 때리다니...!”
아버지의 분노는 정말로 무서웠다. 무기를 안 들었다 뿐이지 정말로 무서울 정도로 노려보며 그를 압박했다.
“그리고 너!”
그 분노는 얼마 안가 나에게 쏟아졌다.
“이 책임을 어떻게 지려고 그러냐? 지금껏 잘 키워왔는데 이런 식으로 배신을 해? 네가 그 아이를 키울 자격이나 여건이 되냐고!”
“죄송해요. 하지만 이렇게 된 거 저도 책임을...”
“책임? 지랄하고 앉아있네. 네가 이런 양키랑 쏘다니니까 더럽혀진 거 아냐! 솔직히 나는 처음부터 저 놈이 마음에 안 들었다고! 둘 중 하나만 선택해라. 이대로 영원히 연을 끊고 살던지, 애를 지우고 헤어질지!”
그 다음부터는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나 확실한 것은 그 뒤로도 아버지와 크게 싸웠고 의견차를 좁히지 못해 결국 전자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못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뱃속의 아이를 지울 수는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아이는 우리의 사랑의 결정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책임은 반드시 질 거라고 다짐했다. 그 전에 남자친구쪽 부모랑 담판을 지어야했지만.
그쪽 집 분위기도 우리 쪽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서있었고 내가 머리를 박고 조아려야 했다는 것이다.
“네년이냐? 우리 아들을 홀린 꽃뱀이.”
“아버지, 말이 심하잖습니까!”
“너는 닥쳐라!”
그 우렁차고 위압적인 목소리에 우리들은 잔뜩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건 뭡니까? 왜 그런 걸 들고 계십니까? 제가 제 출신을 숨기기 위해 얼마나...”
“그 주둥아리 꼬매버리기 전에 닥치고 있어!”
그 말을 끝으로 그 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너,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네년같이 천박하고 돈이라고는 한 푼도 없는 인간들을 묻어본 적이 한 두 번은 아니거든. 분명 노구치 몇 장을 들이밀면서 꼬리쳤겠지. 안 봐도 뻔해. 저 아들놈도 그거에 걸려버린 건 잘못한 거지만, 애초에 네년이 꼬리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어! 알아?!”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날카롭게 갈아진 서슬 퍼런 그것이 내 옆에 바로 들이대져서 더는 꼼짝할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그 이가 자신의 집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심지어 주소조차 알려주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무도 야쿠자 집안이랑은 얽히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
“마지막 한 마디라도 들어보지. 이것이 내가 주는 최대한의 자비다.”
칼날이 턱에 대어지며 그 사람은 내 고개를 억지로 들어 눈을 쳐다보게 만들었다. 그 눈빛은 분노에 서려있음과 이제 질렸다는 느낌이 직감적으로 와 닿았다. 나는 그 눈빛을 피할 수 없었다. 단지 연습했었던 그 말을 간신히 내뱉을 뿐이었다.
“...지겠습니다.”
“뭐?”
“책임... 지겠습니다. 더 이상 꽃뱀 짓을 하지 않고... 곁에서 계속 보필하겠습니다.”
“호오? 그 말뜻을 너는 알고 있겠지?”
“네, 책임지겠습니다.”
그 말에 그 사람은 잠시 나를 보더니 그 물건을 거두고 부하 한명을 불러 맡겼다. 그 뒤에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말, 명심해두겠다. 어디까지 갈 수 있나 한 번 보자고.”
그렇게 말하며 그 사람은 우리 두 사람의 결혼을 허가했다. 아니, 서로 책임지라는 의미에서 결혼하라고 명령했다. 다만 나를 며느리를 받아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고, 금전적 지원은 한 푼도 해주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네년과 뱃속의 ‘고기’를 보기 싫으니 썩 꺼지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나와 그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집안 사정상 만약 거절했다가는 무슨 짓을 당할지 몰랐으니 말이다. 모든 게 끝나고 유례없는 공포와 절망에 빠져 울고 있던 나에게 그가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너를 절대 버리지 않을 거야. 맹세할게.”라는 말을 해주었고, 나는 멍청하게도 그 말을 믿고 다시 일어섰다.

그 뒤로 우리는 괜찮을 2층 주택을 찾아 구입했고, 나는 대학을 그만둔 뒤 그 이의 지인이 하고 있는 회사를 추천받아 취직했고, 그는 계속해서 대학에 다니며 우리를 위해 학업에 열중했다. 그것도 전에 없던 열의로 말이다. 자금은 그가 계속해서 투자해왔던 주식과 나의 직장에서 나오는 월급으로 어느 정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우리는 아무런 사정도 모르는 친구들과 동문들의 열렬한 축하와 함께 결혼식을 올렸으며, 또 몇 개월 뒤 니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 비록 많은 일들이 있었고 직장도 야근이나 잔업이 많아 힘들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나날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행복이 내 삶의 원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음... 공책을 새로 사야겠네.”
수업시간에 쓰는 공책은 큼지막한 글씨와 그림들에 의해 페이지가 완전히 채워지기 일보직전이다. 여유가 있었으면 몇 권씩 사놓고 필요할 때마다 가져가라고 하겠지만, 지금은 그러기에 너무나 아슬아슬한 상황이다. 준비물은 학교 측에서 준비해주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나머지는 예산에서 어떻게든 빼내야 한다. 그리고 만에 하나라는 상황에 대비해 얼마 정도는 집에 두고 간다. 아직 별다른 말이 없으니 잘하고 다니는 거겠지. 어찌 되었건 내 예상보다 지출이 많아진 상황인 건 변함없다. 학교에 보내는 게 이리도 큰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집에서 공부를...”
아니 그건 절대 안 될 일이다. 나는 그렇게 되뇌며 머리를 휘저었다. 최근 들어서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 입 밖으로 나와 버릴 때가 많아졌다. 니나가 들으면 안 되는데...
“후우...”
다행히 니나는 방에서 꿈나라에 빠진 채다. 내가 욕실에서 목욕을 하고 나온 직후에 잠들어버렸으니 얼마나 졸렸을지 예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마 이대로 아침까지는 깨어나지 않겠지.
잠든 아이의 얼굴은 언제 봐도 기분이 좋다. 세상근심이 전혀 없다는 듯한 편안한 얼굴로 얕은 숨소리를 내뱉으며 몸을 뉘인 그 모습은, 내게 안도와 함께 피로를 풀어주는 약이 되어있었다. 비록 함께하는 시간은 너무나 적지만, 혼자 기특하게 스스로 해내는 모습을 보면 대견스럽기까지 하다. 어른의 세계를 너무나 빨리 알아버리는 것 같은 감도 들지만, 철이란 건 빨리 들면 들수록 좋다. 그럼 적어도 나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거나 하지 않을 테니까.
“좋은 꿈 꾸렴.”
나는 자고 있는 니나를 다시 한 번 바라본 뒤 아침밥을 할 준비를 했다. 내일도 일찍 나가야 한다. 니나가 나를 다시 보는 건 깨어난 직후뿐일 것이다. 걔를 깨우고 나면 바로 출근해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건 모두 니나를 위해서다. 좀 더 나은 삶을 선사해주기 위해, 좀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 적어도 그때까진 의연하게 버텨주기를 바랄 수밖에.

 

“여기 커피 나왔습니다.”
나는 쟁반에 들린 종이 커피잔을 회의실 각 자리에 놓기 시작했다.
“아, 고맙네. 번번이 이런 일을 시켜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모두 최상의 상태에서 업무에 임해야하니까요.”
내게 겉치레로 감사를 표하는 이 남자가 바로 내가 속한 부서의 부장이다. 반쯤 벗겨진 머리에, 뚱뚱하고, 툭하면 땀을 흘리는, 겉으로 보면 엄청 이상한 사람이지만 수완 하나는 뛰어나 부장까지 빠르게 치고 올라온 사람이다. 이번 일이 잘 풀리고 나면 이사 자리까지 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자네 딸은 잘 지내고 있나?”
부장이 손에 든 커피를 마시며 말을 꺼냈다.
“네. 매우 의젓하게 자라서 저는 기쁩니다.”
“그거 참 다행이로군. 아직 어려서 걱정했다만 기우였던 모양이군. 뭐, 요새 아이들도 혼자 지내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까. 이 정도는 익숙해지면 안 되겠지. 나 때도 부모님이 밭에서 돌아오시길 기다리며 집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으니까.”
“아, 그렇군요.”
툭하면 옛날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부장의 버릇이다. 주로 자기 어린 시절을 말이다.
“아 그렇지. 자네 어디 좀 갔다 와야 할 것 같네.”
“어디를요?”
부장이 나를 출장 보내다니... 의외다.
“혹시 346프로덕션이라고 들어본 적 있나?”
“아아, 거기군요.”
그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온갖 연예계사업에 손을 뻗고 있는 연예매니지먼트계의 대지주. 거기에 몇 년 전에 아이돌 사업까지 손을 뻗어 대성공한 이른바 거대 문어발 기업이다. 하지만 그런 기업과 우리 쪽은 전혀 관련 없는 곳일 텐데?
“가서 뭘 하면 되는 거죠?”
“이번에 내가 그쪽에 한 가지 아이템을 제안했거든. 우리로서도 이번에 새로 도전해보는건데 꽤 반응이 좋아서 자료를 더 보내달라는 거야. 물론 흔쾌히 받아들였고.”
“하지만 그런 건 이메일로 보내는 편이 빠를 텐데요?”
“아, 뭘 모르는구먼. 원래 영업이란 건 말이야 직접 발로 뛰면서, 얼굴을 맞대면서 대화하고, 최대한 이익을 끌어내는 거라고. 그런 것도 모르면서 잘도 우리 회사에 다니려고 한다? 너.”
“죄송합니다.”
지금은 이렇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그게 사회생활이라는 거니까.
“뭐 됐어. 약속시간은 모레 정오야. 그때까지 이 서류를 잘 숙지하고 최대한 네 능력을 발휘해보도록.”
“알겠습니다.”
요컨대 나한테 그 발로 뛰는 영업을 시킬 생각인 것이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판다는 일을 아직 해본 적이 없어서 솔직히 짐이 무겁고 무섭다. 하지만 이 상황에선 절대 일을 거절할 수 없다. 특히 이 사람이 시킨 일을. 나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부장이 건네준 서류를 받아들였다. 생각보다 두껍다.
“잘 숙지하도록. 이번 일만 잘 풀린다면 그동안 까먹은 연차를 다 쓸 수 있도록 해주겠네. 물론 승진추천서도 써주고. 그리고 모레 영업이 끝나면 바로 퇴근해도 좋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의 말 중 가장 반가운 소리다. 지금까지 야근의 일상이었던 나날이 하루정도는 해방되는 것이다. 그 뒤에 밀린 연차까지. 완전히 파격적인 제안이다. 물론 어깨에 내려진 짐을 덜어내기에는 부족하지만, 잘만 해낸다면 니나와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성공해야한다. 우리 모두를 위해.
라고는 말했지만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
“으으...”
책상에 앉아 계속 서류를 읽어보고 관련 자료를 찾아봐도 어떤 식으로 홍보해야할지 감이 안 잡힌다. 서류의 내용은 간단히 말하자면 무대구성과 연출이었다. 최근에 새로운 길의 시작이라고 몇몇 무대를 기획하긴 했지만 그것도 몇 달 전 이야기다. 아직 경험이 부족한 상태에서 갑자기 그런 큰 기획사에 홍보하고 팔라고 하다니... 부장이 진짜 자신있어하는건지 아니면 허풍을 떠는 건지 지금와선 모르겠다. 수완이 좋다고 했던 평가는 취소해야할까?
“일단 진정하자.”
안 된다. 이런 잡생각만 하다가는 제대로 된 방법을 놓치기 십상이다. 일단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정하는 거다. 일단 뭐가 어떻게 되었건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나는 그저 내가 해야할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하지만 역시나 맡겨진 일은 일이고 잔업은 잔업이다. 일부러 야근을 시키고 싶어서 그런지 몰라도 들어오는 일의 양이 너무나 많다. 그건 다른 사원들도 마찬가지지만 자정이 가까워지면서까지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은 거의 나 밖에 없다. 정시퇴근이 가능한 사람은 부장이상이나 그들의 눈에 쏙 든 사람뿐이다. 나머지는 뭐냐고? 그냥 야근좀비다 좀비.
“다녀왔어.”
“안녕히 쳐다녀오셨어요!”
역시 니나는 나를 반겨주기 위해 깨어있다. 이렇게까지 늦게 기다려 줄 사람은 이 아이 밖에 없다.
“니나, 역시 일어나있구나. 졸리면 먼저 자도 되는데.”
“괜찮아요! 니나, 엄마를 꼭 보고 싶어서 잠이 오지 않아요!”
“흐응~ 그럼 이 졸린 눈은 누굴까?”
나는 그렇게 말하며 니나의 볼을 양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니나는 부에거리는 소리를 내며 당황한 듯 했지만 이내 웃으면서 장난을 받아주었다. 그리고 내게도 똑같이 해주기 위해 팔을 쭉 뻗었지만 역시 닿지 않는다.
“치사해요! 엄마만 팔이 길어요!”
“네가 어른이 되면 닿을지도 모르지?”
“음... 그럼 니나 빨리 커서 엄마 볼 부비부비 할래요!”
“그래? 그거 기대하고 있어야겠는걸!”
나는 장난스레 말을 맞받아치며 거실로 들어섰다. 식탁엔 저녁이라고 생각되는 빈 편의점도시락이 있었고 바닥엔 스케치북에 그려진 그림들이 즐비했다. 하나같이 풍경화이거나 어떤 사람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역시 아이들은 어지럽히는데는 선수다. 니나는 그런 것 생각도 하지 않을 테지만.
“아, 그거!”
니나가 갑자기 소리치며 그림 하나를 가리켰다. 토끼이거나 기린같이 생긴 동물과 사람 세 명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음... 잘 그렸구나. 뭘 그린거니?”
내가 그림을 들고 물어보자 니나는 눈을 반짝이며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가리키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음... 이건 토끼구요!”
역시 토끼다.
“이건 니나! 그리고 왼쪽은 아빠, 오른쪽은 엄마! 우리 모두 동물원에 쳐놀러간거에요!”
“동물원이구나...”
“니나도 동물원 가보고 싶어요! 동물원 한 번도 가본 적 없어요! 엄마랑 아빠랑 같이 동물원 가서 귀여운 동물들을 쳐보는거에요!”
“응...”
뭘까 이 기분은.
“근데 아빠 외국 나가서 못 돌아오시고, 엄마도 열라게 바빠서 못가는거에요. 니나, 모두랑 같이 가고 싶은데...”
그 한마디에 나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순간 머리회전이 멈추며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응, 그렇구나... 다 같이 가고 싶은 거구나...”
겨우겨우 짜낸 말은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곱씹으면서 니나가 원하는 게 뭔지 점점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네! 니나, 동물원에 다 같이 가고 싶어요! 그럼 엄마랑 아빠랑 다시 사이좋게 지낼 수 있고, 니나랑 놀아주고, 니나 이제 쓸쓸하지 않은거에요!”
아아, 그렇다.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니나는 의연하게 지낸 게 아니다. 외롭지만 내 앞에서는 꾹 참고 웃음을 보인 것이었다. 그래야 내가 걱정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야 내가 다시 슬픈 얼굴을 보이지 않을 테니까. 니나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꾹 참고 있었다. 이렇게 작고 어린 아이한테 나는, 우리는 너무나 무거운 짐을 이게 해버렸다. 조금만 생각하면 알만한 일이었을 텐데...
“엄마? 왜 쳐우는겁니까?”
“우는 거 아냐...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그래...”
내가 생각해도 참 구차한 변명이다.
“그럼 큰일입니다! 니나, 티슈 가져올게요!”
그럼에도 니나는 진심으로 날 걱정해주며 티슈통을 눈앞에 가져왔다. 나는 사양 않고 티슈를 한 장 뽑아 눈가를 닦았다. 정말 꼴불견이다, 나란 사람은... 다시는 니나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기로 다짐했었는데...

하지만 알고 있다. 그 소원은 다시는 이루지 못하는 원망이라는 것을.

“니나.”
내가 꼴사납게 울어버린 뒤로 30분 정도가 지났다. 니나가 그린 그림은 이미 눈물범벅이 되어버렸지만 아직 온전하게 형체는 남아있었다. 크레파스의 힘은 이리도 굉장하구나라고 괜스레 생각되어버릴 정도로.
“왜요?”
“엄마, 이번 일만 끝나면 휴가를 얻을 수 있어. 그럼 3주 정도는 쉴 수 있을 거야. 그때 동물원에 갈래?”
“다 같이 가는 거에요?”
“아빠는 외국에 있어서 무리지만 엄마랑은 같이 갈 수 있어. 재밌게 놀고 아빠한테 사진을 보내주자. 우리 잘 지내고 있어요. 라고 말이야.”
“네! 아빠가 없는 건 아쉽지만, 엄마가 놀아줄 수 있으니까 괜찮아요!”
니나는 엄청 기뻐하는 표정을 지으며 동물원 동물원 노래를 불렀다. 어지간히도 기쁜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니나의 미소를 본지 얼마나 지났던 걸까? 지금까지 너무 바쁘게 보내와서 가물가물해졌다. 원래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이제 이 미소를 잃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나의 목표에만 치중해서 니나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이미 늦었지만 말이다. 이혼 때문에 전 회사에서 반 강제적으로 퇴직당하고 여기로 옮겼을 땐 이 정도로 블랙기업일 줄은 꿈에도 몰랐고 상사와의 관계도 별로 좋지 않지만, 지금 그만둬버리면 다음 직장을 구하기가 매우 힘들어진다. 어쨌든 1년도 안 해보고 퇴사하는 것이니 인사에는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쳐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딱 1년하고 그만두는 것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니고...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 그 의문을 풀 열쇠는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안녕하세요, 전 이런 사람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치하라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서로 명함을 교환하며 나는 지금부터 상대해야 할 상대를 바라보았다. 나랑 거의 또래로 보일 정도로 젊은 사람이었지만 뭐랄까... 덜렁대는 끼도 있지만, 오랫동안 이 일을 해왔다는 관록이 보였다. 젊은 나이에 이 정도 오오라라니 정말 대단하다. 이런 사람을 오늘 내가 상대해야 하는 건가?
“에, 그러니까... 프로듀서 일을 하시는군요.”
“아, 예.”
“프로듀서는 어떤 일을 하는 거죠?”
“아이돌들의 스케줄을 짜고 관리하는 일이 주된 업무입니다. 그 밖에 각 아이돌들의 건강 같은 걸 체크하거나 일을 잘 할 수 있게끔 감독하기도 하고요. 사실 감독이래 봤자 서로 잡담이나 하는 거지만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실없는 웃음을 내었다. 저런 인상이라면 누구라도 허물없이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역시 힘들 거라 생각하는데. 정말 대단한 일을 하시네요.”
“아닙니다. 그리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물론 일이 힘들 때도 있지만 제 노력이 아이돌들과 팬들의 웃음을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힘이 납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원천이기도 하고요.”
이번에는 자랑스러운 표정을 내는 이 사람. 말은 그렇게 하지만 진심으로 일을 생각하면서 프로듀서로서의 자긍심도 가지고 있다. 아마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열정적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그렇게 확신한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요?”
“그렇군요. 그럼 서류를 보여주세요.”
지금까지의 여유로운 표정은 사라지고 이제 진지하게 임한다는 듯이 눈이 날카로워졌다. 나는 이 눈빛을 이기고 계약을 따내야 한다. 니나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역시 영업이란 걸 너무 만만하게 본 것 같다. 단순한 외주 일이고 이 정도 준비를 했다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게 너무나 안일했다. 온갖 요소에서 파고들며 의견을 말하거나 수정할 수 있는지 물어보는 등 치밀하고 계산하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하면 무대가 단조롭다느니, 아이돌들이 더욱 돋보이게끔 부탁한다느니, 예산과 안전문제 등을 찝어서 물어보는 건 그나마 약과다. 이런 허점투성이 서류도 잘도 지금까지 거래를 해왔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속으로 탄식을 아끼지 않았다. 내 능력 문제라고 부장은 다그치겠지만 그럴 거면 초짜한테 시키는 게 아니다.
"후우..."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와 버렸다.
"괜찮으신가요?"
이런, 걱정을 하게 해버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일단 말씀해주신 건들은 제대로 따져보겠습니다. 저희로서도 본 기획을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거든요. 완벽하게 할 수 있다면야 환영이죠."
"그렇군요.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로서도 이번 기획은 기대하고 있거든요."
"네, 그런데 이번 무대에 설 아이돌이 혹시 누구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서류에는 어떤 사람이 무대에 설지 쓰여 있지 않았다. 원래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긴 했지만 확신이 안 서기에 잠시 미뤄둔 것이다. 여기에 담당자가 있으니 조금 쉴 겸해서 물어봐도 괜찮겠지.
"음... 사실 이 무대에는 유명한 아이돌이 서진 않습니다. 굳이 얘기하자면 이번에 나올 신인들이 설 무대죠."
"데뷔 무대이군요."
"그렇습니다. 게다가 제가 첫 번째로 맡게 된 아이돌들이 나오는 무대입니다."
"네?"
의외다. 분명 그쪽 세계에서 몇 년을 구른 줄 알았는데, 이 사람도 신입이었을 줄이야...
"왜 그렇게 놀라시죠?"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첫 아이돌이라니 꽤 부담스러우셨겠네요."
"부담... 가졌을 수도 있겠네요. 저희 회사는 위에서 라인을 어느 정도 제시하는 걸 제외하면 모든 건 담당 프로듀서 마음대로거든요. 그래서 한 사람이 가진 권한과 책임이 상당하죠. 저도 그 중 하나지만요."
그의 눈은 어느새 옛날 일을 돌아보는 것 같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자신이 처음으로 이 일을 시작했던 순간일 것이다.
"처음엔 저도 반신반의했죠. 갑자기 이번에 들어오는 신인들을 육성하라는 일을 맡게 되었으니까요. 게다가 그 신인들은 아직 어린 소녀들이에요. 막막했죠, 참. 여자랑 제대로 대화도 나눠보지 못했던 저에게 그 아이들을 이끌라는 말이었으니..."
"그거 큰일이었겠네요."
"네, 큰일이죠."
그는 잠시 쓴웃음을 입가에 띄었다.
"하지만 그 아이들과 대화하며, 레슨을 시키고, 그 와중에도 힘든 내색 없이 척척 해나가는 모습을 보니 저도 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저 하늘의 별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제가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신입이지만 저도 한 사람의 프로듀서입니다. 그 자격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전 뭐든지 할 겁니다. 그렇기에 이번 기획도 철저히 하고 싶고요. 뭐니 뭐니 해도 데뷔 무대잖습니까?"
“자격...”
“네. 제가 그 아이들이 걸어야 할 길을 만들고 함께 그 길을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이죠. 저는 뒤에서 지켜봄과 동시에 옆에 나란히 서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노력해야하지만요.”
가식 없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마쳤다. 나는 그것에 대해 따로 말할 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열정에 대한 감탄만 나올 뿐이었다. 그가 담당하는 아이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사람일 것이다. 이런 열정 가득한 프로듀서를 옆에 두고 있으니 말이다. 왠지 모르게 부럽기까지 하다. 나도 예전엔 저런 사람이 있었... 아니, 생각하지 말자.
“정말 그 일을 사랑하시네요.”
그래도 만약 그에 대해 한마디로 묘사하자면 이런 표현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아, 아닙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저는 한참 모자라거든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앞에 놓여있던 서류를 들어 올렸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2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