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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Next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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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16, 2017 19:43에 작성됨.

 
 어느새 가느다란 손가락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책을 읽다 보면 너무 집중한 나머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주변이 시끄러워져도 눈치채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독서가에겐 흔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시끄럽게 이야기를 나눠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인데 하물며 키보드 소리야 말할 것도 없다. 오히려 단조롭게 반복되는 낮은 소리는 백색 소음과 같은 작용을 한다고 하니 집중을 하는 데 더 도움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읽던 책에 푸른색의 압화로 만든 작은 책갈피를 꽂아놓고선 덮어버렸다. 아직 뒷이야기가 더 읽고 싶은 욕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아쉬움을 뒤로하고 옆에 놓여 있었던 가방에 혹여나 구겨지지는 않을까 고이 넣어두었다. 
 
 시계를 보니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바깥은 이미 어둑해진 지 오래였고 하루의 끝을 향해 느릿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역시 사무실에는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 다들 조용히 나를 두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아마 프로듀서 씨가 남아있기 때문이겠지. 만약 나 혼자서 책을 읽고 있었다면 방해를 해서라도 누군가 말을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누군가 말을 걸었다고 해도 평소처럼 시간이 이렇게 되어버렸냐며 허둥지둥 돌아갈 준비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은 기다려야 할 이유가 있었다. 독서는 그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아주 적당한 일이었을 뿐이다. 새삼 놀랐다. 내게 독서가 목적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목표를 위한 수단이 된다는 건 굉장히 놀랄 만한 일이었다.
 
 의외인 것은 프로듀서 씨 쪽이었다. 돌아갈 시간이 지나고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있는 걸 프로듀서 씨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납득시킬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정작 그 프로듀서 씨는 자신이 일에 빠져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컴퓨터의 화면을 글씨로 채워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 옆모습을 조용히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눈을 살짝 가릴 정도로 긴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헝클어져 있었고, 넥타이는 제대로 매고 다니는 걸 보기 힘들 정도였다. 실제 나이는 프로듀서라는 직업치고는 제법 어린 편이라고 들었다. 반면에 항상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라 보기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듣곤 하는 프로듀서 씨였지만, 이따금 이렇게 눈동자를 불태울 때면 마치 소년을 보는 듯했다. 분명 표정 탓이다. 평소의 모습은 이 업계에서 구를 대로 구른 노련한 베테랑의 모습이었지만, 여자라고 해도 믿을만한 가느다란 손과 호리호리한 체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눈빛이 프로듀서 씨 안에 잠들어 있는 소년을 증거하고 있었다. 
 
 프로듀서 씨는 노력파로 보이는 걸 싫어했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프로듀서 씨는 노력이라는 단어랑은 거리가 멀었다. 방탕하고, 휘몰아치는 바람 같고, 번뜩이는 천재성이 돋보이는 수완가라는 평가를 듣는 사람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프로듀서 씨가 마술사처럼 보였다. 어떤 일에도 만능이고, 문제가 일어나도 금방 수습해버리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하지만 모든 마술에 트릭이 존재하듯이 프로듀서 씨의 뒤에도 보이지 않는 노력들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프로듀서 씨는 그걸 남에게 보이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생색이 아니라 남에게 자신의 완벽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게 싫은 거다. 그 완벽주의는 결벽이라고 할 만했다.
 
 그래서 이런 무방비한 프로듀서 씨의 모습을 보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꼭 내가 아니더라도 프로듀서 씨와 같이 오랜 시간 동안 일한 사람들 중에서는 이런 뒷모습을 아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걸 프로듀서 씨의 앞에서 이야기하면 불같이 화를 냈기에 입에 담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다.
 
 "내 얼굴에 뭐라도 쓰여 있어?"
 
 갑작스러운 그 말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프로듀서 씨가 말을 한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어디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정도의 생각뿐이었다. 그야 그럴게, 프로듀서 씨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쓰여 있나 보지?"
 "네, 네...?"
 
 나는 얼빠진 소리를 내며 급하게 대답했다. 머리카락에 살짝 가려진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아니, 거의 보이지 않았다. 새삼스럽게도 눈을 가리는 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빤히 쳐다보고 있기에 내 얼굴에 아주 재미있는 소설이라도 누가 쓰고 간 줄 알았지."
 
 이번에는 프로듀서 씨의 말을 제대로 들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프로듀서 씨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그대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지만 사람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키면 뭐라고 변명할 말도 없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나도 정신이 없네, 참."
 
 기계적인 리듬의 키보드 소리가 멎었다. 프로듀서 씨는 내가 대답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듯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다시 새삼스럽게도 내가 자주 하던 말을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듣는 건 조금 색다른 기분이었다. 이쯤 되면 프로듀서 씨가 어떤 이유로 나를 떠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평소의 너의 모습이 이런데, 직접 겪어보니까 어때? 라던가.
 
 "다들 돌아간 거야? 우리만 두고?"
 
 프로듀서 씨는 황당하다는 듯 혀를 찼다.
 
 "...네. 그런 것 같네요."
 "거 참 매정한 사람들일세. 말 한마디도 없이. 적어도 수고하라든가 사무실 문은 잘 닫고 가라든가 하는 그런 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프로듀서 씨의 불평도 정당한 것이었지만 나는 언제나 그렇게 남들을 기다리게 하는 편이었기에 맞장구를 치며 프로듀서 씨를 변호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사기사와는 왜 아직도 안 간 거야? 곧 전철도 끊기잖아?"
 "그, 그게... 어쩌다 보니..."
 
 예상한 질문에 나는 고개를 숙이며 얼버무렸다.
 
 "결국, 세상 모르고 책만 읽던 아가씨를 내가 있으니 그냥 떠맡겨두고 다들 퇴근했다는 거네."
 
 고개를 숙여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사이로 슬쩍 프로듀서 씨를 올려다보니 말하는 것과 달리 그렇게 기분이 나빠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속셈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다른 볼 일이라도 있어? 아니면 지금 돌아갈 거야?"
 
 물론, 이제 와서 그냥 돌아갈 생각은 없었지만 어떻게 하면 프로듀서 씨를 납득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머뭇거리자 프로듀서 씨의 표정은 의문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면 프로듀서 씨의 얼굴에서 물음표를 읽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저... 그게... 저희 집까지 가는 노선은 이미 끊긴 것 같아서..."
 
 사실 어떤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럴듯해서 말하고 보았다.
 
 "그런가... 하긴 시간도 늦었으니까. 그런데 나 없었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어?"
 
 이것도 역시 프로듀서 씨의 생색은 아니었다. 프로듀서 씨의 성격이라면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나서 생색을 내기보다 제발 잘 좀 하라고 싫은 소리를 할 위인이었다.
 
 "그.. 그냥 사무소에서 아침까지 책을 읽는다던가..."
 "허."
 
 프로듀서 씨의 반응은 단어조차 되지 못하는 기가 찬 소리였지만 만약 내가 실제로 그런 상황에 부닥쳤다면 정말로 했을 법한 일이었다. 책을 읽느라 밤을 새워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뭐... 일단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데려다줄 테니까 갈 준비해."
 "...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준비를 할 것도 없었다. 이미 읽던 책은 가방에 넣어두었고 그저 소파 뒤쪽의 옷걸이에 걸어놓은 외투를 입으면 끝나는 일이었다. 일부러 느릿느릿 일어나며 프로듀서 씨 쪽을 슬쩍 살펴봤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컴퓨터를 끄고 저쪽에 던져둔 양복 재킷과 넥타이를 찾는 그의 모습은 유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싫으신가요?"
 "응?"
 
 나는 문득 생각하고 있던 걸 물어보았다.
 
 "넥타이라던가, 양복이라던가. 그렇게 싫으시다면 입지 않으시는게..."
 "아아."
 
 프로듀서 씨는 책상 아래로 굴러떨어진 검붉은 색 계통의 넥타이를 주워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원칙이던가, 뭐 그런 거라고 해서. 물론, 양복을 제대로 갖춰 입고 다녀야 한다는 규정 따위는 어디에도 없지만. 보기에 어쨌느니, 이미지가 어쨌느니, 망할 늙은이가..."
 
 프로듀서 씨의 대답은 점점 혼자만의 푸념으로 변해갔다. 사무소의 사장님은 고지식하고 고집스러운 사람이었다. 정론의 화신 같은 사람이라 하는 말이 틀리지도 않아서 성격이 자유롭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프로듀서 씨도 불평을 내쏟을 뿐 거역할 수는 없었다. 
 
 "멀뚱히 서 있지 말고 먼저 내려가 있어. 어떤 차인 지 알지?"
 
 프로듀서 씨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키를 꺼내 나에게 던졌다. 나는 제대로 받지 못하고 두 세 번이나 튕겨서 간신히 키를 떨어트리지 않을 수 있었다. 운동신경만큼은 정말 자신이 없다.
 
 "프로듀서 씨는요?"
 "일단 재킷좀 찾고. 전화해서 사무실 문 잠그는 방법 좀 알아 보고."
 
 다시 여기저기를 뒤적거리는 프로듀서 씨를 뒤로하고 나는 문을 나섰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려 밖으로 나오니 금세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빙하기처럼 추웠는데 지금은 날이 풀려 조금은 나아진 편이었다. 하지만 아직 물러갈 수 없다는 듯 자기주장을 하는 겨울이 마지막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충분히 두껍게 입은 옷 덕분에 춥지는 않았지만 뺨과 손에 불어닥치는 바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짐이 될 것만 같아서 두고 왔기에 장갑을 낄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팔짱을 끼듯 손을 감추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주차장에는 차가 몇 대 없었다. 업무용 밴 같은 것이 몇 대 주차되어 있었고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주인을 알 수 없는 차들을 제외하면 프로듀서 씨의 차밖에 없었다. 
 
 프로듀서 씨의 차는 유명한 메이커의 외제 차였다. 차에 대해서는 무지해서 모델이나 메이커의 위상 같은 건 몰랐지만 그런 나조차도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회사의 차였다. 프로듀서 씨는 물론 굉장히 돈을 많이 벌고 쌓아놓은 재산도 많다고 들었지만 프로듀서 씨의 차를 볼 때마다 약간의 위화감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프로듀서 씨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좋아서 타고 다닌다기 보다는 이미지 메이킹에 가까울 것이다.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을 굉장히 신경 쓰는 사람이니까. 허세라고는 할 수 없었다. 프로듀서 씨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었다.
 
 프로듀서 씨에게 받은 키의 버튼을 누르니 작은 전자음과 함께 덜컹하는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처음 봤을 때는 깜짝 놀라서 가슴을 쓸어내렸었지만 지금은 제법 익숙해졌다. 생각해보면 그다지 자랑스러워 할 일도 아닌 것 같지만 새로운 것들을 알아간다는 점은 좋다고 생각한다.
 
 왼쪽의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운전대가 있어서 깜짝 놀라 다시 문을 닫아버렸다. 그래, 외제 차였지. 보통 차는 오른쪽에 운전석이 있지만, 다른 나라는 왼쪽에 운전석이 있는 곳도 많다고 했다. 그래서 외제 차는 운전석이 왼쪽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혼자만 운전석이 반대쪽에 있는 차를 운전하면 불편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프로듀서 씨도 나름 익숙하기 때문인지 한 번도 불편한 기색을 보인 적은 없었다.
 
 다시 오른쪽 좌석인 조수석에 앉아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오래 지나지 않아 반대편 문이 열리고 프로듀서가 차에 탔다.
 
 "문도 안 닫아놓고 있었어? 그러다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네?"
 "여자 혼자 조수석에 타고 있는 걸 보고 누가... 아니, 됐다. 그냥 조심 좀 하고 다니라는 소리야."
 
 프로듀서 씨는 한숨을 쉬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이나 생각하다가 프로듀서 씨의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이런 시간에 주차장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프로듀서 씨도 그걸 알고있기 때문에 더는 말하지 않았던 거겠지.
 
 엔진이 울리는 낮은 소리가 들리고 차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동할때 주로 타게 되는 밴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의 편안함이라고 해야 할까. 푹신한 의자도 그렇지만 흔들림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내비게이션 쪽에 나타난 시간을 보니 11시 50분쯤이었다. 마음이 슬슬 다급해졌다. 말하면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할 텐데. 날짜가 지나기 전에 주는 게 맞을까? 아니면 차라리 날짜가 지난 후에? 그러면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 아니, 그런 게 큰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여전히 프로듀서 씨는 앞을 보며 운전하고 있었지만 말을 먼저 걸어왔다. 이럴 때마다 신기하기만 하다. 내가 그렇게 둔감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프로듀서 씨는 그렇게 항상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지도.
 
 "아, 아뇨. 아무것도..."
 
 망설이는 사이에도 시간은 조금씩 지나가고 있었다. 54분, 55분, 하고 시간이 흘러갈 때마다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맴돌기만 했다. 어떻게 하면 좋지, 부담스럽진 않을까?"
 
 "저, 프, 프로듀서 씨...?"
 "깜짝이야. 왜 그러는데."
 
 갑자기 큰 목소리를 내버려서 프로듀서 씨가 놀란 듯했지만 그런 것 치고는 프로듀서 씨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나는 가방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것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다지 특징도 없는, 어디에나 있는, 그런 평범한 것을.
 
 "바, 받아주시겠어요?"
 
 수제도 아닌, 아주 평범한 초콜릿이었다. 절대 부담스럽지 않도록. 그래서 차라리 날짜가 지나 15일이 되어버린 후에 건네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러면 초콜릿을 주는 의미 자체가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우정 초콜릿 같은 것도 있고, 회사의 동료들에게 돌리기도 하고, 요즘엔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도 많이 있었지만, 그래도 망설이게 되는 건 역시 프로듀서 씨를...
 
 "뭐야, 의외인데?"
 "네?"
 "사기사와는 발렌타인은 원래 성인의 축일이라던가, 선물을 주고받긴 하지만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 건 회사가 만들어낸 상술일 뿐이라던가, 그런 식으로 생각할 줄로만 알았거든."
 
 굳이 말하자면 틀린 인식은 아니었지만 초콜릿을 건넨 직후에 그런 식으로 보이는 건 역시 조금 싫은 기분이었다.
 
 "역시 프로듀서 씨는 초콜릿도 잔뜩 받으니까 그런 건가요?"
 
 왠지 조금 분해져서 그런 말을 해버렸다. 그렇게 무덤덤한 건가요, 라고 말할 뻔했지만 급하게 다시 삼켰다.
 
 "응? 아니, 오늘 처음인데?"
 "정말요?"
 
 이건 정말로 의외라고 생각했다. 프로듀서 씨 주변에는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으니까.
 
 "글쎄, 언제부터였더라. 저 사람한텐 줘봐야 별 소용도 없고. 감사하다는 말도 없고. 당연히 화이트데이 같은 것도 없고. 초콜릿을 주고서도 왠지 불편한 느낌, 이라는 모양이라 언제부턴가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게 되어버렸던데?"
 
 내가 말하기도 그렇지만 붙임성 없는 사람이었다. 프로듀서 씨의 경우에는 정말 필요에 의해서만 사람과 친밀해지는 것이라 나보다는 낫겠지만.
 
 역시 프로듀서는 겉옷 주머니에 초콜릿을 넣어두고선 다른 감상도, 감사하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은 12시가 넘어있었다. 그렇게 발렌타인은 끝이 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어. 내일은 휴일이니까 푹 쉬고."
 
 집 앞에 도착해서 나는 프로듀서 씨의 차에서 내렸다. 가볍게 손을 흔드는 프로듀서 씨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형언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었다. 어딘가 기쁘기도 하고, 시원섭섭하기도 하고, 아쉽고 안타깝기도 한, 초콜릿처럼 달콤쌉싸름한 그런 기분이었다.
 
  "사기사와."
 
 계단을 오르려다 뒤에서 들리는 프로듀서 씨의 목소리에 몸을 다시 돌렸다. 프로듀서 씨는 드물게도, 웃고 있었다.
 
 "고맙다."
 
 갑작스러운 프로듀서 씨의 말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사이 프로듀서 씨는 그대로 차를 돌려 사라져버렸다. 나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굳어버린 채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프로듀서 씨가 웃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고맙다... 인가요."
 
 나는 아까와는 다른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득한 채로 집의 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 어렸을 적에 정말 좋아하는 책을 두고 학교에 가야 해서 안달이 날 정도로 두근거렸던 마음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내일 일이 없다는 게 너무나 아쉽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이돌로서 한 걸음씩 걸어나가는 것처럼,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건 다음 한 페이지씩. 그날은 유독 잠이 오지 않았다.
 
 
 
-
 
 
정말 오랜만이네요. 바쁘기도 했고, 이래저래 글 쓰는걸 아예 손에서 놔버렸었는데, 이걸로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고 짧게.
 
글을 마지막으로 쓴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라 글 쓰는 법도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더라구요. 어떻게 했던 건지 생각도 전혀 안 떠오르고. 원래는 다른 이야기를 간신히 써 가고 있었는데 진전도 없고, 다른 분이 쓴 비슷한 이야기가 나와버려서 아예 다른 걸 써버렸습니다. 덕분에 별로 만족스럽지도 못한 게 나와버렸고..
 
뭐, 어디까지나 참가에 의의를 두고. 이렇게라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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