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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쾌지수 높은 어느 여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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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16, 2017 20:37에 작성됨.

인생은 끔찍한 법이다. 구체적으로는 싱크대 구석에 떨어진 젓가락만큼.
이미 세 짝이 넘는 젓가락을 잡아먹은 싱크대 사이의 틈새를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섞어 바라보았다. 물론, 나는 이미 수년간에 걸친 풍부한 경험에 의해 여기 떨어진 젓가락은 구제의 길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알면서도 포기 할 수 없는 게 있는 법이다. 틈새에 집게를 집어넣고 장님 코끼리 만지듯 조심스레 더듬어 나간다. 한참을 낑낑대던 나는 급기야 열 받아서 집게를 뒤로 집어 던져 버렸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저절로 이마에 손이 올라갔다. 젠장. 누나 돌아오면 또 혼나겠네.

때는 여름. 아무리 쨍쨍한 햇살이 과실을 익게 만든다지만 그게 나의 불쾌감에 위안이 되지는 못했다. 별거 아닌 것에 짜증 내기에는 그야말로 최적의 시기다. 이런 때면 그야말로 완벽 초인이라고 생각되는 우리 누나, 미나미조차도 공연히 짜증을 내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 젓가락을 더 꺼내고 싶은 거고.
하지만 안되겠다. 기실 저기에 젓가락이 떨어질 때부터 안될 거란 건 알고 있었다. 이걸로 짝짝이인 젓가락이 벌써 두 쌍이 되는구나. 하하. 사이좋게 지내렴. 빌어먹을.
...더워.
가뜩이나 더운날 싱크대랑 씨름했더니 이젠 짜증 낼 기력도 남지 않았다. 등에 착 달라붙은 속옷은 형용하기 힘든 불쾌감을 선사한다. 에어컨 켜버릴까. 아냐. 집에 혼자 있는데 켜는 것도 별로 좋진 않은데.
멍하니 누워서, 조금이라도 더 시원한 곳을 찾아 데굴데굴 굴렀다. 결국 도달한 곳은 베란다 근처. 치밀어오르는 불쾌감과는 정반대되는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은 그 색만으로도 공간감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저 하늘의 색만큼만 시원했으면 소원이 없겠다. 근데 나 왜 이러고 있지. 왜 이따구로 살고 있지. 인생 참 구질구질하다.
젓가락 하나에서 시작된 생각은 급기야 인생에 대한 푸념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물론 시답잖은 생각이 인생에 대한 푸념으로까지 번지는 이유는 나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냥 사는 게 재미가 없어서다. 진지하게도 되는 일이 없으니 이런데에도 짜증을 내는 거지 별거 있나.

"하아..."

잘난 우리 누님은 사는 게 좀 더 재밌겠지. 아이돌도 하고. 친구도 잔뜩 사귀고. 입버릇처럼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이 자신의 보람이라고 말하니까.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누나만 못하다. 누나가 도전해서 척 척 해내는 일들도 실패하기 일쑤고, 좀 비슷하게 해 보려고 해도 몇 배는 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래서야 포기할 수밖에 없잖아.
...음. 기분 나쁜 소리밖에 안 나오네. 일단 나가자. 이런 것만 생각하는 것도 좋지 않아. 외출복을 대충 챙겨입고 방 밖으로 나간다. 때는 방학. 시간은 점심 무렵. 집에는 아무도 없다. 알량한 자유를 만끽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래 봐야 남는 건 찝찝한 기분뿐이다. 그럴 바엔 나가서 뭐라도 하는게 낫지.
나가서 뭔가 시원한 거라도 마시자고.

 

"죄송합니다 손님, 실내 좌석은 다른 분들이 다 앉아 계셔서..."

인간의 자아는 발달과정에서 세계의 침략을 받는다. 자신 외에는 인지하지 못하던 인간의 자아는 세계의 침략을 받고서야 세계에는 자신과 같은 자아를 가진 사람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맘대로 되는 일 하나도 없다 이거다.
나는 돈을 대충 올려놓고 밀크셰이크를 들고 카페를 나섰다. 카페의 문은 단절된 양극단을 잇는 통로다. 문을 열자마자 카페에 들어온 뒤에 잠깐 잊고 있던 타오르는 열기가 내 몸을 강타한다. 으음. 좋아. 끔찍해. 야외 좌석에 앉아 밀크셰이크를 한 모금 빨아먹으니 그래도 한결 낫긴 하다만.
이거 다 마시면 어딜 갈까. 애초에 갈 곳도 없는데. 편의점에서 시간이나 때울까. 순간 스쳐 간 멍청한 생각에 자괴감이 들었다. 그건 어디로 가야 하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잖아. 난 뭘 하고 있는 거지.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고 있잖아. 하지만 정말 어디로 가지. 애초에 목적지도 없었는걸.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채, 멍하니 폰 메신저를 켜서 친구놈들이 뭘 하고 있는지 본다. 오늘도 이놈의 친구놈들은 머릿속에 든 거 하나 없이 서로의 디스를 일삼고 있었다. 정말이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더위 때문에 느끼는 답답함에 박차를 가해주는 훈훈한 친구들이었다.
응. 오늘은 너네랑 놀기 싫다.
고개를 들어 길거리의 전광판을 보니 미시로 프로덕션의 아이돌 홍보 영상이 뜨고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새하얀 군복풍 무대의상을 입은 누나도 잠시 스쳐 지나간다. 동생 된 입장에서 보자면야 누나가 좀 더 강하게 좀 더 상냥하게 된다면 어쩌고 하는 대사를 진지하게 하면 웃음만 나올 뿐이지만 웬걸, 저거 엄청 잘 팔리는 모양이다. 정말이야? 정말 그런 아이돌로 괜찮은 거야?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화면이 바뀐다. 마치 여름과 물이라는 개념의 튀기를 형상화해 놓은듯한 활기찬 목소리가 들린다. 그에 상응하는 보기만 해도 시원한 단발이 찰랑거린다. 내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아이돌인 혼다 미오다.
혼다 미오라는 아이돌은 아이돌치고는 어딘가 친근한 인상이 든다. 어느 학교건 꼭 그런 타입 한 명 있을 것 같은 그런. 당장에라도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그리고 그 손을 잡으면 같이 파란만장한 청춘을 영위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꿈 깨셔. 엄연히 미오쨩은 아이돌이라고. 이건 순전히 판타지야. 나도 참 멍청하지. 쓸모없는 꿈이나 꾸고 있고.
하지만 미오쨩이랑 친구면 정말 재밌을 것 같은데. 뭘 해도 재미없는 나와는 달리 뭐든지 진심으로 즐기고 있잖아. 그래. 내가 원하던 건 이런 게 아니었던것 같아. 한낮에 젓가락이 빠지는 궁상맞은 하루하루가 아니었어.
후후. 새삼 생각하니 인생 참 쓰레기 같은걸.

"어? 닛타 미나미 화보집이다!"

내가 정신을 차린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들어간 편의점에서 왠 교복 입은 꼬꼬마 중딩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을때였다.

"크으... 이야 개꼴!"

편의점의 문을 열자마자 들린 감탄사와 그 끝에 걸친 단어에 살짝 눈썹이 움칠했다. 하지만 반사적으로 참아냈다. 아이돌이라는 직종은 다들 어느 정도 환상을 파는 직업이다. 그 환상은 당연히 성적 판타지도 포함한다.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아이돌인 이상 성적 어필이 없다고는 말 못 하는 것이다. 더구나 내 누나, 닛타 미나미는 프로덕션이 정한 노선 자체가 (맘엔 안든다만) 아예 그쪽이다. 저정도로 내가 화낸다면 그 노선으로 일하고 있는 누나의 노력 자체를 부정하는 게 되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차마 화낼 수가 없었다. 긍정적으로 봐주자면 누나 예쁘다는 칭찬 아닌가.
그래, 저 중딩들이 누나의 옷 아래를 탐구하기 시작하지만 않았어도 화내지 않았을 것이다. 몸매에 대한 평론으로 시작된 중학생들의 음담패설은 사춘기 남자애들 특유의 저속함으로 에스컬레이트 되어가고, 그 발언중에는 친족으로서는 명백하게 넘겨듣기 힘든 발언들도 있었다. 등골이 차게 식는 기분이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덥다고 푸념했던 게 바보 같을 지경이다. 그렇게 에스컬레이트된 발언이 인체에 대한 감상을 넘어 실제적인 행위에 대한 묘사에 들어갈 때쯤 내 인내심도 바닥이 나 버렸다.

"ㅇ..."

"잡지 안 살 거면 헛소리 적당히 하고 비켜, 등신들아."

각종 폭력적인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은 건 순전히 그 순간에 파고든 한 소년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입을 열기 직전에 음담패설을 하는 중학생 사이에 끼어든 그 소년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대놓고 그 중학생들이 들고 있던 잡지를 뺏어갔다. 정말로 불쾌하다는 듯이.

"혼다 이 새끼...! 너 많이 컸다? 한판 뜰래?"

"하시던가. 시험 망해서 방학에 보충하는 게 뭐 자랑이라고 교복 입고 헛소리 중이냐? 교복 입고 쌈박질했다고 선생들 귀에 들어가면 참 좋겠다?"

"칫... 뭣도 없는 놈이 누나 아이돌 한다고 유세는 겁나 떠네..."

잠시동안의 유치한 대립이 지나가고, 중학생 패거리는 고개를 휙 돌리며 편의점 밖으로 나갔다. 그래도 마음속에서는 지기 싫었는지 혼다라고 불린 소년에게 악담 하나씩을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악담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던 소년은 정말 질린다는 듯이 자신의 손에 들린 잡지를 보고 혼잣말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헛소리 한다고 화나서 한마디 하는 게 유세냐, 썩을 놈들."

어째 설까. 그 말은 마치 한숨처럼 들렸다.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무슨 표정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잡지를 뺏었던 그 자세 그대로 서 있는걸 보면 여러모로 복잡한 기분인 모양이었다. 무슨 말을 해 야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소년이 고개를 돌려서 나를 보았다.

"뭐해요. 언제까지 거기에 서 있을 셈이에요?"

 

요약. 소년은 혼다라는 성씨에서 알 수 있듯 미오쨩의 동생이다. 그리고 나와 소년은 한번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별로 좋게 만난 건 아니었지만.)소년이 방학이기도 하고 해서 잉여 대다 보니(이 대목에서 어딘가 동질감을 느꼈다) 내가 보였다. 별로 친한 것도 아니라 무시하려고 했는데 저기서 섹드립을 쳐대는 동창들이 보였다. 그리고 분노로 손을 떠는 내가 보였다.

"운 좋은 줄 알아요. 내가 못 봤으면 진짜로 주먹질하고 싸웠을 거 아냐. 중딩하고."

"...미안하다."

그래서 소년은 속으로 욕지기하면서 끼어들었다. 싸움 나는 건 사양이었으니.

"그런데 그렇게 대놓고 싸워도 되는 거야?"

"걱정해 주는거에요? 됐어요. 어차피 평소에도 시비 걸고 싶은 놈들이었어."

그나저나 이 소년, 전에도 느꼈지만 제법 건방지다. 활기차고 넉살 좋은 미오쨩의 동생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야. 그야 나도 누나하고 상당히 다르니 그런 지적을 하면 할 말이야 없다만 이래서야 누가 소개해 주기 전까진 미오쨩 동생이라고 말해도 모르지 싶네.
...돌려 말했지만 정이 안 가는 성격이란 거다. 예컨대.

"뭐 하여간, 그런 소리 들을 때 화나는 건 충분히 이해하니까 기분 풀어요."

"너야말로 걱정해 주는 거냐?"

"뭐, 똑같은 소리 들어 본 적 있어서."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그냥 질풍노도의 사춘기인 건가.

"그래서, 왜 나온 거야? 할 일 없으면 그냥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도 괜찮을 텐데."

"영화나 보려고 왔어요. 집에 있어 봐야 할 일도 없으니까."

"그래? 나도 영화나 볼까. 346프로에서 내놓은 좀비 영화가 좀 관심 가던데."

"보지 마요. 그거 이상해."

"응? 그게 무슨 말이야?"

"그거 잘 나가다가 갑자기 천사 나와요. 말이 되나 그게."

"게엑."

"그것보단 이거 어때요. '무진합체 키사라기 제 2장 ~Harushutein of revenge~'. 이게 차라리 낫겠네."

"엑. 로봇물? 너 그런 거 보냐?"

"왜요. 나이 가지고 뭐라 하려고?"

"아니 그건 아닌데..."

녀석과 대화를 하다 보니 시선 처리하기 난감해서 공연히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전광판에서는 미오쨩이 이쪽을 보면서 어린이 여러분 안녕- 하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미오쨩이 참여하는 작품의 광고인 모양이다. 하긴, 아이돌을 더빙에 쓰는 경우는 드물지 않지.
안 풀리는 세상에 대한 답답함을 담아 나도 모르게 그 미오쨩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기분나빠."

"어, 응?"

소년은 마치 비린내 풍기는 생선을 본 듯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렇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런데 왜 이쪽을 보고 있니.

"우와, 아이돌 보고 진짜로 헤벌리는 사람 처음 봤어."

"하, 할 수도 있지..."

"그 속눈썹만 긴 선머슴이 뭐가 이쁘다고 그러는지 몰라."

"너, 너는 누나라서 잘 모르는 거야!"

"헤에-"

내가 얼마나 역설을 하건 녀석은 시큰둥한 표정일 뿐이었다. 이해는 간다. 이해는 간다만...

"하여간 너희 누나 같은 애랑 같이 있으면 하루하루가 즐거울 것 같단 말이지..."

"꿈 깨셔, 누나가 밖에선 얼마나 잘났건 매일 끼고 살면 그냥 시끄러운 짐 덩이거든요?"

"더워서 갑갑해 죽겠는데 꿈 좀 꿔 볼 수도 있지."

"네이, 네이. 꿈은 밤에나 꾸시길."

...음. 역시 정이 안 가. 내가 지 누나 좋아한다고 하면 좀 좋아해 주면 어디가 덧나? 왜 저런 시니컬한 반응이야?

"아, 전화 왔네. 여보세요?"

그렇지만 영화는 결국 이 녀석이랑 같이 봐야 할듯하다. 혼자 영화관 가는 것에 대해 거부감 따윈 없었지만, 그렇다고 굳이 찢어져서 영화 볼 필요는 없었으니까. 녀석이 전화를 받는 사이 폰으로 검색을 해, 가까운 영화관의 상영 시간을 체크해 본다. 아까 말했던 좀비 영화는 유감스럽게도 이미 만원인듯하다. 어차피 못 보겠군.

"응? 긴급 상황? 그게 무슨 소리야."

무진합체 키사라기는 걸린 지 좀 시간이 지나서인지 자리가 꽤 비었다. 잘 됐군. 그런데 과연 이게 영화 내용이 괜찮을까... 아니, 그 이전에 영화를 본다고 기분이 나아지긴 할까.

"그렇게 인력이 없어? 기밀 유지? 중학생한테 하는 부탁으로는 바라는 게 많다?!"

어디 보자... '안녕히 풀봇코쨩 ~풀봇코 the movie~'...이건 취향이 아니니 패스하고... '신센구미 걸스'... 이거 재밌을래나? 잘 모르겠네.

"...하아. 저기."

한참 영화를 살펴보고 있는 와중에 소년이 한숨을 푹 쉬더니 나를 불렀다. 그리고 당장에라도 이를 갈듯한 표정으로,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며 나에게 말했다.

"우리 누나 보고 싶댔죠? 보러 갈래요?"

순간, 땀으로 질척이는 내 등줄기에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어, 동생! 지원군도 불러와 줬구나!"

"어쩌다 만났어."

"아, 안녕, 미, 미오쨩. 나 기억해?"

"그럼! 미나밍 동생이잖아!"

지, 진짜 미오쨩이다. 나는 한심하게도 면접하는 것 처럼 쭈뼛쭈뼛대며 미오쨩에게 대답했다.
소년 말하길, 갑자기 미오쨩이 전화를 했단다. 긴급 사태가 생겨서 와줬으면 한다고. 거기다 가능하면 기밀 유지가 되는 사람(기왕이면 어린)을 최대한 많이 데리고 와 줬으면 한다고. 그리고 소년은 나를 보았다. 나는 기밀 유지가 잘 되리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긴급 사태가 뭐냐고?

"그, 근데 미오쨩, 그거 사실이야? 카미야 나오하고 아마가세 토우마가 같이 풀봇코쨩 영화 이벤트에 참여하러 갔다고."

"응. 그치만 오해는 마! 두 사람은 취향이 맞아서 의기투합하고 있는 거지 절대로 그런 사이가 아냐!"

"그, 그래서 기밀 유지 어쩌고 했던 거구나..."

"그런데 아무래도... 거기 파파라치가 붙은 것 같아."

"파파라치?!"

놀라는 나를 보며 미오는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 같아서는 내가 인파에 끼어서 그 파파라치를 잡고 싶지만... 나는 이번에 무대를 진행해야 해. 거기다... 아이돌이 인파에 끼어 있으면 금방 들킬 거야. 프로듀서는 스태프들을 시켜서 파파라치를 잡겠다고 했지만, 이 이벤트 자체가 학생 대상이야. 어른들은 극히 드물어. 너무 눈에 띄지."

"그래서 동생을 부르셨수?"

"뭐, 잘 부탁해, 동생."

"귀찮게 부르기나 하고..."

"안할 거야?"

"여기까지 불러놓고 그런 소리하는 건 치사하지 않아? 그냥 불만일..."

"잘 해결되면 아이스크림 쿼터 하나."

"분부만 내리십쇼 누님."

내가 별말을 못하는 동안 이야기는 착착 진행되었다. 내가 유독 미오쨩 앞이라 말을 잘 못하는 것도 사실일 테지만, 역시 남매는 다르다. 이야기가 빨라. 미오쨩이 말해주는 정보를 동생은 간단하게 메모해간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서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저 건방진 녀석이 착착 말을 듣는 걸 보면.

"그리고 오빠도 잘 부탁해!"

오... 오빠. 오빠아... 생각보다 좋아하는 아이의 오빠라는 호칭은 파괴력이 셌구나. 거기다. 귀여움 만점의 윙크라니. 이건 정말...
헤헤, 헤헤. 갑자기 인생의 순풍이 부는 기분이야.

"이야, 헤벌레하는 표정 진짜 기분 나쁘네요."

"뭐 임마?"

미오쨩이랑 헤어져서 방청객석으로 입장한 이벤트 회장은 벌써 사람이 대부분 차 있었다. 여름의 열기에 어질한 상태에서 보면 흡사 우유 위에 떠다니는 시리얼 같다. 후후. 차가운 우유 마시고 싶은걸. 후덥지근한 날씨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외부였기에 안 그래도 더운데, 사람이 빼곡하게 차 있는걸 보니 당장에라도 졸도하고 싶은 기분이다.
하지만 해야겠지. 하기로 했으니까.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사람들의 틈새로 최대한 무대 가까이 접근했다. 무대에 대문짝만하게 적힌 이벤트의 타이틀이 보인다. '친구들 모여라! 안녕히 풀봇코쨩 ~풀봇코 the movie~ 개봉 기념 이벤트'. 으음. 애들 대상 이벤트인가 보네. 그나마 다행인 건 애들이 대부분일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다 큰 사람들도 제법 끼어 있다는 걸까. 아니, 되려 내 또래랑 어린애들이 비슷비슷한 비율이었다. 정말 괜찮은 걸까.
뭐 그건 됐고. 주변을 둘러 본다. 미오쨩이 말해준 파파라치를 찾아 둬야지.

"미오쨩 동생. 파파라치 인상착의가 어떻게 된다고?"

"작은 체구, 빵모자, 변장용으로 보이는 뿔테 안경. 토이 카메라."

"어디 보자... 여기 없나... 작은 체구라고 했지. 그래선지 잘 안 보이네."

"곤란하게 됐네요."

"...카미야 나오부터 찾자."

"네? 찾기 힘든 건 카미야 나오도..."

"다 방법이 있지."

순간 번뜩한 생각을 기반으로 폰을 켜서 트X터에 접속했다. 그리고...

"@Nao...Kamiya... 찾았다."

유명인사는 참 좋단 말이지. 3초만 서칭해도 다 나오고 말야. 자, 그럼 이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보실까.


Ω풀봇온Ω 카미야 나오 @Kamiya346 3분 전
맨 앞자리!!! 한중간!! 짱이야!

Ω풀봇온Ω 카미야 나오 @Kamiya346 4분 전
우와! 두근두근해!

Ω풀봇온Ω 카미야 나오 @Kamiya346 39분 전
풀봇코 이벤트장 도착!

Ω풀봇온Ω 카미야 나오 @Kamiya346 2시간 전
친구랑 만났어! 이제 풀봇코 이벤트장에 갈거야!


...고맙습니다. 카미야 나오씨. 숨기는 게 정말 요만큼도 없군요?

"찾았다."

"엑. 폰만 보고 있더니 언제 찾았대. 어디에요?"

"맨 앞줄 한중간. 좋은 자리도 잡았네. 바로 옆에 아마가세 토우마도 있어."

"으으... 잘 안 보이네요. 키 크고 싶다."

"이럴 땐 이 형한테 의지하라구?"

"이럴 때만 의지할게요."

후후. 이 자식 진짜 후후.
하여간 카미야 나오와 아마가세 토우마는 변장할 의지조차 없이 풀봇코 굿즈를 하나 들고 열띈 토론을 하고 있었다. 이야. 이거 파파라치가 아니어도 보이기만 하면 대번에 알겠는걸. 다른 건 몰라도 카미야 나오의 저 풍-성함이 눈에 안 띄길 바라는 건 과한 욕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돌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나도 위치만 특정되니 알아봤는걸.
그건 그렇고 파파라치 씨는 어디 있는 거지. 작은 체구라고 했었지. 눈에 안 띄다니. 파파라치로는 최적이구만. 자랑스러워 해도 돼.
앗,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파파라치 씨는 카미야 나오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복색이 수상해서 눈에 안 띌 수가 없다. 다만, 문제라면 역시 나에게서 너무 떨어져 있다는 점. 여기서부턴 인파를 헤쳐 나가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이렇게 떨어져서야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다.

"헤헹! 모두 이 풀봇코님을 보러 오셨나!"

그런 와중에 행사가 시작되고, 더더욱 자리를 옮기는 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파파라치는 남들 현장을 찍으려는 듯 폰을 들었지만, 그 폰은 정확히 카미야 나오를 향하고 있었다. 저 파파라치 은근 귀엽네. 파파라치 같은 거 하지 말고 본인이 아이돌 하지 그랬어.
이거 어떡한다.
그러는 동안 풀봇코의 적 보스 역할로 미오쨩이 나오고, 비장한 악역스러운 연기를 적당히 한다. 음. 이거 어쩌지. 현실에서는 진짜 악역이 있는데.

"풀봇코여, 나는 슬프다. 너라면 이 진리를 깨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으으으... 어쩐다...

"형, 어쩔 거에요?"

침착해. 침착해라 닛타. 분명 어떻게든 해 볼 수가...

"...넌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 볼 생각을 해 봐. 나는 뒤쪽으로 갔다가 인파 사이를 파고들게."

"네? 잠...?!"

한참을 고민하던 내 입에서 튀어나온 건 짜증 섞인 막무가내였다. 이렇게 된 이상 죽이 되건 밥이 되건 해 봐야지! 인파를 헤치고, 일단 뒤로 빠져나간다. 사람의 밀도가 좀 줄어드는 데까지 물러나서 중앙으로 파고들기 위해 힘으로 밀고 간다. 하지만 인파는 아무리 파고들어 봐도 이윽고 뒤로 튕기기만 했다.

"새치기는 안 좋은 거예요, 이상한 형아!"

그리고 날아드는 정론. 아, 아니. 안 좋은 거 몰라서 이러고 있냐 내가!
애들이 욕하는 걸 무시하고 조금 더 앞으로 진행해 본다. 애들까진 어떻게든 밀고 가지만 군데군데 섞여 있는 덩치 큰 어른들에 막힌다. 뭐, 뭐야, 어른은 극히 소수라고 하지 않았어? 왜 그 소수가 앞에 몰려 있는 건데? 이 인간들 자기 덩치 이용해서 앞자리 선점했구만?!

"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급히 사과하고 뒤로 빠져나와 다른 루트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이 인파 사이를 지나가 파파라치에게 도달하는 건 사실상 무리라고 봐도 될 정도로 될 정도로 아직도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파파라치가 앞을 보며 사진을 찍으니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한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날아라-! 풀봇코-! 명왕성까지!!"

뜬금없이 스테이지에서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풀봇코의 목소리와 함께, 스테이지 일부가 하늘 위로 뜨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거?!

"오너라! 풀봇코! 검은 별의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면!!"

그리고 스테이지 정반대 편의 특설 무대에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미오쨩이 응수중. 풀봇코의 스테이지가 미오쨩을 향해 날아간다.

"오오오오오오!"

그리고 관객들은 그걸 또 쫓아간다. 정리 안 되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돌려 이것이 무대 기믹이라는걸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쫓아 가...니까...?
서둘러 파파라치 쪽을 바라보았다. 인파의 뒷꽁무니를 카미야 나오와 아마가세 토우마가 달려나가고, 파파라치가 그 뒤를 쫓아간다.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 직감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실례합니다! 실례합니다!"

글자 그대로 인간의 파도를 헤치고 지나간다. 물론 사람들도 풀봇코를 따라가고 싶어 할 뿐 나에게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상관없다. 난 지금 파파라치를 잡아야 해!

"므흐...엣?!"

파파라치는 뒤늦게 나를 눈치채고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상황을 파악하고는 뒤로 물러서려 반대편을 돌아보니, 그곳에는 미오 동생이.

"잡았다!"

"으... !"

파파라치는 카메라를 꾹 쥔 채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다 비교적 한적한 반대편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나와 미오 동생이 뒤쫓지만, 아무래도 체구가 작은 파파라치가 더 날렵하게 빠져나간다.

"놓치면 안 돼!"

"이것이 풀봇코님의 진심이...다!"

떠오른 스테이지들에서 가상 전투가 한창인 와중에 우리와 파파라치는 계속해서 술래잡기한다. 이래서야 가상이 현실의 이중주니 뭐니 하는 헛소리를 하고 싶은 감정조차 들지 않는다. 어느새 파파라치는 완전히 인파에서 빠져나와 빠르게 무리의 바깥으로 이동한다. 안돼, 이대로 놓쳐서는 안 돼...!

"으윽- 그런가, 이것이 너희의 우정의 힘..."

공중에서 미오쨩이 과장스레 쓰러지는 시늉을 한다. 천천히 쓰러지며 몸을 이쪽으로 돌린다.
그리고 나를 향해 눈을 찡긋 해 보였다. 응...? 기분 탓인가...?

"으어어-"

그리고 쓰러지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파파라치를 향해 몸을 던졌다.

"으에?!"

나는 반사적으로 멈춘 파파라치가 도망가지 못하게 붙들고,

"하지만 길동무는 데리고 가겠어!"

파파라치를 미오쨩이 덮친다.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고, 세 명이서 사이좋게 굴러가 버린다. 셋이서 한 덩어리가 되어, 지진으로 굴러가는 통나무처럼 장절하게 구른다.

"아야야..."

"아야야야... 아, 잡았다, 이 파파라...치?"

고개를 들어 본 파파라치는 모자가 벗겨져 자신의 헤어스타일을 만천하에 뽐내는 중이었다. 얇고 기다란 그 트윈테일 헤어스타일은 몰라 볼 수가 없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어, 그, 그러니까... 여자애?

"으아?!"

"으으으... 이게 무슨 일이람... 미오쨩! 리액션이 너무 과격하지 않습니까!"

"어... 잠깐..."

미오쨩은 멍하니 파파라치 여자애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뭔가 있나?

"미오쨩, 아는 사람이야?"

"저, 혹시, 765 프로덕션의..."

"아, 저 알아 보시나요? 기쁘네요!"

여자애는 미오쨩이 자신을 알아봤다는 기쁨에, 미오쨩의 손을 잡고 눈을 빛내며 말했다.

"네! 제가 마츠다 아리사입니다!"

 

"마아아츠으으으다아아아아!!!"

듣자하니, 이 여자애도 아이돌이란것 같다. 그것도 제법 잘 나가는.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파파라치로보일거라고는생각도못했어요죄송합니다"

오늘은 마츠다 아리사의 오프날이었다. 그래서 평소대로 아이돌쨩들의 이벤트를(...평소대로?) 찾아다니는데 우연히 카미야 나오와 아마가세 토우마가 보였다.
아리사의 프라이드를 걸고, 그걸 놓칠 수는 없었다. 뒤를 밟았다.

"맹세코직접두사람을찍진않았어요그치만용서해주세요용서해주세요"

평소에 몸을 숨기는 건 자신이 있는 아리사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당당하게 두 사람을 따라갔지만, 문제는 카메라. 카메라를 들고 길거리 돌아다니는 사람이 흔하진 않다는 게 아리사의 패착이었다.

"아하하... 죄송합니다. 우리 아리사가 그쪽 프로덕션에 폐를 끼쳤네요. 부디..."

"아뇨, 괜찮습니다. 결국 오해였고, 저희도 공식적인 대응은 원하지 않으니..."

그리고 그 결과, 보시다시피.
프로듀서끼리 서로 꾸벅꾸벅 인사를 하며 양해를 구하고 있었다. 음. 사회인이란 힘든 거구나. 765쪽 프로듀서는 나이도 그리 안 많은 우리 누나뻘인거 같은데 말이지.
참고로, 폰 카메라도 있는데 왜 카메라를 들고 다녔냐는 질문에 아리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대로 된 카메라로 무대를 찍는 게 아이돌쨩들에 대한 예의잖습니까!"

...참 당당하기도 하셔라.

"...하여간, 오늘은 고마웠어, 오빠!"

"으, 으응..."

모든게 대충-대충인 이유는 프로듀서들은 여전히 뒤처리 중이어서다- 해결된 뒤, 미오쨩이 내 손을 잡고 웃어 보인다. 인파 사이에 끼어서 더워 죽을 뻔했지만 이 미소를 보니까 그런 고생들도 다 가치가 있었구나 싶다. 좋구마안... 헤헤. 헤헤헤.

"됐고, 누나. 얼른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러 가자. 나 더워."

"아, 그렇지! 그럼 조금만 기다려 봐! 나 옷 갈아입고 올게! 오빠도 같이 갈 거지?"

"으, 응!"

미오쨩은 그렇게 웃으며 스테이지 뒤로 사라졌다. 나와 미오 동생은 서로를 잠시 서로를 보다가, 피식하고 의자에 걸터앉아 버렸다.

"고생 많았어요."

"됐어. 나름 재밌었고."

그러고 보면 낮까지의 짜증이 어디 갔는지 모를 정도로 상쾌한 기분이었다. 오늘 정말 날 이긴 날인 모양이다. 이런 일도 다 일어나고.
별거 아닌 하루지만, 난 내일부터 오늘을 곱씹으며 즐거워할 것이란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자, 그럼 오늘이 끝나기 전까지만 이 기분을 만끽해 볼까...
삐빅.
...라고 생각하는 찰나에 문자가 왔다.

[동생, 또 젓가락 싱크대에 빠트렸지? 나중에 혼날 줄알아.]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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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글을 다 쓰면 제목 정하는게 가장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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