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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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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1-14, 2017 00:07에 작성됨.

그것은 별다를 것도 없는 어느 날의 오후.

그렇게나 맑았던 하늘이 순식간에 어둠이라도 몰려온 것처럼 어두워지자 사무실에 놓인 다인용 소파에서 멍하니 앉아있던 긴 머리의 소녀가 초점이 거의 사라진 눈으로 창 밖을 쳐다본다.

순식간에 비라도 내릴 것 같은, 약간은 불쾌한 냄새가 조금씩 나는 듯했다.

 

"어머, 큰일이네요. 프로듀서 씨, 우산 안 가져 가셨는데...."

 

가슴팍에 '치히로'라고 쓰여진 명찰이 반짝이는, 녹색 옷의 사무원이 소녀와는 반대로 바쁘게 사무를 처리하다가 창 밖으로 잠시 시선을 돌리고는 중얼거린다.

긴 머리의 소녀가 치히로의 말에 조금은 생기가 돌아온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치히로는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고는 묻는다.

 

"왜 그러죠, 나오 씨?"

 

"아니, 그 녀석이 우산을 안 가져갔다길래...."

 

"네, 아침에 영업 나가실 때 우산을 들고가신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그렇구나."

 

나오라고 불린 긴 머리의 소녀는 치히로의 말에 완전히 생기가 돌아온 눈을 반짝이며, 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치히로가 나오의 말에 그녀를 잠시 쳐다보고는 다시 바쁜 사무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나오는 그런 치히로를 잠시 쳐다보다가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창 밖을 쳐다본다.

창 밖의 세상은, 밤이 오는 것처럼 점차 어두워진다. 그에 맞춰 가로등들도 하나둘씩 점멸하기 시작한다.

소녀, 카미야 나오는 마치 소풍 가기 전날의 어린아이처럼, 날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밝게 갠 미소를 지으며 창 밖을 쳐다본다.

후두둑, 후두둑, 후두둑, 후두둑.

창 밖으로 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카미야 나오는 어떤 특정한 루트를 발견한 게이머처럼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당연하다는 듯이 문 쪽으로 향한다.

치히로가 너무나도 당연한 일련탁생의 과정을 발견했다는 듯이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나오를 쳐다본다.

나오는 문 앞에 몇 개이고 놓여져있는 우산 중 두 개를 뽑고는 태양이 쨍쨍 내리쬐는 듯한 환한 미소로 입을 연다.

 

"그럼, 그 녀석한테 갔다 올께!"

 

"네, 다녀오세요."

 

나오의 말에 치히로가 말릴 생각도 없다는 듯이 손을 흔들며 그녀를 배웅한다.

나오가 고개를 끄덕이곤 사무소 바깥으로 나가자 치히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입을 비쭉이며 중얼거린다.

 

"쳇, 매상에 전혀 도움 안 되는 아이돌 주제에."

 

치히로는 그렇게 말하고는 이제 짐 하나가 사라졌다는 듯이 홀가분한 미소를 짓고는 재빠른 속도로 사무에 다시 눈을 돌린다.

사무를 진행하는 치히로의 손에는 여러가지의 서류가 들렸다가 책상으로 향했지만, 그 많은 서류 중에 '카미야 나오'라고 한 마디라도 언급된 서류는 단 한 장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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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야 나오는 비를 온 몸에 맞아가며 가까운 전철역으로 달린다.

가까운 역이라고는 해도 10~15분 정도는 걸어가야 하지만 나오적으로는 그 정도 거리가 딱 좋다는 듯했다.

역의 이름을 밝히는 라이트의 불빛이 들어오자 카미야 나오는 천천히 숨을 고르고는 펴지 않은 우산 하나를 팔에 걸고는 반딧불이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사람들 속에서 가로등처럼 한 사람만을 기다리며 붉은 빛을 얼굴에 띄운다.

비는 내리고 오고가는 사람은 많고 카미야 나오는 기다린다.

기다린지 30분 정도 되었을까, 마침내 나오는 너무나 익숙한 한 남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얼굴에 약간의 피곤함이 감도는 남자가 비가 오는 것과 사람들이 뛰어나가는 것을 보고 한숨을 쉬자 나오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남자에게 다가간다.

남자는 자신 앞에 선 나오의 모습에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오늘 준비한 츤데레 대사는 뭐야?"

 

"대, 대사 같은거 준비 안 했거든! 치히로 씨한테 부탁받아서 온 거니까 말이야!"

 

"네네, 그렇습니까."

 

나오가 남자의 반응에 툴툴거리면서도 남자에게 우산을 건네자 그가 고맙다고 말하고는 우산을 받아 펼친다.

어떻게 봐도 새 것 같아 보이는 투명색 우산은 물방울이 맺히자 가로등의 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오가 조금은 기대가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남자를 쳐다보자 그가 미안하다는 듯이 슬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연다.

 

"오늘도 미안해, 별로 좋은 일을 찾지 못했어."

 

"...괜찮아, 나는 팔리지 않는 아이돌이고. 린이나 카렌같이 귀엽지도 않고. 말이야."

 

남자의 말에 나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고, 예상했다는 듯이 자학에 가까운 차가운 대답이 돌아온다.

남자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축 쳐진 나오의 어깨를 조금 두드려주고는 입을 연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다 내 잘못이야. 나오는 귀여워."

 

남자가 자학에는 자학으로 맞서라는 명언을 어느 산문집이나 명언집에서 봤다는 듯이 자기 자신을 자책한다.

나오는 남자의 말에 고개를 살짝 가로저으며 더욱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남자의 말에 반박한다.

 

"아냐, 그렇지 않아. 그 말대로라면 린이나 카렌도 팔리지 않아야 하잖아?"

 

"그, 그건, 저 쪽에서 린이나 카렌은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으니까...."

 

"나는 그저 한 물 건너간 캐릭터성밖에 없는, 조금 반반한 아이돌 지망생일 뿐이야."

 

나오의 자책에 남자가 갑자기 우뚝 멈추고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본다.

나오가 남자의 갑작스런 멈춤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다 그의 진지한 표정에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한다.

잠시 멈춰 나오의 얼굴을 쳐다보던 남자가 우산을 천천히 접고는 차갑게 내리는 비를 맞는다.

나오가 당황해하며 남자에게 우산을 씌워주려고 노력하는데 그가 갑자기 나오를 강하게 껴안는다.

그 바람에 들고 있던 우산을 놓쳐버린 나오가 얼굴을 완전히 새빨갛게 물들이며 품 속에서 버둥이자 그녀의 귀에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비 오는 날에는 흠뻑 젖어도 돼. 마음껏 엉엉 울어도 돼, 나오."

 

"프, 프로듀서...."

 

"언젠가는 이 비도 그치고 태양이 다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거야."

 

"하, 하지만 나는...."

 

"나는 린보다도, 카렌보다도 나오를 소중하게 하고 있어. 그러니까 그런 자책하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해."

 

프로듀서라고 불린 남자의 말에 나오가 버둥거리는 것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천천히 올려다본다.

나오의 얼굴에는 비인지 눈물일지 모를, 성분비를 알 수 없는 혼합물 한 줄기가 턱으로 천천히 하강하고 있었다.

프로듀서가 나오의 표정에 옅게 웃다가 그녀가 감기가 걸릴 것을 걱정했는지 우산을 집어 그녀에게 씌워준다.

프로듀서의 행동에 나오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그에게 한 마디 한다.

 

"그러면 마음 놓고 감정 잡을 수 없잖아!"

 

"아, 그것도 그런가...."

 

프로듀서가 나오의 말에 그건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이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나오는 그런 프로듀서의 표정에 빨개진 눈으로 미소를 짓고는 그를 질책한다.

 

"아, 오랜만에 분위기 괜찮은 말을 한다 싶더니만!"

 

"미안, 나오."

 

남자가 나오의 질책에 우산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나오가 남자의 표정에 소매로 눈을 북북 문지르고는 태양같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뭐, 그래도 조금 멋있었어."

 

"...그런가."

 

"그럼 갈까, 프로듀서. 나한테 좋은 일을 주려면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래, 열심히 일해서 언젠가 도쿄돔에서 단독 라이브하게 해줄테니까 말이야."

 

"도쿄 돔에서 단독 라이브?!"

 

나오가 프로듀서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그를 쳐다본다.

프로듀서는 나오의 반응이 너무나 귀여워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생글생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오가 프로듀서의 표정을 보고 어쩔 수 없네, 라고 중얼거리고는 그의 팔에 두 팔을 감싼다.

하늘에서 내리던 빗줄기가 조금씩 약해지고, 동쪽에서는 파란 하늘이 조금씩 그들의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후기

카미야 나오 관련글입니다. 우산 들고 있는 특훈 전 카드와 Ellegarden - 風の日에서 영감을 받아 창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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