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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 상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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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09, 2017 03:12에 작성됨.

원작
아이돌 마스터 신데렐라 걸즈 - 반다이 남코 엔터테인먼트/ A-1 Pictures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자신을 이루는 기준일까? 어디서 어디까지가 자아고, 어디서 어디까지가 가치관이며, 어디서 어디까지가 주관일까?

사람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것들을 얻고 또 잃고 살아간다.

이를테면 돈. 현대 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물건. 사람은 그것을 얻기 위해 일한다. 그건 항상 얻기만 하지 않고 때론 잃기도 한다.

이를테면……. 명성. 세상에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학식을 쌓아 남들이 쉽게 이루지 못하는 일을 이루어 이름을 날린다. 그러나 이것 또한 잃기도 한다. 명성이 아무리 높게 쌓였을지라도 무너지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또 이를테면 인연. 사회는 인간과 인간이 엮여 형성된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 인연을 쌓는다. 돈을 얻기 위해서도 인연이 필요하고 명성을 쌓기 위해서도 인연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또한 얻기만 하지 않고 잃기도 한다. 계기는 원망, 시기, 질투일 수도 있고, 그저 불운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죽음 때문일 수도 있다.

사람은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을 얻고 잃으면서 살아간다. 어떠한 것을 얻어 기쁨을 얻고, 어떠한 것을 잃어 슬픔을 맛본다.

자, 여기까진 일반적으로 겪는 사례를 설명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조금 다른 사례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냐면 약간 모호하다. 그럼 개념적인 것이냐면 그것도 그렇다. 절충해서 물리적이고 개념적인 것. 물리적인 것이 성립해야 개념적인 것도 성립하는 것.

그리고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게 당연할 정도로, 쉽게 손에 넣은 것이다.

쉽게 손에 넣은 거라면 잃을 때 슬픔을 맛보지 않아도 될까? 과연 그럴까?

이를테면 감각. 시각, 촉각, 미각, 청각, 후각. 이것들은 신체의 여러 감각 기관을 통해, 즉 물리적인 경로를 통해 뇌에 전달되어 정신에 영향을 끼친다. 사람은 이런 감각들을 일부를 제외하면 당연하다는 듯이 몸에 지니고 태어난다.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므로 얻는 데에 아무런 수고도 들이지 않는다. 또한 어처구니없는 사고나 질병으로 쉽게 잃어버릴 수도 있다.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도 그야말로 한순간에.

와 닿지 않나? 하긴, 이건 극단적인 예다. 오감을 멀쩡히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비율은 그렇지 않은 사람의 비율보다 압도적으로 많으니까. 설명하기 힘든 예시일지도 모른다. 조금 감정에 휘둘려서 설명하기 힘든 예시를 든 것 같다.

하지만 이어서 이야기할 예시는 그야말로 적절하다고, 이 전제에 딱 들어맞는 건 이것밖에 없다고 표현할 만큼, 전제를 위해 생긴 사례인 양 자신 있게 소개할 수 있다.

지금부터 이야기할 건 어떤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모르는 사이에 다가와 인생에 멋대로 파고든 그 사람.

이를테면, 이치노세 시키의…….

사람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자신일까? 신체와 정신. 자기를 이루는 경계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그 일부를 잃으면, 사람은 과연 자기 자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
인생을 살다 보면 길을 헤매는 일이 많다. 문자 그대로 걷던 길을 헤매는 경우도 있고, 공부, 연애, 일 등등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거나, 실수 하나로 잘못된 길로 들어서거나 한다. 살면서 누구나 다 겪는다.

서류 파일을 작성하면서 어디를 어떻게 작성해야 하는지 헤매는 경우도 종종 있다. 서류 업무를 처음 하는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업무 4년 차에 서류 업무에서 헤매는 경우는 드물다. 그것도 자기가 만든 서식에서 그러는 거라면 더더욱.

어느 아이돌 프로덕션의 어느 프로젝트 룸에서, 어느 청년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모니터를 노려본다. 청년의 한쪽 귀에는 블루투스 이어폰이 자리하고 있었고, 이어폰은 PC 본체의 USB 수신기로 음성 데이터를 받아 청년의 귀에 흘리고 있다.

청년은 음성을 듣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또 음성을 듣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작업을 반복했다. 그러다 얼마 안 가 이어폰을 귀에서 떼어 책상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청년은 입을 비쭉 내밀고는 모니터에 이마를 박을 기세로 다가갔다.

TV나 모니터를 볼 땐 화면에서 적어도 30cm 정도는 떨어져야 눈 건강을 지킬 수 있다. 상식이다. 상식이지만, 모니터가 도통 보이지 않아서 어쩔 수 없다.

청년은 머리를 벅벅 긁적이곤 단축키를 눌러 돋보기 프로그램을 띄웠다. 청년은 프로그램의 확대 배율을 올려 문서의 글자를 살펴보았다. 화면에 무언가 크고 굵은 게 떴지만 청년의 눈엔 영 흐릿하게 보인다. 글자 테두리가 배경에 녹아든 것처럼 보여 무슨 글자인지 보기 힘들다.

청년은 포기하고 돋보기 프로그램을 내렸다. 그리곤 의자 등받이에 기대에 축 늘어졌다.
어차피 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전부터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지만, 허무함이 밀려온다.

“아아, 뭐 이러냐, 이거.”
청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귀에 다시 이어폰을 끼었다. 이어폰에서 화면 안의 글자를 읽는 딱딱한 음성이 흘러나온다. 음의 높낮이가 부자연스러운 구석이 있는, 인간미 없는 목소리. 청년은 거북함을 느끼면서 음성 안내에 따라 서류를 작성했다.

청년은 프로젝트 룸의 프로젝트 책임자이자, 이곳을 거점으로 삼은 아이돌 그룹 LiPPS의 담당 프로듀서다.

그의 눈은 7개월 전부터 안 좋아졌다. 언제부턴가 시야에 희끗희끗한 게 끼더니 사물의 경계선이 점점 흐려지는 증상이 발생했다. 프로듀서는 처음엔 그러다 말겠지 싶어 방치했지만, 날이 갈수록 증상이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악화하여 안과에 가 보았다.

처음엔 가벼운 검사로 시작했던 게 어느새 큰 병원의 뇌신경외과까지 올라가게 되었고, 정밀 검사 결과 프로듀서는 검사 당시 기준으로 14개월, 지금 기준으로 앞으로 7개월 후에 실명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안구 어디에도 문제는 없다. 각막도 멀쩡하고 시신경도 멀쩡하다. 뇌가 문제였다. 눈이 보내는 시각 정보를 뇌가 해석하지 못하게 되는 희귀병이었다. 필름 카메라로 치면 렌즈는 멀쩡한데 필름에 사진이 흐릿하게 기록되는 상황. 그나마도 상이 점점 더 흐려지는 상황이다.

하지만 어떤 원인으로 뇌가 그렇게 됐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난치병.

실명 선고를 받은 첫날, 프로듀서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다는 게 어떤 걸 뜻하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충격에 휩싸여 며칠 동안 무단결근을 하기도 했다. 결국 심상치 않다고 느낀 상사와 담당 아이돌들에게 끌려와 모든 걸 털어놓았지만.

처음엔 소수만 알았지만 딱히 비밀로 했던 건 아니었으므로 프로덕션 내에서 프로듀서의 사정은 알음알음 퍼져갔다. 그리고 소문이 퍼지는 속도와 비례해 프로듀서가 품은 우울함도 조금씩 가셨다.

세 달 정도는 처참할 정도로 일에 집중하지도 못하고, 일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꼴이었지만. 프로듀서는 그래도 꼬박꼬박 출근해 회사에 얼굴을 비쳤다.

눈이 이런데 회사에 나와도 되는지 의문을 품어 상사에게 상담했지만
“네가 그만두고 싶으면 말리지 않으마. 눈이 보일 때 쉬면서 마지막으로 새겨두고 싶은 걸 천천히 고르는 것도 좋겠지. 하지만 나는 네가 눈이 보일 때만이라도 업무를 완수하고 싶다면 그것도 말리지 않을 거다. 하고 싶은 대로 해.”
결정은 프로듀서의 몫으로 돌아왔다.

프로듀서는 고민했다. 눈이 이런데 제대로 일할 수 있을까? 오히려 회사에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닐까? 그런 의문의 이면엔 이런 생각도 붙어있었다. 그래도 여태까지 매일 했던 일인데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지금 그만두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프로듀서는 지금도 회사에 나와 업무를 보고 있다. 그러므로 프로듀서의 대답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겠지만, 사실 내막은 사람들이 보통 짐작한 것과는 살짝 다르다. 프로듀서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뒤로 미루었다. 프로듀서는 결정을 보류한 채로 프로덕션에 나오고 있다.

상사는 프로듀서의 이런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몰라도 나무라지는 않았다. 상사는 그저 프로듀서가 산업재해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도와주기만 했다. 병이 업무 때문에 생긴 건지 확실하지도 않지만, 프로덕션 반응도 긍정적. 오히려 프로듀서를 배려해 프로듀서의 PC에 텍스트 음성 변환 프로그램까지 설치하는 등 프로듀서의 업무 활동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프로듀서가 시력이 약해지기 전에도 느낀 거지만 업무 환경은 정말 복 받은 것 같다. 문제는 프로듀서 본인이 이런 환경에서도 업무의 버거움을 느낀다는 점이다.

프로듀서는 품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기분전환이 필요했다. 만년필 뚜껑을 따자 날카롭게 다듬어진 만년필 팬 촉이 먹잇감을 살피는 맹금류의 부리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프로듀서는 팬을 쥐고 원심력을 살짝 실을 준비를 하다가……. 말았다.

프로듀서는 손가락으로 팬 대를 툭툭 치기만 하다가 만년필 뚜껑을 닫았다. 그리곤 조금 떨리는 손으로 만년필을 책상에 올려놓았다.

프로듀서는 업무가 잘 풀리지 않으면 늘 팬을 돌렸다. 학생 시절부터 손에 새긴 버릇이었다. 정말 오랫동안 그래왔다. 그래서 팬 돌리기 실력만은 수준급이라 자부했고 스릴을 위해 팬 촉을 날카롭게 갈기까지 했지만……. 지금 와선 겁이 나서 팬을 돌릴 수 없다.

프로듀서가 다시 업무에 매진하려는 때에 무언가 길쭉한 것이 프로듀서의 시야 구석에 잡혔다. 잘 보이지 않아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오른쪽 어깨를 지나온 그것이 이내 프로듀서의 목에 감겨들었다.

프로듀서의 목에 따뜻함이 스며든다. 동시에 부드러운 숨결이 프로듀서의 뒷목을 간질였다.

“킁 킁 킁, 킁카 킁카~”
귀에 익은 목소리가 의성어를 열심히 읊는다.

시키의 목소리다. 시키가 멜로디에 의성어를 실어 흥얼거리면서 프로듀서의 목덜미 냄새를 맡았다. 시키의 거칠고 난폭한 숨이 프로듀서의 목을 들락거린다.

이치노세 시키. LiPPS 일원이자 프로듀서의 담당 아이돌. 빼어난 용모의 보유자이자, 무심코 보다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매력의 소유자이자……. 냄새를 각별히 사랑하는 화학의 천재.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는 괴짜. 그냥 아이돌이라기엔 개성이 넘치는, 오히려 그런 점이 매력 포인트인 아이돌이다.

“아 좋다~ 좋아~ 프로듀서는 오늘도 좋은 냄새가 나네. 풍미가 좋아.”
“정작 본인인 나는 내 냄새가 뭐가 좋은지 모르겠는데. 왜 맡는 거야?”
“그건……. 프로듀서의 냄새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나보단 슈코 냄새를 맡는 게 어때?”
“어제 맡았어.”
“그럼 프레데리카는?”
“유감입니다! 아까 오면서 맡았습니다~”
“그건 그렇고, 언제 들어왔어? 깜짝 놀랐어.”
프로듀서는 시키의 손을 조심스럽게 풀면서 물었다.

“지금 들어왔는데?”
“그래? 눈치 못 챘어. 문소리가 전혀 나지 않았는데…….”
“그럴 수도 있지. 냐하하! 근데 지금 뭐 해? 어디 보자~”
시키는 마치 뱀처럼 프로듀서의 옆구리를 비집고 마우스와 키보드를 잡았다. 마우스 휠을 드륵 드륵 드륵, 키보드를 타닥 타닥 타닥, 몇 번 움직이고 나서,
“여기랑, 여기랑. 여기. 오타가 있네. 수정했어.”
시키가 몸을 뺐다.

“이거 미안한걸. 오타를 내다니 참…….”
“겨우 오타 수정인데? 오타는 누구나 다 내는 거고.”
“그래도, 말이지. 난 볼 수가 없어서 말이야.”
“흐응, 그럼 말이야. 조수 군……. 우히히~ 보답으로 온종일 네 냄새를 맡을 권리를 줘!”
“그런 거 없어도 언제든지 와서 맡잖아.”
프로듀서는 의자를 빙글 돌려 시키와 마주한 채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이건 어떨까?”
시키가 프로듀서의 손에 만년필을 쥐여준다. 프로듀서가 조금 전까지 책상에 올려두었던 물건이다. 키보드와 마우스를 조작한 다음에 바로 가져왔나 보다.

“오랜만에 팬 돌리기 보여줘.”
프로듀서는 팬을 만지작거렸다. 팬이 프로듀서의 검지에 붙은 것처럼 깨끗하게 한 바퀴 돌았다. 프로듀서는 팬을 잡고 다시 만지작거렸다. 시키는 프로듀서의 손을 빤히 보았다. 프로듀서는 시키가 눈을 어떻게 떴는지 볼 수 없지만, 분위기로 어렴풋이 그걸 알았다.

프로듀서는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그리곤 팬을 돌리려 손을 움직이려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멈췄다.

“못하겠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레슨 다녀올게.”
시키는 총총거리며 프로젝트 룸을 나갔다. 프로듀서는 만년필을 수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시키가 나가니 프로젝트 룸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물론, 조금 전 대화도 조용했지만. 시키는 조용히 들어와 조용히 나갔다.

시키가 요즘 얌전하다.

-
눈이 안 좋아도 아직은 외출할 만하다. 사물이 덩어리져 보이지만, 그래도 보이기는 하니까. 그래서 프로듀서는 아직 외근 업무를 그만두지 않았다.

자가용을 운전하진 못하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이동은 할 수 있다. 흐릿한 시야와 멀쩡한 청각. 현대 사회에서 이 둘을 합치면 못 갈 곳은 없다. 오늘 방문한 곳처럼 전에 가본 적 있는 곳이라면 더더욱.

……만원 전철에서 사람을 피하긴 힘들지만.

프로듀서는 오늘도 영업 업무를 마치고 사무소로 귀환하려 건물 입구로 향했다. 그러나 프로듀서는 나가지 못하고 입구 근처를 서성이기만 했다.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프로듀서의 진로를 막았기 때문이다.

오늘 일기예보에 비가 온다는 소리는 없었다.

“갑자기 쏟아지네.”
“아까 하늘 못 봤어? 한참 전부터 쏟아질 것 같았거든.”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산을 펴고 밖으로 나간다. 프로듀서는 우산을 챙기지 않아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이 건물엔 휴게실은 있지만 매점은 없고, 편의점도 상당히 떨어져 있어 우산을 사러 가려면 필연적으로 비를 맞아야 한다.

프로듀서는 한숨을 내쉬곤 건물 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차피 소나기다. 금방 그치겠지.

프로듀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휴게실이 있는 층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버튼에 달린 점자가 평소보다……. 아니, 예전보다 더 예민하게 느껴졌다. 프로듀서는 아직 점자를 익히지 않았다. 지금도 배워야 하나 고민만 하는 정도로, 본격적으로 배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요즘엔 스마트폰에도 음성 인식 기능이 있다. 그만큼 기술이 발전한 시대지만 모든 물건에 일일이 컴퓨터 칩을 박을 순 없는 노릇이므로, 점자를 익히는 편이 생활에 도움이 될 게 뻔하다.
역시 배워야 하나……. 프로듀서는 혀에 감도는 쓴맛을 다셨다.

휴게실은 칸막이 여러 개로 공간이 나누어져 있다. 프로듀서는 칸막이 몇 개를 지나, 커피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버튼을 노려보았다. 프로듀서의 기억에 의하면 핫초코는 두 번째 버튼. 프로듀서는 두 번째 버튼을 눌렀다. 자판기에서 종이컵이 나오고 뜨거운 액체가 종이컵을 채웠다. 초코와는 다른 쌉쌀한 향이 흘렀다. 커피다.

프로듀서는 종이컵을 꺼내고 나서야 자판기에 쪽지가 붙어 있는 걸 확인했다.

쪽지 내용을 읽을 순 없지만, 아무래도 자판기가 고장 난 모양이다. 프로듀서는 한숨을 쉬곤 칸막이 몇 개를 지나 창가 자리에 앉았다.

비가 와서 기온이 내려간 탓인지 커피가 유달리 따뜻하게 느껴졌다. 프로듀서는 커피에 입을 대지 않고 그저 손으로 온기만 취했다. 창가로 시선을 돌린다. 빗물이 사정없이 창문을 때린다. 창문에 머리를 박은 빗물이 주르륵 미끄러진다. 프로듀서의 눈에는 창문이 마치 저절로 요동치는 것처럼 보였다.

볼만한 광경은 아니다. 프로듀서는 그래도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뇌리에 파고들었다. 프로듀서의 머릿속에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선명한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다. 시키와 처음 만난 날. 프로듀서는 그날의 기억을 회상했다.

그날도 이렇게 소나기가 쏟아졌다. 그날은 미카가 레귤러로 출연하는 드라마 촬영일이었다. 야외 촬영을 하다 갑자기 온 소나기에 촬영이 중지. 스태프와 출연진은 근처 건물에서 비를 피하며 하늘을 향해 원망이 눈길을 보냈다. 프로듀서도 조금 떨어진 다른 건물 차양 아래에서 핫초코를 마시며 비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프로듀서가 혼자 떨어진 이유는 자판기 때문으로, 스태프들이 모인 건물에 있는 자판기엔 핫초코가 없어서 프로듀서는 핫초코를 찾아 혼자 다른 건물로 흘러들어왔다.

프로듀서는 건너편 다른 건물 입구에서 연기 지도를 받는 미카를 흘겨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예고 없이 시키가 나타나 프로듀서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프로듀서는 처음엔 놀라서 자리를 피하려고 했으나, 시키가 프로듀서를 보는 눈이 심상치 않아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그래도 말을 걸 엄두가 감히 나지 않아 가만히 있었는데 멈춰 선 시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아, 여기일 텐데. 분명.”
“저기,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요?”
“냄새의 근원지는 여기인데…….”
시키는 턱을 괴고 고민에 빠졌다.

“냄새?”
프로듀서가 묻자
“응, 여기서 엄~청~ 좋은 냄새가 나거든. 근처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맡아서~ 아, 나 냄새 페티시가 있걸랑. 빗물에 씻기기 전에 찾으려고.”
시키가 고양이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냄새라……. 짚이는 게 있다. 프로듀서가 마신 핫초코. 자판기 제품이지만 향이 제법 달달해 좋다.

“여기서 나는 냄새 아닐까요?”
프로듀서는 시키에게 종이컵을 보였다. 시키는 그 근처에 코를 대고,
“킁! 킁! 킁가! 킁카!”
입으로 소리를 내면서 맹렬한 기세로 숨을 빨아들였다.

깬다……. 프로듀서는 무심결에 그런 말을 입에 올릴 뻔했다.

여고생이 성인 남성의 손 근처에 코를 대고 냄새를 열심히 맡는다. 비 때문에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만약 비가 오지 않았으면 프로듀서는 그 자리에서 정색하고 도망쳤을 것이다.

“아, 이거 걸리적거려.”
시키는 종이컵을 뺏어 들곤 쓰레기통에 던졌다. 종이컵이 곡선을 그리며 쓰레기통 정중앙에 골인. 다 마신 빈 컵이라서 다행이었다.

시키는 프로듀서의 손목을 잡고 손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자, 잠깐!”
프로듀서는 손을 빼려 했으나 시키가 양손으로 손목을 틀어잡는 바람에 손을 빼지 못했다. 시키는 프로듀서의 손 냄새를 다섯 번이나 깊이 들이마신 후에야 손을 놓았다.

“이거야! 내가 맡은 냄새가 바로 이거야! 좋다~ 폐에 스며들어~”
시키가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너! 일 재밌지? 재밌고 재밌고 엄청 재밌어서 열심히 하는 거지? 손에게 이렇게 맛있는 냄새가 나는걸! 틀림없어!”
시키는 프로듀서를 공격하듯이 질문을 퍼부었다. 프로듀서는 조금 당황했으나 저 멀리서 연기 연습에 집중하는 미카를 보곤 마음을 가다듬었다.

“네, 그런데요.”
“무슨 일 하는데?”
“아이돌 프로듀서를 하고 있습니다.”
“아이돌? 아하, 다른 손에 들고 있는 그거, 대본이야? 보여줘!”
드라마 대본은 일반인에게 보여주면 안 된다. 스포일러가 퍼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로듀서는 시키의 기백에 밀려 얼떨결에 시키에게 대본을 넘겨주었다. 시키는 대본을 빠르게 넘기면서 눈을 굴렸다.

시키는 대본을 덮고 자신만만하게 눈을 빛내며 보폭을 벌렸다. 얼굴을 진지하게 다듬곤 프로듀서를 삿대질했다. 그리곤 삿대질한 손을 천장으로 뻗으며 말했다.

“나는 온리 원으로만 남기 싫어! 내가 원하는 건 넘버 원! 난 좀 더 위로 향하길 원해!”
대본에 있던 내용이다. 미카가 연기한 캐릭터의 대사다. 스포츠에 관한 향상심과 야심을 품은 캐릭터. 시키는 초보자 티가 났지만 그래도 어색하지 않게 동작과 눈빛, 그리고 목소리에 향상심과 야심을 담아 대사를 읊었다.

“어때?”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시키가 프로듀서에게 대본을 돌려주었다.

“나 기프티드거든. 천재야. 재능 넘쳐. 저기 말이야, 내가 아이돌 하면 어떨 것 같아?”
그게 프로듀서와 시키의 첫 만남이었다. 그날 내린 소나기 같은 첫 만남이었다. 예고 없이 갑자기 찾아왔으니까.

회상에서 벗어난 프로듀서는 식은 커피를 조금씩 홀짝였다. 회상은 끝났지만 생각이 머리를 떠돈다.

이치노세 시키. 기프티드. 다재다능한 천재. 해외에 유학했지만, 싫증이 나서 귀국. 목적지 없이 어슬렁거리는 게 취미……. 시키는 그 취미를 실종이라고 부르는데, 그날도 실종 상태로 돌아다니다가 프로듀서의 냄새를 맡았다고 한다.

지금 다시 보면 굉장한 우연이라고 생각한다. 시키는 한 번 실종되면 정말 생각지도 못한 곳까지 잘도 간다. 게다가 100% 마음 내키는 대로 진로를 정해 찾기가 더 힘들다. 그래서 프로듀서는 시키와 만난 지 얼마 안 된 시기엔 시키의 방랑벽……. 아니, 실종벽 때문에 잔뜩 고생했다.

시키는 이런 실종벽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난 천재니까, 덤 같은 거야. 본능의 일부라고나 할까. 냐후후!”
천재는 괴이하다. 천재는 괴팍하다. 세상의 일반 인식은 그렇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시키의 실종벽이 천재라는 카테고리에 따라온 덤일까? 어느 때는 산으로 가고, 또 어느 때는 바다로, 또 어느 때는 들판으로……. 이리저리 쏘다니는 이게 그냥 덤일까?

그래서 어느 날 프로듀서는 시키에게 물었다. 다른 이유는 없냐고.
그러자 시키는 다소 그늘진 얼굴로 답했다.

“천재는 기본적으로 심심한 존재야. 호기심이 넘쳐도 금방, 바로, 금세 이해하고 말지. 뭐든 구조가 보이는 거야. 그래서 시시해져. 충족하고 싶은 욕구는 있는데 그걸 다 채우지 못해.  욕구를 채우는 방법은 알아. 하지만 그걸 이루지 못해. 세상이 못 따라오거든. 그래서 하나씩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거야. 그러다 이성이 지치면 결국엔 본능이 드러나는 거지.”
프로듀서는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입을 우물거리기만 했다. 시키의 말이 프로듀서의 가슴에 아리게 스며들었기에. 시키의 가정사에 대한 건 이미 알고 있다. 머리가 좋은 시키가 마음을 혹사하며 얼마나 달려왔는지도.

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해외로 갔지만, 시키가 그곳에서 얻은 건 싫증과 지루함이었다.
어머니에게, 시키는 자신이 어머니의 희망이란 소릴 들었지만, 정작 시키는 자기 자신의 희망이 뭔지 알지 못했다.

충족하고 싶은 욕구. 시키의 경우엔 아마…….

시키는 프로듀서의 가슴에 손을 대고, 셔츠를 잡아당겼다. 프로듀서의 고개가 순식간에 쭉 내려왔다. 시키는 키득거리면서 프로듀서의 귀에 속삭였다.

“어때? 그럴싸했어?”
시키는 평소 페이스로 돌아와 프로듀서를 살며시 밀었다.

“시키냥은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걸을 뿐입니다~ 와오~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대화는 거기서 끝났지만, 프로듀서는 여전히 의혹을 떨치지 못했다. 시키가 얻은 천재성은 선천적인 것. 노력해서 얻은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달성해서 얻은 것도 아니다. 그냥 태어났을 때부터 손에 쥔 것이다.

시키는 그냥 태어났을 때부터 보유한 재능 때문에 괴로움을 맛봤다. 선천적인 재능은 자연스럽게 기대를 불러 모은다. 그리고 그건 너무나도 쉽게 불행의 씨앗을 키울 양분이 된다.

주변의 기대를 충족하려고 머리를 굴린다. 주변의 기대를 충족한다.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파악한다. 그게 일상에서 당연한 것이 된다. 이런 과정이 몇 번 순환하면 지루함이 찾아온다. 이른바 천재의 숙명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시키가 처음 말했던 ‘덤’이란 표현에 부합한다.

단지 프로듀서가 의혹을 품은 건, 그걸 단순한 덤으로 치부해도 되는지였다.

종이컵에 커피가 반만 남자, 빗물이 창문을 때리는 주기가 점점 잦아들었다. 소나기가 슬슬 그치려는 모양이다. 잔만 비우고 나가자. 프로듀서는 종이컵을 입에 가져갔다. 그때 칸막이 너머에서 소리가 들렸다.

“어휴, 장난 아니게 피곤하네. 온몸이 뻐근하다.”
“네 나이가 몇인데 벌써 그러냐?”
프로듀서가 들은 적 있는 목소리 둘. 아마 다른 프로덕션의 프로듀서였던가 그랬을 거다. 프로듀서는 인사라도 할까 고민했다.

“놔둬. 나 같은 건 이미 다 낡아빠졌다고. 아아, 세상은 이제 기계판이 돼가는데 난 이게 뭐냐. 몸이나 혹사당하고 말이야.”
“기계판이라니 무슨 소리야?”
“알파고 말이야.”
“인공지능?”
프로듀서는 조금 더 두고 보기로 했다. 한창 재밌게 대화하는데 갑자기 나가서 끊기도 그러니까.

“얼마 전엔 또 한국에서 프로 9단을 꺾었다고 그러잖아.”
“아, 그거 때문에 엄청나게 시끄러웠지. 특이점이 오니 어쩌니 하면서 말이야……. 근데 그게 뭐?”
“넌 무섭지도 않냐? 이제 기계가 인간을 대처한다고.”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네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에도 인공지능이 있다. 임마. 공장들 가봐라. 다 기계로 돌리지.”
“어우, 난 그런 거 싫어. 소름 끼친단 말이야……. 인간이 기계하고 어떻게 경쟁을 해……. 질 게 뻔한데……. 능력이 떨어지잖아.”
“아직 안 온 특이점을 걱정하지 말고 네 몸이나 챙겨. 몸 막 굴리다가 훅 가면 기계한테 걷어차이기 전에 다른 사람한테 걷어차인다고. LiPPS 프로듀서 이야기 못 들었어? 몸 막 굴리다간 그렇게 된다고.”
뜬금없이 프로듀서의 이야기가 나왔다. 프로듀서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남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건 병이라면서?”
“병이 왜 왔겠냐. 과중한 업무 때문에 왔겠지. 딱 봐도 각이 잡히잖아. 거기 프로덕션에서 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산재 인정하고 보상해준다는데 이야기 끝났지. 겉으론 병이라지만 진짜로 찔리는 게 없으면 안 줬겠지.”
“에이, 그건 너무 나갔다.”
“그리고 지금 그 프로듀서가 물러나면 그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어. 내가 보기엔 그거라고. 이거 먹고 떨어지고 얌전하게 다른 사람한테 자리 내줘라. 이거지.”
“그런가? 그렇게 생각하기엔 너무 가혹하지 않냐.”
이 시점에서 프로듀서는 종이컵을 구깃구깃 접었다.

“이게 맞든 아니든 그 사람 자리를 노리는 사람은 진짜로 많겠지. LiPPS라고 LiPPS. 죠가사키 미카, 시오미 슈코, 하야미 카나데, 이치노세 시키, 미야모토 프레데리카. 이 중 한 명만 프로듀스해도 대단한데 다섯이나 하고 있잖아.”
“하긴 그렇지. 생각해 보니까 정말 탐나는 자리다. 나도 그쪽으로 이직이나 해볼까…….”
“꿈 깨라. 야. 이미 내정도 다 됐을 거다. LiPPS 정도면 프로덕션 하나를 먹여 살리는 캐시 카우라고. 자리 이미 다 찼겠지.”
프로듀서의 손아귀에 공처럼 말린 종이컵 뭉치가 굴러다닌다.

프로듀서는 칸막이 너머로 소리가 새지 않게 작은 한숨을 쉬었다. 나갈까 말까 고민했지만 안 나가는 게 나을 것 같다. 지금 나가기엔 타이밍이 최악이다. 그냥 저 둘이 자리를 뜨길 바리는 수밖에.

대화는 얼마 안 있어 끝났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그러나 프로듀서는 한 가지 간과했다. 저 둘이 지나려는 길에 프로듀서가 있는 칸막이가 있는 걸.

칸막이 입구 사이로 프로듀서와 상대편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상대편이 알기 쉽게, 지금 프로듀서의 눈으로 보기에도 알기 쉽게 화들짝 놀랐다.

“어? 저 사람…….”
“윽, 야, 조용히 해. 어차피 우리 못 볼 테니까 모른 척하고 그냥 가면…….”
“소리를 들었겠지! 생각 좀 하자.”
이 녀석들 바보인가……. 프로듀서는 상대편 쪽으로 시선을 빤히 향하면서 턱을 긁적였다. 상대편 두 사람의 얼빠진 모습 때문에 프로듀서는 허탈함을 느꼈다. 프로듀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저 기억하시죠?”
프로듀서는 싱긋 웃으면서 상대방들에게 악수를 청했다. 둘은 마지못해 번갈아 프로듀서와 손을 잡았다. 어색한 악수가 끝나고 프로듀서가 말을 이었다.

“갑자기 소나기가 와서요. 비가 그칠 때까지 여기 있으려고 했거든요.”
조금 전부터 계속 여기에 있었다는 말을 돌려서 했다.

“저기, 조금 전에 한 말은 그냥 안타까워서 그런 거고요. 너무 마음에 두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담이었고요.”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꺼낸 말이었겠지만 프로듀서의 미간이 씰룩이는 결과만 낳았다. 지금 말을 꺼낸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이 그걸 파악했는지 손까지 저어가며 말을 더했다.

“나쁜 뜻으로 말한 건 아닙니다. 그냥 업계 동향을 이야기한 겁니다.”
……참고로, 손을 저어가며 말을 하는 사람은 프로듀서가 자기들을 못 볼 거라고 말했던 쪽이다. 아무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더 바보들인가 보다. 프로듀서는 빨리 대화를 끊고 나가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으나…….

“오히려 저희는 당신을 응원하고 있어요! 그 있잖아요, 장애를 극복하고 대단한 일을 해낸 사람들 있잖습니까. 마라톤, 요리, 이런 여러 분야에서요! 프로듀스 업계에서 당신이 그런 사례가 되면 용기를 얻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저도 그럴 거고요!”
“맞아요! 저희는 그런 감동적인 일화를 보고 싶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프로듀서는 얼굴을 긁적이고, 한숨을 내쉬고, 구둣발을 지르밟고, 팔짱을 끼고,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고, 바닥을 향해 고개를 내리고, 머리를 긁고, 이미 공처럼 된 종이컵을 주물렀다.

“음…….”
프로듀서가 신음한다. 상대방들은 긴장했는지 프로듀서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했다.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프로듀서는 하고 싶은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여러 말 중에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하고 싶은 말만 골라 입에 담았다.

“제가 업계에 남든, 그만두든, 뭘 어떻게 하든 말입니다. 뭐가 어떻게 됐든, 그건 당신들을 위해서, 제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프로듀서는 굳어있는 상대방들을 향해 방긋 웃었다.

“아시겠죠?”
프로듀서는 저들 좋아하라고 이렇게 된 게 아니다. 프로듀서는 감정을 배제하고 최대한 담백하게 그것만을 확실하게 전했다.

실질적인 이야기는 이렇게 끝났다. 그 후 간단한 작별인사와 함께, 모임이 끝났다. 프로듀서는 쓰레기통에 종이컵을 버리러 가고, 둘은 가던 길을 서둘렀으므로 완전히 엇갈린 이별. 어차피 같이 걷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기에 하나도 아쉽지 않다.

프로듀서도 슬슬 내려갈 준비를 했다. 그래서 통로로 향하려 했는데 통로 근처에서 누가 멀뚱히 서 있었다. 어느 정도 가까워지고 나서야 프로듀서는 그게 시키라는 걸 알아차렸다. 시키한테서 나는 냄새가 났으니까. 여러 아로마를 혼합한 향. 시키가 달고 다니는 냄새다.

“조수 군, 수고했어~ 우산 없지? 나한테 감사하도록!”
프로듀서는 시키에게서 우산을 받았다. 우산은 겉이 빳빳했고 손잡이에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시키가 오늘 이 근처에서 일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만날 줄은 몰랐다. 가뜩이나 소나기까지 왔고.

“고마워, 근데 여기까진 어떻게 왔어?”
“아까 네가 건물 입구에서 서성이는 걸 봤거든.”
“상당히 전이잖아?”
“그래서 편의점까지 가서 우산을 사 왔어.”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 서 있는 게 이해된다. 이 건물에서부터 편의점까지 거리가 상당하니까. 타이밍이 설명된다.

“그래? 그럼 시간이 맞네. 지금 왔지?”
“아니? 네가 저기 앉아서 한창 사색에 잠겼을 때 왔어.”
“얼마나 빨리 뛰어갔다 온 거냐…….”
그럼 조금 전에 프로듀서가 다른 프로듀서들과 나눈 대화도 들은 셈인데……. 프로듀서는 그걸 물어볼까 고민했지만, 시키가 언급하지 않는 이상 그냥 가슴 속에 묻어두기로 했다.

프로듀서는 대신에 아까 앉아있을 때 생각했던 걸 끄집어내기로 했다. 조금 솎아내서.

“시키, 뭐 물어봐도 돼?”
“냐하하, 질문을 허하노라!”
“너 요즘 안 사라지잖아. 슬슬 다시 사라지고 싶지 않아?”
“응? 왜? 내가 없어지면 네가 곤란하잖아.”
“전에 실종이 본능이라고 그랬으니까. 그게 생각나서.”
“으음, 확실히 그랬지. 아마?”
프로듀서는 입이 근질근질했다.

너는 텅 빈 걸 채우고 싶어서, 허전함을 달래고 싶어서 실종되는 거 아니야? 그건 너한테 중요하지 않아?

말하는 건 쉽다. 발음하는 건 쉽다. 그런데 이걸 시키에게 물어보는 건……. 어렵다.

“왜 그래? 갑자기 멍하니 있고. 변태 놀이 할래?”
“아니, 괜찮아. 변태 놀이는 됐어.”
프로듀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참지 말고 말해?”
시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흐릿하지만 이런 세세한 동작은 아직 눈으로 담을 수 있다.
“괜찮아, 별거 아니니까.”
이쯤 되니 시키도 추궁하지 않았다. 둘은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향했다.

“킁 킁, 킁카 킁카! 너한테는 여전히 좋은 냄새가 나. 내가 정말 좋아하는 냄새야.”
엘리베이터 안에서 시키가 프로듀서의 냄새를 맡았다. 엘리베이터 안은 단둘이고, 어차피 냄새를 맡기만 하니 프로듀서는 시키를 말라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건물 입구에 다다르자 시키가 말했다.
“어라, 비가 그쳤네. 유감.”
어느새 비가 그쳤다.
시키는 기껏 사 온 우산이 쓸모없어져서 시무룩한 모양이다.

“이런 날도 있는 거지. 그래도 고마워. 우산을 일부러 가져와 줬잖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래서 난 기뻐.”
“아까 여기에 들어오자마자 건네줬으면 딱 맞았을 텐데. 왠지 손해 보는 기분이야. 으음……. 보상을 받아야겠어. 프로듀서, 그것 좀 보여줘.”
“뭔데?”
“팬 돌리기.”
“그건……. 이제 못 해. 미련을 버렸어.”
“팬 가지고 있잖아.”
프로듀서의 수트 안주머니에 아직도 만년필이 있다. 프로듀서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키가 대체 이걸 언제 간파한 건지…….

“어떻게 알았어?”
“땡~ 심리테스트였습니다~ 힌트! 나는 팬이 만년필이라곤 한마디도 안 했습니다!”
프로듀서는 혀를 찼다. 찔러 본 거였나. 그래도 어떤 의미로는 시키가 프로듀서의 속을 간파한 셈이다.

“안 돼?”
“어쩔 수 없어.”
프로듀서는 능청스럽게 굴며 건물을 나섰다. 시키가 프로듀서의 뒤를 따른다. 어쩐지 찰박거리는 시키의 발소리에서 아쉬움이 묻어나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착각일까?

-
시키는 프로듀서를 프로듀서라고 부른다.

“프로듀서, 오늘 일은 뭐야?”
프로듀서가 시키를 프로듀스하니까 프로듀서.

시키는 프로듀서를 조수 군이라고 부른다.

“조수 군, 인간관계는 화학반응 같다고 생각하지 않아? 조합에 따라 여러 가지 바뀌는 거지. 조수 군이 날 아이돌이란 세계와 만나게 한 것처럼. 오늘도 아이돌 실험은 흥미롭네~ 그야말로 인체실험이야, 조수 군.”
이런 까닭에 조수 군.

시키는 프로듀서를 너라고 부른다.

“너는 정말 편해서 좋아. 여러모로 말이지.”
그래서 너.

프로듀서, 조수 군, 너. 셋 다 프로듀서를 뜻한다.

시키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것치곤 프로듀서를 여러 호칭으로 부른다. 전부 프로듀서의 몇몇 일면에서 따와 부르는 거다. 시키는 상황과 기분에 맞춰 프로듀서를 다르게 부른다. 어떤 때는 프로듀서, 어떤 때는 조수, 어떤 때는 너. 시키가 그때그때 호칭을 정하는 데엔 변덕이 큰 영향을 주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기준은 있다.

프로듀서도 시키와 오랜 시간 같이 지내면서 그걸 파악했다. 그래서 시키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 묘하게 얌전한 시키에게서 위화감이 느껴진다.

시키가 이상한 건 아니다. 그저 시키가 부르는 그 호칭이 묘하게 낯설게 느껴진다. 프로듀서는 이따금 생각한다.

프로듀서, 조수 군, 너. 이것들이 정의하는 게 정말 프로듀서 본인일까?
하고,

지금 프로듀서는 시키가 보는 것처럼 프로듀서가 맞을까? 프로듀서는 시키에게 조수 군으로 보일까? 프로듀서는 시키가 너라고 부르는 그 사람인가?

프로듀서가 흐린 세상에서 보는 시키는 여전히 시키인데……. 정말 이상하다.

프로듀서가 어떤 고민을 품든 어떤 생각을 하든 시간은 자기 할 일을 한다.

“요즘 어떤가?”
“솔직히 말해서 죽을 맛이네요.”
“그런 것치곤 꾸준히 나오는 모양이네만…….”
“저도 왜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모르겠어요. 그래도…….”
“뭔가?”
“역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있어요. 짐작은 했지만 힘드네요.”
“그런가……. 무리하지 말게. 자네 좋을 대로 하면 돼.”
“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 땐 이런 대화도 나누며, 프로듀서는 시간의 흐름에서 허우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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