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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리티 P 시리즈] 네가 모르는 이야기, 너만이 아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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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06, 2017 03:40에 작성됨.

<퍼스널리티P 시리즈의 이전 이야기들>

1. 타카가키 카에데 <밤 바다의 이정표>

2. 사기사와 후미카 <First Step>

3. P <인내의 삶> 

4. <신데렐라 걸스> 

5. 센카와 치히로 <함께 걷는 길> 

6. <'어제'가 '오늘'과 함께 할 '내일'에게> 

7-1. <방랑자라고 다 길 잃은 것은 아니다> 

7-2. 호죠 카렌 <히로인과 소녀, 꿈의 무게> 

 

<외전격 이야기들>

메모리얼 <사쿠마 마유의 회상>

사기사와 후미카<걷지 않은 길>

사기사와 후미카 <파트너>

 


 

12월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 날씨가 급격히 추워졌다. 쌀쌀하던 바깥의 날씨는 이제 더 이상은 ‘쌀쌀하다’라는 말을 사용하기 힘들 정도로 수은주의 위치가 낮아져 있었다. 

 

점심시간을 넘긴 오후 2시.

CG프로덕션의 남자 기숙사의 로비는 무척이나 한산했다. 아니, 한산한 것을 넘어 을씨년스러운 공기마저 흐르고 있었다. 기숙사의 철거가 결정되자 기숙사에 살던 사원들은 하나둘씩 새로운 거주지를 찾아 기숙사를 떠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던 몇몇 사람들은 철거 날짜까지 확정된 이후에야 별 수 없다는 듯 기숙사를 떠나갔던 것이다.

기숙사의 로비와 2층을 연결하는 계단을 타고 커다란 녹색 박스를 든 프로듀서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모습을 나타냈다. 비록 지금이 한창 몸을 움직이는 중이라지만, 트레이닝 복 바지 위에 하얀색 반팔 셔츠 한 장만을 걸치고 있는 모습은 너도나도 옷깃을 여미는, 칼바람이 몰아치는 한겨울이라는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엇차!”하는 기합소리와 함께 녹색으로 채색된 커다란 플라스틱 박스가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쿵, 하는 묵직한 소리가 로비에 징징 울리고, 벽을 타고 올라간 진동으로 천장에 매달린 전등이 약간 흔들렸다.

 

“흠, 이 정도면 되려나.”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커다란 플라스틱 박스를 돌아보며 프로듀서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성인 남성이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커다란 플라스틱 박스가 일곱 개. 야근이 일상인 샐러리맨. 그것도 혼자 사는 사람의 집에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다소 많은 짐이었다.

박스를 내려놓고, 프로듀서는 자신의 왼팔에 차고 있는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예상보다 작업이 조금 빨리 끝났던 것이다.

 

“어디……마지막으로 작별인사라도 할까.“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목에 두른 수건으로 닦아내며, 박스를 테이프로 밀봉한 프로듀서는 다시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평소와 달리 활짝 열린 현관문 너머로 보이는 을씨년스러운 풍경은,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의 유일한 거주지이자 쉼터로써 기능했던 공간이었다. 역시나 어제와는 달리 신발을 신은 채로 방 안으로 들어간 그는 방 안을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인연이라면 인연이었던 것인지, 이렇게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아깝다.”

 

텅 빈 방에 울려 퍼지는 그의 목소리와 방 안을 둘러보는 그의 시선에는 차마 놓지 못한 미련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프로덕션 매치 이후 1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CG프로덕션의 제1별관에 위치한, 평소였다면 여러 사람들이 모여 북적거렸을 신데렐라 걸즈의 프로젝트 룸에는 무척이나 한산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아니, 한산함을 넘어 적막감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프로듀서도, 치히로도, 미유도, 아무도 없는 사무실 안에는 그저 설정해둔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이따금씩 돌아갔다 멈추기를 반복하는 에어컨의 소음만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잠시 후, 달칵, 하고 사무실의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부드럽게 열리는 문 너머로 상자와 서류뭉치를 든 두 명의 여성의 모습이 나타났다. 두 사람 중 약간 키가 작은 한 명은 밝은 연녹색 유니폼을, 그리고 그녀보다 머리 반 개 정도 키가 큰 나머지 한 사람은 단정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죄송해요……제가 미숙해서…….”

“괜찮아요! 미유 씨는 이제 들어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으셨으니까. 다음부터는 제가 한 것처럼 하시면 되요. 아시겠죠?”

“네…….”

“자료는 프로듀서 씨 자리에 놔둬 주세요. 저는 먼저 이걸 정리하고 있을게요.”

 

연녹색 유니폼을 입고 있는 여성, 센카와 치히로는 품에 안고 있던 상자를 사무실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신데렐라 걸즈’라는 명찰이 붙어 있는 그것은 소포나 팬레터, 편지 등이 들어있는 수발 상자였다. 치히로가 상자 속을 가득 채운 물건들을 정리하는 사이, 정장 차림의 여성, 미후네 미유는 가지고 온 서류를 프로듀서의 자리에 올려놓은 뒤 곧바로 치히로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거들기 시작했다.

 

“뭔가……생각보다 적네요.”

“그러게요……역시, 프로덕션 매치 때문이려나…….”

“아…….”

 

말끝을 흐리면서 치히로는 고개를 돌려 프로듀서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인터뷰 자료를 비롯한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그의 자리에는 ‘외근’이라거나 ‘회의실’같은 행선지가 걸려 있는 평소와 달리, ‘반일 휴가’이라는 보기 드문 팻말이 걸려 있었다.

 

“……아쉽게 됐네요. 다들 열심히 했는데…….”

“그렇죠, 다들 정말 열심히 했는데……이렇게 되고 나니까, 어쩐지 프로듀서 씨가 프로덕션 매치를 꺼려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분명, 노력을 보답 받지 못한다면, 무척이나 허탈하겠죠.”

 

치히로의 말에 미유는 벽에 걸린 일정표를 바라보았다. 프로덕션 매치를 마지막으로, 3개월간 ‘신데렐라 걸즈’는 임시휴업에 들어간다. 그 때문인가, 연습생들의 일정을 제외하면, 일정표에는 프로덕션 매치에 참가했던 아이돌들의 인터뷰나 취재 관련 일정만이 잡혀 있었다. 다만 특이한 점이라면, 취재 일정이 무척이나 많이 잡혀 있었다는 점이었다.

 

프로덕션 매치가 끝난 이후, 사무실에는 신데렐라 걸즈에 대한 인터뷰 문의가 빗발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신데렐라 걸즈의 패배로 끝난 프로덕션 매치였지만, 모두가 3:0 패배를 예상한 것과는 정 반대로, 천하의 765올스타즈를 상대로 2:2까지 끌고 가는 박빙의 승부를 펼쳤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화룡점정을 찍은 것은 건곤일척의 승부가 펼쳐졌던 마지막 5라운드였다. ‘발라드’라는 장르 안에서 가창력과 무대를 장악하는 힘으로는 당대 최강이라는 평가를 듣던 미우라 아즈사를 상대로 올라온 호죠 카렌이라는 루키는, 승패를 반쯤 정해두고 매치를 바라보던 뭇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 충격의 강도를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인지, 프로듀서의 자리에 쌓여 있는 취재 자료의 대부분에는 카렌에 대한 내용들이 들어 있었다.

 

“……치히로 씨?”

“네? 무슨 일인가요?”

 

일정표를 바라보던 그녀는, 자신을 부르는 미유의 목소리에 다시 테이블 위로 시선을 되돌렸다. 미유가 들고 있던 것은, 손바닥 두 개 정도 크기의 작은 상자였다.

 

“이런 게 있는데요……아무래도 프로듀서 씨에게 온 것 같아서요.”

“어디, 저도 잠깐 볼게요……받는 사람은 프로듀서 씨가 맞는데……보낸 사람이……’W. Johnson’?”

“아는 이름인가요?”

“아뇨,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이름이라서요. 언제였더라…….”

 

상자를 들고 있던 치히로는 미간을 좁히며 기억을 뒤적였지만, 결국 그것을 떠올리지는 못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으, 모르겠네요. 분명히 언제 본 적이 있는 이름인데…….”

“그럼, 프로듀서 씨의 자리에 놔두면 될까요…….”

“네, 그렇게 해요.”

 

단단히 밀봉된 상자를 옆에 내려놓고 두 사람은 작업을 재개했다.

 

****

 

“안녕하세요.”

“우리 왔어!”

 

한 시간쯤 지나, 우편물의 선별 작업을 마친 치히로와 미유가 제각각 자신의 업무를 처리하고 있을 무렵, 사무실에 두 사람이 더 모습을 나타냈다. 인터뷰를 마치고 막 돌아온 카에데와 미즈키였다.

 

“아, 두 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아~아. 무슨 인터뷰를 두 시간이나 하는 건지……얼굴에 경련 일어날 것 같아.”

 

카에데와 함께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미즈키는 양 손으로 두 뺨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런 두 사람에게 미유가 조심스레 다가갔다.

 

“저기……차라도 드실래요……?”

“저는 따뜻한 걸로 부탁드릴게요.”

“나는 커피로 줘요.”

“네.”

 

미유가 급탕실로 들어간 뒤, 치히로는 슬며시 두 사람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두 분, 오늘 인터뷰 끝나면 바로 퇴근하셔도 되는데, 뭐 하러 오셨어요?”

“뭐 딱히 할 일도 없고, 집에서 뒹굴거리는 것도 마뜩찮아서.”

 

미즈키의 말에 카에데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치히로는 눈을 가늘게 떴다.

 

“……본심은요?”

“오늘이라면 P군도, 두 사람도 한가할 테니까 마시러 가고 싶어.”

 

미즈키의 말에 카에데는 더욱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치히로는 가볍게 한숨을 토해냈다.

 

“저야 괜찮다지만……프로듀서 씨는 안 되요. 오늘 오후에 반차 쓰고 조퇴하셨거든요.”

“응? 오전에는 있었잖아? 출장이야? 아니면 외근?”

“아뇨, 그건 아니고요.”

 

치히로는 손을 들어 소파 옆에 걸린 일정표를 가리켰다. 저번 달의 빡빡한 일정에 비하면 거의 비어있다시피 한 일정표에는 보기 드물게도 ‘반일 휴가’라는 표시와 함께 프로듀서 본인의 개인 일정이 적혀 있었다.

 

[이사 예정]

 

“엥? 이사?”

 

일정표를 바라보던 카에데가 짝, 하고 가볍게 손을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기숙사 철거한다고 했었죠.”

“네. 그것 때문에 이번 달부터 남자 기숙사가 폐쇄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번 1주일내내 괜찮은 집을 알아보러 돌아다니신 모양이에요.”

“그 사람 유급 엄청 쌓여있지 않나? 근데 계속 출근했어?”

“연습생들 있잖아요. 11월 말에 오디션도 한번 있었고요.”

 

치히로의 대답에 미즈키는 가볍게 손바닥을 마주쳤다.

 

“아. 맞아. 그랬지.”

“정작 저희들이 어제까지 휴가였으니 전혀 눈치를 못 챘네요.”

“그럼, P군은 이번 주 내내 계속 연습생들 봐 주고 있었어?”

“네. 오늘 오전에도 애들 체력단련 할 때 같이 뛰고 오셨어요.”

“이거 참, P군 답다고 해야 하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역시나네요.”

 

카에데와 치히로는 쓴웃음을 지으며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 때, 무언가가 떠오른 듯 미즈키가 무릎을 탁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러면 되겠네!”

 

두 사람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느낀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치히로, P군이 이사하는 곳 주소도 알아?”

“주소요? 그야 인사팀에 미리 연락이 갔을 테니까 물어보면 나오겠죠……?”

“좋아! 장소는 됐고, 미유랑 치히로, 오늘 시간은? 아, 카에데는 됐어. 어차피 한가한 거 알고 있으니까.”

 

급탕실에서 나와, 세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에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내려놓고 있던 미유는 미즈키의 손가락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자 당황하며 자신도 모르게 쟁반을 끌어안았다.

 

“저, 저기, 저도요……?”

“물론! 이 사무실에 들어온 이상, 우리는 공동체라구!”

“그래서, 뭘 하실 속셈이죠?”

 

치히로의 말에, 손으로 술잔을 기울이는 시늉을 하며 미즈키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집들이지.”

“우와, 아이돌이 해서는 안 될 표정을 짓고 계셔.”

 

 

약간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던 카에데는 잔뜩 신이 난 모습으로 계획을 짜는 치히로와 미즈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미유가 그녀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저기, 카에데 씨……?”

“아, 미유 씨……무슨 일인가요?”

“혹시……언짢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네……?”

 

미유의 말에 놀란 듯 눈을 조금 크게 치뜬 그녀였지만, 그녀는 곧바로 평정심을 되찾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아무 것도 아니에요.”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그녀는 미즈키와 치히로를 바라보며 자신에게만 들릴 만큼 자그마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정말로.”

  


 

 

한편, 새 보금자리로 옮겨간 프로듀서는 자신의 짐을 정리하느라 또다시 진땀을 빼고 있었다.

새로 이사한 맨션은 이전의 기숙사에 비하면 분명히 큰 집이었다. 방 개수도 하나가 더 많았고, 거기에 부엌과 욕실, 베란다까지 구비된,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는 집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으음……이거, 방 두 개를 써야 하나……?”

 

팔짱을 낀 채, 자료들로 가득 찬 방 안을 둘러보며 프로듀서는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이사하면서 가지고 나온 플라스틱 박스 7개 중에서 그의 진짜 개인용품이 든 것은 단 한 개에 불과했다. 나머지 여섯 개를 가득 채운 것은 지난 2년간 그가 직접 발로 뛰면서, 혹은 사람들을 통해서 얻은 자료들이었다.

프로듀서는 슬쩍 몸을 돌려, 문 밖에 늘어선 박스들을 바라보았다. 기존에 모아 두었던 자료들 중 약 3할은 회사의 자료실에 옮겨 두었지만, 그새 새로이 추가된 자료들과 신규 연습생들의 자료 덕분에 자료들은 이미 작은 방 하나를 가득 채우고도 2상자나 더 남아있는 상태였다.

그 때, 그의 손목에서 땡땡땡, 하는 가느다란 소리가 울렸다. 그는 자신의 왼팔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를 듣고서야 자료에서 시선을 떼고 자신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미 시간은 오후 6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후, 조금만 쉬었다 해야지.”

 

아직 정리하지 못한 자료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플라스틱 박스의 덮개를 다시 덮고, 상자를 방 안으로 밀어 넣은 프로듀서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팔에 찬 밴드로 닦아내며 거실로 나왔다.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땀을 식히고 있자니, 그의 개인용 휴대전화가 윙윙거리는 진동을 울렸다. 휴대전화의 화면에 떠오른 번호는 프로듀서 역시 잘 알고 있는 번호였다.

 

“네, P입니다. 정리요? 거의 다 끝났죠. 네? 지금 오신다구요? 알겠습니다.”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프로듀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돌아보았다. 조금 쉬어 둘 생각이었지만, 지금부터 찾아올 손님에 대비해서 집을 조금 정리해 둘 요량이었다.

 

“냉장고는 비어 있지만……뭐, 그거야 찾아 올 사람이 알아서 하겠지.”

  


 

 

오후 6시, 오늘 할당된 업무를 모두 마친 치히로와 미유는 회사 근처에 있는 대형 마트로 향했다. 먼저 퇴근한 미즈키, 카에데와 합류하고, 집들이에 사용할 선물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과 합류한 뒤, 일행은 식료품 코너와 연결된 가정용품 코너를 거닐고 있었다.

 

“역시 혼자 사는 남자는 휴지가 필요하겠지. 좋아, 난 이걸로 할래.”

“저는 이걸로 할게요.”

“소면 세트? 그런 걸로 충분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프로듀서라면.”

“헤에……치히로랑 미유는 어때? 정해둔 거 있어?”

“네……저는 세제로 하려고요……아무래도 혼자 살다 보면, 세제가 금방 떨어지곤 하니까요.”

“글쎄요……생각해보니, 저는 프로듀서 씨가 뭘 좋아하는지를 잘 모르네요.”

“저건 어떤가요? 프로듀서, 저래보여도 취미가 요리거든요.”

 

쓴웃음을 짓던 치히로는 카에데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생활용품 코너의 가장 위쪽 선반에 들어있는 그것은 냄비 네 개가 들어 있는 프라이팬 세트였다.

 

“가격도 적당하고……그럼, 저는 이걸로 해야겠네요. 어……이거, 선반이 조금 높……아?”

 

프라이팬 세트가 있는 선반 앞에 서서 가격표를 확인한 치히로는 곧바로 까치발을 들면서 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상자가 생각보다 무거웠던 것인지, 프라이팬이 든 상자는 잠깐 휘청거리더니 곧바로 그녀의 손을 벗어나, 선반 아래에 서 있던 그녀를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앗……!”

 

마치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박스를 바라보며 치히로는 곧바로 닥쳐올 아픔을 대비해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녀가 예상했던 통증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무거운 것이 떨어지면서 들려올 커다란 소음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들려온 것은, 그녀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어이쿠, 큰일 날 뻔 했네. 센카와 씨? 괜찮아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무척이나 낯익은 목소리에 잔뜩 몸을 움츠리고 있던 그녀는 고개를 들면서 슬며시 눈을 떴다. 까만 운동화, 오래 입은 듯 물이 빠진 청바지, 두툼한 항공점퍼가 차례로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프, 프로듀서 씨……?”

 

마침내 완전히 눈을 뜬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녀가 까치발을 들고도 닿지 못한 선반에 너무나도 손쉽게 박스를 올려놓는 프로듀서의 모습이었다. 크게 놀란 치히로가 쿵쾅쿵쾅 뛰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무렵,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세 사람이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

 

“어디 다친 데는 없죠?”

“네? 아, 네……더, 덕분에요.”

““치히로 씨!””

“치히로! 괜찮아?!”

 

***

 

잠시 후, 프로듀서의 뒤를 따라 마트를 나온 일행은 나란히 그의 차에 몸을 실었다.

 

“죄송해요, 신세를 지러 가는 건데 차까지 태워주셔서…….”

“아뇨, 어차피 집에 가던 길인데요 뭘.”

“그런데, 프로듀서는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혼자 드시기에는 꽤나 많아 보이는 양인데.”

 

조수석에 앉은 카에데의 질문에 “예리하시네요”라고 말하며 그는 교차로의 신호에 부드럽게 차를 정지시켰다.

 

“실은, 오늘 집들이 오신 ‘선객’이 한 분 계시거든요. 그 분이 식사를 안 하고 오셔서 뭔가 대접을 해 드려야 하는데, 마침 이사하느라 냉장고가 텅 비어 버려서 말이죠.”

“에? 선객? 그럼 우리가 가면 안 되는 거 아냐?”

“아뇨, 괜찮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는 사람이고, 뭣보다 집주인인 제가 괜찮거든요.”

“헤에, 우리가 아는 사람이야? 업계 쪽?”

“뭐……업계라면 업계죠.”

 

신호가 바뀌자, 프로듀서는 빌딩과 빌딩 사이의 골목길로 차를 몰았다. 그렇게 몇 번인가 굽이치는 골목길을 지나가자, 갑자기 넓은 도로가 나타나면서 담장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맨션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쿄의 정신나간 지가 때문인가, 맨션 치고는 그다지 커 보이지는 않았지만, 진입로의 아스팔트나 건물의 겉면만을 본다면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맨션이었다.

맨션의 정문을 통해 단지 안으로 들어간 그는 곧바로 주차장의 비어있는 자리에 자동차를 세웠다.

 

“저는 짐을 들고 내릴 테니까, 먼저 현관에서 기다려 주세요.”

“응, 고마워, P군.”

“네, 수고하셨어요, 프로듀서.”

 

프로듀서가 트렁크에서 자신의 짐을 내리는 사이, 네 사람은 맨션의 현관으로 향하면서 신기하다는 듯 맨션의 단지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기 시작했다.

 

“헤에, 여기구나.”

“무척 깔끔한 곳이네요. 새로 지은 곳인가?”

“아, 일간지에서 광고 본 적 있어요. 아마 작년에 지었다던가……?”

 

현관 안쪽에 우편함을 배치한 탓인지 맨션의 현관은 2중문으로 되어 있었다. 집배원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바깥쪽의 문은 별 다른 잠금장치가 없었지만, 건물 내부와 연결된 안쪽 문에는 인터폰과 연결된 특수한 잠금장치가 설치되어, 열쇠나 비밀번호가 없다면 들어갈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화장지가 들어 있는 가방을 반대 손으로 고쳐 쥐면서 미즈키는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뭐, P군이 선택한 곳이니까 그러려니 했지만 말이야……이건 좀 심하네.”

“그렇죠…….”

 

그녀의 말에 세 사람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건물 자체는 질투가 날 정도로 좋은 건물이었지만,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맨션의 위치는 ‘거주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장소였다. 작은 공원과 뒷산이 있을 뿐, 나머지 세 방향은 모두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여 있었던 것이다.

 

“여기, 생각보다 저희 집이랑 가까워요. 치히로 씨네 집도 이 근처였죠?”

“네. 전철역으로 두 개만 더 가면 되요. 프로듀서 씨 정도라면, 이 정도 거리는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회사까지 10분이면 될 것 같네요.”

“……확실히, 걸어서 10분 정도라면 워커홀릭한테는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곳이겠지. 왠지 알 것 같아.”

”후훗, 역시 그렇겠죠? ‘잠만 잘 자면 땡이죠’라던가.”

“아하하, 맞아, 맞아.”

 

그의 말투를 흉내내는 카에데의 말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두 손 가득 식재료가 담긴 짐을 들고 맨션의 현관으로 들어오던 프로듀서는 자신을 바라보며 히죽거리는 세 사람과, 안절부절 못하는 미유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들 표정이 왜 그래요? 무슨 재밌는 이야기라도 했어요?”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흐음……”

 

미심쩍은 눈으로 일행을 바라보던 그는 터질 듯 빵빵하게 부풀어 있는 봉투를 한 손에 모아쥐고, 곧바로 잠금장치에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기계음과 함께 여닫이문이 스르륵, 부드럽게 좌우로 열렸다.

 

“아, 나 비밀번호 봤어!”

“괜찮아요. 어차피 사무실에 여벌 키 놔둘거니까.”

“네? 그래도 되요?”

”안될 거 없죠? 여러분들 꽐라되서 뻗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말입니다. 자, 들어갑시다.”

 

문이 닫히지 않도록 센서를 손으로 덮은 채 프로듀서는 일행을 건물 안으로 안내했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있었기에 그는 곧바로 일행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와, 건물 좋다……새 집 냄새 제대로 나네.”

“카와시마 씨, 그거 안 무거워요?”

“괜찮아, 괜찮아. 그래도 선물인데, 주기 전까진 내가 들고 가야지.”

 

그 때, 프로듀서의 손목에서 땡땡땡 하는 일곱 번의 가느다란 종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반응해 시계를 살펴본 그는 곧바로 네 사람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보니, 이 시간에 마트에 계셨다면, 네 분 모두 식사는 아직 안 하셨죠?”

“네.”

“잘됐네요. 어차피 저도 밥 해 먹을 생각이었으니, 식사라도 하고 가세요.”

“에? P군이 직접 하는 거야? 시켜 먹는 게 아니고?”

“당연하죠. 뭐 때문에 장을 이만큼이나 봤겠습니까?”

“헤에…….”

 

영 미덥지 않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미즈키의 귓가에 카에데가 조심스레 속삭였다.

 

“괜찮아요. 프로듀서, 요리 꽤 잘 하거든요.”

“정말? 믿어도 되는 거지?”

“그걸로 거짓말해서 뭐 하게요.”

 

미즈키의 말에 프로듀서는 쓴웃음을 지었다. 기다렸다는 듯 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이 타고 있던 엘리베이터가 8층에서 멈추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 그들은 프로듀서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여깁니다.”

 

복도의 끝에 위치한 현관문에 멈춰 선 프로듀서는 들고 있던 자동차 열쇠에 붙은 작은 카드를 문에 설치된 오토락에 갖다 댔다. 삐빅, 하는 기계음과 함께 부드럽게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추운 날씨였지만 삐걱이는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문이 열렸다.

 

“자,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신발을 벗고, 인사를 하며 집 안으로 들어서는 네 사람을 반긴 것은, 프로듀서가 말한 ‘선객’이었다.

 

“오? 뭐야, 양 손의 꽃……이 아니고, 두 손 두 발의 꽃인가? 하하하.”

 

자신들을 바라보며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맥주잔을 내려놓는 남자.

상머리에 앉아, 껄껄 웃으면서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선객’의 모습을 보며, 네 사람은 제자리에 서서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사, 사장님?!””

 

그는 다름아닌 CG프로덕션의 사장이었다.

프로듀서와 마찬가지로 한여름에도 답답할 정도로 정장 차림을 고수하는 사람이었기에, 그가 후줄근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돌아다닌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그 이상으로 상상하기 힘든 것은 그가 벌겋게 달아오른 민낯을 드러낸 채, 실없는 농담을 던지며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모습이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곧 자리 만들어 드릴테니.”

 

지금까지 자신의 이미지를 손수 와장창 깨부수는 뜻밖의 선객의 존재에 입가를 실룩이는 네 사람을 바라보며, 프로듀서는 쓴웃음을 지었다.

 

 

****

 

 

프로듀서가 거실을 정리하는 사이, 카에데는 들고 있던 선물 세트를 바닥에 내려놓고 집 안을 둘러보았다.

그의 새 보금자리는 기존의 기숙사에 비하면 무척이나 큰 집이었다. 우선 방의 갯수부터 기숙사보다 1개가 더 많은 3개나 되었고, 방 하나하나의 크기 역시 기숙사에 비하면 몹시나 큰 수준이었다. 그래서일까, 거실에 연결된 그의 방은 기숙사에 있던 시절처럼 문이 활짝 열려 있었지만, 그 때보다 더 큰 방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방 안의 모습은 깔끔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황량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다. 집안을 둘러볼 때마다, 이따금씩 현관과 거실 사이의 굳게 문이 닫힌 방에 눈길이 가기는 했지만, 그것도 거기까지였다. 그녀가 알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 저렇게 몰아 넣은 건 대개 일에 관련된 물건들 뿐이었으니까.

오히려 그녀가 더 신경이 쓰이는 부분은 그의 추억이 담긴 쇼케이스가 너무 눈에 띄는 곳에 나와 있었다는 점이었다. 예전 집에서는 안 보이는 곳에 처박아 두었을 그 쇼케이스가, 지금은 그의 방에 설치된 책꽂이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거실이 대충 정리되자 프로듀서는 네 사람을 자리로 안내했다. 네 사람이 자리에 앉자, 상머리에 앉아 있던 사장은 껄껄 웃으면서 그들을 둘러보았다.

 

“하하, 오늘은 나도 놀러 온 거니까 다들 편하게 있어요. 사람이 가끔씩은 어깨에 힘도 빼줘야지.”

“네, 네…….”

“거 참, 누가 집주인인가 모르겠네.”

 

마치 자신의 집인 양 말하는 사장을 곁눈질로 쏘아보며 부엌으로 향한 프로듀서는 곧바로 일행이 가져온 선물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그의 시선을 잡아 끈 것은 다름아닌 카에데가 가져온 소면 세트였다. 눈을 반짝이며 상자를 연 그는 상자 안을 가득 채운 여러 종류의 국수를 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이야, 이거 끝내주네. 그럼 오늘은 국수로 할까…….”

“저기……뭐 도와드릴 건 없나요?”

“아, 괜찮습니다.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미후네 씨는 쉬고 계세요.”

“그래도…….”

”보시다시피 여기가 꽤 좁아서 말이죠. 혼자 하는 게 편하거든요.”

“그런가요…….”

 

그의 말에 미유는 마지못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거실로 돌아갔다. 소매를 걷어부치고, 벽에 걸어둔 앞치마를 두른 그는 곧바로 조금 전에 냉장고에 넣어 둔 재료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어디, 간만에 솜씨 좀 부려볼까!”

 

 

잠시 후, 식탁에는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볶음국수가 여섯 그릇 올라왔다. 국수를 한 젓가락 집어 맛을 본 미즈키가 깜짝 놀라며 프로듀서를 바라보았다.

 

“어라? 맛있다?”

“그래서 자신 있다고 했잖아요.”

“남자 혼자 산다고 하면 왠지 이미지가 그렇잖아? 쌓인 빨래감에 편의점 도시락에 컵라면.”

 

미즈키의 말에 카에데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보다도, 이러면 P군 꽤나 포인트 높지 않아? 키 크지, 돈 잘 벌지, 요리 잘해, 외국어도 잘해. 뭐, 얼굴은……흠흠, 아무튼 굉장하잖아?”

“뭡니까, ‘얼굴은……’다음에 뭐에요?”

“영업비밀입니다.”

“아니, 그건 내 멘트고요.”

 

프로듀서가 세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사이, 슬그머니 방 구석에 세워둔 상자에서 새 맥주를 꺼낸 사장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큭큭거리며 맥주를 들이켰다. 사장이 절반쯤 마신 캔을 상 위에 올려놓았을 때, 기다렸다는 듯 프로듀서의 손이 그것을 낚아챘다.

 

“야, 내놔!”

“그만 드세요. 나이도 생각하셔야지, 그러다 진짜 필름 나갑니다?”

“큭큭, 괜찮아 괜찮아. 사내자식이 그런 거 신경 쓰는 거 아니다. 너 어차피 먹지도 않을 거잖아?”

“아니, 오늘은 안 먹는다는 뜻이죠. 내일은 먹을거에요.”

“그럼 오늘 먹어! 왜 안 먹어?”

“댁 맛 가면 집에 던져줘야 되니까!”

“그랬었지, 참.”

 

도끼눈을 뜨며 옆 자리에 앉은 사장을 쏘아보는 프로듀서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등을 퍽퍽 두드리는 사장을 바라보며, 네 사람은 얌전히 젓가락을 들었다.

 

 

******

 

 

식사를 마치고, 네 사람은 안주를 겸해 후식으로 나온 밀감을 맥주와 함께 먹고 있었다. 네 사람의 시선이 향한 곳은, 그들의 맞은 편 자리에 있는 사장과 프로듀서였다.

 

“그렇지, 연말 계획은 뭐 없나? 송년회라던가.”

“끝내주는 곳이 하나 있지요. 우연찮게 옛 친구와 연락이 닿아서 말입니다.”

“호오, ‘우연찭게’인가. 뭐, 네가 끝내준다고 하니 기대해도 되겠지.”

“아뇨, 기대하시면 곤란한데요.”

 

 

“아, 저번에 말한 것 말인데, 이야기가 잘 풀렸어.”

“진짜요? 뭐랍니까?”

“한번 와 보긴 한다던데.”

“뭐에요, 그게. 그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아, 몰라. 난 할 일 다 했으니까. 아무튼, 한번 만나 보면 알 거야. 그 녀석도 쇠고집이 보통이 아니거든. 너보다 질기다고.”

“저보다요? 그건 좀 기대가 되네요.”

 

 

“신입들은 잘 하고 있나?”

“그럭저럭이죠. 그래도, 매번 나아지고 있습니다.”

“그럼, 계획에는 지장이 없다?”

“그렇게 되네요.”

“그거 다행이군. 저번 오디션 결과는?”

“그냥 보고서 올렸으니까 월요일에 그거 보세요.”

 

 

“헤에…….”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치히로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프로듀서와 사장의 대화를 바라보던 미즈키는 조각조각 뜯어낸 밀감을 입안으로 던져 넣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은 단순히 상사와 부하 직원의 사이라고 하기에는 무척이나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 때, 프로듀서의 가방에서 휴대전화의 벨소리가 새어 나왔다. 무기질적인 벨소리. 그가 항상 들고 다니는 업무용 휴대전화의 벨소리였다.

 

“……잠시만요.”

“에잉, 판 다 깨는구먼. 어떤 놈이야? 이 시간에 전화를 다 걸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곧바로 자신의 가방에서 자그마한 휴대전화를 꺼냈다. 번호를 확인한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것을 보면, 그다지 유쾌한 전화는 아닌 듯 했다.

 

“영업처 전화네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그는 거실과 현관 사이의 굳게 문이 닫혀있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대화의 흐름이 끊긴 거실에는 일시적인 침묵이 흘렀다. 잠시 동안 입맛을 다시며 멍하게 앉아있던 사장은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방 한 켠에 세워놓은 상자에서 새 맥주를 꺼내며 흠,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너무 우리 둘만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여러분들도 나한테 뭔가 할 이야기가 있지 않나?”

“네! 카와시마 미즈키! 질문 있습니다!”

 

그제서야 기다렸다는 듯 듯 미즈키가 손을 번쩍 들었다. 새로 뜯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던 사장은 캔을 내려놓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 말해보게.”

“혹시 두 분은 사적으로 아는 사이신가요?”

 

미즈키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치히로는 ‘저질렀다’라는 표정을 지으며 목을 움츠렸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설마하니 돌직구를 던질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장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인지, 그는 눈을 몇 번 끔벅였을 뿐, 뜻밖에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까……좀 오래 된 사인데, 단순히 오래됐다기보다는……으음, 이거 설명하기 애매하군.”

 

술기운이 돌기 시작하는 것인지, 사장은 단어를 떠올리려는 듯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면서 턱을 괴었다.

 

“그러니까, 나는 P라는 사람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는 나를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

“네?”

“으음……뭐, 알고 있던 건 오래 전부터였지만, 내가 그를 직접 만난 건 순전히 우연이었지. 휴가차 갔던 브로드웨이에서 다시 만났는데, 나 참. 정말로 그런 곳에서 다시 만날 거라곤 정말 상상도 못 했지. 그라운드가 아닌 브로드웨이, 그 화려하지만 어두컴컴한 무대의 뒷면에서 메가폰을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본 순간, 나는 직감했어. 그에게라면 맡길 수 있겠다고.”

“맡긴다면……아이돌 부서, 이야기인가요?”

 

‘그라운드’라는 말에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카에데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것을 눈치챈 것인지,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치히로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사장은 하품 섞인 한숨을 가볍게 내쉬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이돌 부서는, 사실 내 오랜 숙원 중 하나였어. 나는 타카기, 쿠로이와 함께 업계에 뛰어들었지만, 녀석들이 아이돌에 목을 맬 때 정작 나는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지. 그렇다 할 경쟁자가 없었으니 성공은 쉬웠어. 하지만, 한 가지, 도저히 채울 수 없는 것이 있더군.”

“어떤……건가요?”

“’만족감’이야. 무대 위의 자네들을 보면서 관객들이 느끼는 만족감, 편안함……. 그건, 아티스트나 가수들에게서는 얻을 수 없는, 아이돌만의 전유물이지. 나는 그것이 늘 신경이 쓰였어…….”

 

서서히 몰려오는 졸음과 싸우는 것처럼 꾸벅꾸벅 머리를 흔들던 사장은 의식을 바로잡으려는 듯 고개를 강하게 흔들었다. 하지만, 다시 턱을 괴기가 무섭게 그의 눈이 서서히 감기기 시작했다.

 

“으음……그는 무척이나 강한 사람이야. 비록 나이는 자네들과 큰 차이가 없는 연배이지만……인생의 정상과 밑바닥을 경험해 본 사람……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라고 볼 수 있지. 그래서 나는 그에게 제안했다. ‘다른 사람을 이끌어 볼 생각은 없냐’고. 왜냐하면……그 정도의 사람이라면, 여러분 같은 사람들에게 훌륭한 선배이자 훌륭한 이정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사장님?”

“아아……이거, 늙어서 그런가 술 기운이……자비가 없구만……아무튼……그 결과가 자네들일세. 내가 오랫동안 바라기를 마지않던 광경을, 이제서야……."

 

말끝을 흐리던 사장의 눈꺼풀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왔다. 눈꺼풀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그의 머리를 지탱하고 있던 팔에서 힘이 빠지면서 툭, 하고 그의 머리가 상으로 내려왔다.

 

“……사장님?”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선 미유가 다급한 표정으로 사장의 얼굴에 귀를 가까이 대었다. 상 위로 푹 엎어진 그에게서 규칙적인 숨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주무세요…….”

“…….”

 

난처한 듯 한 표정의 미유가 자리로 되돌아오자, 곧이어 낡은 트럭이 굴러가듯,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세상에, 이게 다 뭐래요?”

 

통화를 마친 프로듀서가 거실로 나왔을 때는 이미 바닥에 널브러진 사장이 곯아떨어져 있었다. 드르렁드르렁, 귀청이 찢어져라 코를 고는 사장을 앞에 두고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네 사람을 돌아본 그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외투를 걸치고 나온 그는 사장의 소지품과 함께 곯아떨어진 사장을 들쳐 업으면서 일행을 바라보았다.

 

“……사장님 좀 바래다 드리고 오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주시구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까, 보고 싶으시다면 방 구경이라도 하고 계세요.”

“운전 할 수 있어? 괜찮아?”

“네. 저는 술 안 먹었으니까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네 사람을 안에 남겨두고, 가볍게 사장을 들쳐 멘 그는 현관으로 향했다. 신발소리와 함께 오토락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고, 뚜벅뚜벅, 그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현관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면서 미즈키는 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 철저하네. 어쩐지 맥주는 입에도 안 대더라니.”

“그렇네요…….”

“어쩐지 귀한 걸 본 듯한 느낌이네요……스위치가 꺼진 사장님이 저런 모습이었다니.”

 

거대한 지진이 휩쓸고 지나간 거실에는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재깍재깍, 초침이 달리는 소리만이 들려오는 공간에서 참다 못한 치히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 모처럼 허락도 받았잖아요? 구경합시다! 구경!”

“오! 좋은 생각! 자, 그럼 어디부터 볼까?”

“당연히 프로듀서 씨네 방이죠! 미유 씨도 볼래요?”

“네……? 아, 네……!”

 

미유까지 치히로의 손에 이끌려 프로듀서의 방으로 들어가고, 거실에 혼자 남은 카에데는 좀처럼 입에 대지 못했던 맥주를 꼴깍꼴깍 들이켰다. 절반쯤 남아 있던 캔이 순식간에 텅텅 비어버렸다. 그녀는 불만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텅 빈 캔을 흔들었다.

 

“카에데? 안 볼 거야?”

“아뇨, 갈게요.”

 

자신을 부르는 미즈키의 목소리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 사람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만 하더라도 어쩐지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빙글, 몸을 돌린 그녀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다만, 그것은 '아이돌 타카가키 카에데'의 미소에 더 가까운 성질을 띠고 있었다.

   


 

 

인사불성이 된 사장을 뒷좌석에 태우고, 운전석에 올라탄 프로듀서는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

부르릉 하는 엔진소리와 함께, 그의 등 뒤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로듀서가 눈을 돌려 룸미러로 뒤를 바라보자, 곯아떨어져 있던 사장이 멀쩡하게 자세를 고쳐 앉고 있었다. 여전히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차가운 시트의 감촉 덕분이었는지 곯아떨어진 사람 치고는 몹시 선명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제 좀 괜찮으세요?”

“찬 바람을 쐬니까 조금 깨는군. 이것 참, 늙으니까 취하는 것도 순식간이고 깨는 것도 순식간이구만.”

 

사장이 자리에 제대로 앉은 것을 확인하고, 프로듀서는 곧바로 자동차를 몰기 시작했다. 맨션의 정문을 빠져 나와 골목길을 지나 큰길에 접어들었을 무렵, 창 밖을 바라보던 사장이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뭐가요?”

“내가 너무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은 건 아닌가 모르겠군.”

“에이, 뭘 그 정도 가지고. 별 이야기 안 했잖아요? 괜찮습니다.”

“정말로 괜찮나?”

“……네.”

 

사장의 되물음에 대답이 돌아오기에는 약간 시간이 걸렸다.

 

“과거를 딱히 숨길 생각은 없으니까요. 물어보지 않았으니 가르쳐주지 않은 것뿐이죠.”

“……너도 참, 이상한 곳에서 고집을 부리는군.”

“아직 용기가 없어서 그래요.”

“그럼 타카가키는?”

“……제 실수라고 해 두죠. 그 사람들한테서 너무 많은 걸 들어버렸어요. 그리고 너무 많은 걸 따라해버렸죠.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는데.”

“’실수’인가…….”

 

한숨 섞인 탄식을 내뱉으며 사장은 뒷좌석의 창문을 내렸다.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한겨울의 얼어붙을 듯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술기운이 약간 가시는 것을 느끼며, 그는 룸미러에 비치는 운전석을 바라보았다.

 

“이봐, 윌리. 나는 자네랑 오랫동안 함께하고 싶어. 가능한 한 오랫동안, 말이지.”

“사장님…….

 

교차로의 신호에 자동차를 세운 그는 고개를 돌려 뒷좌석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남자는 좀.”

“야 임마. 사람이 모처럼 무게 잡는데.”

“하하하.”

  


 

 

같은 시각, 프로듀서의 집 안.

 

“와, 이거 뭘까요? 신기하게 생긴 물건이네……트로피?”

 

프로듀서의 방을 둘러보던 치히로는 책꽂이의 한 칸을 통째로 집어삼킨, 트로피가 들어 있는 쇼케이스를 발하고는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아! 나 이거 뭔지 알아!”

“어? 미즈키 씨, 이거 알아요?”

“‘커미셔너스 트로피’라고 하는건데, 메이저리그 우승 트로피야. 일본야구로 치면 일본시리즈 우승팀한테 주는 트로피 같은 거지. 그 옆에 작은건 MVP트로피고.”

“그런가요……그런데, 그게 어째서 여기에?”

“글쎄……레플리카 같은건가?”

 

치히로와 미즈키는 쇼케이스를 향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카에데의 가슴이 두근두근 맥박치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부분은, 그녀가 예전에 보았을 때 쇼케이스 안에 들어 있던, 그의 모습과 예전 동료들의 모습이 찍혀 있는 사진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한참 동안 쇼케이스를 들여다보던 미즈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보아하니 레플리카 같은데, 우승 기념 상품으로 파는 걸 사온 것 같아. 반지도 그렇고, 트로피도 그렇고. 생긴 건 그럴싸하게 생겼는데, 이런 곳에 실물이 있을 리도 없고 말이야.”

“역시 그렇겠죠?”

“그나저나, P군이 야구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덕질을 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남자는 커서도 애라더니 정말이구나.”

 

의외라는 듯 중얼거리는 미즈키를 바라보며 카에데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녀조차도 눈치채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

 

그것은, 그녀와도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미유였다.

  


 

밤 늦은 시각.

집들이를 마치고, 다른 사람들을 모두 집으로 바래다 준 프로듀서의 차 안에는 두 사람, 프로듀서와 카에데 만이 남아 있었다. 거리만 따져보면 치히로 다음으로 내려야 하는 그녀였지만, 차에 타기 직전, 조금이나마 드라이브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자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던 것이다.

퇴근 시간에 비하면 확연히 인파가 줄어든 중심가를 지나면서, 엔진음이 울려퍼지는 조용한 차 안에서 카에데가 입을 열었다.

 

“……또 한 사람, 당신을 아는 사람이 있었어요.”

“네.”

“얼마나 되었나요?”

”브로드웨이에서 처음 만났으니, 제게는 올해로 4년째로군요. 하지만, 사장님의 말씀이 맞다면, 아마도 사장님께서는 저보다는 더 오래 됐을 겁니다.”

“무슨 뜻인가요?”

“선수 시절부터라는 이야깁니다.”

“…….”

 

카에데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잠시 후 두 사람이 탄 자동차가 가로등의 밝기가 조금 옅어진 골목길에 들어섰을 때였다.

 

“당신더러……강한 사람이라고 하셨어요.”

“사장님께서요?”

“네.”

“이거 참, 아직까지는 연기가 제대로 먹히는 모양이군요.”

“연기……인가요?”

“네?”

 

차선을 바꾸기 위해 백미러를 주시하느라 프로듀서는 카에데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조수석의 카에데는 무척이나 답답해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도 쇼케이스, 꺼내 놓으셨더군요.”

“그랬죠. 원래라면 자료실에 놔둘 생각이었습니다만……그쪽이 아직 정리가 덜 되어서요.”

“그런 것 치고는 꽤나 보기 좋은 곳에 놔두셨던걸요.”

“그렇다고 해서 바닥에 놔둘 수는 없잖아요? 그거, 발에 한번 채이면 엄청 아프단 말이에요.”

“뭐, 그건 그렇지만요. 그럼, 사진은요?”

“제 서랍에 넣어뒀지요.”

“……정말요?”

“그거 거짓말해서 뭐 합니까.”

 

잠시 신호에 걸린 틈을 타 프로듀서는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새침하게 앞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볼은 평소에 비하면 아주 약간,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아주 약간 부풀어 있었다.

 

“……화났어요?”

“아니요.”

 

즉답이 날아왔다. 하지만, 그렇게 즉답을 하고 앞을 바라보던 카에데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요. 알고 있어요. 이게 건방진 생각이라는 것 정도는 저도 안다구요. 캐서린도 있고, 사장님도 계시고, 또 어딘가에는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내가 모르는 당신에 대해서 알고 있겠죠. 그치만, 봐요. 아무리 저라고 해도 욕심 정도는 부려도 괜찮지 않나요? 저만이 알고 있는 당신의 모습이라는 것, 말이에요.”

 

입을 비죽이고, 머리카락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볼멘소리로 투덜거리던 그녀는 눈만을 살짝 돌려 곁눈질로 운전석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싱글싱글 웃고 있는 프로듀서의 얼굴이 있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그냥, 귀여워서요.”

“……네?”

 

신호가 바뀌었다. 그녀의 되물음을 듣고도 못 들은 척, 프로듀서는 부드럽게 자동차를 골목길로 몰았다. 두 사람을 실은 자동차는 어둑어둑한 골목길을 헤치며 마침내 그녀의 집에 도착했다.

 

“자, 다 왔습니다.”

 

카에데가 살고 있는 원룸 입구에 자동차를 세운 프로듀서는 안전벨트를 푸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하게 말했다.

 

“타카가키 씨만이 알고 있는 저의 모습이란 말이죠……이거, 어쩐지 재미있는 욕심이네요.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저도 욕심을 부려보고 싶어졌어요.”

“네?”

 

무슨 이야기인가 싶었던 카에데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이번에도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다만, 그녀에게는 그 미소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거는 저도 알 것 같네요. 안 가르쳐 주는 표정이라는 거.”

“하하, 도사가 다 됐군요.”

“됐어요. 운전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네, 좋은 꿈 꾸세요.”

 

프로듀서는 건물의 현관으로 들어가는 카에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건물 안으로 들어서던 카에데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그와 눈을 미주치자, 그녀는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도망치듯 계단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운전석의 창문을 올린 프로듀서는 자신의 집으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끝>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니, 사실 인사보다도, 이런 퀄리티의 글 때문에 이런저런 시간을 끌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려야겠네요.

별 주제도 없는, 쉬어가는 에피소드인데도 뭘 이것저것 집어넣으려다 보니 무척이나 글이 길어졌습니다. 이 버릇 고쳐야 할텐데......

신데렐라 걸즈의 본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슬슬 프로듀서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야 할텐데.....이거 올해 안에는 되려나 모르겠네요.

아무튼! 별 다른 내용이 없으니 각설하고 다음 이야기에서 뵙겠습니다. 이렇게 고생해서 디딤돌을 깐 만큼 다음 이야기는 술술 나왔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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