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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잉크 아래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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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15, 2017 00:54에 작성됨.

 

그거 알고 있어?

옛날에 쓰던 만년필 잉크 중에서 몇 가지는 햇빛에 오래 비추면 색소가 날아가는 일이 종종 있었대.

그래서 귀족들이 편지를 쓸 때, 그 잉크를 이용해서 밀서를 주고받는 일이 꽤 있었다나봐.

하루이틀 말리는 걸로는 잉크가 날아가지 않으니까, 타임캡슐처럼 오랫동안 숨겨야 하는 일에 사용했다더라.

어때, 신기하지?

 

 

 

<잉크 아래의 마음>

 

 

“다녀왔습니다.”

 

촬영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저를 반기는 것은 조용한 사무실의 풍경이었습니다. 문과 가까운 자리에 있는 치히로 씨의 자리는 비어 있고, 사무실의 창가에서 문을 마주보고 있는, P씨의 자리 또한 비어 있었습니다. 아직은 해가 중천에 떠 있고, 시계도 한낮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보면 두 분 모두 퇴근한 것은 아닐 텐데, 이상하리만치 사무실은 조용했습니다.

 

“아.”

 

P씨의 자리라도 정리해두자, 고 생각하여 창가로 다가가던 저는 어째서 사무실이 이토록 조용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한겨울의 햇볕이 주는 따스함에 녹아 내린 것일까요? P씨는 책상 위에 엎드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늘 걸치고 다니는 정장 재킷을 이불처럼 덮고, 두 팔을 베개처럼 벤 채로 말이죠.

엎드려있는 그의 앞에는 화면이 켜져 있는 모니터가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절반 정도 내용이 채워져 있는 새하얀 워드프로세서 화면에는 어서 다음 내용을 입력하라고 종용하기라도 하듯, 새까만 커서가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늘 바쁘신 분이니 지금 정도는 쉬게 해 드려야겠네요.

저는 발걸음을 돌려 탕비실로 향했습니다. 제가 마시고 싶은 것도 있지만, P씨가 일어났을 때, 자그마한 깜짝 이벤트라도 해 볼 생각이었습니다.

 

 

포트의 전원을 넣고, 물이 끓는 소리가 저에게만 들릴 정도로 탕비실의 문을 살짝 열어두었습니다.

소파에 앉아, 햇볕을 받으며 잠들어있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저는 열린 문틈 사이로 보글보글하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시간이 정말 빠르네요. 자리에서 일어나 탕비실로 들어가려는 찰나, 창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P씨를 깨우지 않도록, 저는 조심조심 발소리를 죽여 탕비실로 들어갔습니다.

 

포트의 전원을 끄는 그 짧은 사이에, 결국 그가 눈을 뜬 모양입니다.

저의 작은 서프라이즈 계획은 결국 물거품이 되었네요.

 

“으음, 미……미유 씨?”

“아, 일어나셨어요?”

 

자리에서 일어나, 멍한 눈빛으로 사무실을 돌아보던 P씨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멍한 그의 눈이 삽시간에 초점을 되찾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마중을 나갔어야 했는데……면목 없습니다.”

“아뇨, 괜찮아요. 그다지 먼 곳도 아니었고, P씨는 무척 바쁜 분이니까요. 차라도 한 잔 드실래요?”

“……네, 커피로 부탁드립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펴는 P씨에게 주문을 받고, 저는 다시 탕비실로 들어갔습니다. 특별한 주문이 없다면, P씨는 항상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커피를 드십니다. P씨의 커피와 함께 제가 마실 녹차를 한 잔씩 챙겨서, 이번에는 소파가 아닌 그의 자리로 향했습니다. 그의 자리 옆에는 항상 작은 의자가 놓여 있어서, 이따금씩 그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종종 나누곤 합니다.

대강 정리된 책상 위, 조금 전까지 그가 엎드려있던 곳에 쟁반을 올려놓고, 저와 P씨는 각자의 잔을 들었습니다.

 

“촬영은 어땠나요?”

“모두 친절하게 가르쳐 주셔서……무척 편안하게 했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가 드렸어야 했는데…….”

“아뇨, P씨에게는 언제나 신세만 지고 있으니까요. 괜찮아요…….”

 

사실은, 아주 약간 원망스러운 마음도 들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면, 그 얼굴에 내려앉은 피로가 할퀴고 간 흔적을 보면 그런 것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하게 사라져버리곤 합니다.

언제까지고 미덥지 못한 어른으로 남을 수는 없어요. 저 혼자서도 당당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려야만 합니다. 우선은 작은 것부터 시작하도록 할까요.

잠시 말이 멈추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이 피부로 느껴지는 따스한 햇살의 온기와, 손에서 느껴지는 찻잔의 온기를 느끼면서 여유를 만끽하고 있을 때,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사무실의 문이 열렸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아닌 연녹색 유니폼을 입고 계시는 우리 사무실의 어시스턴트, 센카와 치히로 씨였습니다. 품 속에 얇은 결재판을 안고 자신의 자리로 향하던 그녀는 우리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활짝 웃었습니다.

 

“아, 미유 씨! 수고하셨어요! 프로듀서 씨는 이제 좀 괜찮으세요?”

“네, 잠깐 눈을 붙였더니 좀 낫네요.”

“그거 다행이네요. 그리고 미유 씨? 괜찮으시다면 잠시 저랑 이야기 좀 하실 수 있으세요?”

“네? 네……저는 괜찮습니다만…….”

 

저는 힐끔, 눈을 돌려 P씨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반쯤 남은 잔을 내려놓은 그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네, 그러면……실례하겠습니다.”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저는 치히로 씨의 자리로 향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조금 전 자신의 품에 안고 있던 결재판을 제게 내밀었습니다.

 

“자, 이거 작성 부탁드릴게요.”

“제가……요?”

“네! 프로듀서 씨도 그러는 게 좋다고 말씀하셨고요.”

 

저는 고개를 돌려 창가를 바라보았습니다. 삐죽이 머리를 들고, 이쪽을 바라보던 그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활짝 웃음을 지어 보입니다.

 

“그, 그렇다면야……별 수 없네요…….”

“네!”

 

또다시 활짝 웃는 치히로 씨에게서 결재판을 받아, 소파의 테이블로 돌아온 저는 결재판을 열어 그 안을 유심히 살폈습니다. 결재판의 사이에 끼워진 것은, 스테이플러로 고정된 서류와 낱개로 분리된 종이 한 장이었습니다.

 

“……프로필, 이군요.”

 

과연, 프로필이라면 제가 직접 작성하는 것이 좋겠네요. 새삼스럽지만, 이렇게 새로운 프로필을 만들 때면 한 해가 넘어갔음을 다시 느낍니다. 낱장으로 분리된 종이 뒤에 가려져 있던, 스테이플러로 묶여 있던 서류에는 이전에 사용했던 세 장의 프로필이 있었습니다.

새 종이를 옆으로 밀어두고, 저는 옛 프로필을 집어 들었습니다.

 

첫 번째 프로필에 찍힌 제 모습은, 무척이나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의 저는 웃는 것조차도 마음대로 하지 못했지요. 제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곤 그저 P씨의 등을 바라보고, P씨의 손에 이끌려 다니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를,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아무것도 하지 않던 저를, P씨는 포기하지 않고 저를 지켜봐 주었습니다.

지금도 가끔 떠오릅니다. 레슨이 끝나고, 미즈키 씨나 사나에 씨, 시노 씨나 카에데 씨와 함께 술을 잔뜩 마시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면, 저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만연한 ‘그 장소’에 홀로 웅크려 있었습니다.

몇 번을 반복해도 똑같은 광경만이 떠올랐습니다. 네, 전혀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에요. 하지만, 결코 싫은 기억은 아닙니다. 제가 그것을 싫어하지 않는 이유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괜찮으세요?”

 

그 꿈의 끝에는, 비참하게 눈물을 머금고 웅크리는 저를 향해서 다가오는 한 사람의 손길이 있습니다. 저를 부르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면,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입니다. 한겨울이지만 몹시 따뜻했던 그 손을 붙잡고, 마치 후광처럼 가로등을 등진 그 사람의 얼굴을 올려다 보는 순간, 저는 꿈에서 깨어납니다.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네?”

보여줍시다. 당신들이 버린 이 사람이 얼마나 매력적인 사람인지를 말이죠. 당신께서 그럴 생각만 있으시다면, 제가 전력으로 도와드리겠습니다.”

 

이따금씩 그의 명함과 함께 받은 이야기를 떠올리면 지금도 저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집니다. 다만……그 뒤에, P씨가 받아오는 일들을 보면 리벤지랑은 조금 거리가 멀어 보였지만 말이죠.

……지금도 이 사무실의 입구 옆에는 제 화보를 선전하는 포스터가 걸려 있습니다. 거기에 찍혀 있는 의상들은 빈말로도 적령기의 처녀가 입는다고 할 수 없는 의상들 뿐이었어요. 노출도가 높은 건 자제해달라고 계속 말씀을 드렸는데도…….

저는 고개를 돌려, 창가에서 무거운 신음을 흘리고 있는 정장 차림의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비록 지금은 모니터와 눈싸움을 하고 있지만, 저 사람은 무척 눈치가 빠른 사람이므로, 저는 제 시선이 들키기 전에 냉큼 고개를 낮추어 두 번째 프로필을 바라보았습니다.

 

 

두 번째 프로필에 붙어 있는 저는, 첫 번째 것에 비하면 무척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프로필의 아래 쪽에 저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직은 절반 이상이 비어있는 ‘경력’부분에 클립으로 붙어 있는 사진입니다. 흐드러지게 핀, 촉촉하게 빗방울을 머금은 수국과 함께 찍힌 사진 속의 저는 우산 아래에서 무척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가마쿠라네요. 네, 이것도 기억이 납니다. 당시의 저로써는 대체 무슨 용기가 있었던 것인지, 촬영이 예정보다 일찍 끝났던 탓에 여유가 생긴 틈을 타 관광이나 하자며 P씨의 손을 잡아 끌었습니다. 모처럼 둘이서 관광을 할 수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비가 호되게 쏟아졌었죠. 쏟아지는 비 속에서 우산을 두드리는 빗물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무척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언제나 마음 속에 담고만 있던 ‘그 아이’의 이야기도,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도요.

그러고 보면, 이 날 이후로 꿈 속에서 ‘그 아이’를 보는 일이 줄어들었습니다. 제가 그 아이를 내려놓은 것인지, 아니면, 그 아이가 저를 떠나간 것인지……그것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홀로 집에서 잠들 때마다 환청처럼 들려오던 그 아이의 짖는 소리가……이제 더는 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따금씩 그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아쉬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더 이상 쓸쓸함은 느끼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가르쳐주신 사실. 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저도 알고 있으니까요.

 

힐끗, 이번에는 곁눈질로 창가를 한번 바라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신음을 흘리다가 말고, 어깨를 풀면서 크게 기지개를 펴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종이를 펼쳤습니다. 종이의 가장 위쪽, 펼쳐보면 한 눈에 들어오는 그 자리에는 우리들이 함께 걸어온 길을 가리키는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또박또박 각진 필체로 미루어보아, 아마도 P씨가 직접 적은 것으로 보입니다.

 

제 5차 신데렐라 걸 선발 총선거, 최종순위 3위.

 

이미 몇 번이나 본 것일 텐데, 그것을 본 순간 두근, 하고 가슴이 크게 뛰었습니다.

순위를 발표하던 그 날, 3위를 나타내는 트로피와 휘황찬란한 꽃다발을 안고 대기실로 돌아온 저의 앞에서, P씨는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습니다.

아직도 뭐가 뭔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대기실에 돌아온 다음에도 멍하니 서 있던 저는, 제 손을 꼬옥 잡고 숨죽여 오열을 흘리는 그 사람을 눈앞에 두고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처음으로 라이브를 무사히 끝마쳤을 때도, 토크쇼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큰 인기를 끌었을 때에도 그는 담담하게 저를 맞이하며, 언제나 “수고하셨습니다. 무척 멋졌어요.”라는 말을 해 주곤 했습니다. 스폰서에게서 무리한 영업을 강요당했을 때도, 상대 프로덕션의 방해공작으로 오디션에서 탈락했을 때도, 그는 담담하게 ‘다음을 기약하죠’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P씨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절대로 제가 있는 곳에서만큼은, 쉬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묵묵히 뒤를 받쳐줘야 할 자신이 흔들리면 안 된다면서, 한사코 제 앞에서는 감정을 드러내기를 거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P씨가, 제 손을 잡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거칠게 몰아치는 외풍에 맞서 저를 감싸안은 듯, 마치 단단한 벽돌로 지은 집처럼 강철처럼 강인하게 느껴졌던 사람이 그날따라 무척이나 작아 보였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을 제외한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울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그리고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프로필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다시 첫 번째 프로필이 나타났습니다. 뻣뻣한 미소와 경직된 표정이 저를 맞이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이 때부터, 정말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가마쿠라에 다녀오고, 처음으로 기모노를 입어보고, 저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새하얀 웨딩드레스도 입어보았습니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만 봐 왔던, 야경이 아름다운 바(Bar)에서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고, 아름다운 남국의 바다에서 마음껏 헤엄을 쳐 보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제대로 된 미소조차 짓지 못하던 저는 어느덧 수많은 팬들에게 웃음을 주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밤, 골목길에 웅크려 있던 재투성이 소녀는 어느덧 빛나는 무도회장에서,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는 우아한 아가씨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날, 소녀는, 아가씨는 깨달았습니다.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하던, ‘감사’에서 시작한 이 마음은 이미 ‘사랑’이 되어 넘칠 듯 넘실거리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지요.

저는 창가를 바라보았습니다. 양복 차림의 마법사님이 모니터와 씨름을 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어떻게 하면, 넘쳐흐르는 이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지금 이 소파에 앉아있는 것은 좌절하고 웅크린 재투성이 소녀가 아닙니다. 비록 유리구두에는 닿지 못했지만, 이제는 전국에 난립한 수많은 아이돌들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매력을 가진 아가씨입니다.

그러니, 한 걸음 정도는 더 나아가도 괜찮지 않을까요?

 

하지만, 어떻게?

 

그래요. 문제는 방법이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마법사님은 무척 눈치가 빠른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저는 몇 번이고 마음을 전하려 하면서도 쉬이 그것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더 큰 것은 괜한 소리를 했다가 지금의 관계가 깨지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던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고민하던 중에, 때마침 제 머릿속에 어떤 아이디어가 반짝 떠올랐습니다. 정말 좋은 생각이라고 내심 감탄하며, 저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발소리가 컸던 것인지,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P씨가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미유 씨? 무슨 일입니까?”

“그게……연필을 한 자루만 빌릴 수 있을까요?”

“네, 얼마든지요.”

“감사합니다.”

 

P씨에게서 연필을 받아, 저는 테이블이 있는 소파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동향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그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앉아, 테이블 위에 아직은 비어 있는 프로필을 올려놓았습니다.

자, 이제 시작해 보죠.

펜의 뚜껑을 열었습니다. 촉촉하게 잉크를 머금은 펜이 종이 위를 내달립니다.

 

키는 이미 성장기라고 할 나이는 지났습니다. 아이돌로써는 성장기이겠지만, 그런 것은 여기에 적어서는 안 되겠지요.

다음은, 3사이즈……요전 촬영에서 사용한 기록이 있으니 그걸 사용하면 되겠지요. 필요하다면 다시 재야겠지만, 그래도……어쩐지 부끄럽네요.

체중……은 알고는 있습니다만, 섣불리 적고 싶지는 않습니다. 최근 며칠, 촬영에 대비하느라 무척 바빴으니 지금쯤 새로 잰다면 굉장히 정확하고 합리적인 체중이 나올 것 같네요. 변명이 아닙니다. 아이돌은, 프로는 언제나 어디서나 120%의 자신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니까요.

 

생년월일에 취미, 별자리, 혈액형 등등……비어있는 항목을 거의 전부 작성한 뒤, 저는 프로필을 다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비어있는 곳은 단 두 칸뿐이었습니다. 하나는 제 사진이 붙을 자리이지만, 나머지 한 자리는, 지금까지는 쉬이 메우지 못하던 한 칸이었습니다.

 

-비고

 

빈 칸을 노려보던 저는 마침내 마음을 정했습니다. 조금 전, 머릿속에 반짝하고 떠오른 생각은 다름아닌 P씨와 만나기 전……그러니까 아이돌이 되기 전에 다녔던 회사에서 들었던 이야기였습니다.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하고 마음의 각오를 다진 뒤, 저는 펜을 내려놓고 연필을 쥐었습니다. 몇 번이나 전하고자 했지만 전하지 못했던 말이었기 때문인지, 그저 종이에 적는 것뿐인데도 그 단어를 떠올리면 손에서 땀이 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면, 여전히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좋아요. 지금이라면 들키지는 않겠지요. 누구에게 들킬세라 저는 빠르게, 침착하게 연필을 놀렸습니다.

 

당신을 향한 사랑을 담아. Miyu Mifune.

 

마무리로 조심스레 사인을 그려 넣은 것과 동시에 창가에서 덜그럭,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화들짝 놀란 저는 급히 손으로 종이를 가리고 고개를 들어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습니다. P씨가 허리를 숙인 채 서랍을 뒤적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저는 종이를 덮고 있던 손을 치웠습니다.

연필로 옅게 적어놓았던 것을 지우고, 다시 그 위에 펜으로 글자를 그려 넣었습니다. 만년필이 아니기에 효과는 장담할 수 없지만, 아직은 겁쟁이인 저에게는 이 정도면 충분할 것입니다. 어차피 이건 부적같은 것이니까요.

 

팬 여러분을 향한 사랑을 담아. Miyu Mifune.

 

마침내 완성입니다. 펜의 뚜껑을 닫고, 저는 크게 심호흡을 했습니다.

미후네 미유 일생일대의 어프로치입니다. 처음 해 보는 자그마한 장난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습니다. 혹여 들키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저는 품에 끌어안은 그 종이와 함께 그의 자리로 향했습니다.

 

“P씨?”

“네?”

 

모니터와 눈싸움을 벌이던 그는 제 목소리에 반응하여 이쪽을 돌아보았습니다. 초점을 잡으려는 것인지, 안경 너머로 미간이 굼실거리는 것이 어쩐지 귀여워 보였습니다.

 

“여기요.”

“아, 다 적으셨어요?”

“네.”

 

제가 건넨 종이를 받은 P씨는 그것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으로 종이를 바라보는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괜스레 체온이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잠시 후, “네, 이 정도면 됐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P씨가 종이에서 시선을 떼었을 때, 저는 조용히, 가슴에 담아 둔 말을 꺼냈습니다.

 

“……그거 알고 계시나요? 오래 된 잉크는, 색소가 날아가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해요.”

“아, 저도 들어봤습니다. 만년필 잉크를 햇볕에 오래 두면 그렇게 된다던가요. 그런데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그가 들고 있는 프로필이 적힌 종이, 그 종이에 적힌 한 글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펜으로 적혀 있는 글자였지만, 그 뒤에는 무언가가 지워진 흔적이 눈에 띄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이 제대로 남아 있음을 확인하고, 그에게는 들키지 않도록 마음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저는 입가에 검지손가락을 갖다 대었습니다. 단련된 연기력이 드디어 빛을 발할 때로군요.

 

“후훗, ‘비밀’이에요?”

 

다행히도 연기는 먹혀 든 모양입니다. “그런가요”라고 말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P씨는, 제 비밀스러운 어프로치가 담긴 종이를 조심스럽게 서랍 속으로 집어넣었습니다. 저는 또다시 휘유, 마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럼, 저는 먼저 들어가볼게요.”

“네, 오늘 하루도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내일 뵈어요!”

 

두 사람의 배웅을 받으며 사무실의 문을 닫고 나오자 겨울의 싸늘한 공기가 저를 반깁니다. 적당히 달아오른 두 뺨을, 얼굴을 식혀주는 차가운 겨울의 공기가 지금은 무척 좋았습니다.

사무소의 건물을 나와 하늘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약간 서쪽으로 기울어진 해님은 언제나처럼 온기를 품은 햇빛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시간이 지나고 지나서, 잉크의 색소가 날아가면.

그 때는, 그 아래에 적혀 있던 말을 전할 수 있겠지요?

비록 지금은 보이지 않는 말이지만요.

 

<잉크 아래의 마음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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