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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여행하는 아이돌을 위한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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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1-26, 2017 22:11에 작성됨.

차가운 공기가 날카롭게 볼을 찌른다.

나는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폐에 사정없이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마른 기침을 몇 번 한다.

나는 조금 간지러운 콧가를 검지로 스윽 문지르고는 조금은 눈물이 맺힌 눈가로 한 곳에 시선을 준다.

추위에 약한 내가 이런 곳에 있는 이유, 그것은...

 

"режиссер, 아, 그러니까... 프로듀서, 라고 말했습니다. 프로듀서는 звезда, 그러니까, 별, 안 좋아합니까?"

 

"아니, 뭐. 보통 사람들만큼은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만..."

 

오랜만의 휴가를 받은 아냐가,우연히 휴가 시기가 겹친 나에게 홋카이도의 한 천문대로 별을 보러가지 않겠냐고 물어봐 흔쾌히 허락했기 때문이다.

괜찮은 권유였던데다가, 아냐와 단 둘이 가는 여행이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전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둘만의 여행이었기 때문에 꽤나 꽁냥꽁냥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그녀를 따라온 것이다만, 홋카이도에 도착하고 바로 천문대에 올라와서부터는 아냐가 나에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데다가 해수면에서 너무나도 높은 곳에 있는 곳의 공기는 너무나 차갑기에, 내 얼굴에는 꽤나 귀찮다는 표정이 지어졌다.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신없이 오리온자리의 허리띠를 이루는 세 개의 별이나 리겔같은 별들을 보고 있던 아냐가 잠시 시선을 돌려 나를 쳐다보다가 조금은 실망한 듯한, 혹은 흔히 말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звезда, 별, 북반구에 많이 보이는 시기입니다."

 

"아, 응. 그건 알고 있어. 볼 만한 것들이 많이 뜨는 계절이지?"

 

"да, 겨울마다 휴가를 받는 것은, 이것 때문입니다."

 

"그렇구나. 난 신경쓰지 말고 계속 관측해도 괜찮아."

 

"но...."

 

"괜찮다니까. 취미를 하는 시간을 빼앗을 생각은 없고."

 

애초에 아냐의 여행에 기쁜 마음으로 따라갔던 건 조금 더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서인데 말이야, 라고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는 대인배인 척하는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아냐를 쳐다본다.

하얀 은발의 머리칼에, 방한 대책으로 껴입은 옷들의 조합이 꽤나 어울려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아냐.

일순간 내 얼굴이 붉어진 것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아냐는 틀린 답을 낸 학생을 쳐다보는 교사처럼 잠시동안 내 얼굴을 슬픈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다시 망원경으로 눈을 돌린다.

아냐가 시선을 다시 망원경으로 줘 버린 탓에 딱히 할 일이 없어진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하늘로 고개를 올려 그저 별 몇 개 박혀있을 뿐인 겨울의 밤하늘을 쳐다본다.

굳이 망원경이 없어도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은 보인다.

망원경을 쓰는 이유는,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별들을 보기 위해서.

그래, 망원경을 쓰는 이유...

 

"그래, 그렇구나!"

 

"프로, 듀서...?"

 

내가 소리치자 조금 놀랐는지 옆에서 아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먼 우주로 날아간 정신을 수습해 아냐에게 시선을 줘 본다.

아냐는 나의 시선에 기대하고 있다는 듯이 새하얀 얼굴에 조금 홍조를 띄우고는 나에게 조금 붙어온다.

조금 추웠던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내가 하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아냐에게 감아준다.

목도리를 감아주자 아냐가 아직도 정답이 아니라는 듯이, 그것이 불만이라는 듯이 조금 볼을 부풀리고는 나에게 조금 더 붙어온다.

그제서야 나는 아냐가 말하고 싶어한 것을 깨닫는다.

 

아냐는 여기에 별을 보러 온 게 아니야.

 

"그렇구나, 아냐는 여기에 별을 보러 온 게 아니야."

 

"프로, 듀서....?"

 

"아, 미안. 신경써주지 못했네. 잠시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을 좀 하느라고."

 

내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하자 아냐의 표정이 조금 풀어진다.

그 다음에 떠오르는 것은 기대하는 표정.

그 표정을 보고 나는 다시금 깨닫는다.

 

그래, 아냐는 여기에 별을 보러 온 게 아니야.

 

그녀는 나에게, 이 아름다운 밤하늘을 단 둘이서, 같이 보자고 하는 거야.

 

"режиссер, 아, 프로듀서. 그럼 같이 космос...밤하늘, 을 보지 않겠습니까?"

 

"그럴까, 귀여운 아냐가 권하는 건데 안 볼 수도 없고."

 

내가 아냐의 말에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망원경에 눈을 가져다대자 그녀가 이 정도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이 얼굴을 붉게 물들인다.

망원경 너머로 보이는 여러가지 빛깔의 향연.

망원경 저쪽으로는 붉은 베텔기우스, 망원경 이 쪽으로는 푸르른 리겔.

차가운 아름다움따위는 보이지 않는, 따뜻하고 포근한 너무나 아름다운 세계.

나는 잠시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는 옆에 서 있는 아냐를 천천히 껴안는다.

아냐는 내 마음이 닿았다는 듯이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나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다.

 

새하얀 눈의 향기가 난다.

새하얀 아냐의 향기가 난다.

새하얀 아이돌의 향기가 난다.

새하얀, 나의 아냐의 향기가 난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니 조금은 김이 샜는지 재촉하는 듯한 아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режиссер...?"

 

"아, 그렇네. 미안. 조금 감동해서 말이야."

 

"впечатление... 감동, 말입니까?"

 

"응. 나를 이 여행에 초대해 준 것이 너무나 기뻐서 말이야."

 

"довольный, 기쁘다-입니까?"

 

"응, 아냐는 나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또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싶어한 거잖아?"

 

내 말에 아냐는 이제야 전해졌다는 듯이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이 우주에는 너무나도 많은 별이 있다.

이 우주에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있다.

이 우주에는 너무나도 많은 아이돌이 있다.

 

하지만 이 우주에서 우리는 만났다.

엄청난 확률을 뚫고, 잔부스러기들이 떠다니는 우주를 거쳐, 이 공간에서 만났다.

나는 아냐를 다시 한 번 꽉 껴안고 미소를 짓는다.

나의 미소를 따라 아냐도 잔잔한 미소짓는다.

밤하늘 위에는 잔뜩 이름모를 별이 떠 있다.

아름다운 별들이 떠 있다.

아냐와 내가,

그 밑에 있다.

 

 

 

후기

 

급선회한 아나스타샤 창작글.

포근하고 따뜻한 글을 써보려고 했는데 잘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러시아어는 구글의 힘을 받았습니다! 

나와 아냐의 사이를 가로막는 건, 그 어떤 것도 없다!(하지만 힘들었다...)

BGM으로 추가된 곡은 Madeon - Nonsense(feat. Mark Fo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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