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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즈 담당 프로듀서는 죽을 만큼 후회했다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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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1-14, 2017 21:36에 작성됨.

원작
아이돌 마스터 신데렐라 걸즈 - 반다이 남코 엔터테인먼트/ A-1 Pictures

12월 6일.

안즈의 전학 수속은 3일에 진행되었다. 안즈 부모의 권한도 있고 기간이 촉박했기에 당장 해결할 순 없으므로, 안즈의 거주지 주소가 기숙사로 되어 있는 걸 이용해, 시간을 들여 프로듀서가 다시 전학 수속을 밟기로 했다.

프로듀서가 학교 측에 말해놓아서 안즈의 전학 처리는 일반 학생들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대외적으로는 아이돌 업무로 학교를 쉬는 것으로 처리.

안즈는 결국 같은 반 아이의 생일 파티에 가지 못했다. 그나마 생일 선물은 전해주었다. 그 아이는 소심했던 인상은 어디 갔는지 같은 사림인 게 믿어지질 않을 정도로 뛸 듯이 기뻐했다. 그건 다행이지만……. 그렇기 기뻐했기에 오히려 안즈의 마음에 싸늘함이 사무쳤다.

이왕이면 파티 현장에서 전해주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풀 죽어 있을 수만은 없다. 학교를 본의 아니게 쉬게 되었지만, 스케줄은 변함없다. 그저 빈둥거리는 시간이 좀 더 늘었을 뿐이다. 일은 변함없이 안즈를 기다리고, 안즈는 일에 뛰어든다.

예능 활동은 놀이와 비슷한 구석이 있어, 노는 기분으로 임하면 침침한 기분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 그러므로 안즈는 요 며칠간 일을 평소보다 더 집중해서 끝냈다.

안즈는 오늘도 현장으로 향했고, 프로듀서는 서류 업무가 있어 사무실에 남았다.

프로듀서는 자판기를 열심히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의자 등받이에 무게를 실었다. 의자가 끼익거리며 프로듀서의 무게를 지탱한다. 고급품이라 그런지 반동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프로듀서의 등을 받았다.

프로듀서는 그런 부드러운 움직임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에 차오른 무거운 구름을 걷는 데에 진을 뺐다. 움켜쥐려 해도, 밀어버리려 해도, 날려버리려 해도 사라지지 않는 질척한 안개. 그것들이 프로듀서의 귓가에 스며들어 조용히 속삭였다.

-후타바를 어떻게 할 생각은 있어?
-이미 지겹도록 말씀드렸잖아요. 주든가 싸우든가. 둘 중에 하나만 하라고.
-전에 저보고 프로듀서 씨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프로듀서 씨는 안즈 아가씨의 이해자이며 동반자라고.
-네가 갖고 싶어 했던 걸 다른 사람도 갖고 싶을 거란 보장은 없다.
-지금 당신은……. 안즈 아가씨에게서 무엇을 보고 계시죠? 아니, 정확히……. 당신은 안즈 아가씨에게 뭘 끼워 넣으려고 하는 겁니까?
-지금 당신이 하는 건 그냥 과잉 이입입니다. 그냥 이기적인 행동입니다.
-까놓고 말하죠. 전 당신 같은 사람이 싫습니다. 남을 위하는 척하면서 실은 자기를 위하는 사람. 정말 역겨워요.

프로듀서는 귀를 막았지만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프로듀서를 괴롭혔다.

후타바를 어떻게 할 생각? 있다……. 아마……. 분명……. 그럴지도……. 주든가 싸우든가 둘 중에 하나만? 하지만……. 꼭 하나만을 골라야 하나? 안즈의 이해자이자 동반자? 그러고 싶다. 그렇게 되고 싶다. 내가 갖고 싶어 했던 걸 다른 사람도 갖고 싶을 거란 보장은 없다. 그래, 알고 있다. 그럴 테지……. 그렇지만……. 안즈에게서 무엇을 보느냐고? 그건……. 이입……. 이건 그런 게……. 남을 위하는 척하면서 실은 자기를 위하는 사람……. 그래……. 그런 사람은 정말 역겹지……. 살아있을 가치가 없어.

의자 등받이가 직각으로 똑바로 섰다. 프로듀서의 팔꿈치가 허벅지에 닿는다. 프로듀서는 귀를 감싸고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

여러 목소리가 엉망으로 뒤엉킨다. 인간이 간신히 들을 수 있는 영역에서 그나마 형태를 갖추고 아무렇게나 흔들린다. 음이 음을 먹고 찌꺼기를 내뱉는다. 찌꺼기는 다른 음이 되어 다시 몸집을 불린다. 그리고 프로듀서의 정신에 머리를 파고들어 입을 쩍 벌리고 내용물을 씹어 먹는다.

이런 가운데, 희미한 목소리 하나가 프로듀서를 불렀다. 지금 프로듀서의 머릿속을 휘젓는 소리와 성질이 다른 목소리. 프로듀서는 간신히 그 목소리를 잡았다.

-프로듀서! 안즈를 똑바로 봐줘!

그걸 인지하는 순간, 프로듀서를 괴롭히던 잡음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프로듀서는 귀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한참 뒤에 중얼거렸다.

“알고 있어.”
마치 자기를 다그치듯이
“알고 있어. 안즈의 집이 어떤 곳인지.”
타이르듯이
“그런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책망하듯이
“똑바로, 이해하고 있잖아.”
설득하듯이.

프로듀서는 혼잣말을 멈추고 책상에 똑바로 앉았다. 머릿속이 새하얗다. 내용물을 전부 비운 것처럼 조용하고 평온하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담겨 있던 것들이 새긴 흔적은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긁힌 자국, 찢긴 자국, 얼룩, 구멍, 너덜너덜한 곳 등등…….

프로듀서는 그 흔적을 더듬어갔다. 안즈를 생각하면서. 안즈를 만나고, 안즈와 함께 일을 하고, 과거의 실패담을 마주 보며. 물리법칙이 적용되는 세상에서 벽을 더듬으면서 걷는 것처럼 프로듀서는 머릿속을 더듬었다.

후타바 안즈. 천재. 니트. 후타바 가의 후계자. 프로듀서의 담당 아이돌.

총명하고, 상냥하고, 의욕에 불이 붙기 힘들지만 한 번 붙으면 활활 타오르는 열정적인 아이.

그리고, 프로듀서가 앞으로도 계속 같이 걷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을 위해 프로듀서가 할 일은…….
그 사람이 원하는 건…….

프로듀서는 양손을 곧게 폈다. 그리곤 양 손바닥으로 뺨을 거세게 쳤다. 몇 번이고 쳤다. 얼굴에 새빨간 자국이 남을 때까지 계속. 손바닥이 다른 사람의 것처럼 느껴졌을 때가 돼서야 프로듀서는 얼굴에서 손을 내렸다.

그리곤 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그것을 노려보았다. 안즈의 교육 담당이 건네준 명함. 명함에는 교육 담당의 연락처가 아닌 다른 연락처가 쓰여 있었다. 그 연락처의 주인은 바로…….

프로듀서는 자동 절전 기능으로 꺼진 모니터를 보고 몸가짐을 단정히 했다. 머리, 넥타이, 수트 모두 체크. 눈가에 조금 고인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치고 명함은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프로듀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즈가 있는 방송국으로 향하기 위해.

-
오늘은 안즈가 미쿠의 라디오 방송에 다시 게스트로 나오는 날이다. 미쿠의 라디오 방송은 TV 방송국 건물 내부에 있는 라디오 방송국에서 이루어지는데, 한 층의 일부 구역이 바로 라디오 방송국 영역이다.

영역이라고 해도 같은 브랜드 방송이라 이름 뒤에 TV가 붙나 라디오가 붙나 차이밖에 없지만.

오늘은 마침 미쿠와 스케줄이 맞아 기숙사에서 같이 출발했다. 둘은 라디오 부스에 앉아 다과 봉투를 뜯었다. 방송 시작 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다.

둘은 과자를 조금 집어 먹으면서(방송 시작 전이므로 아주 조금만) 잡담을 나누었다. 친구 사이에 흔하게 오가는 쓸데없는 잡담이었다. 둘은 마침 같은 건물에서 살고 있어 잡담의 범위는 더더욱 넓다.

“그게 진짜 피클이었어? 그게 터졌다고?”
“응, 냥. 그게 터졌다고 그러더라고.”
“대체 뭘 어떻게 하면 그게 터지지……. 오래 묵혀서 가스라도 찼나?”
“그래서 그 방은 청소가 고역이었더라고 하더라냐. 냄새도 강해서…….”
“으음, 뭘 먹으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네.”
그저 그런 일상 대화.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평온함을 느낀다.

근래 미쿠는 안즈에게 틈만 나면 잡담을 건다. 안즈는 미쿠의 의도를 알지만 모른 척 미쿠의 잡담에 같이 어울린다.

미쿠는 안즈의 집안 사정을 얼핏 알고 있고, 그에 관해서 안즈를 배려하고 있다. 같은 사무소 소속, 같은 기숙사 거주. 만날 기회도 많아져 이렇게 미쿠가 안즈의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는 시간도 많아졌다.

정말이지, 유닛이 해체된 지도 꽤 되었건만, 오지랖이 넓은 리더다.

안즈는 미쿠의 호의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미쿠와 잡담을 나누면 적어도 기분은 나아지니까.

녹음 개시 15분 전에 미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쿠의 핸드폰이 진동을 울려서 미쿠가 양해를 구하고 부스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외부와 차단된 공간에 안즈 혼자 남았다. 부스 안은 방음 상태라서 외부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부스 창문으로 미쿠가 통화하는 게 보인다. 안즈는 젤리를 씹으면서 미쿠를 관찰했다. 부스 안에서 딱히 할 것도 없었거니와, 미쿠가 통화하면서 짓는 표정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미쿠는 때론 웃고, 때론 화를 낸다 싶다가도 다시 풀어져서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다. 표정 변화가 풍부하다. 통화 상대에게 마음을 활짝 연 증거. 어지간히도 사이가 가까운 사람인가 보다.

안즈는 그런 미쿠를 관찰하다가……. 그만 미쿠의 입술을 주목하고 말았다.

우연히 벌어진 일이었다. 안즈가 여태 레슨으로 쌓아온 발성 지식과 아이돌 활동으로 더욱 개화한 관찰력이 맞물렸다. 그것들이 안즈의 머릿속에서 마치 자동 프로그램처럼 작동해 미쿠의 입술 움직임을 읽었다.

-아빠도/ 그렇/ 엄마도 참/ 너무 걱정/ 니/까/ 난 잘/ 지/다니/
-조금/ 있으/ 일/러 가야/ 해/
-아하하/ 뭐야 그/ 그런 / 아/라니까/
-응/ 그래/ 잘 /내/
-나도 ///

통화 종료. 부스 문이 열리고 미쿠가 돌아왔다.

“미안 냐. 통화가 길었지?”
미쿠가 자리에 앉았다. 안즈가 대답하지 않자 미쿠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안즈 쨩?”
“응? 어. 그래. 음……. 조금 멍하니 있었나 봐.”
“후후, 진짜 못 말린다니까. 냐.”
시간이 됐다. 방송 개시.

“새끼 고양이 청취자들! 안녕! 냐! 요즘 주목받는 아이돌과 함께 손수 만들어가는 방송! 미쿠냥의 샤이니 넘버즈가 오늘도 왔어! 오늘의 게스트는 바로!”
“수고하셨습니다~”
“전이랑 같은 패턴이잖아!”
“아테나의 세인트에겐 같은 기술이 다시 안 통했던가?”
시작은 순조로웠다. 안부 이야기와 짤막한 홍보 구간이 지나고 청취자들이 보낸 사연을 읽는 코너가 왔다.

“오늘의 주제는 어디 보자……. 평소에 고마운 사람! 냥! 12월은 크리스마스도 있고 날씨도 추워서 주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기 쉽지. 냐.”
“추울 때 먹는 라면은 정말 맛있지.”
“사람 이야기를 해야지…….”
미쿠가 상자를 꺼낸다. 안에 청취자들이 보낸 편지가 섞여 있다.

안즈가 그중 몇 개를 뽑아 내용을 읽고 청취자가 보낸 사연에 대해 코멘트해야 한다. 안즈가 편지를 하나 뽑아 봉투를 뜯었다.

“어디 어디……. 팬 네임 ‘검은 돌 투석기’ 씨.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안즈가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미쿠 씨 안즈 씨 두 분 다 날도 추운데 감기 걸리지 않으시길 빕니다. 네, 고마워. 제가 평소에 고마움을 느끼는 사람은 제 친구들입니다. 얼마 전에도 큰 도움을 받았는데요, 중요한 시험에 떨어져서 기분이 정말 우울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저를 위해 깜짝 위로 이벤트를 열어줬어요. 정말 예상도 못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날은 정말 펑펑 운 기억이 나네요. 이 자리를 빌려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편지는 또박또박 알아보기 쉽게, 정성스레 쓰여 있었다.

이 사연에 진실한 고마움을 담았다는 듯이. 안즈는 자기가 만약 프로듀서와 C5 멤버, 아카네에게 편지를 쓴다면 이만큼 정성을 들일 수 있을까 생각했다. 안즈가 평소에 고마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들이니까.

“가슴이 따뜻해지는 좋은 이야기였어. 미쿠도 친구들에 대해 또 한 번 생각하게 됐네. 냥. 안즈 쨩은 어때?”
“이하 동감.”
“좀 더 길게!”
“이하하 동감!”
“뭐야 그게!”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정말 잘 담겨있었어. 편지가 참 따뜻하네.”
“좋아! 통과냥! 다음냥!”
안즈가 다음 상자를 뽑았다. 오늘 방송은 왠지 느낌이 좋다. 그렇게 느꼈다.

“팬 네임 ‘요모츠헤구리’ 씨. 안녕하세요! 느낌표 느낌표 느낌표 느낌표 느낌표……. 많다. 생략하고. 네, 안녕하세요. 항상 방송 재밌게 듣고 있습니다! 제 삶의 낙이 됐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네네, 잘 부탁해. 안즈는 이번이 끝이지만.”
“잘 부탁한다냥!”
“이 사연이 뽑히면 정말 기쁠 거예요. 제게 있어 정말 너무 고마운 분들이고, 그분들이 안 계셨다면 전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저는…….”
안즈가 읽다 말고 숨을 삼킨다.

안즈가 끊은 다음…….
다음 부분은…….

“안즈 쨩! 자지 마! 냥!”
안즈가 심상치 않은 걸 눈치챈 미쿠가 공백을 커버했다. 덕분에 안즈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암, 미안. 조금 졸리네.”
“나 참, 누가 니트 아니랄까 봐냐…….”
미쿠는 목소리로 평정을 가장했지만, 얼굴에 걱정스러워하는 티가 떠올랐다. 아마 안즈가 어떤 주제의 사연을 읽었는지 짐작을 해서 그러리라. 설마 했는데 역시나- 이런 느낌으로.

“괜찮아? 읽을 수 있겠어?”
청취자들이 들으면 별것 아닌 질문. 안즈는 그 안에 담긴 걸 곱씹고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이왕 시작한 거 끝까지 해야지.”
안즈는 사연을 최대한 태연하게 이어서 읽었다.

“저는 제 부모님께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가장 신세를 많이 진 사람은 바로 제 부모님입니다. 두 분은 자상하시고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언제 어느 때나 저를 아끼고 사랑해주십니다.”
태연함을 연기하면서 읽는다.

“저는 세상 모든 부모님이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웃기지 마.
“세상 모든 부모님은 사랑으로 자식을 낳고 사랑으로 자식을 키워주시죠.”
동감 못 해.
“저는 세상 모든 부모님이 존경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정 못 해.

이후 문장은 머리에 담지 않았다. 안즈는 그저 문자를 음성으로 변환하는 기계라도 된 듯이 사연을 읽었다. 부모와 함께 여행을 갔다. 식사 준비를 같이했다. 어디서 어떻게 재밌게 놀았다. 이런 평범한 내용이다.

“재밌게 놀았다니 다행이네.”
“사연 감사합니다! 냥! 그럼 다음 가볼까?”
안즈는 다음 편지를 뽑았다.

“팬 네임 ‘티로 피날레’ 씨. 여러분 안녕하세요. 얼마 안 있으면 올해도 끝나갑니다. 내년을 맞이하기 전에 올해를 정리하기 좋은 자리가 되길 바라며 사연을 보냅니다. 저에게 있어 정말 소중하고 감사를 전하고 싶은 사람은 제 가족입니다.”
또다……. 하지만 안즈는 이번에는 끊지 않고 읽었다. 속이 쓰렸지만 배에 힘을 주었다. 방송 중에 또 끊을 수는 없으니까. 이번에도 끊으면 청취자들이 이상하게 여길 테니까.

“얼마 전에 전 고열로 앓아누웠습니다. 땀도 엄청 많이 났고 정신이 혼미해서 누워서 숨만 쉬는 게 고작이었어요. 그때를 회상하면 지금도 몸이 축 처집니다. 그땐 학교고 뭐고 다 쉬어야 했어요. 저희 부모님께선 맞벌이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아파도 저를 돌볼 사람이 집에 없었어요. 근데 두 분 다 무리하게 회사를 쉬고 저를 간병하려고 집에 계셨습니다. 두 분은 저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셨어요.”
안즈의 목소리에 차분함이 깃들었다.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의식한 게 아니다. 읽으면서 안즈의 목소리 톤이 저절로 조절되었다. 안즈가 옛날에 겪은 경험이 되살아난다. 그리고 사연을 통해 회상이 되어 안즈에게 펼쳐졌다.

편지를 쥔 손에 온기가 실린다. 마치 누군가가 안즈의 손을 꼭 잡은 것처럼. 안즈는 이 온기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기억한다.

“덕분에 저는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올해 겪은 일 중에 가장 기억에 남은 일은 이것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기억이 풍화하더라도, 제 마음속 한구석에 언제까지고 살아 숨 쉴 소중한 경험입니다.”
안즈는 편지를 읽고, 열이 오른 손을 어루만졌다.

그 후 방송은 차질 없이 순조롭게 진행. 좋은 청취율을 기록하며 끝을 맺었다. 그래서 안즈는 중간에 사연을 끊은 것에 관한 추궁을 받지 않았다. 안즈는 오히려 스태프들한테 칭찬을 받으며 방송실에서 나왔다.

안즈 옆에 미쿠가 붙는다. 안즈의 목적지는 계단. 오늘은 프로듀서가 시간에 맞추어 지하 주차장에 바로 오기로 약속했다. 미쿠는 이 건물의 다른 층에서 다음 업무를 봐야 한다.

안즈는 계단을 내려가야 하고, 미쿠는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둘은 말없이 복도를 걷다가 계단에 이르자 인사를 나누었다.

“안즈 쨩, 오늘 일 잘했어. 그럼 이따가 기숙사에서 보자. 냥.”
“응.”
“아, 저기. 안즈 쨩.”
미쿠가 계단을 내려가려는 안즈를 불러 세웠다.

“아까 말인데…….”
미쿠가 조심스럽게 운을 뗀다. 어떤 말을 하려는 걸까. 신경 쓰지 마? 괜찮아? 어떤 말이었든, 안즈는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안즈는 미쿠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까 첫 번째 사연 말이야.”
“응?”
“알 것 같더라고.”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는 사연.

“내게 있어 미쿠 쨩도 비슷한 분류니까. 그러니까…….”
안즈는 얼굴을 슬쩍 긁적이면서 말했다.
“고마워. 챙겨줘서.”
미쿠는 안즈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대신 미쿠는 기뻐하면서 말했다.

“미쿠는 선배니까! 냥!”
정말 순진하게.

그 말을 끝으로 둘은 각각 위와 아래로 향했다.

안즈는 계단을 내려갔다. 미쿠는 아마 목적지까지 거리가 몇 층 안 되었을 테니 지금쯤이면 계단을 벗어났을 테고, 안즈가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다.

안즈는 미쿠가 기뻐하는 얼굴을 떠올렸다. 미쿠는 안즈를 잘 챙겨준다. 안즈가 기숙사에서 허전함을 느낄까 봐 말벗이 되어주고, 업무 현장에선 조언도 준다. 안즈는 미쿠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미쿠 덕분에 마음이 한결 편한 건 사실이니까.

미쿠는 정말 좋은 아이다. 조금 전에도 안즈가 느낄 괴로움을 짐작하고 안즈를 배려하려고 고운 말을 꺼내려고 했을 테지. 하지만…….

그러려고 뱃속을 얼마나 휘저었을까? 하면 안 되는 말, 담으면 안 되는 감정, 보이면 안 되는 사정……. 그것들을 피해 고르고 골라 모난 곳 없는 완벽한 백옥 같은 결정체를 꺼낸다.

그걸 받는 안즈 입장에선 편하다. 가시도 없고 말랑말랑해서 어딜 어떻게 받아들여도 상처받지 않는다.

오히려 치유를 받는다.

그걸 아무런 의심 없이, 아무 생각 없이 받으면 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만 궁리해도 알 수 있다. 눈치채버린다.

미쿠가 안즈를 배려할 때마다 미쿠가 조심스러워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아픔이 배어있는 걸.
미쿠가 안즈를 생각해서, 안즈를 위해 가슴 아파하는 걸.

미쿠는 좋은 아이다.
안즈는 미쿠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하지만…….

안즈는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내부의 반쯤 밀폐된 환경 탓에 부츠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유달리 텁텁하게 들린다. 소리의 진원지는 가깝지만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텁텁한 소리라서 굳이 가까이서 듣고 싶지 않다.

가까이서 듣고 싶지 않다…….

-아빠도 그렇고 엄마도 참! 너무 걱정하지 마. 난 잘 지낸다니까.
-조금 있으면 일하러 가야 해.
-아하하! 뭐야 그게! 그런 거 아니라니까.
-응, 그래. 잘 지내.
-나도 사랑해!

안즈는 한 걸음 더 내려왔다. 심장이 아래로 쭉 끌려가는 것 같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가슴이 울렁이는 게 심해진다. 속이 썩어 문드러진 양 질척질척하다. 심장을 둘러싼 뼈와 살점이 물러터진 복숭아 과육이라도 된 것 같다. 이래서야 심장을 제대로 감쌀 수 없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중력에 이끌리는 자극이 심장에 그대로 전달된다.

기분이 점점 나빠진다. 명치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 같다. 구멍을 통해 불쾌감이 가득 주입되나 보다. 불쾌감은 곧 혐오감으로 바뀌었다. 혐오감이 안즈의 내부로 파고들었다. 혐오감이 물러터진 과육을 먹고 자기혐오로 성장한다.

미쿠는 좋은 아이다. 미쿠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저……. 상황과 타이밍이 안 좋을 뿐이다.

미쿠는 미쿠고, 안즈는 안즈다.

부러워하지 말자. 부러워하지 말자. 질투하지 말자. 샘내지 말자.
비참해지지 말자.

안즈는 계단을 내려갔다. 점점 더 수렁으로 빠져든다.

네거티브해질 땐 묻어버리고 싶은 게 쓸데없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아까 읽은 편지 내용이 떠오른다. 모든 부모는 위대하다? 모든 부모는 자식을 사랑으로 낳고 사랑으로 키운다? 존경받아야 한다?

웃기지도 않는 헛소리다!

안즈는 부모를 위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안즈 자신이 사랑으로 만들어지고, 사랑으로 키워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로 자기 부모를 존경하지 않는다.

안즈가 부모에게 사랑을……. 적어도 그 비슷한 것을 느낀 적은 단 한 번.

3번째 사연처럼, 안즈가 앓아누웠을 때.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조차 나지 않는 아득히 오래전.

계단도 이제 한층 남았다. 한 층만 더 내려가면 프로듀서와 만나기로 한 지하 주차장이다.

안즈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안즈의 손이 여태까지 쥔 것 중에서 가장 따뜻한 온기를 떠올린다. 부모의 온기와, 그리고 프로듀서의 온기.

프로듀서…….

프로듀서는 안즈를 똑바로 봐준 사람. 안즈를 동등하게 대하고, 소중히 여겨준 사람이다. 지금 시점에서 안즈가 있는 힘껏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가족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다.

만약 안즈가 계단에서 굴러 넘어져서 다치면 프로듀서는 분명 안즈를 걱정해주겠지.

안즈의 부모는 어떨까?

안즈의 부모는 지금 안즈가 계단에서 굴러 넘어져서 다치면 안즈를 걱정할까? 안즈를 위해 달려올까? 옛날 그때처럼 안즈를 간호할까? 안즈와 프로듀서를 그만 괴롭힐까?

“안즈가……. 내가 다치면……. 걱정해줄까. 정말 그럴까. 여기서……. 굴러떨어지면…….”
일부러 입에 올렸다.

몸이 보낸 경고 신호였다. 일부러 의식하게 말로 빚어 보낸 경고. 그러나 안즈는 경고에 아랑곳하지 않고 저 아래 바닥을 응시했다.

투박한 바닥이 매력적으로 보인다. 바닥이 지금 당장 뛰어들라고 안즈를 부르는 것 같다. 지금 여기서 뛰어내리면 어리광부릴 수 있다고. 프로듀서도 걱정해줄 거고, 안즈의 부모도 안즈를 걱정해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안즈와 프로듀서를 그만 괴롭힐 거라고.

안즈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극히 간단한 행위다. 그저 앞으로 폴짝 뛰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만 하면…….

안즈는 발걸음을 살짝 떼었다. 그러나 이내 발을 다시 계단에 붙였다. 안즈는 냉정을 되찾았다. 아무래도 심적으로 피곤한가 보다. 안즈는 조금 전까지 자기를 지배한 생각이 터무니없다는 걸 깨닫곤 다시 발걸음을 떼었다.

여기서 굴러떨어져 봤자, 부모가 안즈를 걱정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고. 그저 한때의 미혹이다. 감정이 치우친 나머지 헛생각을 했다. 안즈는 마음을 평소대로 가다듬고 계단을 내려갔다.

안즈의 부츠 굽이 계단에서 미끄러졌다.

“어?”
한순간이었다.

중력의 손아귀가 순식간에 안즈의 머리를 잡았다. 급하게 균형을 잡으려 했으나 헛수고였다. 안즈의 한쪽 발은 이미 디딜 곳을 잃었다. 중력에 저항할 몸의 축이 하나 사라졌다. 안즈는 팔을 휘저었다. 그러나 난간이 손에 안 닿는다. 안즈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진다. 발로 밟아야 했던 계단이 점점 눈앞으로 다가온다.

안즈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안즈의 손이 따뜻해졌다. 안즈의 손이 무언가를 잡았다.

안즈는 눈을 떴다. 계단이 가까이 보이지만 얼굴에 닿지 않았다. 갈 곳 없던 안즈의 발이 계단에 올라선다. 안즈는 균형을 다잡고, 안즈의 손을 잡은 프로듀서를 올려다보았다. 프로듀서는 한 계단 위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네가 날 필요로 하면, 언제든지 네 손을 잡을 거라고 그랬지? 그래도 이렇게 빨리 실천할 줄은 몰랐네.”
안즈는 프로듀서를 멍하니 보았다. 프로듀서가 안즈의 손을 놓았다.

“생각보다 일찍 왔거든. 그래서 방송실에 가봤는데 이미 내려갔다고 그러더라. 어디서 엇갈린 건지……. 그래서 급하게 내려오니까. 네가 보였어.”
프로듀서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평소처럼 웃었다. 얼굴에 다소 피곤함이 묻어 나왔지만.

안즈는 프로듀서가 선 계단에 같이 올라섰다.
그리곤 프로듀서를 끌어안았다.

“안즈? 왜 그래?”
프로듀서가 당황한다. 그러나 안즈는 프로듀서를 더욱더 세게 끌어안았다. 프로듀서의 온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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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은 이번에 공개된 안즈 신곡 샘플을 들으면서 썼습니다. 슬로 라이프 판타지. 개인적으론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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