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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 상실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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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09, 2017 03:13에 작성됨.

시키가 프로듀서에게 우산을 건네고 며칠이 지났다.

오늘은 메이저 방송국 황금시간대에 방영하는 예능 프로그램에 시키가 출연하는 날이다. 프로듀서는 간만에 시키와 함께 외출해 스태프들에게 얼굴을 비치기로 했다. 프로듀서가 눈이, 아니 뇌가 망가진 이후로 얼마 만에 오는 걸까.

프로듀서의 얼굴을 본 스태프들이 프로듀서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방송 스태프들은 깊든 옅든 대부분 프로듀서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프로듀서가 업계에 처음 들어왔을 무렵에 신세를 진 사람도 있었고, 프로듀서에게 신세를 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을 만나니 프로듀서의 가슴에 뭉클한 감정이 피어났다. 프로듀서 자신이 업계에서 일한 발자취, 증거를 스태프들에게서 보는 것 같아서.

같은 업계 사람은 건너 건너로 소식과 안부를 공유하는 법이다. 스태프들은 얼마 전 시키가 나온 다른 방송을 봤다느니, 요즘 음원 차트에 LiPPS가 상위권이라느니 제법 최근 이야기를 꺼내면서 프로듀서에게 말을 걸었다.

프로듀서는 세트 준비, 리허설 동안 스태프들과 말을 섞으며 업무에 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정말 충실하게 보낸 시간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슬슬 본 방송을 녹화할 시간이 되었다.

“시노미야 씨! 키타자와 씨! 이쥬인 씨! 아키즈키 씨! 아마미 씨! 시마무라 씨! 이치노세 씨! 슬슬 준비 부탁드립니다!”
스태프가 출연진을 모은다. 촬영 세트 주변에 흩어져 있던 출연자가 한둘씩 세트로 올라온다. 하나, 둘, 셋, 넷, 오다가 넘어진 다섯, 여섯……. 여섯…….

“여섯 다음엔 일곱이지…….”
프로듀서는 중얼거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세트 지정석에 여섯 명이 앉았다. 프로듀서가 아무리 눈이 안 좋아도 이건 구분할 수 있다. 자리 하나가 비었다.

시키가 보이지 않는다.
다른 스태프들도 눈치챘는지 촬영장이 웅성거린다.

“이치노세 씨? 어디 계십니까? 이제 곧 촬영이에요!”
프로듀서는 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스태프들이 시키를 찾으려 일사불란하게 돌아다닌다. 뭉개진 물감 덩어리 같은 것들이 프로듀서의 시야 구석구석에서 빠르게 오간다. 프로듀서는 속이 안 좋아졌지만 두리번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뭐야? 없어진 거야? 촬영 직전에?!”
“야, 빨리 찾아봐! 스케줄 맞춰야 해!”
“이치노세 씨!”
스태프들이 한둘씩 문을 열고 촬영장 밖으로 수색 범위를 넓혔다. 프로듀서는 핸드폰을 꺼내 시키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시키의 핸드폰이 꺼진 상태라는 메시지만 뜰 뿐이다. 프로듀서는 스태프들의 뒤를 따랐다.

“시키한테 연락이 안 되어서 그런데 저도 같이 찾아도 될까요?”
“괜찮으시겠어요? 무리하지 마시고 안에 계시는 게…….”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제 담당 아이돌이니까 제가 찾아야 해요. 죄송합니다, 요즘 얌전해서 방심하고 있었어요. 그래도 일하기 전에는 돌아오는 아이였는데…….”
프로듀서는 스태프에게 고개를 숙였다.

프로듀서는 스태프 한 명과 조를 짜 방송국을 돌아다녔다. 뛰진 못해도 최대한 빠르게 걸으며 스태프 뒤를 따랐으나 결국 방송국에서 시키의 흔적을 찾진 못했다. 안에 없으면 건물 밖에 있다는 건데…….

“어떻게 할까요? 밖에서 찾을까요?”
스태프가 프로듀서에게 묻는다.

이쯤 되면 슬슬 구멍을 메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시키 대신에 현장에 급히 올 수 있는 다른 아이돌을 부르는 수밖에 없다.

“잠깐만요, 저쪽은 아직 찾지 않았죠?”
프로듀서는 묘하게 인적 없는 계단을 가리켰다.

“저쪽은 폐쇄된 통로예요. 옥상으로 연결되었는데 문이 잠겨서 못 들어가요. 그리고 반쯤 창고로 쓰는 곳이라서 잡동사니가 이것저것 쌓여있고요. 올라가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타당한 의견이다. 보통 사람은 들어가지 못하는 막힌 통로. 보통 저기에 사람이 있을 거란 생각은 못 할 것이다.

시키가 보통 사람이라면 말이지만.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돌아가죠.”
프로듀서는 스태프를 끌고 왔던 길을 돌아갔다. 모퉁이를 돌고 돌아 다른 계단이 보일쯤.

“이런. 아까 거기에 지갑을 놓고 왔네.”
“예?”
“죄송하지만 지갑 좀 찾고 올게요!”
“혼자서 괜찮으세요?”
“아직 보이니까요.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스태프가 동행하려는 걸 프로듀서가 몇 번이고 만류하자 스태프도 포기했는지 조심해서 다녀오란 말만 남기고 현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프로듀서는……. 아까 그 막힌 통로로 향했다.

지금 프로듀서가 있는 층은 2층이다. 그런데 통로의 내려가는 계단은 판자……. 비슷한 거, 어두워서 분간이 가질 않지만 아무튼 무언가로 막혀 있다. 공기는 텁텁하다. 완전히 막힌 곳도 아닌데 공기가 묘하게 무겁다. 으스스할 정도로.

하지만 프로듀서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텁텁한 먼지 냄새 사이사이에 시키가 달고 다니는 향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잘못 맡은 건가 싶었지만……. 계단을 오를수록 프로듀서의 예상이 확신으로 단수가 올라갔다.

계단은 각종 방송 소품과 서류 뭉치가 널려있어 발 디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프로듀서는 계단에 산재한 잡동사니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계단을 올랐다. 시키의 냄새가 마치 이곳으로 오란 듯이 프로듀서를 이끌었다. 냄새가 더욱 강해진다. 어느새 최상층에 도착했다.

옥상으로 향하는 문을 보자, 문고리에 번호식 자물쇠 몇 개가 깔끔하게 따인 채로 매달려 있다. 프로듀서는 문을 열고 옥상으로 나왔다.

옥상 한가운데에서 시키가 오늘 의상인 의사가운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놓곤 구둣발로 옥상 바닥을 툭툭 치고 있었다. 시키는 그러다 문소리를 듣고 프로듀서가 온 걸 알아챘다.

“왔구나~ 기다렸어~”
“너 말이야, 실종된 거로 모자라서 출입 금지 지역까지 오냐……. 그나마 자물쇠가 멀쩡해서 다행이네.”
“자물쇠 말이야? 부술 필요가 어디 있어? 문구점에서 파는 저런 자물쇠 같은 건 소리가 맞물리는 법칙만 파악하면 금방 딸 수 있는걸. 열쇠식이어도 시키 쨩은 전혀 곤란하지 않지만!”
시키가 보란 듯이 가슴을 폈다.
프로듀서는 어깨를 으쓱이곤 시키 옆에 다가왔다.

“그래서, 왜 실종된 거야?”
“글쎄, 실종되길 바란 거 아니었어?”
“뭐?”
“그랬잖아.”
시키가 담담하게 말한다. 설마 며칠 전 대화 때문인가?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물어본 거였어.”
“그랬어? 정말? 아하하, 뭐, 이유 따윈 아무래도 좋잖아.”
시키는 프로듀서의 소매를 낚아챘다. 그리곤 프로듀서를 끌고 옥상 구석에, 아마 환풍 기구로 보이는 기재 쪽으로 향했다. 기재는 의자로 쓰기 딱 좋은 직사각형 형태. 가로 폭이 넓고, 세로 폭도 사람 두 사람이 등을 기대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어 앉기 적합해 보였다.

“앉아도 되려나.”
“괜찮아. 괜찮아. 거기에 이것도 봐봐. 버스 정류장 같지 않아? 차양 비슷한 것까지 있어. 이걸 벤치로 안 쓰면 아깝지요.”
저 차양 비슷한 것의 용도는 아마 사람이 아니라 기재를 비바람에서 지키는 용도겠지만……. 시키가 그걸 모를 리는 없겠지. 프로듀서는 시키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시키는 프로듀서를 그곳에 앉히고 옆에 자기도 앉았다.

“온다.”
시키가 나른한 목소리로 고한다. 시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빗방울이 몇 방울 떨어지더니 이내 곧 비가 매서운 기세로 내렸다. 빗방울이 옥상 바닥을 짙고 촉촉하게 적혔다. 프로듀서와 시키가 앉은 곳을 빼고.

“용케도 알았네.”
“응, 비 냄새도 났고.”
“비 냄새라. 이런 소나기는 잘 모르겠어.”
“그리고, 하늘이 꼭 비가 올 것 같았거든.”
하늘……. 프로듀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어떤 게 구름이고 어떤 게 하늘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자, 이제 어떻게 할까. 시키. 촬영 어떻게 할 거야?”
“으응~ 기분이 안 내키네.”
“그럼 어쩔 수 없지.”
프로듀서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 앱을 조작했다.

프로듀서는 프로덕션에 전화해 대충 시키가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둘러대면서 시키의 대타를 요청했다. 마침 가까운 다른 방송국에서 일을 보던 아이가 있었으므로 그 아이를 이곳으로 보내주겠다고 한다.
프로듀서는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나중에 스태프분들께 사과해야지.”
“고생이겠구나. 냐하하, 힘내, 조수 군.”
“너도 같이.”
비가 지상을 세차게 때린다. 시끄러운 음색 사이에서 프로듀서가 말했다.

“너 말이야, 실종되는 거 참느라 힘들지 않았어?”
“흐음, 어려운 질문이네.”
시키는 입술을 삐쭉 내밀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실종은 내게 있어 본능 같은 거고, 숨을 쉬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말이지. 생물이 호흡을 못 하면 죽으니까. 그런 점에선 힘들……까나?”
시키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문으로 끝을 맺었다.

“난 오늘 네가 실종되어서 당황했지만, 한편으로는 안심했어.”
“왜?”
“나 때문에 네가 참는 것 같아서 고민했거든.”
시키는 프로듀서의 볼을 손가락으로 살짝 찔렀다. 프로듀서의 머리가 다소 옆으로 기울었다.

“내가 어떤 식으로 행동하든 그건 내가 정한 거야. 내가 너 때문에 그러는 거로 생각했어? 그런 식으로 상대의 행동을 멋대로 단정 짓는 건 오만이야.”
“미안…….”
“뭐, 맞지만.”
시키는 어깨를 으쓱거리곤 고양이처럼 얄밉게 웃었다. 프로듀서는 시키가 찌른 볼을 문지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없어지지 않는 게 이상했어?”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내가 실종되는 건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야. 그렇게 하지 않는 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서고. 심플하잖아. 이해돼?”
확실히 시키는 기분파니. 본인이 이렇게 말하니까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프로듀서는 여태까지 고민했던 게 왠지 바보 같이 느껴졌다.

“너는 여전히 너답구나.”
프로듀서가 체념에 가까운 투로 말을 입에 올리자 시키가 말한다.

“나다운 거라…….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지? 나다운 게 뭔데! 이러면서 등장인물이 자주 화를 내곤 그러잖아. 유구한 세월 동안 짜낼 대로 짜내서 더는 뽑을 엑기스도 없어 보이는 클리셰지만, 꾸준하잖아. 꾸준하단 건 수요가 있다는 거고, 수요가 있다는 건 이런 걸 고민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거지. 근데, 자기다운 게 대체 뭘까? 그런 게 꼭 필요할까?”
시키가 프로듀서에게 가까이 붙었다. 시키는 프로듀서에게 답을 촉구하듯 프로듀서의 어깨를 잡고 살며시 흔들었다. 프로듀서는 시키에게 흔들리면서 입을 열었다.

“사람은 자기 잣대로 세상을 판단하니까. 필요하지.”
프로듀서의 대답을 듣고 시키가 프로듀서의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시키는 손을 그대로 자기 입술로 가져가 입술을 푹 눌렀다.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 그게 자아야? 그걸 위해 자기다운 행동을 정해놓고 거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자기답지 않다고 고민하고, 그래?”
시키는 프로듀서를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마치 프로듀서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처럼.

“할 수 있던 걸 못 하게 되었다고 해서 자기답지 않게 되는 걸까?”
빗소리가 더 거세졌다. 그러나 시키의 목소리는 빗소리를 뚫고 프로듀서의 귀에 똑바로 전달되었다.

자기다운 것. 그건 자신에 대한 기준이다. 자신의 행동범위를 정해놓고 지침에 맞추어 행동하고 판단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관이다.

프로듀서는 예전엔 서류 업무도 척척 해냈다. 당연하다. 눈이 보였으니까. 예전엔 소나기가 와도 곤란할 것 없었다. 하늘이 어떤지 볼 수 있었으니까. 예전엔 바로 앞에서 자기들을 못 봤을 테니 그냥 지나가자 같은 멍청한 말을 듣지 않았다. 눈이 보였으니까.

그리고, 예전엔 촉을 날카롭게 간 만년필을 완벽하게 돌렸다. 그건 눈이…….

“팬 돌리기 보여줘. 주머니에 있잖아?”
시키가 당돌하게 말한다. 프로듀서의 수트 안주머니엔 여전히 만년필이 있다. 며칠 전 시키와의 대화 이후로 버릴까 고민했지만 끝내 버리지 못한 물건.

“이것도 심리 테스트야?”
“아니, 갖고 있다고 믿으니까.”
시키는 여전히 배시시 웃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런 식으로 상대의 행동을 멋대로 단정 짓는 건 오만이라면서?”
“그래? 몰랐어! 이걸 어째?! 큰일이야!”
“뭐, 갖고 있지만.”
프로듀서는 품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그리곤 만년필의 뚜껑을 열었다.

소나기의 습기가 만년필 촉에 코팅된다. 그래서 무엇이든 스치는 것만으로도 베어버릴 것처럼 날이 음산하게 빛난다.

프로듀서의 눈에 촉이 어떤지 보이지 않지만, 프로듀서의 손은 긴장으로 다소 뻣뻣하게 굳었다. 프로듀서는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제 예전처럼 팬 끝을 튕기면 팬이 손끝에서 빙글빙글 돌 것이다. 아주 약간의 힘과 테크닉. 프로듀서가 질리도록 해온 과정이다.

프로듀서는 자기 손을 보았다. 프로듀서의 눈엔 팬을 쥔 손이 찰흙 덩어리에 막대기를 꽂은 것처럼 보였다.

“안 돼……. 역시…….”
프로듀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시키가 묻는다.

“무리야. 못 해.”
“전엔 눈 감고도 했잖아?”
그건 예전 이야기다.

“아니, 못 해. 이젠 못 한다고.”
프로듀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른다. 가슴 속이 삶아지는 듯한 느낌에 프로듀서는 진이 빠졌다.

“너는 잡동사니를 해치고 이 옥상까지 올라왔잖아. 저 길은 눈이 멀쩡한 사람도 올라오기 힘들어. 그런데 넌 옥상에서 예전처럼 날 찾았어.”
“그건 네가 향을 남겨서 그런 거겠지. 오면서 알아챘어. 마치 길 같았으니까.”
프로듀서가 옥상까지 올라올 수 있던 이유. 그건 시키가 프로듀서를 위해 계단에 마킹을 했기 때문이다.

잡동사니 사이사이에 올라올 수 있는 자리를 향으로 표시. 프로듀서는 시키가 남긴 향을 의지해 옥상까지 올라왔다. 프로듀서는 시키가 떠보는 듯이 말하는 걸 듣고 확신했다. 그건 시키가 의도적으로 남겼다고.

그리고 그 확신으로 인해 프로듀서의 가슴이 더 심하게 끓었다.
시키가 그러지 않았으면 프로듀서는 과연 혼자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을까?

“시도도 안 해보고? 조수 군, 실험이란 건 말이야…….”
“너는 눈이 멀쩡하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프로듀서는 자기가 말하고도 놀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폭발할 것처럼 뜨거웠던 가슴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프로듀서의 입을 타고 밖으로 나간 말이, 나가면서 심장을 뽑아가기라도 했는지 철렁함이 프로듀서의 가슴에 퍼졌다.

어조는 얌전했지만 프로듀서의 말엔 상대를 거절하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프로듀서를 그런 걸 시키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시키 앞에서 되도록 평정을 가장하고 있었는데…….
 
“그래? 그럼…….”
하지만 시키는 그걸 신경 쓰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프로듀서의 정면에 섰다. 시키가 프로듀서를 내려다본다. 시키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프로듀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러길 잠시, 시키가 상체를 숙인다. 시키의 손이 만년필을 쥔 프로듀서의 손을 잡았고, 시키는 프로듀서의 손을 이끌어 자기 얼굴 근처에 두었다.

만년필 촉이 시키의 눈앞에서 멈췄다.

“너랑 같은 조건이면 어때? 너랑 같은 세상에, 같은 곳에 같이 서면……. 괜찮지?”
프로듀서가 조금만 더 앞으로 팔을 뻗거나, 시키가 당기면 만년필 촉은 그대로 시키의 눈을 찔러 시키를 실명시킬 것이다. 날카롭게 다듬어진 촉이 각막을 뚫고 홍채와 수정체를 찢기 일보 직전. 프로듀서는 손을 잡아당겼다.

시키는 평소에 가벼운 언동으로 상대방을 자주 골려 먹는다. 기분 내키는 대로 주변을 어지럽히기 일쑤였다. 하지만 지금의 시키는 다르다. 옆에서 누가 이 광경을 보면 시키가 정말 지독한 장난을 친다고 혀를 찰지도 모른다. 하지만 프로듀서는 시키가 장난으로 이러는 게 아닌 걸 알았다.

왜냐면……. 프로듀서의 손을 잡은 시키의 손이 떨리고 있었으니까.

진심을 담았기에 떨리는 손이었다. 자기 눈을 찌를 수도 있는 두려움. 그게 시키의 손을 떨리게 했다.

시키의 진심. 프로듀서는 눈을 감았다. 흐릿한 세계가 어두워졌다. 프로듀서의 머릿속에, 시키의 얼굴이 떠오른다. 언젠가 보았던 그늘진 얼굴을 한 시키가 쓸쓸하게 프로듀서를 쳐다보았다. 프로듀서는 눈을 떴다. 흐릿한 세상이 프로듀서를 반겼다. 시키의 얼굴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시키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정도는 예상할 수 있다.

프로듀서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감정의 물기를 최대한 짜내고 말려서 건조하게 해서, 한 방울도 안 남기곤 입을 열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자명종 시계 시침하고 분침이 보여야 하는데, 매일 아침 그걸 보는 게 당연했는데……. 안 보여.”
프로듀서는 감정을 누르고 눌렀다.

“자기 전엔 혹시나 지금까지 겪은 게 꿈이고 아침에 일어나면 눈이 멀쩡해지지 않을까 기대해. 자고 일어나면 평소처럼 눈이 보였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면 아니야. 여전히 흐리게 보여. 그리고 전날보다 더 흐릿한 정면을 보고 풀이 죽어. 기적 같은 건 없어. 날이 갈수록 나는 어두운 곳으로 가. 세상이 점점 어두워져.”
프로듀서는 근래 품은 생각을 그저 담백하게 풀었다.

시키는 프로듀서에게 진심을 담았다. 그럼 프로듀서도 진심을 담아야 한다.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진심을.

“그러니까 나처럼 될 거라는 그런 말은 하지 마. 이건 그렇게 낭만적인 게 아니야.”
프로듀서가 빠진 구렁텅이가 얼마나 깊은지 시키도 이미 알고 있을 테지. 하지만 그렇기에 프로듀서는 시키에게 말해야만 했다. 시키가 구렁텅이를 들여다보다가 빠지지 않도록 멀리 떨어트려야 하니까.
시키는 얌전히 프로듀서의 옆에 다시 앉았다. 시키가 앉자, 프로듀서는 만년필을 쥔 채로 주먹을 꾸욱 쥐었다. 손목도 돌려 손의 근육을 풀었다.

프로듀서는 팬 끝에 힘을 실어 팬을 돌렸다. 팬이 프로듀서의 손가락을 타고 이리저리 춤춘다. 팬은 프로듀서의 손에 자석처럼 달라붙어 프로듀서의 손을 돌아다녔다. 마치 뱀이 나무를 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물이 수도관을 타고 이동하는 것 같기도 했다. 팬이 손가락 사이사이, 손바닥, 손등을 차고 달린다. 그러면서 만년필 촉은 프로듀서의 피부를 하나도 건드리지 않는다.
묘기에 가까운 행위가 프로듀서의 손끝에서 펼쳐진다. 시키는 그걸 눈에 똑바로 담았다.

팬이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다. 프로듀서는 뚜껑을 닫았다. 프로듀서의 손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다.

옥상이 조용하다. 어느새 소나기가 그쳤다.

“비가 그쳤어.”
시키가 프로듀서에게 알려준다.

“하늘은 어때?”
“구름 하나 없이 맑아.”
프로듀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걸음 앞으로 전진. 물웅덩이를 밟는 소리가 프로듀서가 걸었음을 확인시켜준다. 햇볕이 프로듀서의 머리 위로 내린다. 프로듀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키의 말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하늘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하늘은 아까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무엇이 달라졌는지……. 모르겠다.

프로듀서는 고개를 젖혔다. 하늘을 똑바로 볼 수 있게.

프로듀서의 주변에서 찰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프로듀서가 낸 소리보다 작은 소리가 몇 번 나더니 이내 프로듀서의 눈이 어두워졌다.

“직사광선은 눈에 안 좋아.”
시키가 손을 올려 프로듀서의 눈을 가렸다. 프로듀서가 고개를 내리자 시키가 손을 치웠다.

“찰박 찰박~ 기분 좋다~”
시키가 물웅덩이를 일부러 밟는다.
“냐하하, 우리가 처음 만난 날에도 소나기가 왔잖아.”
“그랬지.”
며칠 전에 프로듀서가 회상했던 그날을, 이번엔 시키가 회상한다.

“그날도 마음 가는 대로 아무렇게나 걷고 있었어. 그런데 소나기가 올 것 같아서 비를 피할 만한 곳을 찾고 있었는데, 갈림길이 보이지 뭐야. 그래서 어디로 갈까 고민했지. 내가 어떻게 했을 것 같아?”
“가까운 쪽으로?”
“땡~ 이렇게 했습니다~”
시키는 프로듀서가 들고 있던 만년필을 자기 손바닥에 올리고 세웠다.

만년필이 시키의 손바닥에서 쓰러진다. 만년필이 조금 전까지 시키와 프로듀서가 앉았던 기재를 가리킨다. 시키는 물웅덩이를 밟으면서 기재로 걸어갔다.

프로듀서는 시키를 뒤따랐다. 둘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그쪽으로 갔더니 좋은 냄새가 나는 거 있지. 냄새를 따라가니까 네가 있었어.”
“팬이 다른 쪽으로 갔으면 우린 못 만났겠네.”
“맞아, 그날 내가 기분 내키는 대로 걷지 않았으면, 소나기가 오지 않았으면, 그리고 팬이 그쪽으로 쓰러지지 않았으면 우리는 만나지 못했을 거야.”
시키의 행동이 조금이라도 어긋났으면 지금 이렇게 시키와 프로듀서가 이야기하는 일은 없었을 거다. 시키가 아이돌 활동을 하는 것도, 프로듀서가 시키를 프로듀스하는 것도.

“너한테 실종벽이 없었으면 만나지 못했을 거야. 네게 있어 역시 실종은 중요하구나.”
“왜?”
“요새 실종하지 않은 이유, 그거 나 때문이지?”
프로듀서는 입술을 조금 씹었다. 뱃속이 쓰라렸다.

“결국 너한테서 내가 앗아갔구나. 실종을 통해 새로운 발견을 할 가능성을 내가 가져갔어.”
시키의 실종벽. 그건 싫증 난 세상을, 조금이라도 돌아볼 구석을 찾기 위한 것이리라. 본 적 없는, 들은 적 없는, 가 본 적 없는 곳을 향해 정처 없이 흐르는 길. 전에 시키는 말했다. 구조를 알게 되면 시시해진다고. 시키는 자신을 둘러싼 주변 구조를 알고, 세상의 구조를 알고 싫증 난 것이 분명했다.

프로듀서는 시키가 장난이라고 말했던 그 말을 그냥 흘려 넘길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그것은 분명 덤이 아니라……. 시키 자신을 구성하는 일부였을 것이다.
시키는 그것을 포기하면서까지 프로듀서를 배려했다.

프로듀서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신에 관한 의구심이 프로듀서를 감싼다. 뱀이 똬리를 트는 것처럼 프로듀서의 온몸을 의구심이 칭칭 감았다. 의구심이 프로듀서에게 물었다. 지금 이곳에서 이 아이와 무엇을 하느냐고. 자신의 상실에서 끝내지 않고, 타인마저 상실에 물들였다.

프로듀서는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 앞으로 7개월 후면 완전한 암흑이 프로듀서를 집어삼킬 예정이다. 그건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운명이다. 기적 따윈 없다. 그래서 프로듀서는 체념했다.

그나마 흐릿하게 보이는 지금을 그저 붙들고 싶어서 미래에 관한 결단을 내리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어떻게 하면 될까, 생각하는 걸 뒤로 미루고 현재를 유지했다. 그 현재는 완전한 현재가 아닌, 조금씩 닳아 사라지는 현재임에도.

“내가 실종하지 않은 이유를 알려줄게.”
시키가 말한다. 기만하는 음색도, 놀리는 어조도, 장난스러운 말투도 없이 말했다.

“나는 평소에 여러 가지 화학약품을 만지잖아? 너는 나를 프로듀스하면서 그것들을 자연스럽게 접했어. 나는 너한테 내가 직접 만든 향수를 시험하기도 했고. 그래, 전엔 프로젝트 룸을 내가 만든 아로마로 가득 채운 적도 있었지. 그땐 재밌었어. 근데 기억해? 네가 시력을 잃는다는 말을 듣고 나서 며칠 동안 내가 쉰 거.”
당시 시키는 몸이 안 좋다는 이유를 들고 며칠 동안 일을 쉬었다.

“실은 그때 내가 그동안 너한테 접하게 한 것들 전부 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분석했어. 혹시나 인체에 해로운 게 있나 철저하게 샅샅이 뒤져 봤어. 결과가 어땠을 것 같아?”
프로듀서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겠지.”
프로듀서는 시키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으니까. 시키는 괴짜지만 적어도 자기 잣대에서 벗어나는 짓은 하지 않는다. 기준이 일반인보단 높지만, 범위는 지킨다. 약제법도 그 범위 중 하나.

“나 말이야, 그걸 알고 정말 안심했어.”
시키의 목소리가 조금 떨린다. 프로듀서는 그걸 알아챘다. 어쩌면 프로듀서가 예전보다 청력에 집중하는 상황이 아니었으면 감지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정말 안심했어. 너의 눈을 뺏은 게, 네 뇌를 망가트린 게 내가 아니라서 정말 안심했어. 안심해서 눈물이 났어. 몇 날 며칠이나 밤을 새워서 피곤했는데도 체력을 쥐어짜서 펑펑 울었어.”
목소리 떨림이 강해졌다. 이젠 누가 들어도 알 정도로.

“근데 이런 생각이 들었어. 만약 내가 만든 게 원인이었다면, 원인을 알았으면 어쩌면 치료법을 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프로듀서의 병은 원인 불명. 어째서 프로듀서의 뇌가 시각을 인식하지 못하게 됐는지 의사들도 밝히지 못했다.

원인을 알면 병을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만약이고, 원인을 알아도 치료하지 못하는 병 같은 건 세상에 발에 챌 만큼 만다.

“나도 알아. 비논리적이야. 그런데 사고가 자꾸 그쪽으로 기운다고.”
시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마치 벼랑 끝에 몰린 사람이 내는 목소리 같다.
“나는 나를 사랑해! 세상 누가 뭐라고 하든 나는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그건 싫었어! 정말 싫었단 말이야! 그렇게 안심하는 게!”
시키가 허리를 앞으로 숙이고 폐를 쥐어짜 냈다. 시키의 등이 프로듀서가 보기에도 급격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프로듀서는 시키의 떨림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목소리 톤을 다듬은 시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사라지지 않았어.”
시키는 다시 허리를 올렸다. 시키의 얼굴이 프로듀서를 빤히 본다.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구분할 수 없지만 프로듀서는 시키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짐작했다. 그리고 프로듀서는…….

시키는 프로듀서의 표정을 읽고 말했다.

“너는 역시 대단해.”
시키가 말한다.
“어둠에 빠지면서도 날 걱정해 줘.”
“아니야, 난 그저……. 네가 그런 이유로, 상관없는 이유로 상실감을 느끼는 게…….”
“내가 느끼는 상실과 네가 느끼는 상실은 달라.”
프로듀서는 시키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건 프로듀서도 어렴풋이 느낀 것이기에. 그리고 뼈저리게 느낀 것이기에.

지금도 시시각각 프로듀서를 향해 다가오는 공포. 그건 거짓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무겁고 잔혹했다. 공포는 실재한다. 지금도 프로듀서를 압박한다.

사람은 일부를 제외하면 태어났을 때부터 시력을 몸에 지니고 태어난다. 시력을 지닌 사람은 세상을 보는 걸 당연하게 느끼며 살아간다.

시키의 실종벽은 시키의 선천적인 천재성에 기인한다. 시키는 태어나면서 세상 구조를 꿰뚫어 볼 능력을 얻었으며, 천재성과 시키의 주변 상황과 맞물려 시키에게 실종벽이 생겼다.

프로듀서는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게 당연했고, 시키는 실종되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지금 프로듀서는 시력을 잃었고, 시키는 실종을 잃었다.

자, 이 둘의 결정적인 차이가 뭘까……. 그건 바로…….

“너는 잃어버렸지만, 나는 버렸어.”
시키가 답을 말한다. 시키와 프로듀서의 결정적인 차이. 자의인가 아닌가.

프로듀서는 시력을 잃었지만, 시키는 실종을 버렸다.

“하지만 내가 이러지 않았다면 버릴 필요는 없었잖아.”
“나는 아이돌 활동이 정말 즐거워. 무대에 섰을 때 팬들의 반응은 정말 짜릿하고 간혹 예상치 못하게 부풀어 오르니까. 예상을 벗어나는 건 언제나 즐겁지. 난 그런 화학반응이 정말 좋아. 그게 나를 채워 줘.”
시키는 조금 숨을 고르고 말했다.

“내게 있어 실종은, 당연한 거지만, 필수적인 게 아니야. 대신할 게 있으니까. 그리고 네게 있어 눈은 분명 필수적이었을걸.”
당연하다. 프로듀서에게 필수적인 게 아니었으면 프로듀서가 공포를 느끼지 않았을 테니까. 프로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프로듀서는 시키의 말을 모두 수긍하지 않았다. 논리로 시키를 이길 수 없다. 하지만 비논리적인 걸 알면서도, 마음이 비논리에 끌려다닐 때가 있다.

“하지만 분명 같은 점도 있을 거야.”
지금 프로듀서가 느끼는 감정은 시키가 실종을 버리기로 결심했을 때 느낀 것과 얼마나 비슷할까? 어디까지 근접했을까? 그건 모른다. 프로듀서의 감정은 프로듀서의 것이고 시키의 감정은 시키의 것이니까.

하지만, 지금 프로듀서의 사고 계기는 시키와 다를 게 없을 것이다. 그저 상대방이 소중하고 소중해서 자신을 밀고 미는 행위.

“자기 일부를 잃는 게 아무렇지 않을 리 없어. 난 지금도 무서워. 필수적이지 않더라도 그게 자기에게 붙어있는 게 당연한 거면 그걸 잃는 게 분명 무서울 거야.”
프로듀서는 억지를 부렸다.

프로듀서도 안다. 시력과 버릇이 같은 선상에 있지 않다고. 그래도 프로듀서는 시키가 버린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취급하고 싶지 않았다. 소중한 시키가 버린 일부를 그저 쓸모없는 것 취급하고 싶지 않았다.

시키는 프로듀서의 말을 듣고 쿡쿡 웃었다.

“억지구나.”
시키의 목소리에 평소 같은 안정감이 돌아왔다. 시키는 조금 더 웃은 다음에 말을 이었다.

“그러네, 공통점을 굳이 찾자면……. 결국 받아들이는 건 자기 자신. 정도려나? 부조리해.”
“그렇구나. 부조리하네.”
프로듀서도 시키처럼 웃었다. 시키는 프로듀서가 웃는 걸 확인하고 말했다.

“나는 세상 구조를 어느 정도 안다고 자부해. 세상은 정말 불공평하고 부조리해. 잃은 것과 버린 게 이렇게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있을 정도지. 결국 원인은 어떻든 결과는 자기에게 쏟아지잖아? 내 주체는 결국 나야. 영향은 결국 나한테 오게 되어있어.”
시키 말대로, 자신의 주체가 자신인 이상 어쩔 수 없다. 누구 탓을 해도 결과는 자신에게 돌아온다. 그게 이 세상이 돌아가는 법칙이다.

“그런 부조리한 세상에서 같은 결과로 웃느냐 우느냐는 결국 자기가 정해야 해. 그건 남이 해주는 게 아니거든. 남이 조언을 해줘도 마지막에 정하는 건 자기야. 네 냄새는 여전히 좋아. 평생 맡고 싶어. 아이돌 활동은 재밌지만 네가 없어지면 아마 2년이 한계일 거야. 너는 중요한 요소니까. 네가 빠지면 안 돼. 그러니까…….”
시키는 마른 입술을 적시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만두지 마. 내 옆에서 없어지지 마.”
시키의 말이 촉촉하고 생기 있게 프로듀서에게 전해졌다.

시키는 프로듀서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어서 마지막으로 실종을 저질렀고, 그리고 이제……. 실종을 버렸다. 프로듀서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곤 과장되게 어깨를 들썩이면서 가벼운 투로 말했다.

“모순 아니야? 정하는 건 결국 자기라면서? 그런데 시키는 나를 부추기고.”
“냐하하, 사람은 모순되니까 재밌는 거야! 이 정도는 허용범위라고?”
“그것도 그런가.”
“자기를 정의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야. 결국 정하는 건 너야. 너한테서 나는 냄새는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한테서 나는 냄새야. 그래서 난 네 냄새가 좋아. 너한테선 여전히 좋은 냄새가 나. 너는 지금도 열심히 살고 있어. 어려움을 겪어도 계속하고 있잖아. 이게 내가 본 너야. 난 실종이 없어도 나야. 너는 너를 어떻게 생각해?”
프로듀서는 생각에 잠겼다. 예전과 지금의 자신을 같다고 정의할 수 있나? 그건 역시 무리다.

시각은 없어도 된다고 여기기엔 프로듀서가 살아오면서 누린 시각의 혜택이 너무 크다. 시각을 잃어 발생하는 상실감이 너무나도 깊다.

하지만……. 예전과 다르다고 해서 자신을, 자신이 아니라고 정의해도 될까? 서류 업무에 쩔쩔매도, 어중이떠중이에게 모욕당해도, 프로듀서는 여전히 팬을 돌릴 수 있었다. 프로듀서는 예전과 다르지만, 예전처럼 팬을 돌릴 순 있었다.

시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프로듀서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프로듀서 옆엔 지금 아무도 없다. 프로듀서는 양팔을 기재에 올리곤 중심을 살짝 뒤로 실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해낼 수 있다고, 확실히 장담은 못 해. 이건 변하지 않을 것 같다.”
프로듀서가 지닌 상실과 허들은 더 심해질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힘들어질지 상상하기도 힘들다.

프로듀서는 혼자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하고 싶어.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프로듀서는 그렇게 말하면서 등에 실린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다. 그리고 손에 올라간 따뜻한 온기도.

프로듀서가 앉은 기재는 의자로 쓰기 딱 좋은 직사각형 형태. 가로 폭이 넓고, 세로 폭도 사람 두 사람이 등을 기대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다.

기적 따윈 없다.

7개월이 지나 프로듀서는 실명했다. 프로듀서는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는 깜깜한 어둠에 빠졌다.

기적은 없다.

하지만……. 소나기가 올 때 누가 프로듀서를 차양으로 이끄는 건 기적 같은 거창한 게 아니다.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그저 당연한 일이다.

상실을 맛본 두 사람이 같은 차양 아래에 나란히 있는 건 기적이 아니다.
그런 걸 보통은 ‘당연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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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한 번에 올리려고 했는데 글이 잘려서 나눠서 올립니다. 이 글은 ‘안즈 담당 프로듀서는 죽을 만큼 후회했다’ 외전에 시키를 등장시키기 위해 시키의 캐릭터를 파악하려는 용도로 작성한 단편입니다. 어디까지나 캐릭터 파악 용도이므로, ‘안즈 담당 이하생략’하고 이어지진 않지만요.
정작 안즈 담당 이하생략 외전을 쓸지 말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래도 쓰는 입장에선 이 글이 시키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할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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