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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리티 P 시리즈] 호죠 카렌 <히로인과 소녀, 꿈의 무게>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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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1-16, 2017 03:33에 작성됨.

 

호죠 카렌 <히로인과 소녀, 꿈의 무게> (中) 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행사가 끝난 뒤의 무대와 경기가 끝난 경기장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차마 식지 않은 관객들의 열기와 함께, 텅 빈 공간을 장악하는 공허함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11월의 4번째 금요일. 프로덕션 매치가 벌어지는 도내의 모 대형 체육관.

 

프로듀서, P는 스태프들이 기자재들을 회수하고 있는 무대의 한 가운데에 팔짱을 끼고 서서 텅 빈 객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 제각각 야광봉이나 응원막대를 흔들며 열렬한 응원을 보내던 관객들이 서 있던 장소를, 이제는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는 초겨울을 막 넘어가는 싸늘한 겨울바람이 대신하고 있었다.

 

프로덕션 매치의 결과는 신데렐라 걸즈의 패배로 끝났다. 예상대로 패배로 끝난 싸움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패배한 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승패를 결정짓던 5라운드의 대진. 765올스타즈의 미우라 아즈사 카드에 대항하여 신데렐라 걸즈가 제시한 카드는 호죠 카렌이었다. ‘트라이어드 프리무스’가 아닌, ‘호죠 카렌’으로써는 처음으로 서 보는 무대. 자칫 압박감에 짓눌릴 수 있는 무대였지만, 카렌은 몹시 침착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자신의 기량을 선보였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벽 너머를 향해 힘껏 도약했던 카렌은 결국 미우라 아즈사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다시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녀의 날개는 아직 그 벽을 넘기에는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반대로 회장의 관심이 그녀에게로 쏠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작 열여섯 살. 솔로 활동으로는 아이돌 랭크조차 정해져 있지 않은 루키가 A랭크의 미우라 아즈사를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는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는 것이 제대로 들어간 것이었다.

계획이 한번 비틀어지기는 했지만, 급조한 플랜B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그래. 순조롭게 마무리 되었을 터인데……이상하게, 마음이 무겁군.’

 

“아, 여기 있었군. 한참 찾았네.”

 

스태프들이 내는 소음 사이로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팔짱을 끼고 객석을 돌아보던 P는 그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 비치는 목소리의 주인은 초로의 남성이었다. ‘STAFF’라는 글자 아래 작은 글자로 ‘PRESS’라고 적혀 있는 신분증을 목에 걸고 있는 것으로 보아 기자이거나, 적어도 언론사에 일하는 사람인 듯 했다.

 

“아아, 소개가 늦었군. 나는 프리랜서로 일하는 요시자와라고 하네.”

 

그의 이름을 듣고 안경 너머로 그를 바라보던 프로듀서의 눈이 아주 조금이지만 가늘어졌다. 전혀 뜻밖의 인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기다리고 있던 인물 중 하나이기도 했던 것이다.

비록 프리랜서지만, 그는 업계의 언론인들 중에서는 나름대로 탄탄한 입지를 가지고 있는, 말하자면 거물급 기자이다. 그보다도 P가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가 다름아닌 ‘765를 밀착 마크하는 언론’중 하나에 속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반갑습니다. 저는 CG프로덕션의 프로듀서를 맡고 있는 P라고 합니다.”

 

P는 자신의 옆으로 다가오는 그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의 옆으로 다가온 요시자와는 품 속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지만, 거기에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만나는 건 처음이지?”

“네.”

“하하하, 뭐, 나도 자네와 자네 회사에 대해서는 계속 주시하는 입장이었으니 말일세. 그보다도 무대 잘 봤네. 예상 외로 굉장히 인상적인 무대였어.”

“감사합니다.”

“마지막 5라운드의 그 아이……호죠 카렌이라고 하던가? 대단히 인상적이었어. 설마하니 스물도 안 된 아이가 그토록 무게감있는 노래를 부를 줄이야. 연출에도 무척이나 힘이 들어가 있었고 말이지. 아이돌 업계에서 CG프로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건만. 이건 생각을 고칠 때가 된 것 같군.”

 

가정했던 것들 중에서 최고의 대답이 들려왔다. 프로듀서는 표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가면 속에 빙그레 미소를 그렸다.

 

“과찬이십니다.

“그것보다도, 자네는 괜찮겠나?”

“네?”

“다른 것도 아닌 프로덕션 매치일세. 연말의 PRA(Producer Ranking Award)에 어떤 불이익이 갈 지 몰라.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는 건가?”

“네. 결과적으로 승부에서는 졌으니 저는 무엇인가 잃는 것이 있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아닐 거에요. 반드시, 오늘의 결과를 통해 무언가 얻는 것이 있을 겁니다.”

“그렇군. 자네의 생각은 그렇단 말이지……”

 

말꼬리를 흐리던 요시자와는 훗, 하고 작게 웃음을 흘렸다.

 

“이거, 듣기보다 훨씬 더 능구렁이 같은 남자였군. 이야기 잘 들었네. 뭐……이건 순전히 관객의 입장이었지만 말이야. 지금부터는 기자의 입장에서 한 가지 질문을 하고자 하네. 그래도 괜찮겠나?”

“네, 얼마든지요.”

“고맙군.”

 

요시자와는 품 속에서 작은 녹음기를 꺼냈다. 작은 마이크로 카세트가 들어가는 낡은 디자인의 녹음기를 바라본 P의 눈이 다시금 가늘어졌다. 그가 녹음기의 녹음버튼을 누르자 달달거리는 소리를 내며 녹음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자네들이 기권을 할 거라 생각했네. 이길 수가 없는 싸움이었으니까. 하지만 자네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 거기다 파격적인 프로그램까지 들고 나왔지. 그 이유를 가르쳐 줄 수 있겠나?”

 

대답을 고르듯, P는 가만히 서서 달달거리며 돌아가는 녹음기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몇 초 정도 우두커니 서 있던 그는 마침내 생각이 정리되었다고 말하듯 크게 숨을 내쉬며 대답을 말했다.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신데렐라 걸즈’는 아직 미완성이에요. 하지만, CG프로덕션의 ‘아이돌 부서’로써, 우리는 2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걸어왔습니다. 그 시간 동안 우리가 쌓아 올린 탑의 높이가 얼마나 높았는지, 그것을 알고 싶었어요.”

“호오, 그렇다면 프로그램에 굳이 신곡을 끼워넣은 이유도 그것과 관계가 있는가?”

“네. 지금까지의 우리들의 모습과 함께, 앞으로 조금씩 변해 갈 우리들의 모습. 이 두 가지를, 지금까지 우리를 지켜봐 준 팬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이번 프로그램의 배치는 그러한 의도가 있었습니다.”

“과연, 승리에 목을 매는 것보다는 차분하게 다음 기회를 노리겠다는 것이로군. 패배라는 건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닐텐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해둔 게 있나?”

 

P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잠시 입을 다물고 무언가를 생각한 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패배를 각오하고 임한 무대였습니다……그들에게는 좋은 경험이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좋은 이야기 고맙네. 하하, 이거 아무래도 회사 뿐만 아니라 자네에 대한 평가를 조금 고쳐야겠군.”

 

요시자와는 고개를 끄덕이며 녹음기를 정지시켰다. P에게 확신을 주려는 듯 녹음기에서 카세트를 분리해 품 속으로 집어 넣은 그는 실컷 우물거리느라 필터부분이 뭉개진 담배를 다시 담뱃갑 속으로 되돌리고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렇지. 단순히 한 때의 혈기에 이끌려서는 진짜 실리를 챙길 수 없는 법이지. 자신을 굽힐 줄도 알고, 타협할 줄도 아는 걸 보면 자네도 보통내긴 아닌 모양이야. 역시 자네 사장이 사람 보는 눈 하나는 기가 막히다니까.”

“아닙니다. 저는 그저…….”

 

손을 들어 프로듀서의 말을 자르면서, 요시자와는 그를 향해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그건 프로듀서로써의 이야기일세. 아이들은 때로 자신을 믿고 바라봐주는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사실 그 자체로도 무척 크게 상심을 하기도 해. 내가 알고 있는 젊은 프로듀서 한 사람도 그 점을 간과하여 크게 실수를 한 적이 있지……물론, 아이들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네. 하지만, 자네를 믿고 따르는 아이돌들의 섬세함을 부디 잊지 말아주셨으면 하네. 자네에게 그들이 무척이나 소중한 존재인 만큼, 그들에게도 자네는 그에 못지않은 존재일 테니.”

“……알겠습니다.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무얼, 감사까지야. 늙은이의 오지랖이라고 생각해주게.”

 

그 때, 요시자와의 품 속에서 휴대전화의 알람소리가 들려왔다. 휴대전화를 꺼내어 액정에 떠오른 시계를 바라본 그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나는 이만 가 보겠네. 자네 사장에게도 요시자와가 안부 전하더라고 전해주게나.”

“알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만날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 다음에는 이런 ‘접대’가 아닌, ‘싸움’을 해주기를 바라네.”

 

P와 함께 악수를 나눈 뒤, 그 말을 남긴 그는 껄껄 웃으면서 스테이지를 벗어났다. 스테이지 위에 혼자 남아, 우두커니 자리에 서서 그의 이야기를 곱씹던 P의 등 뒤에서, 이번에는 그를 부르는 한 여성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저기……프로듀서 씨……?”

 

P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베이지색 원피스 위로 CG프로덕션의 로고가 그려진 스태프용 재킷을 걸치고 있는 여성이 있었다. 등 뒤로 묶어 내린 기다란 밤색 머리카락과, 약간 아래로 처진 눈매가 무척이나 처연한 인상을 주는 그녀는 한 순간 마주친 그의 눈길을 조심스레 피하면서 그를 향해 다가왔다. 1주 전부터 ‘신데렐라 걸즈’의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게 된 어시스턴트, 미후네 미유였다.

 

“무슨 일이에요?”

“치히로 씨가 돌아갈 준비가 끝났다는 걸 전해달라는 부탁을 하셔서요…….”

“알겠습니다. 연습생 애들은 돌아갔나요?”

“네, 조금 전에, 이동차량으로 매니저 분들과 함께 기숙사로 돌려보냈어요.”

“다행이네요. 자, 그럼 갑시다.”

 

프로듀서는 그녀의 뒤를 따라 스테이지를 벗어났다. 스테이지의 뒤편에는 한창 공연을 진행하던 좀 전과는 딴판으로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며 설비를 정리하는 스태프들을 뒤로 한 채 미유와 프로듀서는 스테이지를 떠나 그들의 대기실로 향했다.

  


 

 

여자 기숙사에서 마유와 후미카 씨가 내리고, 린 네 꽃집 앞에서 린이 내리고 나니 사람으로 가득 차 있던 차 안에는 금세 서늘한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스테이지를 막 나올 때만 하더라도 다섯 사람이 타고 있던 자동차에는 어느덧 나와 P씨, 두 사람 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 P씨가 향하는 곳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우리 집일 것이다.

잔잔한 엔진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을 제외하면, 차 내부는 무척이나 조용했다. 평소에는 라이브나 수록이 끝나면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끌벅적했지만, 다섯 명이 타고 있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오늘의 우리는 무척이나 조용했다.

 

내가 졌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야근에 야근을 반복하며, P씨는 우리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우리는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반드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상대는 아이돌이 되기 전이든, 된 다음이든 동경해 마지않던 그 ‘765올스타즈’였지만, 지금의 우리라면. P씨가 함께하는 우리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내가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

카에데 씨와 린의 분투로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던 마지막 라운드에서, 자신만만하게 들고 나간 나의 노래와 함께 내 모든 것을 가지고 올라간 무대에서, 나는 ‘벽’을 넘지 못했다. 과정은 어찌되든 상관 없다. 우리는 결과로써 모든 것을 말하는 프로니까.

무대가 끝난 직후부터 P씨는 몇 번이나 나를 칭찬해 주었다. 최고의 무대였다고, 연습한 것 이상의 멋진 무대가 나왔다고. 그리고, 결과가 나온 다음에는 아쉽게 되었다며 나를, 우리들을 격려해 주었다.

P씨는 다음 번에 되갚아 주면 된다고 했지만, 아무리 그런 소리를 듣는다고 해서 괜찮을 리가 없다. 프로로써, 아이돌인 호죠 카렌으로써, 그 한 번의 실패는 돌이킬 수 없는 실패였으니까. 그것은 나 따위가 괜찮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조수석의 차창 너머로 휙휙 지나가던 풍경이 점차 익숙한 것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다는 의미다.

 

“P씨.”

“응?”

 

나, 오늘은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라는 말은 가슴 속으로 삼켰다. 그 대신, 나는 오늘까지 몇 번이나 했던 말을 또다시 꺼냈다.

 

“피곤하지 않아? 계속 야근했잖아.”

“뭐, 이러는 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오늘은 무대 준비하는 동안에 조금 잤으니까 괜찮아.”

 

내 기억에는 없는 이야기였다. 설마 점검 전에 20분 정도 누워 있던 걸로 충분하다고 하는 걸까?

나는 고개를 돌려 운전석을 바라보았다. 휙휙 지나가는 가로등의 불빛이 그의 얼굴을 잠깐씩 비출 때마다 그의 얼굴이 보인다. 하지만 그의 키가 원체 큰 탓에, 불빛이 비치는 것은 고작해야 턱 부분 뿐이었다.

익숙한 풍경은 마침내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우리 집이 나오게 된다. 나는 슬쩍 눈을 돌려 자동차 안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후 8시라는 시간이 떠올라 있었다.

 

“P씨, 이 다음에는 뭐 할 거야?”

“일단은 사무실에 가서 오늘 받은 걸 정리해야겠지.”

“뭐야, 그럼 오늘도 퇴근 안 해?”

“할 거야. 센카와 씨랑 미후네 씨가 먼저 가서 하고 있으니까 오래 걸리진 않을걸.”

 

치히로 씨랑 미유 씨가 있다는 말은, 아마도 다른 어른들도 같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미즈키 씨나 카에데 씨나, 이렇게 모여서 마시는 걸 무척이나 좋아하시는 분들이니까.

 

“그럼, 뒷풀이도 가?

“으음, 아마도 그렇게 되겠지.”

 

P씨는 난처한 듯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전부 확답이 아닌 가정형이었지만, 좀처럼 거절이란 걸 할 줄 모르는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아마도 억지로 끌려갈 확률이 높았다.

P씨는 자동차를 주택의 대문 앞에 부드럽게 정지시켰다. 어느 새 도착한 것인가. 자동차가 멈춰 선 곳은, 다름아닌 우리 집 앞이었다.

 

“……다 왔다. 바래다 줄게.”

 

나는 시동을 끄고, 안전띠를 풀며 운전석에서 내리려 하는 P씨의 팔을 붙잡았다.

 

“괜찮아. 혼자 갈게.”

“…….”

 

P씨는 대답 대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한 그의 눈빛을 마주하자 가슴 한 켠이 몹시 욱신거렸다. 이렇게 순수하게 나를 염려해주는 사람에게 기댈 생각은 하지 않고, 도망칠 생각부터 하는 나 자신이 무척이나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모든 것의 원인이 누구인지를 따져 본다면, 차라리 도망치는 것이 더 나을 지도 모른다.

한동안 나를 바라보던 P씨는 단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라고 대답한 뒤, 조수석의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린 나는 문을 닫기 전에 전 고개를 숙여 P씨의 얼굴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P씨, 오늘 정말 수고했어. 그리고, 정말 고마워.”

“내가 할 말이지. 일정 따라오느라 고생했다. 내일 미팅 끝나면 다음주 수요일까지는 오프니까 마음 놓고 푹 쉬어.”

“응, P씨도 조심해서 들어가고. 오늘은 꼭 집에 들어가?”

“……그래. 내일 만나자.”

“응, 내일 봐.”

 

나는 조수석의 문을 닫고 우리 집을 향해 걸어갔다. 대문을 지나, 현관문을 향해 걸어가는 도중에도 등 뒤에서는 나를 바라보는 P씨의 시선이 느껴졌다. 계단을 올라, 현관문 앞에 도착한 나는 빙글, 뒤로 돌아 나를 바라보는 운전석의 P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난 이제 들어갈 거니까, 당신도 얼른 가.

내 메시지를 눈치챈 것인지, 나를 바라보던 P씨는 나를 향해 손을 한번 흔들어 준 뒤, 창문을 닫고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 그 모습을, 나는 현관에 서서 문고리를 잡은 채 지켜보고 있었다.

 

“……미안해, P씨.”

 

서서히 멀어지던 자동차의 빨간 후미등이 마침내 사라졌다. 나는 꼭 쥐고 있던 문고리를 슬며시 놓고, 내가 들어왔던 길을 그대로 거꾸로 돌아 집을 나갔다.

 

‘자,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새하얀 한숨을 내쉬면서 올려다 본 하늘에는, 가로등의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불빛을 이겨낸 시리우스가 힘겹게 반짝이고 있었다.

  


 

 

오늘의 행사를 앞두고 들어온 들어온 팬레터와 선물의 선별작업을 마치고, 회사 주차장을 빠져 나오는 프로듀서의 차 안에는 또다시 사람이 한가득 타고 있었다. 뒷풀이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치히로와 미유, 카에데, 미즈키가 탑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면, 미유 씨는 회식 처음이었죠? 미안해요. 한창 바쁠 때 오셔서…….”

“아니요……오히려, 여러분들이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차 안에서는 뒷좌석에 앉은 치히로와 미즈키, 그리고 카에데의 이야깃소리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미유는 창 밖을 바라보다가도 이따금씩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카에데의 농담에 쿡쿡대기도 하면서 다시 창 밖을 바라보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운전석에 앉아 있는 프로듀서는 묵묵히, 입을 굳게 다문 채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그나저나, 정말 아깝게 됐어. 한 걸음만 더 나갔으면 이길 수 있었는데!”

“에이, 그래도 5라운드까지 끌고 간 것 자체가 기적이었죠. 카에데 씨, 정말로 고생하셨어요.”

“아아, 정말……4라운드에서 키사라기 양을 만났을 땐 죽는 줄 알았어요……나이도 어리면서 어쩜 그렇게 프레셔를 뿜어대는지……나중에는 다리가 다 풀리더라니까요?”

“아! 그거 나도 알아. 왜 예전에 MC역으로 관서 라이브 투어 진행을 맡은 적이 있거든? 거기서 키사라기 치하야를 처음 만났는데, 와 진짜 육성으로 들으니까 장난 아니더라.”

 

‘응……?’

 

잠시 이야기가 멈춘 사이, 미즈키와 치히로의 사이에 앉아 차 안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카에데는 문득 프로듀서의 모습에서 자그마한 위화감을 느꼈다. 오늘따라 유난히 프로듀서가 조용했던 것이다. 물론, 운전을 하고 있을 때는 그것이 정상이기는 하지만, 도로 사정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평소의 프로듀서는 이런 대화를 들으면 먼저 말을 꺼낼 사람이지,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입을 다물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교차로에서 잠시 신호를 받아 자동차가 멈추었을 때, 카에데는 자신이 느낀 위화감이 기분 탓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신호를 기다리면서 프로듀서는 운전대에 몸을 기대어 물끄러미 신호등의 빨간 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점 없는 멍한 눈빛으로 이따금씩 시선을 돌리며 턱을 쓰다듬는 그의 행동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할 것이 있을 때 나타나곤 하는 습관이라는 것을 카에데는 알고 있었다.

 

“아, 그러고보니, 행사 전에 765쪽 사무원 분이랑 만났는데 말이에요…….”

 

또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는 치히로와 미즈키의 사이에서 카에데는 룸미러 너머로 비치는 프로듀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좀처럼 생각이 표정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니, 나중에라도 캐묻겠다고 생각하면서.

 

 

골목길 깊숙한 곳에 위치한, 간판조차 없는 선술집에 도착하자 미즈키와 치히로는 기다렸다는 듯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근처 공터에 차를 주차시킨 프로듀서와 함께 두 사람의 뒤쪽에서 걸어가던 미유와 카에데가 가게로 들어가려는 순간, 두 사람은 자신들의 뒤를 따라오던 프로듀서의 발걸음이 멈춰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프로듀서 씨……안 들어가시나요?”

 

가게 입구에 멈춰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얼굴과 하늘을 번갈아 바라보던 프로듀서는 새하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는 미안하다는 듯, 두 사람에게 깊게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중요한 회의가 있다는 걸 잊고 있었어요. 저는 그쪽에 참가해야 하니, 뒷풀이는 제 몫까지 재밌게 즐겨주세요. 사후강평은 차후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잠시만요, 프로듀서?”

 

카에데가 말릴 틈도 없이 곧바로 자신의 자동차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 프로듀서는 운전석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가게 앞에 덩그러니 남겨진 카에데와 미유는 멍하게 서서 골목길 저편으로 사라지는 붉은 테일램프를 바라보았다.

 

“이런 날에도 회의라니……프로듀서 씨는 무척 바쁘신 분이군요.”

“글쎄요……저게 정말 회의인지 아닌지…….”

“네……?”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카에데의 말을 듣고, 미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뒷풀이 장소를 떠나, 프로듀서가 향한 곳은 다름아닌 카렌의 집이었다. 공연이 끝난 이후부터 묘하게 침울해보이던 그녀의 모습이 어쩐지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렌의 집에 도착한 프로듀서가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들은 대답은 전혀 뜻밖의 대답이었다.

 

“네? 집에 없어요?”

“네. 한 시간쯤 전에 연락이 와서, 오늘은 나오랑 같이 기숙사에서 자고 간다고 하던걸요?”

 

프로듀서는 황급히 시선을 내려 시계를 바라보았다. 한 시간 전이라면 오후 9시경. 어느 쪽이든 지금은 16살 소녀가 혼자서 걸어 다니기엔 영 좋지 않은 시간대였다. 프로듀서는 고개를 들어 다시 카렌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라도 발생한 것은 아닐까, 불안해 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혹시, 카렌에게 무슨 일이라도……?”

“아, 아닙니다. 잠시만요.”

 

그는 황급히 자신의 휴대전화를 꺼내 메일함을 열었다. 새로 온 메일 같은 것은 없었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휴대전화를 집어넣었다.

 

“아, 메일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깜박하는 바람에 괜한 걱정을 끼쳐드렸네요.”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걱정을 끼쳐 죄송하다며 거듭 사과를 한 뒤, 불안해하는 카렌의 부모님을 안심시켜 집 안으로 돌려보낸 프로듀서는 다시 운전석으로 되돌아오기가 무섭게 휴대전화를 꺼내 린의 번호를 눌렀다.

 

[네, 시부야입니다.]

“아, 시부야. 쉬고 있을 텐데 미안하다. 프로듀서야.”

[프로듀서? 이 시간엔 무슨 일이야?]

“별 다른 일은 아니고,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잠깐 괜찮을까?”

[응, 괜찮아. 무슨 일인데?]

“오늘 무대 끝나고 나서, 대기실에서 호죠가 이상한 이야기 같은 걸 하진 않았어?”

[이상한 이야기? 글쎄……그런 건 모르겠고, 아, 그래. 무척이나 아쉬워했어. 프로듀서에게 보답하지 못했다고. 그 이외에는……딱히 모르겠네.]

“알았다. 고마워.”

[저기, 카렌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린의 말에 프로듀서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사실대로 말을 해야 할까, 아니면 말아야 할까? 잠시 저울질을 하던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을 결정했다.

 

[……프로듀서?]

“……실은, 호죠가 아직 집에 안 들어간 모양이야.”

[뭐? 직접 데려다 준 거 아니었어?]

“현관문을 여는 것 까지는 봤는데, 아무래도 거기서 집으로 안 들어가고 다시 나간 것 같다. 혹시 짐작가는 곳이라도 있어?”

[글쎄……응, 일단, 나오랑 이야기해보고 다시 연락 줄게. 그래도 되지?]

”물론. 고맙다.”

[아니야. 신경 못 쓴 우리 잘못이지. 아무튼, 금방 연락 줄게.]

 

전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재킷 안에 집어 넣은 프로듀서는 실수로 경적을 울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스티어링에 몸을 기대었다. 스테이지 위에서 느꼈던 찝찝한 기분, 그리고 묘하게 침울해 보였던 카렌의 표정. 그 원인이 지금에서야 밝혀졌다.

 

“호죠…….”

 

프로듀서는 재빨리 생각을 정리했다.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가만히 앉아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잠시 후, 생각을 정리한 그는 다시 시동을 걸고 어딘가를 향해 차를 몰았다.

  


 

 

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두르고, 변장용으로 샀던 알 없는 안경을 쓴다. 그것만으로도 불과 수 시간 전, 수많은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아이돌 ‘호죠 카렌’은 그냥 ‘카렌’이 된다. 지나가는 사람들 그 누구도 나를 신경쓰지 않고, 점차 차가워지는 겨울밤의 칼바람에 옷깃을 여미면서 제갈 길을 갈 뿐이었다.

이거, 카에데 씨에게서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몰랐는데, 정작 느껴보니까 무척이나 씁쓸하네. 다음부터는 적어도 모자는 벗고 다닐까.

빌딩 사이로 돌풍이 몰아치는 번화가의 골목길을 잰걸음으로 지나가자, 텅 빈 공원이 내 눈 앞에 나타났다. 어쩐지 지금의 나에게는 딱 어울리는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나는 주저 없이 가로등이 쓸쓸하게 빛을 뿌리는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완전히 해가 떨어졌기 때문일까, 주위를 둘러보면 사람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타박, 타박, 하는 나 자신의 가벼운 발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하얗게 부서지는 한숨 너머로, 가로등에서 약간 멀어진 곳이라 그런지, 조금 전보다는 훨씬 많은 별들이 보였다.

 

 

***

 

 

나는 문제아였다.

병약한 어린 시절을 핑계 삼아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다못한 것인지, 신은 나에게 넘쳐흐를 정도로 많은 시간을 주었지만 나는 나에게 주어진 신의 은총을 그저 하루하루, 아무런 목표도, 가치도 없이 그저 허비하고만 있었다. 그런 나에게, 신은. 아니, 신님은 두 번째 은총을 내려주셨다.

 

아이돌에 관심 있으십니까?’

 

처음에는, 그저 사기꾼이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붙임성도 없고, 애교도 없고, 근성도 없는 나 같은 폐급 인간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주는 것이, 너무나도 수상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저 때의 나는, 내가 생각해도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히키코모리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이런 나를 아이돌로 만들어 주겠다는거야? 나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데? 제로부터 쌓아간다는 건 안 좋아하고, 체력이던가, 노력, 근성 같은 건 아예 하나도 없는데?’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야.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지.'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그는 진짜였다. 만신창이가 되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무도회장을 우러러보기만 하던 재투성이 소녀에게 내려온 진짜 마법사였다.

무도회장에 간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체력 단련부터 발성, 댄스, 표정연기. 모두가 하나같이 낯설고, 체력을 소모하는 것들 뿐이었다. 근성의 ‘ㄱ’조차 찾을 수 없던 그 시절의 나는 곧잘 그에게 화를 내기도 했고, 짜증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나의 투정을, 짜증을 모두 받아 주었다.

힘들 때 돌아보면, 그는 항상 내 손이 닿는 곳에 있었다. 내가 앞서 나갈 때는 조용히 뒤에서 나를 받쳐 주었고, 힘들어 뒤로 처질 때면 내 손을 잡고 이끌어 주었다.

 

힘들면 얼마든지 욕을 해도 좋아. 때려도 괜찮아. 그렇게 해서라도 네가 나아갈 힘을 얻는다면, 나는 그걸로 충분하니까.’

 

그렇게 하루가 흐르고, 일주일이 흐르고, 한 달이 흐르고, 세 달이 흘렀다.

쓰레기 그 자체였던 나는 어느 샌가 어느 정도 사람다운 흉내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사람답게 웃고, 사람답게 춤추며, 사람답게 노래를 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마침내 우러러보던 빛나는 무도회장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그 날, 나는 마침내 깨달았다. 인생을 반쯤 포기하고, 쓰레기처럼 살아가던 내가 그에게서 받은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자신을 사기꾼이라 생각하고, 가짜라고 생각하던 메마른 소녀에게는 반짝이는 빛을 가르쳐 주었다.

자신을 포기하고, 하루하루 되는 대로 살아가던 소녀의 빛 바랜 꿈에는 근사한 색을 입혀 주었다.

신님께서 주신 시간을 헛되이, 허투루 소비만 하던 아이에게 살아가는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아무리 건방지고, 아무리 제멋대로인 사람이라도 이렇게까지 받아버리면 감격해버릴 수밖에 없다.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날부터, 내게는 한 가지 목표가 생겼다.

그가 나의 꿈을 이루어 주었으니, 나도 그의 꿈을 이루어 주어야겠다는 목표였다.

막연하기만 하던 그 목표를 가슴에 품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나는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처음 프로그램의 계획을 들었을 때부터 얼핏 짐작은 하고 있었다. 목표까지 일직선으로 펼쳐진 꽃으로 치장된 레드카펫을, 지금 내가 걷는 길과 똑같은 길을 걸었던 한 사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카가키 카에데. 그의 첫 번째 신데렐라.

내게 펼쳐진 길은 카에데 씨가 걸었던 길과 무척이나 비슷했다. 시간을 들여 조련한 자신의 노래, 의상부터 연출까지, 모든 것이 나를 위해 튜닝된 나만의 스테이지. 하지만 그보다도 더 나를 행복하게 했던 것은, P씨가 나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P씨와 함께 노래하고, P씨와 함께 레슨을 받고, P씨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나날. 1분 1초가 행복했던 그 시간은, 나에게는 정말로 꿈만 같았던 나날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만……착각을 해 버리고 말았다.

운명이 만들어가는 이야기의 주역은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는 P씨와 내가 자아내는 이야기의 히로인이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정말로 사소한 착각이었다. 그 착각 속에서, 나는 나에게 주어진, 오직 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멋진 드레스를 바라보며 드디어 내 목표를 이룰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긴다는 생각은 하지 마. 지금 네가 가져야 하는 건, 지금까지 갈고 닦아온 네 자신을 여과 없이 모두에게 보여주는 거야. 욕심을 가지지 마.

 

그런 그의 충고를 한 귀로 흘려 버리고, 잔뜩 부풀어오른 가슴을 안고, 나는 스테이지로 향했다.

 

걱정 마, 당신이 키운 아이돌이잖아?’

 

이길 거야. 반드시 승리해서,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할 거야.

저 사람이 내 프로듀서라고. 나를 밑바닥에서 여기까지 끌어올려준, 최고의 프로듀서라고.

 

 

***

 

 

꿈은 거기까지. 현실의 벽은 높았다.

 

“아~아, 끝나버렸구나.”

 

입 밖으로 꺼내놓은 그것은, 내 생각보다 조금 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내게 다시 되돌아왔다. 각오는 했지만, 생각보다는 훨씬 아팠다.

결국, 나로써는 역부족이었던 거야.

갑자기 핑, 하고 눈물이 돌았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흔들며 서늘한 손가락으로 눈가를 덮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은 없을테지만, 그래도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것이다.

 

“아하하, 뭐가 히로인이라는 거야. 나 주제에.”

 

실력도 없어, 체력도 부족해, 성격도 더럽고, 멘탈도 약한 주제에 카에데 씨의 자리를 넘보려 하다니, 착각도 유분수지.

히로인이라니. 나 따위에겐 어울리지 않는 거였어.

  


 

 

근처에 위치한 공터에 자동차를 세워 놓고, 연락처를 붙여놓은 뒤, 차에서 내린 프로듀서는 무작정 달렸다. 영업용 신발이 아닌 업무용 드레스슈즈를 신고 있었기에 달리는 것이 썩 편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그에게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몇 번째인지, 세기도 힘들 정도로 전화를 걸기를 반복한 휴대전화의 스피커에서는 휴대전화가 꺼져 있어 통화를 할 수 없다는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무슨 사고라도 당한 것은 아닌지, 휴대전화를 주머니로 집어넣는 그의 마음이 바빠졌다.

10분 단위로 설정해둔 시계에서 네 번의 종소리가 울렸다. 10시 40분. 카렌이 갈 만한 장소를 뒤져 가면서, 도심을 들쑤신 지 이미 30분이나 지나 있었다. 새끼발톱이 몹시 쓰라렸다. 코로, 목으로 들어오는 한겨울의 칼바람이 기도를 찢어발길 듯이 차가웠다.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듯 땅을 박차는 발에 힘을 넣으면서, 그는 조금 전 나오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저기, 이거는 P씨한테만 말하는 거야.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면 안 돼?

가능하면 내가 가르쳐줬다는 사실은 카렌한테도 말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그 녀석, 이런 말 하는 거 엄청 싫어하니까.

으응, 그러니까, 카렌 말인데. 그 녀석, 요 며칠동안 무척이나 행복해했어. P씨랑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P씨에게 받은 걸 드디어 갚을 수 있게 되어서 행복하다고 노래를 불러 댈 정도였다니까. 정말, 그런 모습은 나도, 린 녀석도 처음 봤어.

아마도 반동 역시 크게 왔을 거야. 우리도 P씨에게 미안하고, 분한 마음 뿐인데, 녀석은 오죽하겠어? 그러니까 P씨, 카렌을 찾더라도, 너무 혼내지는 말아 줘. 열심히 한 후유증이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횡단보도에서 멈춰 서자 몸에서 피어 오르는 새하얀 김 때문인지 안경에 뿌옇게 김이 서렸다. 프로듀서는 칫, 하고 혀를 차면서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주머니 속으로 집어 넣었다. 헐떡이는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신호를 기다리던 그는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린에게서 도착한 메일과, 평소에도 연락을 취하고 있는 주위 상인들에게서 도착한 라인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메시지를 확인하던 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는 곧바로 몸을 빙글 돌려, 자신이 지나왔던 길을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네를 믿고 따르는 아이돌들의 섬세함을 부디 잊지 말아주셨으면 하네. 자네에게 그들이 무척이나 소중한 존재인 만큼, 그들에게도 자네는 그에 못지않은 존재일테니

 

‘그렇군……이런 뜻이었구나…….’

 

명백한 프로듀서의 계산 착오였다. 설마하니 아이들에게 자신의 존재가 그렇게도 중요한 것이 되어 있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지금의 이 사단은 결국 자신의 부주의가 일으킨 것이었으니, 프로듀서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빨리 ‘제보’가 들어온 곳에 도착하는 것뿐이었다.

 

한겨울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한쪽 팔에 둘둘 말고, 온 몸에서는 새하얀 김을 풀풀 일으키며 도보를 내달리는 그를,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춥다.

얼마나 떠돌아다닌 것일까. 밤이 깊어지자 바람이 좀 더 강해졌다. 결코 열이 많은 체질은 아니었기에 평소에도 방한대책은 철저하게 하고 다니는 편이지만, 지금의 날씨는 지금이 11월인지, 아니면 1월인지를 다시 확인하고 싶을 정도로 무척이나 추웠다. 어딘가 실내에 들어가서 몸을 녹이고 싶다는 생각이 든 바로 그 때, 내 눈에 띈 것은 주광색의 은은한 불빛을 흩뿌리는 카페의 간판이었다.

 

“……돈은 없지만, 뭐……염치불구하고 몸이라도 녹이자.”

 

마음을 정한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실내의 따뜻한 공기에 서서히 굳어가던 몸이 녹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창가에 위치한 자리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공연 후의 나른함에 더해 의자의 푹신한 쿠션감이 오늘따라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번화가에서 한 블록 정도만 안으로 들어갔을 뿐이지만 카페 안은 놀라울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번화가에서 가까운 곳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서오세요. 혼자 오셨나요?”

“음……아뇨, 일행이 올 거에요.”

“네, 그러면 주문이 정해지면 불러주세요.”

 

내 거짓말에도 앞치마를 두른 점원은 내 앞에 메뉴판을 내려놓고는 꾸벅, 허리를 숙인 뒤 자리를 떠났다.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엄마에게 나오랑 같이 기숙사에서 자고 간다는 메일을 보냈다.

……나중에 나오한테 말 좀 맞춰 달라고 해야지.

휴대전화의 위쪽에 떠오른 시계는, 오후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서, 나는 이따금씩 턱을 괴기도 하고, 아니면 등받이에 등을 기대어 팔짱을 끼기도 하면서 창 밖의 풍경을, 그리고 카페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카페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두 뺨이 새빨갛게 상기된 채, 옷깃을 여미면서 들어오고 있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나뭇가지가 크게 요동치는 것을 보아하니, 아까보다 바람이 더 강해진 모양이다.

 

“흐아암…….”

 

몸이 따뜻해지자, 이제는 조금씩 피로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체력도 없는 주제에 들어가 쉴 생각은 안 하고 밖을 쏘다닌 벌이라는 것일까?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나는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급히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카운터에서 가만히 커피잔을 닦던 중년의 남성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을 가늘게 뜨고는 곧바로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설마, 거수자라고 생각하는 걸까?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모자를 눌러쓴, 학생처럼 보이는 여자애가 한 시간 넘게 주문도 없이 혼자 앉아 있으니까. 태연한 척 곁눈질로 남성을 바라보고 있자니, 내게 몇 번이나 일행은 언제 오냐고 물어보던 점원이 그에게 다가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점원은 굳은 표정으로 나를 향해 다가왔다.

아아, 올 게 왔구나.

마지막으로 실내의 따뜻함을 기억하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던 바로 그 때.

 

딸랑.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려오는 도어벨 소리와 함께, 가게 내부에 차가운 공기가 휙 돌았다. 나를 향해 다가오려던 점원은 곧바로 발길을 돌려 출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살았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안녕하세요, 혼자 오셨습니까?”

“아뇨, 일행이 있어요.”

 

잠깐만, 거짓말이지?

들려올 리가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화들짝 놀라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내 시선의 끝에는 왼팔에 자신의 잿빛 코트를 둘둘 말고 있는, 안경을 쓴 정장 차림의 남자가 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카페의 입구에 서서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멍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더니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필요할 때 나를 찾아와주는 그가 무척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다. 차가 조금 밀려서.”

“에……?”

 

밖에서 뭘 하고 있었던 것인지, 다른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는 이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땀을 줄줄 흘리면서 내 맞은편 자리에 앉은 P씨는 곧바로 자리로 다가온 점원에게 물 한 잔을 부탁했다. 점원이 물을 가지러 간 사이, 그는 느슨하게 풀어두었던 옷매무새를 다시 바로잡았다.

 

“뒤, 뒷풀이 간 거 아니었어?”

“네 생각엔 내가 지금 술이 넘어갈 것 같아?”

“미, 미안해…….”

“전화는 왜 안 받았어? 배터리 다 됐어? 아니면 꺼 둔 거야?”

 

나는 먹통이 된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배터리가 다 됐어……한 시간쯤 전에…….”

“나 참…….”

 

P씨는 기가 차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을 피해 슬쩍 바라본 카페의 시계는 어느덧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바깥에서 꽤나 오래 돌아다닌 듯, 아직도 거칠게 숨을 몰아 쉬는 그의 두 뺨과 양쪽 귀, 그리고 콧잔등은 새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잠시 후, 점원이 물을 가져오자 잔에 든 물을 단박에 들이켜고, P씨는 팔짱을 낀 채 조용히 나를 노려보았다. 그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누가 보더라도 화가 났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 저기, 화났어……요?”

“그래, 화났다. 왜 화가 났다고 생각해?”

“……모르겠어……요.”

 

하아, 하고 P씨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팔짱을 풀고, 그는 테이블에 기대어 앉아 내게 몸을 기울였다. 밝은 곳에서 다시 바라본 그의 얼굴에는 무거운 피로감이 떠올라 있었다.

 

“왜 집에 들어가지 않았어? 부모님한테는 왜 거짓말을 했어?”

“혼낼 거야……?”

“대답 여하에 따라서는.”

 

즉답이었다. 도저히 그의 눈을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기에,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해 이리저리 눈을 돌렸다.

 

“……오늘, 져버렸잖아.”

“응, 졌지. 그래도 잘 했잖아.”

”……P씨가 그렇게 열심히 준비해 줬는데, 그걸 내가 망친 게 분해서, 나, 나…….”

 

침착하게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목소리가 흔들렸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 같은 건 P씨의 아이돌이 될 자격이 없는 건 아닐까……하고……생각했더니, 다 싫어져서……미안해요.”

 

테이블 위에 올려둔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분함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그 때, P씨의 손이 덜덜 떨고 있는 내 손을 붙잡았다. 처음 봤을 때 새하얗게 곱아 있던 그의 손은, 그 짧은 사이에 마치 숯을 넣어 둔 화로처럼 절절 끓고 있었다. 건강함 그 자체라는 거구나.

손을 타고 전해지는 그의 온기를 느끼던 나의 귓가에, 자그마한 그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네게 실망했다는 말을 했던가?”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너 때문에 무언가를 망쳤다는 말을 했어?”

 

이번에도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나라고 해서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치만, 그치만……프로덕션 매치잖아. 프로듀서들한테는 무척이나 중요한 이벤트라고......그런데 나 때문에 P씨가…….”

“하아……호죠.”

 

P씨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프로는 기본적으로 ‘제로섬 게임’이야. 절대로 공짜란 건 존재할 수가 없지. 네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네 발 밑에 있어야만 해.”

 

나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것은, 내가. 아니 우리가 처음으로 데뷔하던 날, 무대의 대기실에서 P씨가 해 준 이야기였다.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프로는 기본적으로 남을 밟고 올라서야만 하는 직업이라는 거야. 남들과 함께하겠다는 물렁한 마음으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지. 그 대상이 동료가 될 수도 있고, 라이벌이 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너희가 밟고 올라서야 할 발판은 내가 되어야 한다. 내가 무슨 일을 당하든 결과적으로 너희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은 없을 거야.’

 

“물론, 오늘의 일로 인해 내가 결코 좋은 소리를 듣지는 못할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어.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는 내 꿈에 한 걸음 다가갔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뻐.”

 

P씨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가로등의 불빛 너머로 힘겹게 반짝이는 시리우스가 보였다.

 

“무대 위에서 빛나는 너의 모습은 네 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의 꿈이기도 하니까. ‘아이돌 호죠 카렌’은 한 사람만의 꿈이 아니란 말이야. 너는 아무도 배신하지 않았어. 오히려, 네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을 해 주었지.”

“……응.” 

”기 죽지 마. 너는 잘 해 주었어. 알겠지?”

“……응.” 

 

목이 메었다.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을 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 뜨거워진 눈시울에 맺혀 있던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눈물에 못지않게 뜨거운, 내 손을 감싸쥐고 있는 P씨의 체온이 느껴졌다.

 

 

 

우리는 한동안 신파극의 주인공처럼 두 손을 맞잡은 채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어느 정도 감정이 정리되었다고 판단한 것인지, 내 손을 놓은 P씨는 메뉴판을 집어들었다.

 

“아, 뛰었더니 배고프다. 뭐라도 먹자. 호죠 너도 배고프지?”

“으, 응? 어, 으응…….”

“자, 먹고 싶은 거 골라. 살 찌면 마스터 트레이너 씨 붙여 줄 테니까.”

 

나를 향해 내민 메뉴판을 바라보단 나는 머뭇거리면서 맛있어 보이는 치즈케이크 하나를 손으로 짚었다. P씨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들어 점원을 불렀다.

 

“이거 하나랑 프라푸치노 하나. 그리고 에스프레소 더블샷으로 하나요.”

 

응? 프라푸치노?

생각치도 못한 메뉴가 섞여 있었다. 뜻밖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들어 P씨를 바라보았다.

 

“P씨, 프라푸치노 같은 것도 먹었어?”

“아니.”

“그럼 왜 시켰어?”

“먹고 싶다며?”

“내가? 언제……아!”

 

그제서야 나는 며칠 전, 예능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나갔을 때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비싸 보이는 고급 카페에 갔을 때, 먹고 싶은 건?’이라는 질문이었던가. 그 때는 그냥 생각난 음식을 말한 것뿐이었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었구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괜히 가슴이 찡하고 울렸다.

 

엄마, 아빠. 나 아무래도 틀린 것 같아요. 나, 역시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카페를 나와서, 나는 P씨와 함께 귀가길에 올랐다. 생각에 잠겨 이리저리 터덜터덜 걸어다닌 덕분인지, 내가 들어간 카페는 우리 집과는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미안하다. 네 마음도 모르고, 내가 확실히 달래줬어야 했는데.”

“으응, 아니야. 그래도 결국 찾아와줬잖아?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나, 이래봬도 지금 엄청 감동먹었다구.”

“…….”

“아아, 그건 됐고. 아까 P씨, 카페 주인 아저씨랑 꽤 친해 보이더라?”

“개인적으로 자주 뵙던 분이거든. 덕분에 네 위치를 빨리 찾기도 했고.”

 

내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직후, P씨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인맥을 총 동원해서 나를 찾았다고 한다. 주위 상점가의 아저씨들과 이상하리만치 친한 P씨였으니까, 내가 움직인 경로를 파악할 수 있었던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아아, 그래서 나를 계속 뚫어져라 쳐다보셨구나. 난 또, 가출청소년 신고라도 하려는 건 줄 알았어.” 

 

저 멀리, 가로등 불빛 아래로 익숙한 대문이 보였다. 점점 다가오는 우리 집을 바라보며, 문득 P씨가 말을 꺼냈다.

 

“아이돌, 계속 할 거지?”

“응. 아직 내 꿈이라는 건 변하지 않았으니까. 기왕 하려면 톱은 찍어야 하지 않을까?”

 

‘당신과 함께’라는 말은 아직은 가슴 속에 묻어 두었다. 언젠가, 적당한 때가 되면, 잔뜩 폼 잡으면서 말해 줄 거야.

저 사람이 제가 만든 프로듀서에요! 라는 말을 함께 얹어서 말이야.

 

“뭐……이러니저러니 폼 잡으면서 말은 했지만 말이야, 만약 내가 싫다면, 다른 프로듀서라도…….”

“필요 없어.”

 

즉답으로 튀어나온 단호한 어조의 대답에 P씨는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내 프로듀서는 언제고 P씨 뿐이야. 내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이거 참, 과분하네.”

 

과분하다는 건 내가 해야 할 말이다. 나는 아직, 당신에게 받은 수많은 것들 중, 단 한 가지도 제대로 보답하지 못했으니까.

이런 선문답을 주고받는 사이, 저 멀리 있던 우리 집은 어느새 코앞에 와 있었다.

 

“……호죠.”

“응?”

“이대로 한 방 얻어맞고 끝내기에는 아쉽지?”

“……응, 다음번엔 반드시 이길 거야. 기대하고 있을게. 리벤지.”

“그래, 그 마음이면 충분해. 자, 어서 들어가. 날도 추운데 돌아다니느라 감기 걸리겠다.”

 

P씨에게 가볍게 등을 떠밀려, 나는 대문 안으로 걸어갔다. 현관문으로 걸어가며 슬쩍 뒤를 돌아보면, 이번에야말로 들어갈 때까지 떠나지 않겠다는 듯, 대문 너머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P씨의 모습이 보인다.

현관문 앞에 도착한 나는 그에게 손을 한번 흔들어 준 뒤 곧바로 현관문을 열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 현관문을 닫고, 신발을 벗는 대신 현관문의 렌즈로 밖을 들여다 보았다. 크게 기지개를 펴고, 등을 돌려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다 알고 있는 주제에 정작 중요한 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저기, 그거 알고 있어?

신데렐라에게 마법을 걸어 성으로 보낸 것은 마법사님이지만, 마법이 풀린 신데렐라를 쫓아와 준 건 마법사님이 아니라 왕자님이었다는 사실 말이야. 아마도 당신은 모르겠지. 신경도 쓰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까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확실하게 가르쳐 줄게. 내가, 호죠 카렌이 가지고 있는 진짜 꿈을.

그 때까지 아무데도 가면 안 된다? 알겠지?

 

 

“카렌? 기숙사에서 자고 온다더니?”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것인지, 집 안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이제 부모님한테는 뭐라고 변명해야 할까?

나는 주머니 속에서 쿨쿨 자고 있는 내 휴대전화를 떠올리며 거실로 향했다.

 

---------<END>


 

 

해냈다! 카렌 신곡보다 먼저 나왔어!

안녕하세요, 이번에도 어김없이 새벽업로드를 감행하는 작가입니다.

 

카렌의 이야기가 드디어 끝이 났습니다.

12월 말에 시작된 이야기가 1월 중반에 끝이 났으니, 에피소드 하나를 마무리 짓는데 무려 3주나 걸렸군요.

이 저주받은 속도를 어떻게 개선해야하나...... 그래도 카렌 신곡보다는 먼저 끝났으니까 다행이죠.

 

이번 이야기의 테마는 '박하'입니다. 박하의 노래가사에서 많은 것을 가져왔어요.

카렌이 시시때때로 히로인 타령을 하는 게 다름아닌 그것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해도 참 징하게 나왔네요. 그놈의 히로인.

상편에서는 소녀 카렌의 이야기를.

중편에서는 히로인 카렌의 이야기를.

하편에서는 다시 소녀로 되돌아온 카렌이 자신의 꿈에 대해서 고민하는 내용을 담고자 하였는데........잘 전달되었을지 모르겠네요.

언제나 기획은 거창하고 생각은 블록버스터지만 정작 나온 결과물은 불쏘시개가 되기에 읽어주시는 분들에게는 거듭 죄송하고, 또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실, 중편을 적으면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다른 아이돌들의 비중을 어떻게 해야 할까. 각 라운드별 묘사를 넣어야 할까, 아니면 빼도 좋을까. 

열심히 저울질을 해보기도 하고, 썼다가 날리기를 반복하면서 얻은 결론은 '일단 이번에는 빼자'였습니다.

765 vs 신데렐라 걸즈라는 소재는 분명히 매력적이지만, 완전체인 765 올스타즈에 비해 신데렐라 걸즈는 아직 미완성이니까요. 이 둘의 싸움은, 언젠가 둘이 모두 완전체가 되었을 때,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프로덕션 매치가 이번에만 있는것도 아니고 말이죠.

그걸 고민하다 보니까 하편~중편 사이의 텀이 거의 2주 가까이가 되어 버렸어요. 기다려주신 분들께는 거듭 죄송할 따름입니다.

 

매번 이 시리즈를 즐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 이야기에서 뵙겠습니다.

 

 

덧. 읽으면서 눈치채신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만, 미나미 편과 같은 시간대를 다루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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