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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섞인 그림자 - 9

January 12, 2017 (목) 01:12에 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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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멀리, 바다 위 구름이 거의 걷힌 하늘에서 비행기 몇 대가 공항으로 다가오는 게 작은 창문에서 보였다. 아마 중국이나 한국에서 오는 비행기일 것이다. 고도를 낮추는 동안 비행기가 흔들려서 하마터면 손에 쥐고 있던 전화기를 놓칠 뻔 했다. 카나데는 약간 피곤한 듯 머리를 의자에 기댄 채 고개를 살짝 돌려 창가를 바라봤다. 황적빛 석양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감싸 그녀의 이마에 얇은 그림자의 선을 마구 그었다. 두 눈동자 앞에 내린 머리카락 때문에 분명히 눈동자에 그림자가 질 텐데, 기분 탓인 걸까? 카나데의 두 눈동자엔 그림자 하나 없이 빛이 가득 담겨, 아주 작은 파편으로 바스라진 채 안에서 맞물려 빛나는 것 같았다. 석양은 낮이나 밤에는 보이지 않을 바다 먼 끝자락에 걸려 수평선과 하늘을 구분하는 맞닿은 두 개의 작은 반원이 되었고, 슬슬 붉은 빛을 잃어가며 검푸른 하늘에 으스러지고 있었다. 창가에 점점 주택이 커져가는 게 보였다. 전화기를 켜 호텔의 주소를 확인했다. 하카타 시내에서 약간 떨어진 모모치 해변에 있는 힐튼 시호크, 라. 적당한 비즈니스 호텔이라도 괜찮았을 것이다. 아니, 차라리 그 편이 더 좋을 텐데. 비행기가 큰 동체를 긴 활주로에 가까이 댄다. 작은 성냥갑 같던 건물들은 이제 훌쩍 내 머리를 넘었다. 속도감이 거세지며 창가의 풍경이 빠르게 스친다. 비행기가 크게 흔들리며 속도가 줄어든다. 타이어에 감기는 브레이크 소리. 후쿠오카에 도착했다.

  "응. 이제 공항에 도착했어. 아직은 안 내렸어."

  카나데는 벌써 프로듀서에게 전화 중이다. 아직 비행기가 완전히 정지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안전벨트를 끌렀다. 

  "오전 8시? 알았어. 메일 확인할게. 응."

  비즈니스 좌석에 앉은 아이가 칭얼대는 걸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이 초콜렛 스틱을 건네주며 어르고, 배가 나온 늙은 무테 안경 할아버지가 멜빵을 가다듬으며 머리 위 수납함에서 수트캐리어와 작은 노트북가방을 꺼냈다. 앞 좌석의 중년 남성 두 명은 비즈니스 이야기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비즈니스 좌석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고루하고 전형적인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애초에 비행기를 탄 일이 많지 않았으므로 스스로에게 물어본들 알 수 없었다. 

  "아아. 걱정하지마. 이번에는 적절히 대처할 거니까."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시간 조금 남짓한 비행이지만, 그래도 어깨와 허리가 약간 뻐근했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수납함을 열어 수트케이스를 꺼냈다. 사흘이면 끝날 출장이라 짐도 별로 없었기에 21인치 정도면 알맞겠다 싶었는데, 약간 더 작은 걸로 가져올걸 그랬다. 카나데는 여전히 통화 중이다.

  "글쎄, 뭘까? 선글라스도 하나 안 사주고 그렇게 말하면 좀 섭섭한데."

  선글라스? 이미 쓰고 있으면서.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프로듀서가 조금 불쌍해졌다.

  "네, 네. 알았어. 바로 돌아갈게."

  내 캐리어 뒤에 있는 카나데의 버킨 백을 꺼냈다. 수납함에 찬 먼지가 표면에 약간 묻어 손으로 털어냈다. 카나데는 짤막하게 고맙다고 하곤 가방을 들었다. 21인치 캐리어 하나와 가방 하나. 단출하고 편했다. 무거운 짐을 대신 들어줄 사람은 사장에게 불려나가 한창 협의 중이었으므로, 우리에게는 알맞은 짐이었다. 공항에 데려다 주면서 죽을듯한 얼굴을 하며 노골적으로 협의에 가기 싫다고 고백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무슨 말을 꺼내도 차갑게 쏘아붙여서 위가 아프다며 칭얼대기에 카나데가 공항 약국에서 위통약을 사 주머니에 넣어주자, 한층 더 절망적인 얼굴로 우리 둘을 쳐다봤던 게 기억났다. 불쌍한 프로듀서. 물론 불쌍하다고 그 한 대 때리고 싶은 말투가 용서되는 건 아니었다.

  "린, 방금 프로듀서가 말이야."

  "응. 그 사람이 왜."

  "선글라스 꼭 끼고 다니래."

  "하?"

  카나데가 손가락으로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시늉을 했다. 왼눈을 감고 살며시 웃으며 찰칵- 이라고 작게 소리를 내는 모습이 약간 얄미웠다. 망할 파파라치.

  "하아...."

  카나데는 내밀은 내 손에 선글라스를 올렸다. 해가 거의 지고 하늘은 검푸른 빛을 띄고 있는데, 파파라치 때문에 선글라스를 쓰고 다녀야 하는 모양새라니. 웃기는 모양새가 따로 없다. 선글라스를 걸쳤다.

  "아야."

  선글라스의 다리 끝자락이 내 눈가를 찔렀다. 재수없게.

 

  북쪽 출구를 힐끗 보자 예상만큼 파파라치가 가득했다. 우리는 남쪽 입구 끝자락에서 조용하게 빠져 나왔다. 프로듀서가 무슨 꾀라도 부려 파파라치에게 거짓말이라도 흘린 걸까? 남쪽 입구를 빠져나갈 때까지, 파파라치는 한 명도 마주치지 않았다. 공항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탔다. 카나데가 앞 좌석에 타려고 문을 여는 순간 플래시가 터졌다. 그것을 보고 피 냄새를 맡은 상어 떼처럼 다른 파파라치들이 달려왔다. 거칠게 닫히는 문을 향해 플래시 세례를 쏟아붓는 상어 떼의 모습은 택시기사를 꽤나 놀라게 한 것 같았다. 보기 좋은 풍채와 구레나룻과 연결된 턱수염을 슬슬 쓸어넘기던 노년의 택시기사는 액션영화에서나 볼 법한, 거친 운전으로 빠르게 공항을 빠져나갔다. 마지막 플래시가 택시의 뒷꽁무늬를 문 지 5분 정도 지나, 택시기사는 정체된 6차선 도로에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합니다. 뭐가 뭔지."

  카나데는 가볍게 웃었다. 웃지 못할 일이지만, 그녀의 웃음을 보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택시기사도 자신의 거친 운전이 쑥스러운지, 아니면 살면서 몇 번 겪지 못할 영화같은 해프닝이 신기했는지 가볍게 너털웃음을 지었다.

  "괜찮아요."

  "그러고 보니 아직 도착지도 못 들었네요. 어디로 가십니까?"

  나는 우리가 묵을 호텔의 주소를 알려주었다. 택시기사는 서서히 내리는 빗방울의 양에 맞추어 와이퍼의 속도를 조절했다. 앞차가 출발하기 시작하며, 6차선 도로에 가득했던 차량은 서서히 자신의 앞에 서 있던 신호등을 지나쳐 갔다.

  "오, 하야미 카나데 씨 맞죠? 그 '시대의 파편'에 나오는."

  "네, 맞아요. 감사합니다."

  "아뇨, 덕분에 재밌는 일도 겪게 되네요."

  택시기사가 핸들을 천천히 꺾었다. 불과 10분 전만 해도 온 몸이 택시 안에서 이리저리 튕겼는데, 지금은 엔진의 진동도 잘 느껴지지 않을 만큼 정숙했다. 택시기사는 연륜이 있어야 한다던 지루했던 수필집의 글귀가 떠오른 순간, 붉은 빛 아래로 수많은 인파가 횡단보도를 건넜고 그 옆에 거대한 건물의 커다란 틈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사람들이 저마다 쇼핑백을 들고 나오는 걸로 보아 쇼핑몰일 것이다. 반으로 쪼개진 것 같은 틈새로 보이는 건물의 내부에서는 높게 분수가 솟아올랐다. 아이 몇 명이 작게 흐르는 분수로 뛰어들어갔다. 젖은 옷과 추위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겠지. 항만과 이어진 물길 위에 서 있는 다리를 넘어 텐진역을 지나 서쪽으로 갔다. 도로 옆 물길에 가로등의 불빛이 흘렀다.

  저기가 오호리 공원이라고, 안에 큰 호수가 있어서 휴일엔 키우는 시바개와 함께 산책을 다닌다는 택시기사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잔잔한 피아노 곡의 반주에 맞추어 들렸다. 바람이 차가운지 두툼한 패딩 재킷을 껴입은 아주머니가 자전거의 페달을 천천히 밟았다. 바구니에 담긴 종이 백을 빠져나온 대파 끝자락과 긴 빵을 감싼 비닐 포장에 빗방울이 묻었다. 몇 개의 역을 더 지나쳐, 택시는 오른쪽으로 크게 꺾어 올라갔다. 완만한 내리막길엔 이제 본래의 밤의 색으로 덧칠되어 있었다. 정지등 앞에 택시 세 대가 서서 신호를 기다렸다. 우리같이 호텔로 향햐는 차들일 것이다. 신호가 바뀌고, 택시 행렬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커다란 돔 건물이 보이고 택시 행렬은 완만하게 왼쪽으로 꺾인 길을 따라가다 돔 옆 높은 호텔에 도착했다. 미안한 마음에 팁을 약간 후하게 얹어 계산했다. 카나데에게 너털웃음으로 화이팅이라 말하며, 택시기사는 크게 꺾어 다시 동쪽으로 돌아갔다. 우리와는 다른, 조용한 손님을 공항에서 만나기를 속으로 가볍게 바랬다.

  

  

  

  택시를 타는 것보다, 어쩌면 지하철이 더 빠르지 않았을까? 텐진역 근처에서부터 시작된 정체에 밀려, 촬영장에 도착했을 때는 9시 반을 가뿐히 넘기고 말았다. 급하게 먹은 식빵이 목에 걸려 호텔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산 게 화근이었다. 급하게 마시다 순간 나온 기침 때문에 옷에 커피를 거하게 뿜어버려, 호텔 입구에서 나오자마자 되돌아가 옷을 갈아입을 수 밖에 없었다. 죄송한 마음에 감독이 어디에 있나 두리번거리는 우리를 본 조감독이 의아한 얼굴로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택시의 히터로 덥혀진 코트자락이 강하게 불어온 북녘바람에 싸늘해졌다.

  "어라? 하야미 씨, 시부야 씨."

  "아, 야마다 씨."

  "감독님 찾으세요?"

  "네. 어디에?"

  카나데가 숨을 골랐다. 검정 펌프스 앞코에 진흙이 약간 묻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목소리에 잠겨있던 작은 잠이 작은 기침 두 번에 멀리 날아갔다.

  "감독님은 오고 계시는 중인데요."

  "네? 아직 도착 안 했다구요?"

  조감독이 이해가 약간 안되는 듯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바람이 멈추고 작은 나뭇잎이 그의 머리에 떨어졌다.

  "네. 아직 집합시간이 아니니까요."

  분명 프로듀서가 9시 반까지 라고 했었을텐데. 중간에 시간이 바뀌었다면, 문자나 전화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 연락도 받지 않았다.

  "10시 반에 집합해서 11시에 첫 컷 촬영, 6시에 마무리. 오늘 스케줄은 내일보다는 일찍 시작해서 좀 불편하죠?"

  "10시 반 이라구요? 9시 반이 아니고?"

  "네. 후쿠오카 쪽 분량은 금방 지나가고 아침 시간 촬영도 없으니까 천천히 시작하자고 그 쪽 프로듀서가 말해서요."

  들어본 적 없는 일이다. 착각이라도 해버린 걸까. 아니, 애초에 자신이 정한 시간을 착각할 리가 없지. 이것도 또 다른 장난일 테다. 카나데는 이미 눈치를 챘는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한 방 먹었다.

  "커피 드실래요? 아침잠을 깨는 데는 커피가 제일 좋죠. 게다가 바람이 차잖아요."

  그는 우리의 말도 듣지 않고 커피를 세 잔 타왔다. 인스턴트 커피 가루가 미처 녹지 못하고 종이컵 안에서 물의 흐름에 따라 회전했다. 젊고 어리버리해 보이는 남자 두 명이 조명이나, 집기, 카메라를 들고 바쁘게 움직였다. 스타일리스트가 화장대 앞에서 만전을 기하고, 조명감독과 카메라맨이 손짓하며 대본을 보았다. 모두 바쁘게, 나와 카나데의 연기를 담기 위해 자신들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빈 위장에 커피가 들어감에도 속이 아프지 않았다. 묽은 커피를 비우고 종이컵을 근처 쓰레기통에 버렸다. 십 여 분 후에 감독이 나타났고 우리는 메이크업을 한 뒤 옷을 건네받아 입었다. 흰 셔츠는 스몰 사이즈임에도 약간 헐렁해서 허리에 보기 싫은 주름이 구겨졌다. 2주 전 신체 검사 때 트레이너가 좀 더 잘 먹고 다니라고 했던 게 생각났다. 살이 언제쯤 제대로 찔런 지 문득 우려스러웠다. 그에 반해 카나데의 매무새는 굉장히 아름다웠는데, 옷이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만약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그 몸 앞으로 비추어 벽에 실루엣을 만들 수 있다면, 아름다움이란 단어를 결정하는 새로운 기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양이 강렬하게 비추고 있음에도 조명을 켜기 위해 킨 발전기 소리가 크게 들렸다. 카메라맨이 팔뚝만한 렌즈를 카메라에 조심스럽게 꼽고 버튼을 눌렀다. 감독이 조감독을 불러 몇 마디를 나누고 간이 테이블에 놓여 있던 클래퍼보드를 집어 조감독에게 건넸다. 그는 보드와 대본을 쥐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하야미 씨, 시부야 씨."

  "씬 5번부터 촬영, 맞죠?"

  "감독님이 하늘이 맑으니까 씬 8번부터 시작하자네요. 괜찮으시죠?"

  씬 8번이라면, 분명히 카나데가 이 공원에서 저번 시즌에 건네받았던 목걸이를 땅에 묻는 장면이다. 그걸 내가 멀리서 지켜보다 전화를 거는 장면. 대본에는 전화 내용이 적혀있지 않았었다.

  "전화하는 장면에서 대사가 없었던데요."

  "아, 그건 생각나는 대로 말하시면 돼요. 그 부분을 24mm로 찍어서 하늘을 부각할 거거든요."

  "네?"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해서 그를 쳐다보자 그가 말을 알기 쉽게 풀었다.

  "음, 그러니까 시부야 씨는 화면 안에 작게 나올 거라는 거에요. 그러니 입모양은 신경 쓰시지 말고 전화하는 모습이 제대로 나오게 팔과 시선 처리에 신경을 쓰시면 됩니다."

  아무렇게나 말하라고 해도, 만엽집의 한 구절을 읽을 수는 없지 않냐고 말하려는데 그가 감독에게 뛰어가버렸다. 카나데가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신경쓰여?"

  "갑작스럽게 태연한 얼굴로 부탁해도 무리라고."

  "무-리."

  "책상은 여기에 없거든."

  "기운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구.... 후훗."

  "사람의 수준에 걸맞는 조언을 해줄래?"

  "You can do it?"

  "발음 유창하네. 연습한 거야?"

  "저번 영화 촬영할 때 폴란드 출신 감독에게 발음이 나쁘다고 욕먹어서."

  조감독이 우리를 향해 촬영을 시작하겠다며 외쳤다. 나는 카나데에게서 멀리 떨어져 숲의 입구에 서 있는 높은 나무 옆에 섰다. 다른 카메라맨과 조명 담당이 다가와 내 근처에서 준비를 마쳤다. 먼 하늘에 새가 바람을 이기고 북쪽으로 날아갔다. 구름이 새가 지나간 방향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멀게 울려오는 클래퍼보드의 소리가 서늘한 산들바람에 담겼다.

  

  

  

  샴페인이 담긴 칠러에 이슬이 맺혀 테이블을 젖히기 시작했을 때쯤, 영화가 거의 끝났다. 

  스탭 롤이 반쯤 올라가자 카나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샴페인 잔을 탁상에 올려놓고 큰 원형 반신거울 앞에서 머리카락을 빗으로 빗었다. 눈가에 고인 눈물이 그제야 떨어지는 게 보였다. 창가에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불꽃놀이가 한창이었고, 후쿠오카 타워의 푸른 유리에 여러 색의 빛이 물들고 빠졌다. 그보다 먼 인공해변 뒤에 깔린 수많은 건물의 빛 사이에서 작은 원이 천천히 돌아가는 게 보였다.그보다 먼 인공해변 뒤에 깔린 수많은 건물의 빛을 본딴, 광점의 //해협이 땅 위에서 돌고 있는 작은 원을 베껴그렸다.관람차, 마지막으로 탔던 게 언제였을까?

  "감동적이었지, 영화."

  "그러게. 이름만 보고 골랐는데. 심지어 더빙도 안되어 있었잖아."

  건성으로 대답하는 카나데의 목소리가 뒤통수에 닿았다. 그렇다고 내가 얼굴이라도 마주하며 말을 건 것도 아니었다. 창가에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다. 스탭 롤이 끝나고, TV의 화면에 내 모습이 비쳤다. 씻고 나와 정돈하지 않은 머리카락이 침대에 걸려 어지러웠다.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이 머리카락 몇 가닥에 묻은 채 목 언저리에 들러붙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목욕가운을 벗어 샤워실 한 켠에 걸어두고 검정 면 팬티, 스포츠 브라를 입고 회색 울 트랙팬츠와 흰색 반팔 티셔츠를 입었다. 미니바에서 작은 생수병을 꺼내 뚜껑을 따고 그 자리에서 비웠다. 플라스틱이 구겨지는 요란한 소리가 쓰레기통 안에서 멈췄다. 술기운이 내려가기 시작하며 팔이 쌀쌀해 얇은 후드 집업을 걸쳤다. 전화가 울렸다. 전화기를 집고 화면을 켰다. 화면엔 그저 9시 48분을 가리키는 아날로그 시계의 초침과 분침이 덩그러니 있을 뿐, 진동이 울리지도 알림이 떠 있지도 않았다. 나한테 온 게 아니구나. 진동과 벨소리가 같이 울리는 전화기를 집어 카나데에게 건네주었다. 미묘한 두통이 움직임에 따라 느껴졌다.

  "고마워."

  푸른 빛이 약간 섞인 보라색 슬립의 가슴골에 어렴풋이 보이려 하는 유륜을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프로듀서에게 온 전화인 모양이다. 그가 재미있는 하소연이라도 하는 걸까, 가볍고 즐거움이 섞인 웃음 소리가 계속해서 어깨를 스쳐 지나간다. 알콜이 몸에서 전부 해독이 되어, 마지막으로 코 끝을 지나가는 동안 작은 상실감이 빈 알콜의 공간에서 생겨났다. 이 상실감이 가진 감정을 해석하지 않으려고 온더락 잔을 새로 꺼냈다. 하지만 왠지 마음이 더욱 더 아파오기 시작했다. 테이블에 잔을 놓자 맑은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그녀의 전화를 방해하지는 않았을까. 아니, 방해가 안된 건 아닐까. 좀 더 세게 내려놓을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내가 갑자기 낯설어졌다.

 

  나와 카나데가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기 시작한 것은 오랜만에 찾아간 본가에서 그녀의 품에 잠든 이후부터였다. 카나데는 잠들기 직전 나를 안고 자는 버릇이 있었다. 그날 이전까지는 2 센티미터의 차이가 이토록 컸다는 것을 몰랐었다. 머리를 나란히 놓고 누운 채 발을 살짝 뻗으면, 깎지 않은 발톱 끝자락에서 부드러운 발끝이 느껴지고는 했다. 내 허리를 안고 아랫가슴이나 윗가슴의 골에 머리카락을 묻은 채 잠드는 카나데의 팔엔 힘이 거칠고 세게 들어가서, 때론 포옹을 풀지 못하고 두 손을 카나데의 머리카락 사이에 감아 그 채로 잠들었다. 점점 뻣뻣해지는 내 머리카락을 빗을 때마다 잠결에 희미해지는 카나데의 머리카락의 감촉을 떠올렸다. 실크로 짜인 바람의 흐름보다도 부드럽고, 한편으로는 베일로 만든 바다의 안개보다도 희미한 감촉. 트리트먼트와 린스를 새로 구매해서 사용해도 큰 소득은 없었다. 스타일리스트라던지, 헤어 디자이너라든지, 누구도 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했다. 아르간 오일이나 진주가루, 코코넛 오일이던지 혹은 어디서 들어본 적도 없는 화학식의 이름. 그것들도 도움이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분명 머리카락도, 몸이 말라버린 것처럼 시들어 버린 거겠지. 카나데는 그런 내 머리카락도 같이 껴안고 잠들어 주었다. 마치 무언가로부터 자신을 막아주는 부적인 것처럼, 두 손에 한 웅큼씩 쥐고는 했다. 두피가 아팠지만, 나도 그녀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꼽은 채 잠들곤 했으니 서로 피장파장이라고 생각했다. 그 감촉을 마음가는 대로 느낄 수 있으니 오히려 내가 더 이득일지도 모른다. 언제부터 들었는지 모를 유리잔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잔 안에 담겼던 갈색 액체의 잔향이 침과 함께 목 뒤안결로 사라지고, 몇 방울이 중력에 따라 잔의 바닥으로 기울어진다.

  위스키는 여전히, 입에 맞지 않는다.

  카나데는 이제 창가에 기대 서서 전화를 하고 있다. 머리카락엔 불꽃놀이의 빛이 감싸이는데, 불꽃놀이의 빛 때문인지 창가에는 그녀의 얼굴이 반사되지 않는다. 아주 작은 빛만으로도 미려하게 반짝이는 그 눈이 보고 싶었지만 여전히 계속되는 웃음소리를 듣자 그 작은 욕구가 담긴 마음이 가볍게 꺾여버렸다. 그녀가 앉아있던 의자에 앉아 반신거울 앞 화장대에 아무렇게나 놓인 빗을 집었다. 손잡이가 갈색 아세테이트로 이루어진, 쇠 꼬리빗. 거울 위, 아래에서 내리는 조명이 머리카락에 닿았다. 윤기없고, 퍼석한데다, 갈라지고 있는 머리카락. 부드러운 피부와 달라 더욱 대비되어 보기 싫어졌다. 서서히 말라 부산해지려 하는 옆머리를 한 웅큼 잡아 빗었다. 퍽퍽하고 여기저기 걸려 두피가 따끔했다. 이전보다도 줄어들은 가슴에 내린 머리카락은 허벅지에 닿아 기나긴 형태가 무너졌다. 너무 길어졌구나. 예전에 살던 맨션 화장실에 꺼내 놓았던 미용가위가 마음 속에서 떠오르고, 그 마음 속 어디선가, '계속 기르라'는 목소리가 매인 기억이 가위를 따라 떠오르려다 묻혀버렸다. 눈을 감고 그 기억에 손을 뻗었다. 왠지 저 기억을 놓치면 안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기억은 이내 묻혀버렸다. 유일하게 손에 잡힌 것은 '머리카락을 계속 기르라'고 누가 말 했다는 기억뿐이다. 자세한 일면은커녕, 흐릿한 외곽일 뿐이었다. 성과라고도 할 수 없는, 오히려 깨질까 하는 불안과 괜스런 짐이 되지는 않으려나 싶은 걱정거리인 유리석을 집은 것 같다. 빛을 머금지도 않았고 머금을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지만, 그래도 그 조각을 마음 속에 넣어둔다. 다시금 떠오르는 기억의 부표에 다가가면 그 바랜 파편에서 뭔가 떠오를지도 모른다는 옅은 확신이 들었다.

  

  두 눈을 뜨지도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전화기가 어디에. 어디. 아. 두 눈을 감았어도 불빛이 거세 미간이 저절로 찡그려진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몸에 무언가 걸렸다. 카나데의 두 팔이다. 오른쪽 흉곽이 왜 불편했는지 그 이유가 있었구나. 팔이 저리지도 않은걸까. 견고하게 잠긴 두 팔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머리카락 사이에 그녀의 두 손이 꼽혀있었다는 것을 당겨지는 두피를 통해 깨닫는다. 두 눈이 가볍게 감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바다 위에 달이 덧그려져 있었다. 반달과 초승달의 사이에 끼어버린 애매한 크기의 달은 이제 검푸른 하늘의 위에서 점점 기울어졌다.

  바다 언저리에서 흰 빛이 올라와, 고요한 바다 위에 맹렬한 광점의 파도를 만들어 내는 것 같은 착각이 순간 들었다. 두 눈을 힘 주어 감으며 삼 초 정도 숨을 참고 눈을 떴다. 바다는 이전처럼 달의 이지러진 밝은 그림자를 베껴 담았을 뿐, 흰 빛도 광점도 파도도 아무것도 없었다. 분명히 잠이 적어 생긴 착시겠지. 이불에 비친 달빛이 밝았고, 허기가 졌다. 전화기를 집어 시간을 보았다. 그냥 다시 잠들까? 3시 반이 못된 시간에 무언가 먹기도 그랬고, 어차피 미니바에는 지금 먹고 싶은 게 담겨있지도 않았다. 땅콩 스낵이나 감자칩, 위스키나 보드카 같은 것들. 그나마 고를 만한 거라면 콜라나 초콜렛, 맥주 정도일 뿐.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가벼운 것들은 먹고 싶지가 않다. 뭔가 좀 더 무거운 것. 기름지고, 소화하는데 오래 걸리고, 턱에 힘이 들어가야 하는 것들. 얼마나 오랜만에 이런 식욕이 들었는지, 연예인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자기관리에 대한 마음가짐이 흐트러진 게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이 가벼운 저항을, 좀 더 잘 먹고 다니라고 했던 트레이너의 말로 거꾸러뜨렸다. 어느 새 베개를 거세게 안고 있는 카나데의 이불을 고치고, 짧은 팬츠를 트랙팬츠로 갈아입고 코트를 걸쳤다. 잘 쓰지도 않는 무초점 안경이 귓가에서 살짝 흘러내렸다. 운동화를 하나 챙겨올걸 하는 후회를 호텔 방문을 닫으며 접었다. 모자가 닫힌 방문에서 흐른 문풍에 잠깐 떴다 다시금 머리에 내려앉았다.

  

  호텔에 있는 많은 레스토랑은 이미 문을 닫은 지 오래여서, 어쩔 수 없이 열려있는 바에 들렀다. 아르데코 양식으로 장식된바는 손님 세 명을 제외하고는 텅 비어 있었다. 말쑥한 수염을 기른 바텐더가 한 쌍의 연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고, 수염이 목젖까지 내려간 다른 사람은 창가에서 노트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갓 따른 거품이 맥주잔의 입구에서 아슬아슬하게 바깥으로 부풀어올라 있었다. 좀 더 젋어 보이는 다른 바텐더가 일관되지 않은 차림새의 나를 보고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손님. 찾으시는 게 있으세요?"

  입을 열려니 갑작스레 말문이 막혔다. 간단한 스낵이나 칵테일, 위스키라면 기꺼이 내주겠지만, 다짜고짜 이 새벽에 집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와 가라아게나 사 갈 법한 옷차림으로 와서 '기름진 고기 메뉴는 있나요?' 하고 물어보는 손님에게 친절하게 메뉴판을 건네는 바텐더가 얼마나 있을까. 그의 친절한 미소에 궁금증이 섞이기 시작했다. 그 친절한 궁금증이 더욱 입을 열기 어렵게 했다. 안경이 코에서 살짝 미끄러졌다.

  "저, 혹시 물어보는 건데."

  "네, 손님 어떤 걸 찾으시나요?"

  "지금 시간에, 식사도 판매하나요?"

  "식사요?"

  그의 목소리에 담긴 친절한 궁금증이 이젠 슬슬 괴로워지려고 한다.

  "그, 스낵 같은 거 말고, 파스타나 햄버그 같은 거...."

  그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이게 맞는 일이야. 창백한 달빛 아래에서 춤을 추는 것만큼 이상한 질문이니, 너무나도 당연한 태도일 뿐이다.

  "죄송합니다만 잠시 기다려 주시겠어요?"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옆 바텐더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둘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는, 그는 돌연 바 뒷켠으로 들어가 버렸다. 스스로 직접 요리하는 걸까? 당황스러움과 부끄러움, 미안한 감정을 느끼며 바 테이블에 앉았다. 커플은 나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 자신들의 이야기로 빠졌다. 눌러쓴 모자가 미처 가리지 못한 귓볼에 그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니카이도 씨가 부탁해서 사온 걸 자기 것은 없냐고 떼를 쓰잖아. 그래서 한 마디 했지."

  "그래도 결국 사오긴 했잖아?"

  "사오기는 뭘 사. 수량 체크를 제대로 확인 못한 것뿐이야."

  "그래서 당신이 귀여운 거야."

  남자가 기침을 했다. 그가 손에 쥔 사기 잔에서 흰 김이 올랐다. 그는 잠시 창가로 얼굴을 돌렸다가, 무언가 생각한 듯 잔을 보았다.

  "돌아오는 1월엔 오키나와라도 갈까."

  "싫어. 무조건 홋카이도. 눈이 더 좋아."

  "눈은 앞으로 실컷 볼 수 있다고. 무릎이 시리단 말이야."

  "그거야 당신이 운동을 안 해서지."

  "이래봬도 고교 야구부 주장이었어? 마지막 준결승 전에서 만루홈런을 날렸을 때 러브레터를 몇 장이나 받았다고 생각해?"

  "그리고 대학교 야구부에서 무릎부상으로 화려했던 시절이 끝나버렸지? 완전히 작살났던 아이폰과 함께."

  "아픈 기억을 꼬치꼬치 캐묻지 말아줘."

  "병실 구석에서 멍하니 '방망이'를 쥐던 모습이 정말 처량했지. 그래도 그때 날 만났잖아? 완전히 새드 엔딩은 아닌 거네?"

  "그러게.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난 약제실 구석에서 하는 게 제일 좋았어. 누가 먹는지도 모를 수많은 약의 냄새가 이유 없이 흥분됐거든."

  "뭐야, 그래서 그렇게 난폭했던 거였어? 난 매번 약제실 문을 열때마다 얼마나 걱정됐는데. 무릎에 실밥을 삼십 센치 넘게 꿰멘 시커먼 덩치가 머리통 하나는 차이나는 뽀얀 간호사랑 땀투성이로 나오는 게 들키면 어떻게 되는지 너무 뻔하잖아. 게다가 걷지도 못하는 사람을 두고 쌩 가버리는 건 뭐였던 거야. 스릴중독증이야?"

  "그래서 싫었어?"

  "꼭 그렇게 물어봐야 돼?"

  "싫었어?"

  "싫다 좋다가 아니잖아. 나는"

  "싫었어?"

  "아, 좋았어. 젠장, 너무 능숙"

  모자를 눌러쓴다. 듣지 말걸 그랬어. 바텐더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흘깃 보자 서른이 훌쩍 넘어 보였다. 서른과 사십의 중간에 끼인 두 남녀. 10년이 안되어 나도 저렇게 될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기릴 것 없는 사이라는 건 저렇게 즐거워 보이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어떤 거짓말도 없고 어떤 불편함도 없이, 서로 있는 그대로 좋은 점도 나쁜 점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사이. 과연 그런 사이라는 것을 살면서 만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바텐더가 조용하게 나타나 내게 말을 걸었다.

  "스테이크라면 가능하세요. 7천 엔 되겠습니다."

  일말의 주저없이 가져다 달라고 했다. 모자를 더 눌러썼다. 모자가 안경 다리를 눌러 안경테가 이마 위로 올라가 다시 고쳐 썼다. 바텐더가 돌아서자 배에서 꾸르륵하고 소리가 났다. 들었을지도 모르고, 안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걸 신경쓰기에는 이미 늦었다. 5분 남짓한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지만, 그가 접시를 내 앞에 가지런히 놓는 게 보였다. 두툼한 안심 스테이크 옆 으깬 감자에 그레이비 소스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위에 뿌려진 선명한 초록색 파슬리 가루가 눈을 즐겁게 했다. 나이프를 들어 스테이크를 잘랐다. 바삭한 겉과 부드러운 속. 미디엄으로 익은 스테이크의 갈라진 틈에서 육즙이 흘렀다. 소금과 후추, 두 향신료 만으로 고기의 맛을 이렇게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음식에 대해 왈가왈부할 정도로 까다롭거나 민감한 건 아니지만, 몸이 기름진 것을 바라고 있어서인지 엄청 맛있었다. 지금까지의 부끄러움을 감내할 만 했다. 부드러운 육질이 이빨에 순응하여 뭉개지다가도 탄력 있는 힘줄이 이빨 사이에서 강하게 저항했다. 턱이 맞물리는 게 '제대로' 느껴졌다. 그 저항을 짓뭉개는 기분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그레이비 소스가 스테이크의 풍미를 더욱 부풀렸다. 혀 천장이 엄청나게 근질거려서 고기와 감자가 뒤섞여 있는 입을 크게 벌리고 싶은 욕구가 들었다. 어느 샌가 나는 으깬 감자를 육즙에 비벼 포크에 얹어 먹고 있었고, 커플은 사라졌다. '약제실'에서 '방망이'라도 어루만지러 갔겠지. 원초적 욕구. 나도 내 원초적 욕구를 해결하고 있어. 이렇게 독특한 경험으로. 그리고 강한 만족으로. 바텐더가 조금이라도 융통성이 없었더라면, 허기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겠지. 마지막으로 남은 고기를 정성스레 씹어 삼키고, 물로 입을 씻었다. 계산을 하려는데 바텐더가 보이지 않아 고개를 돌려 바를 둘러보았다. 바의 한 켠에서 두 바텐더가 그들의 넓은 바를 정리하고 있었다. 4시가 넘었다. 수염의 남자는 아직도 앉아서 뭔가를 끼적인다. 그의 잔에 담긴 맥주가 완전히 비어있었다. 고맙다는 말이 아까처럼 입에서 넘어가지를 않아 접시 옆에 둔 유키치 안에 오래된 나츠메 소세키 세 장을 더 꼽고 몰래 돌아와버렸다.

 

 

 

  6시를 넘겨, 우리는 촬영을 마치고 호텔 프론트에 도착했다. 다행스럽게도 모모치 인공해변가에서 촬영을 해서 돌아가는데 파파라치를 걱정할 일은 없었다. 스탭이 촬영장을 마무리하고, 조감독과 협의를 끝내자 프로듀서에게 전화가 왔다. 호텔 정문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타이밍이 너무 좋았다. 어디서 CCTV 같은 걸로 감시하고 있는 건 아닐까.

  "프로듀서?"

  <시부야 씨. 촬영 잘 끝났습니까?>

  "그럭저럭. 문제는 없었어요. 그 쪽은?"

  <묻지 마세요. 인피니티 산 걸 엄청나게 후회하는 중이니까.>

  "좋은 차인 것 같던데."

  <할부금이. 이러다 살고 있는 스튜디오를 에어비앤비 같은 데 올려야 할 까봐요.>

  "사장이 보너스도 안 주나 봐요."

  <뭐, 하여튼 말이죠. 카나데 씨는 옆에?>

  말 바꾸는 속도 하나는 정말 일류 프로듀서다. 저러니까 찍혀서 끌려간 거겠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카나데는, 어디에?

  "어라, 어디로. 잠깐만 기다려요."

  귀에서 전화기를 떼고 카나데를 찾기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화장실에라도 간 걸까? 바다에서 바람이 서서히 불어오기 시작했다. 바다가 푸른 색을 잃고 보랏빛으로 물들어간다. 석양이 작은 조각으로 바뀌어, 수평선에 드넓게 퍼진다. 아, 저기에. 카나데의 코트 자락이 건물 외곽 복도 모서리에서 살짝 삐져나온 게 보였다. 카나데에게 걸어갔다. 전화기를 들어 카나데에게 건네주려고 손을 올렸다. 자, 여기 프로듀서 전화. 이번에는 그냥 건네만 주고 방으로 돌아가야지. 옆에서 둘이 웃는 걸 듣고 싶지 않았다. 유치하네, 나. 이상한 데서 질투나 하고. 초등학생만큼이나 유치하다고 속으로 생각하는 순간, 카나데의 목소리가 귓가에 날카롭게 들렸다.

  "대체 뭐야? 왜 그러는 건데."

  카나데는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매몰차게 화를 담아, 또박또박 모든 어절에 힘을 눌러담아. 얼굴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몸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코트 자락이 벽에 닿은 채 살짝 빠져나온 것만 보인다. 발을 멈췄다.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 내가 스스로 멈추지 않았더라도, 무의식적으로 카나데의 목소리에 멈췄을 지도 몰라. 혹시 몰라서 벽의 패인 곳에 몸을 숨겼다. 노이즈가 잔뜩 낀 채로 내 성을 애타게 부르는 전화기를 껐다. 카나데가 그 소리를 들은 듯, 잠깐 말을 멈췄다. 날카로운 말소리가 끊긴 게 더 마음을 긴장하게 했다. 어디 먼 데서 또각거리는 구두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카나데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아냐. 아니, 아니. 아니라고 했어, 분명히. 그만. 그만, 제발."

  답답한 심정이 그녀의 말 끝에 녹아들어 있었다. 누구인지 생각하기 시작한다. 누구인지 짐작하는 데에는 단 몇 초면 충분하다. 단지 확신이 없을 뿐이다. 그리고, 마음 한 켠으로는 그 짐작이 제발 틀리기를 바라고 있기도 하고. 더 차갑고, 무거운 늪으로 잠겨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을 빨리 떨쳐내고 싶다. 방법은 아주 쉽다. 지금 당장이라도 조용히 여기서 벗어나면 된다. 발걸음을 옮겨 건물 안으로 들어가도 된다. 아니면 전화기에 이어폰을 꼽고 아무 음악이나 틀어 들어도 된다. 카나데의 대화를 듣지만 않는다면, 그 어떤 방법이던 괜찮다. 수많은 방법이 있고, 대부분의 방법은 별다른 노력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그저 발을 옳기거나 귀에 무언가를 꼽기만 하면 되는 손 쉬운 방법들.

  하지만 나는 그 어떤 방법도 선택하지 않는다. 카나데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져 이젠 가는 칼날처럼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둔탁하게 깨부수어 버리는 묵직한 망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그 어떤 방법도 선택하지 않는다. 이유? 명확하게 알 수 없다. 그저, 저 둘이 엮여있는 곳에 내가 없어서는 안된다는 착각이 계속 들어서일 뿐이다. 단단한 착각. 너무 단단해 부딪히면 상대방을 깨뜨려 버릴지도 모를 정도로. 그 착각은 내게 앞서 존재하는 모든 쉬운 방법을 치워버리고 아주 어려운 방법을 제시해준다. 그 늪으로 들어가. 목 언저리, 목젖에 늪의 이끼가 들러붙을 때까지. 고개를 치켜들고 눈을 내리깔아 주변을 살필 때까지. 귓 구멍에 가득 찬 진흙이 머리카락 속으로 스며들 때까지. 착각이 내 손목을 잡고 이 건물의 틈새로 이끌어 가둬버린 것 같아, 괜한 원망이 들었다. 카나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그렇게 말 하지마. 하지, 마. 착각이야. 왜 자꾸 그러는 건데? 분명히 말했잖아."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다시 생각해본다. 착각의 이끌려 왔다는 건 너무나도 무책임한 말이다. 나는 꿈에서 깨고 보니 사람을 죽였다고 가짜 눈물을 흘리는 쓰레기같은 범죄자가 아니야. 그런 한심한 변명은 결코 하고 싶지 않다. 내가 왜 여기 있지? 궁금증? 아냐, 아니다. 좀 더 강렬하게 마음을 쥐는 것. 좀 더 검게 타들어가 버린 것. 좀 더 씁쓸하고 독한 것. 카나데의 서늘한 목소리에서 들으려 하는 하나. 단 하나의 말. 확신을 완성해주는 단 하나의 말.

  "제발 그만, 후미카!"

  카나데가 약간 크게 소리를 질렀다. 주변은 너무나도 조용하다. 하지만 그 목소리를 다른 누가 들을 수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바람소리에 착각이 들었다. 카나데가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 울음이 섞인 것 같다고.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단 한나의 말, 확신을 완성하는 단 하나의 말은,

  "착각 같은 게 아냐."

  작게 읖조려 본다. 착각 같은 게 아냐.

  "나중에 연락할게. 먼저 연락하지 마."

  카나데는 전화를 끊은 것 같았다. 무언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둔탁한 게, 지갑 같은 걸 떨어뜨린 소리는 아닐 것이다. 전화기여도, 아니여도 이제는 상관이 없었다. 카나데가 눈치채지 않도록 조용히 자리에서 떠났다. 로비에서 엘레베이터를 탔다. 아무도 없는 빈 엘레베이터 창가에 담긴 검은 바다와 더욱 더 검은 하늘 사이에 서린 아주 흐릿한 회색 선을 보려고 집중했다. 이유 모를 기분이 들었다. 명확히 정의 내릴 수 없는 기분. 따뜻하면서 시원하고, 뜨겁고 차갑다. 이율배반적인 기분이다. 각자 양립하는 부분을 떼어 바라보면 아주 명확한 모습과 빛깔이, 서로 뒤섞인 채로 보니 제대로 형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제일 알기 쉬운 부분을 풀어낸다면, 기쁨과 공포. 두 개 정도인 것 같다. 호텔 방문에 키를 대려는 손이 떨려오는 걸 이제서야 깨달았다.

 

  욕조에 받은 물에 달빛이 조금 담겼다.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세차게 들린다. 폭포 앞에 누워 있는 기분이다. 폭포와는 비교도 안되는 작은 샤워기 헤드지만, 소리만큼은 그에 못지 않게 크다. 카나데는 결국 보기로 했던 영화가 끝날 때 까지 오지 않았다. 맥주가 비릿했다. 프로듀서는 카나데의 전화가 연락이 안 된다고, 무슨 일이라도 있냐고 물어보았다.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카나데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 호텔 방에서 잠깐 잠들고 있다며 거짓말을 했다. 전할 말이 있으면 내게 말하라고 부러 말을 더 꺼냈지만 그는 별다른 질문없이 알았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영화를 봤고, 비릿한 맥주를 마셨다. 마음 속 비밀을 덜어낼 때까지 가만히 안아주기. 어디까지 안아주고 기다려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욕조 속으로 머리를 담근다. 따뜻하고 간지러운 감촉이 귓속에 들어간다. 숨을 내뱉으니 콧날에서 숨방울이 느껴진다. 세찬 물소리가 수막에 걸려 멀직이 들려온다. 따뜻한 물 속에서, 잠시동안 몸을 웅크린다. 10 초. 20 초, 26, 27... 34, 3, 36... 40! 숨을 세차게 들이쉬며 몸을 욕조에서 일으킨다. 입에서 거품의 쓴 맛이 조금 났다. 꿈의 기억이 비누 거품과 쉼호흡 사이에서 피어오른다. 지금껏 살면서 꾼 수많은 꿈의 기억 사이에서 우즈키에 대한 꿈이 슬며시 떠오른다. 크지 않다. 다른 기억과 비교해봐도 평균 이하의 크기다. 하지만 그 무게는 헤아릴 수 없이 무겁다. 그럼에도 거품 속에서 쉼호흡을 타고 서서히 떠오른다. 뒤돌아서 피할수도 없게, 그 작은 기억이 머리 속으로 들어왔다. 그래, 요즘 나는 꿈을 꾼다. 우즈키에 대한 꿈을. 주기적으로 꾸는 건 아니지만, 꿀 때마다 그 기억이 조금씩 선명해진다. 인화액에 담가놓은 현상지처럼 조금씩 검고 흰 부분이 제 형체를 드러낸다.

  꿈의 내용은 아마 아직 내가 아이돌이었일때의 기억인 것 같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도 기억난다. 전부 누군지는 모르지만, 머리가 길고 어른스러운 사람과 치장이 많은 옷을 입은 사람의 형체, 두 사람이 갑자기 말다툼을 하는 모습이 떠오르는 걸 보아 아마 신데렐라 프로젝트일거라 유추한다. 그 사람들 사이에서 갑작스레 덩치가 큰 사람이 있는 게 보인다. 그 사람, 일 거다. 거기서 좀 더, 조금 더 지나 꿈이 끝나버린다. 아직은 선명하지 않다. 흐릿한 파편에 감싸인 꿈을 헤쳐, 이리저리 흠결이 난 기억을 유추해내는 정도다. 그 사람들이 신데렐라 프로젝트가 아닐 수도 있다. 그 덩치 큰 사람은 그저 경호인력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일 가능성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꿈의 기억 속 사람들의 형체가 신데렐라 프로젝트일 가능성도 당연히 있다. 머리카락에 쏟아지는 따뜻한 물줄기를 향해 고개를 치켜들어 얼굴에 남은 거품을 닦아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우즈키. 우즈키에 대한 부분. 그건 기억 속 다른 형체들 보다는 조금 더 선명하다. 우즈키가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 머리카락과 몸의 형체로 유추한 모습이다. 얼굴이라던지, 표정이라던지, 심지어 몸짓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우즈키일지도 모르는 형체가 의자에 앉아있는 걸 기억하고, 지레짐작으로 유추하는 것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그게 우즈키라고 확신하고 있다. 꿈의 기억 속, 의자에 앉아있는 그 형체는 확실하게 우즈키다. 희미하지만, 다른 형체에는 없는 유일한 색채가 어떤 것보다도 더욱 확실하게 우즈키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조금 더 꿈을 기억한다면, 조금 더 선명해진다면 얼굴도 볼 수 있을지 몰라. 표정도 읽을 수 있을 지 몰라.

  하지만 이 꿈이, 대체 왜 지금 떠오르는 거지? 의미가 뭐지? 확실히 나는 우즈키를 걱정하고 있고, 찾고 있다. 하지만 왜 이 꿈의 기억이 떠오르는 걸까? 그리고 왜 자꾸 이 꿈을 꾸며 다시 기억해내려는 걸까? 게다가 꿈을 꾸고 나서부터, 자꾸만 나는 카나데와 후미카 사이의 관계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이유? 당연히 알 수 없다. 모든 게 알 수 없다. 후미카와 카나데, 그 사이의 나. 그리고 나와 우즈키. 언제부터 이렇게 전부 꼬여버리게 된 걸까? 맥주의 취기가 약간 남아있어서 머리 뒷켠이 아프다. 분명 어딘가에 엉키고 꼬인 시작점이 있을 텐데, 네 가지 색의 실이 잔뜩 엉킨 실타래에 손을 집어넣을 수 가 없다. 심에 손이 닿지 않는다. 표면의 실을 따라 조금씩, 조금씩 손가락을 넣지만 표면에서 약간 들어갔을 뿐, 단단한 심에 닿기엔 아직 멀었다. 약간 뜨거운 물이 머리카락 사이로 빠르게 스며든다. 코 속으로 수증기가 들어와 폐 속에 닿았다.

 

  카나데는 아직도 방에 돌아오지 않은 것 같다. 맥주캔을 하나 더 따고 TV를 켰다. 예능프로그램이 시끄러워서 채널을 돌린다. 요리 채널, 예능 재방송, 드라마, 코메디, 영화 채널. 전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빈 맥주캔은 쓰레기통에 깔끔하게 떨어져 들어갔다. 맥주만으로 배가 꽤 부르다. 될대로 되라며 채널 숫자를 아무렇게나 눌렀다. 마지막으로 뜬 채널은 음악 채널이다. 피아노 솔로 독주회려나. 열 살을 조금 넘어 보이는 여자애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피아노에 앉는다. 음량을 조금 키웠다. 부드러운 피아노 곡이 시작된다. 그 노래를 들으며, 의자에 앉아 성긴 머리카락을 성의없이 빗질했다. 빗질하는 손을 움직이기 약간 어렵다. 벌써 취해버렸나 봐. 헤어드라이어로 대충 말린 머리카락은 물기가 완전히 빠지지 않아 미묘한 윤이 났다. 수많은 철사의 끝자락인 것 같았다. 촬영할 때는 트리트먼트 같은 걸로 눈속임을 하니까 어차피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다. TV 프로그램엔 애초에 나가지 않으니, 예능 프로그램에서 쓰는 무자비하게 선명한 카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파파리치들의 현장 사진은 대부분 화질이 나쁘다. 머리카락이 일에 방해되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터다. 마음에 들지 않을 뿐. 철사를 모공에 심어 굳힌 것처럼, 때로는 화가 나기도 하는 거친 머리카락. 왜 이렇게까지 길게 길렀을까? 그 이유는 내 기억 속 어디에 있을까. 아니면 꿈 속에 잊혀져 있는걸까. 카나데는 잠들 때마다 내 머리카락을 쥔다. 거세게 쥔 손에 머리카락이 꺾인다. 꺾인 채 말라붙어 끊어지는 머리카락도 있다. 보기 싫다. 하지만 놓치는 게 두려운 것처럼, 바스라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꽉 쥐고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 싫은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다. 게다가 아직은 자를 수 없어. 자를 수 없는 이유도 기르는 이유처럼 모른다. 하지만 우즈키를 만나고 나서야 자를 마음이 들 것 같은 건 확실하다.

  "천천히 빗어야지."

  카나데가 내 뒤에 서 있었다. 얕은 미소와 함께. 도대체 언제? 카나데가 흰 손을 내게 내민다. 팔을 타고 온 서늘한 공기가 뺨에 닿는다. 조금 취해버린 것 같다. 내키지 않지만 빗을 건네 준다. 언제 방에 들어온 걸까. 눈가가 약간 지친 것 같다. 코트를 벗어 근처 바닥에 두고는 내 머리카락을 한 웅큼 잡는다. 그녀의 흰 셔츠에 머리카락 몇 가닥이 달라붙는다. 정전기. 그리고 술 냄새. 절대 적응되지 않는 위스키 냄새. 맥주 냄새를 내쫓아버린다.

  "결을 따라서, 천천히."

  어느 새 의자에 앉아 내 머리카락을 빗질하고 있다. 목소리가 약간 거칠고 건조하다. 하지만 내 머리카락보다 건조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손길이 상냥하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쓸쓸한 기분도 든다.

  "머리카락, 많이 기네."

  "자르는 게 역시 좋을까."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낸다. 아직은 자를 수 없어. 하지만 때가 오면, 우즈키를 만나면, 아무런 미련도 없이 잘라내겠어.

  "왜? 좋은데. 긴 생머리의 린. 예뻐."

  예쁘다니, 다 갈라지고 퍼석해졌는데. 못난 머리카락이잖아. 사실대로 말해줘. 거짓말도 하지 말아줘.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숨기지만은 말아줘. 그럴 거라면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뭐라도 말해줘.

  "그리고 상냥하기도 하고."

  점점 손길이 부드러워지는 것 같다. 두피에 빗살이 살짝 닿는다. 거울에 카나데의 눈을 응시한다. 머리카락이 가득 담긴 눈동자는 빛이 잘 보이지 않는다. 색도 잘 보이지 않는다. 입을 살짝 열어 말을 꺼낸다.

  "난 싫어." 

  "나는 좋아."

  카나데의 빗질엔 별달리 힘이 들어가지도 않는 것 같은데 오히려 내가 빗을 때보다도 훨씬 더 부드럽게 빗겨졌다. 골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처럼. 처음으로 빗는 것 같지 않았다. 갈라진 머리카락의 허전한 무게감이 더욱 가벼워지는 게 느껴진다. 이제 카나데는 내 뒷머리를 전부 팔목에 모으고 한 웅큼씩 잡아 손질했다. 조용한 사각거림이 귓구멍에 들어갔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중력을 거스르고 내 얼굴 근처에서 떠올랐다.

  "그래서 자르지 않았으면 좋겠어."

  반신거울에 카나데가 내 뒷 머리카락에 키스하는 모습이 덧그려진다. 두 눈을 감고 있어 자신의 머리카락과 내 머리카락이 서로 엉켜가는 것도 모르는 것 같다. 부드러운 빛이 그 위로 떨어져, 서로의 그림자가 뒤섞여버렸다. 카나데는 내 머리카락에서 자신의 입술을 떼고 내 목더미에 가볍게 여러 번 키스를 했다. 여태껏 민감한 부분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는데, 그 가벼운 키스에 새로운 감각을 깨닫는다. 그녀의 입술엔 매혹적인 전류가 배어 있는 것 같아서, 닿은 부분은 따뜻하게 저려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카나데는 의자에서 일어나 내 목에 몸을 숙여 키스하고 있다. 따뜻한 입술을 뗄 떼마다, 서늘한 감각이 목에 퍼진다. 위스키 향이 그녀의 체취에 섞여 있어서, 나도 모르게 귓가가 저리고 민감해진다. 

  고개를 살짝 돌린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행동을 유도한다.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입술이 너무나도 간지러워서, 나 스스로는 마음대로 돌아버리는 고개를 조절할 수 가 없어. 나를 도와줘, 카나데. 눈가에 힘이 들어가는 게 어려워지고, 중력을 거스르던 머리카락이 고개를 돌릴 때 생긴 원심력에 이마에 닿는다. 미약하게 그 느낌을 느낄 수 있다. 카나데의 머리카락이 내 시선의 가장자리에 서서히 들어온다. 황옥빛 눈이 내 눈과 마주쳤다. 끝이 아름답게 부수어져 있는 저 눈. 깨진 틈새에 새겨진 빛이 가득한 저 눈. 아름다운, 토파즈. 분명히 네 눈은, 다치면 깨져서 파편이 흐를 거야. 밤보다 더 어둡고, 침묵보다 더 무거운 장막이 시야를 가리고, 입술의 간지러움이 완전히 해소된다. 카나데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동자의 파편을 핥는다. 그녀가 내 눈동자 근처에 키스한다. 나도 똑같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나 봐. 각자의 점막이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소리가 귓가에 희미하게 들렸다. 이게 네 거짓말이 아니라면 좋겠어. 사실대로 말해줘.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숨기지만은 말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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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피나렐로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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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바르고 고운 말을 사용 합시다.
  • 타노스레이지 (@jwc8***)

    후미카가 얀데레인가.
    1January 12, 2017 (목) 01:22_56
  • 아키하나 (@akih***)

    후미카..... 우즈키..... 너무 얽힌게 많아서 머리아프네요.... ㅍㅅㅍ
    2January 12, 2017 (목) 06:14_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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