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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야장천(酒夜長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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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1-11, 2017 02:51에 작성됨.

삐리리리, 삐리리리.

산 지 너무나 오래되어 한 달에 한 번씩 기종을 바꾸라는, 지겹고도 씁쓸한 전화가 걸려오는 내 휴대전화에서 특별한 벨소리가 들려온다.

또 그 사람인가, 중소 프로덕션의 프로듀서인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얼굴 근육이 풀어지는 것을 막지는 못하는 채로 시계를 재빠르게 쳐다본다.

자정이 되기 3분 전이라는 시간과, 지금 돌아가면 그래도 여섯 시간은 잘 수 있을 텐데, 라는 자신의 내면의 울림을 무릅쓰고 전화를 받는다.

휴대전화 너머에서는, 오늘은 음주하시지 마시고 댁으로 돌아가시라고 말씀드린 이 프로덕션 최강의 마이페이스 아이돌의 약간은 취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 여보세요, 프-로듀서 씨?"

 

무슨 일이죠, 나는 항상 그랬듯 딱딱함을 가장한 두근거림이 담긴 말투로 그녀의 질문에 대답한다.

마치 한 번만 돌리면 모양이 딱 맞아 떨어지는 큐브를 맞추는 것같이, 예상했던 질문이 휴대전화 너머로 들려온다.

 

"무슨-일이죠가 아니에-요! 아직까지 일하고 계시나요?"

 

새삼스레.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휴대전화 너머로 들릴 수 있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고 책상을 바라본다.

아직 처리해야 할 서류와, 그녀의 잡지 촬영에 대한 컨셉 기획안들같은 짐 아닌 짐이 잔뜩 쌓아 올려져 있는 내 책상.

나는 잠시 그것들의 산을 쳐다보다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조금은 화난 듯한 목소리에 다시 전화기에 신경을 집중시킨다.

 

"저-기요? 제 말 듣고 계신-가요?"

 

듣고 있습니다, 나는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내 왼손에 들려져 있던 서류를 책상 위의 서류더미 위에 살포시 올려놓고 퇴근할 준비를 한다.

막차는 이미 끊겼으니 카에데 씨와 몇 시간이고 있을 수 있겠군, 이라고 생각하고는 내일 처리할 서류 외에는 텅 빈 사무실의 문을 잠글 즈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프-로듀서 씨,  아직 퇴근 안 하셨다면 저랑 같이 한 잔 하시지 않을래요?"

 

곧 가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찰칵하고 돌아가는 사무실의 잠금 장치에서 키를 빼내어 주머니 속에 집어넣는다.

열쇠가 돌아가는 각이 좋군**, 나는 카에데 씨를 만나기 전이라면 하지 않았을 말장난을 하며 얼굴에 옅게 미소를 띄운다.

아직 끊어지지 않은 휴대전화에서는 카에데 씨가 내 말장난을 듣고 후훗, 하고 웃는 소리가 났다.

들렸습니까, 라고 물어보자 카에데 씨는 장난기 섞인 말투로 전파에 그녀 특유의 말장난을 실어보낸다.

 

"그럼요, 열쇠로 잠긴 자물쇠***가 빠져버릴 정도로 재미없었어요."

 

그렇습니까, 나는 조금은 낙담했다는 듯이 낮은 어투로 말한다.

내 말에 카에데 씨는 그녀답게 후훗,하고 웃는다.

꽤나 어렵군, 말장난이란 것은.

 

"그래서, 언제 도착하실 건가요?"

 

술은 다 깼는지, 아니면 애초부터 술에 취한 척하고 있었던 것인지 모를 정도의 또렷한 말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다.

나는 빙긋 미소를 짓고는 카에데 씨와 내가 몸담고 있는 프로덕션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우리만의 아지트의 문을 연다.

카운터 근처의 테이블에서 버진 콜라다를 마시고 있던 카에데 씨가 내 모습을 보고는 후훗, 하고 미소를 짓고는 전화를 끊는다.

그녀의 얼굴은 아직까지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는 듯이, 그녀가 들고 있는 버진 콜라다처럼 새하얀 빛깔을 품고 있었다.

잠시 다른 테이블의 주문을 받고 있던 바텐더는 내 모습을 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 잔의 칵테일을 내놓는다.

 

"여기, 미리 주문하신 키스 오브 파이어(Kiss of Fire)입니다."

 

고마워요, 나는 이미 몇 번이나 마주쳐 너무나도 얼굴을 잘 알고 있는 바텐더에게 소소한 감사를 하고 나서 칵테일 한 잔을 입에 머금고 일로 지친 내 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들게한다.

첫 키스처럼 달콤하면서도 새콤한 맛이 내 몸 전체에 퍼진다. 

카에데 씨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꽤나 멋지다는 듯이 미소를 짓고는 입을 연다.

 

"오늘은 얼마나 버티시나 한 번 볼까요?"

 

죄송하지만 오늘도 술은 그다지 마시지 않을겁니다, 나는 그렇게 선언하고는 다시 내 칵테일을 한 입 털어넣는다.

카에데 씨는 내 말에 조금 불만이라는 듯이 볼을 작게 부풀린다.

비슷한 연배인데도 그러고 있으니 아름답다는 생각보다는 귀엽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내 표정을 본 카에데 씨가 더욱 불만이라는 듯이 볼을 더 부풀린다.

미안해요, 하지만 귀여운 걸 어떡해요? 나는 그렇게 솔직하게 감상을 말한다.

 

"정말인가요?"

 

그럼요, 나는 카에데 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칵테일 한 잔을 들이킨다.

처음 입에 댈 때보다 조금 더 달달한 맛이 느껴지는 것 같다.

카에데 씨는 내 말에 화가 풀렸다는 듯이 미소를 짓다가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입을 연다.

 

"오늘도 재우지 않을 거예요?"

 

내일 점심 즈음에 촬영이 있으신데, 이렇게 드셔도 괜찮나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카에데 씨가 마시고 있는 버진 콜라다를 쳐다본다.

새하얀 음료는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고 있어, 나는 미소를 지으며 바텐더에게 오늘 먹을 만치의 양에 해당하는 돈을 미리 내놓는다.

내 월급의 반 정도는 이걸로 다 나가지만, 뭐 상관 없는 일이다.

그녀와 있는 이 둘만의 시간은, 그 누구에게 어떤 지불을 하더라도 가질 수 없는 나의 행복한 시간이니까.

 

"오렌지 블러썸 주세요."

 

"알겠습니다."

 

역시 우리 프로덕션의 이름난 주당답게,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미리 선수를 쳐 주문을 해 버린다.

나는 장난기 많은, 우리 프로덕션의 자랑인 타카가키 카에데 싸를 보며 싱긋 미소를 짓고는 바텐더가 만들기 시작한 오렌지 블러썸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카에데 씨의 향기와 그녀가 새로 주문한 오렌지 블러썸의 달콤한 향기가 섞여 나를 싸고 돈다.

 

 

*제목 주야장천(酒夜長川)

원래의 고사는 주야장천(晝夜長川) 즉,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흐르는 물과 같이 늘 연달아 일어남이지만

조금 주제와 시제에 맞게 어레인지(술 마시는 밤이 연달아 일어남)해 보았습니다

 

** 열쇠는 일본어로 카기(かぎ), 그 뒤에 따르는 '각이'와 이어지는 말장난

***위와 같이 열쇠는 일본어로 카기(かぎ), 자물쇠도 일본어로 카기(かぎ)

 

 

 

후기

 

아, 카에데 씨 창작글 하려니까 어렵네요(....)

왜 내가 처음부터 이걸 떠올렸을까 과거의 저를 붙잡고 때리고 싶은 심정.

카에데 씨와 연인 미만 썸 이상의 관계인 P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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