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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날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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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1-15, 2017 00:48에 작성됨.

눈이 내렸다.

 올해는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하아. 하얀 입김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평소엔 기온이 어떻든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눈이 오면 괜히 하곤 하는 행동이다. 입김이 공기 사이로 흩어져 사라지는 걸 보면서 편의점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작은 종 소리가 울리고, 알바생의 인사 소리가 들려왔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 적당히 싼 도시락 하나를 집었다. 계산대 위에 올리자 알바생이 바코드를 가져다 댔다.

 

 "398엔입니다."

 

  계산을 한 뒤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집보다는, 사람 구경이라도 할 수 있는 장소가 좋다. 그런 생각만으로.

 눈 덮인 벤치 하나가 비어 있었다. 손으로 눈을 털어내자 손이 빨갛게 언다. 맨손으로 나온 건 그리 현명한 선택은 못 되었다. 잠시 손을 불어 데우고 있으려니,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추운데 이런 곳에서 뭐 해?

 

 상냥한 목소리가 걱정하는 투로 묻고 있었다. 이젠 듣지 못할 목소리. 고개를 저어 떨쳐내고 눈을 턴 자리에 앉았다. 차디찬 벤치가 몸을 떨리게 할 만큼 추웠지만, 무시했다.

 

 "...잘 먹겠습니다."

 

 도시락 뚜껑을 열어 밥을 한 젓가락 물었다. 굳은 밥알이 이 사이로 뭉개지며 옅은 단맛이 새어나왔다. 다 씹었다고 생각될 즈음 밥을 목으로 넘기고, 계속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이내 도시락이 비었다. 고기 소스가 묻은 통을 뚜껑을 닫아 근처 쓰레기통에 버린다.

 

 이제 할 건 없다. 적당히 시간이나 때우고 들어갈까. 그런 생각이 들어 일어나 몇 걸음 걸었다. 눈 섞인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춥네..."

 

 춥다. 모자를 더 눌러써도 얼굴이 가려지지 않아 소용이 없었다. 고개를 숙이자 가방 안의 책받침이 눈에 들어왔다. 아아, 맞다. 정전기 실험이니 뭐니 하면서 얼떨결에 받았던 것을 잊고 있었다. 크게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얼굴 위를 가렸다. 그럭저럭 쓸 만했다.

 

 -이게 그 전설의 머리카락 자석이라고! 신기하지?

 

 자석은 무슨 자석. 픽 웃었다. 너는 항상 그랬지. 별 것도 아닌 걸로 사람의 흥미를 끌고, 어느새 자신의 흐름에 동화시키곤 했다. 나도 자주 휘말렸었어.

 

 머리를 휘휘 저었다. 이제 의미 없는 기억이다.

 

 '...돌아가자.'

 

 눈도, 사람도 보기 싫었다. 집으로 돌아가자.

 

-

 

 공원을 나와 걸었다. 직장에서 집까진 걸어서 꽤 먼 거리이지만, 전철로 다니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 사이에 눌리는 것보다 조금 일찍 나오는 게 낫다.

 

 하아. 입김이 하얗게 새어나왔다. 별 의미도 없는 행동이지만 그냥 하고 싶었다. 별로 할 것도 없으니까 뭘 하든 상관 없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도 이내 질려버렸다. 검게 물든 하늘 아래 조명에 비쳐 빛나는 하얀 눈을 보며, 그저 걸었다. 멍하니 걷기만 했다. 뭐라도 생각하면 거기에 네가 나올 것 같아서. 내 기억 곳곳에 자리잡은 네가 나타나 날 붙잡을 것 같아서, 차라리 문을 닫고 막아버리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자 사거리에 서 있었다. 신호를 기다리고 있자니 건너편 건물에 달린 대형TV에서 요란한 광고가 나왔다.

 

 「시원하고 상쾌하게, 마다제스틴 사이다!」

 

 금발머리를 한 여자아이가 나와서 상큼하게 웃고 있었다. 요즘 자주 보이는 아이돌이다. 호시이 미키, 였던가.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금세 유명세를 타서 나도 알고 있다. 인터뷰에서 프로듀서에 대한 신뢰를 굳건히 표현했다고 하던가.

 

 신호가 바뀌어 있었다. 황급히 건넜다. 한 타임 더 기다리는 건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다. 사거리의 공백은 기니까.

 

 

 집에 거의 다 도착했을 즈음에야 어제 사용하던 컵이 깨졌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쓰던 것이라곤 그게 다라서, 오늘 사지 않으면 난처했다.

 어쩔 수 없다. 근처 마트에 들렀다 가자. 나는 걷던 방향을 돌렸다. 하필이면 마트와 내 집은 완전히 반대 방향이었다. 덕분에 도착하려면 꽤 걸어야 할 듯했다.

 

 음악이라도 들을까 싶어서 주머니에서 mp3를 꺼냈다. 이어폰을 연결해 귀에 꽂자 맑은 목소리가 나왔다. 가수의 이름은 모르지만, 멜로디가 마음에 들어 음반을 사 두었었다. 잠시 들으며 걷다 보면 도착하리라. 이어폰을 만지작거리며 주위를 구경하는데, 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에 테이프로 765라고 써진 퍽 우스운 층이 있는 건물. 뭐하는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별 관심은 없다. 여자아이가 많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아 그쪽과 관련된 곳이겠거니 짐작할 뿐이다.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가게가 보였다.

 

-

 

 적당히 쓸 만한 컵 하나를 골라 구입한 후 가게를 나왔다. 눈이 더 거세져 있었다. 시선을 위로 올려 내리는 눈을 보았다.

 

 '...하아.'

 

 너와 이별한 날도 이렇게 눈이 내렸었는데.

 

 '잘 지내고 있을까.'

 

 네 생각이 났다. 언제나 밝게 웃던 네가.

 

 문득 옆을 보니 아까 그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765라고 쓰인 창문 안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아까는 불이 꺼져 있었는데, 그새 사람이 온 모양이다.

 신경을 끄고 지나가려는데 계단에서 사람이 내려오는 게 보였다. 무심코 시선을 주었다. 어린 여자아이. 자세히 보니 아까 광고에서 나온 호시이 미키였다. 이곳 소속인가. 나랑은 상관 없는 일이라 시선을 돌리려는 순간에, 차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 그 사람을 보고, 나는 헛웃음을 낼 수밖에 없었다.

 

 "허니!"

 "미키, 아직도 안 가고 있었어?"

"허니를 기다렸던 거야!"

"너무 늦게까지 그러고 있지 말라니까..."

 

 저 아이가 애정을 표했던, 그 프로듀서가 너일 줄이야.

 내가 없어도 너는 잘 지내고 있었다. 원망스러운데, 왠지 홀가분했다. 너를 비로소 놓아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너는 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으니까.

 

 '다행이네. 응, 다행이야.'

 

 눈물이 났다. 시야가 흐려지는 것도 아랑곳않고,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실감이 났다. 그가 떠나갔다는 사실이. 이제 나와 상관 없다는 사실이. 빌어먹을 정도로 실감이 났다.

 

 나는 길을 걸었다. 오늘이 지나면 너를 잊을 것이다. 완전히, 잊어버릴 것이다.

 

 -

이젠 뭘 쓰려고 했던지도 기억이 잘 안 납니다. 페이스 조절에 실패해서 후반 급전개와 뜬금없음이 눈에 많이 띕니다. 그냥 막 쓴 거니까 그러려니 해 주세요.

P는 여친 차고 헬렐레하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도 죄책감 가지고 있고 헤어지는 것도 많이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에요. 원랜 이유도 쓸 예정이었지만, 조절 실패하고 다 귀찮아져서 패스. 언제 한번 이 소재를 다시 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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